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노년의 즐거움/2023년 3월 15일>

 

노년의 즐거움-김열규


행복한 노년을 위한 5금(禁)과 5권(勸)

4勸 사색,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라.


노년에는 머리를 많이 쓰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고 머리를 싸매고 끙끙대라는 소리는 아니다. 소식(蔬食)을 하듯이 은근하게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태연하게 생각에 잠겨야 한다. 간절하게 궁리해서 사물이며 세상의 이치에 통달해야 한다.

그러러면 책을 읽는게 도움이 된다. 문학작품도 좋지만 명상록이나 단상집이나 잠언집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세상에는 강한 것이 열두 가지 있다. 첫째는 돌이다. 그러나 돌은 쇠에 깍인다. 쇠는 불에 녹는다. 불은 물로 꺼진다. 물은 구름에 흡수된다. 구름은 바람에 날린다. 그러나 바람은 인간을 날려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도 괴로움에는 참혹하게 무너져 버린다. 괴로움은 술로 다스릴 수 있다. 술은 잠을 자면 깨지만 잠은 죽음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런데 사랑은 그 죽음조차도 이긴다(탈무드 에서)

이런 대목을 읽고, 또 읽어도 마음에 여운을 남기기 마련이고 더불어 깊은 생각도 불러오기 마련이다. 그런데<탈무드> 말고도 파스칼이며 노발리스며 지멜의 단상집 또는 폴 클로텔의 <視?集>이면 명상하면서 읽기에 알맞고, 읽은 뒤에 깊은 사념에도 젖게 된다.

비가 내린다
바다 위 바위 끝
소나무 앞에 어린 빗방울 하나
떨어질 듯 말 듯 머뭇거린다
그러다 마침내 뚝!
떨어진다
물결이 맴돌면서
빗방울을 얼싸 안는다.

우리 시대 최고의 가톨릭 시인이었던, 클로텔의 <시도집> 중 내 머리속에 남아 있는 대목이다. ‘시도’란 <성경>이나 교회에서 미리 의식으로 정해둔 기도가 아니다. 누군가 마음이 내키는대로 그때그때 시시로 드리는 기도가 곧 시도다.
그래서 여기 소개한 시도의 속뜻은 매우 깊다. 그 정경을 한 번 그려보자.

비가 갠 후 절벽 위의 우람한 노송에는 가지 끝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있다. 물방울들은 까마득한 저 바다가 무섭다. 차마 떨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끝내 제 힘으로 매달려 있을 수도 없다. 떨어질까 말까 한사코 멈칫댄다. 그러다 드디어 떨어진다. 그러자 그 물방울을 에워싸듯이 물살이 일어나고 물방울은 마음껏 물살에 안긴다.

그런데? 이렇게 풀이된 정경의 의미는 뭘까? 어느 기독교인이 신에게 처음으로 믿음을 바치려 할 때 이렇게 조마조마하게 머뭇댔다고 상상해보자. 한동안 그렇게 주저하던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려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신의 넓은 품에 내맡긴다. 그때 비로소 느끼게 된 푸근함, 안도감은 어머니에게 안긴 애기의 심정과도 같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랑에 몸을 바치는 것도, 일에 마음을 바치는 것도 비슷할 수 있다. 아니면 어른이 되어 낯선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도 비슷할 것이다.

클로텔의 시도 자체는 짧지만 그걸 읽는 사람은 여러 가지 생각에 젖어들게 된다. 한참을 깊은 사색이나 명상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지는 시도집만이 아니라 단상집이나 수상집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노년이 되면 자주자주 명상에 빠져 머리를 쓰는 것이 좋다. 고요하게, 하지만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퀴처럼 머리를 빨리 돌릴 수도 있어야 한다. 약삭스러워도 좋다. 머리의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좋다. 이를 위해 바둑을 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 장난삼아 무엇인가 가벼운 것을 걸고 화투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너무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꼭 이겨야 하고 반드시 따먹어야 한다고 악지를 무리면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난다. 눈이 흐릿해지고, 넋이 반은 나가면서 몸의 상태도 덩달아 흉측해질 수 있다. 그러니 그저 재미로, 한때의 여흥으로만 즐겨야 한다.

