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종교다원주의란?/2021년 12월 1일>

길희성의 <종교다원주의란?-마지막 회>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요즈음도 종종 듣게된다. 특히 보수적인 정통신앙을 강조하는 한국교회에서 흔히 듣게 되는 물음이다. 한국의 모 교단에서는 신학대학 학장이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하여 출교까지 당한 적이 있다. 한국교회에서 이 질문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종교다원주의'로 알려진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위해서는 먼저 '종교다원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 이런 질문이 제기되었고 그 배경은 무엇이고 지향점은 무엇인가? 를 먼저 알고 다른 종교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할 것이다.

길희성 교수는 개신교 신앙을 배경으로 성장하여 서울대 철학과,예일대 신학부, 하바드에서 Ph.D를 취득하였다. 서울대 철학과, 서강대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 은퇴후 강화도에 '공부와 명상의 집' 심도학사를 세우고 연구와 가르침을 계속하고 있다.

비교종교학으로 불교를 전공하고 메이터 엑카르트의 영성에 심취하였던 그는 <보살 예수>, <종교의 의미와 목적> 등을 집필하였다.

<보살 예수>을 열면서 서론격으로 다룬 한 장을 일반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에 적절하리라 생각하여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바꾸어서 3회에 나누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찬반의 선입관보다는 이해하려는 진지한 자세로 일독을 권한다.(편집인)

새로운 선교관과 구원관.

종교다원성을 보는 네 가지 입장.

새로운 선교관과 구원관?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데는 잘못된 신학, 잘못된 선교관, 잘못된 구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대체 선교가 무엇입니까?

현대의 선교관은 이른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선교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다 잡혀 죽은 분입니다. 그는 자기를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전파하는’ 선교에서 ‘예수가 하셨던’ 선교로 돌아가자는 것이 현대의 선교관입니다. 하느님은 선교사 등에 업혀 다니는 분이 아닙니다. 선교사가 들어가기 전에 이미 사람들의 삶 속에 계시고, 그들을 사랑하고,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알게 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안 계신 곳은 한 군데도 없고 종교가 없는 곳도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선교는 교회 중심의 선교에서 하느님 중심의 선교를,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선교에서 하느님 나라를 현장화하고 사건화하는 선교를 지향합니다. 이런 선교관에서는 이웃 교인과도 충분히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물음이 생깁니다. ‘구원’이란 것이 무엇인가?하는 물음입니다. 대체 구원이 무엇이기에 지옥 간다, 멸망한다고 잔혹하게 말하는 것입니까? 저는 구원은 ‘하나됨’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치입니다. 개인이 이기적. 자기 중심적인 삶을 떠나 하느님과 하나되고 다른사람들과 하나되어, 소외, 단절, 외로움을 극복하고 더 큰 자아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모두 열린 넉넉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됨이 구원이지요. 하나됨에는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인격적 표현이사랑입니다. 사랑 속에 하나되고, 하나됨으로써 사랑하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입니다. 구원은 본래 인간의 인간다운 삶입니다. 구원이라는 영어 단어 ‘salvation’은 라틴어 ‘salus’에서 왔습니다. 살루스는 ‘건강’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나 인간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잃은 건강을 되찾는 것입니다. 구원은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과 통교하며 이웃. 자연과 하나되는 인간다운 삶이며, 거기에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이 과연 그리스도교만의 전유물이겠습니까? 인류 대부분을 멸망으로 몰아넣고도 눈 하나 깜박 안 하고 자신들만이 진리라고 외치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일까요? 그런 하느님이 정말 예수님이 믿고 전한 하나님입니까?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신다는 그 하느님이 맞습니까? 하느님이 그리스도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 아니 하느님이 그리스도교 신자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숭배가 따로 없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스스로 선민이라고 자만하면서 하느님이 무조건 자기네 편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철저히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볼모로 잡힌 하느님을 해방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구약 예언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에 볼모로 잡힌 하느님, 바리사이파와 율법주위자들에 사로잡힌 하느님, 성전과 율법에 갇힌 하느님을 해방하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온갖 차별과 편견, 집단 이기주의를 허무는 것이었습니다.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허물다 집단적 배타성과 편견에 희생된 겁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정결과 불결, 이웃과 원수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됨을 선포하여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됨을 몸소 보여주셨지요. 완전한 사랑, 넘치는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이고 복음이었습니다.

