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Gallery/서양미술사 산책/2019년 11월 1일>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22)>

미래파 (Futurism)

미래주의는 이태리 시인 톰소 마리네티(18776-1944)가 1909년 문학운동으로 시작, 이태리에서 형성된 현대미술운동으로1909년에서 1914년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시들해 졌으며 1차 대전 후에 다시 시작되었는데 이때의 미래파들을 2세대 미래파라고 부른다.

마리네티는 1909년 피가로 신문에 발표한 미래주의 선언에서 “우리는 세계의 장엄함이 새로운 美, 즉 ‘스피드의 미’에 의해 더욱 풍성해졌다”고 선언하고 기계와 현대기술과 스피드와 폭력 등을 고무하고 축하하였다.

미래주의의 목표는 과거와 단절하여, 이태리의 전통적인 예술을 파괴하고 기술과 기계, 힘과 에너지를 포용하는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이 역사의 멍예라고 인식한 것에서 전적으로 탈피하기를 원해서 이들은 그들의 나라를 과거로부터 해방하기 위하여 예술관이나 뮤지움들을 파괴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들은 1911년 밀란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가졌고 그 후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들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주제들을 선택했고
종종 다양한 사진의 노출을 통해 움직임과 속도를 투사하였다. 사회를 이끌어 나가고 고전적인 제한을 깨어 버리려는 목적에서 미래주의자들은 화가와, 조각가, 음악가와 작가들 건축가들, 디자이너들 다양한 인물들로 포섭하였다. ?입체파와 교류하면서 미래파 예술은 각진 형상등을 포함해 몇몇 요소들을 공유하였으나 입체파는 일반적으로 정적이고 은은한데 비해 미래주의는 밝고 역동적이다.

미래파들은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을 쓸어버리고 거기에 기계시대의 활기찬 역동성으로 대치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특이하고 역동적인 미래에 대한 비젼을 만드는데 초점을 맞추고 기차나,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새로운 기계들로 채워진 도시풍경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들은 스피드, 폭력을 고무하고 노동자 계층들이 변화를 촉진시키는 계층이라하여 높이 평가하였으며 그들의 작업은 건축, 조각, 문학, 연극, 음악 그리고 음식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형태를 다루었다. 이들은 흐려짐이나, 반복, 역선등을 도입해 스피드와 움직임을 표현하는 새로운 기술들을 발전시켰다.

대표작으로는

*움베르 보초니(Umberto Boccioni,1882-1916)의 <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 공간에서의 독특한 형태의 연속성, 1913)은 이탈리아의 조각가인 보초니가 1913년에 제작한 미래파 청동 조각 작품이다. 높이는 111.44cm이며 미국 뉴욕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람의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유연함을 형상화한 것이 특징이다.

 

 

*카르로 칼라 (Carlo Carra 1881-1966)는 이태리의 화가로 미래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예술에 관한 책들도 집필하였다.
<The Funeral of Italian anarchist Angelo Galli, 이태리 무정부주의자 안젤로 개리의 장례식>은 1904년 슽라이크에서 경찰과 충돌하다 죽은 안젤로 개리의 장례식을 둘러 싸고 벌어졌던 대치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카르르 칼라는 현장에 참석, 현장의 긴장과 혼란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루이지 루솔로(Luigi Carlo Filippo Russolo,1885-1947)는 이탈리아의 미래파 화가이자 작곡가이며 실험적인 악기 제작자로 The Art of Noises 선언문을 쓸 정도로 다양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Dynamism of a Car , 자동차의 역동성> 은 1913년도 작품으로 Musee National d'Art Moderne.에 소장되어 있다. 입체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자동차의 스피드와 기계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미래주의의 선언’을 을 그대로 들어낸 전형적인 미래주의 작품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21)>

입체파(Cubism)미술

20세기에 들어와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현대미술운동을 꼽는다면 피카소(Picasso, 1881-19773)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 에 의해 만들어진 입체파 미술일 것이다.

미술에 새로운 차원을 만들면서 입체파 화가들은 르네상스 이래 공간을 그리는데 사용하던 원근법을 버리고 현실적 모델이 되는 인물도 거부하였다.

그대신 그들은 기하학적인 분석과 다양한 시점을 적용해 대상을 그렸다.

세잔느의 영향을 받은 피카소와 브라크는 처음에는 작업을 같이 하였는데 그들은 의도적으로 어떤 고정된 시점에서 공간이란 환상을 만들어 내는 유럽의 미술전통을 내버렸다. 그것은 피카소의 1907년도 작품 <Les Demoiselles d’Avignon>에서 시작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세잔느의 영향과 함께 아프리카의 마스크와 이베리안 조각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 입체파 그림들을 Analytic Cubism(분석적 큐비즘)이라고 부르는데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두 번째 양상의 입체파는 Synthetic Cubism(종합적 큐비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들은 신문지나, 커라쥬성분, 밝은 색깔 등을 사용하였고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외에도 몇몇 화가들이 이들의 아이디어에 개인적인 해석을 추가하여 입체적인 시도를 하였다.

아비뇽의 처녀들》(Les Demoiselles d'Avignon)은 피카소가 1907년에 제작한 그림. Oil on canvas. 크기 233.7 x 243.9 cm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06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미완성의 대작인 이 작품은 작가 피카소의 중요한 전기를 보여주는 작품일 뿐만 아니라 20세기 회화로서도 기념비적 가치의 전환을 의미하는 의미 깊은 작품이다. 아비뇽이란 바르셀로나의 서민가에 있는 창녀가 출몰하는 뒷거리의 명칭이며 화면에 그린 것은 이 뒷거리에 있는 창부들이다. 미술사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 마르디르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게르니카〉(Guernica)는 크기는 349.3 X 776.6 cm 이고 Oil on canvas 로 1937년 작품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1937년 4월 26일 나치군이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파불로 피카소가 그린가 그린 그림이다. 폭격의 공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이 프랑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독재 체제에 대해 엘리트로서 느꼈던 비애와 함께 잘 나타나 있다.

조르쥬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의 <라로슈구이온의 성,Castle of Roche-Guyon> 1909년 작품. Oil on Canvas. 크기는 92x73 cm. Russia의 모스코에 있는 Pushkin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조르쥬 브라크(1882-1963)는 20세기 초 현대미술 발전에 중심적인 인물이다. 그는 야수주의 운동에 기여하였고 피카소와 함께 입체파를 만들었다.?
프랑스 세느강변에 위치한 <라로슈구이온의 성>은 원조 입체파의 대표작으로 브라크는 분석적 입체주의로 한 발 더 나아가 특히 건축에 입체주의를 적용하였다. 건물을 네모 형태로 만들고 그림자를 이용해서 건물을 3차원적인 평면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를 위해 다른 각도에서 기하학적인 평면을 그리도록 하였다.? ?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20)>

20.야수파(Fauvism)

야수파 또는 포비즘은 20세기 초반의 모더니즘 예술에서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이다. 20세기 미술은 반자연주의를 기조로 하는 혁신적 유파와 사조가 어지럽게 뒤바뀌게 되지만 그 발단이 되는 것은 야수파의 운동이다.
이들은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했다.

야수파의 흐름 자체는 1900년경에 시작되어 1910년 이후까지 지속되기는 했으나, 실제 야수파 운동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세 차례의 전시회를 갖는 데 그쳤으며 결속력도 약했다. 이 운동의 기수로는 앙리 마티스와 앙드레 드랭을 들 수 있다.

* 앙드레 드랭(Andre Derain)의 <Boats at Collioure>1905. Oil on canvas, 38.4x46 cm, Private collection.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와 함께 프랑스 화가, 조각가이자 Fauvism의 공동 설립자

기법상의 특징은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이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게 거침없이 표현했다. 이지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감정을 중시하는데 표현주의의 한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몇 몇 후기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영감을 받은 일단의 화가들이 생생한 색깔과 자유로운 붓놀림을 사용하여 야수(“wild beast”)라고 불려졌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1875-1947), 그리고 조르주 루오(Georges Rouault,1871-1958) 같은 야수파의 몇 몇 화가들은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1826-1998)의 제자들이었지만 대부분은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의 확실한 탐사,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표현력있는 브러시 터치 그리고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의 순수하고 병치된 색깔 등에서 영감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마티스를 야수파의 리더로 보고 있으며 다른 화가들은 빛과 공간을 묘사하는데, 그리고 격앙된 감정을 전달하는데 강열한 색깔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를 따르고 있다.

