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세상을 바꾼 위대한 인물들/2023년 5월 1일>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기다린

라이어넬 베리모어 (Lyonel Barrymore)


-26세에는 스타, 53세에는 왕년의 스타, 57세에는 미국 최고의 스타였던 끈기 있는 배우-

나두 그날 그곳에 있었다. 1918년 라이어넬 배리모어가 <살무사>에서 밀트 생크스 역으로 브로드웨이에 데뷰하던 현장에 말이다. 그 공연은 역사에 길이 남을 환상적인 작품이었다. 흥분에 휩싸인 관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열렬한 환호를 보냈고, 배우들은 열 다섯 번이나 커튼콜을 받았다.

15년이 지난 후, 나는 라이어넬 배리모어와 브로드웨이에있는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사의 대기실에서 긴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가 배우로 인정받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당신이요? 리모어 가문의 화려하고 대단한 대접을 받는 당신같은 분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당신이 방금 말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명성은 오히려 장애가 될 뿐이죠”

베리모어 가의 아이들은 조금 이상하고 정신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모리스 배리모어는 가장 매력적인 호감형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무대밖에서는 종종 무모한 장난을 일삼았다.

그는 동물을 사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곰, 원숭이, 야생 고양이 그리고 다양한 종의 개들을 사들였다. 라이어넬과 동생 죤이 여름에 스탠튼 섬으로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섬에는 흑인 하인 한 명과 아버지가 사 놓은 개들밖에 없었다. 형제는 모양, 크기, 품종이 각기 다른 서른 다섯마리의 개들과 함께 여름휴가를 지냈다.

라이어넬과 존, 에셀이 <리스푸틴과 황후>에 출연했을 때 할리우드는 이것이 배리모어 가의 세 남매가 함께 출연한 최초의 작품이라고 자랑스럽게 발표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40년 전에 이미 한 무대에서 연기한 경험이 있었다. 무대는 스탠튼 섬의 황폐한 헛간이었고 관객은 동네 아이들이었다. 1페니의 입장료를 받아 총 37센틍의 수입을 올렸다. 그들이 무대에 올린 작품은 <춘희>였다. 매니저를 담당했던 에셀은 라이어넬과 존에게 10센트씩만 나누어 주고 남은 17센트를 자신이 혼자 독차지하는 바람에 훗날 원성을 사기도 했다.

사실 라이어넬과 존의 꿈은 배우가 아니라 화가였다. 실제로 바이어넬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돈 없고 배고픈 시절이 있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런 시절은 아주 많았습니다. 그림을 잡지사에 못 팔았거든요. 물론 집에 연락하면 언제든 돈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가끔은 전보를 칠 돈조차 없었습니다. 존과 저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작업실을 하나 가지고 있었죠.”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가구를 살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침대도 없었어요. 우리는 바닥에서 잠을 잤고 추운 날에는 책으로 몸을 덮었습니다. 그당시 함께 살던 친구가 작가였는데 그 친구에겐 빼어낼 수 있는 금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돈이 한 푼도 없을 땐 그 금니를 저당 잡히곤 했습니다. 그리니치 빌리지 동부 지역에 있는 전당포라는 전당포들은 모두 돌아다녔는데 , 금니 하나에 70센트 이상을 주는 곳은 없더군요. 아직도 생생합니다.”

라이어넬 배리모어는 스물여섯의 나이에 브로드웨이에서 반짝이는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쉰 세살이 되자 그의 명성은 추억 한편으로 밀려났다. 깔끔한 외모의 동생 존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스타가 되었고, 여동생 에셀도 뉴욕에 자신의 전용 극장을 소유하는 유명 인사가 되었지만, 라이어넬만은 하리우드 감독으로 조용한 생활을 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충격을 받아 그가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며 투덜거렸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30년간 무대에서 쌓은 노하우로 영화를 만들었고, 다양한 실험을 했다. 그는 사운드 카메라를 멀리까지 이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감독이다. 이것은 실로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그는 <마담 엑스>의 루스 채터슨, <악당의 노래>의 로렌스 티베트, <10센트 춤>의 바바라 스텐윅 등과 함께 불후의 명작들을 제작했다.

그는 자신이 연기를 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감독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무렵, 기회가 생겼다. 노마 시러어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영화의 아버지 역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어넬 배라모어는 카메라 앞에서 환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아카데미 상까지 받았다. 전에 그를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던 제작자들이 너도나도 그에게 출연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노란 티켓> <마하타리> <그랜드 호텔> <라스푸틴과 황후> <황무지>등의 영화로 그는 잇다른 성공을 거뒀다.

할리우드로 돌아오기 전에 낙심한 경험이 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뇨, 제 인생에는 늘 행복과 불행이 공존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는 이미 끝났다고 했지만 저는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제 문제로 바빠서 그럴 여유가 없었거든요,”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 클래식 간

 


 

세상의 필요를 위해 헌신한 메이요 형제

-고귀한 도덕성으로 세상의 정신질환을 치유한 세계적인 의사 형제-

의학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는, 50년 전 토네이도가 미네소타 주의 한 마을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토네이도의 공격을 받은 그 마을은 로체스터로,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바로 위대한 외과 의사인 메이요 형제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발견해 낸 것은 다름 아닌 정신병 치료제다. 이것은 정신 이상자에게 주입하면 빠른 속도로 열액을 순환시켜 심리를 안정시키는 놀라운 약이다.

이 발견이 과연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국에는 다른 질병 환자 수를 합친 것 보다 훨씬 많은 정신 질환자가 있다. 고등학생 열 여섯 명 중 한 명이 성인이 되어 정신 병원에서 생의 일부분을 보내는 셈이다. 만약 당신이 뉴욕에 사는 열다섯 살 소년이라고 가정했을 때, 당신의 일생 중에 7년을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보낼 확율은 5%에 달한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정신병 환자는 거의 2배 가까이 늘었다. 만약 이 놀라운 증가율이 한 세기 가량 지속된다면 미국 전체 인구의 절반은 정신 병원에서 지내야 하고, 나머지 절반은 세금으로 이들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메이요 형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외과 의사다. 파리, 런던, 베를린, 로마, 레닌그라드 그리고 도꾜의 의사들이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 사는 메이요 형제를 방문해 인술을 배울 정도였다. 가망 없는 6만 명의 환자가 해마다 기적의 성지인 그들의 병원을 순례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만일 토네이도가 60여년 전 중서부 지방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메이요 형제나 미네소타 주의 로체스터 또는 정신 치료제에 관한 소식은 지금까지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메이요 형제의 아버지인 메이요 박사가 80년 전에 로체스터에 정착했을 때, 그곳에는 고작 2천명의 주민밖에 없었다. 처음 그가 치료한 환자는 아픈 소 한 마리와 말 한 마리뿐이었다.

