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노년의 즐거움/2022년 1월 15일>

노년의 즐거움-김열규

노당익장(老當益壯), 노년의 당당함

무슨 일에나 뒤로 물러서는 것이 노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아예 접어두는 모습을 더러 보게 된다. 이렇게 나이 들어 삶의 뒷전으로 물러나는 것을 노퇴(老退)라고 한다. 노년에 은퇴하는 게 마땅하듯이 노퇴하는 것 또한 지당한 일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면 노퇴는 딱하게도 그야말로 볼 장을 다 본 꼴이 되고 만다. 인생의 막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퇴는 도리 없이 노쇠며 노약과 겹쳐질 것이다. 그야말로 늙음은 딱하게도 낡음을 겸하게 된다.

물론 노퇴가 미덕으로 작용할 수 도 있다. 하던 일에서 손을 떼고, 절은 세대에게 자리를 물리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이다.

가령 한 세대 전에는 웬만큼 자산을 갖춘 중류 이상의 가정이라면 안방마님이 집안 살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다. 안채의 안방을 독차지하고는 그야말로 내무대신의 역할을 당당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며느리를 보고도 한참동안 계속된다, 곳간 열쇠를 비롯해서 뒤주며 장롱 열쇠를 무슨 장식품처럼 줄줄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게 안방마님이었다. 그렇게 우쭐대는 것을 대단한 권력의 상징처럼 여겼으니 그 기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방마님은 며누리들과 일꾼들을 거느린, 집안의 총사령관 구실을 당당히 맡아냈다.

그러다가 더러는 환갑이 지나, 더러는 진갑이 지나 당시 기준으로 사뭇 나이 든 노인의 경지에 들게 되면, 그제야 열쇠를 며느리에게 물리고 스스로 뒤로 물러섰다. 이 대단한 정권 이양은 당연한 노퇴이고, 자랑스러운 노퇴라고 해도 좋을것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드시 노퇴는 문자 그대로 늙고 낡아서 세상에서 영영 뒤처지는 것, 그래서 방구석에서 죽치고 앉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늙은 퇴물(退物)이 된는 꼴을 보이게도 된다. 여자라면 ‘뒷방 마님’, 남자라면 ‘뒷방 어른’등의 그럴듯한 칭호가 붙을 수도 있으나, 사실 뒷방이란 고물을 넣어둔 방과 다를 바 없었다. ‘뒤방마누라’라고 하면 뜻이 더 흉측해진다. 첩에게 남편도 집안의 권세도 모두 빼았기고 뒷방으로 추방당한 처지를 일컫기 때문이다.

‘뒤듬바리’라면 바보에다 천치인 주제에 성질까지 못된 인간을 가리킨다. ‘뒤틈바리’도 마찬가지이다. ‘뒤뿔치기’라고 하면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하는 바보 둥신을 의미한다.

이들 단어들이 꼴사나워지는 것은 모두 ‘뒤’라는 글자가 붙었기 때문이다. ‘뒤’라는 글자가 붙으면 하고 많은것들의 신세가 망가지고 만다. 그런 면에서 ‘뒤’나 ‘퇴’나 다를바 없다. 그러니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도 음산한 노퇴는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수록 노당익장(老當益壯)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이 휘황찬란한 말에서 당(當)은 ‘마땅할 당’이다. 뭔가가 당연히, 또 지당하게도, 아니면 의당(宜當) 그렇고 그래야 한다는 뜻이다. 익(翼)은 흔히 이익(利益)을 본다’라든가 편익(便益)을 얻는다’는 뜻 말고도 ‘더할 익’ 또는? ‘더더욱 익’이라는 뜻을 지닌다. ‘많은 익’이라고도 읽다 보니 익년(翌年)은 노년과 같은 뜻으로 쓰이게 된다.

어떨까? 나이 많아 익년이긴 하지만 익 장의 다른 의미를 살려서 익년을 이익이 많고 이득이 충만한 나이라고 못 읽을 것도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노년에도 그런 익년의 뜻이 겹쳐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더더욱 건장(健壯)하다는 뜻의 노당익장이란 말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물론 노년의 경지에 들어서서 물리적으로, 또 생리적으로 익장하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다.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몸을 자주 움직익고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과하지 않게 섭취하며, 보태어서 바둑, 독서, 음악, 산책, 담소 등 밝고 긍정적인 취미를 살리면 생리적으로도 익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정신적, 정서적 건강도 노당익장에 마땅히 포함되어야 한다. 꼿꼿하게 곧은 마음씨, 굽힘이 없는 기개, 장쾌한 정서 등으로도 노당익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정신적인 노년의 건강함도 있을 수 있다.