위대한 화가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표현이라는 모로의 가르침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마티시는 슈라트의 점묘법에서 특별히 영감을 받았다. 생생한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전의 미술가들의 목표를 버린 야수파들은 자연의 세계를 직접 카피하지 않고 적극적인 분위기를 기획하고 구조감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색깔을 사용하였다. 그들의 단순화한 형태와 강열한 색깔들은 페인트 칠한 평범한 표면에 관심을 갖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감정적인 반응과 직관을 학문적인 이론이나 고양된 주제들 보다 더 중요하게 이해하였다

*앙리 마티스(Henry Matisse)의 <춤> 1910, 260x391 cm,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명처럼, 마티스는 색면을 배치하고 사용하는데 뛰어났다. 야수파는 감정에 따라 색을 자의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몇년 후에 나올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진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9)>

19.표현주의(Expressionism)


표현주의는 미술의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버리려 했던 20세기 미술 운동 중 하나로 자연주의 경향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 표현주의 운동은 국제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났지만 독일의 여러 도시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보다 소규모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그것들은 현대사회의 불안을 보여주었다. 20세기 초반에 영적인 것에 대한 상실감이 증대되면서 인간의 행위와 현대세계에 대한 (불안한)감정이 조성되었다.

?부분적으로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자들은 형식(형태)를 왜곡(찌그러트리다)하고 현대사회에서 서서히 발전되어 온 방법들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전달하기 위해서 강력한 색깔들을 사용하였다.? 1905년 4명의 독일 화가 그릎이 드레스덴에서 ‘다리(Die Bruke)’라고 하는 그릎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표현주의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었다. 이들 예술가들은 그들의 과격한 사회관을 인물이나, 도시 광경 그리고 풍경화 등을 통해 표현하였다. 한편으로 몇 년 후인 1911년에 다른 예술가 그릎이 The blue Rider라고 하는 그릎을 뮤니히에서 만들었는데 이들은 색깔을 통해서 예술에 영적인 가치를 주입하려고 시도하였다. 1920년대에 는 새로운 객관주의(the Neue Sachlichkeit)라는 파가 생겨났는데 그들은 전후 독일에서의 부패와 비도덕성을 그림으로 나타낸 예술형태였다. 이들은 표현주의가 주관적인데 초점을 맞춘데 반해서 객관적인 현실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표현주의는 1905년에서 1930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퍼져나갔다.

그들의 문명에 대한 비판 특히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인식 가운데서 이들 예술가들은 처음으로 외부적인 세계를 묘사하기 보다는 때로는 과장되거나 불안한 붓놀림 그리고 아주 조화가 되지 않는 색깔 등으로 그들의 내적 감정을 표현했다. 세계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분위기는 그들에게 분노, 폭력, 그리고 좌절을 표출하게 하였으며 그들은 창녀나 마스크 등을 쓴 사람들로 불만이 쌓인 개인들을 표현했다.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 독일 국적의 스위스 화가.그의 유화 <Actor’s Mask>는 1924년 작품으로 36.7x33.8츠.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표현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클레는 입체파, 초현실주의, 표현주의 등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The Scream 1893.>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노르웨이의 국민작가이다. 처음에는 신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기법의 그림들을 그렸으며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른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의 유화, < Street with Red Streetwalker> 125x90.5 cm, 1914-1925.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Thysson Bornemisza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표현주의"는 독일에서 시작했지만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들은 독일사람들이 아아닌 경우가 많은데 키른히너는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이다.

 

표현주의자들은 그들의 강력한 사상과 의견들을 관람자들에게 강요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개인의 상징주의를 그들의 사상에 전하려 하였다. 하모니와 조화는 이들이 추구했던 내적 감정을 표현하는데는 적절하지 않았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8)>

18.아르누보(Art Nouveau)

1890년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새로운 기계문명의 발전과 함께 주목할 만한 미술양식이 일어 났다. 이를 '새로운 예술(new art)'의 의미를 가진 '아르누보(Art Nouveau)'라 부르는데 순수 예술이라는 역사적 양식을 탈피하고 새로운 미를 창조하려 했던 범유럽적 운동이었다

아르느보 양식의 건축양식, 곡선과 유동적인 화려한 장식이 특징이다.

이 양식운동은 화가, 공예가, 건축가들이 순수 예술에 대항하여 새로운 조형미의 창조에 도전, 모든 조형분야에 걸쳐 곡선적이고 화려한 장식이 풍미하였으며 건축의 외관이나 일상생활용품에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에서 비롯된 장식을 이용,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하였다.

아르누보의 특징은 사치스런 재료의 사용과 섬세한 디테일, 장인 정신 그리고 아름다운 물결모양의 곡선무늬 등에 있었다. 식물과 같은 유기적 형태에서 영감을 얻어내는 아르누보는 역겨운 도시적 분위기가 제거된 머나먼 환상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곡선적인 화려한 양식을 풍미하여 건축의 외관이나 일상 생활용품에 자연물의 유기적 형태에서 비롯된 곡선적인 장식을 애용한것이 두드러진다. 동식물의 형태를 모티브한 유동적인 형식을 사용하였고, 종래에 그다지 채용되지 않았던 담쟁이 덩굴의 감아붙인 모습과 수선화, 단풍나무, 페릴컨, 백조, 학, 뱀 등의 장식 문양을 즐겨 이용하였다.

아르느보의 양식은 비대칭적이고 생동적이다 그러나 사치스럽고 환상적이며 지나치게 여성적으로 과장적인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비난을 받았다. 구조를 무시한 변화에 치우쳐 20세기와 함께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란 시대적 요청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아르누보는 벨기에에서 처음 생겨나 전 유럽으로 영향이 미쳤고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그 영향을 받아, 개화시켜 '기마르양식(Style Guimard)'으로도 불리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독일에서는 '유겐트 스틸(Jugend Stil)', 이태리에서는 '스틸 리버티(Stile Liberty:)',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에서는 '아르테 호벤(Arte Hoven)', 오스트리아에서는 '세세션(Secessin)', 영국과 미국에서는 '모던스타일(Modern Style)' 등으로 불려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Alfons Mucha의 Zodiac 아르누보 삽화  

아르누보는 채 20년도 안되는 시간동안 강력한 영향을 발산했지만 20년도 채 안되어 사그라들게 되었다. 그것은20세기에 기계산업 중심으로 사회의 질서가 재편되었고, 이러한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새로운 미술을 부르짖는 모더니즘이 미술계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르누보 역시 이전 시대에 비하면 새로운 미술이었지만,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어차피 낡았던 것이다.

보다 순수한 형태, 기하학적 형상을 선호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입장에서 보면 장식은 불필요한 것이요, 장식과 아름다움에 매달리는 아르누보는 퇴폐미술에 불과했다. 게다가 산업의 입장에서 보면 장식이 많은 아르누보 제품보다는 모더니즘에 근거한 '디자인'된 제품이 훨씬 더 생산이 편리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이 낙관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금욕적이며 자기 비판적인 분위기로 바뀐 점도 원인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회/이론적 당위성에 의해 아르누보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구시대 미술의 대표로 매도당하면서 15년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아르누보 장식가구와 장식품. 정교한 장인기술과 생동감이 넘친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7)>

신 인상주의(Neo-Impressionism)

신 인상주의는 19세기 말 프랑스의 회화사조의 하나로 1886년 평론가요화가였던 펠닉스 페네옹(Felix Feneon.1861-1944)이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 여기에 과학성과 이론을 뒷바침하려고 하였던 쇠라(Georges Seurat,1859-1891)나 시냑( Paul Signac,1863-1935)을 중심으로 그들을 따르던 화가들의 작풍을 신 인상주의 또는 신 인상파라고 규정한데서 처음 사용되었다.

후기 인상주의의 한 부분인 신 인상주의는 과학적인 색깔이론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들 예술가들은 전에 섞어보지 않은 순수한 색깔의 작은 물감이나 점들을 병행해 놓아서 그들의 그림에 추가되는 진동을 만든다.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색깔들이 관람자의 눈에서 섞여져서 그전에 섞어 놓은 색깔보다도 더 생생하고 선명하고 밝게 보이게 하려는데 있다.

그들이 사용한 특이한 기법을 분할주의(divisionism) 또는 묘화법(Pointillism)이라고도 부른다. 캔버스에 색칠을 할 때 순색(純色)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팔레트에서 뒤섞지 않고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의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동시에 인상주의의 사실주의에 반발하여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아래 색깔의 반향에 초점을 맞춘 화풍 또는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 인상주의는 과학적인 이론을 추구한 특색때문에 20세기 들어서 나타난 입체파나 미래파에 영향을 끼쳤다.

조르쥬 쇠라(George Seurat)

La Grande Jatte(라 그랑데 자태섬의 일요일 오후)

인상주의 화법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한 조르쥬 쇠라는 빛의 프리즘을 통해 새어나오는 작은 색점을 활용한 점묘화 기법으로 신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장르의 도래를 알렸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프랑스의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피에르 쇠라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Oil on Canvas에 6ft 10 in x10ft.1in (207x308 cm) 점묘법을 사용한 신인상주의 작품 1884년부터 1886년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현재 미국 시카고 미술원에 소장되어 있다.

Georoge Seurat의 써커스(The Circus)

1890-1891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oil on Canvas. 185x152 cm, 프랑스 파리의 오로세 미술관에 소장. 인상주의의 즉흥적인데서 떠나서 생생한 색깔을 계속 탐구하였다. 상호보완적인 색깔들을 병행배치하여 관람자의 눈에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는 신인상화법을 구사하였다.