한국 가톨릭 초기에 백정 출신의 황일광(1756-1801)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양반 신도의 방 안에 들어가 함께 앉을 수 있는것만으로도 매우 감격해서 “내게는 천당이 둘 있는데, 하나는 지상에 있고 다른 하나는 내세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양반과 백정 출신의 담이 허물어지는 역사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바울 사도는 에수님의 정신을 제대로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노예와 주인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저는 만약 바울이 오늘 우리와 함께 산다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인도 불교인도 없다”라고 말하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좀 심하게 말하면, 이러한 예수님을 배반해 온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됨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선포한 그리스도교가 예수의 이름으로 도그마를 만들고, 그리스도교라는 울타리를 쳐서 하느님의 구원을 전매특허라도 낸 듯 독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은 좋지만 그리스도교는 싫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열린분이지만 그리스도교는 닫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이 세상에 오신다면 아마도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기득권과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교회의 담과 그리스도교의 편견을 부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구원하길 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그리스도교의 울타리에서 해방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존재 이유는 자기 울타리를 치고 영역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고, 무차별적 사랑으로 자기를 비우고 내어주고 십자가에 죽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의 정신이고 삶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느 말이 유행했는데, 저는 요즈음의 심정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죽어야 예수님이 살고 나라도 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독점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교회라는 아성을 쌓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세상 속으로 들어가 빛과 소금이 되는게 진정한 그리스도교 아니겠습니까? 빛은 지배하지 않고 비추고 감쌉니다. 밝고 따뜻합니다. 소금도 자신을 잃고 스며들어 음식을 만나게 합니다. 그리스도교도 인생을 살맛 나게 해야지요

종교다원성을 보는 네 가지 입장.

이상과 같은 열린 선교관과 구원관을 가진다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가르침을 가진 종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요? 이에 대해 논리적으로 네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 것만 옳다는 배타주의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과거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입장이고, 지금도 한국 개신교 지도자와 신자 대부분의 입장이지요.

둘째는 가톨릭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대두한 입장으로 이른바 포괄주의라는 겁니다.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입장이지요.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칼 러너는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했습니다. 교회 밖에서 진실하고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모를 뿐 실제로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넓은 이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주적 , 보편적 진리로서의 로고스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교회 밖 사람들이 선하고 거룩하게 사는 건 모두 이 ‘우주적 그리스도’의 활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이런 입장은 배타주의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썩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타종교인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일이지요. 생각해보십시요.불자가 그리스도인더러 ‘익명의 불자’라 하면 좋겠습니까? 그건 타인의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횡포이지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만 그렇게 생각하자는 건 어느 정도 이하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것은 결국 예수 믿고 교회로 들어오는 게 좋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종 완성을 그리스도교로 보기 때문이지요.

셋째는 다원주의입니다. 수천 년 역사를 갖고 세계인으로 하여금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한 영적 힘을 지닌 종교는 저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렵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이 종교들이 모두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하느님과 인간을 매개해주는 매개체라고 봅니다. 이는 신중심적 신앙입니다. 배타주의가 교회중심적이고 포괄주의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관이라면, 종교다원주의는 하느님 중심의 혹은 궁극적 실재 중심적인 구원관입니다.

넷째는 해탈 아닌 해답으로, 세속주의와 회의주의입니다. 종교는 골치 아프다. 생각이 다 달라서 믿을 게 하나도 없다고 하여 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이런 입장에도 의미가 있지만, 종교사를 공부한 저는 모든 종교가 다 훌륭한 점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종교가 죄악도 많이 저질렀지만 각 종교 전통에는 우리가 모르는 깊은 영성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영적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속주의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든 종교는 하느님께로 혹은 궁극적인 실제로 가는 길이며 매개체이고 중재자이며 계시이고 창구입니다. 종교는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은 절대적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등산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우리는 모두 한 정상에서 만난다는 거지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산정에 올라가본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모두가 자기 시각에서 산정을 보며 위로 오르다 보면 결국 정상에서 모두 만나게 될 거라는 ‘가설’입니다. 이것이 종교 다원주의의 한 이론입니다.

