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서양인들이 본 개화기 조선과 조선사람들(7)/2022년6월 1일>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F. A. 매켄지의 <조선말 이등방문의 통치 >

F.A. 매켄지 지음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F.A. 맥켄지의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풍전등화와도 같던 조선이 세계열강들에 유린당하면서 무너져 가던 비극의 양상들을 살펴보려고 한다.이 책의 원저자인 Frederick Arthur McKensie는 1869년에 카나다의 퀘벡에서 출생한 스코트랜드 계 영국인으로 영국에서 해외 특파원으로 활동하는 등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러일전쟁때 극동특파원으로 조선에 온것이 인연이 되서 1906년에 다시 조선에 와 순종 황제 즉위식에 참석하는 등 취재활동을 하는 한편 자료들을 수집하여 <The Tragedy of Korea>와 속편이라 할 수 있는 <Korea's Fight for Freedom>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그의 <조선말 의병활동>에 이어 안중근 의사에 의해 하르빈 역에서 암살당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치의 실상을을 다룬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를 소개한다. 이등박문이 암살당했다는 사실외에는 그가 한일합방 이후 초대 조선통감으로 어떠한 통치를 하였는지는 잘 모르는데 그는 조선에 주재하는 영국기자로서 예리하게 관찰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통치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했다. 한국인들은 그에 대해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며, 싫어도 싫은 내색을 보일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천황(天皇) 을 대신하여 한국의 독립을 빼았은 장본인이기는 하지만 그와 친근한 일본의 고위층들은 아무도 그가 충동질하지 않았다고 아직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와 접촉해 보면 그가 일본의 정책을 위해서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방법이 본질적으로 어떤것이든지 간에 그는 아직 한국인에 대해 진정으로 호의를 품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일본 제국의 팽창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의 처지에 있지만 그에게도 덕(德)이 있었음은 사실이다. 이제 영광스러운 생애의 황혼길에서 평안과 존엄을 눈앞에 바라보면서 누구인가 일본 외교가가 수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막중한 임무를 스스로 맡았다는 것은 가상하다 하겠다.

이토는 매우 유능한 고위 관리 몇 사람을 대동하고 부임했으며, 그들의 직책을 확정시켜주는 법령을 공포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통치를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통감은 원하는 바를 모두 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사실상 한국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공익을 해친다고 여겨지는 법령을 철폐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1년 이하의 징역과 2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형벌권도 가지고 있었다. 이과 같은 형벌권의 상한선은 순전히 명목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국은 군법에 지배되고 있었으며 군법정은 사형권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인 영사와 부영사가 전국에 배치되어 사실상 지방 장관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경찰관으로 배치되지 않은 곳의 한국인 경찰들도 일본의 사찰을 받았다. 농상공부는 일본인 감독관과 고문의 자리를 받았으며 고위 관리를 제외한 모든 관리의 임명권은 종국적으로 통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기에서도 고위관리라는 상한선은 또한 무의미한 것이었으므로 통감은 사실상 한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자는 아직도 한국인 관리들을 통해 지방 사무의 여러 가지를 처리했으며, 아직까지 제거되지 않은 근왕파(近王派)의 음모를 주시해야만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은 아세아 대륙에서의 군사 활동을 위한 전략기지로서, 그리고 식민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통감부가 해야 할 첫 사업은 군대를 신속, 편리하게 이동시킬 수 있도록 전국의 교통 통신망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었다. 경부선을 이미 착공하고 경의선의 준공 단계에 들어감으로써 수많은 일본군을 일본 본토로부터 만주 국경까지 36시간 이내에 수송할 수 있는 간선 철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국 해관의 보증으로 1천만 엔의 차관이 제공되고 그 중 150만 엔은 대도시와 주요 항구 및 철도 중심지를 연결하는 4대 군사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 철도 부설비용의 일부는 차관에서 유용된 것이며 일부는 지방세에서 충당되었다. 이 철도는 상업상의 목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군사적인 것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국내 여행과 물자 수송은 말이나 노새를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옛날에 만들어진 좁은 길로도 충분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다. 새로 생긴 도로들은 단계적으로 개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필요한 경우에는 쉽사리 그 위에 철로를 부설하여 대포와 화약차를 신속하게 운행할 수 있었다. 동해안 쪽에서는 경원선의 부설 작업이 급속히 진전되어 완공단계에 들어갔다.

런던 경시청의 형사과에 해당하는 포도청이 폐지되고 지방 경찰서와 경찰 행정은 일본에서 건너온 특수 경관의 손으로 점차로 넘어갔다. 일본군 헌병대는 점차로 귀송되고 경찰로 대치되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전적으로 먼 앞을 내다 본 조치였다. 헌병대는 거칠고 독단적인 행위로 인해 지방에서 악명이 높았다. 경찰들은 헌병보다는 사람이 좋았고 더 융화적이면서도 올바른듯 보였다.

통감이 취임한 이래 이룩한 뚜렸한 업적중의 하나는 일본인 이민들을 엄격히 규제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악질적 범법자들이 발목을 잡혀 본국으로 귀송되었다. 통감부의 관리들은 숫적으로 증가했으며 적어도 어느면에서는 일본인들에게 불평있는 한국인들은 그예 대한 답변을 얻기가 수월하게 되었다. 통감은 항상 화의(和意)와 우의(友誼)의 정책를 강조했으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 그는 외국인들의 협조를 얻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목적은 한국을 통째로 병합하고 한민족의 흔적을 말살하려는 것이었음이 점차 명백하게 드러났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일본인 중의 한 사람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말은 전적으로 사견임을 먼저 알아주십시요.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일본정책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가를 나에게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목적을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몇 세대가 걸리겠지만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일본어를 사용하게 될 것이고 일본의 생활 습속대로 생활할 것이고 우리의 일부분을 이룰것입니다. 식민지 통치에는 오직 두 가지의 길이 있을뿐입니다. 하나는 상대 민족을 외국인으로 그대로 간주한 채로 통치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조국인 영국은 인도에서 이와같은 방법으로 통치했으며 결국 이와같은 제국은 오래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인도는 당신들의 지배를 벗어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두번째 방법은 상대 민족을 동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취할 작정입니다. 우리는 한민족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우리의 제도를 이곳에 이식함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일체가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일본의 자비심 많은 계획이다. 한국의 국토를 병탄하고, 모든 산업을 일본인들이 장악하고, 토착민들을 벌목꾼이나 물지게꾼으로 만들어서 정복자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려는 것은 가장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그러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한국인은 일본인과는 수준이 적적으로 다른 나약한 겁장이라고 그 일본인은 생각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을 형편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생각속에서 한국인을 다루고 있다.