Paul Signac( 시냐크) Portrait of Felix Feneon,

폴 시냐크은 프랑스 파리 출생의 화가이다. 처음에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하였다. 그 후 쇠라와 함께 신인상주의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하여 그림을 그려 유명하며, 단순하고 신선한 수채화도 많이 남겼다.

1890년에 제작된 시냐크의 작품으로 <펠릭스 훼농(Felix Feneon)의 초상화>이다. Oil on Canvas에 73.5cm x 92.5cm 이며 뉴욕시에 있는 Museum of Modern Art에 소장되어 있다. 점묘법을 사용한 전형적인 그림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6)>

후기 인상파(Post- Impressionism) 미술

인상주의 이후 인상파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관적이고 개성적인 그림으로 인상주의를 넘어서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노력하였던 일단의 화가 집단을 후기 인상파라고 부른다. 대상의 구조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새로운 색채중심의 접근법을 따랐지만 공통점 보다는 개성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따라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들을 그린 예술가들로 주로 1885년에서 1910년 사이에 활동한 고흐, 고갱, 세잔 등을 대표적인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꼽는다.

후기 인상파라는 용어은 1910년 전시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예술가이며 평론가이기도 했던 로저 프라이(Roger Fry,1866-1934) 는 자신을 위한 전시회 <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m>에서 인상주의의 단순한 외모에 대한 집착에 반대해서 시각적인 효과에 대한 움직임을 탐구하였던 화가들, ?그들이 본 것 보다는 그들이 생각한 것을 표현하려고 하였던 특성을 가지고 있는 화가들을 한 그릅으로 엮어서 후기 인상파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 이들 화가들은 자신들을 후기 인상파라고 부른 적이 없으며 화단에서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20세기 초에 젊은 화가들이 이들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서 후기 인상파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굳이 이들의 특징을 꼽아 보자면 순간의 인상을 그럴듯하게 그리려는 인상파들과는 달리 색채를 살리면서도 겉 모습을 넘어 심리적 내면을 추구하여서 “예술이란 무엇이고,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고 하겠다.

폴 고갱(Gauguin, Paul 1848-1903)

주식 중개인이었던 직업인이 35세에 직장도 버리고 가족과도 헤어져서 가난과 주변의 몰이해 속에서 평생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며 보헤미안의 삶을 산 화가이다

파리에서 유명한 공화주의자 정치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정치적 혼란기에 페루로 망명,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페루, 라마에서 4년간 살다가 파리로 돌아와 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 피사로, 폴 세잔과 어울려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40이 다 되어 조르주 쇠라와 폴 시나크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색채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이때 반 고흐와 함께 작업을 하게되는데 정신착란에 빠진 고흐의 발작으로 이들은 결별하게 된다.

고갱은 찬란한 색채와 관능의 기쁨을 발견하고 원시적인 자연과 생활을 동경하여 남태평양에 있는 타히티 섬으로 가서 작품활동을 한다. 1903년 심장발작으로 도도했던 예술가로서의 생애를 마감한다.

1897년 프랑스에 있던 큰 딸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 깊은 슬픔에 잠겨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실존적 물음을 제기하는 그림을 그린다. 자살까지도 결심하고 그린 그림이라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다. 치연하고도 비장한 느낌을 준다.

 

<아이 오라니 마리아>

타히티 섬에서 처음 그린 그림으로 원색의 색면을 강열히 구사하고 있다. <마리아를 경배하자>는 제목으로 보아서는 분명한 종교화지만 전통적인 카톨릭신앙에서 볼 때는 성화가 아니라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갱은 남 태평양의 강열한 색채에서 종교에서 느낄 수 있는 원시적 생명력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된다.

 

 

빈센트 반 고호(Vincent Van Gogh, 1853-1890)

성직자의 아들로 한 때 성직생활도 하였지만 그만 두고 불우한 생활을 하다가 밀레의 예술에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그림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그는 인상파와 동양미술의 영향을 받은듯 강열한 색채의 효과를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으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그것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다. 특히 그의 자화상은 인간의 깊은 심연을 표출하고 있다.

그는 정신착란 증상으로 치료를 받았으며 마음의 평정을 회복할 때마다 그림을 그렸으나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자화상>
서양에서 자화상으로 겉모습의 치밀한 묘사를 넘어 심리적 통찰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얀 반 에이크(1395-1441)에서였다. 이어 뒤러를 거쳐 렘브란트 그리고 고야에 이르러 내적인 주관적 심상을 그린 자화상이 그려졌다. 그러나 고흐의 자화상만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불안하게 할 정도로 심리적 마음을 표출한 작품은 흔치 않다.
1890년 그가 죽기 3개월 전에 그린 마지막 자화상을 보면 처절하도록 고뇌 어린 표정과 눈빛을 통해 반 고흔의 고독한 영혼을 느끼게 된다.

 

폴 세잔 ( Paul Cezanne, 1839-1906)

세잔은 한 때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전의 음영위주의 그림과 달리 색상의 차이로 사물의 형태를 구성하려고 한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세잔을 통해 입체주의적 미술양식을 만들어 내게 되었고 그런점에서 세잔은 근대를 마무리하고? 현대 미술을 탄생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현대회화의 아버지”란 평가를 받는다. 세산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물에서 영구적인 형태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정물화 (관점이 어긋나 보인다, 평행이 어긋나 보인다)

위의 정물화들은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어떤 정물들은 평행이 어긋나 쏟아질듯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어떤 정물들은 보는 각도가 다른 과일 접시들이 한 그림안에 들어있기도 하다. 그것은 순간적인 인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 저러한 각도에서 대비해 보는 것이 사물의 영구적인 본질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세잔의 관점에서 의도적으로 나온 것으로 그림에서 한 사람의 눈으로 순간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시공을 초월해서 측면에서 관찰한 형태도 화폭에 동시에 담은 것이다. 이것이 입체파와 추상미술을 탄생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5)>

인상주의 (Impressionism) 미술

19세기 후반에 파리를 기반으로 한 일단의 화가들이 독자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들의 그림은 순간적인 동작을 스케치 형식으로 그리면서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극대화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작가의 주관과 감성이 강조되었다 해서 인상주의를 낭만주의와 같이 상대주의적 미술로 분류했지만 인상주의는 고전주의뿐 아니라 낭만주의의 비 현실적이고 과장적인 화풍을 거부하고 일상적인 삶과 자연을 그려내려 하였다. 사실주의가 민중의 가난과 노동이라는 정치적 측면을 부각시킴으로 이념적인 측면이 두드러진다면 인상주의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려내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개념이나 이념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보이는 그대로의 ‘현상’을 그리려 하였다. 그것도 지금 이 순간의 인상을 빠른 붓놀림으로 화폭에 담으려 하였다. 그래서 순간적 빛이 만들어 낸 색과 나아가서는 색의 효과를 극대화 하였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인상주의 화풍을 시작하고 완성한 사람은 모네다 그의 대표작 <인상, 해돋이> 외에도 <수련 연작>, <루앙 대성당>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데 인상주의란 용어를 탄생하게 한 작품 <인상, 해돋이>는 고향집에서 항구를 내려다 보며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새벽 물안개 속에서 Ej오르는 태양 빛에 물드는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에는 미완성 작이라고 혹평을 받았다.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작품같이 디테일하고 진한 색칠로 무게감 있는 그림이 아니라 순간의 인상만을 엉성하고 거친 붓질로 스케치 하다 말았다는 것이었다.

1ft 7in x 2ft 1in, Oil paint.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상, 해돋이》는 클로드 모네가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유화이다.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유래로 알려져 있다.

모네 이외에도 인상파로 분류된 화가들로는 마네, 르누아르, 드가, 로댕 등이 있는데 이들을 전기 인상주의로 불린다. 이들은 화풍과 표현기법이 각기 다르지만 지금 이 순간의 이미지와 일상을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라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에두와르 마네(Edouard Manet 1832 ?1883)

에드와르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주의와 인상파 사이를 이어 주는 가교역할을 한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마네는 고전적인 아카데믹한 방법에 싫증을 느껴 24세 때 스승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된 관심은 색채의 대조를 통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 6ft 10in x 8ft 8in  현재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위시해서 <퇼르리 공원의 음악회>, <거리의 여가수> 등을 그렸는데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마네가 1862년과 1863년 사이에 그린 대형 유화이다. 이 그림은 전원을 배경으로 잘 차려 입은 두 명의 남성과 함께 있는 누드인 한 여인과 옷을 거의 벗은 또 다른 여인을 묘사한다. 1863년 살롱 심사에서 거부당하자 마네는 다른 두 작품과 함께 이 작품을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fuses)에 전시할 기회를 얻었고, 그곳에서 이 그림은 당대의 전형적인 미적 규범과는 거리가 먼 표현으로 대중적인 혹평과 논란을 일으켰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5)>

사실주의(Realism) 미술

‘사실주의’란 프랑스의 소설가 샹폴레리(Champfluery(1821-1889)가 그의 친구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의 작품을 묘사하려고 사용한 용어로 17세기 네델란드 화가들과 영국의 풍경화가들 그리고 새로이 발명된 사진 기술과 오일페인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세기 들어 서구세계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이 현대세계를 새롭게 표현하려고 하는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들이 나타났는데 특히 프랑스에서는 1848년 혁명 이후 몇 몇 젊은 예술가들이 진보된 기술과 기법, 사회적인 불공평에 대한 반발, 담대해진 새로운 솔직한 신체묘사 등과 결합하여 이 세상을 자기들이 본 그대로 직접적으로 그리려는 시도를 하였다.