인디언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메이요 박사는 구식 머스킷 총으로 인디언들을 위협한 뒤, 연기가 사라진 황폐한 땅에서 시체를 수습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메이요 박사의 환자들은 주로 80킬로미터쯤 펼쳐진 미네소타 주의 대초원 지역에 흙집을 짓고 살았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여건도 되지 않은 그들을 위해 그 늙고 선한 메이요 박사는 밤새 먼길을 다녔다. 가끔은 낮인데도 불구하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거센 눈보라와 폭풍과 싸워야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그에게는 훗날 메이요 형제라 불리며 유명 인사가 될 윌리암과 촬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 약국에서 일하며 처방전 작성법과 약 제조법을 배웠고 의과 대학에도 다녔다. 그러던 중 의학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사이클론, 즉 토네이도가 마치 노여움에 찬 신처럼 미네소타 주의 모든 초원을 날려 버린 것이다. 마을은 산산 조각이 났고 사방은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수백 명의 사람이 다치고 스물 세명이 목숨을 잃는 엄청난 재해였다. 메이요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어긋난 뼈를 맞춰 주며 수술을 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 프랜시스코 수녀원의 시스터 알프레드 원장은 메이요 형제를 위해 병원을 세워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889년에 메이요 클리닉이 문을 열었다. 당시 아버지인 메이요 박사는 일흔 살이었고 두 아들은 인턴 경험조차 없었다.

“우린 둘 다 너무 어렸죠.”

자신들을 이렇게 소개했던 윌리암 메이요는 훗날 암에 관한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형제는 둘 다 서로를 훌륭한 의사라고 믿었고 두 사람 모두 가장 위생적인 의사로 유명했다. 언제나 정확하고 신속한 실력으로 다른 의사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했다.

그들은 아침 7시에 병원으로 출근해 네 시간씩 하루에 열세 번에서 열 다섯 번의 수술을 맡았다. 그들은 학업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의술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착실한 형제였다.

로체스터 시 전체는 메이요 클리닉이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동차는 인도로 진입하지 못했고 버스는 소음없이 다녓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가난한 사람이든 은행장이든 농부든 영화배우든 환자 지위에 관계 없이 모두 똑같은 대기실에서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부자들은 알맞은 액수의 치료비를 지불했고, 돈이 없어 치료 받지 못한 채 돌아간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메이요 형제의 일은 삼분의 일이 자선 활동이었다. 그들은 절대 창구내역을 따로 기록한 적이 없었고, 진료비 명목으로 환자의 집을 담보로 잡지도 않았다. 환자가 자불할 수 있을 만큼의 현금만 받았고, 수술하기 전에 수술비를 낼 수 있는지 묻지도 않았다.

어떤 환자가 자신의 농장을 담보로 병원비를 지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메이요 형제는 그에게 돈을 몽땅 되돌려 주고 수백 달러의 수표까지 발행해 주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일을 하지 못해서 생긴 지출까지 보상해 준 것이다.

돈에 관심이 없던 메이요 형제에게 돈은 끊임없이 들어왔고, 명예를 바라지 않았던 메이요 형제는 가장 명예로운 외과 의사가 되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인류의 고통을 차유하는 것뿐이었다.

병원 대기실 책상 위에는 두 사람의 성공 비법이자 영원한 진리가 담긴 액자가 있다.

-숲속에 갇혀 있더라도 세상이 원하는 일을 하면 곧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


불행한 과거를 예술로 승화시킨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4년밖에 교육받지 못했으면서도 열일곱 권의 명작을 남긴 신이 내린 소설가-

1843년 크리스마스, 작지만 불멸의 작품이 될 운명을 지닌 책이 출판되었다.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두고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 책이 처음 나왔을 때 팰맬의 스코트랜드에서는 친구와 만나면 일단 그 책을 읽었는지 물었고, 답은 항상 똑같았다.

“응, 그는 신이 내려주신 작가야. 당연히 읽었지!”

책이 출간되던 당일에만 1천 부가 팔렸고, 2주 후에 1만 5천 부를 추기로 인쇄했다. 그 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판본이 나왔고 하늘 아래 존재하는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 작품은 무엇일까? 바로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찰스 디킨스는 영국 문학사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집필했으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이다. 그러나 이런 그 조차도 초창기에는 사람들의 평가가 두려워 밤에 몰래 나가서 자신이 쓴 첫 작품을 우편함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그 당시 그는 스물 두살이었고 직접 쓴 소설이 책으로 출판되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는 첫 소설로 돈을 벌지 못했다. 그 뒤에 쓴 여덟 편의 소설은 그에게 얼마의 돈을 가져다 줬을까? 전혀, 그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가 소설을 쓰고 처음으로 받은 돈이라고는 명예로운 5달러짜리 지폐 한 장이 다였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은 그에게 단어당 15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안겨 주었다. 어느 작가보다 높은 액수였다. 한 단어당 15달러라니! 이는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받았던 연봉의 15배에 해당한다.

작가들은 대부분 사후 5년 정도가 지나면 사람들에게 잊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디킨스가 죽은지 60년이 지난 뒤에도 많은 출판사가 <우리 주님의 삶>이란 작품에 대한 20만 달러 이상의 인세를 그의 유족에게 지급했다. 디킨스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이 책을 출간한 것이다.

그가 학교에 다닌 기간은 고작 4년이었지만 그는 열 일곱 편의 굉장한 소설을 써냈다. 다만 그의 부모는 학교를 운영했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은 그 학교에 가 본 적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그 학교는 여학교였고, 적어도 그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정문에는 1년 내내 ‘디킨스 여자학교’라는 놋쇠 간판히 걸려 있었지만 그 학교를 다닌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딕킨스의 가정에는 빚만 늘었다. 빚쟁이들은 돈을 달라고 거칠게 욕을 하고 책상을 부숴 버렸다. 그리고 끝내 빚쟁이들은 디킨스의 아버지를 고소해 감옥에 집어넣었다. 찰스 디킨스의 어린 시절은 이토록 비참하고 불행했다.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그는 고작 열 살이었다. 집에는 먹을거리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아침 전당포로 가서 얼마 없는 가구들을 팔았다. 심지어 가장 아끼는 책들도 팔아야만 했다. 그 열 권의 책은 그의 유일한 벗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 책들을 전당포에 팔던 날,마치 제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어머니인 디킨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살기 위해 네 아이를 데리고 감옥으로 갔다. 찰스는 낮에는 온종일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밤이 되면 그는 런던 빈민굴에서 온 두 명의 부랑아와 함께 사용하는 자신의 어두운 다락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의 삶을 정말 지옥처럼 만들었다.

결국 그는 쥐가 득실득실하는 창고에서 구두약 병에 상표 붙이는 일을 얻었고 적은 보수를 차곡차곡 모아서 마침내 다른 방을 얻었다. 지저분한 침구가 구석에 쌓여있는 어둡고 작은 곳이었지만 그는 그 방을 보고’마치 천국 같았다.”고 말했다.

몇 년 후 작가가 된 그는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빈 그릇을 들고 구걸하는 아이를 등장시켜 자신의 어린시절에 복수했다.

디킨스의 글에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실패했다. 그는 사랑 없이 결혼한 아내와 23년 동안 함께 살았다. 아내는 열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혼 생활은 비참해졌다. 세상 사람들에게 온갖 좋은 말을 전했지만 사실 그는 불행했다.

그 불행이 지나치게 날카롭고 비참해지자 그는 도저히 견딜 수 가 없어서 빅토리아 시대에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 공식적으로 아내와의 이혼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내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그는 인정 많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유산으로나마 처제에게 20만 달러를 남길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어머니인 아내에게는 과연 얼마를 물러줬을까? 일주일에 단돈 35달러뿐이었다.