요컨대 명상을 하듯이 고요히 생각하든 자동차 바퀴를 굴리듯 생각을 굴리든 간에 자주자주 머리를 써야 한다. 우리 육신의 어느 부분이든 쓰지 않고 묶혀두면 절로 못 쓰게 되지만 특히 두뇌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하다.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지 않으면 치매에 걸릴 활률도 비례해서 커지게 된다. 이 점을 각별히 머리에 새겨라.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간행


3勸 소식, 소탈한 식사가 천하의 맛이다

두 가지 小食이 있다.’작을 小’를 쓰는 ‘小食’과 ‘분수에 따를 素’를 쓰는 ‘素食’, 素食은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채소를 먹는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하나는 素朴하게 먹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채소를 먹는다는 의미의 소식은 疏食이라 써도 좋을 것이다. 이때 疎는 蔬처럼 채소, 즉 푸성귀를 가리킨다.

하지만 疎는 ‘거칠 소’라고도 읽으므로, 손질하지 않고 肉味가 없는 음식이 곧 蔬食이 된다. 따라서 蔬食은 疎薄하다든가 疎忽하다고 할 때의 그 疎를 써서 소식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게하고 누웠으니
노인네 살림살이
이만하면 넉넉하다.

이렇게 읆조리면 蔬食은 분명 천하태평을 맛보개 해줄 것이다. 이 노래는 <논어>의 한 대목과 맞닿아 있다.

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을 굽혀서 이를 베게 삼으면 즐거움 또한 그속에 있으니 의롭지 못하고 부귀한 것은 내게 뜬 구름과 같다

이 말을 한 공자도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사는 삶을 예찬한 우리 민요에 박수를 보낼 것이다.

한편 소식은 말할 것도 없이 적게 먹는 것이다. 배가 터지게 먹어대는 먹보나 식충이 노릇은 노년에 할 짓이 못 된다. 그건 필경 자해 행위이다. 소화에만 나쁜 게 아니다. 몸 전체의 건강에도 나쁘기만 하다. 노년들에게 과욕은 독이고 적인데, 특히 먹는 일이 그렇다.

 

일본에는 ‘배 팔부’란 말이 있다. 음식을 먹되, 배가 덜 찬 듯이 먹는 것을 그렇게 부른다. 일본이 세계 제일의 장수국가로, 백 살 이상의 노인인구가 많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적게 먹는 소식에 있다. 그러니까 밥그릇을 아예 작은 것으로 바꾸고 많이 꼭꼭 씹어 먹는 것이 좋다.

한편 소식(素食)은 고명이며 소스며 드레싱의 맛은 아예 나 몰라라 하고 먹는 것을 의미한다. 맛 좋고 빛 좋은, 그래서 손질 많이 하고 양념 많이 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채소라면 밭에서 거둔 그 상태 그대로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러면 자연히 음식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도 소탈해야 한다. 그래야 소식이란 말을 쓸 수 있다.

小食에 겸해서 두 가지 의미의 素食들을 함께하게 되면 자연히 음식을 두고 잔소리며 군소리를 하지 않게 되고, 더불어 몸이 실해지고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먹기 전에 드리는 기도의 형식은 가난한 사람들의 밥상에서나, 아이들의 먹을 것도 대단찮고 먹을 마음도 내키지 않는 그런 밥그릇 앞에서 하는 것이 아름답다. 이러한 경우의 식전 기도야말로 매우 품위있게? 돋보인다. 다시 말하면 가장 소탈한 식사야말로 감사 기도로 시작하기에 가장 합당한 것 같다. 식욕을 최소한으로 자극시키는 음식은 마음을 최대한으로 자유롭게 해주어서 다른 일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은 무를 곁들인 변변찮은 양고기 한 접시를 앞에 놓고 고마워하고,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먹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볼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다. 그런데 사슴 요리나 산비들기 요리를 코앞에 대하면 기도의 목적과 일치하지 않는 마음의 혼란이 일어난다. 한번은 부잣집 식탁에 끼여 앉게 되었는데, 맛있는 고깃국과 콧구멍을 살살 건드리는 가지각색 요리 냄새와 집어 먹고 싶은 욕망에 어디다 먼저 젓가락을 대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손님들이 군침을 적시고 앉은 마당에 기도 의식을 끌어들인다는 것은 뚱단지같은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촬스 램 수필선중 ‘식사전의 기도’>에서

이 글에서 “다시 말하면 가장 소탈한 식사야말로 감사 기도를 시작하기에 가장 합당한 것 같다.”라는 대목을 눈여겨보자. 그러면 근대 영국을 대표하는 명수필가의 글이 蔬食을 찬미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도는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를 올리게 되어있다. 그런데 소식이라야 경건하고 다소곳하게 기도를 올릴 수 있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다고 촬스 램은 말한다.?

