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글쓰기 교실(CSULB, OLLI)/2020년 9월 1일>

 

<CSULB, OLLI 글쓰기 교실>

 

서동성, 나의 남편

박 현 덕

대학 1학년 되던 해 가을, 친구와 같이 각 대학 학생들의 모임에 갔다가 대학 2학년생인 서동성씨를 만났다. 두 번을 만난 후 그는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나에게 주소를 물었고 그로부터 영어로 쓴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3년이 지나서 나도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오게 되었고 우리는 타주에 살면서 편지 연애는 6년 반 동안 계속하다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에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남편은 L.A. Times의 사진 기자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네바다에 있는 Salt Lake City에 큰 호텔 유흥지를 계획하면서 영국에서 London Bridge를 사다가 설치하고, 지금도 번성하고 있는 London Bridge Resort를 짖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기사를 남편이 썼는데 그 기사가 대대적인 홍보 효과를 보았다. 그 이후 대학에서 Communications 와 신문학 교수로 초청되어 십여 년 동안 후배 양성에 보람을 느끼며 안정된 삶을 살았다.

가족이 열심히 다니던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남편에게 우리 이민 일세들이 풍속이 다르고 언어가 부족하여 미국 사회에서 고생이 많으니 변호사가 되어 이들을 도울 것을 간곡히 권하셨다. 남편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5년 동안의 법학박사 과정을 마치고 변호사가 되었다. 그때 남편의 나이는 40이 넘었고, 막내가 2살이었다.

독립 운동가였던 서재필 박사의 증손인 남편은 개인적으로 장학 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장학생을 내고 있다. 변호사가 된 이래로 남편은 힘없고 무지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한인들을 위해서 또 한인 단체들이 정부의 혜택을 받고 성장할 수 있도록 비영리 단체 등록을 돕고 소망소사이어티 같은 자선 단체들의 고문 변호사로 무료 법률상담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LA한인사회의 30년 숙원사업인 미국 최초의 '한미박물관(Korean American National Museum)' 건립에 참여하여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한미 박물관을 비영리 단체로 등록하는 법적인 일을 도맡아 했고 한미 박물과 부이사장 또 평 이사로 3년 넘게 봉사해 왔다. 현 이사장 홍 명기 박사는 현재 총 건립비 3200만 달러 중 약 50%인 건립비 1500만 달러가 확보된 만큼, 대출과 기금모금을 통해 2020년 공사를 시작해 2022년 개관할 것이라고 한다.

우리 가족은 모두 UCLA를 졸업한 동문이다. 남편은 신문학, 나는 영문학 석사이다. 큰딸은 엄마 아빠가 졸업한 모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둘째 아들은 누나를 따라 UCLA에 갔고 막내는 형을 따라 UCLA 졸업생이 되었다. 자녀들은 캘리포니아와 한국에 뿔뿔히 흩어져 살지만 거의 매일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교환하고 있다. 가끔 한 번씩 모이면 모교의 스포츠 경기를 함께 응원하며 가족애를 나누는 가족 동문회가 되는데 이때마다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자긍심과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을 더 느끼게 된다.

이제 은퇴한 남편은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많이 쓰고 언어에 흥미가 많아 그 방면에 열정을 쏟고 있다. 좋아하는 골프를 치고, 음식 만들기를 좋아해서 기회가 생기는 대로 당신이 만든 음식을 벌려 놓고 자녀들과 손자들이 먹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한다.

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것은 계속 건강하여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은퇴생활을 즐겼으면 한다. 이렇게 좋은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드리며 나도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삶을 살 수 있기 원한다.

 

 

 


나의 어머니

박 현 덕

 

나에게 오월은 특별한 달이다.어머니날,어린이날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는 팔 남매를 두셨는데 나는 여섯째로 태어났다.

모유가 부족해서 유모를 구하실 때 어머니는 젖이 콸콸 잘 나오는 것이 먼저이지만 유모가 미련하면 아기가 미련해 질 것이 걱정되시어 똑똑하고 영리한 유모를 구하셨다고 한다.

나는 겨울에 온돌방이 뜨거우면 찬데,?찬데 하면서 찬바람이 들어오는 커튼 밑으로 들어가서 자곤 하여 감기가 떠날 날이 없어 어머니는 나를 안고 주무셨다고 한다.

유치원은 학교 가는 날보다 누워 있는 날이 더 많아서 일 년을 더 다녀야 했다.유치원을 낙제한 아이는 아마 이 세상에서 나 하나 뿐 일가 싶다.

유치원을 마칠 때까지 나는 골골하는 약한 아이어서 늘 어머니를 더욱 힘들게 해드렸다.

가을이 되면 동두천에 사시는 외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햇밤을 자루에 가득 담아 보내주시곤 했는데 어머니는 내가 그 밤을 먹다가 목에 걸릴 것 같아 당신이 씹어서 내입에 넣어 주시곤 하셨다.

새벽 여섯시면 인삼 녹용이 들어간 한약을 짜서 코를 붓 잡고 목을 위로 제친 후 약 한탕이 다 넘어 가도록 먹이시곤 했단다. 그 덕분에 나는 오늘 날까지 추위도 타지 않고 감기 드는 일도 없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으셔서 어린 나에게 가정교사를 늘 달려 주셨다.

내가 유학 온 후에는 보쌈김치 통조림을 만들어 보내주시기도 하셨다.

어머니의 김치, 빈대떡, 순대, 고기 포는 어디서고 그 맛을 보기가 어렵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늘 교훈을 하셨다.

형제 들 간에 우애하고,

남을 배려하고,

은혜는 반듯이 갚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남은 돈은 남을 도와주는데 쓰라는 것,

누가 나를 해치려 하면 맞서지 말고 자리를 뜨라는 것 등이다.

또한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말씀도 많이 하셨다.그중에는

밥알이 한 알 버려지면 밥알은 사흘을 운단다.

땅을 열 길을 파보아라. 일전이라도 나오나. 힘들여 일해서 살아야 한다.등이다.

 

내가 결혼 후,첫 아이를 해산했을 때 젊은 의사의 경험 부족으로 나는 심한 고통을 당했었다. 어머니가 이 사실을 아시고 하신 말씀은 지금도 생생하다. 절대로 앞길이 창창한 의사의 길을 해칠 일은 하면 안 된다. 지금 너에게 중요한 일은 네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만을 위해 전심을 다하라고 하셨다.

나는 지금도 힘든 일이 생길 때는 어머니를 꿈속에서 뵙곤 한다.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은 나는 어떤가?

어머니에게 받은 사랑의 만분의 일이라도 해드렸을까?

형편이 나아지면 굉장한 관광을 시켜드려야지.

선인장을 좋아하시니 조슈아 추리도 가고 파피 꽃이 만발한 랑케스터에도

모시고 가겠다고 벼르기만 하다가 막상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어머니는 노쇠하셔서 걸음도 못 걸으시게 되었다.

 

5월 어머니날,어머니를 생각하며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니 어머니께 못한 효도를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쏟아

부으리라.

어머니 불효를 용서하세요.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