사실주의자들은 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과도하게 인식된 자각 과 방종 그리고 (유럽의 공식적인 아카데미 예술을 좋아했던) 아카데미 예술의 인위적인 모습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다.

그들은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그림에 그들의 객관적인 견해를 표현하였으며 양식화나 인위적인 관례를 피하려 하였고 전통적인 권력자들이나 부자들을 ?높이고 치장하기 보다는 일상적인 노동계층의 삶을 즐겨 그리면서 환상적이거나 인위적인 표현 없이 자연적인 이미지를 그렸다.

서구의 예술이 아카데미 중심이 되면서 실 생활에서는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사실주의자들은 그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생활의 모습 즉 농부들이나 노동자들, 도시의 풍경이나 카페 또는 오락장들의 모습을 그렸다.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그린 주변의 그림들은 중,상층 관람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사실주의’에는 대상을 사실 그대로 그린다는 뜻도 있지만 그동안 배제되었던 일상적인 주변의 사회현실을 예술의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지니고 있다. ?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

<오르낭의 매장> 1849-50, 314X663Cm. Oil on canvas

평민 출신으로 부르조아적 이상을 경멸하며, 치열한 삶을 살았다. 자신을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요 혁명의 지지자라고 규정한 쿠르베는 ‘리얼리즘, G. 쿠르베”라는 명칭을 걸고 전시회를 할 정도로 리얼리스트였다. 대표작으로 그의 <오르낭의 매장>을 꼽을 수 있다. 자신의 고향 오르낭에서 일어난 장례식을 그린 작품으로 가운데 구덩이를 기준으로 늘어선 동네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정확하게 그렸다. 흔히들 장례식을 성스럽고 엄숙하게 묘사한것과는 달리 가운데 몇 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고 지루한 듯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한 평범한 동네사람들의 사실적인 모습을 꾸밈없이 그대로 묘사함으로전형적인 사실주의 그림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장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

<이삭줍는 사람들> 1857, 2ft 9in x 3ft 8in,Oil paint,

《이삭 줍는 여인들》 또는 <이삭줍기>로 번역되는 이 작품은 장 프랑수아 밀레가 1857년에 완성한 유화이다. 프랑스의 농촌지역인 바르비에서 주로 주변의 가난한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밀레는 수확이 끝난 밀 들판에서 이삭을 줍는 세 명의 여성들을 그렸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룻의 이야기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녀자들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린 사실주의 그림으로 이외에도 잘 알려진 <만종>, <씨뿌리는 사람> 등이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4)>

낭만주의 (Romanticism)미술

낭만주의는 19세기 초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 문학 , 음악 부문의 지적운동이다.

상상력과 감정에 강조점을 둔 낭만주의는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의 게몽주의의 이성과 질서에 대한 환멸에서 발생한 것으로 고대를 모방하고 재현하려고만 할 뿐, 개인의 감정과 주관의 탁월성을 소홀히 한 신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나온것이다. 작가의 주관과 감정의 표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공상과 환상의 세계를 그림의 대상으로 하는 낭만주의 예술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낭만주의는 합리성 보다는 격정, 감상, 그리고 개성에 대한 강조로 그 특성을 이루고 있다.

낭만주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 등 자연의 힘에 경의를 표하면서 논리를 극복하는 감성, 지성을 초월하는 감성을 찬양하며 합리주의를 배격하고 생동하는 브러시터치나 화려한 색감 그리고 상상력과 정신이 살아 넘치는 낭만적인 조각 등에 초점을 맞춘다.

데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16ft 1in x 23ft 6in
Oil Painting, 1818-1819 제작,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낭만주의

*낭만주의 미술의 창시자 격인 인물은 제리코(Theodore Gericault)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은 낭만주의 미술의 전형적인 요소들인 격렬한 움직임, 강렬한 명암대비와 색채 효과 그리고 극적인 상황등을 담고 있는 작품으로 당시 있었던 실제 사건을 소재로 그린 것이다.

프랑스 군함이 침몰했을 때, 급조된 뗏목에 150명이 타고 15일간 표류하다가 아르귀스호에 구조되었는데 그때 15명만이 살아 남았다. 제리코는 아르귀스호를 처음 발견한 극적인 순간을 상상력으로 화폭에 담았다. 즐비한 시체들과 죽음의 처참함 속에서 희망이 발견되는 순간을 격정적으로 담아낸 것이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7월 혁명, 마리안(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8ft 6in x 10ft 8in , Oil paint , 루브르 박물관 소장, 낭만주의

*제리코의 친구이며 그의 영향을 받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는 낭만주의 대표화가로 꼽히는데 그의 대표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너무나 유명하다.

<1830년 7월 28일>이란 부제가 붙은 이 그림은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일어선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브르봉 왕가를 무너트리고 필립을 국왕으로 맞은7월 혁명을 주제로 한 것으로 전면에 혁명에 쓰러진 사람들의 시체를 배치함으로 참상을 극대화하고 공상적인 여인을 내세워 애국심에 호소하는 전형적인 낭만주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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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코 고야의 < 1808년 5월 3일>,268 cm × 347 cm (106 in × 137 in) Oil on canvas, 1814년 제작, 마드리드의 Museo del Prado 소장

*서양미술사에서는 고야를 낭만주의 화가의 선구자로 보지만 한 화파에 속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자유분망한 화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한 화가로 근대정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는 개인적인 상상력을 한껏 발휘하여 환상적 세계를 표현하려 하였으며 작가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을 작품의 주제로 강열하게 표현하였다.

그는 초상화 제작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는데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인물의 특징을 포착 표현함으로 인기를 얻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1898년 5월 3일>이 있다. 프랑스군대가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자 민중들의 항쟁이 시작되었으나 체포된 민중은 마드리드의 동부에 있는 언덕에 끌려가 총살되었다. 이러한 참혹의 형장을 고야는 극적으로 그렸다. 캄캄한 한 밤, 흰 셔츠를 입은 사나이를 중심으로 혼이 나간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람들과 명령에 따라 총을 쏘아대는 프랑스 군인들, 고야는 여기에서 침략군의 잔혹함과 전쟁의 부조리와 스페인에 대한 자신의 애국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3)>

신고전주의 (1750-1830/1850)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희랍과 로마의 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문화운동으로서 시각예술, 장식, 미술, 문학, 건축 등을 망라하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1748년 고대 로마도시 품페이와 허큘라네움의 빌굴로 고대예술에 관한 관심이 새로이 일어나던 때 고고학자요 예술사가인 요한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의 저서들을 통해 시작되었으며 당시 파리, 베니스, 프로렌스 그리고 로마 등 유럽의 도시들을 돌면서 고전적인 교육을 받던 인기 프로그램 Grand Tour에 참여한 일단의 유럽 귀족층 젊은이들이 새로이 재발견한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이념을 가지고 자기나라로 돌아가면서 유럽 전역에 급속히 퍼졌다. 이때는 또한 18세기 유럽에서 계몽사조(또는 이성의 시대)가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때와도 일치하였다.

질서와 자제를 포용하는 신고전주의는 18세기 말에 로코코의 경박한 관능성에 대한 반발과 계몽사조의 합리적인 사고의 전형적인 귀감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예술은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뎃상을 그림보다 높이 평가하였다. 즉 부드러운 윤곽과 식별할 수 없는 붓놀림의 그림이 궁극적인 목표였던 것이다. 그림이나 조각들에 안정과 자제가 강조되었고 영웅들의 주제에 계몽적이고 애국적인 자기희생과 애국심과 같은 고상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형태가 분명하고, 수수한 색깔(진지한)에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예술과 문화에서 뽑아온 주제들을 중요시 하였다.

