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글쓰기 교실(CSULB, OLLI)/2019년 11월 15일>

 

<CSULB, OLLI 글쓰기 교실>

 

“38선을 넘었다.” (잊지 못할 일)

박 현 주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이 되니 모두 살아났다고 야단들이었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38선이 생기고 북쪽은 공산주의 정권,남한은 민주주의 나라가 되었다. 북쪽에 살던 우리는 경애하는 김일성 장군을 신으로 모시며 경애하는 김일성 장군 노래를 매일 불렀다. 내 이름이 경애여서 남학생들이경애하는 경애씨라고 매일 놀려댄다. 나는 이름을 바꾸어 달라고 졸랐으나조부님께서 지어주신 좋은 이름을 바꾼다는 말은 다시는 꺼내지 말라.”고 어머니가 타이르신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오기 전에 나는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 지어주신 조부님도 돌아가셨으니 신경 쓰지 않고 현주로 개명 했다.

나에게는 언니 하나가 있고, 내가 태어 났을 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어서 나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으나 부족함도 몰랐으니 다행이었다. 내 고향은 평안남도 개천군 견롱리 개천군에서 강 하나를 건너있는 현 씨 마을이다. 양반이고 대 지주임에는 틀림없다. 소작인들 몇 가정이 농사를 짓고 집안 허드레 일을 전부한다. 조부님이 아들들을 공부시키시기 위해 경성(서울)에 사시면서 앞날을 내다보셔서 사업도 참 잘 하셨다.개천군에 정미소를 세우시고 번성하니 타면공장도 차리시고 세 번째로 직조 공장을 차리셨는데 너무 번성 하니 일본 정부가 국영으로 하자고하여 조부님께서 내 목숨을 베어가도 그것은 아니라고 호통을 하셨다고 한다.

해방의 기쁨이 가기도 전에 조부님과 삼촌들을 형무소로 끌려가셨다.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고 부자라는 이유 한 가지였다. 형무소에서 풀려난 후 남자 어른들은 모두 남한으로 피신했다. 남북이 통일 될 것이라는 기대는 보이지 않아 나머지 식구들도 남하 해야 한다는 결론을 지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빽팩 세개를 만드시고 남한으로 도망가야 한다며 짐을 싸셨다. 내가 원하는 것을 골랐으나 어머니는 팔아서 돈이 될 패물만 싸시면서 옷은 꼭 한 벌씩만 가져가야 한다고 하신다. 우리는 이사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는 것이니 남모르게 해야 한다고 경고하신다. 친구들께 떠난다는 말도 없이 우리는 집을 떠났다. 어머니, 언니, 나 셋이서 정거장으로 나와 기차를 타고 사리원에와 내렸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멀리서 따라 갔다. 어머니가 절대로 아무 말 없이 무조건 어머니만 따르란다. 한참 걸어가 우리는 시골 허름한 농가로 들어갔다. 집주인인듯한 분이 우리를 헛간으로 데리고 가 마초 밑에 숨으란다. 때때로 남한으로 도망가는 사람을 찾으러 조사가 나오기 때문에 숨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어두어지자 남자 세 명이 우리를 안내하러왔다. 7월 장마 때는 비가 억수 같이 내려 도망하는 분도 적고 38선 경비도 어수룩해 장마철을 택했다고 한다. 남한에 도착 할 때까지 안내자의 손을 절대로 노치면 안 된다고 주의를 한다. 우리 여섯 명이 한 번에 움직이면 안된다고 하며 나와 내 안내자가 한 10미터쯤 앞서고 다음에 언니가 떠나고 어머니와 안내자가 끝으로 떠났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무더운 장마철에 우산도 없이 밤새도록 걸어 본적이 있나요? 그것도 평탄한길이 아니고 산골짜기를 지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강은 장마로 물이 불어 허리까지 차올라 있다. 동이 틀려고 하니 우리는 어떤 농가 헛간으로 다시 안내되었다. 복더위에 비에 푹 젖은 끈끈한 옷 을 입고 헛간 마초 밑으로 또 들어가란다. 또 삼일 밤을 더 걸어야 한단다. 또 한가지 힘들었던 것은, 헛간에 웬 굶은 왕 모기 떼가 그리도 많은지. 한번 물리면 굵은 침으로 쑤시는 듯 아팠다. 보이면 잡아 죽이기라도 하련만. 먹는 음식은 매일 꼭같은 깨소금에 글린 주먹밥이었다. 우리는 살려고 물도 없이 꿀꺽 꿀꺽 밀어 넣었다.

사흘째 날이다. 오늘 밤만 참으면 기다리던 남한이다. 안내원 따라 전과 같이 밤이 되었을 때 우리는 헛간에서 나와 다시 떠났다. 여전히 비는 퍼붓고 있다. 유난이 오늘은 걷는 길에 바위가 많다. 언니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팔이 골절되어 아프다고 울려고 하다가 순애야 너 울면 우리 다 죽는다.”라는 어머니의 말에 언니는 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옷 하나를 벗어 언니 팔을 목에 매고 남하 했다. 몇 년 전에 내가 넘어져서 골절이 되었을 때 그 진통은 말 할 수 없이 아팠다. 해산때 진통보다 더 하다고 느꼈다. 그때 수십 년 전 38선을 넘을 때 나이 어린 언니가 울지도 못한 것을 생각하고 퍽 애처롭고 가여웠다.

남한에 도착하면 서로 얼싸 안고 환영 할 줄 알았는데, 우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신분 조사를 했다. 다행이 어머니가 족보를 가지고 오셔서 그것을 검사원이 뒤져 보드니 가라고해 다행이었다. 선조 대대로 물려받고, 또 자신이 개척해 벌어놓은 재산을 통째로 버리고 외지로 떠나 가난한 피난민 신세가 되어 보지 않고는 참 인생을 맛보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매번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