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글쓰기 교실(CSULB, OLLI)/2021년 1월 1일>

 

<CSULB, OLLI 글쓰기 교실>

다시 사랑 할 수 있을까

김 정 숙

책장에서 한권의 책에 눈이 멎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얼마만에 해후인가. 한 동안 그의 문학 혼에 마음을 빼앗겼던 작가였는데, 십 수년을 잊고 살아왔다. 먼지를 털고누렇게 바랜 책을 어루만졌다. 유경환 에세이 1986년에 발표된 <아픔 끝이 사랑인 것을> 이라는 수필집이다. 뒤표지를 보았다. 작가가 흰 벽의 오른쪽 편에 팔장을 끼고 서있다. 안경너머로 왜 나를 외롭게 했지, 수심에 쌓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동안 긴세월의 간격이 있었고, 그 시간들이 커다란 상실의 시간으로 올줄은 몰랐다

캘리포니아 사막은 따가운 햇볕으로 갈증을 일으킨다. 그 목마름으로 타들어 갈때 나는 학군이 좋은 동네의 집을 팔았다. 아이들마저 떠나자 그집은 나에게도 필요가 없어졌다. 한인들이 선호하는 한인 타운에 오래된 큰 집을 샀다. 살면서 늘어난 살림살이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인타운은 활발했다. 한국음식점, 대형마켓과 교회가 몰려있고 각종 전시회와 음악회도 열리며 크고 작은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한국에서 유명인사가 방문하면 이곳에서 강연회가 열린다. 한국 사람과 음식 그리고 문화가 있는 곳이라 나성구라고도 불린다. 학군따라 멀리 떨어져 살던 이민자들은 아이들이 성장해서 떠나면 이곳 나 성구(남가주)로 모여든다. 친구 숙도 얼마전에 콘도를 사서 살고있었다.

친구가 가까이 있는것은 나에게 위안이었다. 돌아온 싱글과 남편 있는 싱글인 그녀와 손을 잡았다. 우리 둘은 각종 전시회,클래식 음악감상동호회, 교회 모임, 인간관계세미나, 법륜스님 집회,유럽여행 등을 함께 다녔다.

그녀 남편은 공부하고 책쓰는데 푹?빠진 사람이었다. 식사도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는 남자이었다. 친구와는 재혼한지 이년 남짓했지만, 그는 아내를 외롭게했다. 남편 P 미국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하고 유명 우유회사에 다녔다. 틈틈이 독서하면서 <식품 알고 먹어라> <종교와 신> 그리고 다시 새책을 쓰고 있었다. 그는 산타모니카 메인도서관의 철학 관련서적을 이 백 여 권 읽었다.

이사온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3주 정도를 그녀 집에서 지냈다. 일을 마치고 저녁에 모이면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의 관심사인 종교와 철학분야에 깊이 참여할순 없어도 질문을 하던지 그의 얘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었다. 그분은 신바람이나서 잠자리에 드는 시간도 잊어버리곤 했다.

한날은 책장에서 친구가 쓴 책이라며 나에게 수필집을 주었다. 저자와는 경복고교 동창이라 했다. 유경환작가는 고교때부터 시를 발표했고 첫 직장을 사상계사에서 시작했다하니 더욱 관심이 갔다. 받은책을 가지고 수리한 내 집으로 왔다.

수필은 자신의 얘기를 쓴 글이 많아 작가의 많은 삶을 엿볼수 있어서 가깝게 느껴진다. 그는 나처럼 황해도에서 태어났고 6.25 사변으로 가족이 월남했다. 기억도 별로 없는 내 고향에 대해서 많이 알 것 같아 마음이 바짝 다가갔었다. 그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둑한 저녁에 호롱불 킨 집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이었다.아들을 학교에 보내면서도 멀리 사라질 때까지 서서 지켜보던 그녀의 모습만 남아있단다.

