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2022년 5월 15일*<이달의 기도-"좋은 부모가 되게 해 주세요>*<의문이 생기십니까?-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범하기 원하시는가?>* <이달의 기도-어머니 날의 기도-저자 미상>*<이달의 명상-어버이 날의 유래>*<의문이 생기십니까?-7. 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명하셨나?>

<이달(가정의 달)의 기도>

좋은 부모가 되게 해주세요.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행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갈라디아 6장 9절)

예수님,
저는 저의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필요한 지혜를얻기 위해 당신께 향합니다.
저에게 당신의 사랑과 평화로 채워주셔서 저의 영혼과 육신이 풍성하여
이 가장 중요한 저의 직무를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때대로 저는 부모라고 하는 중차대한 책임 앞에 압도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은총으로 저를 채워주시고
제가 이 책임을 나 혼자 감당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당신이 언제나 저의 협조자(동반 부모)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아멘

<의문이 생기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범하기 원하시는가?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이방인들의 잘못된 관행으로 과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그러한 잘못을 행하기를 원하셨는가?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분명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때로는 마지막 단계의 헌신을 요구하기도 하신다. 이 장의 처음에 보면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였다고 하였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결코 이삭을 속죄제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요점은 아브라함이 정말 하나님을 신뢰하는가?를 시험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성경에서 유아제물을 강력히 비난한 사실들(레위기 20:1-5, 열왕기 하 23:10, 예레미아 32:35)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기사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유아제물을 금하는 율법이 후에 나온것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가치관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하나님과는 상치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관심은 분명하였다. 하나님께서는그에게 약속한 아들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비록 고대인들에게도 지나친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가슴 아픈 의문을 제기한다. 아무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이 우리를 부르시는 분을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런 하나님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들의 이해심을 따를것인가?

우리 하나님은 인간제물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을 요구하실 뿐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구에도 기꺼이 드리는 순종하는 마음을 우리에게 원하신다.

<이달의 기도>

어머니 날의 기도

주님 ! 저희 어머니들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을 낳아주실만큼 용감하셨고
사랑으로 우리들을 키워주셨으며
하나님과 사랑 그리고 착함에 대해 가르쳐 주셨지요.
종종 고맙다는 소리도 듣지 못하면서도
조그마한 울음소리도 놓치지 않는 귀를 가지셨고
작은 것도 지나치지 않고 다 보셨던 눈
돌봐 주고 씻어 주고 안아 주셨던 손
종종 터질듯 했던 가슴에도
항상 용서하고 잊으셨으며
무언가 잘못될 때마다 격려해주려 하셨고
항상 기꺼이 들어 주시던 분
모든 일들이 잘 돌아가도록 그렇게 애쓰시고
그래서 이 세상이 훨씬 좋은 세상이 되도록 하신 어머니 들.
이 어머니 날에
그리고 매일 매일
아니 영원토록
우리들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저자 미상)

<이달의 명상>

<어버이 날의 유래>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부터 어머니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아버지와 어른, 노인들을 포함하여 어버이날로 개칭한 것은 1973년의 일이다.
어머니날의 유래는 서양에서 비롯된다. 영국과 미국 같은 기독교 국가에서 어머니 주일을 지키는 종교적 관습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1872년 보스톤 지역 교회를 중심으로 어머니날이 제안되었으나, 범국가적인 어머니날 제정 움직임은 필라델피아 출신 여성인 아나 자비스가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907년 모친의 2주기 추모식에서 흰 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어머니날을 제정할 것을 촉구했다. 마침내 1914년 미국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하면서부터 정식 기념일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날도 기독교 단체에서 시작하였다. 1930년 무렵부터 구세군 가정단에서 어머니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고, 1932년에는 감리교 연합회에서 5월 둘째 주일을 부모님 주일로 지킬 것을 결의하였다. 미국의 기독교 전통에서 시작된 어머니날이 유교적 전통을 가진 우리나라에 뿌리내리면서 우리 고유의 어머니날로 발전하게 되었다.