로코코의 건축이 우아함, 장식, 불균형을 강조한데 반해, 신고전주의 건축은 로마와 고대희랍의 덕성으로 꼽히는 단순성과 균형의 원칙에 기초하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Oil on canvas

129.5 cm × 196.2 cm (51.0 in × 77.2 in) 뉴욕메트로포리탄 미술박물관

*신고전주의 대표적인 화가로 프랑스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다비드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랑스 전체의 미술적 흐름을 고전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로 바꾸는데 크게 기여하였는데 그의 작품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의 죽음>, <마라의 죽음>, <호라티우스의 맹세> 등이 있다.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기 직전 고결함을 지키며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장면으로 고전적인 소재와 인물들의 안정적인 배치와 묘사, 고전적인 안정감과 비율, 조화를 잘 드러낸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앵그르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 오달리스크> Oil on canvas
르브르 박물관 소장

*다비드의 제자인 앵그르 역시 신고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고 있다. 고대예술이 남성의 미를 주로 다루었던데 비해 앵그르는 주로 여성의 누드를 그렸는데 선정적인 누드가 아니라 고전풍의 세련미로 그렸다하여 전형적인 신고전주의 화가로 평가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그랑 오달리스크>, <터키 욕탕> 등이 있으며 그의 영향으로 프랑스 예술에서 남성 누드가 사라지고 여성 누드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2)>

로코코(Rococo) 미술

18세기에 들어서서(1720년 경) 프랑스에서는 로코코(Rococo)라는 예술형식이 생겨났다. 자연적인 무늬와 부드러운 색상과 곡선들을 특색으로 사랑, 자연, 가벼운 유흥거리 등을 주제로 다룬 것이 그 특징이다.

루이 14세의 웅장한 바로크 스타일의 바르세이유 궁정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로코코 운동은 루이 15세 시대(1730년-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건축의 내부장식과 생활양식의 장식 등에서 조개무늬를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조개무늬 스타일(rocaille)이라고 부르던데서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특징으로 하는 예술형식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1840년대부터 서양예술사에서 로코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로코코는 우아한 바로크 풍의 왕실예술과는 달리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말하자면,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건축으로 유행하였는데 경박하게 표현되었다는 평가와 함께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고들 이야기 한다.

건축으로 시작된 로코코풍은 그림과 조각에서도 나타났으며 음악에서도 하이든이나 모잘트의 음악을 로코코로 구분한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된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프랑스 풍의 경향은 독일과 영국, 이태리 등에서도 인기를 끌게 되었다.

웅장하기 보다는 아담함을 보여주는 로코코풍의 상수시 궁전

*대표적인 로코코풍의 건축물로는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프러시아의 프레드릭 대제의 여름궁전으로 베르린 근처의 포츠담에 세워진 이 궁전은 독일의 벨사이유 궁전과 비교되나 로코코 스타일로 프랑스의 바로크 스타일의 웅장한 궁전에 비교하면 무척 작으면서도 공원에는 수많은 신전들과 공연장들이 있어 친근감을 더하고 있다.

*죠바니 바티스타 티에포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 ? 1770),
이태리 베니스 출신의 화가로 로코코 스타일의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이테리뿐만 아니라 독일과 스페인 등지에서도 작품활동을 하였는데 다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생애 초기부터 성공가도를 달렸는데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장식미술가이며 가장 유능한 장인으로 꼽혔다.

죠바니 바티스타 티에프로의 <크레오파트라의 만찬, 1743>

*프랑슈아 뷰셰(Francois Boucher,1703-1770) 가장 유명한 로코코풍의 화가로 관능적이며 편안한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그는 로코코 양식으로 작업한 프랑스의 화가로, 소묘가, 판화가이다. 부셰는 고전적인 주제의 전원적이고 관능적인 그림과 장식적인 알레고리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세기에 가장 유명하고 장식적인 예술가였다. 또한 그의 후원자였던 마담 퐁파두르의 초상 몇 개를 그렸다.

프랑수아 부쉐의 <여자의 초상화>와 오페라 <Renaud와 Armide> 루브로 미술관

*장앙투안 바토(Jean-Antoine Watteau,1684-1721)
대표적인 로코코 화가 장앙투안 바토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발랑시엔 태생으로 처음에는 지방 화가로 활동했지만 18세 때 파리로 가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본격적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장안투앙 바토의 <사랑의 기쁨, 1718-1719>

로코코는 후에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양식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1)>

바로크(Baroque) 미술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Diego Velazquez, 1650, oil on canvas, 140x114cm, 도리아팜필라미술관(로마) 소장.

바로크 시대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활동하던 에스파나의 궁중 화가. 벨라스케스는 궁정을 위한 거의 모든 공식적인 초상화나 전쟁화들을 그렸다.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벨라스케츠는 일상을 자연스럽게, 그러나 날카롭게 표현했다.
당시 교황을 그린 이 초상화는 스냅 사진처럼 자연스럽게 한 순간을 포착하면서도 교황의 성격까지도 들어내 주고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음악과 예술이 단순하고 검소한데 반해서 캐톨릭 교회는 예술은 정열적인 종교 주제를 가지고 관람자들에게 영감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545-1563년 사이에 열렸던 트렌트교회회의는 종교예술은 관람자의 주의와 감정을 끌어 모아 경건함과, 사실주의와 정확성을 고양하고 캐톨릭 교회에 영광을 돌리며 캐톨릭교회의 이미지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 결과 다음 세기에 르네상스 전성기 모델을 포용하여 발전시킨 급진적인 바로크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이 나타났고 그것은 새로운 종교예술과 다양한 세속예술의 새로운 발판을 마련하였다. 바로크 예술은 예술의 규모와 영역을 확대시켜 준 것이다.

이러한 캐톨릭의 주장을 반영한 예술이 화려하고 찬란한 바로크 예술로 음악, 회화, 건축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 한때 유행하였는데 17세기 후반 로마에서 시작해서 프랑스, 북부 이태리, 스페인, 폴튜갈, 오스트리아를 거쳐 남부 독일에 이르기까지(18세기 초반) 급격하게 퍼져나갔으며 특히 건축과 음악에서 널리 유행하였고 1720년 경까지 계속되었다.

바로크라는 단어는 폴튜갈어로 모양이 불규칙한 진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스위스의 미술사가 뵐플린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으로 고전적인 르네상스 미술이 선(線)적인데 비해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회화적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르네상스 그림은 분명한 선으로 입체감을 표현, 평면적인데 비해 바로크는 음영이나 색감 등으로 입체감을 구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외에도 바로크의 특징으로 폐쇄적인 고전주의 구도를 벗어나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극대화를 특징으로 지적하는 미술사가들도 있다. 또한 바로크 시대의 미술작품에서는 당대의 미적 가치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상징과 알레고리들이 발견된다고도 한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3-1610)와 푸생(Poussin, 1594-1665), 플랑드르의 루벤스(Rubens, 1577-1640)와 스페인의 궁정화가인 벨라스케스(Velazquez, 1599-1660) 그리고 네델란드의 렘브란트(Rembrandt,1606-1669)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 of Christ)

Annibale Carracci, 1593, oil on canvas, 217x160cm(85x63 in)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서장

빛과 그림자의 명암을 이용하여 웅장한 효과를 강조하는 특별한 기법을 사용하였다. 브러시를 사용하여 어떤 부분은 진하게 발라 웅장하고 환상적인 만들어 내었다. 이 그림은 현실주의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감상적이며 과장된 스타일의 그림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10)>

네델란드 황금시대 미술(Dutch Golden Age)

네델란드 황금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가운데 하나인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The Meagre Company, 1633-1637>로' Reinier Reael 대위와 Cornelis Michielsz Blaeuw 중위의 부하들'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Oil on canvas, 209X429 cm. 암스텔담의 Rijks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는 이 그림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했던 집단 초상화의 하나로 보통인물들의 일상이 소재로 등장하며 모든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표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17세기 격렬한 개신교 종교개혁의 물결이 지나가고 네델란드 독립전쟁인 80년 전쟁(1568-1648)을 거치면서?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유별난 현실주의 미술을 말하는데1585-1702년을 그 전성시기로 보고 있다.

16세기, 종교적, 정치적 불안으로 유럽북해연안의 저지대 국가들은 두 나라로 갈라졌다. 남부의 프란더스(Flanders)는 카톨릭 전통을 고수하면서 왕정을 계속한 반면에 북부의 네델란드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개신교회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새로운 네델란드 공화국은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번성하는 나라가 되었을뿐 아니라 유럽의 무역과 과학을 이끌었다. 그러나 예술에서는 전통적으로 남부의 프란더스가 중심이었으며 카톨릭교회와 왕실과 결별한 네델란드에서는 종교화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면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는 더 이상 예술의 중요한 주제도, 후견인도 아니었다. 그러자 네델란드에서는 새로운 예술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교회 대신 사람들이 후견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것이다.

17세기 초반부터 1660년 사이 네델란드의 예술가들에게서는 종교적 주제에 관한 그림들이 줄어든 반면 초상화뿐만 아니라 정물, 풍속화, 풍경화, 그리고 일상적인 생활에 관한 관심을 새롭게 한 실내장식품 등, 새로이 등장한 부자상인계층의 집들을 장식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세속적인 주제들에 관한 보통그림들이 많이 나왔으며 그들은 풍부한 시장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별 의미가 없고 시시한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하나님의 피조물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개신교 신학과 무엇이든 나름대로 그 중요한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철학이 그들의 예술을 뒷바침하였다.

