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어느 탈북자의 이야기/2021년 3월 1일>

<어느 탈북자의 기적같은 이야기>

지난 60여년 동안 세계적으로 억압받는 기독교인들의 사정을 세상에 알리고 지원하는 일을 중점적으로 해온 선교단체 ‘Open Doors’는 기관지 <Presence> 2021년 1,2월 호에서 북한에서 억압받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특집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계제된 한 기독교인의 북한집단구치소 생활에 이어 어느 탈복자의 기적같은 이야기를 번역하여 소개합니다.


성 경- 가장 위험한 책

희는 김일성에 관해서는 학교에서 배웠으나 하나님에 관해서는 집에서 배웠다. 그녀의 가정은 오래된 기독교 유산을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은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녀는 ”저의 할머니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은 후에 폐쇄해버린 침례교회의 교인이었지요. 그렇지만 할머니는 몰래 다른 교인들과 계속 모임을 가졌어요”라고 말했다.?

희가 어렸을 때 그녀의 집에서는 모임이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람들을 많이 접촉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집에 들낙거리는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리집의 한 작은방에서 모 이곤 했는데 그들은 거의 침묵하고 있었지요. 나같은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 놀면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이 오는지 망을 보기도 했지요. 수상한 사람이 집 근처로 오는 것을 보면 집으로 달려가서 할머니에게 알려드렸어요. 할머니는 거기 모이는 그릎의 지도자였고 설교자였지요.”

희의 할머니는 아주 오래된 중국어 성경을 그리고 할머니는 한글 성경을 가지고 계셨다. “그들은 물론 성경을 읽었고 찬송도 불렀지요 그러나 그들의 입에서는 거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요. 다른 교인들은 성경을 갖고있지 않았구요. 그들은 저의 할머니가 손으로 베껴 쓴 성경들을 돌려가며 읽었지요.”
북한에서는 성경을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저의 할머니는 성경책을 바구니에 담고 그 위에 양말이나 각종 바느질 감들을 얹저놓곤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 날 희는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못한 채 학교에 갔다. 그런데 “보안대원들이 사람들이 예배보는데 우리 집을 덮친거예요. 아버지가 체포되어 붙잡혀 갔지요

“제가 집에 왔을 때 저는 아버지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리라고 기대했는데, 저는 막내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제가 집에 올때마다 저를 직접 반겨주셨거든요.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방에 가보았으나 거기에도 안 계셨어요. 그제야 가족들이 아버지가 잡혀갔다고 말해주었지요.”

희는 비탄에 빠졌다. 그녀는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표현은 “집안이 엉망이었다”는 것이었다.

두 주 후에 희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고 운명하시기 전에 할머니는 희와 온 가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우리는 모두가 죽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하늘나라에 속해 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할머니의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 사람들이 이것을 찾으려고 왔던거야. 그러니 이것을 태워버려야 돼. 할머니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만 진실돼게 지킨다면 그러것은 괜찮다고 하셨다. 그러나 성경을 태우는 불길이 맹열히 올라가며 성경을 한장한장 태우자 ?할머니는 서럽게 우셨다.

희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얼마 안되어 희의 가족들은 보안대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우리는 아버지가 성경을 읽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 일에 필요한 책인줄만 알았다”고 이야기하자 이들은 녹음테이프를 틀어주었다. “그들은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와서 낡은 시계뒤에 녹음장치를 달아놓았던 거예요. 가족들이 아버지의 신앙에 관해 몰랐었다고 더 이상 잡아뗄 수가 없게 되었지요”.?

몇 가지 이유를 첨가해서 우리 가족들은 오지로 추방되었으나 강제노동수용소 행은 면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구해주신데 감사하였습니다. 물론 산다는게 쉽지 않았지요. 우리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었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은 초목이나 나무들을 구할 수 있는 산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먹여 살리셨지요. 우리는 우리 신앙을 지켜나갔지만 다른 신도들과의 접촉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지요. 당시에는 우리는 아무와도 접촉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성경은 물수되고 할머니의 성경은 불태워 버리고 남아있는 성경이란 그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언니가 무엇이든 기억하는 것들을? 종이에 적어서는 숨겨두고는 어려울 때마다 그것들을 찾아 읽으며 넘기곤 하였지요.”