1973년부터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하는 어른, 노인들을 공경해야 하는 전통적 미덕을 기리는 기념일로 거듭나게 되었다. 어버이날이 제정된 초기에는 이날을 전후해 일주일 동안을 경로주간으로 정하여 양로원과 경로당을 방문하는 등 어른 공경에 관한 사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년부터 경로주간이 폐지되고 10월 2일을 노인의 날로, 10월을 경로의 달로 정해 별도로 시행하고 있다.

 

<의문이 생기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명하셨나?(창세기 17장 10절)

할례란 당시 가나안 사람들 사이에는 별로 시행되지 않았지만 고대세계에서는 사춘기나 결혼을 위한 통과의례로 일반적으로 행하든 의식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특별한 의식을 요구하시면서 이 의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할례란 소유의 표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표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헌신의 표시이기도한데 주님만이 아브라함이 신뢰하고 섬길분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할례가 일종의 서약의 표시로 “만약 내가 주님 앞에 성실하지 아니하면 내 생식기의 표피를 짤라내듯이 내 백성들에게서 짤리워버릴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는 할례로 상징되듯이 결혼계약과도 유사하게 표형되었다. 하나님이 남편과 아내들에게 서로 갖기를 원하시는 헌신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서 원하시는 그러한 헌신이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자신의 백성들의 남편이라고 특정지으면서 간음을 우상숭배나 자신에 대한 불성실로 은유하고 있다(호세아 2장16, 4장 15)

 

<오늘의 기도>

 

<의문이 생기십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그렇게 위대한가?(창세기 15장)

구약성경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람과 야훼가 환상가운데 만나 계약을 맺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계기를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그 이후로 성경은 아브람의 믿음이 모든 믿는자들의 모델이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옳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로마 4:3)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3장에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린다(9절)고 말하고 있으며 야고보 2장에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3절).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은 성경을 본 적도 없고, 교회에 나가본 적도 없으며 교리란 것을 가져 본 적도 없고 성례전을 행한 적도 없고 10계명에 관해 들어본 적도 없으며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실 때 단순히 그를 신뢰할만 하다고 믿고 담대히 믿고 나갔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릎쓰고 명예와 미래를 내려 놓고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그가 믿는분으로부터 오는 말씀에 아들 이삭의 목숨까지도 걸고 모험을 하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보다 더 잘 표현해 보여 줄 수 있을까요?(히브리 11장 참조)

지금 우리는 성경, 교회, 신조, 성례전 그리고 십계명 등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고 계신 것은 여전히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찾고 계신 것은 믿는 마음이요 무모한 포기이고 모든 것을 걸고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의문이 생기십니까?>

 

6. 왜 예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어떤 점에서 비유는 이해하기에 힘들지 않다. 예수께서는 농부나, 어부, 상인들 그리고 각종 다른 직종의 청중들에게 단순하면서도 실제적인 실례들을 사용하여 도덕적인 원리들을 훌륭하게 가르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비유의 깊은 의미들은 예수를 반대하는 자들이나 예수의 사명이나 멧세지에? 조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들(진리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들)은 더욱 깊이 파고 들어서 근본적인 영적 통찰력을 발견합니다. 그렇지않은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비유는 환상적이기는 하지만 알송달송한 수수께끼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멧세지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더 깊이 추구하려는 관심도 없고 열정도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야기 하실 때 종종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제자들에게 보다 자세한 설명을 하시기도 하였습니다(마가 4:33-34). 너무나 빨리 다가온 십자가를 앞에 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예수의 ‘사명’은 우연한 목격자들이나 제대로 알지못하고 열성을 부리는 자들이 그리고 노골적인 반대자들에게는 하늘나라의 비밀을 숨기는 것이 좋은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께서 보다 직설적이고 비유적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마태복음 5장-7장에 있는 산상보훈을 살펴보라. 직설적인 교훈들로 가득 하다.

<의문이 생기십니까?>

 

노아 홍수 기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창세기 7장

창세기 7장을 보면 노아홍수 기사가 나옵니다. 과연 지구 전체를 뒤덮었던 홍수일까요? 아니면 지역적인 대홍수였을까요?

