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종교다원주의란?/2021년 10월 1일>

길희성의 <종교다원주의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요즈음도 종종 듣게된다. 특히 보수적인 정통신앙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물음이다. 한국의 모 교단에서는 신학대학 학장이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하여 출교까지 당한 적이 있다. 한국교회에서 이 질문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종교다원주의'로 알려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는 먼저 '종교다원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 배경은 무엇이고 지향점은 무엇인가? 를 먼저 알고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길희성 교수는 개신교 신앙을 배경으로 성장하여 서울대 철학과,예일대 신학부, 하바드에서 Ph.D를 취득하였다. 서울대 철학과,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 은퇴후 강화도에 '공부와 명상의 집' 심도학사를 세우고 연구와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다.

비교종교학으로 불교를 전공하고 메이터 엑카르트의 영성에 심취하였던 그는 <보살 예수>, <종교의 의미와 목적> 등을 집필하였다.

<보살 예수>을 열면서 서론격으로 다룬 한 장을 일반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에 적절하리라 생각하여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바꾸어서 3회에 나누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찬반의 선입관보다는 이해하려는 진지한 자세로 일독을 권한다.(편집인)

하느님은 ‘종교다원주의자’

‘불교와 그리스도교'란 주제로 강의를 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불교를 전공으로 공부하긴 했지만, 신앙으로는 그리스도인이며 신학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불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기가지는 상당한 내적 갈등과 신앙적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사람이므로, 이번 강의에서도 제 개인적인 신학적 견해와 종교 이해를 말씀드리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디가지나 제 개인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혀두려고 합니다.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왜 저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오랜 종교생활과 종교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얻은 결론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신학과 사상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갖는가에 따라 인간이 구원받거나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고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데 동의하신다면, 저의 신학과 사상이 보수적인 신앙, 신학과 어긋난다 해도 여유를 갖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걸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물론 한국의 신학계, 종교계에서 ‘종교다원주의자’라 하면 오명이 됩니다.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종교다원주의를 공격합니다. 그것을 예상하면서도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에 대하여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가 된 것은, 외람된 말이지만, 하느님 자신이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분이므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저는 종교다원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지요.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과 관계맺는 존재이며,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분을 ‘종교다원주의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곧 시간과 영원,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인간과 하느님을 매개해주는 미디어, 즉 매개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세계의 성인과 성자는 모두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 나아가도록 인도해주는 안내자,매개자, 혹은 그리스도교 용어로 중보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와 깊이,넓이와 풍요로움을 전해주는 특별한 존재이며 하느님 계시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통해 자기 존재, 자기 얼굴을 알리려고 특별히 선택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수많은 성자와 다양한 종교적 미디어를 통해 인간과 교류해 왔고 인간도 그들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입니다.

좀더 근본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세계의 성인,성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계시라고 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그 안에 신성을 갖고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그리스도교 인간관입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함석헌 선생같은 분은 그것을 “씨알”이라고 했지요.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인간을 볼 때 하느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일그러진 인간성으로 인해 그것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긍정적으로 인간을 봐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자가 될 수 있는데, 다만 탐욕과 죄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서로가 장애가 되고 있지요. 성인과 성자는 인간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 하느님과 하나되는 경지까지 나아간 분들입니다. 모든 인간이 본래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저는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동양 종교의 사상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 선교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들이 있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획일적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다양성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한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 없겠습니까? 문화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종교제국주의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 카톨릭과 개신교를 합해 세계 15억 인구가 믿는 ‘세계종교’지만 아직도 세계인의 다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하게 살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19세기 이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19세기 전 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 채 수천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에는 서구에서도 그리스도교가 수세에 몰리며 퍽 퇴조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서구에서 실지(失地)한 그리스도교가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아시아와 아프리에서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근대 그리스도교는 다분히 제국주의 세력의 첨병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진출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한편으로 노예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아시아에서는 식민 침탐을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입니다. ‘병 주고 약 주는’셈이지요. 하지만 지금도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과 동남아 여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거의 있으나 마나 한 존재입니다. 19, 20세기의 그 엄청난 서구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선교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성공한 곳은 아시아에서 한국과 필리핀,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뿐입니다.그나마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이 더 강합니다. 더우기 아프리카 그리스도교는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영성으로 토착화된 ‘아프리카적 그리스도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처럼 서구의 그리스도교를 그대로 복제한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주체성 면에서 우리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있지요.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고작 필리핀과 우리 나라만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셈입니다. 이것을 명예로 생각해야 할지 수치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에게 불교, 유교, 도교,이슬람처럼 깊은 철학과 사상을 지닌 ‘고등종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니미즘(animism,혼령숭배)이나 샤마니즘 같은 ‘원시종교’밖에 없었지요.물론 제가 원시종교를 폄하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했습니까? 이상하게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불교,유교, 도교 등 심오한 종교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고등종교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것도 한물간 지 오래된 서구 그리스도교를, 서구인조차 외면한 그리스도교를 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실입니다.

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했는가

이런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외국인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투에서 저는 신통하고 놀랍다는 표정보다는, 좀 신기해하고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읽게됩니다. “당신들은 문화주체성도 없는가?”하는 식이죠.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속으로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정말 우리는 문화적 주체성과 자존심도 없는 민족이란 말인가?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하느님이 한국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번성하게 되었고, 하느님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신앙을 세계에 전파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했다는 식의 신앙고백적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또 그리스도교 신앙이 갖고 있는 여러 장점도 들수 있겠지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그리스도교가 번성하게 된데는 세 가지 명백한 그리스도교 외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면 해방과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청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본의 통치를 받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서구 식민 통치를 받은 다른 나라들이 독립과 함께 그리스도교를 제국주의 압제자의 종교로 청산한 반면, 일본의 통치를 받은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청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에 한국 사회는 종교가 진공상태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 시대에 불교는 산중불교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유교도 종교이기는 하지만 종교성이 약해서 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만약 불교가 조선 시대에 조선시대에 박해 받지 않고 융성하여 고려 시대나 통일신라 시대처럼 나라의 주류 종교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교 선교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 역시 안하무인격으로 우리나라의 토착 종교들을 무시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한국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진공상태에서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6.25의 아픔, 1970-198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같은 사회변동의 영향입니다. 불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도시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는 교회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에게 큰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들은 모두 비신앙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하느님이 유독 한국사람들만 사랑해서 이땅에 그리스도교를 번성시켰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는 광복 후 1960년대까지는 비구와 대처간의 싸움을 비롯해 많은 혼란을 걷다가 70년대 이후 안정을 되찾고 교세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우리나라의 최대 종교가 되어 그리스도교와 함께 종교계를 양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를 갖게 된다면 어느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물어보면, 제가 아는 지성인 대다수는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대개 가톨릭, 아니면 불교를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저질종교’라는 생각이 지성인 사이에 팽배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믿을 사람은 이미 다 믿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신도를 빼았기지나 않으면 그만 다행이라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참 희한한 종교입니다. 개종도 많이 시키지만 탈종도 제일 많습니다. 한국의 종교에 관한 통계 자료들을 보면, 자기 종교에서 탈종한 사람들 가운데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간 이들이 제일 많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 전환

한국 종교문화의 다원성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새로운 선교관과 구원관.

종교다원성을 보는 네 가지 입장.

*길희성 지음<보살 예수-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현암사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