네델란드 황금시대의 예술들 가운데는 삶의 허무함과 허영으로 알려진 허무하게 없어지고 마는 쾌락추구의 위험을 상기시켜주는 특성을 가진것들이 있다. 이때 또한 초상화들이 널리 유행했는데 아주 상세하게 그려졌으며 화가들은 빛의 효과를 세세하게 기술하는 특별한 기술을 갖게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렘브란트와 프랑스 할즈, 할멘 스틸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을 꼽고 있다.

이시대 그림들의 특징으로는 초기 유럽의 그림들과 비교할 때 종교화의 숫자가 줄었다. 네델란드 칼빈주의는 교회에서의 종교화를 금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와 함께 여러 장르로 나누어서 농부들이나 일반인들의 생활, 풍경화, 도시화, 동물이 섞인 풍경화, 꽃 그림? 그리고 정물 등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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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황금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 렘브란트 의 대표작 <The Knight Watch(야간순찰대) 1642 >은 '프란스 반닝 코크와 빌럼 반 루이텐부르크의 민병대'란 부제가 붙어있다. 11ft 11in X 14ft 4in, OIL on Canvas,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소장되어 있다.1642년에 그린 렘브란트의 집단초상화의 하나인 <야간 순찰대>. 그의 특유의 명암 효과를 사용, 극적인 구성을 시도하였으나 당시에는 인정을 못 받았고 오늘에 와서 그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렘브란트는? 수많은 성화들을 그리면서 화가로서의 명망과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1640년 이후 그는 당시의 전형적인 방식을 버리고 자신의 예술을 추구하였다. 그의 시도는 결국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감동과 호소력을 갖게된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9)>

매너리즘(Mannerism,)

르네상스 미술의 방식이나 형식을 계승하되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매너 혹은 스타일)에 따라 예술작품을 구현한 예술 사조를 말하는데. 1520년대 르네상스 전성기(High Renaissance)의 후기에서 시작해서 1600년대 바로크가 시작하기 전까지 지속된 유럽 회화, 조각, 건축과 장식 예술의 시기를 지칭한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의 <예수 탄생(Nativity)으로 목재에 Oil Paint로 그렸다.. 8ft 5in x 6ft in,제작연도는 1529년?1530년.. 역사화 또는 성화에 속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 시대 명화로서 매너리즘의 특성을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매너리즘(mannerism은 영어 'manner'(양식)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maniera'에서 유래한 용어로 양식적으로는 초기 미켈란젤로의 조화로운 이상의? 영향을 받고 다빈치와 라파엘로의 다양성 있는 개인적인 접근에 반응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자연적인 것과는 반대되는 지적이면서도 인공적인 특징이 두드러진 것을 알 수 있다.?

20세기 초반에 독일의 미술사가들이 16세기 이태리아 미술들 가운네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르네상스 미술이라고 분류하기는 어려워 보이는 미술들을 분류하여 ‘매너리즘’이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자신만의 개성적인 스타일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1500년경에서 1539년경까지 이테리아는 물론 북유럽에서 활동한 후기 고딕 화가들에게도 사용되었다.

매너리즘의 특징 ?매너리즘은 예술을 자신들의 거대한 富를 ?자랑하는데 사용하기 원했던,귀족후원자들을 기쁘게하고 자랑할 수 있도록 하려는 필요에서 나온 작품들로 궁정형 미술이다.

매너리즘 그림들은 인위적이다. 길고 가는 사람의 형체라든지,이상한 자세, 아성헌 조명효과, 전망, 비율 그리고 색채 등을 사용하여 과장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속하는 화가들 가운데는 Antonio Da Correggio,깬내 forentino Pontiormo 그리고 Giulio Tomano 등이 있다.,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 의 <도나 이사벨의 초상화>는 목재에 오일로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120 cm × 95 cm (47 in × 37 in, 제작연도는 1518년이다. 이탈리아 루네상스 전성기의 작품으로 라파엘의 제자요 매너리즘의 시조로 알려진 줄리오 로마노가 라파엘의 스케치에 그린것으로 알려졌다. 파리, 르브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베네치안 르네상스 미술

죠반니 베리니(Giovanni Belli,1430-1516)의 <초원의 마돈나>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르네상스예술이 꽃릏 피우던 이태리에서는 프로렌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한 르네상스 대가들 외에도 베네치안(베니스)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화가들이 나타났다. 1000여년 이상 상업의 중심지로 동부 지중해에서의 상권을 휘어잡고 식민지 정책을 휘두르면서 중요한 역할을 한 베네치안은 강력한 경제력과 파워를 가진 이태리 도시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베네치안의 파워를 배경으로 그곳의 예술가들은 생동하는 색채감의 그림과 특별한 오일페인팅 기술의 개발 등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가운데 ?베니스 초기의 예술가로는 Bellni 가문이 널리 알려졌는데 그 가운데도 죠반니 베리니(Giovanni Belli,1430-1516)는 옛 시대 그림의 기법들을 계속해서 쇄신하는 등 가장 위대한(the Great) 화가로 꼽힌다 그는 베네치안 미술을 보다 감각적이고 색체감이 나는 스타일로 바꾸었으며 보다 분명하고 천천히 마르는 페인트를 사용해서 보다 깊고, 다양한 엷은 색조의 섬세한 그림자들을 표현하였다.

화려한 색채와 유려한 분위기의 자연경관은 베네치안 르네상스 미술의 특색으로 ?자리잡았다.

Georgeone의 The Tempest(1908) ?

16세기에 들어와서 ?베니스 르네상스 화가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로는 ?티치아노(Titian,1488-1576)을 꼽고 있다. 그는 베네치아 공화국 회화의 황금기에 창작활동을 한 화가로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이태리 각지로 팔려 나갔다. 그는 동년배인 죠르조네(Georgione)와 함께 풍경화를 자신의 그림의 배경으로 처음 사용한 화가이다. 종종 미켈란젤로의 디자인에 대비되는 티치아노의 훌륭한 색채감은 틴토레토와 파오로 베레네세 등을 통해 17세기 바로크 궁전의 테마와 장식을 시작하게 되었다.

티치아노(Titian,1488-1576)의 <Bacchus and Ariadne(1520-23)


 

전성기 르네상스 미술

초기 르네상스 이후 전성기의 르네상스 미술은 다른 어느시기 보다도 많은 천재적인 화가들을 배출하였다.

이시기의 작품들은 이성적인 규범에 따른 객관적인 정확성을 기반으로 창작되었고 조화와 균형이라는 미적감각을 미의 이상적인 구현이라고 보았다.

레오나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르네상스기에 접어들면서 성화에도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레오나도 다빈치를 꼽는데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초까지 활동하였다. 레오나도는 화가이자 조각가, 건축가이자 기술자로 전형적인 천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뿐 아니라 과학자로서의 섬세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평생동안 39구의 사체를 직접 해부함으로서 인간의 골격이나 근육의 움직임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인물을 현실감 있게 묘사할 수 있었다.

한편 레오나도는 공기원근법이론을 창안해 내어서 당시 사용되던 선원근법(線遠近法)에 깊이감을 더하였는데 공기원근법이란 가까이 있는 물체는 선명하게 보이지만 멀리 있는 물체일수록 공기로 인해 푸른색이 가미되고 채도(彩度)가 낮아져 윤곽이 희미해지는 현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대표적인 작품으로 레오나도의 <모나리자>를 꼽고있다. 심지어 이 작품은 인체및 공간에 대한 사실성과 객관성을 바탕으로한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레오나도의 <모나리자>

레오나도 이외에도 르네상스 전성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미켈란제로를 들고 있다. 레오나도보다는 20년 아래인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보면 레오나도와 경쟁관계였다고도 할 수 있지만 레오나도가 회화에 집중한 반면 미켈란젤로는 조각에집중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피에타>가 있다. 십자기에서 내려진 그리스도를 그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안고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다. 사실적이면서도 절제된 감정표현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이 작품외에도 <모세상>, <다윗상>등이 있다.

미켈란제로의 대표적인 조각상:피에타(왼쪽)와 다윗상(오른쪽)

그는 조각이외에도 교회의 요청에 의하여 <시스틴채플의 천정벽화>를 그렸는데‘천지창조’나‘최후의심판’ 등은 조각같은 그림으로 종교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중세기의 획일적인 성화들과는 달리 이성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미를 추구함으로 예술적으로 르네상스 미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시스틴채플의 천정 벽화) 중세기의 전형적인 하나님 상과는 달리 생생한 모습의 근육질 하나님 상이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6)>

초기 르네상스 미술

이 시대는 예술가들이 비잔틴이나 중세기의 종교적인 제한을 완전히 박차 버리고 가장 창조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하던 위대한 시대로 15세기 초반에 이태리의 프로렌스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시에나에서는 몇 몇 혁신적인 예술가들이 다양한 진취적인 아이디어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두치오(Duccio 1278-1319)와 시몬마티니(Simone Martini 1284-1344) 등이 있었고 그들의 뒤를 이어 프로렌스에서는 지오토 드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 등이 새로운 느낌의 자연주의와 3차원적인 초상화들을 그렸다.

