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글쓰기 교실(CSULB, OLLI)/2020년 7월 15일>

 

<CSULB, OLLI 글쓰기 교실>

 

임헌영교수와 함께 떠난<독일 인문학 기행>

2011년 8월 7일부터 28일까지

김 정 숙

*지면관계로 1부와 2부로 나누어 계재합니다. 1부는 2부가 끝나는 아랫부분에계재되겠습니다.(편집자)

제2부 (7월 15일자에 계재됩니다)


6. 히틀러의 다카우 수용소

바이마르를 출발하여 4시간 정도 남쪽으로 달려 뉴렌베르크에 도착했다. 세계제2차대전을 일으켰던 히틀러일당을 처벌하던 전범재판소의 역사적인 장소이다.

문은 닫혀있었다. 그곳에서 독일의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를 안고 문헨으로 향했다.그곳 가까이 있는 다카우수용소를 참배하기 위해서다. 역사의 패륜아 히틀러의 잔악한 죄악상과 희생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일, 후대에게 남겨진 몫이기 때문이다.

다카우수용소는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강제수용하고 종족말살을 하던 장소들중, 독일 남부에 위치한 곳이다. 헐벋은 벌판을 들어서면 한옆에 박물관과 기록영화를 통해서 그때 그 현장을 보여준다.뼈들로 엉켜져 울부짖는 유대인의 대형 조각물이 막사를 향하여 서있다.

막사 몇 개만 남겨놓고 헐어버린 빈터로 걸어 들어갔다. 양쪽으로 들어서있던 도살을 기다리는 가축들의 집합소, 우리가 들어섰던 자리를 바라보며 걸었다. 굶주림과 공포에 떨던 영혼들이 포개져서 너부러진 모습이 보인다. 그 길을 통과해서 깊숙이 들어서면 한 허름한 창고같은 건물이 서있다. 굶긴 유태인들을 산채로 태운 화장터다.

유태인의 빨간 눈물방울이 튀어 물들어진 방들, 그 원한이 방바닥에, 벽에, 천장에,불구덩이에 짙게 남아있다. 살기로 덮힌 주위에 위령탑으로 세워진 몇개의 기도소가 있다.

방문자는 희생된 그들의 넋을 위로할 수 있게 하고있다. 죽은자는 말이 없으나 남은자는 몇 겁을 통해 속죄를해도 덜수 없는 멍에를 지게했다.

히틀러는 세계제1차대전의 패망과 세계대공황을 맞아 독일을 구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는 금융권을 잡고있던 유태인 말살계획을 세웠다.세계2차대전을 일으키고 1941년부터 점령지마다 유태인수용소를 짓기시작했다. 유럽에 산재되어있던 십 수개의 수용소들, 그중 독일과 인접한 폴란드점령지에 있는 아우스비치수용소를 우리는 대명사로 기억하고 있다.

4년간에 걸친 대학살, 1945년 연합군에 의해 독일패망으로 유태인학살 600만으로 막을 내렸다. 믿을수 없는 인류의 죄악상이 지성과 이성의 나라 독일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을수가 없다. 참을수가 없다.

그때 모든 독일인이 침묵한 것은 아님을 알고있다. 나는 한 청년 목사를 기억한다 . 히틀러암살단명단에 올라 옥에서 죽어간 본 훼포목사.

미친놈이 차를 인도로 몰고다면 끌어내야하지 않겠느냐,그를 비난하던 교회에게 남기고 간 그는 진정 예수님의 아들이었다. 전후세상은 달라졌다. 살아남은 생존자들,그들의 증언으로 수많은 감동적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로는 쉰들러즈리스트, 라이프이즈뷰티풀, 피아노등의 잊을수 없는 명화들을 기억한다. 문학작품으로는 엘리위젤의‘밤’을 잊지못한다.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600만이 죽어갈 때 살아계시다는 하나님은 왜 침묵했을까?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걸까.우리는이 물음을 물으며 살아가며, 해답을 찾는것도 우리의 몫이다.

최근에는 재일 동포인 서경석작가가 쓴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작품이 유난히 가슴에 남는다. 서경석작가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국적을 가진 재일교포다. 그는 박정희정권 때 일본에서 서승,서승석, 두 형이 서울대학으로 유학하였다. 그당시 유신체제반대 주모자로 몰려 감옥에 갖혔다.고문, 20여년옥살이,현해탄을 수차례 넘어 아들을 찾다 죽어간 부모님,그는 고통을 겪은 시대의 증언자로 여러작품을 남겼다.

그중 이탈리아 거주 유태인이였던 쁘리모 레비, 그는 어린나이에 히틀러에 의해 가족이 모두 수용소로 옮겨져서 죽는모습을 목격한 생존자였다.그는 살아남아서 지옥이었던 그때를 세상에 증언했다. 말년에 그는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 서경석작가는 그의 자살을 주목했다.

그의 고향을 찾았고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라는 작품을 썼다. 비교할 수 없지만 그 가족이겪은 악몽의 증언자로서 동변상련을 앓고있는것이 아닐까.

아우수비치의 생존자들의 자살. 그 고통을 지고 살아야했던 그들의 고통의 무게를 생각하게 한다.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살았던 우리민족, 그 상황을 극복하기위해 저항하다 감옥에서 고문당하며 죽어갔던 우리의 역사. 그래서 이 참상의 현장을 보고 갖는 그 고통도 남다르다.

약소민족의 서로움,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잔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는 것.시지프스신화에서 큰 돌덩이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던 시지프스를 기억한다. 살아남은자에게 주는 역사의 고문이기도 하다.