일본인 관리들에 대한 한국인의 불만은 그들이 매사를 한국인의 입장이 아닌 일본인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일본인들의 착취의 손길이 뻗쳐 있지 않은 곳이 없다. 일본인에게 이권이 부여되고 계약조건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으며 이민법, 토지법 그리고 일반적인 행정 수단이 오로지 일본인의 이해관계에 입각하여 제정, 운영되고 있다.

외국인들에 대한 통감부의 정책은 그들을 점진적으로 추방하려는 것이었음이 점차 분명해졌다. 백인들이 아직까지 가지고 있는 명예를 박탈하기 위해 가능한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백인들은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수가 많으며, 정열적이고 혈기왕성한 신도들을 가지고 있다. 일본인들은 영국과 미국의 교육자의 지도를 받고 있는 그 신도들을 전향시켜 일본인들과 손잡고 일할 수 있도록 유혹하기 쉽고 조심스럽고 치밀한 계획을 추진해 왔다. 일본인들이 편집을 맡고 있는 한국 내의 신문은 조직적으로 반서적(反西的)인 논조를 전개했다. 한국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는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청하지도 않은 것들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나는 전 대신들과 젊은 학생들과 심지어는 집안에 있는 한국인 하인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있는 한 일본 하인 소년은 나에게 그와 같은 사실을 간결하게 들려주었다. 그는 아세아의 장래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다음 일본의 새로운 이념을 매우 간결하게 요약했다. 그는 더듬 더듬 이렇게 말했다.

인님, 일본인들은 모든 아시아가 하나로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그 우두머리가 되고 말입니다. 일본인들은 모두가 그걸 원합니다. 한국인들 중의 몇몇 사람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원치 않습니다. 중국인들도 모두가 그걸 원치 않습니다.

일본은 1895년의 갑오경장을 통해 한국인의 복식이나 개인적인 습관에 간섭하지 말하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초기에 그들이 저질렀던 어처구지없는 실수중에서 상투를 강제로 자르도록 규제했던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은 없었다. 단발령은 민비를 살해한 것보다도 더 민중의 마음을 할퀴어 놓았다. 일본인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즉시 사치 단속령을 다시 공표했다. 우선 겨울철에 흰 옷을 입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모든 사람들은 검은 도포 이외에는 입지 못하게 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온갖 제재를 받았다. 일본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상투를 짜르도록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권한이 미치는 한 심한 압력을 가했다. 대궐에 출입하는 관리나 공직자나 방백 수령 등은 모두가 머리를 자르도록 명령했다. 공직자들은 모두 자기 관활하에 있는 사람들이 상투를 짜르도록 하라고 분명히 지시했다. 친일 단체인 일진회는 그 명령을 추종했다. 궁중에 드나드는 관리들은 서양복장을 입도록 강요를 당했다. 모국어와 마찬가지로 민족의상을 가능한 한 말살하려고 했다. 궁중의 여인들은 서양옷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가난한 여인들은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나 않을까하여 결과적으로 공식 석상에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일본 민족은 재치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단순한 익살꾼에 지나지 않는다. 지위가 높은 관리로서 도포를 입게 되면 신문 지상에 큰 웃음거리로 취급된다. 내가 알고 있는 일진회의 몇면 간부들은 서양잡지에 나오는 변덕스러운 의상만화를 정신병자가 복사해 입은것처럼 보였다. 일본인들이 저지른 실수는 아마도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생활습속을 급속히 바꾸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도 그렇게 해야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에 있는 백인들의 지위가 하락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에 대한 많은 일본인들의 태도에서 명백히 찾아볼 수가 있다. 나는 한국에 살고 있는 조용하고도 순박한 나의 한 친구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피가 끓어오름을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한 선교사 부인이 길을 가는데 일본 군인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고의로 젖가슴을 쳤다는 것이다. 어느 카톨릭 신부는 성당 안에서 일본군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았지만 그 군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웨이걸 부부의 경우를 보면 다른 일들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웨이걸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산 기술자인데 1905년 12월 부인과 그의 조수인 테일러 그리고 몇 사람의 한국인 용인들과 함께 북부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여권도 가지고 합당한 절차에 따라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어는 곳을 지나던 그들은 일본군의 정지명령을 받고 글로써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모욕을 당했다. 일본군들은 그들에게 모욕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총칼로 쿡쿡 찌르고 결국 체포되었다. 어느 한 군인은 웨이겔 부인에게 가깝게 총을 겨누고 그녀가 움직이면 주먹으로 젖가슴을 쥐어박았다. 그 군인은 일행을 가장 모욕적인 언사로 대했으며 부인에게는 기분 나쁜 말만 골라서 썼다. 용인들은 발로 채였다. 드디어 그들은 온갖 모욕을 당하고 추위에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겨우 풀려났다. 영국 당국자들은 이를 문제삼았다. 이러한 사건에 대해 증거는 충분했지만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러나 웨이겔 일행은 형식적인 사과를 받은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북부지방에 살던 캐나다 선교사 맥크레이 목사의 경우를 보자. 그는 선교사업을 위해 얼마간의 토지를 구입했는데 일본군 당국이 그것을 탐냈다. 일본군은 그 토지에 말뚝을 박았다. 이에 그 목사는 일본 관리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말뚝을 철거할 것을 두 번이나 요청한 다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들을 모두 뽑아 버렸다. 맥클레이 목사와 함께 살고 있는 동료 선교사들이 다른 지방으로 포교를 나간 사이에 6명의 일본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숙소로 몰려가 그를 습격했다. 맥크레이 목사는 한 일본인이 휘두르는 총대에 맞아 중상을 입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을 잘 막아내었다. 매크레이 목사는 해당 일본 관서의 장에게 항의했으며, 일본인들은 이번 경우에도 관계자들을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불평을 말하기 위해 일본 영사관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영사관 직원의 태도를 보면 그 지위를 막론하고 서구인들을 백안시하는 예가 허다하다. 심지어는 죄상이 명백하여 일본측에서도 처벌을 약속한 경우라 하더라도 그 피의자는 뻐젔이 밖에 나와 우쭐거리며 다니는 꼴을 보게 된다. 오늘날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서구인들을 대하는 정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에게 모욕을 주려는 것이다.

