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2022년 2월 1일>

20세기 초반, 미국의 인간관계 대가로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를 매달 소개하려고 합니다. 보람있게 살았던 저명인사들의 삶을 돌아보면서 명상해 보는 시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줄 것입니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은 죤 데이비슨 록펠러

한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고 청혼을 거절당했던 세계적인 백만장자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세 가지 놀라운 일을 해낸 인물이다.

첫째,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가 했던 최초의 일은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하루에 4센트를 받으며 감자를 캐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는 백만장자가 여섯 명도 되지 않았는데, 록펠러는 10조에서 20조 정도의 재산을 모은 갑부였다.

그러나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왜 그랬을까? 그녀의 어머니가 ’딸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가난한 남자와 결혼해 인생을 낭비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가 역사상 가장 많은 액수인 7억 5천만 달러를 사회에 기부한 것이며, 세 번째는 그가 아흔일곱 살까지 장수를 누렸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록펠러는 끔찍히 미움받는 인물이었다. 그를 죽이겠다는 협박 편지가? 매일 수천 통이나 날아들었으며, 밤낮으로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또한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스트레스를 받았다.
철도 사업가 해리먼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예순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센트와 10센트짜리 물건을 파는 대형 체인마켓을 설립한 울워스는 예순 일곱살에. 담배 사업으로 1억 달라의 수입을 올린 ‘벅’듀크는 예순 여덟살에 각각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록펠러는 해리먼, 울워스, 벅 듀크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했을뿐 아니라 더 오래 살았다.? 알려진 바와같이 백만장자 중에 틀니 없이 아흔일곱 살까지 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록펠러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의 장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물려받은 장수의 유전자 덕분이었을 것이고, 평온하고 침착한 성격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결코 흥분하거나 급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스탠다드 오일 캄파니의 사장이었을 때, 록펠러는 브로드웨이 26번가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 소파 하나를 마련해 두고 시간만 나면 삼십분간 낮잠을 잤다. 그렇게 하루에 다섯 번씩 낮잠을 자는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록펠러가 쉰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의학 역사사 가장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록펠러가 의학 연구에 수백만 달러를 기부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의 병을 계기로 록펠러 재단은? 한 달에 100만 달러레 가까운 금액을 인류의 건강을 위해 헌납한 것이다.

1932년 전염병인 콜레라가 돌던 시기에 나는 중국에 있었다. 피폐한 황무지, 그 질병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나는 베이징의 록펠러 의과대학에서 콜레라 백신을 접종할 수 있었다. 사실 그전까지는 록펠러가 아시아와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수많은 환자를 위해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록펠러 재단은 세계적인 수준의 십이지장충 박멸 캠페인을 벌였고 말라리아와의 오랜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고 있다. 무시무시한 황열병을 치료할 백신을 발견해 낸 것 역시 록펠러 재단 소속 의사들의 위업이다.

어릴 때 그는 칠면조 사육 일을 도와서 어머니에게ㅔ 용돈을 받곤 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 위해 8천 에이커 정도의 땅에서 우수한 품종의 칠면조를 길렀다.

어머니에게 받은 동전을 쓰지 않고 벽난로 선반 위에 놓인 찻잔속에 넣어 저축했다. 그는 하루에 37센트를 받았는데, 훗날 그돈이 쌓이고 쌓여 50달러가 되었다. 그는 모인 돈을 농장 주인에게 7센트의 이자를 받고 대출해 주었다. 그로 인해 록펠러는 50달러의 돈이 있으면 1년 만에 자신이 열흘간 힘들게 일한 만큼의 금액을 만들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저는 결심했죠. 돈의 노예가 되는 대신 돈이 나의 노예가 되게 하자고.”

록펠러는 부유한 가정서 태어난 아들의 성품을 망치지 않으려 애썼다. 예를 들어, 그는 아들의 영지내에서 수리해야 하는 울타리 기둥을 찾는 대가로 1센트를 주었다. 록펠러의 아들은 하루에 열세개의 기둥을 찾으면 13센트를 받았고, 울타리를 고치면 한 시간에 15센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아내도 아들이 바이올린 연습을 하면 시간당 5센트를 용돈으로 주곤 했다.
록펠러는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몇 달간 상업학교에 다녔을 뿐이다.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그의 모든 정규교육은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카고 대학에 5천만 달러를 기부했다. ?

그는 교회에도 관심이 있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던 젊은 시절, 그는 춤도 추지 않았고 카드놀이도 삼갔으며 영화도 보지 않았다. 술과 담배도 끊었다. 밥을 먹기 전에는 항상 기도를 했고 매일 성경을 읽었다. 시와 기도문에서 감명 깊은 구절을 골라 매일 묵상하기도 했다.

록펠러의 재산은 대략 분당 100달러의 비율로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지닌 유일한 꿈은 백 살까지 사는 것이었다. 그는 백 번째 생일인 1939년 7월 8일까지 자신이 살아 있다면 포칸티고 힐즈에 있는 영토에서 밴드를 이끌겠다고 말했으나 193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 밴드가 연주할 곡은 아마 ‘메기의 추억’이었을 것이다.