*김열규의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간행>에서


 

2권(勸) 달관( 達觀), 두루두루 관대하라.

인생, 그리고 세상일에 달관하자. 이런 몸가짐은 앞에서 말했드시 유유자적하다 보면 저절로 터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노년이라면 누구나 따로 떼어서 각별하게 마음에 새겨두기를 바란다.

관대는 말할 것도 없이 너그러움이다. 드넓은 마음, 널따랗게 된 마음이다. 웬만큼 마음 상하거나 언짢은 일, 어줍짢은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면, 못 본 듯이, 못 들은 듯이 외면하고 마는 것이 노년의 크나큰 미덕이다. 노년을 돋보이게 하는 인품이다.

남은 물론이고 가족이 저지른 것에 상심이 되더라도 모른 척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 그건 노년다운 심덕(心德)이다. 예부터 쓰던 ‘어진 이’라는 말은 노년의 이상적인 모습을 나타낸다. 왕을 칭송할 때도 ‘어진 임금’이라고 했다. 재상중에도 황희나 맹사성 같은 분들은 어질기가 이를 데 없었던 것으로 전해져 온다.

맹 정승이 고향이 온양에 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마침 장마철이라 달포 동안 비가 구질구질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청빈했던 선비 재상의 단간방에는 비가 줄줄이 새기 시작했다.

정승은 방 안에서도 낡은 우산을 받쳐 들고 책을 읽었다. 맞은편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던 정경부인과의 사이에는 빗물이 고이다 못해 작은 개울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재상의 독서삼매는 여전했다. 부인이 견디다 못해서 한마디 구시렁댔다.

“아이고, 저러고도 정승이라고.!”

그러고는 크게 한숨을 쉬는 부인에게 정승이 한마디 던졌다.

“아이고, 배가 있으면 이 강을 건너가서는 부인을 혼쭐낼 텐데. 배가 있어야 말이지!” 그러고도 맹 정승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한 토막은 조선조의 이름난 정승이 이처럼 딱한 처지, 한심한 처지에서도 오히려 유머를 부렸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만큼 커다란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노년의 관대함은 노년을 위대하게 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무슨 일에나 무슨 말에나 느긋하자. 느긋하다 못해 나긋하면 더욱 좋다. 그야말로 금상첨화이다. ‘나긋’은 원래 소녀의 예쁜 행동이나 아가씨의 고운 표정을 나타내지만, 노년의 느긋함이 고운 마음씨를 갖추게 되면 나긋해지기도 할 것이다.

한편 관대함과 아울러 달관(達觀), 또는 체관(諦觀)도 노년의 크나큰 미덕으로 내세우고 싶다. 달관은 달통(達通)과 거의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무엇인가를 넓게 두루두루, 그러면서도 깊게 꿰뚫어 보되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 다른 사람들의 태도며 의견, 자신의 처지 등을 여유만만하게 대하는 것이 달관이다.

체관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경우 ‘체(諦)’는 체년의 ‘체’와 마찬가지이다. 일본인들은 이 글자를 ‘아키라메’라고 읽는데? 그건 단념과 같은 뜻이다. 하지만 체념이 포기하는 일이고 단념하는 일인데, 비해서 체관은 좀 더 좋은 뜻을 갖추고 있다. 사물이나? 이치를 분명하게 규명한다는 뜻을 지닌 체시(諦視)와 거이? 같은 의미로 불교에서 깨달음을 의미하는 진체(眞諦)와도 통하는 말이다.

그런데 체관은 마음의 여유나 부드러운 정서 등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강조해두어야 할 것 같다. 바다같이 드넓은 인품, 고요한 호수와도 같은 잔잔한 마음가짐이 체관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옛날 관직에서 밀려난 어느 선비에게 동료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거요. 난데 없이 벼슬이 . . .?”

그는 어쩔줄 모르고 말을 끊었다. 그러자 선비가 빙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하긴. 고향으로 돌아가서 푹 쉬게 된 게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료가 울상이 되어 물었다.

“다른 사람들과 영영 인연이 끊어지지 않을까요?”
“그럼 나만의 온전한 세계를 누리면 되지요.”

선비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옷 깃을 여미는 것이었다.