한국인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인이 분명하게 제정한 두 개의 법령이 있는데 이는 오히려 한국인의 권익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보고 있다. 새로운 토지법이 성안되었는데 이 법에 따르면 옛날에 사용하던 복잡한 문서 대신에 새로운 명의서가 교부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인 대부분의 지주들은 자기의 토지의 소유권을 문서상으로 입증할 수가 없다. 새로운 제도에 따르면 그러한 지주들은 소유권을 상실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1905년 말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이 호놀루루나 그밖의 지역으로 품팔이를 떠났다. 그렇게 되자 통감은 명목상으로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이민법을 제정했는데 이로 인해 옛날과 같은 질서있는 이민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본의 통치를 스스로 피해 타국에서 정착하기를 바라는 가족들이 도처에서 방해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북부지방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러시아령 우수리 지방에 가면 살기 좋고 행정도 옳게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동부 시베리아에서 풍족하고 평화롭게 만족하게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생활 조건은 자기 나라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본국인들의 그것과는 너무나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일본인들이 일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낱낱이 드러났으며 한국 내의 모든 것들은 일본인들에게 귀속되었다. 그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감히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려다가는 슬픈 일만 당하게 된다. 이와 같은 소행은 일본의 천황이 한국의 왕에게 특사로 파견한 다나까 미스야키 자작의 야만적인 행동에서 잘 나타났다. 1906년 말 다나카가 서울에 있을 때 한 일본인 골동품 상인이 찾아와서 송도에서 멀지 않은 풍덕지방에 매우 훌륭한 고탑(古塔)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 탑은 1천 년 전에 중국의 왕실이 선물한 것으로 거기에 사용된 석재는 병을 치료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고 한국인들은 믿었다. 따라서 그 이름도 약왕탑(藥王塔)이라고 불렀으며 그 이름은 전국에 잘 알려져 있었다. 런던교가 영국인들에게는 국가적인 기념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탑도 한국인에게는 국가적인 기념물이었다. 다나카는 유명한 골동품 수집가였기 때문에 이 탑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욕심이 생겼다. 그는 한국의 궁내부대신을 찾아가서 자기의 욕심을 말했더니 그 대신은 선뜻 응락해 주었다. 몇일이 지난 다나카가 왕에게 작별인사를 드릴 때 탑을 선물한 데에 대해 감사한 뜻을 표했다. 한국의 왕은 영문을 모르고 있던 터인지라 다나까 자작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노라고 말했다. 그는 그 탑에 대해 전혀 들은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 전에 헌병을 포함한 80여명의 일본인들이 주민들의 항거에 대비하여 완전무장을 하고 송도를 급습했다. 그들은 그 탑을 해체하여 여러 차에 실었다. 그러자 주민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위협하면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일본인이 너무 강했다. 그 탑은 예정된대로 도꾜로 운송되었다. 그와 같은 불법적인 처사는 그대로 보아 넘길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재의 손실에 관한 소식이 전국에 퍼졌으며 외국의 신문사에도 들어갔다. 일본을 두둔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선언했다. 특히 <재팬 메일>지는 분통을 터트렸으며 서울에서 발행되는 영문일간지로서 이 문제를 다루었던 <코리아 데일리 뉴스>지의 편집자 배설(Ernest Bethell)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의 주장은 “전혀 터무니 없는 거짓말”이며 “어느 정도 공부를 해서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편견에 전혀 눈이 멀지 않고서야 그와 같은 명백한 거짓말을 믿을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러다가 신문기사가 사실임이 밝혀지자 일본의 관리들은 결국 이를 시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서, 통감은 그러한 절도행위에 대해 동의한 바 없으며 다나카도 그것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황실에 선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통감부의 기관지인 <서울 프레스>는 이에 대해 가장 납득이 갈만한 변명을 하고 있다.

다나카는 양심적인 관리이며, 외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그를 아는 사람은 모두가 그를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그는 열성적인 미술품 감정가인 동시에 골동품 수집가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골동품 수집가로서의 그의 열의가 진지한 판단력과 자제력을 압도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이 탑은 한국에서는 풍덕 부소산 경천사 10층 석탑으로 알려져 있다. 다나카가 이 탑을 가져간 이후 이를 안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엄명으로 1915년 한국으로 되돌려와 국보 86로 지정되어 경복궁 안에 있다.

F.A. McKenszie 지음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H.세비지 랜도우의 조선의 종교-불교

다시 도심 밖을 살펴보면 이들보다 한 차원 높은 불교의 비구승이나 비구니들이 있다. 서울의 몇 마일 안에서도 몇 개의 사찰을 볼 수 있다. 사찰에 대해 꼭 덧붙여야 할 한가지 점은 한결같이 명당(明堂)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산꼭대기나 산등성이 높은 곳에 그들은 단지 종교활동을 위한 장소를 넘어서 요새화된 난공불락의 성을 구축하고 있다. 수도승들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통상적으로 약 20명 가량이 있다.

불상

작은 암자의 경우 법당 가운데에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그 발치에는 조그마한 향로가 있고 양옆에는 두 개의 황동 촛대가 놓여 있다. 불상 앞에서 연신 타오르는 선향의 자욱한 연기와 냄새가 법당을 가득 메운다. 조선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은 보통 가부좌를 틀고 있다. 두 발은 발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엇갈려 있고 오른팔은 내려 놓은 반면에 왼팔은 팔뚝을 굽혀 앞으로 돌출해 있으며 손에는 청동구(求)를 쥐고 있다. 그 왼편에는 보통 정교하게 조각된 나무틀 안에 서패(書牌)가 들어 있다. 불상의 발치에는 숭배자들의 헌금을 받는 불전함이 있다.