옛말에 이르기를 “늙어서 둔 아들은 한낮에도 그림자가 생기지 않고 그 불알에도 줄무늬가 없다”고 하였다.

<동국골계전(東國滑稽傳)>이라는 조선조의 유머집에 나오는 그럴싸한 말이다. 노년에 얻은 아이가 한낮에 햇살을 받고서도 뒤로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그만큼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는 뜻일 테고, 그 아이의 불알에 줄무늬가 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토록 온몸의 살갗이 튼실하고 매끈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건 일종의 역설이다. 상식을 뒤집어 엎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설로 오히려 노년에 뒤늑게 얻은 아기가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노옹(老翁)의 아기는 귀동자라는 뜻이 거기 들어 있는데, 이것은 노옹이 생리적으로도 익장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동국골계전>은 위에 소개한 말에 이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공을 많이 세운 어떤 재상이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었는데, 늦게 상처하여 젊은 후처를 얻었다. 그러자 아내는 운 좋게 사내아이를 나았다. 영감에게는 하늘이 내린 복과도 같았다. 귀동자로 섬기다시피하면서 사랑했다.

그런데 재상 댁에 자주 드나드는 노파가 어느 날, 벗고 있는 아기를 보고는 재상더러 말했다.
“아기의 불알에 주름이 잡혀 있는 것을 보니 대감의 아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다. 아기를 햇살이 비치는 마루에 세워보았더니 아기 뒤로 그림자가 생기자 노파가 또다시 재상을 빤히 처다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자가 생기는 걸 보아도 대감의 아이가 아닌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귀찮게 구는 노파를 꺼리는l기색도 없이 재상은 손바닥을 두드리며 깔깔 웃어댈 뿐이었다.

이 대목을 눈여겨 보면 노 재상이 큰 인물임이 드러난다. 마음이나 정신이 후덕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야마로 노당익장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이보다 더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 뒤 어느 귀한 집의 유모가 아이를 안고 집 앞에 서 있다가 마침 말을 타고 장군처럼 지나가는 재상을 보고는 혀를 내두루면서 말을 건넸다.
“높이 우러러보이는 재상님, 연세가 팔구십은 되었는데, 그토록 정정하다니요. 남보다 훨씬 더 오래 사셨으니 이제 무슨 욕심을 더 부리시겠습니까. 바라건데 남아 있는 연세를 이 아이에게 보내주옵소서.”
재상은 가당치도 않은 그 여인의 말을 듣고는 말을 계속 몰면서 혼잣 말로 크게 외쳤다.
“심하구나, 내 노쇠함이 심하구나. 내 노쇠함이 심하구나.”
그러면서 그는 연신 웃어댔다.

정말이지, 이 재상은 호쾌(豪快)하다. 마음가짐이 호걸답다. 호방하고도 호탕하다. 마음이 바다만큼 넓고 기개가 하늘만큼 높다. 이 또한 정신적인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머리는 백발이고 턱에는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년이 후처에게서 아기를 낳은 것은 육체적인 노당익장이고 공연히 트집을 잡는 노파를 박장대소로 물리치는 것은 정신적인 노당익장이다. 또한 노년을 보고 살 만큼? 살았으니 더 살 것 없이 남은 나이를 젖먹이에게 내놓으라고 망발하는, 괘씸한 여인을 오히려 웃음으로 대한 것, 역시 대단한 정신적인 노당익장이다.

어디 그뿐인가. “내 노쇠함이 심하구나”라고 한탄조로 말하면서도 연신 웃어댄 것 역시 그의 정신적인 노당익장을 보여준다. 대단한 재상이다.? 우리 노년들은 모두 그의 노당익장을 본받아야 한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노현(老賢)’, 노년의 현명함

나이 든 노년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 이른바, 노망이란 것이다. 노년에 망령妄靈스럽게 되는 게 곧 노망이다. 머리와 감각이 둔해지고, 말이며 행동이 정상을 벗어나기 마련인 게 곧 노망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그걸 치매라고도 한다. 그래서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아예 ‘치매 환자’라고 부른다. 그러니 노망은 질병이기도 한 것이다.

