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세상을 바꾼 위대한 인물들/이달의 화두/2022년 7월 15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한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치 않는 결혼으로 후회의 세월을 보냈던 다재다능한 극작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100년이 흐른 뒤에도 그는 여전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에는 그와 관련된 방대한 양의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화필 끝으로 사랑니를 갈았던 무수한 저자중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작가로, 지금도 수천 명의 사람이 그가 태어난 고향을 방문하며 그를 기억한다.

나 역시 그중 한 사람이다. 1921년 나는 스트랫퍼드에서 슘래터리에 이르는 시골 마을을 찾아 그가 열정적으로 돌아다녔을 들판을 거닐었다. 그 장소는 수수한 시골 소년인 셰익스피어가 연인 앤 웨어틀리나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던 곳이었다.

그는 자신이 수백 년 동안 명성을 유지할 작가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또한 그의 아름다운 연인이 슬픈 운명으로 후회의 세월을 보낼 것 역시 알지 못했다. 어쩌면 예상치 못한 것이 다행일지 모른다.

셰이스피어의 원치 않는 결혼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비극이엇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진심으로 앤 웨이톨리를 사랑했지만 달빛이 가득한 어느 늦은 밤에 앤 해서웨이라는 여인과 하루를 보내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앤 해서웨이는? 자신과 하루 밤을 보낸 그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공포와 절망에 휩싸였다. 그녀는 이웃집을 찾아가 그녀가 왜 그와 결혼해야만 하는지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웃은 순박하고 정의로운 농부들이어서 그 둘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그녀를 거들었다.그다음날, 그들은 마을 회관으로 가서 셰익스피어와 앤 헤서웨이의 결혼을 밝히는 글을 남겼다.

이렇게 결혼한 셰익스피어의 신부는 그보다 여덟 살이나 더 많았다. 시작하는 단계부터 그들의 결혼생활은 참혹했다. 그는 자신의 연극을 통해 여러차례나 나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앤 해서웨이와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산 것도 아니었다. 그는 결혼한 이후 주로 런던에서 머물렀고 1년에 한 번 정도만 아내가 있는 고향에 들렀다.

오늘날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지역은 작은 초가집과 접시꽃이 피어 있는 정원, 독특하게 구부러진 거리가 있는,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의 하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절에도 그랬을까?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 그 지역은 지저분하고 가난하며 병이 만연해 처참한 곳이었다. 심지어 하수구도 없었다. 돼지가 음식 쓰레기를 먹으며 마을을 돌아다녔고, 공무원이엇던 셰익스피어의 아버지는 마굿간에서 나온 쓰레기를 거리에 쌓아 놓았다가 벌금을 물은 적도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에는 스트랫퍼드 주민의 절반 이상이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비참한 형편이었다. 또한 대다수의 사람이 문맹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딸과 손녀들까지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다.

영국 문학의 찬란한 역사가 될 셰익스피어조차 일을 하기 위해 열세 살 때 학교를 그만 둬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장갑 제작과 농사일을 했고, 셰익스피어도 소젖짜기, 양털 깎기,버터 만들기,가죽을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기 등을 하며 아버지를 도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임종을 맞을 무렵, 꽤 부유한 편이었다. 런던에 입성한지 5년 만에 배우로 성공해 많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두 곳의 극장에서 주식을 샀고 부동산에 투자했으며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서 그는 1년에 300파운드 정도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아내에게 얼마의 유산을 남겼을까? 그는 아내에게 1센트도 주지 않았다. 아내에게 남긴 것은 그가 두 번째로 소중히 여기던 침대 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침대 틀에 관한 내용도 유언장을 작성한 뒤 나중에 급하게 끼워 넣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희곡 원고가 출간되기 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많은 책을 쓴 S.A. 태너바움 박사에게 윌리암 셰익스피어가 그 유명한 희곡들을 직접 썼다는 증거가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링컨이 게티스버그에서 연설했던 것만큼 확실한 사실”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셰익스피어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의 작품은 사실 옥스포드 백작이었던 프랜시스 베이큰 경이 쓴 희곡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책이 열 권도 넘는다.

나는 종종 셰익스피어 무덤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묘비명을 읽는다.