희의 가족들은 이와같이 힘들게 초근목피로 10여 년을 살아남았다. 그러던 가운데 어느 날 어떤 남자가 그녀의 집에 나타났다. 그는 어떤 중국계 한국인 목사가 자신을 보냈다면서 “이 목사님이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우리 집을 방문했었다고 하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어쩌면 첩자일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빨리 그를 돌여보내려고만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매일 네 시간씩 걸어서 우리집에 와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다”

결국 이 사람이 중국에 있는 목사와 손전화로 통화를 하고 그 목사가 가족들에게 희의 어머니 이름을 정확히 알림으로 우리들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 목사님은 우리에게 중국으로 오라고 하시면서 중국에 있는 그의 ?교회에는 많은 탈북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어머니가 너무 연로하셨고 나도 어머니와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

그러나 목사님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희는 어머니에게 목사님의 계획을 이야기 하였다. “어머니는 자신은 너무 늙었지만 나만이리도 가기를 원한다고 하셨다. 그때는 떠나면 다시는 어머니를 볼 수 없는게 분명했다. 그러나 집에서 내어 놓고 울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도청당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었다. 그리고 집 밖에서도 울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것이기 때문이다.

희는 국경까지 여섯 시간을? 걸어야 했다.?“저는 안전하게 강을 건넛지요 목사님과 사모님이 강 저편에 차를 세워 놓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후에 그들은 그녀를 예배가 진행중인 그들의 교회로 데려갔다. “제가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계속 떠올랐지요. 그들도 오랫동안 이러한 예배를 기다렸었으니까요.”

얼마 후 희는 남한에 올 수 있었다. 희가 합법적인 난민지위를 확보하자 가족들을 찾아서 남한으로 데려오는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제게 전화가 걸려왔어요, 수화기를 들자 다시는 들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들려왔지요. 그것은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중국국경에 와 있다며 그 날밤 강을 건널거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놀랐으면서도 무척 행복했습니다.”

“나의 모든 가족들이 지금 남한에 있습니다. 꿈만 같아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

 

 


 

‘이 지옥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북한의 구치소에 수용되었던 한 기독교인의 이야기-

 

그들이 당신에게서 제일 먼저 빼았아 가는 것은 당신의 이름이다.
그 다음에는 당신의 자유를 빼았아 가고
그 다음에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빼았아 가며
그 다음에는 당신의 옷을. 그리고는 당신의 머리카락을
끝으로 그들은 당신의 햇빛을 빼앗아 가 버린다.
서서히 말라버리는 수도꼭지와 같이 마음과 육체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 둘 마저도 결국은 여기에서 뭉개져 버릴것이다.

나의 이름은 ‘42번 죄수’, 물론 이것이 나의 진짜 이름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북한의 이 형무소에 들어왔을 때 나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아침 8시만 되면 그들은 ‘42번 죄수”를 부른다. 내가 일어설 때 나는 간수들을 보면 안된다. 나는 일어나야 하지만 나의 두 손은 뒤로 하고 그들을 따라 취조실로 가야 한다. 나는 죄수들의 그림자를 볼 수 있지만 결코 내가 그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비록 똑같은 일이 매일 벌어지지만 나는 매일 여전히 두려움에 쌓인다. 그들이 “42번 죄수”를 불러낼 때마다 그들은 나를 때리고 발로 찬다. 피해가 가장 심할 때는 나의 귀를 때렸을 때인데 그런때는 종소리같은 울림이 몇 시간 내지 때로는 몇 일씩 가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그래도 살아 있다.

끝없는 취조

나는 매일 아침 1시간씩 취조실에서 취조를 받는다. 매일 아침 그들은 똑같은 질문을 한다.
“왜 중국에 갔는가?”
“그곳에서 누구를 만났는가?”
“교회에 갔었는가?”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가?”
“남조선 사람들을 만난적이 있는가?”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이러한 취조를 마친 다음 그들은 나를 감방으로 데려다 준다. 나의 감방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다. 그리고 겨울과 여름에는 온도가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다. 감방은 너무 좁고 나는 거의 누울수가 없을 지경이다.
거기에다가 사실 나는 누워있을 시간이 별로 허용되지 않앗다. 나는 주먹을 쥐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안된다. 내가 지금 살고있는 곳은 사람살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나 간수들에게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동물만도 못했다. 나는 장속에 갖혀 있었고 육중한 문들이 등뒤에서 쾅하고 닫히면 불빛마저 어두워지고 더는 밝아지지 않았다.