그의 첫사랑은 초등학교 때 처녀 담임선생이었다. 한 날 그는 학생들 틈에서 주름치마를 입은 선생님의 손등을 몰래 꼬집었는데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때는 누나의 친구를 짝사랑했다. 그는 연상의 여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랑꾼이었다.사상계사에 처음 입사해서는 동료인 연상의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고 장준하선생 부인의 동생으로 그들은 동서지간의 연을 맺게되었다.

작가는 새 구두를 사는것을 좋아했고 헌것은 버리지 않았다. 15켤레의 구두가 신발장에 있었고 매일 갈아 신었다. 발에 생긴 무좀으로 고생하며 백약이 무효었다고 토로했다,

만년에 그는 경기도 부천으로 이사해서 전철을 이용하여 광화문의 조선일보사로 출퇴근을 했다. 역곡 역에서 내리면 시골 노점상 아낙들의 목소리로 북적거리는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사랑했다. 휴일에는 집 가까이 있는 뒷산에 올라 걸으며 숲속에 살고 있는 자연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글에는 오솔길, 여울, 징검다리, 논두렁, 포도밭,, 바람, 일몰, 작은 새, 풀꽃, 벌레 등이 소재가 된다. 그들과 매일 만나다 보니,도시에살며 술로 버린 십이지장궤양이 호전되었다고?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작은 것들이 아름답지하며 내 어깨를 툭치는 것 같다. 도시에서만 자란 나에겐 숲속의 푸르른 솔 향보다 시멘트바닥의 콜타르 냄새만 배어있었다.민초로 태어나고 그곳을 탈출하고 싶어 안달을 했었다. 거대담론과 넓고 높은 세상에 관심이 있어 남산위에서도 멀리 바닥에서 솟아오른 빌딩 숲만 바라보았었다.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민초, 힘 있는 자가 짓밟아도 소리 없는 민초,속으로만 울어야만 하는 민초는 관심에도 없었다.

그는 나를 옆에 끼고 앉아 그가 말을 거는 작은 풀꽃과 벌레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게 했다. 그들에게도 삶이 있어 꽃도 피우고 쪼그만 열매도 맺으며 산새 소리 듣는 자연의 세계. 그는 애정 어린 낮은 목소리로 그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풀꽃은 묵상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는 민초라 했다. 내가 무시하던 민초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그가 참 좋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풀꽃과 그들의 친구인 작은 벌레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그의 영혼에 반하고 말았다. 그의 글을 읽으며 건조하기만 하던 나의 영혼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지 않을 까하는 감성이 살아나게 했다.

그가 길어 올린 사유의 샘물은 깊은 산속 옹달샘처럼 나의 마음속에서 흘렀다. 좌절과 실망으로 어두워진 마음을 치유해 주는 생명력이기도 했었다.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이른 새벽별을 볼 수 있었고 숨어있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었다는 시인을 만나고 싶었다. 친구 숙과 함께라면 만남이 쉽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없이 살아오는동안 믿을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연인 같은 시인을 만나게해준 숙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책을 출판하고 그는 점차 치매현상이 나타났다.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를 떠나 헤매게 되었고, 경찰에 신고가 잦아졌다. 남편의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아내는 그를 양로원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탈출을 시도하고 거친 행동을하자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감금당했다. 갇혀서 사는 것에 절망했는지 그는세상을 떠났다.

P가 떠난후 다음해에는 내 친구 숙도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그녀는 통증이 없어 정상적으로 비즈니스도 계속하며 즐겁게 살았다. 떠나기 2주전에야자기생명이 길지 않음을 알려주었다. 따스한 겨울날 친구들 방문도 받던 숙은 잠자듯 가버렸다. 유경환 작가도 검색해보니 임파선암으로 투병하다가 71세로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력을 잃고도 마지막 병상에서 시를 지었다하니 문학은 그의 운명이었다.

왜 그들은 그렇게 급히 가버렸을까.

먼 산을 호젓이 바라보면/누군가 부르네/산너머 노을에 젖는/ 내 눈썹에 잊었던 목소린가/ 산 울림이 외로이 산 넘고/행여나 또 들릴 듯한 마음/아 아, 산울림이 내?마음 울리네/다가오던봉 우리 물러서고/산 그림자 슬며시 지나가네

<산 노을>은 고교 은사인 작곡가 박판길 선생에 의해 작곡되어 오래 사랑받는 가곡이 되었다. 작곡가는 나의 교고 은사이기도 하다.