속이 좁은 사람과 넓은 사람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는 대화이다. 선비는 체관하고 달관할 줄 아는 크고 넓은 도량을 갖춘 사람이다. 노년일수록 그런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

그러니까 노년의 가장 큰 미덕이 될 체관은 허무감, 서러움, 애달픔 등의 아프고 쓰라린 심정을 스스로 가라앉히고 진정시키는 마음 가짐이다. 그런 심정에 시달리지 않게 불리하고 허망한 사물과 세상의 이치, 그리고 자기의 운명 등을 포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곧 체관이다.

“서러워, 서러워서 못살겠어요!”라고 소리치는 마음이 아니라 “서러움도 인생살이의 이치라면 달게 받아야지”하는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김영랑의 시 <그 밖에 더 아실 이>에도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그밖에 더 아실 이 안 계실거나
그대의 젖은 옷깃 눈물이라고
빛나는 별 아래 애달픈 입김이
이슬로 맺히고 맞히었음을

애달픔의 입김이나 눈믈을 별빛에 빛나는 이슬이라고 생각하는,? 이 고운 심성이 다름 아닌 체관이다. 자주 눈물겹게 되는 노년일수록 이 시를 입버릇처럼 외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듯이 노년에는 유유자적해야하고 또 관대해야 한다. 노년은 그럴 수 있는 가장 좋은 나이이다. 그런 면에서는 인생 지상의 나이가 곧 노년이라고 해도 지나침은 없을 것이다.

*김열규 지음<노년의 즐거움-비아북 출간>

 


1勸 유유자적, 큰 강물이 흐르듯 차분하라.

노년에 삼가야 할 것들을 살펴보다 보니 마음이 조금은 힘겨워진 것 같다. 이제는 마음을 풀 겸 해서 노년에 해봄 직한 일들, 해보면 보람 있는 일들, 마음에 내키는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나이 들기를 잘했다!” 아니면 “나이 먹기를 잘했어!”라고 우쭐댈 수 있도록.

첫 번째로 유유자적(悠悠自適)을 들 수 있다. 유유는 서두르거나 안달하지 않는 느긋함이고 자적은 자연스럽게 일이 되어가는 대로 행동하거나 마음을 내맡기는 것이다. 한편 순적(順適)이라는 말은 순탄하게 고분고분 행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순적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유유자적을 줄여서 유연(悠然)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때 ‘유(悠)’는 ‘멀 유’라고도 하고 ‘한가할 유 라고도 하는데, ‘유연하다’고 할 때 이 ‘유’는 말할 것도 없이 ‘한가할 유’이다.

그런데 유유는 참 묘하게도 근심하는 모양새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엉뚱하게도 아득하게 멀거나 끝도 없이 넓은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큰 강물이 유유하게 흐르는 것도 나타낸다. 그중 ‘근심할 유’는 유유자적의 ‘유’, 즉 침착하고 차분하고 여유만만한 유와는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유가 지닌, 모순되는 두 가지 의미에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근심이 짙을수록 걱정이 많을수록 마음을 크고 넓게, 그리고 너그럽게 가져야 한다. 그래서 만사에 한결같이 유유도일(悠悠度日)하고 유유범범(悠悠泛泛)한 마음을 먹어야 한다. 유유도일은 잔일이나 말썽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낸다는 뜻이다. 유유범범도 비슷한 말인데 ‘범(泛)’은 강물이 넓고 시원하게 흘러가는 모양을 가리킨다. 그러니 노년의 삶은 큰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가 하면 유유자적은 태연자약(泰然自若)과 좋은 짝이 될 수 있다. 벼락이 쳐도, 난리가 일어나도 까딱하지 않는 게 태연자약이다. 이렇게 태연자약 할 수 있다면 유유자적한 강물 같은 노년은 거기에 더해서 거대한 바위 같고, 또 태산 같아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노년은 드넓은 강가에 유유히 솟은 암벽 같을 것이다. 그게 노년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의 궁극이다. 드높은 이상이다.

하긴 살다보면, 그것도 노년으로 살다 보면, 별달리 한스럽고 애통한 일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얇은 물기운이 어리고 한숨을 크게 토해내는 일인들 왜 없겠는가! 그럴 때는 혼잣말 하듯이 이런 시를 가만 가만 되뇌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외로워서 힘이 들 때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혼자 앉으세요

혼자 앉아 이름을 부르세요
그리고 외롭다고 말하세요

외롭다고 말하면
슬퍼질 거예요
슬퍼서 눈물이 나거든
그냥 흘리세요
목놓아 울고 싶거든
그렇게 하세요

그런다고 외로움이
가시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나아질 거예요.