그들이 진실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취조실에서 내가 부인하는 것들을 통해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냐고? 그렇다. 그렇지만 아닌척 해야 한다. 만약 내가 어떤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시인하면 나는 빨리 죽든지, 천천히 죽든지 여하튼 죽기 마련이다.

비밀스런 신앙유산

내가 알고 있는 첫 번째 기독교인은 나의 할아버지였다-그 당시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일요일이면 할아버지는 나에게 집에 있지 말고 멀리 밖에 나가서 놀다오라고 아야기 하셨다. 나는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기도 싫었지만 그는 억지로 나를 내보내셨다.

내가 기근때문에 북한에서 중국으로 도망갔을때 다른 기독교인들을 처음 만낮고 그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들은 복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때 어느날 밤 나는 꿈에 할아버지를 뵈었는데 다른사람들과 함께 둥그렇게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 가운데는 성경책이 있었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꿈에서도 저는 “저도 신자에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의 목숨을 주님께 바쳤다.
여하튼, 신비스럽지만 나는 북한의 기독교 가정 출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는 중국의 어떤 거리를 지나고 있는데 검은 차가 내 옆에 와서 섰다. 나는 길을 물으려나보다 하고 생각했는데 운전수와 다른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나를 붙잡았다. 나는 반항했지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차안으로 집어넣자마자 발동을 걸고 급히 달렸다.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다.

중국유치장에서 몇 주를 지낸 후 나는 북한당국에 인계되었다. 그들은 나를 유치장으로 데려가더니 나의 옷들을 완전히 벗기고 혹시 무엇이 특히 돈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지 철저하게 뒤졌다. 그들은 나의 머리칼을 완전히 밀어버린 뒤 이 형무소의 감방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나에게 전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다른 옷을 입으라고 주었다. 아마도 이방에 있던 지난번 죄수의 것인듯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내 이름이 나온듯 ‘42번 죄수’라는 이름이 운동복에 찍혀 있었다. 나는 ‘42번 죄수’ 반열의 또 다른 참가자가 된게 아닌가 생각했다. 지난번 ‘42번 죄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죽었을까? 처형되어서? 굶어서? 아니면 매맞아서. 그것도 아니면 말라버린 수도꼭지와도 같이 그저 말라비틀어진걸까? 나는 그녀가 혹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북한의 구치소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지 그곳에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영웅적인 이야기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자서 그리고 결코 혼자만이 아닌?

나는 이곳에서는 혼자 있다. 너무나 외롭다. 물론 이곳에 다른 죄수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보는 것은 간수들의 그림자뿐이고 그들이 내 감방의 작은 창문앞을 지나갈 때 비치는 달빛과 햇빛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도뿐이다.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 뿐이다. 결코 소리를 내서는 안된다. 오직 마음속으로만 가능하다. 나는 내 머리에 적혀져 있는 노래를 부른다.

이 감방에서 내 마음은 나의 아버지를 갈망합니다
비록 진리에의 길이 거칠고 좁아도
계속한다면 밝은 미래가 보일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재난이 이 길을 때릴것이니
저로 하여금 튼튼한 요새로 가게 하옵소서.
어떻게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는지요?
나의 마음은 눈물로 이 감방에서 아버지를 열망하고 있습니다.다
아버지, 이 죄 많은 딸을 받아주시고
당신의 산같은 요새와 방패아래 저를 보호해 주소서.
당신의 평화의 날개 아래 저를 품어주시고
하늘에서 들려 오는 당신의 목소리로
매일 매일 당신의 축복속으로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이미 1년이 지났다. 내가 얼마나 오래 견디어 낼런지 나는 모른다. 어느 날, 그들이 나를 부르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 이 어둠 가운데서 죽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나의 시체를 던져버리고 새로 들어온 죄수에게 나의 죄수복을 입히고 그 새로 들어온 죄수는 새로운 ‘42번 죄수’가 되어 나의 죄수복들을 입을 것이다.
이러한 지옥을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가 의기소침해진 이곳에서 그들도 의기소침해질까?
그들도 이곳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행해지고 있는지 알고 계실 유일한 분 하나님께 울부짖을까? 그들도 나와 같이 죽어갈까?