말틴루터, 괴테, 칸트, 쇼펜하우어, 니체, 헤세, 하이네, 헤겔, 피히테. 브레이브히트, 칼 마르크스...등등 독일이 인류사에 남긴 빛나는 정신적 유산들.

과대망상증환자에 의해 20여년 집권당하며 씻을수 없는 치욕을 남겼다는 독일을 믿을수 없다.펜은 휘둘리는 칼앞에는 쓰러진다. 그러나 영원히 죽지않는 승리자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오, 하나님!

7. 뮌헨,이미륵과 전혜린을 찾아서

뮌헨은 독일 남부에 위치하며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비교적 큰 도시에 속한다. 12세기부터 번성한 바이에른 왕국의 문화유산으로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가지고있다. 이곳은 생동감 넘치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사랑을 받는다.

뮌헨, 6.25동란이 끝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서울법대재학생이었던 전혜린이 유학을 갔다. 그는 그곳에 살면서 헬만헷세, 루에제린자등의 여러 작품을 번역하여 그당시 젊음의 우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특히‘압록강은 흐른다’를 처음 번역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독일에서 삶을 마감했던 이미륵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뮨헨은 우리에게는 그녀의 대명사처럼 존재하는 도시다. 그녀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소개되었던 슈바빙거리, 카페, 가스등, 자유, 청춘, 모험, 예술…….전혜린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곳, 그래서 아직도 뮌헨을 꿈꾸게하는 곳이다.

전혜린이 다닌 뮌헨대학 주위를 걸었다. 늦은 오전이었으나 더웠다. 도로변은 견고해 보이는 4-5층의 석조건물들과 깨끗한 거리가 인상적이었다. 슈바빙거리를 걸으며 그녀의 수필집에서 소개되었던 분위기를 찾으려 애썼으나 거리가 텅비어있었다. 그녀가 매일 지나다녔을 개선문에 서서 사진을 찍으며 잘못 온것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지나는 사람도 차량통행도 별로 없는 쓸쓸하기까지한 이었다. 화가들이 거리에 펼쳐놓은 미술작품도 없고 노천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도, 배회하는 청춘도 없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던 것을.

숲이 좋은 산책로를따라 공원을 걸었다. 그녀가 자주 걸으며 사색에 잠겼던 곳일것이다.아쉬운 마음이되어 언젠가 다시오면 이곳에 며칠 머물며 예술가들이 모여 펼치는 살아 숨쉬는 슈바빙거리를 담아가고 싶었다.

시청사가 있는 마리엔느 광장으로 옮겨갔다.상가에는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로북적였고 시장바닥 같았다.눈에 들어오는 구시청사는 고색찬란한 예술품의 건축물이었다.고풍 건축물의 시계탑을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12시에는 사람크기의 인형들이 돌아간다는 종탑이다.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뒤로하고 인파를 피해 주위의 상가를 돌았다. 노천카페 음식점은 점심시간을 즐기기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고도시의 상가들을 걷는 기분이 여유롭고 정겹다. 500여년의 전통을 자랑한다는 거대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미국 어느곳에서도 느낄수 없었던 전통의 향기가 진하게 풍겨주는 곳이다. 시원한 맥주와 생음악 연주를 들으며 돼지고기 스테이크로 점심을 먹었다.

전혜린은 낭만이 살아있는 이 거리를 사랑하고 즐겼을 것이다.

그레펠핑시로 가서‘이미륵의 묘’를 방문했다.주택가 한가운데에 공원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공동묘지었다. 독일의 고급주택가에는 반드시 공동묘지가 있다한다. 묘지는 자기집 꽃밭처럼 가꾸었다. 자주 방문하고 죽은자와 산자가 정다운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미륵의 묘(1899-1950)는 비교적 큰 검은대리석 비석에 비문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신 박사님께서는 1919년 삼일운동에 가담하시고 반일시위를 하다 일경에게 쫓겨서 1920년 독일에 오셨다. 그 후 30년 독일에 살면서 소설‘압록강은 흐른다.’등을 통해 동서문화의 교량 역할을 하셨다. -후략

이미륵(본명 이의경)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맹자, 중용 등을 읽었으며 소동파의 시를 줄줄 암송했던 천재였다 한다. 경성의전을 다니면서 항일운동에 가담, 일경을 피해 정착한 곳이다. 어린시절부터 독일을 진정 학문의 고향으로 선망했다 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도 받았고, 1946년에‘압록강은 흐른다.’자전적소설을 출판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1947년-1949년까지 뮌헨대학에서 한국어와 중국문학과 역사를 강의하면서 독일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의 소설은 독일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반 나치주의자였던 뮌헨대학 총장(후버)과는 절친한 친구였다한다.

전혜린이 뮌헨으로 유학한 것은 그가 죽은지 수년이 지난 후였지만 그의 명성은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녀는 그의 작품을 번역해서 한국사회에 알리는 큰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해방후에 한 번도 고향땅을 밟지 못하고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작고했다.고 이미륵박사는 1963년에 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장이 추서되었다.

한국이 낳은 두 천재의 삶의 흔적을 찾아 이곳 뮌헨을 방문한 것이다.

전혜린씨는 31살에 세상을 마감했고 이미륵박사는 56세의 길지않은 세월을 살고 갔다. 그들이 빨리 가버린 것이 섭섭하지만, 그들이 남긴 정신적 유산은 세월과 함께 살아있을 것이다.

그들의 영혼이 숨 쉬는 이곳 뮌헨은 우리민족에게 살아있는 도시인 것이다.