노망의 ‘망妄’은 ‘허망할 망’ 또는 ‘거짓 망’, 아니면 ‘잊을 망’등으로 읽는다. 경거망동輕擧妄動의 ‘망’이고 망언妄言의 ‘망’이고 요망妖妄의 ‘망’이다. 뿐만아니다. 망상妄想과 망언妄言의 ‘망’이기도 하니 어떻게 모든 인간 망조亡兆가 들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딱하게도 노년에 노망이 드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말하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노년이라서 비로소 꾀바르고 약빠를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노회老獪다. 그러니까 노망과 노회는 노년의 음지와 양지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노회는 썩 좋은 말, 반길 말은 못된다. ‘회獪는 “교활할 회’ 또는 ‘교활할 쾌’라고도 읽는다. 교활하다면 잔재주 부려서 다른 사람을 욕보이고 잔꾀를 부려서 다른 사람을 속여먹는 것을 가리킨다. 간교奸巧하다거나 간사奸詐하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노인이 잔꾀나 간계奸計를 부려대는 게 노회이거나 노쾌이다. 결과가 나쁘든 좋든간에 머리가 초특급으로 돌아가야 하고 꾀가 여간 바지런하지 않고는 노회할 수 없다. 그건 날렵하기가 물찬 제비 정도 되는 기민한 머리에나 써먹을 수 있는 말이다. 어쩌면 전설적인 인물인 김선달이 다른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하는 말재주며 연기력에 노회를 맞추어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아니면,다른 사람을 골탕먹이는 즉흥시를 지어낼 때 김삿갓의 지능지수를 노회에 견주어도 좋을 것이다.

二十 樹下 三十 客
四十 村中 五十 食

이대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무슨 숫자놀이 같다. 그런데 그걸 우리말로 조금만 풀어서 읽으면 멀쩡하게 뜻이 통하게 되어 있다.

스무 나무 아래 서른 살 나그네에게
망할 놈의 마을에서 쉰밥을 먹이다니.

이것은 시치미 뚝 떼고는 은근슬쩍 악담을 퍼붓고 욕을 끌어 붓는 셈이다. 그야말로 꾀바른 만큼 교활하고 간특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을 당시의 나이가 예순이었다고 하면, 그야말로 노회가 될 것이다. 그런데 정수동은 한 술 더 뜬다.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 정수동이 주막에서 외상술을 달라고 한다. 구두쇠 주모가 들어줄 리가 없다. 그래도 이 가난뱅이 술꾼은 자꾸 치근댄다. 그러자 못된 주모가 말했다.

“그래, 정 술 한잔 얻어먹고 싶으면, 금새 나를 웃겼다가 금세 화나게 해보시오!”

정수동은 즉시 그 집 뜰에 풀어놓은 돼지 앞에 가서 엎드렸다. 그리고는 큰 절을 올렸다.

“형님.그새 편안하신지요?”

주모는 낄낄댔다. 그러자 이 능청맞은 사람이 주모 앞에 가서 큰절을 올리면서 삼가 문후를 아뢰었다.

“형수님, 그동안 편안하신지요?”

주모는 화를 내면서도 약속은 약속인지라 정수동의 머리에 술 벼락을 안겼다. 정수동은 입으로 흘러내리는 술을 핧아댔다.

여간 간교하고 약은 꾀가 아니다. 머리가 벼락치듯이 번득이고 있다. 그때 정수동이 노년이었다면 이 역시 노회에 속할 것이다.

김삿갓과 정수동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같은 걸 예측할 수 있다. 김삿갓과 정수동이 노년에 접어들면 에누리 없이 노회해졌으리라는 사실을. 노망은 머리가 한물간 것인데 비해서 노회는 머리가 생생하게 회춘하는 것이다. 조금 간교하기는 해도 노년의 머리가 노숙하고 노련해진 것, 그게 바로 노회이다.

그러니 노회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노년은 늙다리가 아니다. 꾀돌이가 된다. 그랫서 노회는 노현’老賢’, 즉 노년의 현명함과 맞 통하게 된다.