그는 샴 공작처럼 허영심이 가득했고, 조금의 비난만 받아도 화를 내곤 했다. 외모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1842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진홍색 쪼기와 울새의 알처럼 파란 색깔의 외투를 입었다. 미국인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머리를 빗는 디킨스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디킨스는 미국인들이 뉴욕 거리에 돼지를 풀아놓고 달리게 하는 것에 층격을 받아 눈이 휘둥그래졌다.

전성기 시절 디킨스는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모든 이의 우상이었다. 그가 두 번째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입장권을 사려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씩 줄을 섰다. 브루클린에서는 사람들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며 폐렴의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다. 그의 유료강연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표가 매진되자 수백 명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의 팬들은 소동을 일으켰다.

문학의 역사는 모순으로 가득하지만, 찰스 디킨스는 그중에서도 가장 모순적인 인물이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더 클래식 간행


 

불의에 맞서 싸운

클래런스 수어드 대로(Clarence Seward Darrow, 1857-1938)

 

-어린 시절의 치욕을 잊지 않고 폭력과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 정의로운 변호사-

어느 날,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시끄럽게 굴었다는 이유로 한 소년이 교사에게 뺨을 맞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뺨을 맞은 소년은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고작 다섯살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부당하고 폭력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해 집으로 가는 내내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폭력과 부당함을 싫어하게 되었고 평생을 바쳐 그것과 싸웠다.

그 아이의 이름은 클래런스 대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변호사이자 당대 최고의 범죄 전문 변호사다. 그의 이름은 수차례 미주 각지에서 발행되고 있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곤 했다. 그는 운동가요, 반역자였고, 전사이자 약자들의 영웅이었다.

오하이오 주 애슈터불라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가 처음으로 만든 소송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건은 고작 3달러짜리 말 용품의 소유권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에게는 본질적인 가치관을 건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마치 뱅골 호랑이와 싸우듯 으르렁거리며 그 문제와 싸움을 했지만, 소송의 대가로 그가 받은 보수는 단지 5달라에 불과했다. 그는 사비를 털어 일곱 개 법정에서 7년이나 싸움을 지속했고,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는 부나 명예를 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게으르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시골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던 어느 날 발생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이 180도 뒤바뀌게 되었다.

마을의 대장장이 한 명이 한가할 때마다 법률을 공부하곤 했는데, 하루는 그 대장장이가 양철공의 가게에서 법적 논의를 하는 목소리가 대로의 귀에 들려왔다. 그는 대장장이의 유창한 말솜씨에 매료되고 말았다. 토론을 즐겼던 대로는 대장장이에게 법률서적을 빌려 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아침이면 학교로 책을 가지고 가서 학생들이 지리나 산수를 공부하는 동안 자신은 법을 공부했다.

하지만 대로는 그 사건이 없었다면 자신은 한낱 시골 변호사로 남았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사건은 이러했다.

대로 부부는 3천5백 달라를 주고 오하이오 주 애슈터불라 소재의 한 치과의사의 집을 구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은행에서 전 재산인 500달러를 인출했고, 나머지 금액은 조금씩 갚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약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 무렵, 치과의사의 부인이 갑자기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봐요, 젊은이. 아무래도 댁이 평생돈을 모아도 3천 5백 달라가 모일 것 같지는 않군요.”

대로는 굉장이 화가 났고 더는 그 마을에 살고 싶지 않아 당장 시카고로 떠났다.

시카고에서 그가 처음 번 돈은 고작 300달라였다. 집세를 내기에도 벅찬 보수였다. 그러나 다음 해에 시의 담당 변호사를 맡은 후로는 그전보다 10배나 많은 3천 달라를 벌게 되었다.

대로는 이렇게 말했다.

“한 번 행운이 찾아오니 모든 게 다 제 마음대로 되더군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시카고앤 노스웨스턴 철도 회사의 변호사가 되었고, 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폭동이 일어났다. 파업이었다. 증오! 반란! 마침내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다.

대로는 파업자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철도 노조 대표인 유진 뎁스가 법정으로 불려가자, 대로는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 노동자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그가 최초로 맡은 결렬하고도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그후에 그가 맡은 사건은 모두 법정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재판으로 주목받았다. 예를 들어 어린 바비 프랭크스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레오폴드와 로엡의 사건이 있다. 그들의 범죄는 너무나 잔인했다. 그래서 대로가 두 범죄자의 변호사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악질 범죄자들을 변호할 수 있느냐며 그를 비난했다. 심한 욕설까지 서슴없이 해댔다. 그는 왜 하필 그 사건을 맡았을까? 그는 이렇게 답했다.

“증오와 악의의 물결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변론을 맡은 사람 중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지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저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교수형이 집행되는 날이면 그 마을을 떠나곤 했죠. 저는 사형제를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는 사회가 범죄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누구라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대로 자신도 재판을 받는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뇌물 혐의로 고발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엇다. 그 재판에서 그는 스스로를 지키기위해 온갖 말재주를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법정에 서서 일생 중에 가장 감동적인 감사 인사를 받았다. 전에 대로가 변론을 맡았던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당신은 지난번 재판에서 제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당신을 도와드려야 할 때인 것 같네요. 제가 상대편의 증인들을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아무 대가 없이 말입니다.”

몇 년 전 대로는 자서전을 한 권 썼다. 나는 그가 자신의 인생철학을 기록한 부분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이룬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혹은 얼마나 형편없는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어려운 형편에 실수도 했지만 나는 되도록 즐겁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삶의 방향과 목표를 항상 생각하며 하루하루에 만족해야 한다.”

“내가 늙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는다. 그 긴 하루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뒤로하고 인생 여정을 떠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순례는 거의 끝나고 마지막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또한 내가 걸어온 길은 얼마나 짧은가? “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 더 클래식 간


세상에 행복을 선물한

하워드 서스턴

- 기차표를 잘못 사는 바람에 선교 대신 마술의 길을 걷게 된 관객을 사랑한 마술사 이야기-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시카고의 맥비커 극장에서 한 무리의 관객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하나같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당시 최고의 마술사였던 알렉산더 헤르만의 공연 덕분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각, 한 신문팔이 소년은 길가에서 덜덜 떨며 군중에게 <시카고 트리뷴>을 파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외투도, 집도, 숙소에서 묵을 돈도 없었다. 그날 밤, 소년은 관객이 버리고 간 신문을 덮고 극장 딋골목에 있는 맨홀 뚜껑 위에서 잠을 청했다. 지하에 있는 난방 장치 덕에 뚜껑에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춥고 배고픈 상태로 누운 소년은 자신도 훗날 꼭 마술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털 코트를 입고 박수를 받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 앞에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여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광경을 간절한 마음으로 그렸다. 자신이 유명한 마술사가 되면 반드시 이 극장 무대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이 소년의 이름은 하워드 서스턴. 20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켯다. 그는 공연을 마치고, 배고프고 가진 것 없던 신문팔이 소년이 사반세기 전에 새겨 놓은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1936년 4월 13일 그가 생을 마감할 무렵, 하워드 서스틴은 마술의 대가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손으로 하는 마술은 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그는 노년에 40년 동안 온 세상을 순회하며 여러 차례 환상적인 마술을 선보임으로써 관중을 압도했다.? 숨 막힐 정도의 놀라운 마술쇼였다. 6천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입장권을 샀고, 그는 거의 200백만 달라를 벌어들였다.

