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세상을 바꾼 위대한 인물들/이달의 화두/2022년 11월 15일>

오늘의 지성들과 함께 다시 읽어 보는

예수의 산상보훈

 

현대에 다시 보는 산상보훈-바보같은 지혜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자는 복이 있나니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하여 버릴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20-23)

버지니아 스템 오웬스(Virginia Stem Owens)

제가 대학 1학년 영어클라스에서 학생들의 수사학 교과서에 들어 있는 킹 제임스 버젼의 “산상보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과제물로 내줄 때에는 그것을 읽은 학생들이 적어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들이 써내는 페이퍼에 일말의 신앙심을 보여주리라 기대하였습니다. 더구나 텍사스 주는 항상 바이블 벨트의 중심지로 간주되는 곳이 아닌가?

내가 집어든 첫 번째 페이퍼는 “내 생각에 종교는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이다”로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이 글이 한 학기 내내 인습타파적인 말은 한 마디도 안했던 학생의 글이라는데서 약간 놀랐습니다. 나는 두 번째 페이퍼의 첫 문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옛말에 ‘당신이 읽는 것들을 다 믿지 말라’는 말이 있다. 산상보훈이 바로 이 경우에 적용되는 경우다.”

'그래! 우연이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세 번째 페이퍼를 집었습니다. “2천 여년 전에 쓴 것을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로 시작하여 “ 성경에는 아담과 이브가 처음 두사람인데 그렇다면 흑인들은 어디에서 나온것인가? 성경은 또한 다이나쇼어에 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은데 내 생각에는 하나님이 그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붉은색 펜을 내려 놓았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내가 여기에서 맞대결하고 있는 페이퍼들은 중요한 대세인 것입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엉성한 논리나 철자법이나 떼어쓰기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선생으로서 나는 그들의 삼단논법을 살펴 보고 철자법 틀린 것들을 지적해야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이 학생들이 a)왜 그들이 읽은 것들에 대하여 화를 내었나? b)왜 그들이 그 내용에서 무시된 것을 그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처음 주일학교에서 산상보훈에 접했을 때는 인내심 많은 미스터 로저스와 같이 호기심 많은 아이들에 둘러 쌓여 푸른언덕에 앉아있는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화를 낸다거나 외면하는 일 따위는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페이퍼들을 읽어가면서 첫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 분명해졌습니다. 말하자면:

“교회가 설교하는 것들은 극단적으로 엄격하고 죄냐 아니냐 하는것만 따지지 전혀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산상보훈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읽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아무도 완전하지 않은데 나더러 완전해야 한다고 죄책감을 갖게 한다. “

“이 설교가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다. 여자를 보기만해도 간음한 것이라고? 그것은 내가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바보같으며, 비 인간적인 선언이다.”

여기에서 나는 고무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바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아주 순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앙의 적으로 간주되는 지적인 반 영지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형적인 쾌락주의입니다. 그것은 살로매의 춤을 주시하는 헤롯입니다. 그것은 부자가 되려는 그들의 꿈을 바늘귀의 이야기로 깨어버리셨을 때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겠습니까?”하고 묻는 제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2 천년 문화적 안개를 거치고도 걸려지지 않은 복음에 대한 순수한 반응이요 진정한 모습입니다.

내가 다른 페이퍼들에서도 발견한 것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무시된데 대한 분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상보훈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반면에 나는 성경은 수많은 다른 언어에서 번역된 것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규정(법)이 아니라 안내서로 사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대비책은 어떤 팔복은 현대의 생활패턴에는 적합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날 다수에 의해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저는 아직까지 도덕에 따른 입장과 그들의 “누가 말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문제라고”라는 유명한 격언 사이에서 논리적인 모순을 발견한 학생들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페이퍼에서는 요령부득의 전제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가장 당혹스러운 학생을 발견하였습니다.

“산상보훈에서 저자는 과거 한 세대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그것은 미래에는 동일한 맥락으로 끌어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그것이 기록된 때와 동일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고. 좋은 예절을 위한 안내서로사용될 수는 있다.”

좋은 예절! 이 모두가 내가 기대했던 낡은 풍의 경건으로 남아있다는 말인가? 산상설교는 에밀리 포스트에 의한 제안 정도로 낮아졌단 말인가?

이러한 반응들에 대하여 나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무엇보다도 먼저 이제 나는 왜 어떤 사람이 문학강좌에서 성경의 간단하면서도 진부한 이야기들, 말하자면 요나와 고래 이야기,또는 노아와 방주 이야기들을 설명해야 하는지 알게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상으로 산상수훈이 좋은 예절을 위한 안내서임을 발견한 젊은이들은 제외하더라도 성경이 1세기에 그랫던 것 같이 정직하고, 무지한 귀들에게 여전히 공세를 취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상하게도 신나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어쨌건 의미심장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이 지난 세기 동안에 그 특징적인 맛을 거의 다 상실한 판국에 최근 널리 퍼진 성경무식증은 우리로 하여금 1세기 본래의 청중들과 거의 근사한 상황으로 우리를 쏘아넣었습니다. 성경은 더 이상 지나치게 감상적인 문화적 연대에 의해 질식되어서는 안됩니다.