 

노숙(老熟), 나이든 보람

‘노(老)’는 참 말썽이 많다. 이랬다 저랬다 하고 이러쿵 저러쿵 둔갑을 한다. 양지와 음지가 업치락뒤치락한다. 아니, 갈팡질팡한다는게 옳을지도 모른다. 노망(老妄)을 비롯해서, 듣기만해도 저절로 얼굴이 찡그러지는 것들이 적지 않다. 수두룩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도 좋을만큼 적은 것도 아니다.

노쇠老衰, 노병老病, 노후老朽, 노물老物, 노둔老鈍, 노약老弱 . . . . 모두 반길 수 없는 말들이다. 반면 노성老成, 노련老練, 노숙老熟, 노사老師 . . . . 이들은 쌍수를 들어 반길 만한 말들이다. 노는 이렇게 종잡기 힘든 말이다. 음지와 양지를 모두 포함한 말이다. 그것은 노년이 지닌 별난 특색이기도 하다.

그중에도 노가 붙은 말들 가운데는, 둘이 서로 반대되거나 아주 대조적인 것들이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노약老弱과 노숙老熟이다. 노약은 늙어서 몸이 상하고 약해졌다는 뜻이다. 노쇠와 거의 비슷한 의미이다. 시력이 떨어져서 세상이 온통 아물거리는 것도 노약이다. 평지에서도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 또한 노약의 징후이다. 뿐만 아니다. 기억력이 떨어져서 이른바 ‘잊음이 헐하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이것 역시 노쇠에 속한다. 모두 기력이 떨어지고 기운이 나가서 그 지경이 된다.

반대로 노건老健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노년에도 여전히 펄펄 기운이 넘치는게 노건이다. 노장老丈이라는 말도 비슷한 의미이다. 노년인데도 천하장사 부럽지 않은 게 노장이다.

“다리에 쥐가 나고 힘들었지만 끝까지 걸어서 행복했습니다.”

유쾌하게 이 말을 쏟아낸 것은 노건한 노년의 장사들이다. 일간지 <중앙일보>는 이 밀을 지면에 옮긴 뒤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70대 노인 세 명이 100킬로미터 걷기에 도전해 성공했다. 이번이 세 번째이다. 2009년 4월 18-19일 강원도 원주에서 열린 제3회 한국100킬로미터 걷기대회에서 채홍기(78), 윤희정(76), 김영길(72)씨 등 원주의 ‘걷기 노인 삼총사’가 완보했다. 완보는 100킬로미터를 25시간 이내에 걷는 것으로 이들은 19-21시간 만에 도착지점인 원주운동장에 각각 도착했다.

게다가 세 번째 도전에 나선 이들은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채씨는 심한 감기를 앓고 있었으며, 윤 씨는 며칠 전 왼쪽 발목 위를 다쳐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김 씨도 한 달 전 수술을 해 보약을 먹고 몸을 추스르던 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중도에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일단 도전하겠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젊은이들이 앞서 나갔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페이스를 잃지않았고, 힘에 부칠때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세 번째라지만 사실 이들은 2007년 창설된 100킬로미터 걷기대회에 앞서 열렸던 예비대회에서도 100킬로미터를 걸었다.

어쩌면 차마 믿을 수 없는 일화같이도 들린다. 100킬로미터면 이수로 쳐서 250리이다. 서울과 부산간 거리인 1,000리의 4분의 1이다. 그걸 불과 20시간 안팎에 걸어내다니! 노년의 건각의 본보기이다. 기적의 노년, 기적의 노장들이다. 그들에게는 칠순이 우스운 나이로 느껴지고, 250리라는 까마득한 길이 아무렇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노년이 되어 오히려 다리가 무쇠가 된것이 틀림없다. 이런 노건老健의 노장老丈이라야 노장老將, 곧 나이 많은 장수나 장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노숙老熟도 노장만큼이나 반길만한 일이다. 노숙이란 나이 든 보람 같은 것이다. 봄, 여름이 지나 시간이며, 세월을 들일만큼 들여서 익은 과일을 숙과熟果라고 하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청년, 장년, 중년 등 기나긴 세월을 고루 보내고 거친 다음,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솜씨의 재주, 그리고 재치 등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게 다름아닌 노숙老熟이다. 익은 숙과가 그렇듯이 노숙에서도 향이 나고 멋이 오른다.

