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서양사람들이 본 개화기 조선과 조선사람들(4)/2021년 12월 15일>

-서양인들이 본 개화기 조선과 조선 사람들-

사비지 랜더가 직접 그린 당시 서대문 근처

조선의 여인들

A. H. Savage Landor(1865-1924) 는 영국의 화가요, 탐험가요, 문필가로서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하고 1895년 <Corea or, Cho-sen,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그가 직접 그린 당시 조선의 풍속화 들이 삽입되어 흥미롭다.

조선여성의 용모

하층계급은 예외이기는 하지만 , 대체로 어여쁘다고 알려진 조선의 여성들은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외출이 거의 허락되지 않는다. 외출할 때 그들은 모양이 희거나 푸른색의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들은 남자나 특히 외국인을 만나면 수줍어하며, 누군가 근접해 오면 특히 외길에서는 대개 옆집 대문을 열고 들어가 숨어 버린다. 처음에는 내가 지나칠 때마다 처녀들이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녀들이 집에 도착했나보다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이목을 피하기 위한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중에 조선사람 친구에게 물어보니 조선의 여인은 외국인 남자와 마주치게 되면 어떤집이든 문을 열고 들어갈 권리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그것은 조선 여인들에 대한 높은 도덕적 신뢰와 함께 외국인 남성을 양귀(洋鬼)로 보고 그들에게서 여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세간의 인식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이 조선 여성의 매력을 분석하게 될 때 찬반양론에 부딪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평균적으로 조선 처녀들의 매력이 다른 나라의 처녀들보다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다. 여성의 경우 남자들이 그녀의 매력에 흠취할만큼 아름다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몹시 추해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일단 아름답게 생긴 한 처녀를 보기로하자. 슬픈듯한 모습의 작은 달걀형의 얼굴을 가졌다. 그녀는 아치형의 눈썹과 긴 속눈썹 때문에 타원형의 새까만 눈이 부드러워 보인다. 약간 덜 평편한 것이 낫겠지만 그녀는 곧은 코와 달콤한 작은 입을 가지고 있으며 눈처럼 하얀 예쁜 아랫윗니를 드러내고 있다. 당신이 그녀를 처음 보게된다면, 그녀의 행동은 상당히 고결하고 침착하게 느끼게되어 당신은 그녀를 거의 작은 조상(彫像)으로 여길 것이다. 그녀는 수줍음 때문에 거의 얼굴을 돌리거나 고개를 들어 당신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웃음을 흘리려고 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데, 바로 그것이 그녀의 정숙함이다.

그러나 일단 수줍음이 가시면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밝아진다. 그녀의 화사한 얼굴과 부드럽고 애정어린 눈길로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아무리 강직한 남자라도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청순하고 자연스러운게 그녀의 주된 매력이다. 유럽 여인의 아름다움은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견할 바가 못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렇게 키가 크지도 않고 체형이 빼어나지도 않지만, 내 생각에는 극동 민족의 여성들 가운데서 보기 드믄 세련된 미모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매우 흔히 들어온 일본 여성은 보다 예술적으로 차려 입지만 조선의 비너스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밝은 햇살과 위에 열거한 특성들을 모두 고려해 볼 때, 조선의 여성은 나에게 유럽 여성의 아름다움의 표준에 가장 가깝게 근접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이 나의 서투른 묘사에서 판단했을 테지만 그녀의 의상은 우아하기보다 어색하고 딱 어울린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상이 눈에 익을 무렵에는 그것을 입은 처녀가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는 특별히 한 여자를 기억하는데 그녀는 왕의 대신들 가운데 한 사람의 소실이었다. 운 좋게도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자리에 앉아 주었다. 그녀는 흔히 입는 것보다 훨씬 더 길고 푸른 너울을 입고 있었는데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 너울은 바로 발목 위까지 오는 흰 비단 바지와 그녀의 작은 발에 꼭맞는 푸르고 흰 예쁜 신발을 가렸다. 그녀는 입고 있던 작고 붉은 저고리를 매우 자랑했다. 그리고 그녀는 파이프 담배를 피웠는데 내가 알기로 그녀의 나이는 단지 열일곱 살에 불과했다.

평민층의 여성들은 그들이 입은 초라한 옷과 모리 모양새를 통해 언제나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들의 머리는 두 개의 긴 머리단이 일종의 터번 속으로 머리 뒤에 감아 올려져 있었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미용 기교는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실용적이고 꾸밈없이 보여 상류 계층 여성의 무성한 머리숱과는 진기한 대조를 이루었다. 나는 땋아 올린 머리와 채워 넣은 머리가 여인들이 자신의 미용법을 제법 욕심내어 유행시키기 위해 애용된다고 들었다.

조선 여성의 지위.

조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은 이름도 없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무개’의 딸이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불려진다. 가족중에 여러 명의 딸들이 있다면 혼란을 피하기 위해 편의상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가 결혼하는 순간부터 잊혀지는데, 그런 일은 종종 결혼 초기에 발생한다. 그때부터 그는 아무개의 아내가 된다. 조선에서 여성은 다소 애처롭고 따분한 생활을 한다. 왜냐하면 4-5세 경부터 그들은 심지어 자신의 남자형제들과도 떨어져 집안의 격리된 장소에서 양육되기 때문에, 그 때부터 그들의 덜 성숙한 작은 머리 속에는 이성과 대화하거나 심지어 처다보는 것조차도 부도덕하다는 관념이 뿌리 박히게 된다.