그가 죽기 며칠 전에 나는 무대 옆에서 그의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을 마친 그는 그의 의상실에서 자신의? 흥미진진한 인생에 대해 두 시간 동안이나 이야기해 주었다. 그의 인생을 통해 배우는 소박한 진리는 무대에서 그가 보여주는 마술처럼 놀라웠다.

어린 시절,, 서스틴의 아버지는 말을 급하게 몬다는 이유로 아들을 잔인하게 때렸다. 화가 난 그는 집을 나와 소리를 지르며 거리를 배회하다가 가출해 버렸다. 그의 부모는 5년 동안 그를 보지도, 소식을 듣지도 못한 채 그저 아들이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만 했다.

사실 서스턴 역시 자신이 죽지 않은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면서 화물칸에 몰래 탑승했고, 구걸과 도적질을 했으며 헛간, 건초더미, 버려진 건물에서 잠을 자는 등 거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수 차례 체포되었고,쫒겨 다녔으며, 얻어맞기도 하고, 기차에서 내던져지거나 총에 맞은 적도 있다.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말을 타는 기수이자 도박꾼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돈도 친구도 없이 뉴욕을 떠도는 부랑아 신세가 되었다. 바로 그 시점에, 무척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참석한 종교 모임에서 설교자가 ’당신 안에 사악한 마음이 담겼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것이다.

설교를 통해 깊이 감동한 그는 전에 없던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요동하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자신이 지금 엄청난 죄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엉엉 울면서 제단으로 걸어나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회개하였다.

2주 후, 이전의 떠돌이는 차이나타운 모퉁이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 어느때보다 더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러 결심하고 매사츄세츠 주 노스필드에 있는 무디성경학교에 입학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교? 경비실에 일자리도 얻었다.

그 당시 서스틴은 열여덟 살이었지만 이전 그가 학교에 다닌 기간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철도를 따라 세워진 표지판을 차장 밖으로 내다보며 뜻을 익힌 것이 다였다. 그는 글을 쓰거나 셈을 할 줄도 몰랐고 알파벳도 몰랐다. 서스틴은 성경학교에서 낮에는 그리스어와 생물학, 밤에는 읽기, 쓰기, 산수를 공부했다.

그러다가 그는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펜실바니아 대학에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의 인생을 바꾸어버린 작은 사건과 맞닥뜨렸다.

서스틴은 매사츄세츠에서 필라델피아로 가는 길이었다. 알바니에서 기차를 갈아타려고 기다리는 중에 그는 무심코 가까운 극장에 들어 갔다. 마침 극장에서는 알렉산더 헤르만의 놀라운 마술쇼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항상 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서스틴은 시간이 나면 카드 마술을 연습하곤 했었다. 그는 자신의 영웅과도 같은 헤르만과 말 한마디라도 나누어 보고 싶은 마음에 헤르만이 묵고 있는 숙소의옆방으로 들어갔다. 열쇠 구멍에 귀를 바짝 대기도 하고 복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지만, 말을 걸거나 방문을 두드릴 용기도 낼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그 유명한 마술사를 따라 기차역으로 갔다. 경외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마술사는 시라큐스로, 서스턴은 뉴욕으로 가야 했다. 적어도 뉴욕으로 갈 예정이긴 했다. 그러나 서스턴은 뉴욕행 기차표 대신에 시러큐스 행 기차표를 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그 실수는 서스턴의 인생 방향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를 의료 선교사가 아닌 마술사의 길로 인도한 것이다.

최고의 전성기 시절,서스턴은 하루에 1천 달러 정도를 벌었다. 하지만 그는 약장수를 따라다니며 사람들에게 카드 마술을 보여주고 단돈 1 달러를 벌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그때는 ‘북부의 마술사 서스턴’이란 빨간 글자가 적힌 깃발을 걸곤 했다. 그는 미국 중서부인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 출신이었지만, 텍사스 지역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북부 사람이었다.

그가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마술은 많은 사람이 이미 알고있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서스턴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는 두 가지 성공 비법이 있었다. 그는 무대를 활용하여 자신의 개성을? 뚜렸하게 들어냈다. 그는 관객의 심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진짜 마술사였고, 이런 재능은 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만큼니나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소리나 눈썹의 높이 등 그가 무대 위에서 보이는 모든 행동은 철저한 예행연습을 거쳐 완성된 것이었다.

두 번째로 그는 관객을 사랑하는 마술사였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긴장을 풀고? 집중하기 위해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서 이렇게 외치곤 했다.

“나는 관객을 사랑한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하길 원한다! 내 일은 정말 훌륭하다! 나는 행복하다! 정말 행복하다!”

서스턴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에서


가능성을 믿고 결단한

로렌스 티베트

-방세를 내기 위해 포도를 따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훗날 목소리로 엄청난 부를 얻은 감성적인 성악가-

 

1922년, 로렌스 티베트는 아내와 함께 로스앤젤스 근처에 살았다. 가난하고 힘든 시절, 그는 아내를 먹여 살리고자 일요일마다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고 가끔 5달러를 받고 결혼식장에서 축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오랫동안 학업에 매진했음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날, 그의 친구 루퍼트 휴스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는 정말 목소리가 좋아. 뉴욕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게 좋겠어”

그의 다정한 말 한 마디는 곧 티베트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말을 계기로 티베트가 2천 500달라를 빌려 집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가 뉴욕에서까지 실패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트럭이나 팔면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때는 1922년이었고 로렌스 티베트는 도시에서 지낼 만큼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포도밭 한 가운데에 있는 식품점 하나를 임대했고, 얼마든지 포도를 따 먹을 수 있었다. 나중에 그는 “당시에 포도 외에는?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집세는 한 달에 20달라 5센트였지만 그 금액은 때때로 그가 벌어오는 수입보다 더 많은 액수이기도 했다. 한번은 열 달이나 집세가 밀려서 포도나무를 관리하고 포도를? 따는 일을 하는 것으로 방세를 갚기도 했다.

그는 한 달에 5달라를 내고 피아노도 대여했다. 하지만 그의 집이 가파른 언덕에 있어서 피아노를 거실에 두기도 어려웠다. 피아노를 내려놓는 순간 바닥이 가라앉아 피아노가 포도밭으로 굴러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뉴욕에 입성했을 때, 티베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루스의 가장 저렴한 자리조차 구할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극장 맨 뒤편 구석에 간신이 서 있을 수 있는 임석표를 2달러 50센트에 샀고, 그 표로 명예로운 성악가 스코티와 아름다운 메리 가든의 멋진 공연을 관람했다.

당시에 그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방세와 레슨비를 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10년 후,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청중 의 열광적인 찬사를 받는 몸이 되었다. ’한 번 공연에서 무려 스물두 번의 커튼콜을 받는’ 위대한 바리톤으로 그 입지를 굳힌 것이다.

해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진 수백 명의 야심 찬 청년이 명예와 부를 얻고자 뉴욕으로 온다. 나는 로렌스 티베트에게 그들 중에 평범함을 뛰어넘지 못해 실패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물어 보았다. 그는 ‘1천명 중 999명’이라고 답했다.? 목소리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기술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원인은 쇼맨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덧붙였다. 무대를 장악하고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이야말로 성공의 필수 요소라고 그는 믿었다.