노숙이 되면 인간으로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지혜는 제갈량 부럽지 않은 꾀주머니가 되고 수완은 국수國手가 된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어느 거룩한 노안(老顔)

노안이란 말할 것도 없이 노인의 얼굴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이다. 흔히 백발에 덮인 주름진 얼굴, 야위고 수척한 얼굴이 연상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연민이나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물론 노안이 이런 애틋한 인상임을 전적으로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 긍정적인 면이 노안에는 어려 있다. 점잖음, 인자함, 아늑함에 다사로운 등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노안이 있다. 그래서 그 얼굴에는 풍요함과 넉넉함이 가만히 고여 있기도 하다. 보는 이의 마음이 푸근해지고 가슴이 따듯해지는 노안을 보는 일은 그렇게 드물지 않다. 부드러운 할아버지, 자상한 할머니가 거기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온화함과는 대조적인데도 여전히 긍정적으로 여겨질 노인의 또 다른 면모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권위가 넘치는 엄숙함이고 위용(威容)이다. 거기에는 사려와 지혜가 어려 있을것이다. 거기에는 엄한 할아버지가 있을 것이다. 이들 부드러움과 엄함은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맞물려 있는 노안의 긍정적인 두 가지 표정이고 인상이다.

이제 그 본보기를 하나 살펴보자.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이다. 르네상스기의 천재가 그려낸 자신의 노안(老顔)이다.

이 그림은 누구나 알고 있는,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모나리자>와는 퍽 대조적이다. 하늘과 땅의 요정이자, 산과 강과 들판의 요정이기도 한, 젊은 여성의 초상화는 우아한 아름다움, 감각적인 동시에 초감각적이기도 한 아름다움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의 <자화상>은 그렇지 않다.

사물이 갖는 물리적인 속성뿐 아니라 인체의 생리에도 밝았던, 이 다재다능한 천재는 머리카락과 턱수염의 꼬북꼬불한 선문(線紋), 날카로운 눈썹,이마와 얼굴에 팬 주름, 눈과 코 그리고 입의 윤곽중 어느것 하나 놓치지 않고 정교하게, 또 치밀하게 묘사해내고 있다. 특히 어지러울 정도로 정묘하게 묘사된 머리카락과 턱수염의 선문은 그의 또 다른 작품, <대홍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대홍수>에 묘사된 물살의 파동과 <자화상>의 머리카락이며 수염의 선문이 겹쳐 보이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 자신을 그리면서 ‘노년의 역학(力學)’ 또는 ‘노년의 생명력’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한다.

그의 <자화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거친 바람을 연상시키는 한편, 눈, 코, 그리고 입이 서로 삼위일체가 되어 무언가 짙은 인상을 풍기고 있다. 멀리 응시하는 눈매, 우뚝한 콧날, 그리고 앙다문 입술이 얼굴 전체에 걸쳐서 만만찮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인간의 생태에 관한 날카로운 통찰만큼니나 풍요롭게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자화상>은 1513년경에 그려졌으니 그가 생을 마감하기(1519) 불과 6년 전이다. 밀라노에서 20년 가까이 보낸 뒤, 고향 피렌체로 돌아온 것도 잠시, 로마를 거쳐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생의 절정기가 저물어갈 무렵에 이 작품 <자화상>을 남긴다. 거기에는 죽음을 앞둔 그의 미학, 예술철학, 그리고 인생관이 짙게 아로 새겨져 있다.

이 노년의 얼굴에, 그 노안에 슬픔이나 허무감, 또는 상실감 같은 것만이 어려 있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하염없다느니, 한스럽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같이 느껴진다.

뚜렸한 선을 그리며 꼭 다문 입술은 다부지다. 야무지고 알차다. 마치 무슨 깊은 생각을 깨물고 있는 듯이, 우뚝하게 솟아오른 코가 그걸 더한층 강조하고 있다. 그런 입과코의 상징성을 마침내 눈이 매듭짓고 있다. 그건 응시요, 통찰이다. 동시에 깊은 사색이다. 이를테면 ‘필로소피렌(philosopiren),’ 곧 ‘철학하기’의 눈이다. 생각하고,사색하고,명상하는 눈이다.

그런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절로 숙연해진다. 옷깃이 저절로 여며지는 기분이다. 그 얼굴은 눈으로 응시하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머나먼 것,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깊디깊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 같다. 영원을 되새기고 구원(救援)을 조망하는 영혼의 기적이 거기 어려 있다. 그러면서 엄숙하고 신비롭다.