*Ed. by Charles E. Moore <Following the Call> Living the Sermon on the Mount Together, Published by Plough 에서

 


 

팔 복 또는 참된 행복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옳은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그들은 자비를 입을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위의 '팔복' 또는 '참된 행복'은 그 뒤에 나오는 산상설교를 요약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예수 자신을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하고 겸손한 자, 의에 주린자. 동정심이 많은 자, 마음이 순수한 자 그리고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평화를 만드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예수를 따르려고 힘쓰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에 자신을 맡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결과가 어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팔복은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팔복이 가진 충격적인 가치를 상실한 듯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못생긴 사람은 복이 있다, 기형인 사람은 복이 있다, 역겨운 사람은 복이 있다. 낙오자는 복이 있다, 패배자는 복이 있다, 버려진 자는 복이 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복이 있다. 그리고 근심걱정 없는 삶을 높이 평가하는 이 세상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핍박받는 것을 즐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부자가 복받은 사람이 아닌가요? 근심걱정 없는 것이 행복한 것 아닌가요? 고집세고 공격적인 사람들이 앞서는 것 아닌가요? 원하는 것들을 다 갖는 것이 '좋은 삶’ 아닌가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온유하고, 마음이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엘리트도 아니고 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높이 존경받는 사람들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한 삶이란 언제나 바보같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복은 어떤 존재양식이 번영하는 인간을 만드는지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왕국의 시민으로 살면서 그를 따르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 서 있습니다.

위대한 교사 예수-헨리 J.M. 나우엔

복음의 멧세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의 초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우리 앞에 놓고 지낸다면 우리는 곧 예수를 따르고 그와 같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인 예수는 가난했습니다. 예수의 빈곤은 경제적인 빈곤이나 사회적인 빈곤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권력을 능가하는 무권력, 어떤 방어도 극복하는 연약함, 자족함을 넘어서는 의존성 등을 스스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가난하셨습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노래”에서 아름답게 표현된대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빌닙보 2:6-7)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살기로 선택한 마음이 가난한 삶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가난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시면서 우리들을 복있는 자라고 부르셨습니다.

복 있는자인 예수께서는 온유하셨습니다. 비록 그는 무척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온갖 위선들을 통열히 비판하고 거짓과 자만심과 조작과 억압 등을 공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무척 부드러웠습니다. 그는 쓰러저가는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고통에 응답하시는 분이시고 그들의 상처를 고쳐주시는 분이시며 심약한 자들에게 용기를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복 있는자인 예수는 애통하눈 장입니다. 예수께서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 애통하였으며 곧 무너져버릴 예루살렘 도성을 내려다 보시면서 우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마음을 고통으로 채우는 모든 손실과 파괴에 눈물 흘리셨습니다. 그는 슬퍼하는자들과 함께 슬퍼하였고 우는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셨습니다. 폭력, 욕심, 사치 그리고 그외에도 수많은 지구와 그 위의 백성들의 얼굴을 왜곡하는 죄악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하여금 애통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기 바란다면 애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받은 아들인 예수는 의에 굶주리고 목말랐습니다.그는 불의를 혐오하였습니다. 그는 富를 모으고 억압과 착취로 영향을 끼치려는 자들에게 저항하였습니다. 그의 전 존재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제요 자매로, 아들이요 딸로 똑같이 돌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은 기도를 많이 하거나 헌금을 많이 바치는데 있는 것이 아니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병자들을 방문하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방문하는 것이라고 강열하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의로운 세계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예수께서는 우리들도 그와 같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살아 갈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복받은 자녀인 예수께서는 자비로우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동정을 보이는 것과는 다른것입니다. 동정이란 말에는 거리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무시한다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거지가 돈을 구걸하여 당신이 동정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줄 때 당신은 자비를 베푸은 것이 아닙니다. 자비는 동정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같이 되자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무시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와 같이 되시기를 원하셨고 우리와 깊이 공감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 예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순수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한 가지만을 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아버지의 뜻만을 행하기 원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던지간에 그것은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셨으므로 나는 항상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만 하느니라(요한복음 8:28-29) 예수의 마음에는 갈등이란 것이 없습니다. 의심스러운 동기도 없고 숨겨진 의도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 있으므로 예수 안에는 완전한 내적 합일만이 있습니다.예수같이 된다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 순수함이란 예수께서 주신것으로 우리들에게 진정한 영적 비젼을 줄것입니다.

아버지의 복받은 자녀인 예수는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그의 평화란 단지 전쟁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조화를 이루거나 평정을 이룬 상태가 아닙니다. 그의 평화란 행복으로 충만한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공짜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너희에게 끼치노니 고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14:27)고 하셨습니다.

평화는 샬롬입니다.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마음과 심장과 육체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는 전쟁에 시달리는 이 세상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과 증가하는 인간들의 갈등가운데에도 존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생명을 형제들과 자매들을 위하여 내어주심으로 평화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평화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것입니다. 평화에 봉사하기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칠 용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자녀인 예수는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가난하고, 부드럽고, 애통하셨던 그는 충렴결백함에 주리고 목말랐으며 자비롭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며 평화를 만드는자였지만 이 세상에서는 환영을 받지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는 기성질서에는 위협이었으며 이 세상의 통치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계속 짜증거리였습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지만 그는 비난자로 간주되었습니다. 아무도 비판하지 않았지만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고 부끄러움을 갖게했습니다. 아무도 판단하지 않았지만 그를 본 사람들은 재판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를 용서할 수 없는, 괴멸시켜버릴 필요가 있는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죄를 자백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같이 되기를 원할 때 우리들은 항상 사랑받고 존경받으리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거절 당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헨리 나우웬은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사제이자 사목신학자이며 그리스도교 영성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