8. 튜빙겐에서 헤세를 만나다.그리고 훠덜린,쉐링,헤겔

튀빙겐은 슈튜트가르트 남쪽 40 km에 있으며 전통적인 교육도시이다.이곳에는마울브론수도원 기숙학교가 있었던 곳이다.12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16세기에 수도원기숙학교가 세워졌다. 수도원은 중세시대를 보여주는 고풍의 건축모습을 보전하여 유네스코에 등재된 유적지다.

헤세는 칼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했던 그는 라틴학교를 마치고 부모의 뜻대로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했다.헤르만헤세는 성직자수업을 받기위해 명문인 마울브론수도원 기숙학교를 14살에 입학했다.그러나 그는 수도원 기숙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의 자전적 소설‘수레바퀴아래서’에는 그의 학교생활의 갈등이 그려져있다.수도원의 성직자들은 위선에 가득찼고 인간적이지 않았다.입학 7개월만에 자살을 기도했고,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는 성직자의 길을 버리고 시계기술자로 일했다. 그후 책방에서 일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2년동안 일했다는 책방에도 들어가 보았다.작은서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의 길을 걸었다.

칼브에는 그의 생가박물관이 있다. 아담한 2층 목조건물로 그의 전생애의 모습을 볼수있다. 가족사진,그의서신들 그리고 그의 저서들이 전시되어있다.

내가 헤세를 처음 만난것은 1970년 즈음, 그의 소설 데미안을 통해서다. 그때의 내면의 충격은 폭탄을 맞은것 같았다.그의 분신 싱크레어처럼 나는 자아에 눈을 뜨고 인생을 탐구하며 살고싶어 졌었다. 그후 그의자전적 작품‘수레바퀴아래서'를 읽으며 그의 작가정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오염된 기독교에 반항했고 동양사상에 깊이 빠졌으며‘싯다르타’작품을 발표했다.그의 정신세계는 깊이있는 마지막작품‘유리알유희’를 남겼고, 그 작품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시인, 소설가, 화가로 인생을 풍요롭게 살다 갔다.

깊숙한 그의 내면세계가 엿보이는 헤세 조각상을 보면서 감회가 깊었다.

튜빙겐에서 아름다운 시인 훠덜린을 만났다.

그는 철학자 셀링과 헤겔의 친구였고 같은 학교에 다녔다.마울브론기숙사 학교에서 한방을 썼고 3총사로 유명했다. 쉘링과 훠덜린은 미남이었고 천재였다.셀링과 헤겔은 독일의 관념철학자가 되었고 훼덜린은 시인이되었다.

훼덜린은 가정교사를하며 아들의 어머니,주제테를 사랑했다.그녀와의 사랑을 시집으로 남겼다.그후 그는 젊은나이에 정신이상으로 외롭게 살있다. 어머니가 가까이 살았지만 한번도 방문하지 않았다한다. 정신이상자로 슬프게 살다간 아름다운 시인.그가 마지막까지 살았다는 네카강변의 노란집을 바라보며 그의 삶이 아쉬웠다.

시가 자연스레 흐름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웠던 곳이다.

9. 트리어에서 칼 마르크스를

트리어는 독일 서쪽 남부의 작은도시로 조용하고 아담한 도시였다. 3층정도의 주택가에서 칼 마르크스의 생가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방명록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한자로 쓴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중국인들에게 단연 인기가 있는 장소였다.박물관은 활기가 넘쳤고, 곳곳의 작은스크린에 그의 어록이 떠있다. 나도 마르크스사상에 매료되었던 시기가 있었기에 감회가 깊었다.

칼 마르크스는 1818년에 유태인 부모님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중 몇몇은 랍비였고 아버지도 동네 랍비였으나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는 부모의 뜻대로 본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해겔철학에 영향을 받은 그는 그당시 부르주아지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계급의 불균형에 관심을 갖는다.그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며 주목을 받는다.

그는 반체제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대상이었다.공산당선언을 발표하고 계급없는 사회를 위해서 투쟁한다.그의 사상을 펴기위해 자유의 도시 파리로가서 활동했다. 서클에서 부유한 엥겔스를 만나며 친구가 된다. 그는 감시의 대상으로 독일에서 추방된다.

영국으로 망명, 대영박문관 도서실에서 일하며 혁명사상을 발표한다.부모로부터 큰액수의 유산을 받지만 혁명사업에 바치고 빈곤한생활을 한다. 부인이 그의 활동을 도왔지만 자식들을 병으로 잃고 거처할곳도 없이 떠돌게 되었다.말년에는 친구 엥겔스의 도움으로 겨우 생활을 이어갔다.

지구상의 악질적 문제였던 지주계급과 노동자계급사회.계급사회가 없는지구상의 이상국가를 실현하고자했던 혁명적사상은 인류의 자산이다. 그의 사상은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지구상에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상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내가 칼 마르크스에게 심취한 계기가 있었다. 미국으로 이민온후 LA의 한인타운에는 역사철학을 공부하는 모임이 있었다.서양철학을 주로 공부했지만 동양철학도 가끔 다루었다.

근대철학은 주로 독일의 관념철학을 공부했다. 기초가 없이 강의를 듣는것은 힘들었으나 칼 마르크스 철학은 어렵지 않았고 감동이었다. 지주계급의 횡포로 노동자계급이 착취당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도 고질병였기 때문이다.

수 십년이 지나서 공산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의 경제가 차이를 보였다.공산주의국가는 빈민에 허덕이며 독재자에 의해 자유가 억압받는 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20세기 말에 소비에트유니온이 해체되고 동독은 서독과 통일을 이루었다.