물론 상류계층은 대부분 가장 엄격하게 예법을 지켜야 한다. 반면에 최하층의 여성들은 비교적 자유를 누린다. 그들은 신분이 매우 낮아서 어떠한 주목도 받지 않기 때문에 마음내키는 남성에게 말을 걸거나 심지어 너울을 쓰지 않고도 외출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류 계층은 매우 격식을 따지기 때문에 엄격하게 규칙을 지킨다. 조선에서 여성은 노예와 같다. 그는 쾌락과 노역을 위해 이용된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거나 자신의 어떠한 견해도 표명할 수 없으며 자신의 남편 외에 다른 남성을 처다볼 수도 없다. 조선문학에는 단지 남자들이 처다보았다는 이유 때문에 처녀들이 자살했다거나 남편이나 남자 형제나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수없이 많다. 오늘날도 자신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말을 나누는 대죄를 범했기 때문에 죽인다면 법적으로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상류층의 과부는 재혼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죽은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면, 자신의 목을 찌르거나 몸을 자해하여 가장 빠르고 용이하게 남편의 뒤를 쫓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여자들의 그러한 행동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에게는 무척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하류계층은 매우 현실적이다. 이 계층의 여성들은 10여명의 남편과 사별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곧바로 새로운 결혼생활에 들어갈 것이다.

어쨌든 조선에서 여성은 귀중하고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품팔이꾼과 이와 비슷한 부류, 또는 더 낮은 신분의 사람들은 여자 없이는 살수가 없다. 왜냐하면 음식을 준비하고 빨래를 하며 바느질을 하는 역할은 다름아닌 여성들이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항상 매를 맞는다. 그러나 여자들도 종종 남자를 때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선의 여자들도 때에 따라서는 성깔을 부리기 때문이다. 질투는 여자의 주요한 성격중 하나이다. 나는 서울에서 다른 사람을 쥐어 뜯으며 길길이 날뛰는 여자들을 본 적이 있다. 맙소사, 그녀들의 할퀴는 기술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그와 같은 경우에 남자들은 주위에 서서 싸움을 조장하고, 특히 남편은 더욱 흥미있게 즐긴다.하류계층의 여자들은 항상 흥분하고 성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항상 서로를 모욕하고 욕하거나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하기까지 한다.

여성의 의무

그러나 조선에 있는 모든 여성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오해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조선의 여성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들 대다수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들은 예의 바를뿐 아니라 본성이 온순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은 가장 추운 겨울밤에 강과 도랑의 두꺼운 얼음을 깨 그 찬물에 자신의 손을 담거 아마도 집에서 한가롭게 잠에 취해있을 남편과 주인의 옷을 빨며 시간을 보내는 불쌍한 여성들을 기억해야 한다.

또 당신은 조선의 가정에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사치품인 비누로 젖은 무명옷의 때를 벗기려고 곤봉과 같은 짧은 나무로 만든 방망이를 두들기고 있는 여성들을 기억해야 한다. 집에서 빨래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는 더 가엾은 여성들은 개울로 가야 한다. 그런데 옷은 낮에 입어야 하기 때문에 빨래는 반드시 밤에 해야한다. 때때로 셋 혹은 그 이상이 함께 무리지어 빨래를 하는데 그것은 찬 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목 주위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얼음을 깨트리며 때가 깨끗하게 빠질 때까지 옷을 두드려야 하는 단조로움을 어느 정도 없애준다. 부유층의 여성들은 집에서 빨래를 한다.

만약 당신이 밤에 서울 거리를 걷노라면 많은 집에서 시계 소리와 같이 박자에 맞춰 규칙적으로 빠르게 울리는 똑딱똑딱하는 소리에 곧 익숙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소리는 모든 사람이 나들이옷을 입고 외출하고 싶어할 때인 어떤 잔치나 공공 행렬 전날 밤에 더욱 부산하다. 만일 우리나라 여성들이 옷 한 벌을 적당히 빠는데에 두 시간 정도 걸리는 몹시 힘든 이와 비슷한 상황과 정신상태에서 빨래터로 내 몰린다면 잔혹하고, 자신을 냉대하는 남편에게 당장 이혼을 요구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나 조선의 여성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 그것이 남자를 기쁘게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아무 불평도 없이 한다. 사실 나는 조선 여성은 순교자가 되고싶어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가 고생하지 않는다면 더 개화된 다른나라의 여성들 처럼 그들 자신을 매우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습고 이치에 맞지 않지만 실제로 그렇다. 조선의 여성을 연구하는 동안 그녀들이 의무적으로 무거운 짐과 고된 일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회보다 그들을 더 행복하게 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나의 생각은 확고해졌다. 만약 거기에다가 그녀가 냉대에 대한 불평을 더 할수만 있다면 그녀의 행복은 무한해질 것이다. 내 생각에 조선 여성들은 아마도 아시아에 있는 어느 다른 여성들보다 생활에서 즐거움을 덜 누린다. 이와같은 생활에는 불행, 침묵 그리고 심지어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녀의 어린아이들-남편과 아이들-로부터의 분리가 포함되어 있다. 무엇이 그들을 이보다 더 불행하게 만들 수 있을까? 여전히 그녀들은 그런 모든 것들을 훌륭하게 인내하며 심지어는 이와같은 슬픔을 즐기기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길들여 있는 것을 항상 즐기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기 생

여성의 특별한 계층에 대해 몇 마디 보태야 되겠다. 일본에서처럼 가인(歌人)들은 다른 여성과는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동업집단이다. 일본의 게이샤와 유사한 표현이 이와같은 발랄하고 재치있는 젊은 여성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고관들과 벼슬아치들은 노래와 음악으로 연회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그들을 흔히 부른다. 그들은 대체로 매우 가난한 계층의 출신들이다. 출중한 외모와 어느 정도의 재치 그리고 음악적인 재능은 성공적인 가인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할 항목들이다. 그들은 즉석에서 시를 짓거나 옛 민요를 불러 자기도취적이고 살찐 관리들을 기쁘게 한다. 만약 호평을 받는다면 그들은 손님들의 잔에 정겹게 술을 따르고 다과를 건넬 수도 있다. 만약 아름답고 재능이 있다면 ‘조선의 가인들은 자신들의 직업을 통해서 부유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신들이 노력한 대가만큼 많은 돈을 벌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조물주가 은덕을 베푼다면,기생들은 어떤 부유한 벼슬아치나 관리의 내연의 여자가 됨으로써 옛 생활을 청산한다. 이러한 여성들은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을 칠하며 비싼 비단옷을 입는다. 그리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들 사이에 끼이게 된 사람들처럼 으시대는 태도와 역겨운 자부심을 갖게된다. 그들은 다른 조선사람들을 명령하고 많은 찬사를 받는다. 돈 때문에 마음이 돌변하는 이와 같은 창기(娼妓)들로 인해 종종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음모와 스켄들이 일어났다.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에서

명성황후 민비 암살 사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지음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 5일에 일본공사 미우리가 훈련대와 일본수비대 병사 및 낭인들로 하여금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왕후 민씨를 살해케 한 사건이다. 일본은 친러세력을 제거하여 조선의 식민지화를 서두르려고 친러정책을 쓰는 왕비를 죽였다. 시체마저 비단 홑이불에 싸여 불살라진 왕비는 그 뒤 일본의 압력으로 폐위되었다가 이태 뒤에야 명성황후로 올려졌다.