저는 이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토인비, 간디 같은이와 수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이론은 없어도, ‘상식적’차원에서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같은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다른 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하나고, 한 분의 하느님을 믿고, 궁극적 실제가 하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평생 종교를 공부하다 보니 종교 간에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결국 같은 것을 달리 이야기했으리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는 거지요. 물론 아무도 입증은 못합니다. 어느 정도 근거를 지닌 하나의 가설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과 종교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겸손해야 하는 겁니다. 어느 종교도 하느님을 독점하거나 완전히 알 수 없기에 거리를 두어야 하지요. 그러면서 자기 종교를 따라야 합니다.여러 종교를 동시에 다 믿을 수는 없으니까요. 종교의 공통어 같은 것을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각기 자신의 언어를 가져야만 하지요. 그러면서 서로 배우자는 거지요.

이런 다원주의 신학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어렵습니다. 유영모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 같은 분은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사셨습니다. 지금에 와서도 따라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미 몇십 년 전에 서구의 진보적 학자들이 현재하고 있는 생각을 하셨던 분들입니다. 이론적이지는 않았지만, 동양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롭게 사고하면서 사신 분들이지요.

이런 다원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정의이지요. 신앙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지요.그는 매개자요 계시자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손에 잡힐 듯 우리에게 다가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신앙이 배타적일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분은 사랑의 하느님이며, 모든 장벽을 허물고 인류를 하나되게 하시는 하느님이므로, 결코 그리스도교만의 점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 선교는 여전히 계속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도그마에 사로잡힌 예수가 아닌, 흙과 땀을 묻히고 돌아다닌 인간 예수, 역사의 예수가 전하신 사랑의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오늘의 선교여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다른 종교의 이야기,즉 붓다, 공자, 노자, 무함마드의 이야기도 겸손히 경청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예수님과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는지를 점검하고, 우리의 이해를 심화하며, 배울 점은 배우자는 것이 종교다원주의 신앙입니다.

*길희성 지음 <보살예수-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현암사 간


길희성의 <종교다원주의란?-제2회>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 전환

한국 종교문화의 다원성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 전환

우리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다종교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함께 살려면 이웃 종교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의 평화는 없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물론 종교간의 평화가 있다고 해서 세계의 평화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간의 평화는 세계평화의 필요충분조건은 못 된다 해도 필요조건은 됩니다. 저는 그의 명제에 덧붙여 “종교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근 서구와 이슬람권의 갈등은 종교와 평화의 관련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입니다. 새무엘 헌팅턴 교수의 ‘문명충돌론’은 서구의 특수성과 우월주의를 내세우는 면이 있지만, 그래서 문화적,종교적 갈등이 탈냉전 시대 이후 인류평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을 지적한 면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본격적인 종교다원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종교관과 종교 위식이 이런 상황을 무시하거나 과거의 단순한 배타적 신앙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는 이 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교입니다.