불상의 뒤에는 대개 어떤 장식도 없거나 수많은 신들의 형상을 그려 넣은 탱화가 있다. 젊고 흰 얼굴에 호인의 풍모를 풍기는 신상은 아마도 신념의 신일 것이다. 그리고 우락부락하고 추한 얼굴에 흰 눈썹과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가진 신들은 분명히 각종 지혜의 신들일 것이다. 어떤 신은 짙은 눈썹과 수염을 달고 사팔뜨기의 흉폭한 눈을 부릅뜨고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있는데 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쟁의 신일 것이다. 나머지는 정의와 복종과 애정의 신들인데, 마지막 신은 보통 부처의 양옆에 서 있는 두 여자로 형상화된다.

부처의 형상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몸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머리가 대단히 크고 귀 또한 머리의 크기에 비해서 크다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큰 귀를 가진 것을 복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 부처는 귀가 머리의 전체 높이만큼이나 길게 표현된다. 유럽에서 이러한 형상은 찬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의 머리카락은 이마 아래까지 차분하게 붙여 있으며 이마 가운데에 보석이 장식되어 있다. 눈은 몽골족의 눈처람 곁눈질하는 대신에 유럽인의 눈과 같이 정면을 직시하고 있으며 작은 붓을 사용해서 잘 그려진 눈썹은 아름다운 반월형이다. 얼굴 모습은 보다시피 대부분의 경우 고결하면서도 졸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서대문 밖에는 북경로로 가는 잘 닦인 길이 있는데, 그 길의 언덕 사이에 보이는 절에 들리면 매우 재미있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곳에 도착하기에 앞서 왕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작은 무덤을 지나게 된다. 무덤의 각 면에는 석상이 서 있고 삼면에 벽이 둘러져 있어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무덤을 보호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고인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무덤 앞에는 제단과 작은 항아리가 놓여져 있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서 걸어 올라가면 절에 이른다. 절은 대개 법당과 진흙으로 만든 오두막과 승려와 행자들이 거처하는 처소로 이루어져 있다. 법당은 어디나 동떨어져 있다. 내가 가 본 조선의 어떤 사찰도 일본의 절만큼 흥미로운 예술품이나 빼어난 장식물을 풍부하게 갖고 있지 못했다. 절과 같이 경배되는 조선의 가옥들은 단지 외곽 부분, 즉 문 위와 지붕 아래의 사이 부분만이 장식되었을 뿐이다. 추녀 부분은 나무가 거칠지만 정교하게 조각되고 적색, 백색, 녹색, 황색의 천연색으로 칠해져 있다. 법당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 위에는 코끼리의 상아같이 굽은 두 개의 거대한 이빨이 달린 판자가 설치되어 있다. 법당의 가운데 출입문 위에는 검은 편액이 걸려 있는데, 그 외에는 사찰의 이름이 금빛 한자로 씌어져 있다. 대웅전과 요사체의 기둥에는 대개 대단한 찬양조로 후원자나 기증자의 이름이 씌어진 긴 목조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전의 출입문은 네 부분으로서 격자 모양으로 세공되었는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경첩이 달려 있다. 때때로 신도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대웅전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때에는, 대웅전의 앞문과 양쪽 옆문 모두를 개방한다. 위에서 언급한 격자 세공으로 제작된 창문에는 앏은 창호지가 덧붙여져 있어 겨울에 절을 찾는 신도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한다.

대웅전의 내부는 매우 단순하다. 불상과 이미 언급한 여러 신들을 그린 탱화 외에는 거의 볼만한 것이 없다. 불경은 아주 특이하다. 불경은 길게 접지되어 있을 뿐 실로 제책(製冊)되어 있지 않으며, 두 개의 나무 판자를 부착한 양 끝장을 제외하고는 어느 장도 붙어 있지 않다. 책의 한 면이 다른 쪽보다 높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동적으로 접혀지지 않는다.

남대문 근처의 암반에 위치한 매우 작은 한 절에서는 무사, 고관, 왕자의 복장을 한 수백 개의 작은 불상들이 매우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이 절은 오백나한상으로 유명한데, 그 주위에는 절에 딸려 있는 작은 암자와 기묘한 토굴이 있다. 암자는 절에 부속되어 있지만 인접한 곳에 별도로 지어진다. 조선의 일반 가옥들처럼 암자의 지반은 돌과 흙으로 다져지고 본채는 거의 흙으로 짓는다. 암자와 지붕은 기와로 덮여있는 반면에 행자들의 처소와 후원의 지붕은 이엉으로 엮여져 있다.

승려

절과 그 부속 건물들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승려들인데, 그들은 어느 한 순간에 매우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더욱 흥미를 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인데 조선의 승려들이 바로 그렇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 약삭빠르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며 완전히 양심을 상실한 인간형을 겪게 되는데, 사실상 그들의 단 하나의 목적은 약한 마음을 가진 신도들을 이용해서 치부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터럭만큼의 도덕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어떤 말이라도 지어낼 것이다. 그들은 이런 절에서 놀음을 즐기거나 떠들석하게 술판을 벌이면서 게으르고 타락한 생활에 빠져 있다. 그들은 신도들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물론 공개적으로 그러지 않지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평판이 좋지 않은 중개인들을 통해서 부자들을 갈취하는데 정력을 쏟는다.

이러한 몇가지 잘못을 제외하면 다른 면에서는 그들은 매력적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이 입는 옷은 흰 솜으로 속을 누빈 긴 가운 형태로서 소매는 헐렁하다. 속에는 짧은 상의와 통이 큰 바지를 입고 있으며 목에는 큰 구슬을 꿴 염주를 두르고 있다. 그들은 기도할 때면 염주를 손에 들고 기원자를 위해 염주를 하나씩 헤아린다. 염주 중에서 조금 큰 구슬이 염불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기원하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극히 드물기 때문에 그들이 제3자를 위하여 부처에게 축원을 비는 기도는 기원자의 재산에 따라서 가격의 규모도 다양하다. 부적은 현금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바꾸어말해서 사람들은 쌀이나 과일을 사는 것처럼 부적을 구입한다. 승려들은 머리를 당구공처럼 말끔하게 깎는다. 반면에 행자들은 머리를 매우 짧게 깎는데, 머리카락 길이가 1/8인치를 넘지 않아 보인다.