콜레라도 가라앉고 그에 관련된 여러일들도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대궐에서는 큰 비극이 일어났다. 진보와 문명과 개혁의 벗이었던 총명하고 진보적인 왕비가 암살되었다.

중전마마는 총명한 외교관이었으나 늘 그의 적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일종의 보호국으로 생각하여 왕비가 나라 안팎에 펼치는 정책을 감독하려 들었다. 많은 관직들이 일본인들, 또는 일본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채워졌고, 조선군대의 거의 전부가 일본 관리의 훈련을 받았으며 그 명령을 따랐다.

왕비의 애국심과 총명함을 보고 일본인들은 조선을 일본화하려는 자기들의 계획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 사람 하나와 마주쳐야 한다는것을 깨닫고 나랏일에 그가 참여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우리가 들은 말에 따르면 그들은 이런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는 다짐을 왕비에게서 강제로 받아냈다. 물론 이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고, 왕비는 여전히 혼란을 일으켜 그들의 계획에 큰 장애가 되었다. 마침내 일본 공사관의 인사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정부의 이름으로 그때까지 줄곧 왕비에게 일본의 지지와 보호를 약속해오던 이노우에 공사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미우라 공사가 그 자리를 맡았는데 그는 전임 공사와는 전혀 성향이 다른 인물이었다. 미우라 공사는 아주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나라에 대해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을 사람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군대가 새벽 세시에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이며 왕비의 가혹한 적이다)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다이 장군(미국인)휘하의 조선인 근위병을 물리치고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것도 더 알 수가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몇 시간 동안에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여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손자 편을 들어 임금에게 반대한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왕비에게 반대하는 음모꾼들의 지도자가되어 그 무리의 앞장을 서서 대궐에 들어가 두 분 전하를 사로잡은(그리고 그 김에 정권도 손에 쥐고) 뒤에 왕비를 쫓아내는데 이미 그들과 합의를 본 것이었다. 그래서 그 무리들은 이 늙은이를 가마에 태우고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끝난 대궐문으로 행진해 들어갔다. 탄약은 몰래 옮겨다 놓았고 미국인들에게 훈련을 받은 군인은 거의 다 일본인들에게 훈련받은 군인들로 바꾸어 놓았으므로 공격 부대는 총을 쏜 뒤에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대궐안으로 들어섰다. 왕족의 숙소까지는 얼마만큼 거리가 있었는데 소동이 일어났다는 소문은 그들이 처들어오기 조금 전에 그곳에 들려왔다. 중전마마는 깜짝 놀랐다. 중전은 용감한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적들이 아주 지독하고 힘이 세며 위험한 무리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가냘픈 실에 매달린 칼 아래 있는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임금의 둘째아들인 의화군은 왕비에게 아직 파수꾼이 지키고 있지 않은 작은문으로 자기와 함께 도망치자고 간청했다. 변장을 하고 그 문을 빠져나가 성안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로 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전마마는 외국인들이 대궐을 점령한 것이 틀림없는 이런 공포 속에 나이가 너무 많아 움직일 수 없는 대비를 홀로 남겨놓고 갈 수는 없다고 점잖게 거절하였다. 게다가 그는 이노우에 공사가 자기에게 했던 다짐 곧 절대로 안전을 보장하겠노라던 그 다짐을 아무 의심없이 믿었고, 더구나 정병하(친일 개화파 정객으로 농상공부 협판이었다)라는 신하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두 분 전하는 절대로 안전하다고 다짐을 했다. 이 남자는 근본이 천한 사람인데 왕비의 덕으로 출세를 하고 많은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왕비는 그에게 퍽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왕비에게 숨지 말라고 전언을 해 놓고는 그의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했다.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 자는 이미 암살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왕비 암살의 공모자임을 밝혀주는 증거는 무척 많다. 그래서 왕비는 무척 불안하고 두려운 채로나마 그냥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대원군과 고용된 암살자들이 왕비를 찾으러 밀려닥쳤을 때에야 숨으려고 했다. 아아! 그러나 숨기에는 너무 늦은 때였다.

우리들에게 말로 전해진 숱한 소식들 가운데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이 꽤 있었다. 그러나 외국인 두 사람 곧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 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때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일치되는 말을 하였다. 곧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서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을 일본인 ‘소시’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 어디 있어!”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먹이를 찾아 미친듯이 야만적인 사냥질을 시작했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들짐승 같은 그들은 대궐의 여자들을 붙들어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면서 두들겨 팼다. 왕비가 어디 있는지 대라고 하는 것이었다. 시바틴 씨도 그들에게서 심문을 받았으며 죽인다는 위협도 받았다. 일본군의 제복을 입은 ‘소시’와 장교들은 임금이 서 계신 방을 지나갔다. 임금은 그들의 관심을 왕비에게서 다른데로 돌리려고 애를 썼다.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 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그런 뒤에 왕비의 시체를 덮어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와서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써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찾던 사람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곧 거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를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뼈 몇 줌만 남았다.

그 다음에 펼쳐진 일들은 모두, 이 암살자들이 자기들의 범죄를 감출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저지른 어리석은 일들이었다.