종교다원성을 인정하고, 모든 종교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종교다원주의자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가지면서도 어느 특정한 종교를 신앙하는 것이 가능한지요? 이것이 현대 종교에 주어진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가능하고, 가능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종교의 배타적 우월성을 고집한다면 갈등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문화다원주의가 가능하듯, 과연 종교다원주의도 가능할까요? 특히 ‘절대적’진리를 주장하며 이웃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리스도교의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가톨릭은 적어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년)’ 이후부터는 이 문제에 대해 개신교보다 훨씬 전향적 입장을 취해온 반면, 개신교는 여전히 호전적,배타적, 개종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세 번의 큰 페러다임 전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유대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그리스’로마 세계로 진출하면서 그리스철학을 접한 일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교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철학 사상을 수용해 그리스도 복음에 옷을 입혔습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이 만남의 산물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과의 직접적 만남의 체험이며, 특수한 신앙고백적 언어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철학 사살의 만남을 통해 신학이라는 보편적 언어를 발전사키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존재하다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철학을 수용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위대한 사상, 철학, 신학이 있는 종교로 발전하여 지중해 세계를 석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갈릴레이 이후 근대 과학과의 만남입니다. 이제는 성서의 천당, 지상, 지하의 ‘삼층 세계관’과 기적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 현대인은 별로 없습니다. 초등학교만 나와도 믿지 않게 될 만큼,현대 그리스도교는 자연과학의 세계관을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역사의식의 발전은 그리스도교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수운 이야기이지만 교황청에서 갈릴레이의 이론이 옳았다고 공인한 게 1992년이었습니다. 참 빨리도 했지요. 그렇게 교회가 늦은겁니다. 아직 성서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과의 만남과 충돌은 그리스도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세 번째는 이른바 ‘동양 종교’와의 만남입니다. 불교, 힌두교, 유교, 도교 같은 동양의 종교는 우주와 인생에 대한 깊은 철학적 통찰과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과거의 그리스철학처럼,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구원의 멧세지가 있습니다. 이미 수 천년동안 무수히 많은 아시아인의 귀의를 받았지요. 그런 종교들 앞에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진리관과 배타적인 구원관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죤 힉은 신학에 또 한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중심의 종교관은 지구 중심의 세계관과 마찬가지로 폐기해야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동양 종교사상과의 만남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어떤 변화를 가저올지는 지금도 진행되는 물음입니다. 심대한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중심적, 제국주의적 시각은 치명타를 입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입었습니다. 이 세 번째 패러다임 전환은 첫 번째, 두 번째 보다 훨씬 더 심각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한국 종교문화의 다원성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종교다원 국가입니다. 주류 종교가 하나가 아닌, 둘이나 셋인 나라이지요. 불교와 그리스도교 외에 유교까지 치면 셋입니다. 장례식장을 가보십시요..한 가족의 신앙도 제각각입니다.스님이 와서 목탁 두드리며 독경하고 나면 목사님이 와서 예배를 인도하는 진풍경이 우리의 종교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심각한 종교적 갈등이 없다는 게 신기합니다. 물론 전혀 없는건 아닙니다. 역대 대선 때 보면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냐 불자냐 하는 게 민감한 사안이 된 적이 있었고, 정치인도 종교를 교묘히 이용했습니다.신도의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자기 종교의 신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것이 심각한 갈등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번 총선 때는그리스도교 정당이 출현하여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래 봤자 잘 안 될 거라 생각했는지 다행이 불교 정당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다종교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종교갈등이 없는 이유는 우선, 신앙의 자유와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국인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효심, 충성심, 예의 같은 유교적 심성과 관습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비교적 단일 언어, 단일 민족, 단일 역사를 공유해와서, 특정한 종교에 속하는 정체성보다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은 대체로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합니다. 배타적인 신앙관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난처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교 신앙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 조상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물음이지요. 또 내 사랑하는 식구나 친구중 그리스도 신앙을 갖지 않은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건가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여태껏 시원한 대답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할 테니 상관하지 말라.”, <로마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양심에 따라 심판할 것이라는 식으로 답변하기도 하나 모두 시원한 대답은 못 되지요.

도대체 과거 조상들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게 그들의 잘못이란 말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을 구원에서 배제한다면 하느님은 매우 불공정한 분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의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그리스도교를 통해서만 구원받는다면 왜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나라에 '지각’을 하셨는지,사랑의 하느님이 수천 년 동안 한국 백성을 사랑지 않다가 갑자기 사랑하기로 마음을 바꾸신 건지 말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선교사 등에 업혀 다니시는 분입니까? 그것도 제국주의를 틈타 야비한 방법으로 선교하셨다는 겁니까? 사랑의 하느님인데 모든 인간을 구원하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가지신 하느님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리의 모든 전통 종교가 무가치하다면 조상들은 전부 무가치한 삶을 살았다는 말입니까? 지금도 우리 주위의 양심적이고 착한 이웃들이 단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의 길을 간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증오의 종교입니다.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멸망을 외치는 종교이며, 복음 즉 ‘복된 소식’을 전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류의 절대 다수에게 화를 청하는 종교가 됩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다음호에 계속)