좋은 친구들이여 부탁한다.
이곳에 묻힌 유해를 파헤치지 마십시요.
여기에 있는 돌들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을 것이요
유골들을 건드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작은 마을 교회의 앞뜰에 묻혔다. 어떻게 그가 이런 영예로운 자리에 묻힌 것일까?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그의 천재성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영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 셰익스피어가 교회에 묻힌 까닭은 고향에 돈을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고향 마을에 돈을 빌려주지 않았더라면 샤일록이라는 인물을 창조한 작가의 유골은 오늘날까지 아무도 모르는 쓸쓸한 무덤에 갇혀 영원히 잊혔을지도 모른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클래식 사 간


끈기와 노력으로 꿈에 다가선

엔리코 카루소

아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고된 농사일도 마다하지 않은 어머니 덕분에 탄생한 노력파 성악가

1921년 엔리코 카루소가 마흔여덟의 나이로 생을 마쳤을 때, 모든 사람이 슬픔에 잠겨 말을 잊지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카루소는 세상의 모든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최고의 시절에 세상을 떠났다. 과로로 인해 매우 지친 상태였다. 가벼운 감기려니 생각하고 그것을 무시했으나, 결국 6개월간 죽음과 격렬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미사를 올렸고,많은 이가 그의 생명을 위해 절실하게 기도했다.

카루소는 신의 선물이 아닌, 오랜 기간 끊임없는 노력으로 얻은 황홀한 목소리를 지녔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습한 강한 의지로 성공을 이룬 것이다.

어릴 때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가볍고 얇아서 선생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는 노래를 할 수 없겠구나. 목소리가 별로야. 창틈에서 나는 바람 소리 같아.”

사실 그의 목소리는 지나친 고음이라 갈라지기 일수였고 연기력마저 형편없었다. 그래서 공연 내내 그는 쉬익하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카루소만큼이나 달콤한 성공을 맛본 이는 없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그는 자신의 힘겨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이후로 평생 그는 어머니의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카루소의 어머니는 스물 한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열여덟 아이가 어린아이일 때 모두 죽었고 단 세 명의 아이만이 살아남았다. 그녀는 고생과 슬픔에 갇혀 살던 평범한 시골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한 아들이 천재적인 자질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자신이 고생하더라도 아이의 앞날은 밝혀 주기로 결심했다. 카루소는 종종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는 저의 음악 교육을 위해서 신발도 없이 고생만 하셨습니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드게 하고 카루소를 공장에 보냈다. 그는 온종일 공장에서 일했고, 모든 업무가 끝난 저녁에야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공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즈음 카루소는 근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자리를 얻었다. 또한 여인의 집 창문 아래에서 세레나데를 대신 불러주는 일도 종종 했다. 여인을 흠모하는 한 음치 남자가 화려한 몸짓으로 달빛아래서 입을 뻥긋거릴 때, 카루소는 문 뒤에 숨어 아폴로 신이 들려주는 음악만큼 부드럽고 매력적인 선율에 자신의 영혼을 담아 노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에게 오페라 무대위에서 제대로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그는 리허설에서 상대를 다 망쳐 버렸고, 목에서는 유리 조각처럼 거친 쇳소리만 새어나왔다. 수차례 반복해 봤지만 모든 음정은 최악이었고, 그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극장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후에 가진 진짜 첫 데뷰 무대에서 그는 만취 상태로 공연장에 올랐고, 지나치게 취한 나머지 그의 목소리는 청중의 야유와 소음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날 주인공을 맡은 테너가 병에 걸렸다. 임시 대역을 맡아가던 카루소도 하필 그 자리에 없었다. 심부름꾼은 거리로 나가 카루소를 찾아 헤맸다. 비바람을 맞으며 세 거리를 달리던 그는 어느 포도주 가계에 앉아있는 카루소를 발견했다.

카루소는 힘껏 극장으로 달려갔다. 흥분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간신히 극장에 도착하긴 했지만 그에게는 진한 포도주 냄새가 풍겼고, 세상이 마치 회전목마처럼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극장은 결국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렇게 그는 극장에서 쫒겨났다. 다음 날 그는 끔찍한 절망에 사로잡혀 자살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의 주머니에는 겨우 1리라밖에 없었다. 한 병의 포도주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그는 온 종일 먹지도 못하였다. 그저 술을 마시며 어떻게 죽을지 궁리할 뿐이었다. 그때 오페라 극장의 심부름꾼이 문을 벌컥 열었다.

