<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2023년 2월 1일*<이달의 성구감상-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이달의 기도-불안과 걱정, 우울증에 대한 기도>*<의문이 생기십니까?-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절한 것인가? (레위기 19:18-28)*<이달의 기도-새해를 맞으며 드리는 기도-노만 빈센트 필>*<의문이 생기십니까?-예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달의 성구 감상(시편 23편)>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은 성경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구절들 중 하나이다. 보편적인 호소력과 특이한 시구들의 조합으로 유대인들이나 크리스천들의 예배의식에서 흔히 인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이 구절들을 알고 있으며 암송하기도 한다. 성경의 앞에 나오는 여섯 절은 그것이 묘사하는 평온한 풍경때문에 더욱 인기가 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이전에 한때 목자였던 다윗은 이 시에서 주님을 그의 양떼들을 평화로운 초장으로 인도하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고 여러가지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선한 목자로 비유하고 있다. 그 결과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빡빡하게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에 스트레스와 불안을 주며 평화를 도적질해 가는 많은 문제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는 문제들을 살펴보면

*상호관계
*결혼이나 이혼 문제
*자녀 양육문제
*병이나 부상 문제
*일자리나 직장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를 많이 쓴다. 그럼에도 우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의기소침해지고 희망을 상실하게 된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병에 걸리고 심지어는 죽기까지도 한다. 심장마비, 고혈압, 스트록, 두통, 불면증 등이 스트레스와 직접 연관해서 일어날 수 있으며 그외에도 천식, 당료, 비만,목이나 어깨통증 등이 올수도 있다. 때로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약이나, 알코홀에 의존하려고 하지만 도리어 건강을 악화시키거나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원하는 삶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적인 문제들이나 혼란에서 벗어나서 보다 낳은 행복한 곳으로 가고싶어 한다. 그렇지만 그런 현실에서 도망간다는 것은 최선의 방식도 아니고 가능하지도 않고 해결책도 아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보면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향하는 것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없다. 시편 23편의 여섯 구절들은 목자들이 그의 양떼들을 돌보아 주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양떼들은 그들의 생활이나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을 돌보아 주리라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도 그의 양인 우리에게 똑같이 하실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해를 당하거나, 어떤 고통을 견디어 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해 주시고 좋은 삶을 경험하게 하리라고 신뢰할 수 있다.

시편 23편의 강력한 말씀들은 하나님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확신속에서 편히 쉴 수 있는 평화로운 배경을 공급하여 준다.

이제 시편 23편을 한 구절씩 명상해 보자

(다음호에 계속)

<이달의 기도>

불안과 걱정, 우울증에 대한 기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나에게는 두려움이 없나니
누구가 나에게 손을 대리오!<시편 118년 7-8>

주여, 제가 처한 상황에서
가능성들을 생각해 볼 때 저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가능성들에 대해 적게 생각하도록 도와주시고
당신의 능력의 말씀을 더욱 생각하게 하옵소서, 아 멘

마음이 한결같이 당신께 몸을 맡기는 그들,
당신께서는 번영과 평화로
그들을 지켜주시옵니다. (이사야 26:3)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는 두려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자신감을 가져보려 애를 써 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평화로 저를 만져주셔서
저의 혼란한 마음이 당신이 저와 함께 하심을
알게 도와주시고
당신과 함께라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항상 깨닫게 하옵소서.

<의문이 생기십니까?>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적절한 것인가? (레위기 19:18-28)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들 가운데는 오늘날 지키기가 아주 쉬운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못 한 것들도 있다. 시공을 초월하는 율법(18절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 과 시시콜콜 문화적 한계를 가진 계명을? 혼동해 버리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종류가 다른 실을 섞어 만든 옷은 입지 말라(레위기 19:19)는 계명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동성연애 금지계명은 (레위기 20:13) 아직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이러한 달렘마에 대하여 사람들은 몇 가지 방법으로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율법들은 예수께서 오심으로 교체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그러한 율법들을 유지하려고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오직 신약성서에서 언급된 것들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율법에 관해서 말씀하신 것에 비추어 이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이 모두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지리라고 하셨다.(마태 5:17-20) 그러나 예수께서는 종교교사들의 법율적인 견해보다는 율법의 참된 정신을 따르려고 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율법을 범하였다(누가 6: 2)는 비난을 받았다.

가장 좋은 통찰력은 모든 율법안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부분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오래된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상황에 맞추어 쓴 어떤 구체적인 부분들은 우리들의 형편과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율법들의 배후에 있는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는 것이며 여전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가르치실 때 율법의 깊은 원리를 강조하였다. ?“너희는 이러한 말을 들었으나 나는 너에게 말하노니”(마태복음 5장)란 말로 가르치셨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부르심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세상과 일치하려는 압력에 저항하여야 한다.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분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표준을 우리의 문화 안에서 구체적인 우리의 삶으로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

*The Quest Study Bible 참조

새해를 맞으며 드리는 기도
노만 빈센트 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지난날 베풀어 주신 당신의 사랑과
돌보아 지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의 인생길에 당신께서 인도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미래에도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십시요.

바라옵기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내려 놓고
역동적인 생각과 기대로 가득 찬
새해를 맞이하도록 도와주옵소서.

주여, 저의 믿음이 더욱 두터워지게 하시고
위대한 의미있는 삶의 능력으로 채워주소서.

새해에는 좋은 일들로 채워지리라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더 나은 내일이 임하도록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의문이 생기십니까?>

예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당연히 예수의 이름을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의문에 대한 명쾌하면서 만족할만한 대답이란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성경은 예수께서 분명하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선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정의로운 분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잘못때문이 아니라 , 단지 시대적, 지리적 이유때문에 전혀 예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불리한 점을 고려하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닝의 본성과는 상치되는듯 하다.

또한 개신교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도 비록 예수의 이름을 들은자들 가운데도 구원을 받지 못할자들도 있다.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결과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우리들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충은 우리의 반응을 필요로 한다. 크리스천들은 온 세계가 그리스도를 알게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에 반응할 기회를 갖도록 할 책임이 있다(마태복음 28:19-20)

궁극적으로 구원 받느냐? 못받느냐? 하는 논쟁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공의롭게 심판하시리라는 믿음을 갖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The Quest Studdy Bible 참조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