초기 르네상스는 고전적인 문학, 철학, 예술이 밀려옴과 함께 국제교역의증가, 새로운 대륙의발견, 새로운 발명이 특별히 쇄도하던 시대였다.?이때에는 그 지역의 정,재계를 이끄는 지배계층의 가족들과 독립된 도시국가들이 예술가들과그들의 혁신적인 아이디어 발전에 기여하는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1438년 요한네스구텐버그(Gutenberg 1398-1468)의 인쇄기 발명은 특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전파하는데 큰 도움을 준 문학의 발전에 특별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고대 로마문화나 예술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으며 고대 그리스와 라틴의 문학에 관한 특별한 관심이 휴매니즘이라고 알려진 개인주의와 이성이란 개념을 부추기게 되었다.

인본주의자들은 현재의 삶에 보다 관심을 가졌고 화가의 접근법에 영향을 끼치는 개인적인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초기 르네상스시대에는 일관성 있는 미술스타일이 나타나지는 않았다.그러나화가들이 심지어 사채의 해부 등을 통해 신체구조에 관한 생생한 지식도 얻게 되고 직물들의 색깔 투시를 통한 일치하는 경향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점에서 이 시대 미술의 특징은 명암과 함께 원근법을 통한 새로운 신선한 자연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icelli)의 < 베누스의 탄생(The Birth of Venice)>
5ft 8in x 9ft 2in Tempera, Upich Museum of Art. 1484-1486 Florenting painting, Early Renaissance.

베누스의 탄생은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화가인 산드로 보티첼리의 대표적인 그림 가운데 하나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로마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베누스가 성숙한 여성의 모습으로 바다에서 탄생하면서 해안에 상륙하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이다. 전형적인 르네상스 소재와 기법의 그림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5)>

중세기 미술

중세기 미술이란 로마제국과 비잔틴제국의 문화적 유산에 북부유럽의‘이방인’들의 문화유산이 혼합되어 발전한 예술로 시기적으로는 기원 300년 경 로마의 붕괴로 부터 기원 1400년경 르네상스 미술이 나타나기 까지 약 1천여 년 동안 유럽대륙을 중심으로 중동과 북 아프리카등지에서 나타난 지역적, 민족적 특징을 지닌 예술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시대의 예술을 건축양식에 따라 대체적으로 초기기독교, 로마네스크, 고딕등 셋으로 구분한다.

초기기독교의 가장 오래된 미술로는 카타콤에 그려진 그림들이 남아 있고 로마의 지하에 있는 묘지의 장식용 그림등이나 조각품을 들 수 있다.

(왼쪽)로마 카타콤에 그려져 있는 <예수와 제자들>과 (오른쪽) 로마 지하묘지에 있는 Junius Bassus의 석관에 새겨진 조각들

암흑시대라고 하는 첫 천년이 지나고 기원 1000년 경부터 로마네스크 예술과 건축이 나타났는데 이것들은 그 이름이 시사하듯이 로마의 예술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치가 많은 수도원 건물들이 이 시대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이고 교회실내장식용 벽화들이나 경전의 사본에 그려진 삽화등이 주요작품들이었는데 무역항구들이 늘어나고 부자들이 생겨나면서 궁전이나 교회를 위한 그림외에도 개인의 저택을 장식하는데도 화가들이 동원되면서 벽화를 그리는 전문적인 개인화가들이 나타났다.이때에 활동안 주요 화가들로 시마부(Cimabue), 앙드레아 피상(Andrea Pisnag), 두치오(Duccio) 그리고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등이 있으며 이들은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을 가져온 전위들이었다.

전형적인 고딕건축물인 성당의 모습

고딕 미술 또는 고딕 예술은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달한 중세 미술 운동이다. 이들은 특히 아치와 첩탑을 자랑하는 고딕 건축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였다. 이 미술은 서유럽 전반과 알프스 북부에 두루 퍼졌다. 지역적인 차이는 있으나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의 전 운동이 되었다. 고딕의 어원은 번족인 고트에서 나온 것으로, 전화하여 '야만적'이란 의미로 쓰였는데 르네상스시대에는 중세미술은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Giotto di Bondone의 벽화 Lamentation(애통) 185x200 CM(72X78 IN)Sorovegni (Arena) Chapel, Padua, Italy

조토 디 본도네는 13세기 가장 인정받는 이태리의 화가요, 조각가요, 건축가로서 다가오는 르네상스 예술의 모델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비잔틴의 성화들이 사실적이기 보다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적인 모습을 가진 예수를 묘사한 것과는 달리 애통과 고뇌를 지닌 인간의 적라라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르네상스시대에 꽃피운 기독교미술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Sorovegni채플의 네 벽을 인간의 구원이라는 주제로 그린 그의 작품가운데 하나인 막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놓고 여인들이 애통해 하는 장면이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4)>

비잔틴 예술

<Emperor Justinian Mosaic> San Vitale (c. 546-56)

기원 3세기 이후 기독교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현실주의적인 미술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신을 마치 보통사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원 313년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겼으며 후에 콘스탄틴노플로 개명하였다. 그러므로 비잔틴 미술이란 기원 330년경부터 1445년까지 발달된 미술이라 말할수 있다. 희랍과 로마와에집트예술들의 중요 요소들을 끌어낸 비잔틴 예술은 강력한 질서를 표현하고있다. 거기에는 나체표현이 없으며 감상자에게 하나님이나 성자들이나 조각품들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려고 만들어진 이야기체 이미지들이 없다.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 Hagia Sophia 성당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비잔틴 예술은 라비니아, 베니스, 씨실리, 그리스, 러시아 등지로 퍼져나갔다. 많이 남아있는 작품들 가운데는 주로 벽화와 모자익들이 있는데 주로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표현하기 위해 건축된 커다란 돔이있는 교회들을 장식하는데 사용되었다. 그외에도 커다란 목판화들과 조그마한 동물조각상, 그림이 함께하는 필사체 사본등이 있다. 그외에도 장식용으로 평면화된 성자들의 양식화된 아이콘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이 화가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있다. 예술에서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이 중요하지 개개인을 기억하거나 숭배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인듯 하다.

*비잔틴이란 말은 기독교동방로마제국의 미술이란 말로 그 영향이 미쳤던 다른지역들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을 표현하는데 관심을 가지며 목표는 자연주의적 묘사가 아니라 신의 능력과 신비를 전달하는데 있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다음에도 베니스와 시실리같은 지역에서는 비잔틴예술이 성행하였다.

<Christ Pantokrator> Hagia Sophia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 문화인 비잔틴 미술은 주로 벽화나 금속가공물 또는 4각형 타일을 모아놓은 모자익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블(현재의 이스탄불)에 있는 가장 큰 교회인 Hagia Sophia에는 왼손에는 복음서들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축복하기 위하여 들고 있는 <Christ Pantokrator>란 이름의 예수상이 그려져 있다.

희랍어로 Pantokrator란 "전능하신분"이라는 뜻으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분이란 의미인데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들을 심판하시고 돌보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Hagia Sophia 성당은 6세기경 유스태니안 황제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Christ Pantokrator>이 들어있는 커다란 장식용 모자익은 <deesis(기도)란 제목의 모자익으로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께 심판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으로 1261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성당에서 가장 훌륭한 모자익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색깔이 진한 비잔틴 미술품들과 비교해 보면 색깔이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며 그것들을 통해 사랑과 자비심이 얼굴에 나타나 있다.

<deesis(기도)> Hagia Sophia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3)>

로마 미술

(왼쪽)로마에 있는 로마시대의 신전(Pantheon) 아데네에 있는 그리스 신전(오른쪽)만큼 우아해 보이지는 않지만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경 그리스 주변 마케도니아의 왕인 알렉산더 대왕은 짧은 기간동안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일대를 통합하여 대 제국을 세우고 이 제국의 문화를 헬레니즘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그리스 문화와 같은 문화’라는 뜻으로 알렉산더 자신이나 대 제국의 문화적 지향점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원형경기장. 그리스의 건축물보다 웅장한 맛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알렉산더 대왕이 설흔 세살에 요절하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는 와해되어 갔고 이태리 남단 로마에서 시작되어 지중해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장악해 가던 신생 로마제국이 유럽 일대를 장악하면서 로마문화가 유럽 일대의 문화를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태리남부 일대는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스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가 그리스를 장악하면서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때문에 문화적으로는 초창기부터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로마예술은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와 그리스의 미술이 별 차이가 없으며 로마의 예술가들이나 건축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그리스의 신전과 고대의 회화 및 조각들을 복사한 것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후에 로마예술은 유럽 전역으로 확장되면서 국제적인 성격을 가미한 예술로 확장되었으며 보다 실용적으로 변화하는 등 변화를 보였습니다.