갖가지 얘기들이 떠돌았다. 중전은 무사히 피신을 하여 어딘가에 숨어 계신다는 등, 일본인들이 잠간 데려갔을 뿐이니 언제라도 다시 모셔올 수 있다는 등의 얘기였다. 1895년 치 <조선인의 벗>에는 암살자들에 대한 공식 보고서와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렸던 마우라 공사와 ‘소시’에 대한 공판 기록이 실려있다. 공식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피고인 미우라 고오로는 1895년 9월 1일 . . .공무를 맡아. . . .그의 관찰에 따르면 조선의 사태는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중전은 나날이 횡포를 더해 가고 있었고, 국사에 방자한 간섭을 획책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이제 막 제국 정부의 지도와 협조 아래 재조직된 행정 체계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일어났다. 조선의 궁중은 일본에 대해 등을 돌렸고 ‘구렌다이’ 부대(일본 장교 휘하의 조선군대)를 해산하고 그 장교들을 처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게다가 미우라에게 보고된 내용에 따르면, 조선 궁중에서는 개화파와 독립협회에 참여한 혐의를 받는 몇몇 각료들을 좌천시키고 또 살해함으로써 모든 정권을 탈취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우라는 큰 불안을 느꼈다. 궁중이 보여주는 태도는 조선을 위하는 일에 대한 뚜렸한 반대 표시일 뿐만 아니라, 내정 개혁 사업에 대한 훼방이고 ‘왕국의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피고인은 한편으로는 “조선 왕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서의 제국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개선책을 쓸 필요를 느꼈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이 보고서에는 10월 3일에 열린 대원군과 일본인 관리들의 회의에서 “대원군이 대궐에 들어가는 데 ‘구렌다이’ 부대를 이용하여 도움을 주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 부대원들은 대궐의 미움을 받고 있었으며 , 자기 스스로 위험을 느끼고, 사건의 전개를 매우 침통하게 여기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또 이 작전을 지원하려고 서울에 주둔한 일본 군대도 출동하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궐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왕비의 목숨을 빼았도록 결정을 보았다”고 쓰여 있다.

이 계획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들은 일본인의 공판기록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미우라는 그들(대원군을 호위하기로 한 사람들) 에게 작전의 성공에 따라 지난 스무 해 동안 조선에 온갖 손해를 끼쳐왔던 죄악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말하고, 대궐에 들어가는대로 바로 왕비를 처치하라고 부추겼다.

뒤 이어 이 기록에는 음모자들이 꾸민 갖가지 절차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마침내 이렇게 적혀 있다.

"그리하여 일당은 서울을 향하여 천천히 나아가다가 서울의 서쪽 문 밖에서 ‘구엔다이’ 부대와 합류하였다. 그들은 얼마동안 거기서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동틀 무렵에 그들은 모두 광화문을 지나 대궐로 들어가 곧장 지밀로 진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중에 그 누구에게도, 실제로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충분한 증거는 없다. . . .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피고인들을 모두 석방한다. . . .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입수된 기록들과 다른 문서들은 그 소유자들에게로 돌려준다.”

이상은 히로시마 지방법원의 판결임

예심판사 요시다 요시다
법원서기 다무라 요시하루
메이지 29년 1월 20일
이 사본은 원본과 틀림없음.
히로시마 법원서기.”

이 기록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마우라 공사는 일시적으로 박탈당했던 모든 직함과 명예를 최근에 되찾았다.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에서

1895년 조선을 휩쓴 콜레라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지음

 

 

어둠을 덮은 어둠-콜레라

1895년 7월과 8월에 콜레라가 조선을 휩쓸었다. 그때 조선에 와 있던 외국 선교사들은 캐나다의 선교사이지 의사인 에비슨 박사의 지휘 아래 이 병을 막아내는 데 앞장섬으로 이씨 조선 사람들에게 크게 환심을 샀다. 에비슨은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음은 물론 경찰지휘권까지 위임받아 일곱 주 동안에 외국선교사들과 더불어 쿨레라 환자 수천 명을 치료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전염병의 위력에 어두운 조선사람들을 계몽하려고 콜레라라는 병의 성격과 발생원인, 예방 지식 등을 한글로 자세히 적은 인쇄물을 널리 배포하여 그 예방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 일 이후로 선교활동이 크게 활발해졌다.

콜레라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퍼지기 시작했고 아침까지 멀쩡한 사람들이 낮에 송장이 되기도 했으며 한 집안에서 같은 날 몇 명씩 죽어 나가기도 하였다. 이웃에서 이웃으로 병이 번져 날마다 환자가 불어났다. 그 위세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고 한치의 어김도 없으며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지각있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일찍이 이 일을 경고했고, 유럽과 미국계 의사들에게 전국적인 검역소와 보건단속 기구를 설치할 것을 의논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 재치 있는 조선인 젊은이는 처량하게 말했다. “법을 만들기는 쉬우나 그 법이 제대로 시행될지는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검역을 하려고 관리와 군인을 파견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아주 작은 뇌물에도 금세 마음이 흔들리고말 것이라는 점은 이 나라의 관습과 이 나라 사람들을 잘 아는 이에게는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제물포와 서울 사이에 검역소를 세울 필요성이 얘기되었을 때에 고급관리들 스스로가 , 이 두 곳사이의 교역의 중대성에 비추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검역 따위를 시행하는 것이 아예 희망없는 짓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시퍼런 사과며 수박, 오이 따위를 미친듯이 먹는 것을 막아보려고 이런 음식을 사거나 파는 사람들에게는 엄벌을 내린다는 금지령이 내려졌고, 어디에나 그 포고문이 붙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일이 있은 뒤에 내 남편은 그런 물건을 엄청나게 많이 파는 좌판 앞을 지나게 되었다. 그 좌판장수 뒤에는 바로 그 포고문이 붙어 있었으나 순검 몇이 물건을 사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보란 듯이 뻔뻔스럽게 그 금지된 괴일을 맛있게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 정부가 자기들은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으며 모든 힘을 다 기울이고 있지만 수많은 관리들의 통탄스러운 부패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친 일이 아니다. 조선정부는 임시로 콜레라 응급병원을 세우고 위생법을 실시하고 돌림병이 번지는 것을 막으려고 2만원(1만 달러)을 기부했으나 그 돈을 탐욕스런 아랬것들이 조선의 표현대로 많이 “먹어 치웠다.”

