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이미지로 보는 기독교 역사/2023년 5월 1일>

이미지로 보는 기독교 역사(7)

Christian history in images

미국에서 발간되는 계간 잡지 CHRISTIAN HISTORY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하여 <40주년 기념 특보>를 발간하였는데 100여 페이지의 특대판에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과 그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그림들도 있지만 아주 생경한 그림들도 적지 않아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이달부터 갤러리에서 몇 편씩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 7 회

기원 325년 Nicaea 회의(18세기 루마니아의 아이콘). 콘스탄틴황제의 기독교 국교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니케아 회의를 소집, 논쟁이 분분하였던 기독론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정통 교리를 채택한 것이다. 기원 318년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는 예수는 신의 능력을 가졌지만 신은 아니고 영원한 분도 아니며 하나님 아버지의 특별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교회안에 논란이 발생하고 교회가 분열될 조짐이 보이자 황제는 교회회의를 소집, 통합을 시도하였다.니케아 회의 결과 아리우스 파는 정통파 대표들 앞에 엎드려졌다.

기원 330년 경 Mirian lll 왕과 Nana of Iberia 왕비가 기독교로 개종한 후 원래 안드레에 의해 시작되었던 죠오지아 정통교회가 설립되었으며 한편으로는 필경사들을 동원 당시 남아있던 오래된 성경들을 필사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시내산 근처의 성 Andrene 수도원에 소장되어 있다가 1700년 경에 발견된 Codex Siinaiticus 사본이 있다. 윗 오른쪽 사진은 미리아 3세 왕과 이베리아 왕비, 가운데는 Codex Sinaiticus 필사본, 오른쪽은 이 사본이 발견된 St. Catherene 수도원이다.

기원 370년 경에 Goth 족에게 선교사로 갔던 Ulfilas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진 Gothic Bible로 5세기 경에 필사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Anthoy 와 초기의 사막의 교부들에 의해서 초기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들은 안일한 생활을 버리고 광야에서 영혼의 빈곤함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였다

시내산 근처에 있던 성 Catherene 수도원으로 1700년대에 재발견되었다. 이곳에서 Codex Sinaiticus 가 발견되었는데 신구약과 희랍어로 쓰여진 외경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니케아 회의의 결과를 기록한 5세기의 파피루스로 조각으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영원한 분이시요이요 ,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만들어진 분이 아니다"라는 니케아 회의의 결의가 새겨져 있다.

기원 380년에 Theodoseus I세는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제정하고 다음 해 Constantinople회의를 소집(위의 그림은 18세기에 루미니아에서 제작된 그림) 니케아 신조를 확인하였으나 정치적 이유로 시민들을 학살함으로앰브로스 감독으로부터 파면을 당하고 사죄하였다.

 

제 6 회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요 신약성서 형성에 큰 기여를 한 성서학자인 Origenes(기원 185-254년) 의 성경사본 표지

초기 기독교에서는 3세기 경부터 에짚트의 사막을 중심으로 ' 사막의 교부'들이라고 불리는 성직자들이 세상적인 안일함을 버리고 광야에서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가난을 체험하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300년 경부터 로마의 변방지역에는 "Dura"라고 부르는 경비대가 있었고 경비대를 중심으로 교역의 중심지인 동네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의 기독교 예배처소 인근벽에서 발견된 벽화로 복음서에 나오는 전신이 마비되어 친구들이 메어다 논 환자가 고침을 받고 잠자리를 메고 가는 장면이 새겨져 이이

1920년대에 기원 256년에 파괴되어버린 "Dura"에서 발견된 벽화로 예수와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성화이다.

 

기원 311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Peter는 디오크레티안 황제의기독교 박해로 순교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다음해 312년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제국을 정복하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함으로 종막을 고하고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전의 길을 걷게된다.

밀비안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제국을 장악하고 박해받던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였다.

제 5 회

기원전 3세기경 유럽과 타 지역(주로 동부지역의 시리아나 페르시아 등)의 국경지대에는 강력한 로마군의 전방 경비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수비대들은 동서무역의 거점으로서 페르시아 여행의 기착지로서의 역할을 하게되었다. 오늘날 시리아의의 유브라데스 강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양쪽의 문화가 교류하는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기원 3세기 경에는 그곳에 희랍의 신전이나 신비 종파들, 유대교 회당, 그리고 잘 보존된 초대 기독교의 가정교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마에서 주기적으로 종교핍박이 심해질 때에도 이곳의 교회들은 건재하면서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여유있는 교인들은 자택에 예배처를 만들어 놓고 다른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으며 아래 모형과 같이 예배처소를 만들어 놓고 예배 드리기도 했다.

Dura Europos 로 알려진 로마수비대의 유적지 모습

두라 유라포스에서 발굴된 초기기독교회의 모형도

초대교회의 세례당의 모습. 전신이 들어갈만큼 크게 만들어 졌다.

계몽자 그레고리오는 아르메니아 교회의 첫 수장이며 성인이다. 301년 이교도 국가였던 아르메니아를 기독교 국가로 개종시켰다. 그리하여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으며, 그레고리오는 사후 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아라랏산 봉오리를 배경으로 언덕에는 7세기에 세워진 Nerses Chaple이 알메니아의 그레고리 계몽자를 기념하여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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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는 284년부터 305년까지 로마 황제였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다. 제국의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했다.