프라하의 봄을 투쟁했던 채코도 민주주의국가로 전환되었다.공산주의의 이상국가는 지구상에서 실현불가능한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능력으로 실현할 수가 없는것이 슬펐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빈부의 격차를 좁힐 수 없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수정해 나가고있다. 독일은 비교적 복지국가를 위해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있다.

마르크스와 같은 인류복지를위해 생을 바쳤던 위인의 고향을 방문하여 그를 만나는 것은 감격스럽다. 그의 뜻대로 국민의 복지를위해 주력하는 독일이 자랑스럽다.

에필로그

독일 인문학기행을 마치고

동행했던 권성우교수는 LA에서‘문학과 인간’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문학은 인간학이라 정의했습니다. 복잡하고 모순된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문학의 영역이라는 얘기다.

인류에 선명한 색깔의 빛을 남긴 독일 영혼들을 찾아나선 탐구의 여정.

독일을 만들었던 토양과 햇빛과 강과 바람과 공기와 그리고 그들이 걷고 사색했던 그땅은 기름졌다.

지구의 옆길을 장시간 날아가 머문 열흘간.

다양한 쏘시지, 백포도주 그리고 시커먼 흑포도주가 잔에 넘칠 때 독일이라는 얼굴도 함께 마셨다.

빨강 태양과 타는 갈증, 자두 복숭아, 아이스크림을 공급받고 독일을 촘촘히 발로 밟으며 걸물들이 태어나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집필하였던 곳. 그들의 작가정신을 빨아들이려 혼신을 다했던 시간들이었다.

독일안에 흩어져 살고있는 재독교포들을 초대하여 만남의 자리도 있었고 그들의 삶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맥주의 나라에서 점심과 저녁에 물을 마시듯 마신 독일맥주 맛, 독일소세지, 그들의 산천, 공기, 바람등 일기를 쓰듯이 독일을 그려보았다.

독일이 인류사에 남긴 그들의 업적과 과오 모두를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로 삼는다.

국화.정숙


임헌영교수와 함께 떠난<독일 인문학 기행 1부 >

2011년 8월 7일부터 28일까지

김 정 숙

제 1 부 2020년 7월 1일 계졔

프롤로그

<월간한국산문> ,<계간문예>, <계간문학과 의식>, <세계한인작가연합>이 공동주관하는 기획된 인문학 기행이었다.

일정은 베를린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문헨에서 다시 서북쪽으로 올라가서 푸랑크푸르트까지다.

베를린장벽을 베를린에서,

포츠담선언의장소 ,포츠담,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된 라이프치히의 성 니콜라이교회,

바흐가 활동한 성토마스교회.

괴테가 활동한 바이마르,

전범재판소의 뉴렌베르크,

전혜린과 이미륵의 뮌헨,

히틀러의 다카우수용소,

실러의 고향 마르바흐,

헤세, 흴더린, 헤겔, 셀링, 케프러의 흔적을 찾아 튀빙겐으로

헬만 헤세의 고향 칼브, 헤겔의 고향 슈트트가르트,성 하이델베르크 독일대학의 도시,하이델베르크,

독일안에 작은 로마인도시, 칼 마르크스의 고향 트리어, 하인리히 하이네의 고향 뒤셀도르프,베토벤의 생가 본,라인강변을 따라 전설의 고향 로렐라이 언덕,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무대인 베츨라르, 괴테의 생가 프랑크 푸르트 등 19개의 도시를 도는 대 장정이었다.

임헌영 교수(문학평론가)가 프로그램을 준비 실행하였다.

강만길교수(국사학의 권위자), 권성우교수(문학평론가), 최순택 원광대교수,백시종소설가 등이 함께 동행 했다

특히 최순택교수는 독일유학을 하고 15년을 산 곳이지만 이번 일정을 함께 했다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노력했고 전쟁없이 민족통일을 이룬 독일을 방문하여‘독일은 누구인가’를 배우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었다.독일역사를 공부하며 우리 인류문화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들을 찾아서 그들의 숨결과 행적 그리고 그들이 준 시대정신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기회이었었다.

  1. 자유의 도시 베를린에서

독일하면 우리는 베를린을 먼저 떠올리며 친숙함을 느낀다.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모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민족의 슬프고 부끄러운 역사,‘동백림 간첩사건’도 함께 떠올리게 된다.

반공을 국시로 삼던 박정희 정권은 1967년 독일간첩단이라 하여 재독 유학생과 재독인을 대거 소환하여 한국법정에 세웠다.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형을 살았고, 이응로 화백, 피아니스트 백건우, 윤정희부부의 이름이 거론되며 몇년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을 잊지못한다.

무엇보다 세기적사건인 1990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져 내리고 통일독일이 탄생하게 된 감격이다. 세계2차대전후 분단국가였던 독일이 전쟁 없이 민족통일을 이룬 역사의 현장. 우리 한민족에게도 통일의 꿈을 주던 도시 베를린이다.

독일통일을 이룬 독일인,그들은 누구일까.

제2차대전 패망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국토가 분단되었다. 동독 영토안에 있던수도 베를린도 동서로 나뉜것이다.해가 갈수록 동베를린 사람들이 자유롭게 잘 사는서 베를린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그것을 막기위해 동독에서는 서 베를린 주위 155km에 장벽을 쌓기 시작했다.동독안에 있는 서 베를린은 고립된 작은섬이 되었다.그 장벽이 무너져내린 현장,그곳에 도착한것이다.

가슴이 뛰었다.버스는 한 광장에 멎었다.

