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노년의 즐거움/2022년 5월 1일>

 

노년의 즐거움-김열규

 

정정한 노년, 정정한 노송


이 그림 앞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진다. 마음의 옷깃이 절로 여며지고 눈에는 맑은 정기가 돈다. <구봉설제도>처럼 이 그림에도 우뚝우뚝한 바위가 우람하다. 패이고 접히고 휘어진 채 온통 주름투성이인 아래쪽 바위 뒤편으로 암봉(岩峰), 즉 바위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다. 늠름하고 단호하기가 매서울 정도이다. 이 같은 바위의 모습은 얼굴에 잡힌 주름만큼 당당하고 의젓한 노인의 자태를 보여준다.

그런데 치솟은 바위 밑으로 비스듬하게 누운 바위 옆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다른 나무도 아닌 소나무이다. 그것도 노송(老松)이다. 그 인상은 마치 커다란 덩치의 우람한 바위들이 미쳐 말하지 못하는 속내를 대변해주는 것 같다. 바위와 짝이 된 노송, 그것은 노년의 기개를 상징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골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사육신의 두령격인 성삼문의 시조이다. 그런데 그는 죽어서만 정정하게 우거진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되고자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서 그가 보인 기개 도 능히 낙락장송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장송은 당연히 노송인데, 봉래산 제일봉에 우뚝 버티고 서 있다. 아마도 그 제일봉의 아무데나 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새삼 말할 것도 없이 봉래산 제일봉의 암벽 위에 고고하고 아스라하게 서 있을 것이다.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로 여기느냐
천심절벽에 낙락장송이 내 그것이로다
길 아래 초동의 접낫이야 걸어볼 수 있으랴

조선조의 이름난 기생, 송이(松伊)의 절창이다. 공연히 유세를 피우면서 집적대는, 돼먹지 못한 벼슬아치들에게 호통을 치는 그 소리가 우람하다. 사내들은 작은 낫을 맨 초동에 비유되고 있다. 그 주제에 명색이 사내라고 허술한 낫으로 ?내게 덤비다니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천 길이나 솟아 있는 암벽 위에 서 있는데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이처럼 제 뜻을, 또는 제 처지를 굳건히 지켜내려는 의지가 두 시조에서 똑같이 낙락장송에 견주어져 있다. 노송에 견주어져 있다. 그것도 높디높은 암벽 위에 우뚝 선 노송에. 그렇기에 이 두 사람이 노래한 노송은 곽희(郭熙)의 <조춘도(早春圖)>에 그려진 노송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더러 노송은 장송 외에 서송(瑞松)이라고도 불린다. 거룩한 서기(瑞氣)가 고인 소나무’란 뜻이다.

이 그림은 봄이 깃들기 시작한 깊은 산골, 드높은 봉우리들 앞이기에 오히려 기를 돋우며 푸르디푸른, 상서(祥瑞)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소나무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역시 서기가 감돌 만한 소나무라면 당연히 노송이라야 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늙은 줄을 모르는, 그야말로 노당익장하는 노송이라야 할 것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자연의 노대가

산 절로 수 절로 산수 간에 나도 절로
그 속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조차 절로 절로 하리라.

옛 선비들은 이렇게 산이듯이 물이듯이 살기를 원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소망은 더 한층 간절하고 또 간곡해졌다. 동양에서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말을 흔히 써왔다. 무위란 사람이 일부러 손을 대지 않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만사를 되어가는 그대로 맡겨두는 것을 의미했다. 인공이나 인위(人爲)같이 사람의 손길이 끼어들지 않는 게 곧 무위이다.

천지개벽한 이래로, 산과 물이 이미 있는 그대로 절로 절로 지탱되어가는 것이 곧 무위자연이다. 그렇기에 동양인에게 자연은 곧 ‘저절로’이고 ‘절로 절로’였다. 서구인들이 자연을 물리적인 실제로 보면서 물질적으로 다룬 것과는 크게 달랐다.

흔히 영어 단어 ‘네아쳐,narure’는 우리말로 ‘자연’이라 번역된다. 하지만 네이쳐는 ‘본질’이라는 뜻이되, 물리적인 본질을 의미하기에 엄밀히 따지면. 네이쳐와 자연은 같은 말이 될 수 없는, 서로 다른 속성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구름 가는 대로, 이게 바로 우리의 자연관이었다. 나이 들어서 노년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그런 자연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노년들은 스스로 바위 같고 물 같기를 원하면서 살아왔다. 기봉(奇峯)의 바위가 노년의 얼굴과 같은 모습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습만이 아니라 기상(氣相)이라고 불리는 마음의 자세 또한 바위와 같기를 소망했다.