외로움이 슬픔이 되고
슬픔을 하염없이
슬퍼하고 나면
긴 한숨이 나올 거에요
그러면 한결
수월해질 거예요

외로워서 힘이 들 때는
이름을 부르세요
그리고
외롭다고 말하세요.

(예창해, <외로워서 힘이 들 때는>),

그렇게 서러움이며 슬픔에 한껏 젖고 나면, 마치 그새 자신도 모르게 흘린 눈물을 받아서 영근 듯이 마음의 고요가 깃들 것이다. 그런 아린 고비를 아프게 넘기는 것도 일종의 마음 다스림이 될 수 있다. 그래서는 조용히 가만히 눈감고 앉아 바위가 될 것이다.

노년에는 세상만사 남의 일에 별로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 그 자질구레한 것들을 아주 멀리 남의 일로 떼어놓고 사는 게 좋다. 자기 일도 그게 죽자 살자하는, 다급하고 긴요한 일이 아닌 이상 딴전을 피우며 모르는 척하는 게 좋다. 그렇게 꽃을 스쳐가는 봄바람처럼 살아가면 된다. 그러러면 절로 진중하게되고, 행동이나 자세에 무게가 붙을 것이다. 백두산의 천지연처럼 , 한라산의 백록담처럼 시원하고 육중할 것이다.

영화 <워낭 소리>에서 소를 몰고 가던 노인처럼 노년에는 그렇게 살고? 싶다. 넉살 좋게 야금야금 흙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 마는 듯하는 소를 따라 노인이 차분하다 못해 고분하게 발을 옮기던 그 장면, 그 정경. 나이 들어서는 매사 그렇게 하고 싶다.

*김역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간행>에서


5禁 어제를 돌아보지 마라

과거에 집착하지 마라. 지나간 날에 마음을 주지마라.

“그때 난 이렇고 저렇고 했는데 . . .”
“내가 한창일 때는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 . “
“내가 소싯적에는, , , ,”

이런 투의 말을 삼가야 한다. 어제를 빛나게 하려고 우쭐대다 보면 뜻하지 않게 오늘을 꼴사납게 만들 수도 있다. 물론 마음속으로 어제의 보람을 되짚어봄으로서 오늘의 생기를 찾을 수도 있다. 회상 속에 떠오르는 멋진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어제를 두고 우쭐대다 보면 끝에는 큰 한숨이 따라 붙기 마련이다.

“어젠 이랬었는데 오늘은 왜 이 꼴이지?”

그리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과거를, 마치 잃어버린 물건, 도둑받은 보물을 찾듯이 뒤적거리게 되면, 소중한 오늘의 노년이 파리해지고 초췌해진다. 가버린 시간때문에 현재의 시간을 꼴사납게 만들진 말아야 한다. 그렇게 흘러 보낸 오늘은 내일이 되면 또 다른 잃어버린 시간, 도둑맞은 시간이 된다.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는가!

물론 노년에 삼가야 할 일이 여기 열거한 다섯 가지만은 아닐 것이다.
가령 자식들을 원망하는 일, “우리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구질구질한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키우긴! 태어나게 했으니까, 당연히 키운 것뿐이지, 자식들이 낳아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다. 그저 부모가 좋아서 낳은 것뿐이다. 그러니 마땅히 책임지고 키워야 했던 것이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기에, 그러니 자식들에게 빚진 것을 받아내듯이 조르지도 말고 은근히 뭔가를 바라지도 말아야 한다. 그저 저희들끼리 잘살면, 그게 오죽 고마운 일인가 말이다.

또 있다. 앉을때에는 웅크리거나 쪼그리지 말아야 한다. 바른 자세로 곧추 않는게 가장 좋다. 힘들어도 그렇게 떳덧하게 앉아야 한다. 괜히 얼굴을 찡그리고 허리가 꺾인듯이 죽치고 앉았지는 말아야 한다. 한 시대 전에 대청마루에 장죽을 비스듬이 물고는 양반다리로 앉아 “으흠!”하고 큰기침을 해대던 노장들을 본받아야 한다.