*데일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클래식)에서


 

불행을 희망으로 바꾼 헬렌 켈러

듣지도 보지도 말을 하지도 못했지만 나폴레옹에게 필적했던 장애를 극복한 긍정적인 여인.

마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19세기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두 인물은 나폴레옹과 헬렌 켈러다.”

마크 트웨인이 이 말을 했을 때 헬렌 켈러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헬렌 켈러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보다 100배 이상 많은 책을 읽었고, 열 한 권의? 책을 직접 쓰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음에도 그녀는 보통사람들보다 더 많은 음악을 즐겼다. 일생에서 9년 동안은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미국 모든 주에서 강연을 했다. 4년간 그녀는 보드빌의 주연 배우로 유럽을 순회하기도 했다.

태어날 때 헬렌 켈러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였다. 1년 6개월 동안 그녀는 다른 보통의 아이처럼 보고 들었으며 심지어 말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순식간에 재앙에 휩쓸리고 말았다. 태어난 지 19개월 만에 병에 걸려 듣지 못했고, 말을 할 수 없었으며, 보이지도 않게 된 것이다.?

어둠에 갇히게 된 그녀는 정글 속의 야생 동물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물건을 내던지고 부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손으로 게걸스럽게 집어 먹었다. 누군가 그 행동을 바로잡으려고 하면 그녀는 바닥에 누워 몸부림치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의 부모는 보스턴에 있는 퍼킨스 맹인학교에 딸을 보내 그녀를 가르칠 교사를 찾았다. 바로 그 순간 헬렌켈러의 비극적인 삶 속에 한 줄기 빛처럼 앤 맨스필드 설리반이 나타났다. 설리반은 겨우 스무 살이었지만, 퍼킨스 학교를 떠나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했다. 귀가 먹고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아이를 교육하는 일이었다. 비로 그녀 자신의 삶도 비참하고 초라했지만 말이다.

앤 설리반이 열 살이었을 때, 그녀는 남동생과 턱스베리에 있는 난민촌으로 보내졌다. 난민촌은 매우 북적거려서 두 아이는 화장되기 전의 시체를 대기시키는 ‘죽음의 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결국 어린 남동생은 병에 걸렸고 6개월 후에 죽었다. 겨우 열 네살이었던 그녀 역시 눈이 거의 실명되어 퍼킨스 학교로 보내졌고, 거기서 손으로 독서하는 법을 터득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시력은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완전히 눈이 먼 것은 그로부터 50년 후, 죽음을 맞이하기 바로 전이었다.

앤 설리번이 헬렌 켈러와 함께 만들어 낸 기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완벽한 어둠과 침묵 속에서 갇혀 지내던 아이가 짧은 시간안에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은 헬렌 켈러의 자서전 <나의 삶 이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듣거나 볼 수도, 심지어 말조차 할 수 없었던 어린 헬렌이 보통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기쁨이 책에 세세히 담겼다.

 

"그 뜻깊은 날이 지나갈 무렵, 침대에 누워있는 저보다 더 행복한 아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을 만끽하며 저는 난생처음 내일을 그리워했습니다."

스무 살이 된 헬렌 켈러는 레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설리반도 함께였다.그때 당시 그녀는 다른 학생들처럼 읽고 쓰고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처음 배운 문장은 ‘저는 이제 벙어리가 아닙니다’였다. 반복적으로 훈련한 그녀는 무한한 감동에 젖어 의기양양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이제 벙어리가 아닙니다.”

다소 외국인 억양이 섞인듯한 말투를 지녔던 그녀는 점으로 표시되는 점자 타자기로 글을 입력해서 책과 잡지를 직접 만들었다. 수정이 필요할 때는 머리핀으로 종이의 여백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었다. 그녀는 걸을 때 종종 혼잣말을 했는데 우리처럼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이용한 기호 언어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비서는 ‘헬렌 켈러의 방향감각은 보통 사람들보다 좋지 않다,’고 밝혔다.?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길을 잃은 적도 있었고 집안의 가구를 옮겨 놓으면 굉장히 당황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눈이 먼 그녀가 시각 대신 초인간적인 육감을 지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과학적으로 실험해 본 결과 그녀의 미각과 후각은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촉각만은 굉장히 예민해서 친구들이 말을 할 때 손가락을 그들의 입술에 대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피아노나 바이올린 위에 손을 살포시 얹기만해도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옷장의 진동으로 라디오를 들을 수도 있었다. 비록 자신은 노래를 하거나 음정을 전달할 수 없었지만, 노래하는 사람의 목에 손가락을 대서 노래를 듣는 것은 가능했다.

만약 헬렌 켈러가 당신과 악수를 한 후 5년이 지나 다시 만난다면, 그녀는 당신이 화가 났거나 행복하거나 기운이 없다 할지라도 악수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기억할 것이다.

그녀는 노를 저을 줄 알았고 수영을 했으며 말도 탔다. 그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체커와 체스게임을 즐겼으며 비가 오는 날아면 자수와 뜨게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보통 우리는 시력을 잃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는 것은 듣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그리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세상과 단절시키는 완전한 어둠과 침묵 속에서 그녀가 간절히 그리워한 것은 바로 사람들의 친근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데릴 카네기의 5분 명상록>더 클래식 간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