길건너에 색채디자인으로 화려한 담장이 시야에 담겨왔다.이것이 베를린 장벽이라니, , 믿기지 않았다.비원이나 덕수궁 담장같이 정답다. 삼팔선처럼 잡초가 우거지고 몇 겹의 철조망과 지뢰밭이 있는 살벌한 담이 아니란 말이다.

수 천년 역사를 가진 동족이 어느날 강대국 지배하에 두 동강이 나고 원수가 된 한반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이념,그 이념도 인간이 존엄성을가지고 이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나의 실현이 아닌가?

공산주의가 무너지므로 냉전의 대결상태가 사라진 지금도 한반도는 체제유지를 위해동족에게 살기를 보이고 있다. 국민은 굶어죽는데 체제의 허깨비를 붙들고 있는 북한.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다.

베를린 장벽 수 백 미터나 될까.

그 벽에는 화가들에 의해 그린 그림으로 현대적 회화 전시장이 되었다. 우리의 삼팔선도 흉물스런 철망을 걷어내고 이처럼 공원이 되는 날은 언제일까.예술가들의 작품전시장으로,휴식처로,공연장으로.관광명소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버스는 분단되었던 베를린의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통독후 동독지역에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섰다고 한다.동 베를린거리와 서 베를린의 차이는 아직도 느껴졌다.두 체제가 가진 문화와 경제의 차이일 것이다. 독일통일의 상징 부란덴 부르크 게이트.이 문을 통과하면 구 동독지역이었다. 통일전에는 우리나라의 판문점같은 곳이였으나 이제는 누구나 자유롭게 문을 통과한다.그 광장은 관광지로 우리를 맞는다. 보리수 가로수를 따라 현대적 유리돔이 보이는 위풍당당한 연방의사당을 지났다.

일행은 피히테와 헤겔이 교수로 있던 베를린대학(훔벌트대학)으로 향했다.근대대학의 효시가 된 베를린대학은 1810년 프리데릭 빌레름 3세때 훔벌트에 의해 세워졌다.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노벨상 수상자와 쇼펜하우어,헤겔, 피히테등 철학자와 엥겔스,마르크스등 많은 학자들이 졸업했거나 교수로 있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독일,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침략당했을 때 피히테는 베를린 학사원 강당에서‘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명연설로 국민의 결합을 구했다.

우리는 한동안 그곳에 머물며 독일의 통일도 베를린대학의 전통과 권위에 무관하지않음을 절감했다. 올림픽경기장에서 손기정선수와 남성용선수의 흔적을 보았고 전망대에도 올라 베를린시내를 내려다보았다.보불전쟁의 전승기념탑이 솟아있고 반듯한 현대식건물과 푸른숲이 넉넉하다.

수도 베를린은 세계제2차대전을 치루며 도시의 80%가 파괴되었다 한다. 그러나 역사적인 건물은 모두 재건되었다. 최근 구동독지역의 개발이 활발하여 구서독의 거리의 모습처럼 상권이 살아나고 있다한다. 베를린. 인구 350만이 자유롭게 살고있는 대도시이다. 단 28년후 통독이 된지도 2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많은 구동독인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익숙하지 않아 힘들어하며, 또 구 서독인들도 엄청난 통일비용의 충당으로 국민소득이 낮아졌다한다.

민족통일은 이루었지만 아직도 통일의 후유증은 가시지 않았다.한반도 분단 60년,통일을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도 수십년이 걸릴터인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포츠담 선언,포츠담을 찾아서

포츠담은 독일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부란덴베르크주의 주도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상수시 궁전과 체칠리엔호프 궁전이 있다.체칠리엔 호프 궁전은 포츠담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세계제2차대전후 전승연합군의 수뇌들이 패망한 독일의 국토분할문제를 논의하던 장소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권고와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에 대한 처리문제가 논의되었고, 합의내용은 "포츠담선언"으로 공포되었다.일본은 미국의 원폭투하를 맞고서야 무조건 항복 거부하던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

일제치하 36년의 고통에서 해방을 가져다준 포츠담선언, 그러나 우리민족은 6.25동란으로 동족이 총을 겨누었고,삼팔선으로 못을쳤다.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한반도, 무엇이 문제일까.역사의 현장에서 깊게 생각해 보고 싶은것이다.

베를린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포츠담으로 가고 있다. 버스가 도시를 벋어나 숲이 우거진 산책로같은 일방통행로로 들어섰다. 남쪽 알프스 산자락을 제외하곤 산이별로 없는 평지에 한적한 숲길이 나타났다.나무들은 곧게 뻗어나 하늘을 만나고 있었다.

얼마간을 달려도 같은 풍경의 숲으로 가슴을 짙푸르게 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곳 같은 온전한 숲길,마음에 산소부족증을 느낄때, 숲의 깊은 소리를 담아 올 수 있는곳이다. 상업적인 건축물도 별장도 없어 자본주의 냄새가 나지 않는곳이다.

몇시간은 달릴 수 있게 만든 길인것 같다.독일인의 발견이다. 30여분쯤 달려왔을까,숲길의 영상을 간직한채 체칠리엔 호프 궁전에 도착했다.궁전 입구에는 마지막왕인빌혤륨2세와 체칠리왕비의 사진이 걸려있다.제왕의 모습보다 귀족시인같은 미남이다.그는 세계1차대전의 패망으로 네델란드에 머물다 죽었다한다.

히틀러가 1933년 집권하면서 이곳을 집무실로도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서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나 순종과 같은 운명이지 않았을까.