로렌스 티베트는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스필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그의 아버지는 방목장 카우보이였다. 울타리를 수리하고 송아지에게 낙인을 찍고 소도둑을 쫓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큰 진주를 지니고 허리에 권총을 찾던 티베트의 아버지는 명사수이기도해서, 두 명의 소도둑을 죽인 기념으로 그는 자신의 총에 두 개의 줄을 그어 흔적을 남겼다.

나중에 그는 캘리포니아 주 컨 카운티의 보안관이 되었다. 그는 정식 무기고를 가지고 있었고, 큰 귀에 슬픈 눈을 한 커다란 블러드하운드 한 마리도 키웠다. 총격사건이 일어아면 보안관의 집으로 전화가 왔다. 그러면 그는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으로는 개 목걸이 줄을 잡고 사건현장으로 달려갔다. ‘로드’라는 이름의 개는? 사납게 짖으며 범인을 잡으려 다녔고 로드의 줄을 잡고 따라가던 티베트의 아버지는 손을 흔들며 이렇게 소리쳤다.

“로드가 잡았어, 로드가 잡앗다고!”

그러나 로드가 잡은 것은 범인이 아니라 늙은 소나 코요테인 경우가 많았다.

어린 티베트에게 보안관이라는 직업은 무척 재미있고 근사해 보였다. 그래서 티베트는 아버지처럼 보안관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갑자기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일이 일어 났다. 아버지가 서부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은행강도이자 총잡이 중 한 명인 짐 맥카니와 싸우다가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그 총알이 로렌스 티베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의 아버지는 신앙심이 매우 깊어서 담배, 춤, 카드,극장을 멀리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베트는 ‘만약에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자신은 성악가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고 시절, 티베트는 열등감에 눌려 지내던 아이였다. 어머니는 하숙을 쳐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옷이 한 벌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바지가 짧아서 우수꽝스러웠다. 짝사랑하던 소녀에게 구멍가계에서 파는 크림 소다도 사 줄 수 없을만큼 가난했다. 친구들은 그를 무시했고 아무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사람이 되어 명예를 얻기로 마음먹고 지름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글리합창단의 멤버가 되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연극 동아리에 가입하려고 했지만 그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 축제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도 얻을 수 없었다. 스물한 살이 되기 전까지 그 목소리가 지닌 천재성은 도통 빛을 보지 못했다.

티베트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음악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최근에 연주되는 많은 대중음악도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위대한 하루의 마지막’은 가장 대중적인 음악의 하나로 적어도 500만명이 그 음반을 구입하였다. 로렌스 티베트는 그 순수한 음악이 가장 훌륭한 곡이라고 했다.

또한 그는 ‘올드 맨 리버’와 ‘랩소니 인 믈루’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비엔나 작곡가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했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 클래식 간 에서


인생이라는 모험을 즐긴

마크 트웨인

-전화기라는 발명품의 가치를 몰라 봤던 모험을 사랑한 소설가-

헐리우드는 200만 달러라는 돈을 투자해 미국이 낳은 가장 주목받을 만한 인물인 이 사람의 삶을 영화로 제작했다. 그는 당시 문학계에서 가장 유명했고, 모든 시대를 아우르며 가장 널리 읽히는 유모러스한 작가였다.

그는 열두 살까지 통나무로 지은 학교에 다녔고 이것이 전 생애를 통틀어 그가 받은 교육의 전부였다. 하지만 옥스포드대학과 예일대학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지상의 모든 학자들도 그와 동료가 되길 원했다.

그는 소설을 써서 수백 달러를 벌어들린 인물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에게 어느 작가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다 주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집필한 작품과 라디오, 영화에 대한 인세는 유산 상속인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안겨 주었다.

그의 이름은 사뮈엘 클레멘스. 세상에는 마크 트웨인으로 더 잘 알려졌다.

마크 트웨인의 인생은 모험 그 자체였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파란만장한 시대를 경험했다. ?그는 1835년 미시시피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주리 주의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미국에 처음으로 철도가 도입된 지 7년이 되는 해였고,아브라함 링컨이 아직 농사꾼으로 일하며 경작지와 황소 무리를 돌보던 때였다.

마크 트웨인은 75년간 스릴 넘치는 삶을 살다가 1920년 코네티컷 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믈세 권의 책을 썼다. 물론 그중에는 모두가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두 권의 책<허클배리 핀의 모험>과 <톰 소여의 모험>은 불멸의 작품이 되어 앞으로도 수세기에 걸쳐 읽힐 것이다. 이 두 책은 모두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것이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쓰였다’기 보다는 그에게서부터 ’터져 나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마크 트웨인은 미주리 주 플로리다에 있는 방 두 개가 딸린 작은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농부들은 소나 닭조차 키우지 않을만큼 허름한 곳이었다. 두 개의 작은 방에 일곱 명의 가족과 노예 소녀 한 명을 포함한 여덟 식구가 살았다.

마크 트웨인이 아기였을 때,사람들은 그가 하도 약해서 첫 겨울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라면서 튼튼한 말성꾸러기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다른 가족을 전부 합친 것보다 마크 트웨인 한 명 돌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실없는 농담을 즐겼다. 학교가 그저 지루하게만 느껴진 그는 가끔 집에서 멀리 도망쳐 올드 맨 리버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는 신비로운 섬과 느리게 떠내려가는 통나무, 기품 넘치는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움직이는 거대한 미시시피 강에 매료되었다.

그는 몇 시간이고 강 옆에 앉아 꿈을 꾸었다. 아홉 번이나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마크 트웨인은 인디언 놀이나 해적 놀이를 포기하자 않고 동굴탐험을 하며 거북이 알을 먹었다.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가던 그 나날이 그에게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왜냐하면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집필한 두 작품의 위대한 명장면과 인물들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천재적인 유머 감각을 물려 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미소는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서도 보기 드문, 더욱이 여자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능력, 즉 재미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듯 태연하게 말하는 재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에게서 불려받은 이 능력으로 그는 가장 유머러스한 연설자로 명성을 떨쳤고, 강연회를 개최하여 돈도 벌었다.

그의 어머니는 말 그대로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마음 약한 여인이었다. 고양이가 생쥐를 잡았다고 꾸짖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번은 원치 않는 새끼 고양이가 생겨서 물에 빠트려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부딪치자, 그녀는 고양이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물을 따뜻하게 데우기까지 했다.

마크 트웨인은 항상 학교를 멸시했다. 학교는 자유를 박탈하는 곳이라고 여겼다. 학교는 숲속을 돌아다니거나 신비로운 미시시피 강둑을 구경하고 싶은 그를 통나무 오두막 안에 가두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 드디어 학교에서 달아날 기회가 생겼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아버지 말씀을? 따르지 않고 철없이 굴었던 시절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감성적인 그는 후회와 자책으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란다. 이제 와서 이러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 대신 나에게 약속 하나 해 주겠니?”
그는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약속이라도 할게요. 다만 학교에 가라는 약속만 빼고요.”

며칠 후 마크 트웨인은 인쇄업자의 제자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그곳에서 돈도 벌고 교육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2년동안 받은 것이라고는 음식과 옷이 전부였다.