증려들의 종류도 다양하다. 예를 들면 대나무를 쪼개어 엮어 만든 커다란 원추형의 모자를 쓰고 다니는 시주승이 있다. 그들은 심지어 먼 시골까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자금이나 정보를 수집한다. 그들은 때때로 자신의 퍠거리들을 유복한 사람들에게 다리 놓아 주는데, 상대방을 환대하는 예절이 습관처럼 밴 유복자들은 그 패거리들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계속해서 음식과 돈 그리고 그밖의 것들을 지원해야 한다. 다음으로 부사태평하게 절에서 소일하는 비만한 승려들이 있다. 그들은 머리에 프랑스나 이딸리아의 빵가게에서 파리가 단 것을 먹지 못하도록 다른 접시들을 덮는데 사용하는 것과 매우 흡사한 모양의 둥글고 말총처럼 뻣뻣한 검은 모자를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승병이 있는데 그들은 전시에 기도하기 위해 군대를 따라다닌다. 그들은 원통형의 모자 대신에 둥근 계관(鷄冠)을 쓴 것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착용하는 평범한 형태의 모자를 쓴다. 이들은 때때로 홀로 마을을 출입하는 것이 허용된다. 그들은 주로 짚신을 즐겨 신는다.

내심 당연하게 상응한 댓가를 바라긴 하지만 절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은 나를 극진하게 환대한다. 그러면 나는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긴 하지만 그들에게 뭐라고 감사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들은 곧 예쁜 놋그릇에 무나 밥을 담아 내오든지 소반에 콩을 담아 내왔는데, 그 위에는 늘 큰 술잔이 따라나와 술자리로 바뀌었다. 그들은 내 그림에 높은 관심을 보였으며, 한결같이 초상화를 그려 주기를 바랬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매우 뛰어난 에술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절에 있는 탱화나 조각상은 대개 그들의 인내어린 수작업의 결실이었다. 그들 중의 몇몇은 매우 총명한데, 그들이 하고 있는 생활 때문에 프랑스 말을 빌리자면 다소 멍청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매우 현명하고 쾌활하며 종종 기지가 넘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높은 통찰력과 기민한 지각을 놓고 견주자면, 내 생각에 조선의 승려들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비구니

조선에는 종교적 수행을 갈망하는 여자들을 위한 절도 있다. 특이하게도 우리들의 규칙과는 정반대로, 조선의 비구니들은 속세의 여자들보다도 더 자유분망하다. 불가에 입문하면서 그들은 비구승들과 똑같은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는다. 그리고 그들은 전혀 여자 같지 않게 매우 추해 보이고, 마치 남성들처럼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다. 그들 중의 많은 이들은 비구승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나에게 자신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었으며 몇몇은 백치에 가까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나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고, 두세 명의 비구니들이 함께 기거하는 방에서 열리는 자신들의 법회를 보여 주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사명에 대해 비구승들에 못지않게 충실했으며, 인근의 작은 암자에서 들려 오는 북소리만 곁들여진다면 누구의 마음이라도 빼앗을 수 있을만큼 단아한 징소리를 냈다.

이런 비구니 사찰은 비구승들의 사찰보다 내부 구조가 더 정교해 보였다. 종교 의식을 거행할 때면 두 비구니중에 한 사람은 흰 가사를 입고 다른 사람은 암록색의 가사를 입는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겨드랑이를 지나 몸 앞부분에서 리본처럼 묶은 붉은 의상을 입고 절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중얼거리며 기도한다. 그러는 동안에 제3의 여자는 계속해서 북을 두드린다.불상 앞에는 쌀이나 콩 등의 제물이 놓여 있고 한두 자루의 촛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검은 복장을 한 비구승이 꼬부라진 막대기로 끝 부분에 단단하게 매단 조그만 징을 들고서 긴 손잡이가 달리 채로 처음에는 부드럽게 천천히 시작해서 점점 더 빨리 세고, 길게, 예리한 소리가 날 때까지 두드린다. 기도자는 그가 의지하는 특정한 보살 앞에 무릎을 꿇고 대부분 불상 앞에서 그렇게 하지만, 코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비구니와 함께 기도를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줄곧 일어서 있다가 다른 기도를 할 때는 다시 무릎을 꿇어 앉는다.

비구승들은 여행하는 승려들이 쓰는 원추형의 풀로 만든 삿갓을 쓴다. 큰 제물이 바쳐진 경우에 종교 의식은 더 시끄러워지며 비구승들은 큰 북을 매우 격렬하게 쳐댈 뿐만 아니라 절의 안쪽 벽을 따라 앉아서 일심 일체가 되어 방금 서술한 것과 비슷한 꽹괴리들을 쉬지 않고 두드려댄다. 두 사람이 대장간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어리를 담금질하는 소리를 떠올린 다음 그 소리를 백배로 확대하고 거기에 기도자들이 중얼대는 소리를 겹쳐보라. 그러면 이런 종교의식에서 나는 소음이 유럽인의 귀에 어떻게 들리겠는가를 아주 정확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이 없다는 사람들이 보기에 신앙이란 우수꽝스러운 것이었다.

도시의 경계를 막 벗어나서 서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들성이에 특이한 형태의 바위가 있는데 풍화작용으로 인해 거대한 이빨 모양으로 닳아 버렸다. 여기에서 이빨 바위란 이름이 유래한다. 이 특이한 바위를 찾으면 아무리 심한 치통도 낫는다는 조선사람들의 기이한 관습만 없다면 이 바위는 전혀 보잘것이 없다. 나는 치통을 앓지는 않았지만 이 기적 같은 장소에서 매일같이 늘어서는 순례 행렬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어느 날 오후에 그곳에 갔다. 거대한 이빨의 발치에 놓여있는 작은 제단 위에는 치통이 치유된 고상한 방문객들이 감사의 표현으로 세워놓은 서패들이 바위에 기대어 고정되어 있었다. 서패에는 효과를 본 사람의 이름과 치유 일시가 적혀 있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뺨이 부풀어 오른 남녀들을 보고서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매서운 추위에 나오느라고 지독한 고충을 겪으면서 붕대와 수건 따위로 얼굴을 동여매고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올라와서 제단 앞에 턱을 내민다음 준비한 만큼의 돈을 바치고서, 마치 고양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사람의 다리에 부벼대듯이 앞 사람을 따라서 이빨 바위에 뺨을 비비며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그들은 붕대를 벗어버리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뺨을 그 차가운 돌 위에 문지른 다음, 안도하거나 아니면 더 심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천차만별의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은 내가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떤 쇼보다도 더많은 즐거움을 선사했다. 만약 고통이 일시적으로 사라졌다면, 그곳에서 기적을 주관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돈을 받아 내려고 했다. 반면에 대부분의 경우들처럼 더 심한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그의 비열한 수법에 분개하지 않고 더 많은 돈을 갖다 바쳐야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이 더 많은 돈을 바치도록 유도하고 다시 차가운 돌에 얼굴을 문지르게 한다. 그밖의 다른 데가 아프면 저 경박한 사람들은 과연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의심스럽구나.