아담한 궁전, 이곳이 포츠담회담이 열린 역사적인 장소인 것이다. 미,영,소의 정상들이 모였던 장소. 여러개의 방을 지나며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처칠, 미국의 투루만대통령들이 집무실을 차려놓고 머리싸움을 하던 그 공기를 느꼈다. 회담장이었다는 작은방에는 지금도 붉은색 테이블보가 깔린 원탁테이블이 놓여있었다. 그위에 꽂혀있는 세나라 국기들. 그정상들이 앉았을 붉은색 의자는 지금은 비어있지만,역사는 지금도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동행한 한국역사학의 권위자 강만길교수의 한반도 분단의 현대사를 들을 수 있었다.팔순을 바라보지만 그의 목소리는 청년이었다. 일제강점기 상해에 임시정부를 세워독립운동을하던 김구선생과 왜소한 광복군.해방후 그의 임시정부는 정부수립에 힘이되지못했다는 우리의 아픈 역사.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의 주장을 설득할 힘도 없던민족, 해방직후 정권투쟁의 혼난 속에서도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국토 통일을 강렬히원했던 한민족.

무력만이 민족통일의 길로 생각하고 6.25전쟁을 일으켰다. 우리역사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아직도 진행형이다. 중국은 지정학상 요지인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않는다. 그래서 아사직전인 북한을 쓰러지지 않게 받히고 있다는 것이다.민족통일에앞서 문화교류로 문화통일을 먼저 이룰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베루사이유 궁전을 본따서 지었다는 프로이센왕국 프레드릭왕의 화려한 여름궁전. 그 아래로 펼쳐지는 계단식 정원과 시원한 분수. 왕실의 권위와 부와 힘의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궁전과 정원을 거닐면서도 나의 가슴은 공허하기만 했다.

포츠담을 뒤로하고 베를린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 무겁다. 포츠담선언으로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던 순간도 잠간 동족상잔의 육이오 동란으로 분단된 조국, 수백만의사상자와 잿더미가 된 서울.이뿐인가? 수백만의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든 역사의 비극.그 아픔을 갖고 살아야했던 주인공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때를 희미하게 기억하는 세대만이 남아있게 되었다.그들도 가면 아픔도 원망도 희망도 스러져 갈 것인가.그러나 죽은자는 죽어서도 말하게하라.

3. 라이프치히/독일 통일의 불씨가 된 곳

라이프치히는 작센주에 있는 비교적 큰 도시에 속한다. 12세기부터 교역이 활발하여 도시로 발달한 곳이다. 1408년에 설립한 라이프치히대학과 바흐가 봉사한 성토마스교회,그리고 독일통일의 초석이 되었던 니콜라이 교회를 만날수 있다.

구 동독지역으로서 독일 중동부에 있는 상업도시다.라이프치히 중심가로 들어섰다.

도로가 좁았고 촘촘하게 들어선 5층 정도의 건물들, 구도시의 모습이 정겹다.복잡한 도시중심지에 서있는 라이프치히대학. 지금은 도로변으로 현대식 고층건물로 확장되어 시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괴테,니체,바그너,슈만등의 거장을 배출한 대학.동독시대에는 칼 마르크스대학으로개명해서 불렸다한다.600년의 역사와 전통의 라이프치히대학.독일은 교육으로 세운 나라임을 말해주고 있지않은가.

바흐가 죽기까지 27년간 성가대지휘자로 매주 작곡한 작품을 연주했다는 성토마스교회. 2000년 7월 28일 바흐몰후25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 수리를했다 한다.넓은 성전안에 그의 묘소도 옮겨놓았다.새로 설치한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에 눈이 멈춘다.건반을 누비던 바흐의 커다란 손,

토카타와 푸가....의 웅장한 선율이 가슴에 진동하는 듯 했다. 그 울림은 교회를 나서면서도 길게 따라 나왔다. 바흐의 동상 앞에 섰다.그의 뒤를 이은 모짤트,베토벤,리스트,멘델스존,슈만 그리고 바그너의 얼굴도 함께 다가왔다.

오늘 방문의 관심은 성니콜라이교회에 있었다.라이프치히대학 가까이에 있는 1165년에 세워진 교회.동서유럽과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2개의 주요한 통상로의 교차점에 건설, 전 세계에서 오는 보행자들에게 개방되었고, 그 당시 상인들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한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이후 개혁교회로 예배를 보았다.

바흐가 한때 성가대지휘를 했던때가 절정기를 이루었고 그의 주요한 작품들이 초연되었다한다.구동독시대인 1980년대초 매년 11월에 평화를 위한 집회가 시작되었으며 10일간 젊은이들이 기도를 하기위해 모였다한다. 그 후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평화의 기도회’가 젊은사람들 중심으로 열렸다.

환경오염,빈부격차를 위해 모이던 기도회는 점차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과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서독에서는 해마다 군비확장에 반대하는 큰 데모가 열렸고 니콜라이교회에서는 독일통일을위해 기도하며 동독비밀경찰에 감시를 받기시작했다.점차 불법모임으로 인정, 경찰들에게 포위되기까지 했다.

1989년 10월9일에는 기도회를 끝마친 2000여명의 군중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일통일을 외쳤다. 그들은 비폭력으로 저항했고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성 니콜라이교회가 쏟아낸 폭발력. 그것은 독일의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던것이다.니콜라이 교회의 역사와 행적을 더듬으면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우선 니콜라이 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개혁교회였다는 점이다.면죄부를 팔던교회,일반교인은 라틴어성경을 읽을 수 없었던 교회, 그 제도와 권위의 교회를 버렸다.그리고 일반 신도중심의 교회가되어 사회참여에도 기여했다.