그가 인쇄공이 되고 2년이 지난 어느날 그는 미주리 주에 있는 해니벌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책에서 찢겨나온 종이조각 하나를 주웠다. 이 작은 사건은 아마 마크 트웨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일 것이다.

바람에 날리던 그 종이는 잔 다크의 전기에서 찢긴 조각이었다. 루앙 요새에 포로로 잡혀간 잔 다르크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불의에 대항하는 잔 다르크의 모습은 열네 살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지피기 충분했다.

그는 잔 다르크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한 번도 그녀에게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는 잔 다르크에 관한 내용은 모조리 섭렵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한 마크 트웨인의 관심은 평생의 절반 이상 동안이나 사그러지지 않았다.

46년이 지난 후에 그는 <잔 다르크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집필하기까지 했다.비평가들은 그 책이 최고의 저서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지만 마크 트웨인은 스스로 그것을 최고의 작품으로 여겼다. 만약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면 사람들이 우습게 여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일부러 책에 자신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엘버트 페인은 네 권짜리 마크 트웨인 전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마크 트웨인은 잔 다르크 전기에서 찢긴 그 종이를 발견한 후부터 역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고, 지적인 삶을 추구하는 열정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열정은 그의 생애 마지막 날까지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의 손에 종이가 날아들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삶에는 지적인 탐구 정신이 강하게 자리잡았다.

마크 트웨인의 사업 능력은 토끼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는 그져 근사해 보이는 사업 계획만을 따라다닐 뿐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책을 읽다가 아마존 강 상류의 밀림에서 열린다는 코코아를 따서 팔면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코코아에 대해 아는 것도 전혀 없었고 남아메리카에 갈 수 있는 돈도 없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아마존 강에 간다고 해도 원주민과 대화를 할 수조차 없었으며 심지어 열병에 걸려 죽을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는 어느 날 길에서 50달러짜리 지폐를 주웠고, 그 돈을 가지고 아마존 강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신시내티까지 갔다가 돈이 다 떨어져 끝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그는 책과 강연을 통해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돈을 투자하기만 하면 매번 실패로 끝났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그는 특허받은 증기 발전기에 투자했지만 기계가 고장났고 시계 회사에 투자했지만 시계가 금방 작동을 멈춰서 배당금조차 받지 못했다. 증기 도르래에 투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출판사를 차렸을 때도 16만 달러의 손해만 남기고 그만둬야 했고, 활자 조판기계 때문에 20만 달러나 날려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크 트웨인은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라는 발명가를 만났다. 벨은 자신이 만든 최신 발명품에 투자하라고 그를 설득했다. 다섯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과 그저 전선을 통해 대화할 수 있다는 벨의 말에 마크 트웨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얼간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엉뚱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다섯 블락이나 떨어져 있는 사람과 전선으로 이야기한다는 아이디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만약에 마크 트웨인이 500달러로 전화기 주식을 샀다면 지금 그 가치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전화기에 투자하는 대신 그 500달러를 한 친구에게 빌려 주었고, 사흘 뒤에 그 친구는 파산했다.

1893년 쉰 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에게는 빛만 가득했다. 미국은 불황으로 신음했고 마크 트웨인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 파산 신고를 함으로써 빛을 청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하는 대신 자신이 진 빚을 전부 갚기로 했다. 어떻게? 글을 쓰고 강연회를 개최해서 말이다.

몸도 좋지 않았고 강연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빚을 갚기 위해 그는 5년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 강연은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찾아온 청중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만큼 커다란 강당은 거의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빚까지 다 갚은 순간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적었다.

“빚을 다 갚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입은 즐겁고, 더는 짐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마크 트웨인은 사업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정말 운이 좋았다.결혼할 아내를 만나기도 전에 아내의 사진을 보고 사랑에 빠졌으니 말이다. 그가 배를 타고 성지순례를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그 여행은 후에 <철부지의 해외여행기>라는 작품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운명적인 그날, 마크 트웨인은? 친구인 찰스 랭던의 선실을 방문했고, 랭던은 자신의 아름다운 여동생 올리비아 랭던의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마크 트웨인의 마음속에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샘솟았다. 배가 나아가는 내내 그는 여러 차례 랭던의 선실로 가서 그 사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그럴수록 그녀에 대한 확신은 깊어져만 갔다.

몇 달 후 마크 트웨인은 뉴욕에서 그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고, 생애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내 마음에서 떠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뉴욕 엘마이리에 있는 그녀의 아버지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만남을 가진 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지만 그는 그곳을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랭던의 마부에게 자신이 마차에서 떨어지도록 마차 좌석을 조작하라고 지시하였다. 마크 트웨인은 태연한 태도로 짐을 싣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고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계획대로 뒷좌석이 뒤집혔고 마크 트웨인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쓰러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눈을 감고 있어서 마치 반쯤 죽은 것 같았다. 물론 난리가 났다. 그녀의 가족은 그를 침대에 눕혔고 그는 2주 동안 그렇게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멀쩡했다. 그의 뛰어난 연기는 어렸을 때 미주리 주 해니벌에서익힌 것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그가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마음껏 간호를 받았다. 둘은 서로를 ‘소중한 애인’과 ‘사랑스러운 달링’이라고 불렀고, 34년 후 아내가 죽는 날까지도 그들의 사이는 변함없었다.

그녀는 마크 트웨인이 준 소중한 연애편지들을 상자에 담아 자물쇠로 잠갔다. 휴가를 갈 때면 그 상자를 은행에 맡겨 안전하게 보관하기까지 했다.

올리비아 랭던은 남편의 원고를 편집하는 일을 맡아 했다. 저녁이 되면 마크 트웨인은 아내가 잠들기 전에 읽어볼 수 있도록 온종일 쓴 원고를 그녀 옆에 놓아두곤 하였다. 그녀는 불필요한 내용은 없는지, 모든 것이 완벽한지 꼼꼼히 살폈다. 그녀가 어떤 평을 하든지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었다.

마크 트웨인은 원고를 잃어버리거나 원래의 자리가 아닌 아닌 다른 곳에 두는 것을 굉장히 싫어해서 하녀가 침대를 건드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분필로 바닥에선을 그어 놓고 넘어오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일흔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서 살아도 될 나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열 네벌의 흰색 정장과 100개의 흰색 넥타이를 주문해서 여생을 온통 흰 옷으로 치장하고 다녔다. 심지어 연회복까지도 말이다.