이러다 보니 나이가 들수록 지켜야 할 것, 가려야 할 것들이 늘어만 간다. 그러니 삶을 대하는 태도도 노년에 들어서 더한층 다부지고 야무져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잠시 차치하고라도 오금(五禁)만은 명심하고 지키는 것이 좋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비아북에서

 


4禁 노탐(老貪)을 부리지 마라

그런데 참 묘하게도 노년이 되면 투덜대고 구시렁대면서 기가 꺾이는 한편, 허욕이나 탐욕이 많아지기도 한다. 나이 든 사람의 허황된 욕심을 노탐(老貪)이라 하는데, 그런데 참 묘하게도 노년이 되면 투덜대고 구시렁대면서 기가 꺾이는 한편, 허이건 여간 악덕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욕심은 줄여야 하는데, 거꾸로 그걸 더 돋우는 것이 노탐이다.

그래서 노년에 지켜야 할 오금으로 ‘노탐을 부리지 마라’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노탐은 흔히 허욕(虛慾), 이를테면 허망하고 헛된 욕망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탐스러운 구석이라고는 단 한 곳도 없는게 노탐이기 마련이다. 아무 보람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나 부작용만 불러올 허욕으로노탐은 버글거리게 한다.

음식이나 옷가지 등에 대한 노탐도 문제에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식탐(食貪)이 제일 말썽이기 마련이다. 많이는 못 먹는데도 이것저것 챙기고,또 맛이 있느니 없느니 투정 부리는 그 고약한식탐은 필경 건강까지 해칠지도 모른다. 게닥 인품까지 엉망이 될 게 뻔하다.

봄 산 어느 곳엔들 녹음방초 없으리오만
상제와 가까운 천왕봉이 있어서 사랑스럽네
빈손으로 와서 무얼 먹고 살것인가
은하수 십 리에 뻗어 있어 먹고도 남겠네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자신의 산천재(山天齎) 기둥에 써붙인 시로, 조식의 전기를 쓴 한수연이 번역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무얼 먹고 살것인가?” 라고 하면 그건 가난에 찌들 대로 찌들고 쪼들릴대로 쪼들린 소리가 되기 마련이다. 탄식이고 한탄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기개 높은 선비중의 선비로, 차라리 신선에 가까왔던 조식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은하수 십 리에 뻗어 있어 먹고도 남겠네”라는 그 호언장담이, 그 큰 소리가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고고한 선비는이 노래를 지을 당시 나이가 이미 예순 안밖이었으니 당시로서는 노인으로 섬겨질 처지였다. 그런데도 은하수 물을 마시고 그 별을 먹겠다니 밥 따위는 관심 밖이다. 가진 것도, 먹을 것도 없는데도 스스로 자족할 줄 아는 그 허심탄회(虛心坦懷)가 놀랍다.

오늘의 노년에 이를 그대로 실천하기는 힘겨울 것이다. 하지만 마음가짐만이라도 그 근처에 다다르고 싶다. 그러면 게걸스럽게 식탐을 부리는 것만은 면할지도 모르겠다. 한껏 바람을 마시고 시원하게 물을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한때나마 배부를 수 있는 게 노년이다. 그래야만 노년이 더한층 노련해질 것이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란 말이 있다. 적은 것을 탐내다가 큰 이득을 놓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노탐대실’할 수도 있다. 건강을 놓치고,인품을 잃고, 결국 인심까지 잃고는 미움덩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줄이고 줄여서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무심과 무욕과 무탐, 그것은 노년의 세 가지 ‘무의 미덕’이다. 그 미덕들을 지키지 못하면,노년에 무리가 간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해코지하게 된다. 그건 일종의 자해(自害)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 비아북 간

 


행복한 노년을 위한 5금(禁)과 5권(勸)

3禁 기죽는 소리는 하지마라

노년에는 되도록 기가 죽고 풀이 죽는 소리를 삼가야 한다. 기가 죽을 짓이나 행동도 하지 말아야 한다. 푸념은 무당이 귀신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을 몰아치는 소리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마음에 박힌 상처며 가슴에 품은 불만을 구중중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스스로 기죽은 꼴을 내보이는 것은 노년으로서는 차마 할 짓이 못된다.

“아이고 더 살아서 뭐 해!”

“이 꼴 보고, 이 지경 겪으려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았나?”

이렇게 기죽는 소리는 본인의 기운을 빼았기 마련이다. 말이 힘을 잃고 소리가 기운을 놓치면 생기가 덩달아서 빠져 나간다.