 


길희성의 '종교다원주의란?' 제1회

하느님은 ‘종교다원주의자’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 선교

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했는가

하느님은 ‘종교다원주의자’

‘불교와 그리스도교'란 주제로 강의를 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불교를 전공으로 공부하긴 했지만, 신앙으로는 그리스도인이며 신학도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불교에 대해 마음을 열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되기가지는 상당한 내적 갈등과 신앙적 고민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학적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사람이므로, 이번 강의에서도 제 개인적인 신학적 견해와 종교 이해를 말씀드리게 되겠지만, 이것은 어디가지나 제 개인의 생각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혀두려고 합니다.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구나, 왜 저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오랜 종교생활과 종교 연구를 통해 지금까지 얻은 결론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신학과 사상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지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떤 신학적 입장을 갖는가에 따라 인간이 구원받거나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하나되고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데 동의하신다면, 저의 신학과 사상이 보수적인 신앙, 신학과 어긋난다 해도 여유를 갖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가능하다는 걸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입니다. 물론 한국의 신학계, 종교계에서 ‘종교다원주의자’라 하면 오명이 됩니다. 내용도 정확히 모르면서 종교다원주의를 공격합니다. 그것을 예상하면서도 저는 종교다원주의자임을 숨기지 않습니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불교에 대하여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교다원주의자가 된 것은, 외람된 말이지만, 하느님 자신이 ‘종교다원주의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분이므로, 그런 하느님을 믿는 저는 종교다원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지요.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과 관계맺는 존재이며,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그분을 ‘종교다원주의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세계의 다양한 종교들은 곧 시간과 영원, 상대와 절대, 유한과 무한,인간과 하느님을 매개해주는 미디어, 즉 매개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롯한 세계의 성인과 성자는 모두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 나아가도록 인도해주는 안내자,매개자, 혹은 그리스도교 용어로 중보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와 깊이,넓이와 풍요로움을 전해주는 특별한 존재이며 하느님 계시의 도구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통해 자기 존재, 자기 얼굴을 알리려고 특별히 선택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수많은 성자와 다양한 종교적 미디어를 통해 인간과 교류해 왔고 인간도 그들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의 입장입니다.

좀더 근본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세계의 성인,성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계시라고 봅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에, 그 안에 신성을 갖고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그리스도교 인간관입니다. 그래서 어떤이들은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함석헌 선생같은 분은 그것을 “씨알”이라고 했지요. 하느님의 씨앗이 우리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인간을 볼 때 하느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일그러진 인간성으로 인해 그것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긍정적으로 인간을 봐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자가 될 수 있는데, 다만 탐욕과 죄 때문에 우리의 본성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서로가 장애가 되고 있지요. 성인과 성자는 인간의 신적 본성을 드러내 하느님과 하나되는 경지까지 나아간 분들입니다. 모든 인간이 본래 하느님의 육화(incarnation)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저는 그리스도교의 사상과 동양 종교의 사상이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 선교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들이 있어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는 획일적 문화가 세상을 지배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의 다양성도 자연스러운 일이며 하느님의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한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 없겠습니까? 문화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종교제국주의도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현재 카톨릭과 개신교를 합해 세계 15억 인구가 믿는 ‘세계종교’지만 아직도 세계인의 다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하게 살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 나라들이 세계를 지배하기 전인 19세기 이전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19세기 전 까지만 해도 그리스도교라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 채 수천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 이후에는 서구에서도 그리스도교가 수세에 몰리며 퍽 퇴조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서구에서 실지(失地)한 그리스도교가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아시아와 아프리에서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근대 그리스도교는 다분히 제국주의 세력의 첨병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진출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한편으로 노예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아시아에서는 식민 침탐을 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한 것입니다. ‘병 주고 약 주는’셈이지요. 하지만 지금도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과 동남아 여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거의 있으나 마나 한 존재입니다. 19, 20세기의 그 엄청난 서구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하여 선교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결코 성공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가 성공한 곳은 아시아에서 한국과 필리핀,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뿐입니다.그나마 아프리카에서는 이슬람이 더 강합니다. 더우기 아프리카 그리스도교는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영성으로 토착화된 ‘아프리카적 그리스도교’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 그리스도교처럼 서구의 그리스도교를 그대로 복제한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은 문화주체성 면에서 우리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있지요.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고작 필리핀과 우리 나라만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셈입니다. 이것을 명예로 생각해야 할지 수치로 생각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들에게 불교, 유교, 도교,이슬람처럼 깊은 철학과 사상을 지닌 ‘고등종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에니미즘(animism,혼령숭배)이나 샤마니즘 같은 ‘원시종교’밖에 없었지요.물론 제가 원시종교를 폄하해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했습니까? 이상하게도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불교,유교, 도교 등 심오한 종교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했습니다. 한국은 고등종교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것도 한물간 지 오래된 서구 그리스도교를, 서구인조차 외면한 그리스도교를 그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우리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실입니다.