그때에 그 도시에 있던 유럽인, 미국인, 일본인 의사들의 모임에서 에비슨 박사가 이 응급병원과 위생사업의 책임자로 뽑혔는데, 일본이들은 자기들은 서양사람 밑에서는 일할 생각이 없다면서 가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미국인들만이 이 엄청난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수많은 좌절과 장애를 겪은 뒤에 환자들, 그리고 매우 많은 선교사들로 구성된 간호원과 의사들을 받아들일 낡은 헛간 같은 집이 거칠게나마 완성되었다. 이런 긴급한 사태에는 걸맞지 않은 몹시 초라한 집이었으나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집이 들어선 장소가 그런 목적에 적절한 일을 할 수 있을 곳 같지가 않았다. 그곳은 툭 터진 곳이었고 습기가 차고 쌀쌀한 곳이었다. 게다가 환자들을 따뜻하게 하거나 격리할 방법도 없었다. 그 도시 안에서 어디서나 금방 볼 수 있는 필수품 정도로 가까스로 구색을 맞추었다. 아, 미국병원의 그 화려함! 미국인이 생각하는 ‘필수품’과 아시아에서 우리들이 구할 수 있는 ‘필수품’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마국인들은 필수품이라면 으레 침대와 침대보, 베게따위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환자들은 작은 무명 포대기를 덮고 바닥에 누워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일을 하는데 있어 다만 시설이 형편없고 필수품이 모자라고 적절한 위생단속이 시행되지 않고 협조가 부족해서 실망스러워 했던 것은 아니다. 에비슨 박사를 비롯해서 그 아래의 외국인 일꾼들이 모두 영웅적으로 일을 했고 지칠 줄 모르는 희생정신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평치 못한 수고였다. 조선사람들은 거의가 다 병원에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을 병원에 끌고 가는 건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조차 외국인 의사의 진료를 받으려 하지 않았으며 우리가 조선 약품을 써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아, 그 병은 너무나 맹렬해서 온갖 과학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여태껏 내가 본 상황가운데서 가장 절망적이고 무시무시한 일이었으며, 약이란 것도 그저 최후의 순간을 조금 늦추어 주는 것밖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독은 단번에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모든 기관에 퍼진다. 끔찍한 경련으로 근육이 옥죄게 되고 , 심장이 약해지고, 사지가 점점 차가와지고, 맥박은 가늘어지며 ,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된다. 때로는 아무런 예비 증세도 없이 갑자기 쓰러져서 급사하기도 한다. 또 병의 가장 격렬한 증상이 다 사라지고 , 욕지기와 고통도 멈추고, 맥박이 거의 정상이 되어 환자가 막 퇴원하려고 하는 때에, 폐렴이나 요독성 경련 또는 그 밖의 병발증으로 죽기도 한다.

언더우드 씨는 도시 곳곳에 설치된 검역소의 책임을 맡았으며 거기에 보고되는 모든 환자들은 곧 응급치료를 받았다. 젊은 기독교인 몇 사람은 이 일을 하려고 언더우드 씨에게서 훈련을 받았고, 언더우드 씨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서 병이 퍼진 마을들을 찾아내어 병에 안 걸린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조수들과 주민들에게 집을 소독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 젊은이들은 총명함과 열정과 용기로 지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검역관과 의사와 간호원들은 모두 뱃지를 달았는데 , 그 뱃지는 조선 지도위에 적십자가가 그려진 것이었다. 그러니 조선 땅 어디에서나 십자가가 움직인 셈이었고 그것이 조선정부의 상징을 지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 병을 막는 데 석회가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저분한 도랑가에 석회 가루가 여기저기 뿌려져 있기도 했고, 석회를 하얗게 바른 호로병을 콜레라를 쫓자내는 부적으로 여겨 문간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 병을 ‘쥐 병’이라고 하였다. 콜레라에 걸리면 쥐가 다리 안쪽을 콕콕 깨물면서 기어 다니다가 가슴까지 올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쥐의 넋에게 기도를 드리기도 했고, 집 대문에다 고양이 그림을 걸어 놓기도 했으며, 고양이 가죽으로 쥐가 난 곳을 문지르기도 했다. 그들은 온갖 높은 장소에서 하늘-하느님-에 기도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곤 했다. 병이 퍼진 지역의 거리에는 26피트쯤 간격으로 높이 5피트의 금줄이 쳐져 있었고 그 금줄에는 종이 부적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들 때문에 지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돌림병과 관련된 광경 가운데서 가장 참담했던 것은 어디에나 힘없이 걸려 있던 이 바람에 찢기고 비에 너덜너덜해진 가련한 종이 부적들이었다. 이것은 동정심도 없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귀머거리 귀신에게 바치는 맹목적인 미신이었다.

돌림병이 점점 번져 나가던 8월 초순에 우리 진료소에서도 콜레라 환자를 받기로 결정하였고, 에비슨 박사는 웰즈 박사와 언더우드 씨 그리고 나를 이곳의 감독자로 임명하였다.

도성 바깥의 높직한 곳에 자리 잡은 이 진료소에는 아늑한 방들이 많이 있었고, 방바닥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있어서 그런 일에는 아주 적합한 장소일 것 같았다. 그곳은 사실 그다지 큰 곳은 아니었으나 환자들은 재빨리 낫거나 재빨리 죽거나 했으므로 우리는 꽤 많은 환자를 받을 수가 있었다. 언더우드 씨와 웰즈 씨는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구할 수 있는 대로 죄다 구해서 쌓아 놓느라고 쉴 새 없이 일했다.