*A.H.새비지-랜도어 지음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H.세비지 랜도우의 조선의 종교-샤마니즘을 중심으로

 

어디에 가든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종교문제는 다루기가 힘들다.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은 종교가 없으나 고려시대인 10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는 열렬한 불교신자들이 있었던것 같다. 조선에서 불교는 몇 차례 중국의 침략을 받는 과정에서 성했던것 같다. 한때 거대한 구름처럼 불교가 조선을 풍미했으나 여기 저기에 강렬한 활동의 자취만을 남긴채 명멸해 갔다.

불교의 승려들은 한때 실질적으로 왕을 움직일만큼 국사 전반에 대해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선동을 일삼은 탓으로 나라가 혁명과 내분에 휘말리자, 그들을 탄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그들은 그때부터 천한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나라에서는 도성 안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종교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법을 제정하여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승려들은 성내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면 참수당했다.

이렇게 해서 승려들이 법당에서 누렸던 영향력은 갑자기 몰락하였고 법을 어긴 자들은 가장 엄중하게 다스려졌기 때문에, 조선에서 불교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거의 5세기 동안 대단히 성행했다 할지라도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수많은 원시적인 미신들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는데, 불교가 몰락함에 따라 이러한 잠재 의식이 전보다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둘째, 앞에 언급한 법이 대단히 엄격했을 뿐더러 짧은 시간 동안에 후원자들이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금난에 쪼들린 절들은 급기야 문을 닫아야 했다. 여기에서는 내가 조선에서 본 무속신앙의 모습과 몰락과정에 있던 불교사찰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한다.

무속신앙(샤마니즘)

굳이 표현을 하자면 현재 성행하고 있는 종교는 샤마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적인 자연 숭배는 조선 사람의 종교적 영감을 매우 충분하게 보여 준다. 또한 조선사람들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하늘, 새벽별 그리고 선과 악의 영혼과 함께 인간을 이 세상에 공존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기족중에 누가 죽거나 어떤 큰 일이 일어났을 때, 혼령들에게 제물을 바친다.심지어 높은 교육을 받은 저명 인사들조차도 이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지배자와 친밀하게 지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 혼

조선사람들은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하늘과 영혼은 공존하여 서로 교감한다고 맹신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갖가지의 모든 질병, 특히 마비증세는 건강이 나쁜 혼령이 사람의 신체를 홀렸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죽는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 혼령의 작용 이외에 어떤 것에서 기인할 수 있단 말인가? 노화나 역병은 죽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오직 영생하는 불멸의 악령이 이 모든것에 대한 유일한 답이다.

산신령

가장 유명한 혼령은 아마도 산신령일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산과 언덕에 이 마법의 영웅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망자가 산에 묻히면 그 혼령은 어떤 동물의 몸에 전이될 때까지, 밤에 이웃의 주위를 배회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몇 몇 작가들이 즐겨 부르는 것과 같은 산신(山神)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판다하기에 주민들이 그 혼령을 떠올릴 때는 숭배하는 경향보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 때문읻. 건강한 정신과 신체를 가진 조선 사람은 전장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용맹을 발휘하지만, 밤에 산길을 걷지 않으려 하며 심지어 낮에산에 올라가야만 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단한 두려움에 휩싸인다.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한아름의 돌을 준비해 가지고 이런 상상물을 향해 하나씩 힘껏 던지며 산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혼령들에게 자신과 동반하기를 원치 않음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더 낫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간단한 조치를 취하고 나면 혼령은 그 뜻을 존중하거나 멸시해서 여행자의 안녕을 거의 방해하지 않는다. 마을 주위의 언덕은 산신령에게 던진 돌무더기로 덮여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영혼과 접촉하고 있다고 상상하여 일어난 공포심이 만들어 낸 효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영혼과 신체적인 접촉이 있다고 상상하는 그것은 단지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나뭇잎이나 작은 가지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마음의 시야에서 그들이 허공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상상의 적을 향해 돌을 던진다. 용감하지 못한 사람들은 후퇴하거나 어떤 때에는 머춰 서서 자신을 뒤따라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한다.신수(神樹)

어린 시절부터 이런 영혼들이 일으키는 두렵고 기이한 일들이 수없이 뇌리에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혼령의 일상적인 행태는 늘 생생하게 각인되어있어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돌무더기 외에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신성시되는 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은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는데 특히 산등성이에 많다. 나뭇가지는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누더기나 유리 조각 그리고 갖가지 제물들로 덮여 있어 종종 통행자를 놀라게 하는데, 이것은 혼령들에게 감지되어 공격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어 언덕을 지나칠 때에는 이런 누더기를 바치는데, 신성한 나무가 너무 많아서 바칠 물건이 부족할 때에는 많은 여인들이 비단옷을 찢어서 나무가지의 다른 제물들 사이에 걸어놓는다고 알려져 있다.

악 령

어느날 저녁, 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물감상자를 나르던 짐꾼이 겁에 질려 자신에게 혼령이 씌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혼령이 입을 통해 자신에게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며 입을 꼭 다물고 좀처럼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차거운 지팽이 끝으로 물래 목 뒤를 건드리자 그것을 귀신으로 착각한 그는 혼비백산해서 죽어라고 달아났다. 그는 반 마일가량 떨어진 곳의 오르막 길에서 나를 만나자 진심으로 사과하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어떤 혼령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정신없이 흔들어 댔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입 속으로 들어오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지독한 중병에 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하였다. 지팡이 끝으로 건드린 것은 바로 나라고 말했으나 그는 자기가 더 잘 안다며 믿지 않았다. 그는 “아닙니다. 선생님. 정말 제 눈으로 나를 덮친 혼령을 똑똑히 봤어요.”라고 말했다.