“카루소!”

그는 소리쳤다.

“카루소, 이리 와! 사람들이 다른 테너의 노래는 듣기 싫대. 무대에서 내려오라고 야단이야. 그들은 너를 원해. 너를 말이야.”

“나를?”

카루소는 울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그들은 내 이름도 모르는걸.”

“물론 그들은 네 이름을 몰라.” 심부름꾼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를 원해. 그들이 ‘주정뱅이’를 왜치고 있거든!”

생을 마감할 무렵, 엔리코 카루소는 상당한 부자가 되어 있었다. 음반을 통해 올린 수입만 해도 200만 달라거 넘었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가난으로 호되게 당한 기억때문에 죽지 직전까지도 가계부를 썼다. 소장용으로 산 값비싼 레이스와 조각된 상아를 산 것도, 심부름꾼에게 팁을 준 것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카루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특별한 목소리를 지녔지만 의상실에서 메이크업을 할 때에는 담배를 피웠다.? 담배가 몸게 해롭다고 사람들이 조언해도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또 공연에 앞서서는 언제나 위스키와 소다를 한 모금씩 마셨다.

열 살 때 학교를 떠난 그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고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왜 책을 읽어야 해? 삶 그 자체가 공부라고.”

그는 독서 대신 우표와 희귀한 동전을 모으는 취미를 가졌고, 만화를 그리는 데에도 소질이 있어 자신의 작품을 이탈리아 잡지에 싣기도 했다.

그는 오왯동안 지독한 두통을 앓았다. 감각이 둔해졌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그는 기운이 딸리는 것을 느끼며 점점 조용히 공부하는데 시간을 썼다. 청중의 환호와 박수갈채도 더는 흥미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고독에 빠져 지내며 신문 기사를 스크랲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나폴리에서 태어났지만 처음으로 고향에서 노래하려고 했을 때 그를 반긴 것은 언론사의 혹평과 청중의 무반응 뿐이었다. 카루소는 이날 자신을 모욕한 나폴리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성기를 맞은 후 나폴리를 방문해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냉정하게 거절하곤 하였다.

그의 일생 가운데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은 그가 그가 처음으로 딸 글로리아를 안아 보았을 때였다. 글로리아가 성장해서 뛰어다니며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에서 살 던 어느 날, 피아노 옆에 서 있던 그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그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글로리아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기억하오?”

그 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과 작별했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


목숨을 바쳐 도전한 로버트 펠건 스콧

- 남극의 비밀을 밝히려 길을 떠났다가 신의 비밀을 발견한 용맹한 탐험가-

내가 아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남극에 두 번째로 도착한 로버트 스콧의 이야기만큼 영웅적이고 비극적이지는 않다. 스콧과 두 동료가 로스 아이스 배리어에 생을 마감한 그 순간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준다.

1913년 2월 화창한 오후, 영국에 스콧의 죽음이 전해졌다. 샤프란이 리젠트 공원을 수놓으며 피어날 무렵이었다. 트라팔가로 해전에서 전해진 넬슨 제독의 사망 소식 이후로 가장 충격적인 뉴스였다.

그로부터 23년 후, 영국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세계 최초의 극지 박물관을 설립해 스콧에게 바쳤다. 세계 방방곡곡의 극지방 탐험가들이 이 영웅적인 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입구에는 스콧의 비문이 라틴어로 적혀 있다.

“그는 남극의 비밀을 밝히려 길을 떠났다가 신의 비밀을 발견했다.”