내 남편은 조선사람 가운데에서 간호부 지원자들을 모아 조를 짰다.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선교사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또 관청에서 고용한 간호사들도 수없이 많았으나 언더우드 씨는 몇몇 기독교인 조수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봉사를 해 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콜레라는 참으로 지긋지긋한 병이어서 가련한 병자들을 아무 불쾌감 없이 믿음직스럽고 친절하게 간호하는 데에는 사랑보다 중요한 것이 없었다.

이 일에는 선비나 양반계층에 드는 사람들도 끼어 있었는데 그들은 육체노동이라곤 도무지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어서 처음에는 좀 망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이 이 일을 하기로 결정을 하자 기꺼이 일을 했고 훈련을 좀 받자 아주 훌륭한 간호부가 되었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고 불쾌한 일에도 결코 움츠러드는 법이 없이 믿음직스럽게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저녁마다 진료소의 뜰에서 예배를 보고 찬송가를 불렀다. 그곳에서 의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마음을 모은 기도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내놓고 인정하는 이 모임에 대한 답으로 우리가 하는 일에 크나큰 축복이 있을 것임을 믿었다. 또 여기에서 우리 일꾼들은 새로운 열정과 믿음과 희망에서 우러나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웰즈 박사의 눈부신 업적은 높이 칭찬할 만하다. 나는 5마일 밖에 앓아 누워있는 우리 아기를 돌보느라고 병원에는 하루 걸러 한 번씩 밖에는 와서 봉사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우리 세 사람 중에 나머지 두 사람의 노고가 더욱더 컸다. 그러나 우리의 힘이 필요한만큼 용기도 그만큼 났다.

치료하는 동안에 비참한 정경들이 너무 많았으나 우리는 우리 환자들이 꽤 많이 목숨을 건진 것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 환자들의 65%가 회복됐다는 것은 일찌기 없었던 일이며 이것이 우리 진료소의 기록이었다.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우리는 이같이 엄청난 치료 실적을 기록했으나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원인에 기인하였다. 첫째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그리고 많이 살롤(일종의 페니실린약)을 썼고 둘째, 환자의 체온이 회복되고 혈액 순환이 좋아질 때까지 환자를 아주 뜨거운 방바닥에 눕혀 놓았으며 셋째 원주민(조선사람) 기독교인들의 양심적이고 지칠 줄 모르는 간호 덕분이었다.

우리들의 진료효과는 이 도시 안에서 적지 않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마을주민의 3분의 2쯤이 죽은 곳에서는 더욱 더 그랬다. 기독교병원에만 오면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전문이 담벼락에 붙어 있었다. 며칠 밤을 꼬빡 새우며 환자를 돌보는 선교사들을 본 사람들은 서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외국인들이 어쩌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할까? 이 사람들이 남에게 하는 것만큼 우리가 우리 애들에게라도 할 수가 있을까?” 여름날 아침 어둑한 여명 속에서 거리를 급히 걸어가고 있는 언더우드 씨를 본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 그리스도의 사람이 가는구나. 저 분은 한시도 쉬지 않고 병자들과 함께 밤낮을 일하고 있다네.” “무엇때문에 그러지?”하고 다른 사람이 물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야.”하는 것이 그 대답이였다. 우리의 봉사속에서 사람들이 주님을 발견하는 것보다 더 즐거운 보답이 어디 있을까! 그가 구원하려고 하는 그 영혼의 눈 앞에 주의 모습이 좀 더 분명히 다가올수만 있다면 돌림병을 통채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다.

괴로운 일이지만 날마다 도성안에서 죽는 사람들의 정확한 수효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송장은 모두 성문 두,세곳을 지나서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사망자는 하루에 300명 이상으로 늘어나다가 점점 줄어들었다. 돌림병은 여섯 주일을 채 못 끌었다. 성 밖 2마일 반경 안에 사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도성 밖의 인구는 아마 도성 안만큼 많을 것이다. 모두 합쳐서 인구는 30만에서 40만 사이였다. 돌림병이 거의 가라앉을 때에 조선의 외무부에서는 미국 공사를 통해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

병원에서 일을 거들었던 선교사들은 많은 선물을 받았다. 내부대신의 이름과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비단 두루마기와 부채 그리고 자그마한 은제 잉크스탠드 등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강화도에서만 자라는 독특한 갈대로 짠 방석이었다. 이 방석들은 빛깔이 다른 갈대를 솜씨있게 엮어서 만든것으로 우리들에게 준 방석의 한 끝에는 이 나라의 상징이 수놓여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적십자와 내부대신의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물론 이것은 더할나위 없이 기쁜 선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은, 조선 정부와 조선 사람들이 주님의 대표자인 우리를 쓸모없고 별로 가치도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자기들의 친구로, 또 우리가 그러려고만 든다면 자기들을 돕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더 근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진료소와 검역소에서 간호를 하고 일을 한 조선사람들의 명단을 달라고 했다. 그들에게 보수를 치르겠다는 말이었다. 우리들은 그 사람들이 보수를 바라고 그 일을 했던게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들은체도 않고 줄곧 그들에게 보답을 해야겠다고 정중하게 우겼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생각지도 않던 어마어마한 거액의 돈을 받자 놀랍게도 이 돈을 기꺼이 새교회를 짓는 기금으로 내놓았다. 그들은 이 돈을 하나님의 선물 곧 신앙의 힘으로 이루려는 사업을 도와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짓는 일을 계속하여 마칠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불어나 200명이나 모였다. 그 교회는 아주 검소한 집으로 토속재료만 써서 지었다. 벽에는 진흙을 바르고 지붕에는 기와를 이고 창에는 종이를 발랐다. 그러나 그때에는 창에 유리를 끼우거나 벽돌이나 돌로 벽을 지어 으스댈 줄은 아무도 몰랐으므로 그 교회는 가장 훌륭한 조선집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 집에는 그리 많지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쁜마음으로 하나님께 손수 자기의 정성을 바쳤다. 그것은 희생과 사랑과 믿음을 통한 것이었으니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주님이 보시기에 황금이나 상아보다도 더 값지고 귀한 것이었다.