마크 트웨인이 태어나던 날 하늘에 헬리 혜성이 보였는데 그 혜성은 76년마다 나타나는 별이었다.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그 혜성을 보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마크 트웨인의 딸에게 한 마지막 부탁은 자신이 좋아했던 오래된 스코트랜드 노래를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다음 네 줄의 구절은 마크 트웨인이 그의 딸 수지의 묘비에 남긴 것이자, 그가 사랑한 조국이 그의 묘비에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따뜻한 여름 해가 부드럽게 빛나네.
여기에 따뜻한 남풍이 살며시 불어오네.
푸른 잔디도 가볍게 누워라, 가볍게 누워라.
잘 자라, 내 사랑, 잘 자라,? 잘 자라.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 더 클래식>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치 않는 결혼으로 후회의 세월을 보냈던 다재다능한 극작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이 흐른 뒤에도 그는 여전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에는 그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화필 끝으로 사랑니를 갈았던 무수한 저자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로, 지금도 수천 명의 사람이 그가 태어난 고향을 방문하며 그를 기억한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1921년 나는 스트랫퍼드에서 슘래터리에 이르는 시골 마을을 찾아 그가 열정적으로 돌아다녔을 들판을 거닐었다. 그 장소는 수수한 시골 소년인 셰익스피어가 연인 앤 웨어틀리나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던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백 년 동안 명성을 유지할 작가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또한 그의 아름다운 연인이 슬픈 운명으로 후회의 세월을 보낼 것 역시 알지 못했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셰이스피어의 원치 않는 결혼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비극이엇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진심으로 앤 웨이톨리를 사랑했지만 달빛이 가득한 어느 늦은 밤에 앤 해서웨이라는 여인과 하루를 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앤 해서웨이는? 자신과 하루 밤을 보낸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공포와 절망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웃집을 찾아가 그녀가 왜 그와 결혼해야만 하는지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웃은 순박하고 정의로운 농부들이어서 그 둘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녀를 거들었다.그다음날, 그들은 마을 회관으로 가서 셰익스피어와 앤 헤서웨이의 결혼을 밝히는 글을 남겼다.

이렇게 결혼한 셰익스피어의 신부는 그보다 여덟 살이나 더 많았다. 시작하는 단계부터 그들의 결혼생활은 참혹했다. 그는 자신의 연극을 통해 여러차례나 나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앤 해서웨이와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산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결혼한 이후 주로 런던에서 머물렀고 1년에 한 번 정도만 아내가 있는 고향에 들렀다.

오늘날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지역은 작은 초가집과 접시꽃이 피어 있는 정원, 독특하게 구부러진 거리가 있는,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의 하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절에도 그랬을까?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 그 지역은 지저분하고 가난하며 병이 만연해 처참한 곳이었다. 심지어 하수구도 없었다. 돼지가 음식 쓰레기를 먹으며 마을을 돌아다녔고, 공무원이엇던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마굿간에서 나온 쓰레기를 거리에 쌓아 놓았다가 벌금을 물은 적도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에는 스트랫퍼드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비참한 형편이었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이 문맹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딸과 손녀들까지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다.

영국 문학의 찬란한 역사가 될 셰익스피어조차 일을 하기 위해 열세 살 때 학교를 그만 둬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갑 제작과 농사일을 했고, 셰익스피어도 소젖짜기, 양털 깎기,버터 만들기,가죽을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기 등을 하며 아버지를 도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임종을 맞을 무렵, 꽤 부유한 편이었다. 런던에 입성한지 5년 만에 배우로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두 곳의 극장에서 주식을 샀고 부동산에 투자했으며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서 그는 1년에 300파운드 정도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아내에게 얼마의 유산을 남겼을까? 그는 아내에게 1센트도 주지 않았다. 아내에게 남긴 것은 그가 두 번째로 소중히 여기던 침대 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침대 틀에 관한 내용도 유언장을 작성한 뒤 나중에 급하게 끼워 넣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희곡 원고가 출간되기 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많은 책을 쓴 S.A. 태너바움 박사에게 윌리암 셰익스피어가 그 유명한 희곡들을 직접 썼다는 증거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했던 것만큼 확실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셰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작품은 사실 옥스포드 백작이었던 프랜시스 베이큰 경이 쓴 희곡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책이 열 권도 넘는다.

나는 종종 셰익스피어 무덤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묘비명을 읽는다.

좋은 친구들이여 부탁한다.
이곳에 묻힌 유해를 파헤치지 마십시요.
여기에 있는 돌들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요
유골들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작은 마을 교회의 앞뜰에 묻혔다. 어떻게 그가 이런 영예로운 자리에 묻힌 것일까?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그의 천재성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영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 셰익스피어가 교회에 묻힌 까닭은 고향에 돈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고향 마을에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작가의 유골은 오늘날까지 아무도 모르는 쓸쓸한 무덤에 갇혀 영원히 잊혔을지도 모른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클래식 사 간


끈기와 노력으로 꿈에 다가선

엔리코 카루소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고된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 덕분에 탄생한 노력파 성악가

1921년 엔리코 카루소가 마흔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쳤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겨 말을 잊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루소는 세상의 모든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최고의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과로로 인해 매우 지친 상태였다. 가벼운 감기려니 생각하고 그것을 무시했으나, 결국 6개월간 죽음과 격렬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미사를 올렸고,많은 이가 그의 생명을 위해 절실하게 기도했다.

카루소는 신의 선물이 아닌, 오랜 기간 끊임없는 노력으로 얻은 황홀한 목소리를 지녔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한 강한 의지로 성공을 이룬 것이다.

어릴 때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가볍고 얇아서 선생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노래를 할 수 없겠구나. 목소리가 별로야. 창틈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아.”

사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친 고음이라 갈라지기 일수였고 연기력마저 형편없었다. 그래서 공연 내내 그는 쉬익하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카루소만큼이나 달콤한 성공을 맛본 이는 없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그는 자신의 힘겨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이후로 평생 그는 어머니의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카루소의 어머니는 스물 한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열여덟 아이가 어린아이일 때 모두 죽었고 단 세 명의 아이만이 살아남았다. 그녀는 고생과 슬픔에 갇혀 살던 평범한 시골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 아들이 천재적인 자질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고생하더라도 아이의 앞날은 밝혀 주기로 결심했다. 카루소는 종종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저의 음악 교육을 위해서 신발도 없이 고생만 하셨습니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드게 하고 카루소를 공장에 보냈다. 그는 온종일 공장에서 일했고, 모든 업무가 끝난 저녁에야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공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즈음 카루소는 근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자리를 얻었다. 또한 여인의 집 창문 아래에서 세레나데를 대신 불러주는 일도 종종 했다. 여인을 흠모하는 한 음치 남자가 화려한 몸짓으로 달빛아래서 입을 뻥긋거릴 때, 카루소는 문 뒤에 숨어 아폴로 신이 들려주는 음악만큼 부드럽고 매력적인 선율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 노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에게 오페라 무대위에서 제대로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그는 리허설에서 상대를 다 망쳐 버렸고, 목에서는 유리 조각처럼 거친 쇳소리만 새어나왔다. 수차례 반복해 봤지만 모든 음정은 최악이었고,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극장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후에 가진 진짜 첫 데뷰 무대에서 그는 만취 상태로 공연장에 올랐고, 지나치게 취한 나머지 그의 목소리는 청중의 야유와 소음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주인공을 맡은 테너가 병에 걸렸다. 임시 대역을 맡아가던 카루소도 하필 그 자리에 없었다. 심부름꾼은 거리로 나가 카루소를 찾아 헤맸다. 비바람을 맞으며 세 거리를 달리던 그는 어느 포도주 가계에 앉아있는 카루소를 발견했다.

카루소는 힘껏 극장으로 달려갔다. 흥분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간신히 극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진한 포도주 냄새가 풍겼고, 세상이 마치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극장은 결국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극장에서 쫒겨났다. 다음 날 그는 끔찍한 절망에 사로잡혀 자살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겨우 1리라밖에 없었다. 한 병의 포도주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그는 온 종일 먹지도 못하였다. 그저 술을 마시며 어떻게 죽을지 궁리할 뿐이었다. 그때 오페라 극장의 심부름꾼이 문을 벌컥 열었다.