스콧은 테라 노바호를 타고 비극적인 남극 탐사를 시작했다. 북극권의 차가운 물속으로 배가 들어선 바로 그 순간부터 운명의 장난이 그를 따랐다.
거대한 파도가 테라 노바 호를 덮쳤다. 화물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수천 톤의 바닷물이 채우기 시작했다. 내연기관과 펌프도 물에 잠겼다. 그 튼튼했던 배도 거친 파도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스콧의 불행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일부러 추위에 잘 견디는 조랑말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 조랑말조차 시베리아의 둔드라 지역에서는 버티지 못했다. 가루처럼 날리는 눈발에 갇혀 어쩔 줄 몰라 하던 조랑말들은 크레바스에 빠져 다리를 다쳤고 일행은 결국 말들을 죽여야 했다. 유콘 산이 익숙한 시베리안 허스키들도 방향감각을 잃고 빙하의 갈라진 틈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스콧과 네 명의 동료는 500킬로그램의 썰매를 끌고 남극을 향해 돌진했다. 대원들은 얼음 지대를 지나는 동안 해발 3천 미터의 차갑고 희박한 공기 중에서 숨을 고르며 썰매를 끌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행하지 않았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는 가장 매혹적인 탐험, 그 도착점은 신비에 둘러싸인 남극점이었기 때문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이래 누구도 발을 디딘적이 없는 곳이었다. 어떤 생명체도 없는, 심지어 갈매기 한 마리조차 날지 않는 곳이었다.

2주만에 드디어 탐험대는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좌절과 충격뿐이었다. 그들보다 앞선 누군가가 남극점에 막대 하나를 꽃아 놓은 것이다. 막대기에 매달린 천 조각 하나가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다름 아닌 노르웨이의 국기였다.

노르웨이에서 온 아문젠이 이미 그곳에 도착했던 것이다. 탐험대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기다려 온 모든 과정이 고작 5주 전에 물거품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그들은 절망감을 떠 안은 채 돌아가야 했다.


탐험대의 귀향길은 그야말로 고난의 서사시였다. 엄청나게 차가운 바람에 그들의 얼굴이 얼어붙었고 나중에는 턱수염까지 얼었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는 곧 죽음으로 직결되었다.

탐험대에서 가장 힘이 센 에번스 하사가 미끄러지면서 얼음에 머리를 부딫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목숨을 잃었다. 뒤이어 오츠 대위의 발이 동상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동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고 생각한 그는 다른 동료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사나운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다. 기쁨도 슬픔도 없는 차분한 말투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요.”

그리고 그는 영원히 가 버렸다. 얼어붙은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기념비가 서있다.

“대단히 용감하고 위대한 한 사람이 여기 잠들다.”

스콧과 남은 동료들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몰골은 참혹했다. 코와 손가락, 발이 동상에 걸렸다. 1922년 2월 19일 남극점을 떠난지 50일이 되던 날, 그들은 마지막 캠프를 세웠다. 두 잔의 차를 끓일 수 있는 연료와 며칠간 먹을 식량이 전부였다. 그러나 불과 18킬로메터 떨어진 거리에 보급품이 묻혀 있었기에 희망이 있었다. 조금만 더 걸으면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비극적인 운명이 그들을 압도했다. 텐트 밖에서 엄청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격한 칼바람이 쌓여 있던 눈을 날려 버리자 눈 아래 모습을 감추고 있던 뾰죽한 얼음 언덕이 드러났다. 어떤 생명체라도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11일 동안 그들은 텐트 안에 갇혀 꼼짝 할 수 없었다. 이제 보급품은 다 떨어졌다. 최후의 순간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그들에게는 퍽 쉬운 탈출구가 있었다. 그들이 위급상황을 대비해서 소지하던 아편이었다. 아편을 많이 피우면 몽롱한 행복감에 젖어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 특유의 스포츠맨십을 발휘하여 죽음과 직면하기로 했다.

마지막 몇 시간동안 스콧은 제임스 배리 경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의 상황을 알리기로 했다. 음식은 남아있지 않았고 죽음만이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스콧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텐트 속에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를 당신이 들으셨다면 참 좋았을 겁니다.”

8개월 후, 남극의 따사로운 태양이 눈부신 얼음 위로 내리쬐었다. 마침내 구조대는 얼어붙은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십자가 모양으로 묶은 두 개의 스키 아래에 시신 두 구가 묻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무덤 위에는 테니슨의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이 적혀 있엇다.

“변함없는 영웅적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의지는 강건하다.
투쟁하고 추구하고 발견하고 절대 무릎 꿇지 않으리니!”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 클래식 간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