한국개신교 역사 100년으로 대한민국의 밤하늘은 빨간불빛의 수많은 탑들로 장식하고있다. 왜 그들은 중세교회의 수준을 아직도 벋어나지 못하고 있나. 기복신앙의 중심에서 언제까지 하나님을 상품으로 팔것인가.교회의 개혁을 두려워하는 목회자들.교회의 사회참여를 금기로 몰아붙이는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라이프치히! 루터의 종교개혁 450 주년,1989년10월7일 동독의 건국 40주년기념의 날,운명의 날인 독일통일의 기폭제, 10월 9일.개혁을 실현한 라이프치히사람들.

라이프치히대학이 위대한 작가 철학자 음악가를 배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들의 정신은 체제의 대결속에서도 독일민족통일도 가능하게 한 저력이리라.

4. 니체의 고향 뢰겐으로

‘신은 죽었다’고 선포해서 유럽문명의 몰락을 예고했던 철학자 니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등 우리에게 친근한 저서를 통해 그는 인류에게 큰 선물을 남겨주었다.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과 포스트모던니즘의 기초를 세웠던 그의 삶과 철학을 생각하며 그가 태어난 고향을 찾았다.

니체의 성장과정과 철학적 배경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이번 독일여행을통 해 특별한 기회였다. 니체가 간지 100여년, 그가 죽인 신은 영원히 눈을 감았을까. 라이프치히를 떠나 30여분만에 그가 태어난 도시 뢰켄에 도착했다.인가도 별로 없는한가한 들판을 바라보며 아담한 교회당 앞에 섰다. 30-40여명정도가 예배를 보았던곳 같은 소박한 곳이다. 아버지는 이 작은 교회의 목사였고 니체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키가 크고 우람한 남자가 우리일행을 안내했다. 이교회의 담임목사로 니체가족이 살던 교회부속건물에 살고 있었다.교회마당을 들어서면 사람크기의 흰석고상 3개가 우리를 맞는다. 자그마한 키에 단정미가 스며나는 정장의 여인과 믿음직해 보이는 남자상이 서있다.

부부처럼 보이나 어머니와 아들,니체였다. 못 볼것을 훔쳐보듯한 조각상이 다시 눈길을 잡았다.벌거숭이 남자가 모자로 남성의 심벌을 가리고 서있는 모습이다.한곳만을 응시하는 것같은 뻥 뚫린 눈이 들어오자 더위로 땀을 흘리던 목 줄기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부실해 보이는 그의 하체를 스치는 바람도 쓸쓸했다. 큰 머리에 눈동자만 남은 얼굴은 수염이 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못생긴 얼굴을 가리고 싶었기 때문이란다.두통에 시달리다 말년에는 정신착란 증상으로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이 이제는 하얀천사가 되어 서있다.교회건물 벽쪽에는 니체의 가족묘지가 안장되어 있었다.부모님,누이동생 엘리자벧과 니체의 3개의 묘가 나란히 자리했다.

마구간이나 창고로 쓰던곳을 개조했다는 니체의 기념관 어린 니체의 모습과 가족사진들을 보며 총명한 니체를 떠올렸다. 5살때 사랑하던 아버지가 뇌를 다쳐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고 또 동생이 죽어가는 꿈을 꾼 후 동생의 죽음을 보았던 니체,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에 침묵했을 그의 사랑하는 하느님.어린 니체가 받았을 상처를 들은후에 그의 철학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으리라.

그 후 니체가족은 교회를 떠나 할머니 집으로 이사를 했고 많은 여자식구들 틈에서성장했다. 14살에 50편의 시를 썼고 작곡에도 재능을 발휘했다.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일기에서 기독교에 대한 흔들림이 보이기 시작했다한다. 그의 인생에 영향을 준것은 한 책의 조우와 한 사람과의 조우였다 한다. 쇼펜하우워의‘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와 음악가 바그너였다.

24세살에 바젤대학에서 최연소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던 천재. 십년후 그는 지병으로 교수직을 사임,요양을 위해 여행을 했다.그리고 집필에 열중했다. 그는 운명의 연인을 만나 사랑의 열병을 앓게된다.지적감수성과 미모로 남성을 사로잡았던 여인,루살로메였다. 결혼을 원했던 니체는 루살로메의 사랑을 얻는데 실패한다.

[……아 내가 어떻게 영원을 갈망하지 않을 수 있단말인가. 반지중에 반지인 결혼반지

회귀의 둥근고리를 갈망하지 않을수 있단말인가! 나는 단 한번도 내 아이를 낳고싶은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자를 제외하고는 그대를 사랑하기때문이다. 아 영원이여!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 ‘자라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중‘일곱개의 봉인’이라는 서사시는 후렴처럼 일곱번 반복하여 이 노래를 부르며 맺는다-

루살로메에게 보낸 그의 연애편지는 세계문학사에 남는 명문장이라 전한다.누이동생 엘리자벧은 루살로메를 질투할만큼 니체를 사랑했다.그녀는 정신병을 앓는 그를 바이마르로 옮겨왔고, 1900년, 56세에 니체의 임종을 지켰다. 그의 저서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니체도서관을 만들었다.니체가 죽은후 그는 누이동생,엘리자벧을통해 왜곡되어 발표되었다고 한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꼬마 니체가 눈을 꼭 감고 하나님과 속삭이던 모습이 보인다

목사에게 물었다.