기원 311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피터가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성당. 천 여년 전에 건축되었으나 현재도 보존되어 있으며 이 건물을 기본으로 현재의 베드로 대 성당이 건립되었다.


제 4 회

기독교 초기(기원 원년에서 AD 500년 사이) 기독교와 연관된 그림들 가운데는 제자들이나 그들의 순교같은 장엄한 모습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조롱하는 회화들도 적지 않다.

그중의 하나로 Graffito를 꼽을 수 있다.

기원 200년 경 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이 벽화는 당나귀 얼굴의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 그림인데 로마제국의 공식 검투사 훈련장인 패다고기움의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일반검투사들이 노예로 강제로 끌려와 검투사 훈련을 받는 크리스천 검투사들을 조롱하는 그림으로 추측되고 있다.

카타콤에서 꽃피운 기독교 미술

초기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많이 받았다. 특히 큰 도시의 크리스천들은 박해의 눈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들어가 예배도 드리고 교제도 나누며 여러가지 활동을 하였다. 소위 말하는 카타콤에서의 활동을 통해 타카콤 미술이 기독교 미술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성 마틸과 이레니우스

기독교 초기에는 노예들이나 일반서민들만이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다. 당대의 성자들이나 신학자들도 그들의 신앙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였다. 순교자 저스틴 마틸(왼족 사진)은 로마의 황제나 배심원들, 그리스나 유대의 철학자들을 상대로 담대하게 토론하였으며 이레니우스는 정통교리가 무엇임을 당당히 전파하였다.


제 3 회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퍼져나가는 가운데 예수께서 생전에 복음을 가르치셨던 유대의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의 전파에 큰 영향을 끼치는 대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에서는 처음으로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나자 Titus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이 즉각 출동하여 예루살렘을 점령, 약탈하였으며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것은 반란의 완전한 종식을 의미하는 동시에 성전을 중심으로한 유대 예배공동체의 종식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후 2000여년 동안 계속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생활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된지 11년만에 Domitian 황제가 이 지역 반란세력을 완전 정복한 것을 기념하여 티투스개선문(arch of Titus)을 설립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건재한 이 개선문의 안쪽 벽에는 이스라엘 정복후 당당하게 귀향하는 군인들의 행진하는 모습과 성전에서 시용되던 성물(聖物)들을 끄집어 내어 신성모독하는 로마군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수백년동안 성전에 안치되어 사용되던 성물들이 이렇게 팽개쳐진다는 것은 1세기 유대인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들을 이교도 신전에 안치한다는 것은 유대교의 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루살렘성전의 붕괴로 예수의 고향땅에서 안주하던 초기 예루살렘 기독교가 온 유다와 땅끝까지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제 2 회

그중 대표적인 것이 자신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바로 매달릴 가치가 없다면서 십자가에 꺼꾸로 매달려 순교하였다는 베드로 사도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전해오는 것이 <꺼꾸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베드로>입니다.

종교화에 사실주의를 시험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1426년 Masaccio의 그림으로 아래의 중세기 순교자들의 그림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베드로의 후광은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모습이 아니라 머리의 한 부분과 같이 몸의 한 부분인 실체적인 모습으로 베드로의 성자됨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12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벽화로 그려진 이 성화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보았기 때문에 사도로 불리우는 사도 바울의 순교장면으로 로마황제의 명에 의해 참수형을 받기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중세기 사본(A medieval manuscript)으로 알려진 이 작품은 12 제자들의 순교장면을 모은것으로 기원 879-883년 사이에 비잔틴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제 1 회

로마의 카타콤바는 고대 카타콤으로, 로마 안팎의 지하 매장지로, 적어도 40개가 있으며 일부는 최근 수십 년 동안에만 재발견되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매장으로 유명하지만, 기독교 이전에도 유대인과 다양한 이교 로마 종교 지지자들 역시 카타콤에 묻혔습니다. 박해를 피해 카타콤브에서 모였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앙을 알리기 위해 지하 카타콤브의 벽이나 천정에 그림을 그렸는데 3세기 경에 그려진 이 벽화는 한 가운데에 선한목자이신 예수상을 부각하였습니다.

예수의 열 두 사도였던 도마는 복음전파의 선봉장으로 기원 52년에 이미 예수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 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20여년 후 그가 순교당했지만 다른 문화권임에도 4세기 경에 특이한 인도인 모습의 히브리 성자 상을 조각한 비석을 만들어 그의 묘역을 장식하였습니다. 도마의 원 묘지는 Chennai, India.에 유해의 다른 일부가 묻힌 또 다른 묘지는 Ortena, Italy에 있으며 위의 묘비는 이태리의 올테나에 있다.

 

4 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쓰여진 책이 마가가 쓴 마가복음입니다. 그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만 15세기에 에치오피아 사람이 그린 이 그림에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어 복음을 전파하던 마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초대교회들은 예수와의 역사적인 관계가운데서 융통성있게 사명을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