창세기에 쓰여진 기사대로라면 전 세계를 다 뒤덮었던 홍수로 생각됩니다. 그 근거로는 1) 6장 17절에 하늘 아래 모든 생물들을 멸해버리겠다고 하였고 2) 7장 19-20에는 물이 높은 산들보다 20피트나 더 높이 고였다고 했으며 3)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마르기까지 371일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는 지역적인 홍수로 보기에는 너무나 오랜 기간이며 4)베드로 후서 3장 3-7에 보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을 노아의 홍수와 비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노아의 홍수가 그 지역에 국한했던 대홍수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 근거로는 1) 만약 노아의 홍수가 전 지구를 뒤덮을 정도의 규모였다면 왜 노아의 방주가 처음 띠워졌던 곳에서 불과 몇 마일 밖에 안되는 아라랏산에 정박하였느냐?(8장 4절) 2)왜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이 기사를 쓰면서 온 세상을 의미할 때 쓰는 world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땅이나 나라로 번역될 수 있는 eartth란 용어를 사용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아의 홍수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믿지만 다른 사람들은 세계의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을 흔히 쓰는 용어로 기술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요즈음 우리들이 강대국 몇몇 나라들이 참가했던 1차와 2차 대전을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참여했던듯이 세계대전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중요한 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홍수 기사는 홍수의 실상을 알려주려는 지질학 교과서가 아니라 그러한 참사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The Quest Study Bible 참조

 

<성경풀이-의문나는 점들>

 

4.팔복(八福)’은 과연 인간에게 가능한 기준인가?

마태복음 5장-7장에 있는 산상설교는 하늘나라 시민들을 위한 헌법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만 비록 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의 완벽한 수준에 도달한 사람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헌법의 서문을 ‘8복’으로 시작하는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늘이 저들의 것이요”라는 말로 우리의 불가능한 마음상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기쁨을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러한 삶의 스타일을 목표로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에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여 사랑으로 응답한 사람들은 이러한 목표에 더 잘 이르기 될것입니다. 팔복은 우리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선언의 모델입니다. 심지어 그렇게해서 완전하게 따르는데 실패했을 때에라도 억지로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팔복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에게 의도하셨던 삶의 본질 즉 축복된 삶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복되다는 말은 행복하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적인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에 가까이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The Quest Study Bible에서

 

<성경풀이-의문 나는 점들>

3.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었다는데?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닐까요.(창세기 2:18-22)

창세기 기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 혼자 사는게 좋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짐승들과 모든 창조물들은 처음부터 한쌍씩 만들었는데 인간 아담만은 홀로 만드시고 스스로 친밀하게 교제하며 정을 나눌 다른 짝이 필요함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내조자(helper)를 만들어 주셨읍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거나, 여자들은 단지 남자를 돕도록 만들어진 존재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의는 그런 뜻이 아닌듯 합니다. Helper라는 단어는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힘센자, 능력을 가진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여자란 남자에게 필적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여자를 삶의 동반자로서 남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동등하게 만드셨습니다.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를 떼어 만들었다고 할 때 그것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남자에 의지하여 살아야 하고, 남자는 여자에 의하여 자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나 수멜어에서 갈비뼈라는 말은 삶, 또는 생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삶 또는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The Quest Study Bible-New International Version 참조

<성경풀이-의문 나는 점들>

2. 성령이 우리를 시험받게 하시나?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태복음 4장 1절)

마태복음 4장 1절에 보면 예수께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시험받게 하시나?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악에 시험받게(temptation)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시험(test)하시는데 여기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Temptation과 test는 한국말로는 같이 번역되지만 tempting은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돤 행동을 하도록 유혹하는 것인데 반해 trial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무언가 옳은 일을 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실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격이 성장하도록 하기 위하여 어려운 환경들을 허용하시기는 합니다. 그러므로 종종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불이 우리 앞에 임하도록 내버려두셔서 우리들을 test해 보실 수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죄에 대해 시험받게 함으로 test의 현장으로 보내십니다. 그의 신적인 사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예수게서는 먼저 이 원수와의 대결을 극복하여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수많은 작은 전투들에서 이겨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앙이 test 받고록 허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를 도우셔서 작은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하게 함으로 보다 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준비를 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test 하십니다. 죄에 너머지게 하려고가 아니라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 고통과 악과 비극을 영원한 선으로 바꾸어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고난은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근본적인 신앙이 없다면 하나님이 보내시는 응답을 깨닫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The Quest Study Bible-New International Version 참조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