안 초시는 그 날카로워진 이를 빈 입인 채 빠드득 소리 나게 한 번 물어보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천 리같이 트였는데 조각구름들이 여기 저기 널렸다. 어떤 구름은 깨끗이 바래 말린 옥양목처럼 흰 빛이 눈이 부시다. 안 초시는 이내 자기의 때묻은 적삼이 생각이 났다. 소매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날래 돌리지 않는다. 거기는 한 조박의 녹두 빈자나 한 잔의 약주로써 어쩌지 못할, 더 슬픔과 더 고적함이 품겨 있는 것 같다. 흑, 혹 소매 끝을 불어보고 손끝으로 투겨보기도 하다가 목침을 세우고 눕고 말았다.

이태준의 <복덕방>에서 거처가 마땅치 않아 친구인 서 참의(參議)의 복덕방에서 잠을 자곤 하는, 안 초시를 묘사한 대목이다. 그는 딸이 부러진 안경다리를 바꿔 끼라며 준 40전을 토막내어서는 야금야금 담배를 사 피우는 그런 처지이다. 그러다 보니 흰 구름이 떠 있는 천 리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눈길과 자기의 찌든 옷소매를 내려다보는 눈길이 다를 수밨에 없다.

거기에는 “슬픔과 고적함이 품겨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작가가 소매를 내려다보던 안 초시의 눈이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게 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소매 끝과는 대조적으로 천 리같이 트인 맑은 하늘이 더 한층 슬픔과 고적함을 줄 수 있었을 테니.

이처럼 별 것도 아닌 것들, 굳이 소맷자락이 아니라도 무시로 주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에서 슬픔과 고적함을 느끼는 게 노년이다. 슬픔과 고적함이 사방팔방에 널려 있는 셈이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노년일수록 이런 상태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기가 죽고 기운이 꺾여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게 된다.

그렇다. 안 초시가 옷소매를 뿌리치고 일어서야 했듯이 노년은 누구나 자질구레한 일로 기가 죽는 상황을 떨쳐내야 한다. 헛기침을 해도 좋고 “으흠! 으흠!” 소리를 연발해도 좋다.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바라보아도 좋고, 배에 힘을 주고 심호흡을 해도 좋다. 기가 죽으면 생기도 덩달아서 시든다. 기고만장(氣高萬丈)까지는 아니라도 ‘기고백장’ 정도는 괜찮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2禁 노하지 마라

오금 가운데 둘째는 노년의 ‘노老’가 노기怒氣의 ‘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노기老氣와 노기怒氣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멀어야 한다. 노여움을 머금는 것까진 몰라도 그게 밖으로 펑 하고 터져 나오면 흉측하다. 힘껏 안으로 누르거나 감추어야 한다.

한 집안의 큰 어른이 되었다면, 노발대발怒發大發은 평생에 한두번이면 족하다. 마땅히 노발대발해야만 할 때는 위풍 있고 권위 있게 상대방을 압도해야 한다. 다이너마이트가 장소나 시간을 잘못 골라 터지듯이 아무 때나 노기를 터뜨리면 정말 꼴사나워진다. 찡그린 얼굴의 주름살이 더욱 민망하게 쪼글쪼글해질 것이다. 시뻘겋게 염색된 낯빛은 개의 엉덩이 뒷문 같아 보일 것이다.

노기충천怒氣衝天, 이를테면 노여움이 하늘을 찌를 때라도 높이 솟구치게 하는 대신 뱃속 깊은 곳에 가라앉혀야 할 것이다.

노발대발!
노기충천!

어느 것이나 경우에 맞고, 그럴 법해야 하고, 그래서 마땅해야 한다. 위엄에 차고 권위가 높아 보일 때만 노기도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된다.

그렇지 못해서 품위 없고 상스러우면 노기는 그만 악이 되고 만다. 악쓰기의 악이 되고 악지 부리기의 악이 될 것이 뻔하다. 악이 아니라 아예 악독한 악다구니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 지경이면 노기충천해 노기를 부린 노인 스스로가 영영 승천昇天해버릴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노기는 뇌경색이나 뇌출혈을 부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발끈하여 악을 쓰기 마련이었다.
“맨날, 천날 죽는다 카면서 외 몬 죽을꼬.쪽박 들고 동냥질 댕기도 똑 맞을 그 잘사는 딸네집에 갈라 카모 어서 가소. 평생 딸네집 뒤만 봐줬는데도 딸네는 이날 이때까지 와 제 발도 몬 닦는고,”
이제 고모까지 들고 나서는 어머니의 빈정거림이었다.