*그러나 ‘42번 죄수’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살았다. 그녀의 삶은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었지만 그녀는 살아남아 감방에서 불려나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법정에 간다는 것은 승리한 것이다. 정치적인 ‘범죄’ 때문에 또는 예수를 따른다해서-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진 사람들은 결코 판사에 의해 선고받지 않는다. 그저 감방에서 사라질 뿐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그곳에 있다. 내가 끈질기에 부인한것이 효과를 본 것이다. 그들은 내기 기독교인이란 증거를 찾아낼 수기 없었던 것이다.

법정에는 나를 변호해주는 변호사는 없었다. 나는 간수가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재판장 앞에 섰다. 그런데 나만이 아니었다. 나의 남편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내가 늘 보던 아주 슬픈 눈으로 나를 처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울었음에 틀림없다.

나는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고 그 역시 그러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 마디도 서로 나눌 수 없었다.
재판장은 남편에게 나와의 이혼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의 대답은 나의 마음을 찢어버렸지만 그의 결정은 우리 가족들 특히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내린 것이었다. 만약 그가 나와 이혼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벌을 받을것이었다.
나는 교화소에서의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곳이 바로 내가 지금 있는곳이다.

이 수용소에서 나는 하루 12시간씩 일을 한다. 때로는 더 많은 시간을 할 때도 있다. 하루하루가 긴 악몽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제는 더이상 독방에서 혼자 있지는 않는다. 꼬박 일년 동안 격리수용소에서 지냈기 때문에 나의 피부는 한 줄기 햇볕도 쬐이지 못했다. 감방에서 나와서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운다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우리만치 굉장한 것이었다.

처음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는 무언가 움직이는 것들을 보았다. 그것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어떤 사람들은 등이 굽어지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팔이나 다리가 없기도 하였다. 있는 팔, 다리 마져도 너무나 가늘어서 성냥개비와 같았다. 나 자신도 다른 죄수들과 별 다르지 않았다.

수용소 교회?

한 달쯤 전에 나는 병에 걸려서 막사에 남아 있게 허락을 받았다. 나는 나 혼자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한쪽 구석에 있는 담요가 눈에 띄었다. 그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담요 밑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뒷금치를 들고 담요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여 보았다. 목소리는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귀에 익숙한 어조였다.

나는 갑자기 모든 것을 알게되었다. 거기에는 한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은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내 침낭이 있는 자리로 돌아와 그 후 몇 일동안 그 여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한 일주일 후 우리들은 밖에 나가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가까이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 여인 근처로 걸어가서 “여보세요, 예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라고 속삭였다.
그 여인은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여인은 누가 이말을 엿들었다면 두 사람 모두 즉석에서 처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 여인은 나에게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수용소 안에 비밀교회를 만들었다. 우리들이 만나서 안전하다 생각될때면 주기도문을 같이 기도했고 성경을 암송하고 사도신경을 함께 외웠다.
그 여인은 나보다 훨씬 용감하였다. 그 여인은 다른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이야기하기까지 하였다.

아마도 그때문에 어느 날 차가 와서 그 여인을 싣고 간듯 하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를 죽음의 캠프인 관리소로 데려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내가 그 여인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다.

나는 지금 수용소 막사에 있다. 하나님은 매 일, 매 시, 매 분 그리고 매 초마다 나와 같이 하여 주셨다. 어제 내가 석방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2년밖에 복역하지 않았다.
내가? 출소하면 처음 할 일이 남편과 아이들을 찾아 보는 것이다. 이제 우리 아이들은 무척 컷을 것이다. 지난 몇 년동안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지켜보아 주셨다. 감정이 막 터져나오려 할때도 포기하지 않도록 지켜주셨다. 나는 단지 말라버린 수도꼭지가 아니라 예수게서 생수를 부어주셔서 내가 낙담하려 할 때 계속할 수 있도록 하셨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지켜주셨고 그에게 기도하고 소리지르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아이들도 매 일, 매 시간, 매 분, 매 초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며 믿고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다.

*이 수기는 실화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것으로 ‘42번 죄수’의 이야기는 북한에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실화란 것을 밝힌다. <Open Doors>에 의하면 현재 5만명 내지 7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북한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