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했는가

이런 현상과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는 외국인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어투에서 저는 신통하고 놀랍다는 표정보다는, 좀 신기해하고 조롱하는 듯한 표정을 읽게됩니다. “당신들은 문화주체성도 없는가?”하는 식이죠.그런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속으로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정말 우리는 문화적 주체성과 자존심도 없는 민족이란 말인가? 선교사들이 전해준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는 건 아닌가?

물론 하느님이 한국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번성하게 되었고, 하느님은 한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신앙을 세계에 전파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게 했다는 식의 신앙고백적 해석도 가능하겠지요. 또 그리스도교 신앙이 갖고 있는 여러 장점도 들수 있겠지요,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그리스도교가 번성하게 된데는 세 가지 명백한 그리스도교 외적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느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면 해방과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청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본의 통치를 받았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서구 식민 통치를 받은 다른 나라들이 독립과 함께 그리스도교를 제국주의 압제자의 종교로 청산한 반면, 일본의 통치를 받은 한국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청산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시기에 한국 사회는 종교가 진공상태를 겪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선 시대에 불교는 산중불교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유교도 종교이기는 하지만 종교성이 약해서 민중의 종교적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만약 불교가 조선 시대에 조선시대에 박해 받지 않고 융성하여 고려 시대나 통일신라 시대처럼 나라의 주류 종교로 자리 잡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교 선교는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 역시 안하무인격으로 우리나라의 토착 종교들을 무시하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한국 그리스도교는 종교적 진공상태에서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6.25의 아픔, 1970-1980년대의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같은 사회변동의 영향입니다. 불교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도시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는 교회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온 사람들에게 큰 정신적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들은 모두 비신앙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하느님이 유독 한국사람들만 사랑해서 이땅에 그리스도교를 번성시켰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는 광복 후 1960년대까지는 비구와 대처간의 싸움을 비롯해 많은 혼란을 걷다가 70년대 이후 안정을 되찾고 교세를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우리나라의 최대 종교가 되어 그리스도교와 함께 종교계를 양분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한국에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종교를 갖게 된다면 어느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물어보면, 제가 아는 지성인 대다수는 그리스도교, 특히 개신교는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대개 가톨릭, 아니면 불교를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저질종교’라는 생각이 지성인 사이에 팽배해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그리스도교를 믿을 사람은 이미 다 믿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신도를 빼았기지나 않으면 그만 다행이라는 시절이 되었습니다. 개신교는 참 희한한 종교입니다. 개종도 많이 시키지만 탈종도 제일 많습니다. 한국의 종교에 관한 통계 자료들을 보면, 자기 종교에서 탈종한 사람들 가운데 개신교 신앙을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간 이들이 제일 많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길희성 지음<보살 예수-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현암사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