 


'내가 본 조선 어린이들과 놀이 '

A.H. 새비지 랜도우

조선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은 바로 어린이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에게 조선에서 남자 아이를 별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소년시절은 없어져 버리고, 유년기에서 곧바로 결혼해서 의젓해진 남자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랄만한 이야기이지만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내아이가 8-9세가 되면 대개는 그의 자유로운 생활은 끝나게 된다. 열 살이 되면 그는 멸목상으로는 기혼자가 된다. 여기에서는 어린이들의 미혼 시절에만 국한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에서는 사내아이가 여자 아이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겨지며 한 가족중에 여러 명의 아이가 있다면, 아무리 더잘 생기고, 더 영리하며 학문에 정진한다 하드라도 연장의 사내아이가 그의 어린 동생들보다 더 소중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버지가 죽게 되면, 장자는 가장의 권한을 떠맡으며, 그의 동생들은 생전에 자신들의 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형에게 의탁한다. 장자는 상속받은 재산을 나머지 가족들과 같은 몫으로 나누거나 그렇지 않으면 선친이 했던 것처럼 그것들을 보전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가족의 재산과 거의 모든 돈을 물려받는 사람은 장자이다.

조선의 가족은 대부분 서로 모여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이 매우 많은 씨족들, 말하자면 씨족의 한 부분을 이루는 다양한 친족들을 가진 각각의 가족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말할 것이다. 가족의 유대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매우 중요시되며, 가족의 행복과 안녕에 결부된 이해관계는 먼 친족들 까지도 단합시킨다. 더구나 만약 씨족의 어떤 성원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그를 돕기 위해 모든 친족이 동원된다. 한층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아무런 불평 없이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조선 사람은 본래 호의를 잘 베풀지만 친족에게는 훨씬 더 그러하다. 어떤 한 친족에게 속한 집은 실제로 다른 친족에게도 속한다. 어느 ‘소중한 친족’이 몇 년 동안 그의 집에 체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방문객을 내쫓는다면, 그는 조선의 예법에 따라 만들어진 환대의 엄격한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다.

식 객

심지어 전혀 낯선 사람들도 종종 부유한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서 머무른다. 그들은 더 좋은 숙식이 기대되는 다른 부잣집으로 거처를 스스로 옮길 때까지 그 집에서 몇 달 동안 머무른다. 조선 사람들이 식객들의 험담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없다. 특히 이것은 조선의 귀족이 항상 골치를 싸매는 골치거리인데, 차라리 약탈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식객들은 이런 사정을 이용한다. 머리가 어깨까지 처진 고관들은 이와 같은 약탈자들에게 매우 시달린다. 만약 그들이 호의를 베풀기를 거절한다면, 그들에게 독기 어린 험담과 중상 모략이 가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공평하게 평하자면, 이와 같은 인간 거머리들도 양심응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몇 달 동안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면 그들은 대체로 새로운 먹이를 찾아 떠날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남에게 극진하게 호의를 베푸는데, 그러한 사실은 외국인에게도 역시 똑같다. 그것은 내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항상 음식과 마실 것을 대접받았기 때문이다. 당신도 그들과 함께 식객노릇을 해보라는 권유도 수없이 들었다.

가 족

그러면 조선의 가족으로 되돌아가 보자. 실제로 어머니는 처음부터 가정에서 아무런 존재도 아니다. 그는 남편의 신분에 따라 일종의 가구나 짐을 끄는 가축 또는 장식품으로 여겨지며, 아들은 어머니를 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 만약 그에게 딸이 있다면 딸은 오히려 어머니와 외로운 시간을 함께 나누고 그의 일을 도와주는 벗이 된다. 여자는 자신의 남편이 베푸는 만찬과 연회에 결코 참여할 수 없으며, 포도주나 술을 마시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담배는 피울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남자는 여자와 격리되는데, 남자는 항상 아버지와 동무가 되는 반면에 여자는 우리가 살펴본 대로 어머니의 처연한 운명을 함께 나눈다. 사내아이가 가르침을 받는 첫 번째 항목은 지배자에 대한 사랑과 깊은 존경 그리고 복종이며 이를 통해 그는 대개 일가의 전형이 된다. 만약 아버지가 편찮으시면 부친의 곁에 온종일 앉아 그를 간호하고 용기를 북돋워 줘야 한다. 그리고 만약 어떤 불행이 그에게 닥치면 그 아픔을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것이 효자의 의무이다.

조선의 어린아이는 즐겁게 노는 시간을 갖는지 그리고 잘 보살펴지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여 나는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대체로 귀족과 부유층의 어린아이들은 엄격하고 심지어 가혹하게 양육되지만 내 생각에 학대를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가난한 가정의 자식들은 종종 무자비하게 매를 맞는다.

장난감

조선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단단한 머리와 고통에 대한 무감각성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어린 아이들이 아주 신나게 노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는데, 예를 들면 밖에서 팽이를 채찍으로 처 돌리는 것이 유행하는 1월이 바로 그 때이다. 마치 소형 인간처럼 솜을 넣은 커다란 바지와 붉거나 초록색뿐인 짧은 외투를 입고 등에 매달린 한 두 개의 머릿단을 긴 비단 리본으로 묶은 어린아이들은 이 계절에 커다란 팽이와 채찍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가지고 그는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어울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채찍을 휘두르며 즐긴다. 힘이 다 빠져 지치면 자신의 아버지 옆에서 녹초가 된 작은 몸을 쉬기 위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그는 온종일 자신을 그토록 기쁘게 해주는 장난감에 매달린다.