이런 영혼의 형태는 수많은 상상과 사람들의 표현능력에 따라 무척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형태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사람이나 뱀의 형상이리라고 가정한다. 조선 사람들의 관념에 의하면 혼령을 쫓는 최상의 방법은 음악이다. 내 생각에 그 음악이란 오히려 소음에 가깝다. 귀신이 들면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북소리, 목소리, 요령소리들을 요란스럽게 낸다. 반면에 한편으로는 실에 매달려 댕그랑거리는 작은 유리 조각들과 감미로운 음색을 가진 종을 지붕의 모서리나 창문 또는 문 앞에 달아 놓으면 풍금소리와 거의 흡사한 청명한 소리를 내는데, 이것은 집에 행운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선한 신을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바 람

조선 사람들은 바람은 신이 매우 강하게 숨을 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비, 번개, 전쟁, 기근, 곡식 등에도 각각 특별한 신이 있어 적절한 때, 올바른 방식으로 기원하거나 제사드리지 않으면 예기치 못했을 때에 앙갚음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굿

조선의 신들은 매우 민감해서 주의를 요한다. 신들은 점술가들을 통해서 사람들 특히 부유한 사람들에게 계시를 내리거나 위험사항을 미리 알려주면서 중개인에게 얼마간의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것을 고치거나 회개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렇기 때문에 무당들은 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준 댓가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 도심지 외곽에는 무당들이여러 방식으로 주술을 완벽하게 행할 수 있는 시설들이 정열해 있다. 가난한 사람이나 지체 높은 사람이나 모두 이곳의 단골손님이다. 귀청이 터질듯이 고함을 지르고 손뼉을 치고 북을 두드리며 굿을 함으로써 병마를 쫓고 고통을 약화시키며 재앙을 예방하고 애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아이를 얻을 수 있다. 정부는 이러한 무당 집단을 앞서 말한 종교집단으로 여기지는 않으며 한 두 집 정도는 도성안에서도 볼 수 있다. 지독히도 씨끄러우며 특히 여자들이 무척이나 신봉하는 그러한 집 한 채가 서울의 경계를 따라 서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남산의 등성이에도 역시 한 두 채가 있다.

몇 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굿은 대체로 집 앞의 탁 트인 평지에서 이루어진다. 무아지경 상태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무당을 중심으로 여러 기원자들이 둘러앉는다.

더 많은 돈이 놓일수록 소리는 더 커지며 푸닥거리가 더 오래동안 지속된다. 가운데에 앉아있는 무당은 이따금씩 일어나서 원을 만들고 있는 한 여인에게 급작스레 다가가서 그의 몸 안에 악귀가 씌워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등을 격렬하게 두드리거나 흔들어 댄다. 그는 별도의 돈을 더 내서 특별한 굿을 함으로써 그 악귀를 쫓아내야 한다는 암시를 받을 것이다. 몸 안에 무엇인가 들어와 있다고 느낀 그는 공포 때문에 몸을 흔들고 손뼉을 치고 북을 두드리고 고함을 질러대는데, 결국 악귀를 내쫓은 후에는 무당히 특별히 요구하는 돈을 추기로 지불한다

무 당

무당들은 여자가 숫적으로 더많다. 그들은 도시의 하층민에서 충원되며 대개 모든 사람의 형편이나 조건 그리고 하는 일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전 지식을 가짐으로써 그들은 종종 과거를 완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미래의 사건을 예견하는 많은 경우에 자신이 판단컨대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델피의 신탁과 매우 비슷한 방식으로 예언한다. 그들은 상대방이 만족스러워할 만한 대답을 한다. 그런데 자신이 예언한대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은 돈을 더 뜯어내않으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고 협박한다. 그들은 이렇게 번 돈을 대개 밤에 술마시고 흥청대는데 탕진한다. 그들은 대체로 파염치하고 비도덕적인데, 종종 명문가의 음모나 심지어는 살인등의 끔찍한 범죄에도 연류된다.

다음에는 <조선의 종교(2)-불교를 중심으로>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에서

명성황후 민비 암살 사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지음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5일에 일본공사 미우리가 훈련대와 일본수비대 병사 및 낭인들로 하여금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왕후 민씨를 살해케 한 사건이다. 일본은 친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의 식민지화를 서두르려고 친러정책을 쓰는 왕비를 죽였다. 시체마저 비단 홑이불에 싸여 불살라진 왕비는 그 뒤 일본의 압력으로 폐위되었다가 이태 뒤에야 명성황후로 올려졌다.

콜레라도 가라앉고 그에 관련된 여러일들도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대궐에서는 큰 비극이 일어났다. 진보와 문명과 개혁의 벗이었던 총명하고 진보적인 왕비가 암살되었다.

중전마마는 총명한 외교관이었으나 늘 그의 적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일종의 보호국으로 생각하여 왕비가 나라 안팎에 펼치는 정책을 감독하려 들었다. 많은 관직들이 일본인들, 또는 일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채워졌고, 조선군대의 거의 전부가 일본 관리의 훈련을 받았으며 그 명령을 따랐다.

