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보/2014년 1월>

<화보>초기 한국개신교 인물 열전

1901년 5월 14일 한국에서 첫 목사안수식이 있었다. 서울정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감리회 조선선교회 연례회의에서 김창식 목사가 감리교회 무어(D.H. Moore) 감독으로부터 ‘집사 목사’안수를 받았다. 개신교 선교사가 정식으로 선교를 시작한지 17년만에 이루어진 경사였다.

그 이전에 이미 선교를 목적으로 조선을 찾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있었다. 박연이나 하멜과 같이 조난을 당하여 할 수 없이 조선에 발을 들여 놓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분명한 선교목적을 가지고 찾아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선교사들로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도마스 목사와 충청도 고대도에서 40여 일간 선교를 하다 돌아간 칼 귀즐라프 선교사가 있다.

개신교회 선교초기 서울지방에 설립된 한인교회들은 대부분이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그들의 모교회인 미국과 카나다 교인들의 재정적인 도움으로 가능하였다. 그러나 서울의 초대교회 가운데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고 처음부터 한인목사가 담임하여 성장한 교회가 있는데 그것이 안동교회요 한석진 목사이다.

도마스 목사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조선에서의 복음전파를 기원하였고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다. 그 때 그는 27세였으며 조선에서 서양개신교 선교사들이 정식으로 선교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된 것이다.

1887년 언더우드 목사는 서울에 조선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교회를 개척하면서 백홍준과 서상윤을 장로로 장립시켰다. 전 조선을 합쳐봐야 세례교인이 얼마 안되던시절 언더우드는 전조선을 하나의 교구로 보고 지금까지 복음전도에 큰 업적을 올린 두 사람을 장로로 세운것이다. 그래서 백홍준은 조선 최초의 장로가 되는 기록도 세웠다.

감리교의 매클레이 목사가1884년 6월 24일 선교가능성을 알아 보려고 조선에 입국하였다. 감리교의 선교사로는 물론 미국의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 조선땅을 밟은 것이다. 2개월 정도 조선에 체류하면서 당시 고위관직에 있던 일본에서 만난 개화파 김옥균을 통해 조선정부가 북감리교회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윤허하도록 고종황제에게 청원하여 승락을 받았다.

이수정이 일본에서 4년간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선교’를 호소하는 글들을 해외(일본과 미국)의 선교지들에 계재하여 특히 미국의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들이 다투어 조선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한국개신교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란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국이름 마포삼열(혹은 마삼열)로 더 잘 알려진 모펫(Samuel A. Maffett) 목사는 조선선교초기 미국 북장로교 교단에서 보낸 선교사로 한국 장로교회 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조선예수교 장로회가 배출한 첫번째 목사이며 선교사였던 이기풍 목사는 성공적으로 제주도에 복음을 전한 선구자였고 진정한 개심(改心)의 본을 보여준 순교자였다.

평신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와서 한국성령운동의 불씨를 지폈을뿐 아니라 조선 청년들을 교육하고 그들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하도록 격려하여 한국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이 초기의 카나다 선교사 로버트 하디(1865-1949)로 한국이름은 하리영(河鯉泳)이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초기에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어서 그들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초기 개신교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한국교회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인물로 길선주 목사를 꼽고 있다.

말콤 펜윅은 1889년, 약관 26세의 나이로 조선에 와서 한국 침례교회의 씨앗을 뿌린 초대 선교사이다. 그가 전성기에 개척한 교회는 250여개였고,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는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선교지가 지금은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북한땅이었기에 그의 이름마저 잊혀져가고 있다.

펜윅 선교사는 항상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한국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그런 노력의 하나로 한복을 즐겨 입고 다녔다. 그의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를 크게 쓰셨던 것이다.

성직자로 안수를 받지 않았지만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학문적 교양과 영어에 능통하고 외국의 교계지도자들과 교우관계가 넓었던 윤치호는 국제적인 모임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적격자로 한국교계의 대표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구한말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으로 그리고 ‘밀사'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잘 알려진 헐버트는 고종황제를 도왔을뿐 아니라 조선의 계몽을 위해 청년들을 교육하고 YMCA를 설립하는 한편 역사가요, 교육자요,저술가로 조선을 세계에 소개하고 한국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키워준 선교사였다.

이씨 조선의 왕손으로 마부꾼 엄영수(당시 선교사나 목사를 돕는 사람을 영수라 불렀다)의 전도로 왕족으로는 처음으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목사까지 된 이재형 목사

진정으로 조선을 사랑하였고 조선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한 민족을 위한 진정한 복음전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안수 받은 목사선교사가 아니면서도 누구보다 많은 일을 한 최초의 미 장로교 선교사 호라스 알렌((Horace Allen)

주로 만주를 무대로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보내다 조국의 해방을 보지못하고 만주벌판에서 세상을 떠났기에 특히 남한에서는 쉽게 잊혀져가고 있는 초대개신교 목사로 손정도 목사가 있다.

선교초기 미국선교사로 한국감리교회의 토대를 놓는데 큰 공헌을 하였지만 세월과 함께 잊혀져가는 선교사들 가운데 한민족의 미국이민역사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초기이민자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이민역사에서 잊지못할 고마운 선교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죤슨 목사

존스(George H. Jones) 목사가 하와이노동이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노력하던 때 그를 도와 제1차 이민선이 떠날 수 있도록 힘써 주고 자신이 직접 가족들과 함께 통역으로 제 2차 이민선에 올랐을 뿐 아니라 현지에서 이민자들의 어려움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더 이상 이민이 이루어지지 않던 후년에 가서도 하와이 지역에 찾아가 이민자들과 자손들의 영과 육을 돌보는 목사로 1940년 은퇴하기까지 진정으로 이민자들을 염려하고 돌보았던 한국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현순(玄楯, 1878-1968) 목사이다.

단지 기독신자로서, 목사로서 교회나 교단의 지원없이 순전히 선교적 사명을 가지고 성경 한 권을 가방에 챙겨 1896년 제물포 항에 도착하여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가장 어려웠던 시대에 일생을 조선사람들과 함께 한 일본인 목사가 있으니 그가 자비량 선교사였던 노리마쯔(한국명 승송) 목사이다.

오직 민족과 믿음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말과 행실이 진실하였던 조만식 장로는 한국이 낳은 훌륭한 지도자였으며, 믿음의 사표였다. ‘신앙을 승화하여 일생을 올곧게 산 민족의 등불이었다.

소가 가이치 전도사는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먼길을 찾아와 선교의 큰 업적을 남긴 조선개신교 초기의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조선에 와서 조선의 초기 개신교신도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 들이고 힘없고 불쌍한 조선의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 음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내었다.

20세기 초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으로 또한 발명가로서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한국에서 온 초기이민자, 유학생 그리고 사진결혼을 하고 온 여인들을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봉사하다 끝내 건강을 잃고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대위 목사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