조선의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조용하다. 처신에 관한 한 태어난 순간부터 실제로 작은 한 성인(成人)이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에도 별로 다투지 않으며, 오히려 수줍음을 타고 말수가 적은 편이다. 그는 조용히 자기의 장난감을 가지고 즐겁게 놀며, 그의 최고의 즐거움은 자기 아버지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다. 소년들은 늘 아버지처럼 그렇게 살도록 고무를 받는다. 능력이 닿는 사람들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쓸 수 있도록 물건들은 좀 더 작게 만든 장난감들을 아이들에게 제공한다. 아이들은 작은 활과 화살, 칼 그리고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등을 가지고 논다. 허수아비를 가지고 놀다가 거기에 대고 화살을 쏘기도 하고 싫증이 나면 언제든지 그는 그 목을 베면서 즐거워 한다. 낚싯대들도 가지고 놀며 바람이 부는 날이면 세계적으로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인 큰 종이로 만든 바람개비를 가지고 달음박질하면서 논다. 가마와 휠체어같은 국민적인 운송수단은 물론 여러 악기들 또한 장난감으로 제공되는데 물론 크기에서는 실물보다 훨씬 작게 만들었지만 완벽할 정도로 정교하게 모방하고 있다고 한다.

연(燕) 날리기

어린아이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놀이는 집밖에 나가서 하는 놀이일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연 날리기는 가장 중요한 놀이가 아닌가? 생각된다. 실제로 그것은 조선에서 하나의 기술로 여겨지는데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너무 좋아할 뿐 아니라 심지어 어른들도 이와같은 아이들 놀이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조선의 연은 폭이 14인치, 길이가 20인치 정도로 매우 작다는 점에서 비교적 일본이나 중국 것과는 다르다. 더구나 구조가 평평한 대신에 조선의 연은 아치형이다. 조선사람들에 의하면 연을 아치형으로 만듦으로써 훨씬 더 멀리 날려보낼 수 있다고 한다.

딸들의 모습

열 살도 채 안된 어린 소녀들은 매우 예쁘다. 이마의 가운데 부분을 차분하게 가른 다음 뒤에서 두 갈래로 묶은 머리와 작은 초록색 조끼와 붉은 색의 긴 치마를 입은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스러워 보인다. 당신은 그들의 품행이 얼마나 단정하고 순수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한번도 미소를 짓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에게 사탕이나 장난감 혹은 당신이 마음 내키는대로 어떤 것을 줄 수는 있지만 ‘고맙소’라는 힘없는 한 마디가 당신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어머니에게 선물을 보여 드리기 위해 달아난다. 그들은 당신 앞에서 흥겹게 떠드는 행동을 거의 하지 않지만 물론 그들의 기쁨이 때로는 빤짝이는 눈가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녀들은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의 숫자가 남동생들에 비하면 훨씬 부족하다. 그녀들은 엄격하게 길려지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부터 고된 일과 잡일을 시작한다. 가녀린 손가락을 놀릴 줄 알게된 순간부터 그들은 바느질과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에게는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노예처럼 비하되고 남자에게 충절을 바치는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기 시작한다.

입 양

일본에서처럼 역시 조선에서도 자식 없는 부모가 사내아이들을 양자로 삼는 관습이 성행하고 있다. 양자로 선택된 어린아이들은 대개 더 가난한 친구나 입양시킬 여력이 있는 친족의 아이들이다. 양자 결연이 일단 이루어지면 국법으로 정해진 모든 규정과 왕의 승인에 따라 양자는 친아들을 대신하며, 양어머니에 앞서 양아버지에 대한 상속과 고인의 모든 관계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상속한다.

조선의 사내아이는 매우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한다. 만약 부자의 아들이라면 가정교사를 두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학교에 다닌다. 조선에서 모든 공식서한은 한문으로 쓰여지는데 모두들 알고 있드시 일생 동안 한문을 완전히 습득하기란 불가능하다. 반면에 한글은 가장 실용적이고 쉬운 표음 방식의 문자이다. 나는 여러가지 면에서 그것이 심지어 영어보다 더 실용적이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산수도 역시 주판이라고 하는 미끄러운 구슬로 된 덧셈판을 사용하는 조선의 어린이들의 작은 머리 속에 매우 친숙해져 있다. 그런데 이 주판은 일본과 중국에서도 역시 사용되는 대단히 훌륭한 발명품으로 빠른 계산을 하는 데에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준다. 어린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나는 한 조선사람에게서 그들은 대체로 매우 부지런하고 학구적이라고 늘 들어 왔다.

한 아버지가 어느날 나에게 자기 아들은 아주 부지런 하지만 자기는 가끔 그에게 따끔한 매질을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당신은 왜 매질을 하죠?”라고 물었더니 “나는 내 아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자식이 공부하는 것이 만족스럽지만, 더욱 열심히 공부하도록 분발시키기 위해 매질을 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내가 학교다닐때 결코 그와 같은 방법으로 ‘분발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 기뻣다. 내가 “만약 당신이 그에게 충분히 매질을 한다면 그는 언젠가는 너무 똑똑해져서 이 땅의 어떤 사람도 그의 실력을 평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빈정거리는 나의 말을 즉시 알아차린 그 노인은 “당신이 옳아, 당신이 옳아. 나는 다시는 결코 내 아들을 때리지 않겠소”라고 답했다. 노동자의 아이들은 대개 야학에 다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매우 적은 비용이나, 또는 무상으로 효과적인 교육을 받는다.

조선사람들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지는지는 나도 확실히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규칙은 모든 남성은 친가의 성을 따고 우리처럼 앞이 아니라 그 뒤에 하나의 다른 이름을, 그리고 다시 그 뒤에 직위나 신분을 붙이는데, 그외에는 전혀 아무런 규칙이 없다. 별명은 매우 일상적이고 별명을 갖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으며 실제로 이름 대신에 별명으로 통한다. 외국인도 역시 외모나 의복의 어떤 특징적인 부분을 따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유럽식 의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조선 사람으로 오인됐기 때문에 나는 자랑스럽지는 않지만 ‘변장한 조선 사람’으로 불려졌다.

조선의 귀족들은 그들의 많은 여유시간 동안 종종 장기와 주사위 놀이와 바둑을 즐기며, 양반의 자격 요건의 일부로서 자식들에게 이와 같은 놀이들을 가르친다. 왕명으로 금지된 것들 외에 화투는 오직천민들에게만 적합한 저속하고 차원 낮은 놀이로 여겨진다. 그밖의 다른 놀이들을 대단히 즐긴다.

H. 새비지-렌도어 지음 <고요한 아침의 나라>(집문당)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