“카루소!”

그는 소리쳤다.

“카루소, 이리 와! 사람들이 다른 테너의 노래는 듣기 싫대.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야단이야. 그들은 너를 원해. 너를 말이야.”

“나를?”

카루소는 울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그들은 내 이름도 모르는걸.”

“물론 그들은 네 이름을 몰라.” 심부름꾼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를 원해. 그들이 ‘주정뱅이’를 왜치고 있거든!”

생을 마감할 무렵, 엔리코 카루소는 상당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음반을 통해 올린 수입만 해도 200만 달라거 넘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가난으로 호되게 당한 기억때문에 죽지 직전까지도 가계부를 썼다. 소장용으로 산 값비싼 레이스와 조각된 상아를 산 것도, 심부름꾼에게 팁을 준 것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카루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목소리를 지녔지만 의상실에서 메이크업을 할 때에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가 몸게 해롭다고 사람들이 조언해도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또 공연에 앞서서는 언제나 위스키와 소다를 한 모금씩 마셨다.

열 살 때 학교를 떠난 그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고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왜 책을 읽어야 해? 삶 그 자체가 공부라고.”

그는 독서 대신 우표와 희귀한 동전을 모으는 취미를 가졌고, 만화를 그리는 데에도 소질이 있어 자신의 작품을 이탈리아 잡지에 싣기도 했다.

그는 오왯동안 지독한 두통을 앓았다. 감각이 둔해졌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기운이 딸리는 것을 느끼며 점점 조용히 공부하는데 시간을 썼다. 청중의 환호와 박수갈채도 더는 흥미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고독에 빠져 지내며 신문 기사를 스크랲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나폴리에서 태어났지만 처음으로 고향에서 노래하려고 했을 때 그를 반긴 것은 언론사의 혹평과 청중의 무반응 뿐이었다. 카루소는 이날 자신을 모욕한 나폴리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성기를 맞은 후 나폴리를 방문해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냉정하게 거절하곤 하였다.

그의 일생 가운데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은 그가 그가 처음으로 딸 글로리아를 안아 보았을 때였다. 글로리아가 성장해서 뛰어다니며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 살 던 어느 날, 피아노 옆에 서 있던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글로리아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기억하오?”

그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


목숨을 바쳐 도전한 로버트 펠건 스콧

 

- 남극의 비밀을 밝히려 길을 떠났다가 신의 비밀을 발견한 용맹한 탐험가-

내가 아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남극에 두 번째로 도착한 로버트 스콧의 이야기만큼 영웅적이고 비극적이지는 않다. 스콧과 두 동료가 로스 아이스 배리어에 생을 마감한 그 순간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준다.

1913년 2월 화창한 오후, 영국에 스콧의 죽음이 전해졌다. 샤프란이 리젠트 공원을 수놓으며 피어날 무렵이었다. 트라팔가로 해전에서 전해진 넬슨 제독의 사망 소식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뉴스였다.

그로부터 23년 후, 영국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세계 최초의 극지 박물관을 설립해 스콧에게 바쳤다. 세계 방방곡곡의 극지방 탐험가들이 이 영웅적인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입구에는 스콧의 비문이 라틴어로 적혀 있다.

“그는 남극의 비밀을 밝히려 길을 떠났다가 신의 비밀을 발견했다.”

스콧은 테라 노바호를 타고 비극적인 남극 탐사를 시작했다. 북극권의 차가운 물속으로 배가 들어선 바로 그 순간부터 운명의 장난이 그를 따랐다.
거대한 파도가 테라 노바 호를 덮쳤다. 화물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수천 톤의 바닷물이 채우기 시작했다. 내연기관과 펌프도 물에 잠겼다. 그 튼튼했던 배도 거친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스콧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일부러 추위에 잘 견디는 조랑말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조랑말조차 시베리아의 둔드라 지역에서는 버티지 못했다. 가루처럼 날리는 눈발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던 조랑말들은 크레바스에 빠져 다리를 다쳤고 일행은 결국 말들을 죽여야 했다. 유콘 산이 익숙한 시베리안 허스키들도 방향감각을 잃고 빙하의 갈라진 틈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스콧과 네 명의 동료는 500킬로그램의 썰매를 끌고 남극을 향해 돌진했다. 대원들은 얼음 지대를 지나는 동안 해발 3천 미터의 차갑고 희박한 공기 중에서 숨을 고르며 썰매를 끌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가장 매혹적인 탐험, 그 도착점은 신비에 둘러싸인 남극점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 누구도 발을 디딘적이 없는 곳이었다. 어떤 생명체도 없는, 심지어 갈매기 한 마리조차 날지 않는 곳이었다.

2주만에 드디어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좌절과 충격뿐이었다. 그들보다 앞선 누군가가 남극점에 막대 하나를 꽃아 놓은 것이다. 막대기에 매달린 천 조각 하나가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다름 아닌 노르웨이의 국기였다.

노르웨이에서 온 아문젠이 이미 그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탐험대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려 온 모든 과정이 고작 5주 전에 물거품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들은 절망감을 떠 안은 채 돌아가야 했다.


탐험대의 귀향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서사시였다. 엄청나게 차가운 바람에 그들의 얼굴이 얼어붙었고 나중에는 턱수염까지 얼었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는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탐험대에서 가장 힘이 센 에번스 하사가 미끄러지면서 얼음에 머리를 부딫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오츠 대위의 발이 동상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동료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사나운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차분한 말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그리고 그는 영원히 가 버렸다. 얼어붙은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기념비가 서있다.

“대단히 용감하고 위대한 한 사람이 여기 잠들다.”

스콧과 남은 동료들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몰골은 참혹했다. 코와 손가락, 발이 동상에 걸렸다. 1922년 2월 19일 남극점을 떠난지 50일이 되던 날, 그들은 마지막 캠프를 세웠다. 두 잔의 차를 끓일 수 있는 연료와 며칠간 먹을 식량이 전부였다. 그러나 불과 18킬로메터 떨어진 거리에 보급품이 묻혀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비극적인 운명이 그들을 압도했다. 텐트 밖에서 엄청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격한 칼바람이 쌓여 있던 눈을 날려 버리자 눈 아래 모습을 감추고 있던 뾰죽한 얼음 언덕이 드러났다. 어떤 생명체라도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11일 동안 그들은 텐트 안에 갇혀 꼼짝 할 수 없었다. 이제 보급품은 다 떨어졌다. 최후의 순간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퍽 쉬운 탈출구가 있었다. 그들이 위급상황을 대비해서 소지하던 아편이었다. 아편을 많이 피우면 몽롱한 행복감에 젖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 특유의 스포츠맨십을 발휘하여 죽음과 직면하기로 했다.

마지막 몇 시간동안 스콧은 제임스 배리 경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의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음식은 남아있지 않았고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스콧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텐트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를 당신이 들으셨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8개월 후, 남극의 따사로운 태양이 눈부신 얼음 위로 내리쬐었다. 마침내 구조대는 얼어붙은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십자가 모양으로 묶은 두 개의 스키 아래에 시신 두 구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무덤 위에는 테니슨의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이 적혀 있엇다.

“변함없는 영웅적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의지는 강건하다.
투쟁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절대 무릎 꿇지 않으리니!”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 클래식 간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