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Gallery/이달의 화보/2009년 5월>

퓨리탄(Puritan), 그들은 누구인가?

대서양을 건너 북 아메리카 대륙에 '미국'이라는 나라를 건설하는데 한 몴을 담당한 퓨리탄들, 그들의 족적은 미국사회 구석 구석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특히 정치와 경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렇다면 퓨리탄이란 과연 누구인가?

영국에는 이미 6세기에 대륙으로부터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어 대중들 사이에 퍼져 나갔으며 교회들이 설립되었는데 14세기경 부터 기성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을 최초의 퓨리탄이었다고 후세의 학자들이 이야기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이름은 없었다.

14세기 대표적인 개혁자로는 John Wycliff(c. 1330-1380)를 들수 있다. 그는 성자와 성상 숭배를 반대하고 성직자들의 비행과 교회의 관행을 비판하면서 단순한 형태의 예배'를 주장하였는데 후에 퓨리탄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영국교회의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성직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교회개혁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함량미달의 불완전한 것이었다. 전처와 이혼하고 새로이 결혼하려던 영궁의 왕 Henry VIII세(1491-1549)는 교황의 승인을 받지못하자 1534년 카톨릭 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교회개혁을 시도하였다.

한편 William Tyndale(c.1494-1536)의 성서번역은 개혁운동을 대중속에 확산시켰으며 교회의 철저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

Henry VIII가 죽자 어린 Edward VI(1547-1553, 재임기간)가 즉위,

교회개혁에 호의적이었던 Thomas Cranmer(1498-1556)의 섭정아래 개혁의 기대가 무척 상승하였으나 에드와드왕이 요절하자

Mary I(1553-1558)공주가 즉위하여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때 유럽대륙에서는 John Calvin과 John Knox가 종교개혁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 여러곳에서 개혁동조자들이 모여들었다..

Mary(1553-1558,재임)의 뒤를 이어 여왕이 된 Elizabeth(1558-1603,재임기간)는 아버지 Henry VIII 가 시작한 캐톨릭과의 결별을 분명히 하고 영국국교회의 최고통치자가 왕임을 선포하였으며 교회개혁도 그 테두리 안에서만 시행토록 하였다. 그 결과 캐토릭은 물론, 대륙의 종교개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엘리자베스의 개혁에 불만이었으며 이때 특별히 '순수한 예배와, 철저한 교회개혁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빈정대는 말로 Puritan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1570년대에는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1958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James I세는유명한 King James 역 성경을 번역, 출판하는 등 종교개혁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영국국교회에 동의하지 않고 분리를 주장하는 퓨리탄 개혁자(Separatist)들에게는 단호하여 그들이 기대하는 개혁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영국국교회와의 분리를 주장하던 일단의 퓨리탄들이 박해를 피해 William Bradford와 John Robinson 의 인도로 홀랜드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을 필그림이라 불렀으며 그들은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기 보다 신대륙에 가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세우기로 하고 메이프라워 호를 타고 대서양을 건느기로 하였다.

이들은 버지니아 회사의 허가를 받고 영국상인들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아 Mayflower호로 홀랜드를 떠나 대서양을 건넜다. 필그림 지도자들은 선상에서 간단한 문서를 작성 남자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자치'를 골자로 하고 있으며 미주이민자들이 문서로 작성한 최초의 문건으로 미국헌법의 모체가 되었다.

어려운 항해끝에 그들은 모적하였든 버지나어가 아니라 뉴 잉글랜드의 Plymouth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들은 무사히 도착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고

위험에 대비하여 총을 들고 자유롭게 예배하며 추운 겨울을 지냈다

인근의 인디언들과도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자리를 잡아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Charles II(1630-1685)가 제임스의 뒤를 이어 1625년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선왕의 전철을 따라 영국국교회와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해를 가하였으며 그에 저항하는 의회를 1629년에 해산하자

촬스왕 치하에서의 개혁의 기대를 접은 John Winthrop은 1630년 Arbella호를 타고 뉴 잉글랜드로 향했는데 1630-40년 사이에 수만명의 영국 퓨리탄들이 이주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John Cotton(1585-1652)같은 캠브릿지 출신의 청교도 지도자들과

Connecticut주를 개척한 Thomas Hooker(1586-1647) 같은 성직자들이 있었는데 이들 청교도 지도자들은 필그림들과는 달리 단지 자유로 예배 볼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려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산 위에 성'을 세우려는 분명한 꿈을 가지고 대서양을 건넜다.

뉴 잉글랜드에서 퓨리탄의 세가 강화되면서 그들의 박해하료고 하자 인디언들이 준 땅에서 Rhode Island 주를 세우고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였던 Roger Williams 도 꿈을 가졌던 퓨리탄이었으며

18세기 초엽 뉴 잉글랜드에 신앙적인 대각성운동의 불길을 집혔던 Jonathan Edward 역시 순수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를 이루어 보려는 열정에 차있던 퓨리탄 정신을 승계한 후예였다.

한편 영국에서는 한때 해산되었던 의회와 촬스왕과의 계속된 투쟁끝에 군인출신의 지도자요 경건한 퓨리탄이었던 Oliver Cromwell(1599-1658)이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왕의 호민관으로 전권을 장악, 섭정을 펴면서 1653년부터 1658년까지 개혁적인 정책을 수행, 청교도 혁명이라고 불리었으나 그의 사망으로 5년만에 퓨리탄들이 기대하던 개혁정치도, 종교개혁도 중단되고 말았다. 영국에서의 퓨리탄 운동은 새로운 체재를 수립하는데에는 실패하고 옛 체재에 대한 비판으로 그쳐야만 했다.

그러나 북미 대륙에서의 퓨리탄들은 사회에서의 지도적인 역활을 감당하면서 나름대로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 그들이 이상하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고 그들의 정신은 아메리카 합중국을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하는데에도 기초가 되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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