<낙산사 가는 길> <노래로 가는?> <혼자 선 나무> <새가 그리는 시월> <시간의 빈터>등 시집과<길에서 주운 생각들> <새끼 손가락의 약속> <유경환의 기침소리> <나무의 영혼>등의 수필집을 냈었다. 유경환 작가는 그 후에도 수많은 작품을 남겼을 텐데, 찾아 나서야겠다.잊혔던 이 십 여년을 그의 향기로 채우고 싶다. 쪼끄만 보랏빛 색깔의 새가 되고 싶다던 그는 높이 날지는 못했을 것 같다.숲속 어딘가를 날며 풀꽃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좋겠다.작가는 친구P, 남편은 내 친구 숙도 데리고 간것 같다.

온종일 잿빛으로 하늘이 내려앉아있다. 난 꿈을 꾸고 있는 것일 거야.

10.25.2020

 

 


'비비안 메이어를 가슴에 안고

김 정 숙

수 년 전에 잊을 수 없는 영화 한편을 보았다. 그 영화는 요즈음 글을 쓰는 나에게 멘토로 서 무언의 말을 해 주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Finding Vivian Maier'(2013도 작품)이다.존 말루프(John Maloof )가 만들고 내레이터를 맡았다. 이 영화는 그해 오스카시상식에서 다큐멘터리 작품부분에 노미네이션 되었고 여러 곳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천재적 사진작가라고 평가되는 주인공 비비안의 행적에는 너무 기이해서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그녀는 사진을 촬영하는 행위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의 작품을 처음 발견한 존은 제작자로 변신 그녀의 인생을 찾아서 탐구의 길을 떠났다.

존은 부동산업자로 한 지역의 역사책을 발간하는데 자료를 얻고자 지역 옥션을 찾았다. 그리고 한 무명의 사진작가의 소유 트렁크 중 가장 큰 것 한 개를 380불에 사들였다(2007). 트렁크에는 현상하지 않은 필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몇 개를 현상했지만,자신이 쓰고 있는 책의 자료는 되지 않았다. 몇 달 후 본격적으로 필름 일부를 현상했다. 그 후 그는 옥션에 나왔던 그녀의 가방과 박스를 거의 사들였다. 그 안에는 15만 장의 사진이 있었고 그는 일부를 현상해서 200여 점을 SNS에 올렸다. 그의 예상대로 네트 진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고에 묻혀있던 한 인생의 골동품은 비로소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존은 사진작가가 궁금해졌다. 의문의 인물을 추적해 나가기로 했다. 가방과 상자의 물건들을 꺼내서 방안에 늘어놓았다. 그곳에는 그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물건이 담겨있었다. 필름, 비디오테이프, 신문 기사 스크랩, 녹음테이프, 사진기들, 구두, 옷가지,영수증, 메일,액세서리 등등이 나왔다.

그녀는 누구일까? 메일의 주소나 전화번호 그리고 영수증으로 그녀를 추적해 나갔다.존은 그녀와 관계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데 얼마간 성공했다.

영화는 그녀가 키웠던 아이들과 부모가 그녀를 회고하는 장면으로 이어간다. 그녀는 내니(Nanny)로서 아이들에게 다정다감하지는 않았으나 늘 사진기를 메고 그들을 자주 찍었다. 메리 팝핀스처럼 아이들을 잘 데리고 놀았던 내니였다. 그녀는 키가 컸고 걸음걸이가 팔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비비안은 1926년에 뉴욕에서 태어나서 2009년에 시카고에서 죽었다. 부모는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이주 하여 비비안을 낳았다.그러나 아버지는 건강한 생활인의 가장이 아니어서 집을 자주 떠났다. 그녀는 20대 전후에 시카고로 이주하여 내니로 살았으나 알려진 것이 없는 외톨이 인생이었다.