왕비의 애국심과 총명함을 보고 일본인들은 조선을 일본화하려는 자기들의 계획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 하나와 마주쳐야 한다는것을 깨닫고 나랏일에 그가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이런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다짐을 왕비에게서 강제로 받아냈다. 물론 이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고, 왕비는 여전히 혼란을 일으켜 그들의 계획에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내 일본 공사관의 인사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정부의 이름으로 그때까지 줄곧 왕비에게 일본의 지지와 보호를 약속해오던 이노우에 공사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미우라 공사가 그 자리를 맡았는데 그는 전임 공사와는 전혀 성향이 다른 인물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군대가 새벽 세시에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이며 왕비의 가혹한 적이다)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다이 장군(미국인)휘하의 조선인 근위병을 물리치고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것도 더 알 수가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몇 시간 동안에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여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손자 편을 들어 임금에게 반대한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왕비에게 반대하는 음모꾼들의 지도자가되어 그 무리의 앞장을 서서 대궐에 들어가 두 분 전하를 사로잡은(그리고 그 김에 정권도 손에 쥐고) 뒤에 왕비를 쫓아내는데 이미 그들과 합의를 본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무리들은 이 늙은이를 가마에 태우고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대궐문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탄약은 몰래 옮겨다 놓았고 미국인들에게 훈련을 받은 군인은 거의 다 일본인들에게 훈련받은 군인들로 바꾸어 놓았으므로 공격 부대는 총을 쏜 뒤에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대궐안으로 들어섰다. 왕족의 숙소까지는 얼마만큼 거리가 있었는데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그들이 처들어오기 조금 전에 그곳에 들려왔다. 중전마마는 깜짝 놀랐다. 중전은 용감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적들이 아주 지독하고 힘이 세며 위험한 무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가냘픈 실에 매달린 칼 아래 있는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임금의 둘째아들인 의화군은 왕비에게 아직 파수꾼이 지키고 있지 않은 작은문으로 자기와 함께 도망치자고 간청했다. 변장을 하고 그 문을 빠져나가 성안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전마마는 외국인들이 대궐을 점령한 것이 틀림없는 이런 공포 속에 나이가 너무 많아 움직일 수 없는 대비를 홀로 남겨놓고 갈 수는 없다고 점잖게 거절하였다. 게다가 그는 이노우에 공사가 자기에게 했던 다짐 곧 절대로 안전을 보장하겠노라던 그 다짐을 아무 의심없이 믿었고, 더구나 정병하(친일 개화파 정객으로 농상공부 협판이었다)라는 신하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 분 전하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다짐을 했다. 이 남자는 근본이 천한 사람인데 왕비의 덕으로 출세를 하고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비는 그에게 퍽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왕비에게 숨지 말라고 전언을 해 놓고는 그의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했다.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 자는 이미 암살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왕비 암살의 공모자임을 밝혀주는 증거는 무척 많다. 그래서 왕비는 무척 불안하고 두려운 채로나마 그냥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대원군과 고용된 암살자들이 왕비를 찾으러 밀려닥쳤을 때에야 숨으려고 했다. 아아! 그러나 숨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우리들에게 말로 전해진 숱한 소식들 가운데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두 사람 곧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때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일치되는 말을 하였다. 곧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서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일본인 ‘소시’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 어디 있어!”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미친듯이 야만적인 사냥질을 시작했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들짐승 같은 그들은 대궐의 여자들을 붙들어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면서 두들겨 팼다. 왕비가 어디 있는지 대라고 하는 것이었다. 시바틴 씨도 그들에게서 심문을 받았으며 죽인다는 위협도 받았다. 일본군의 제복을 입은 ‘소시’와 장교들은 임금이 서 계신 방을 지나갔다. 임금은 그들의 관심을 왕비에게서 다른데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 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 뒤에 왕비의 시체를 덮어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와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써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찾던 사람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곧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를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뼈 몇 줌만 남았다.

그 다음에 펼쳐진 일들은 모두, 이 암살자들이 자기들의 범죄를 감출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지른 어리석은 일들이었다.

갖가지 얘기들이 떠돌았다. 중전은 무사히 피신을 하여 어딘가에 숨어 계신다는 등, 일본인들이 잠간 데려갔을 뿐이니 언제라도 다시 모셔올 수 있다는 등의 얘기였다. 1895년 치 <조선인의 벗>에는 암살자들에 대한 공식 보고서와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렸던 마우라 공사와 ‘소시’에 대한 공판 기록이 실려있다. 공식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피고인 미우라 고오로는 1895년 9월 1일 . . .공무를 맡아. . . .그의 관찰에 따르면 조선의 사태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중전은 나날이 횡포를 더해 가고 있었고, 국사에 방자한 간섭을 획책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이제 막 제국 정부의 지도와 협조 아래 재조직된 행정 체계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일어났다. 조선의 궁중은 일본에 대해 등을 돌렸고 ‘구렌다이’ 부대(일본 장교 휘하의 조선군대)를 해산하고 그 장교들을 처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게다가 미우라에게 보고된 내용에 따르면, 조선 궁중에서는 개화파와 독립협회에 참여한 혐의를 받는 몇몇 각료들을 좌천시키고 또 살해함으로써 모든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우라는 큰 불안을 느꼈다. 궁중이 보여주는 태도는 조선을 위하는 일에 대한 뚜렸한 반대 표시일 뿐만 아니라, 내정 개혁 사업에 대한 훼방이고 ‘왕국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피고인은 한편으로는 “조선 왕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서의 제국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선책을 쓸 필요를 느꼈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이 보고서에는 10월 3일에 열린 대원군과 일본인 관리들의 회의에서 “대원군이 대궐에 들어가는 데 ‘구렌다이’ 부대를 이용하여 도움을 주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 부대원들은 대궐의 미움을 받고 있었으며 , 자기 스스로 위험을 느끼고, 사건의 전개를 매우 침통하게 여기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또 이 작전을 지원하려고 서울에 주둔한 일본 군대도 출동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궐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왕비의 목숨을 빼았도록 결정을 보았다”고 쓰여 있다.

이 계획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들은 일본인의 공판기록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미우라는 그들(대원군을 호위하기로 한 사람들) 에게 작전의 성공에 따라 지난 스무 해 동안 조선에 온갖 손해를 끼쳐왔던 죄악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말하고, 대궐에 들어가는대로 바로 왕비를 처치하라고 부추겼다.

뒤 이어 이 기록에는 음모자들이 꾸민 갖가지 절차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마침내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하여 일당은 서울을 향하여 천천히 나아가다가 서울의 서쪽 문 밖에서 ‘구엔다이’ 부대와 합류하였다. 그들은 얼마동안 거기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동틀 무렵에 그들은 모두 광화문을 지나 대궐로 들어가 곧장 지밀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중에 그 누구에게도, 실제로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는 없다. . . .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피고인들을 모두 석방한다. . . .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입수된 기록들과 다른 문서들은 그 소유자들에게로 돌려준다.”

이상은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판결임

예심판사 요시다 요시다
법원서기 다무라 요시하루
메이지 29년 1월 20일
이 사본은 원본과 틀림없음.
히로시마 법원서기.”

이 기록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마우라 공사는 일시적으로 박탈당했던 모든 직함과 명예를 최근에 되찾았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