그건 노안이나 간직할 수 있는 시각이고 시야(視野)이다. 삶을 겪을 만큼 겪어낸 사람의 지혜와 슬기가 거기 어려 있다. 삶에 익고 세계에 익숙한 노년의 예지(叡智)가 그 얼굴에 하나 가득 고여 있다.

백발의 성긴 머리카락과 턱수염,얼굴 전체의 주름살과 쭈그러진 피부, 그리고 기울어져가는 목숨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얼굴 표정만이 지닐 수 있는 성찰(省察)과 동경(憧憬)이 거기 서려 있다. 그건 노안의 또 다른 미학이다. 심미(審美)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가 스스로 자신의 노안이 부질없다고 여겼다면 그걸 애써 작품으로 남겼을 턱이 없다. 자신의 주름진 얼굴이 쭈그러지고 꾀재재하고 너저분하게 느껴졌다면, 그가 굳이 그걸 묘사했을까? 하찮고 초라하고 민망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걸 그림으로 남겼을 까닭이 없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게 내 최후의 얼굴인데, 화가로서 남기지 않을 수 없지.”
이렇게 혼자 다짐이라도 한 걸까? 설마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소극적인 태도로 이 작품을 창작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 천재가 너무나 가엾어진다.

대신 그는 “바로 이거야! 내게 바치는 내 삶의 최후의 기념비가 바로 이거야!”라고 숙연하고 엄숙하게 생각했을 게 틀림없다. 생전에 세 명의 동방박사 중 한 명이 되고 싶어했고, 또 성자가 되고 싶어 했던 그의 소망이 마지막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그래서 그렇게 그림으로 남은 것이 바로 그의 <자화상>에 비쳐진 노년의 얼굴이다. 이 자화상에 고민이 어려있고 비통함이 서려 있다면 그건 순전히 그가 동경해 마지않던 성인(聖人)의 정신이며 영성(靈性)의 표현일 뿐이다.

누구나 각자의 노안을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처럼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다. 그리고 이런 소망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노년의 생활을 가꾸고 싶어 한다. 성자의 극치, 성스러움과 경건함의 극치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간행


위인의 초상, 노년의 얼굴

왼쪽부터 퇴계 이황, 강세황,니콜라에비치 톨스토이,알베르트 슈바이쳐

모두 노안(老顔)이다. 그래서 멋진 인상을 풍기고 있다. 조선왕조의 존경할 만한 선비 중의 선비들, 크나큰 대인들의 면모는, 풍모는 그야말로 신선이다. 그분들은 나이든 얼굴로 인해 더한층 빛나고 있다. 그 주름살이 여름 밤하늘의 은하수 같다. 그분들의 백발은 이른 봄 , 얼음 바람 속에 핀 매화요,백설이다. 그분들의 수염은 동지 섣달 나무가지 끝에 늘어진 눈이다. 우리나라의 노친(老親)들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서양의 노친들도 마찬가지다.

지상지고(至上至高), 주어진 분야에서 더 오르고자 해도 더 오를 데가 없는 인간성숙의 지상에 다다른 어른들, 노년들의 얼굴이 사뭇 눈부시다. 인간으로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더 없이 거룩하고, 더없이 착실하게 여문 어른들의 용모가 여기에 매우 덩그렇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들 위인의 용모를, 이들 대인의 풍모를 굳이 노년의 초상화에 담으려 했을까? 젊은 시절의 사진이나 그림은 남겨진게 없어서? 아니면 중장년기의 사진으로는 뭔가 좀 모자랐던 것일까?

앞의 물음을 묻고는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당연히 뒤의 물음을 묻고 답을 찾아야 옳을 것 같다. 이치에 맞을 것 같다. 젊은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중장년기의 사진이나 초상화로는 이들 거인, 거물들이 이룩해낸, 그리고 그들이 다다른 완성과 성취를 말하기가 모자랐던 것이다. 중장년기만으로는 아직도 무엇인가 미성(未成)하고 미숙했던 것이다.