 

(왼쪽)로마 시대(기원14-29 년경) <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그스투수> 높이 204cm의 대리석 조각품. 바티칸 카이리몬티 미술관 소장. (오른쪽)기원전 440년경, 폴리크레이토스가 청동으로 제작한 것을 로마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것으로 <창을 든 청년>이다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소장 권위적인 로마와 자연적인 그리스가 대조를 이룬다.

로마시대의 폴리니우스는 "예술의 최고 목표는 '자연의 완벽한 재현' 즉 니메시스(Nimesis)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러한 예술관은 변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번에는 비잔틴 미술을 다루겠습니다.


김상신의 <서양미술사 산책(2)>

그리스 미술

그리스 예술의 고전기의 우아한 건축물 그리스 신전

고대 선사시대의 동굴벽화 이후에도 고대문화의 발상지들을 중심으로 암각화나 벽화및 건축물등 예술작품들이 발견되었지만 대부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작품이라기 보다는 영혼의 영원한 안식처를 단장한다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나 실용적인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에집트의스핑크스나 피라밋 그리고 그 안의 벽화들이 좋은 예들입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만들어진 본격적인 작품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있습니다.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어서 조화와 균형을 기본으로 하였던 그리스 예술이 본격적인 서양미술의 시작이요 서양예술의 근간으로 지금까지 계속되어 서양미술에의 영감의 기본이 되어 온 것입니다.

전성기 미노스 궁전의 벽화

이와같이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고대 그리스 예술은 오래전부터 배를 타고 해상 무역을 하던 지중해의 크레타(Creta) 섬 사람들이 나일강과 티그리스강 등지의 오리엔탈 문화를 수용했을뿐 아니라, 건축과 도자기 만드는 법들을 인근 그리스에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20세기 초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크레타섬의 미노스 궁전과 벽화는 기원전 1600년경, 전성기의 문명과 예술의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창기 기하학적 시대의 물병

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그리스 본토 남쪽을 중심으로 에게해 주변에 폴리스라는 도시국가들을 이루며 발전된 문화와 예술을 그리스 문화라고 합니다. 도시국가들은 강력한 독립성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지만 같은 언어를사용하고 신에 대한 같은 신앙을 공유하였던 이들은 수시로 또는 정기적으로 델피와 올림피아와 같은 성소(聖所)에 함께 모여 그들이 기리는 신을 위한 경기나 체전 및 시,음악경연들을 열면서 오리엔트와는 다른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의 예술은 기원전 1세기 로마제국에 흡수되기까지 근 1,000여년 계속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 예술은 그 시대와 양식에 따라서 4시기로 구분하는데 첫째는 기원전 11세기 말부터 기원전 700년 경까지로 기하학적(geometric)시기라고 부르며 암흑시기라고도 부릅니다. 예술적으로는 별 볼일이 없다는 뜻이지요.주로 도자기들의 무늬에서 찾아 볼 수있는 이시대 미술의 특징은 반복적인 패턴이 강조된 것입니다.

다음 시기가 기원전 620년 경부터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480년 까지로 고풍(아르카이크,Archaic)시대라고 부르는데 이 시대는 정치, 경제, 문화, 외교등에서 발전을 이루던 시기로 그후에 찾아온 황금시대의 기반을 쌓았습니다. 이 시대의 작품으로는 기념비적인 조각상과 붉은 색깔의 인물들이 그려져 있는 도자기등이 있습니다. 그 다음이 정치, 문화, 예술등 모든 분야에서 황금시대를 이루었든 기원전 480년에서 323년까지를 고전기(classical)라고 부르는데 건축, 조각등에서 그 전성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고풍시대의 조각품들로 기하학적 대칭을 강조했기 때문에 좀 딱딱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하고 그리스 문화가 확대, 변화되던 기원전 323년부터 기원전30년 까지의 문화를 헬레니즘(Hellenistic) 이라고 부르며 교류와 융합을 거쳐 나타난 새로운 미술의 형태가 이 시대 그리스 미술의 특징으로 이 시대의 그리스 예술가들은 위대한 생동력과 다양성 그리고 힘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발전시켰으며 제국의 위용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로마제국의 예술가들에게 전수되어 수많은 기술과 아이디어를 발전사켰습니다.

기원전 150년 경에 만들어진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으로 생동적인 힘과 아름다움의 조화와 위용을 자랑한다.


기원전 479년 아덴사람들은 페르시안들의 침략을 막아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자신감을 가지고 벽화와 조각과 건축등을 하였는데 이 시대에 이들 예술가들의 이름이 역사상 처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조각가 폴리클레이토스,피디아스, 미란, 프랙시텔레스등위 조각들은 이상적으로 아름답고 균형잡힌 살아있는듯한 흠결없는 사람의 형상으로 유명합니다.

왼쪽 사진은 'Dorypholos'(창을 든 청년)로 기원전 440경 경에 폴리클레이토스가 청동으로 제작한 조각상의 로마시대 카피. 오른쪽 사진은 플락시텔레스가 기원전 4세기에 제작한 조각상. 대리석 제품으로 복제품으로 추정된다. 그리스에서는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제작한 예술가들의 이름이 밝혀졌다.

*다음회에는 로마제국의 예술을 다루겠습니다.

 


 

서양미술사 산책(1)

<늘푸른나무>가 창간이래 지난 11년동안 Gallery의‘명화감상’란을 통해서 130여편의 명화들을 해설을 덧붙여 소개해 왔습니다.

라스코 동굴의 입구는 서양미술사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다.

이제 새해를 맞이하면서‘명화감상’의 포맷(format,구성방식)을 좀 바꾸어보려고 합니다. 화가 개인들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던 것을 movement중심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대표적인 작품을 감상함으로 미술감상에 필요한 상식들을 넓혀보자는 의도에서 선사시대의 '동굴의 미술'에서부터 현대의 퍼포멘스아트라고하는 행위미술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한때 유사한 경향을 보였던 화가들의 움직임을 돌아 보고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경향과 기교등을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보다 폭넓은 감상을 위한 본격적인 해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필자의 한계를 잘 알기에 상식적인 조언에 그칠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공부하는 자세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Susie Hodge의 <The Short Story of Art>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선사시대 '라스코 동굴의 미술'

라스코동굴 암벽에 그려져 있는 가장 큰 황소의 모습

미술에서 선과 같이 연속된 역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절된 개인이나 그릎의 작품들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점들을 연결하다 보면 선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며 그것을 가르켜 우리는 역사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서양미술의 기원을 선사시대 원시인들이 거주하던 동굴에 그려져있는 벽화에서 찾고있습니다. 인간의 예술활동을 추적해 가면 그 흔적을 50여만 년전까지도 올라 가지만 과연 그것들이 현대의 인간과 같은 지능을 가진 인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하는 문제에서부터 많은 의문들이 제기되기에 선사시대 미술이라면 흔희들 기원전 5만년에서 기원전 3000년 사이에 만들어진 미술품을 의미하며 서양미술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양한 시대에 걸쳐, 다양한 장소에서 그려진 예술품들이 포함될수 있겠지만 선사시대 예술이라하면 일반적으로 사회제도와 신앙들을 표현하는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지역에서 비너스인물상이라고하는 선사시대의 조그마한 공예품들이 발견됐는데 젖가슴과 배를 과장한 모습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있습니다.그 대표적인 것이 기원전 28,000-25,000 사이에 오스트리아의 빌렌돌프에서 만들어진 비너스 조각상이며 오스트랄리아에서도 같은 시대의 유사한 돌로 만든 공예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서양미술의 시작으로 보기에는 너무 빈약한듯 합니다.

광물이나 야채에서 추출한 정교한 색깔들로 사실적인 생동감이 넘친다.

그후 약 1만년이 지난 시대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의 라스코동굴에서 거대한 동굴의 암벽에 수 백마리의 황소, 사슴, 들소들이 광물이나 야채에서 추출한 색소들을 사용해 정교한 색깔로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기원전 16,000-14,000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그림들의 목적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합니다만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식을 위한것이 아닌가?하는데 의견들이 일치합니다. 비슷한 빙하시대의 벽화들이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라스코 동굴안에는 '황소들의 대 회당'이라고 부르는 넓은 공간이 있는데 양쪽암벽에는 130여개의 짐승들과 사람들 그리고 추상적인 기하학적 사인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황소와 암소, 말과 사슴등 동물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고 암벽에 주로 짐승들의 한쪽이 보이도록 그려져 있는데 움직이는듯한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어떤 동물들의 윤곽선들은 바위를 쪼아 그 위에 광물의 색소들을 칠하여 뚜렸하게 만드는 등 상당한 기법들을 사용한 예술작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이외에도 동양을 위시한 고대문화의 발상지에서는 상당한수준의 미술품들과 벽화들이 발굴되고 있지만 서양미술사에서는 동굴의 벽화들과 공예품들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로 이어진 선을 따라 미술사를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130여개가 넘는 짐승과 사람들과 기하학적 싸인들로 넓은 공간을 꽉차게 그린1만 5천 여년 이전의 예술의 전당이다.

*다음은 고대 그리스의 미술에 관하여 다루겠습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