황공망(黃公望)의 <구봉설제도>에서 ‘설제’는 눈이 그쳤다는 뜻이다. 모진 한 겨울,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겨우 눈이 걷힌, 바로 그때의 바위며 바위 봉우리들을 화폭에 옮겨놓은 것이 바로<구봉설제도>이다.

멀리 뒤로는 짙은 눈을 덮어 쓰고 있는 봉우리들이 우뚝우뚝하게 치솟아 있다. 그 소박하고 단아한 바위 봉우리를 배경 삼아 앞에 자리한 바위가 보는 이의 눈길을 끈다. 전면에 귀물스럽게 버티고 있는 우람한 바위가 보는 이의 관심을 사로잡는다.

잘 들여다보면, 그 바위의 윗부분이 꼭 사람의 머리와 얼굴을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조금 왼쪽으로 기웃한 얼굴이 보인다. 언듯 수사자의 머리로도 보이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얼굴을 더 닮은것 같다. 얼굴 한가운데에 콧날이 서 있는 듯이 보이고 그 위로 두 눈이 찍혀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긴 코 아래로는 턱이 보이니 이래저래 영락없이 사람 얼굴이다.

턱 아래로는 수염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무늬가 패어 있고 그 아래, 그러니까 목 부분에는 굵은 주름살이 박혀 있다. 뿐만 아니다. 목 바로 아래, 그러니까 어깨 부분에는 얼기설기, 또 가닥가닥 주름이 져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바위는 대체로 노인의 초상을 닮아 있는데, 우연치고는 너무나 그럴듯한 우연이다. 그래서 그림전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백설로 덮인 높고 뽀죽한 기봉들을 자신의 드높은 기상 삼아 노인이 반쯤 눈섭을 찡그린 채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이렇게 말해도 크게 과장되지도, 허황되지도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이 한 폭의 바위 그림에서 노년의 우람찬 면모를 보고 싶다는 바람에 맞추어 지난날, 노년들 중에도 기개가 높은사람은 흔히 바위에 비교되어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시조시인으로도 유명한, 조선조 중기의 문신인 이현보(李賢輔)는 자신의 호를 농암(聾巖) 또는 설빈이라 했는데, 여기서 그의 성품을 유추해낸다면, 대체로 바위를 닯아 있을 것이다.

농암의 ‘롱聾’은 ‘귀머거리 롱’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이지만, ‘어두울 롱’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농암이란 호는 침믁하고 있는 바위, 그러니까 단단하고 야무진 바위로 풀이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또 다른 호인 설빈은 “백설같은 귀밑머리’라는 뜻이지만 좀 더 크게 보아 ‘백설과 같은 백발’이란 뜻으로 해석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니 둘을 합치면, 백설을 인 채 침묵하는 바위가 연상된다. 그래서 농암과 설빈이라는? 그의 두 호는 <구봉설제도>를 떠오르게 한다.

조선조 사람으로는 드물게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현보는 문신으로서나 시조시인으로서나 노대가였다. 그의 초상화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노년이 깊어갈수록 이 대선비는 점점 더 바위를 닮아갔을 것이다.호만이 아니라 인품도, 모습도 바위 봉우리를 닮아갔을 것이다. 노년의 경지를 어떻게 다듬고 닦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듯이.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에서


 

늙다리와 어르신

망측하게도, 또 괴이쩍게도 늙음은 낡음과 그 뿌리가 같을지도 모른다. 원래는 물건이 늙으면 낡았다고 하고 사람이 낡으면 늙었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유감스럽게도 늙음과 낡음을 서로 상통해 있는 것 같다.

“늙으면 죽어야지!”
“늙으니 그 꼴이지!”
“늙은 게 별수 있나!”

이런 여러 말들,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노인들 스스로 입버릇처럼 하는 이 말들은 정말 안쓰럽고 망측하다. 누구든 그런 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말들이 흔하게 쓰이는 게 현실이다. 늙음과 낡음이 짝을 짓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듣기는 거북하다. 민망하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늙다리, 늙정이 같은 거북한 말들이 천하게 나돌기도 한다. 이 두 낱말은 아무래도 천격(賤格)이다. 노년을 똑바로 보고 하는 말이 아니다. 얕잡아 보아도 예사로 얕잡아보는 말이 아니다.

사실 살펴보면 노인을 얕잡아보는 말이 제법 많다. 늙다리, 늙정이, 늙은뱅이, 영감쟁이, 영감태기 등등은 노년들이 들어서 반길 말은 아니다.