신을 믿지않았던 니체를 어떻게 이 교회가 기억하고 기념할수가 있는가.목사의 대답은‘기독교는 니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라고 했다. 교회의 절대 신성안에서 기독교적 도덕에 잡혀 있었던 시대에 도전장을 내었던 니체. 세계제2차대전후 기독교에 의해서 니체는 서서히 부활된다. 니체가 부정했던 기독교는 풍자화된 허구에 대한 공격이었지 결코 기독교의 참된 역사적 형식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는 지적이다.상실한 기독교적 교리의 참된 핵심을 상기시키고자 했던 기독교의 자각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존의 진리를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자 도전했던 한시대의 유럽정신의 풍운아 니체. 20세기의 유럽의 정신은 신에게 내려와서 인간실존의 문제를 중요시하게되었다.지금은 유럽의 거대한 교회들은 박물관으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인 신은 그 모습 그대로 한국으로 옮겨와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본다. 신은 영원히 죽을수가 없다.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앞으로도 지구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니체가 어머니와 오랜기간 살았던 나움부르크에 니체박물관이 있다하나 이번에는 방문하지는 못했다.니체의 영혼이 잠든 뢰켄은 평안했고 그의 초인이 살 수 있는곳이였다.

5. 바이마르/괴테와 실러를 찾아서

바이마르는 독일의 중부지방으로 구동독 지역이다.도시형성이 9세기부터 이루어져18세기에 독일의 고전주의문화를 꽃피우며 유럽문화의중심지가 되었다.

괴테가 살며 쉴러와 우정이 싹튼곳으로도 유명하다. 괴테국립박물관,괴테의 여름전원주택,괴테와 쉴러의 묘지, 쉴러의 생가등을 만날수 있다.조식후 괴테가 교수로 있던 예나를 출발 30여분 후, 괴테의 도시 바이마르에 도착했다.

도시의 중심부 독일국립극장앞에 섰다.괴테와 쉴러의 청동기념비가 우뚝 서서 우리의 방문을 반긴다.괴테는 월계관을 들고 쉴러는 두루마리 작품을 들고 서있는 당당한 모습. 그들은 바이마르와 고전문화의 상징으로 전 세계의 방문객을 맞이한다.

바이마르의 듀크 아우그스틴공은 괴테에 빠져있었다. 26세의 괴테는 7살 연하인 왕의 남자가 되어 바이마르로 오게되었다. 그는 바이마르를 문화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다. 유명한 화가였던 루카스도 이곳으로 불러들였고, 요한 세바스쳔 바흐도 초청 궁정 올갠니스트로 활약하게 했다. 바흐는 그 후 라이프치히로 옮겼지만 그의 자손들이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로 활약했다.

바이마르는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당대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왕이 하사한 집에 살았던 괴테의 집은 국립박물관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그의 프랑크 푸르트 생가에 못지않은 궁전같은 호화로운 집에는 6500권의 장서가 전시되어있다.이집에서 16세 연하인 크리스티안 불푸스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이집에서 살았다 공원을 걷다 만나 사랑에 빠졌고 600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한다.

괴테는 듀크 아우크스틴, 아들도 아내도 먼저 보내고 83세에 이집에서 죽었다.

왕이 하사했다는 여름 전원주택. 집은 별로 크지않았지만 숲이 좋은 산책로가 있는아름다운곳 이였다.살롯 스타인부인과 자주 만나 연애를 하던 곳이다.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낳았던 첫사랑 살 롯테, 스타인 부인은 결혼하여 7남매를 낳은부인이다.

그는 그녀와 10여년동안 1600여 통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연정을 나누었다. 어느날 괴테는 이태리로 떠났고 돌아와서는 크리스티안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배반당한 스타인부인은 그동안의 자기의 편지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한다. 슈타인부인은,괴테의 안식처였던 그녀를 무덤에서 만나보았다.

괴테에게는 사랑하는 친구가 있었다. 가난하게 어린시절을 보낸 실러, 그는 시를 썼고 희곡을 썼다. 10년이나 연하였지만 괴테는 그를 사랑했고 예나교수로 임명했다.괴테는 그와 함께 희곡을쓰고 그의 작품을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한다.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빌헬름텔’로 유명하다. 그의 시‘환희의 송가’는 베토벤 9번교향곡의 합창곡으로 공연되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실러를 그리워하며 괴테는 그가 실러의 옆에 묻히기를 원했다한다. 궁중묘소안에 나란히 누워 있는 쉴러와 괴테.생전에 수많은 여성편력에도 괴테의 남자는 실러이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타운홀 광장을 걸으며 잡상인들이 늘어놓은 물건들도 구경했다. 그곳에는 그가 묵었다는 엘레판트 호텔입구에도 서서 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20세기에 들어 프로이센 왕국이 망하고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이 들어섰다.처음으로 민주헌법, 바이마르 헌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히틀러가 집권하므로 바이마르는 역사의 도시가 되었다.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바이마르.젊은 베르테르의슬픔과 파우스트로 우리의 젊은시절을 매료시켰던 괴테. 독일의 섹스피어인 괴테의 행적은 독일 여러곳에서 만날수 있다.

한 청년, 예루살렘의 실연으로 권총 자살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티브가 되었다하여 그집은 기념관으로 만들어 놓았다.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고 베츨라아에서 살롯테을 만나 사랑을 했고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그리고 바이마르에서 활동하다가 죽었다.

바이마르에는 독일인의 영원히 살아있는 전설, 괴테가 있다.


제2부의 목차들 (7월 15일자에 계재됩니다)


6. 히틀러의 다카우 수용소

7. 뮌헨,이미륵과 전혜린을 찾아서

8. 튜빙겐에서 헤세를 만나다.

9. 트리어 에서 칼 마르크스를

에필로그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