노년의 초상이라야만 했던 것이다. 거기 비로소 성숙이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청년이, 그리고 중장년이 까마득하게 못 미칠, 거룩하고 성스러운 지상지고의 경지, 그나마 지성과 정신, 혹은 영혼이 다다를 최절정의 경지가 노년의 초상에 비로소 깃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거룩함에도 불구하고, 그 더없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노년의 초상에는 거의 하나같이 부드러움과 우아함이 말갛게 어려 있다. 더 이를 데 없는 엄숙한 그 지엄(至嚴), 더 바랄 데 없는 그 숙연함, 바로 그 속에 단아(端雅)함이, 다소곳함이 은은히 여운을 피워내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논어(論語)>에서 공자가 “나이 예순에 이순(耳順)하고 나이 일흔에 마음먹은 대로 해도 구(矩)를 넘지 않는다”고 한 대목을 생각나게 한다 예순과 일흔의 나이는 기로라고 한다. 공자가 살아 있던 당시로는 최고령이다.
그런데 나이 예순이 되어서야 남들 말하는 이치가 고분고분 귀에 들어오고, 그래서 세상이며 인생, 그리고 사물의 이치가 순하게 받아들여 지는 것이 ‘이순’이다. 그런가 하면 ‘구’란 ‘법도’, ‘법칙’이란 뜻인데 나이 칠십이 되고 보니 뭐든 마음먹은 대로 해도 규범이나 법칙에 척척 들어맞더라고 했다. 세상의 옳은 이치며 인생살이의 바른 법도와 맞아떨어지더라는 것이다. 결국 ‘이순’이나 ‘구를 넘지 않는 것’이나 순리를 따라 곱게 느긋하게 산다는 뜻이고, 앞의 노년의 초상을 보아도 그걸 느낄 수 있다.

노년의 얼굴은 이렇게 멋지다. 이토록 귀하다. 그건 남들보다 먼저 노년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차려야 한다. 또 그렇게 되도록 마음을 써야 한다.

가을이 되어 인생이란 과수원에 농익은 과일들, 그 모습, 그 향이 노년의 초상에는 자우룩하다. 우리 노년들 누구나 그렇기를 마음먹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늙으면 죽어야지!”라느 말은 당치도 않다. 그런 넋두리는 내뱉지 말아야 한다. 그게 말버릇이 되면 노망기가 말썽을 피우게 된다. 대신 , “이제 사는 것처럼 더 살아야지!”라고 호쾌하게 장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가하면 “아이구! 이 나이에 뭐?”같은 푸념은 잠고대로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아이고! 이 나이니까, 뭐든 해야지”라고 떳떳이 큰소리쳐야 한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노년의 초상들을 바라보며, 우리의 얼굴이 그 초상들을 닮도록 마음을 다지면 좋겠다. 그래서 이제 초상화 속의 노년과 맞먹음 직한, 멋쟁이 노인네 얘기를 소개해 볼까 한다.

고려 말기의 삼은(三隱), 곧 새로운 조선조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세상을 피해서 살아간 세 명의 선비중 한 명인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과 , 고려 말과 조선 초 성리학의 대가인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조선왕조 창건에 큰 보탬을 준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당시로는 천하의 대학자요,선비들인 삼걸(三傑)이 자리를 같이하고 담소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도전이었다.

“나는 북쪽 국경 지대에 첫눈이 내리면 담비 가죽옷을 입고는 준마로 산하를 내달리면서 사냥을 하고 싶소.”

이 말을 이숭인이 받았다.
“나는 말이오.산집의 작고 깨끗한 방 안에 고운 책상을 들이고는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면서 스님과 마주 앉아 시를 지었으면 하오.”

끝으로 권근이 말했다.
“난 그렇지 않소. 난 말이오, 한겨울 흰 눈이 뜰에 가득할 때를 맞아서 창가에 자리 잡을거요. 아침 햇살이 비치는 방에 병풍을 둘러치고는 손에 책 한 권을 들고 화롯가에 길게 누을거요.”

정도전만 해도 예순이 넘도록 살았으니 이들은 노인으로서 대담을 주고 받은 셈인데, 이 가운데 누구의 말이며 취향이 앞에서 본, 우리나라 어르신들의 초상화와 어울릴까? 말할 것도 없다. 정도전만 빼면 된다. 앞서 본 대성(大聖)들의 초상화도 도은과 양촌처럼 티 없이 말고 정갈한 마음을 풍기고 있을 것이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