그나마 남자는 나은 편이다. 여자의 경우 얕잡아 부르는 비칭(卑稱)이 아주 가관이다. 노파(老婆)만 해도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하물며 할멈, 할망구, 할망탱구 . . . 이쯤 되면 할머니들의 체면은 도무지 말이 아니다. 노년에 관한 비칭에도 이처럼 남녀차별이 있다.

이렇듯이 나이에 따라서 층을 가르는 호칭, 그것도 낮추어 부르는 호칭으로는 단연 노년에 관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참 묘한 일이다. 청년은 물론이고 중장년도 그렇게 많은 호칭을 갖고 있지는 않다.

물론 노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도 있다. 노장(老丈), 노친, 영감님, 어르신 등은 예절을 다한 말들이다. ‘영감’이란 낱말은 그 자체로도 신세와 처지가 높아졌다 내려앉았다 해서 종잡기가 어렵다.

영감은 원래 정삼품과 종이품의 높은 벼슬아치, 그러니까 조선왕조의 고급관리를 일컫던 말이었다. 그게 근세에 들어서는 노인을 지칭하게 되었는데, 그만 당치 않게 말썽이 따라 붙었다. 영감님, 영감마님은 좋은데 영감쟁이, 영감태기라고 부르면, 그만 인간 하등품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듯이 노인을 부르는 호칭중에는 음양이 다르고, 좋고 궃음이 확연히 다른 말들이 적잖이 있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 그것은 다른 나이층과는 달리 노년층일수록 문제가 많아서 주위의 관심도 크다는 의미인 것 같다. 노년일수록 인생의 어렵고 힘겨운 국면을 많이 갖게 되는 한편, 높이 받들어 후하게 대접해야 할 면도 적지 않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런데 늙다리와 늙정이라는 두 낱말은 늙은이를 천대하는 호칭 중에도 유달리 질이 좋지 않다. 노년을 여간 천대하고 있는 게 아니다. 둘 다 천하고도 천하다.

모르긴 해도 늙다리의 ‘다리’는 키다리, 꺽다리, 작다리 등에 쓰이는 다리와 같은 것이다. 키 큰 사람을 놀리는 게 키다리와 꺽달이다. 키 작은 사람을 우습게 여겨서 부르는 말이 작다리이다. 사람에게 접미사인 ‘다리’를 붙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구닥다리의 ‘다리’쯤 되면 꼴이 더 초라해진다. 낡아빠지고 시대에 뒤떨어진 게 바로 구닥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다리가 하필이면 다른 나이층을 다 젖혀두고 노년에게만 흉하게달라붙어 있다니!

한편 늙정이의 ‘정이’는 어디서 어떻게 유래된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정이가 접미사로 붙은 말이 따로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억지로 들추어 보면 ‘식정이’ 정도가 있는데, 이건 산나무에 시든채로 매달려 있는 잔가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좋은 걸 가리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북한강의 시작점에 위치한 강원도 인제에서 물살을 따라 뗏목을 서울까지 저어오던 남정네들은 그 먼 기간의 중간 중간에 쉬어가거나 묵어가는 주막집의 여인네들을 삭정이라고 불렀다. 여인네들은 술만 판 게 아니었다.그들은 때로 웃음도 팔았으니 삭정이란 말에 예븐 뜻이 담겼을 턱이 없다. 그 삭정이의 ‘정이’와 늙정이의 ‘정이’가 서로 통한다면 그건 노년의 체면을 말도 안 되게 구겨놓을 것이다.

거기 더해서 늙다리와 늙정이는 여간 늘큰거리는 게 아니다. ‘늘컹거이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는 ‘늘큰거리다’는 무엇이 너무 물컹하고 짓눌려서 늘어질 대로 늘어지고 처질대로 처졌다는 뜻이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든 노년들의 살갗은 불행하게도 작잖게 늘큰거리게 마련인데, 그래서 그들을 늙은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물건 말고 사람이 늘큰한 것이 늙음인지도 모른다.

반면 노친이라는 말에는 상당한 존경의 뜻이 묻어 있다. 노덕(老德)은 나이가 많고 덕을 쌓았다는 뜻으로 노승(老僧)을 존경해서 부르는 말이다. 노친이나 노덕에는 늙다리나 늙정이가 지닌 고약한 의미는 없다.

그런 노친이나 노덕과 나란히 모셔질만한 것이 다름 아닌, 영감님과 어르신이다. 그러니 영감님과 어르신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어깨에 힘을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중년이나 장년을 보고 젊은이들이 더러 어르신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어른신이란 경어를 들을 만한 사람은 환갑 진갑 다 넘긴 노년이라야 한다.

그렇다. 바라건데 노년들은 누구나 어르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영감님이 되고 영감 어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열규 지음 <노년의 즐거움> 비아북 간행 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