앞서? 인용된 <미망>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욕과 악을 내뿜으며 화풀이하는 것은 서술자인 ‘나’의 어머니이다. 이미 예순을 넘긴 어머니가 욕을 퍼부어대는 상대는 나이 팔순에 가까운 ‘나’의 할머니이다. 한 시대 전의 우리 사회에서라면 며누리는 중늙은이고 시어미는 아주 극한까지 다다른 노인인 셈이다.

그런 나이, 그런 인간관계인데도 이런 악담을 내뱉다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전통 사회에선 생각도 못 할 일이다. 며느리가 시어미에게 발악을 하고 저주를 퍼붓다니 망조가 들어도 보통 든 게 아니다.

이처럼 노기를 부리는 것은 듣기 딱하고 보기 민망하다. 세상이 막 되어 먹고 인간도 막 되어먹지 않고서는 이럴 수 없다. 그러니 노년들은 더욱 노기를 꾹꾹 참아야 한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 에서


1禁 잔소리와 군소리를 삼가라

‘나이를 먹는다’는 이 말, 누구나 자주 쓰는 이 말은 정말 근사하다. 나이를 뭔가 보람찬 것으로 떠 받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우리가 먹어서 나쁠 것은 없다.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 가끔 독을 먹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건 예외다. 그래서 독은 ‘못 먹을 것’이 된다. 그러고 보면 ‘먹을 것’은 다 좋은 것이다. 아이들은 군것질을 좋아하고 어른들은 술이며 안주를 즐긴다.

따라서 ‘나이를 먹는것’도 나쁠 것이 없고, ‘드는 나이’ 또한 나무랄 것이 없다. 맛있는 음식을 탐내듯이 나이도 탐낼 법하다. 품에 들고 주머니에 들어서 나쁠 것이 별로 없듯이 ‘드는 나이’ 또한 반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을 언짢아할 이유는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먹는 걸 즐긴다면, 나이 또한 그럴 수 있어야 한다.

“아, 배불러!’

잘 먹고 나서 누구나 내뱉는 한마디! 이럴 때 인생이 부르고 또 만복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 마음 불러”라고도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이를 먹으며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나 나이 먹어서 마음이 부를 수 있도록 삶을 가꾸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노년에 비로소 누리게 되고, 그래서 나이가 더욱 돋보일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노년이라서 귀하고 소중한 것들, 부디 이것만은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것들, 여기서는 그들 중 다섯 가지만 따로 세우고 ‘노년의 오권(五勸)’이라 부르고자 한다.

하지만 그늘이 양지를 더더욱 빛나게 하듯이, 노년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지켜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 말아야만 노년이 한층 고와 보이는 일들, 노년이라서 더 삼가고 가리고 멀리해야 할 일은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그것들을 ‘노년의 오금(五禁)’이라 부르면 어떨까.

오금 가운데 첫째는 투덜대지 말라는 것이다. 투정부리기, 삐쭉거리기, 구시렁대기,중얼대기, 넋두리하기 등등에서 노년은 되도록 멀어져야 한다. 일그러진 얼굴, 둔한 칼자루를 내민 듯이 비죽대는 입술, 상대방을 해꼬지하는 날카로운 말버릇을 노년들은 피해야 한다. 그악한 말, 그악한 행동은 무엇보다 본인 자신에게 해롭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곤 필터가 반쯤 타서야 담배를 재털이에 부벼 껐다. 핢머니는 기침을 콜록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 복, 서방 복, 자슥 복 다 없는 이 늙은이를 저승사자는 왜 안데불고 갈고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서럽은 내 팔자야 , 그저 자는 잠에 꼴깍 숨 거두고 마 좋겠구마는 . . .”

할머니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더니 소리 죽여 흐느끼기 시작했다.

박완서의 <미망>에서 시어미가 신세를 한탄하는 모습이다. 평생을 가난하고 외롭게 산 것도 뭣한데 엎친데 덮친 꼴로 이제는 죽음을 앞 둔 나이에 며누리에게도 박대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 노파의 중얼댐이 딱하고 안스럽다.

이것은, 이를테면 ‘팔자 한탄’으로 ‘한풀이’의 전형 같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애틋한 동정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가뜩이나 처연한 시어미의 몰골을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Via Book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