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노년의 즐거움/2022년 8월 1일>

 

노년의 즐거움-김열규

행복한 노년을 위한 5금(禁)과 5권(勸)

2禁 노하지 마라

오금 가운데 둘째는 노년의 ‘노老’가 노기怒氣의 ‘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기老氣와 노기怒氣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멀어야 한다. 노여움을 머금는 것까진 몰라도 그게 밖으로 펑 하고 터져 나오면 흉측하다. 힘껏 안으로 누르거나 감추어야 한다.

한 집안의 큰 어른이 되었다면, 노발대발怒發大發은 평생에 한두번이면 족하다. 마땅히 노발대발해야만 할 때는 위풍 있고 권위 있게 상대방을 압도해야 한다. 다이너마이트가 장소나 시간을 잘못 골라 터지듯이 아무 때나 노기를 터뜨리면 정말 꼴사나워진다. 찡그린 얼굴의 주름살이 더욱 민망하게 쪼글쪼글해질 것이다. 시뻘겋게 염색된 낯빛은 개의 엉덩이 뒷문 같아 보일 것이다.

노기충천怒氣衝天, 이를테면 노여움이 하늘을 찌를 때라도 높이 솟구치게 하는 대신 뱃속 깊은 곳에 가라앉혀야 할 것이다.

노발대발!
노기충천!

어느 것이나 경우에 맞고, 그럴 법해야 하고, 그래서 마땅해야 한다. 위엄에 차고 권위가 높아 보일 때만 노기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

그렇지 못해서 품위 없고 상스러우면 노기는 그만 악이 되고 만다. 악쓰기의 악이 되고 악지 부리기의 악이 될 것이 뻔하다. 악이 아니라 아예 악독한 악다구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 지경이면 노기충천해 노기를 부린 노인 스스로가 영영 승천昇天해버릴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노기는 뇌경색이나 뇌출혈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발끈하여 악을 쓰기 마련이었다.
“맨날, 천날 죽는다 카면서 외 몬 죽을꼬.쪽박 들고 동냥질 댕기도 똑 맞을 그 잘사는 딸네집에 갈라 카모 어서 가소. 평생 딸네집 뒤만 봐줬는데도 딸네는 이날 이때까지 와 제 발도 몬 닦는고,”
이제 고모까지 들고 나서는 어머니의 빈정거림이었다.

앞서? 인용된 <미망>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욕과 악을 내뿜으며 화풀이하는 것은 서술자인 ‘나’의 어머니이다. 이미 예순을 넘긴 어머니가 욕을 퍼부어대는 상대는 나이 팔순에 가까운 ‘나’의 할머니이다. 한 시대 전의 우리 사회에서라면 며누리는 중늙은이고 시어미는 아주 극한까지 다다른 노인인 셈이다.

그런 나이, 그런 인간관계인데도 이런 악담을 내뱉다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전통 사회에선 생각도 못 할 일이다. 며느리가 시어미에게 발악을 하고 저주를 퍼붓다니 망조가 들어도 보통 든 게 아니다.

이처럼 노기를 부리는 것은 듣기 딱하고 보기 민망하다. 세상이 막 되어 먹고 인간도 막 되어먹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그러니 노년들은 더욱 노기를 꾹꾹 참아야 한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 에서


1禁 잔소리와 군소리를 삼가라

‘나이를 먹는다’는 이 말, 누구나 자주 쓰는 이 말은 정말 근사하다. 나이를 뭔가 보람찬 것으로 떠 받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가 먹어서 나쁠 것은 없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 가끔 독을 먹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건 예외다. 그래서 독은 ‘못 먹을 것’이 된다. 그러고 보면 ‘먹을 것’은 다 좋은 것이다. 아이들은 군것질을 좋아하고 어른들은 술이며 안주를 즐긴다.

따라서 ‘나이를 먹는것’도 나쁠 것이 없고, ‘드는 나이’ 또한 나무랄 것이 없다. 맛있는 음식을 탐내듯이 나이도 탐낼 법하다. 품에 들고 주머니에 들어서 나쁠 것이 별로 없듯이 ‘드는 나이’ 또한 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을 언짢아할 이유는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먹는 걸 즐긴다면, 나이 또한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아, 배불러!’

잘 먹고 나서 누구나 내뱉는 한마디! 이럴 때 인생이 부르고 또 만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 마음 불러”라고도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나이 먹어서 마음이 부를 수 있도록 삶을 가꾸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노년에 비로소 누리게 되고, 그래서 나이가 더욱 돋보일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노년이라서 귀하고 소중한 것들, 부디 이것만은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것들, 여기서는 그들 중 다섯 가지만 따로 세우고 ‘노년의 오권(五勸)’이라 부르고자 한다.

하지만 그늘이 양지를 더더욱 빛나게 하듯이, 노년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지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 말아야만 노년이 한층 고와 보이는 일들, 노년이라서 더 삼가고 가리고 멀리해야 할 일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들을 ‘노년의 오금(五禁)’이라 부르면 어떨까.

오금 가운데 첫째는 투덜대지 말라는 것이다. 투정부리기, 삐쭉거리기, 구시렁대기,중얼대기, 넋두리하기 등등에서 노년은 되도록 멀어져야 한다. 일그러진 얼굴, 둔한 칼자루를 내민 듯이 비죽대는 입술, 상대방을 해꼬지하는 날카로운 말버릇을 노년들은 피해야 한다. 그악한 말, 그악한 행동은 무엇보다 본인 자신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필터가 반쯤 타서야 담배를 재털이에 부벼 껐다. 핢머니는 기침을 콜록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 복, 서방 복, 자슥 복 다 없는 이 늙은이를 저승사자는 왜 안데불고 갈고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서럽은 내 팔자야 , 그저 자는 잠에 꼴깍 숨 거두고 마 좋겠구마는 . . .”

할머니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더니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완서의 <미망>에서 시어미가 신세를 한탄하는 모습이다. 평생을 가난하고 외롭게 산 것도 뭣한데 엎친데 덮친 꼴로 이제는 죽음을 앞 둔 나이에 며누리에게도 박대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 노파의 중얼댐이 딱하고 안스럽다.

이것은, 이를테면 ‘팔자 한탄’으로 ‘한풀이’의 전형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애틋한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가뜩이나 처연한 시어미의 몰골을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Via Book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