그녀의 삶에는 오직 사진 촬영이 전부였고, 그것에 집착했다. 휴일에는 시카고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의 풍경과 도시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녀가 살았던 1950년대 전후의 시카고의 사진이 대부분이다. 힘없는 사람들의 어두운 모습, 거리를 지나는 뚱뚱하거나 비쩍 마른 사람들. 앙상하게 굽은 다리로 서 있는 아이들의 다리만 강조한 사진, 공원 벤치에 누워 잠에 빠진 고단하고 지친 남자의 사진.쭈그리고 앉아있는 거지의 처절한 모습.그녀는 카메라를 든 자화상도 많이 남겼다.자신의 긴 그림자를 찍은 사진은 회화를 보는 것 같았다.한시대의 서민들의 모습들이 내가 살았던 60~70연대 서울의 모습과도 비슷했었다. 그곳에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많은 이야기가 살아있다. 몇 개 월동안 아시아의 몇 나라와 유럽으로 여행하며 그곳의 모습도 사진에 담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비디오에서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지 않은 사회를 언급하기도 했다.학력이나 재력,인맥이 없어 작품을 발표할 기회조차 없는 사회를 절망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200여 박스의 물건들을 창고를 세내서 보관했다.말년에 창고 세가 밀리자 회사는 그녀의 물건을 옥션에 내놓았다. 병석에 있던 작가는 그 후 양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사후에 자신이 전설적인 사진작가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전문가들은 그녀의 작품은 유머가 있고 작품성이 뛰어난 매력적인 것으로 비비안을 천재적 작가로 평가했다. 이제 Vivian의 작품은 세계 각국의 뮤지엄과 화랑을 돌며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다.

존은 영화에 성공을 거두며 매스컴에서도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는 비비안의 공식 왭싸이트를 운영하며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어려운 환경의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녀는 죽어서 자신의 꿈을 이루었다. 밀알 한 알이 떨어져 썩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히듯이 고통스럽던 그녀의 삶이 떠나자 비비안은 새롭게 태어났다. 좋아하는 일에 미쳐서 평생을 살았던 삶의 조각들은 자서전보다 더 사실적인 영상으로 남겼다.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면서 내 능력의 한계가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럽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 보다는 그림에 관심이 있었고 대학 때도 부전공처럼 그림을 그렸다. 미주로 이민을 오면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림은 멀어졌었다.컴퓨터가 일반화되면서 여행기를 쓰고 작은 책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즐거움에 푹 빠졌던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더 이상 여행기는 만들지 않는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늦깎이로 수필을 쓰며 고민 할 때 내 곁에는 비비안이 있게 되었다.

나는 너 보다 더 기초가 없었어. 왜 십 만장이 넘게 찍었겠어.매일 사진을 찍으며 혼자 연구하고 원하는 사진이 나오기까지 수없이 반복하며 찍었던 거야.순간의 포착을 위해서 거리를 헤매며 빛 과 사물의 변화도 꾸준히 관찰했어. 포기 하지 마. 계속 공부하고 사색하면서 쓰다보면 너의 내면 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힘이 있었다.

사진은 그녀의 삶이었고 생명이었다.그 삶을 소중히 여기며 죽는 날 까지 자기 작품을 간직하고 싶었던 그녀를 생각하면 눈가가 촉촉해진다. 비비안의 예술 혼을 조금이라고 받고 싶었다. 그녀는 평범했으나 끊임없는 탐구와 실습이 그녀를 비범하게 만들었다.비비안을 가슴에 담고 글을 쓰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녀처럼 가슴에서 흐르는 나만의 이야기를 쓰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처음에는 땡감 맛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농익은 연시가 될 수도 있다. 그녀는 행위에 푹 빠져서 결과나 평판을 생각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듯이 나도 다양한 이야기를 써 보는 거다.

영화 촬영을 할 때 많은 장면을 찍어 편집자에게 맡기듯이 후에 누군가는 그녀의 사진을 보고 편집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작가의 목소리로 작품세계를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듯이 그녀가 남긴 수많은 사진으로 말할 뿐이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글을 쓰는 것이다.

11.23.2020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