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교회사 산책 15/2020년 9월 15일>

<교회사 산책 18>

 

신약성경 27권은 언제 정경으로 채택되었나?

기원 2세기가 마감되던 시기까지 초대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던 기독교의 경전은 구약성서였다.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퍼져나갔던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예수께서 안식일이면 회당에서 읽으셨던 유대교의 경전을 읽고 사도들이 전해주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 후서 3장 16절에서 말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을 때 모든 성경이란 물론 구약성경을 의미하였다.

그런 가운데 바울 서신들이 기원 48년부터 58년 사이에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뒤를 이어 <마가복음(60-70년 경)>, <마태복음(70-80년 경)>,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80-90년 경에 그리고 <요한복음(90-100)>이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러한 바울 서신과 사복음서가 공식적으로 기독교의 경전으로 인정된 것은 후대의 일이었다.

초기 이스라엘의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데는 별 이견이 없었지만 후에 신약성경에 포함된 사 복음서와 바울서신들 역시 무언가 특별한 책이라고들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베드로와 같이 바울서신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베드로는 그럼에도 바울의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믿음이 굳세지 못하거나 무식하여 바울의 생각을 왜곡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베드러 후서 3:16) 여기에서 베드로가 기독교인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구약성경 이외에 다른 문서 내지 경전이 필요하다고 깨닫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유대교에서는 어떤 책들이(구약성경을 말함)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로 쓰여진 것이고 어떤것들이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명백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이단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들과 그렇지 않은 책들을 구분해야 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교회가 경전임을 확인하는‘기준’으로 두 가지를 내세웠는데 첫째는 사도들의 증언에 근거하였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에서 즐겨 사용되는 내용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도와의 관계에 관한한 초대교회에서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비록 바울이 생전에 예수를 만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일은 없지만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직접 만났고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오는 것과 같은 그의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그 어느 사도들 보다 더욱 훌륭한 사도의 규범이 되었던 것이다.

마가의 복음서는 사도 베드로와, 누가복음은 사도 바울과 연관이 있는 복음서로 경전의 자리를 굳혔는데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후 기독교인들은 사도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 복음서의 증언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책들이 교회에서 얼마나 사용되었느냐?에 관한 기준은 “만약 교회들이 이 문서를 많이 사용하고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면 이 문서는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로 쓰여진 책이라면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킬 것이며 영감 없이 쓰여진 책이라면 사라지고 말것이라는 매우 실용적인 판단이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 기준만으로는 이 책들이 경전이 될 수 있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뻔뻔스럽게도 많은 이단사상을 주장하는 저술들이 사도들의 이름을 가지고 나타났고 거기에다 어떤 교회들은 이러한 저서들을 함부로 인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2세기 말엽까지에는 사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의 편지들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높이 평가받앗다. 물론 공식적인 ‘명단’은 없었지만 교회들의 대세는 이들이 영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데로 기울고 있었다. 이그나시우스, 로마의 클레멘트, 폴리캅 같은 영향력 있는 감독들이 이들 책들이 널리 수용되도록 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히브리 서, 야고보 서, 베드로 후서, 요한 2,3,서, 유다 서, 계시록 등을 놓고서는 논쟁이 분분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단종파들의 잘못된 해석이나 주장때문에 정통기독교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신약성서 정경화 작업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신약경전을 위한 첫 번째 시도는 2세기 중반의 말시온에 의해서였다. 그는 구약성경의 가치를 부정하고 바울서신 가운데 10개만을 인정, 복음서는 누가복음만을 포함하는 정경안을 기원 144년에 제시하여 자체적으로 사용하였다. 이단이 된 이들은 후에 자신들만의 “비서(秘書)”라는 것을 정경에 집어넣고 거기에 사도들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단들의 준동에 자극받은 정통교회에서는 정경화 작업에 박차를 가해 200년 경에 로마교회의 <뮤라토리안 정경>이라고 하는 최초의 초대정교회의 성경목록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는 현재의 신약성경 전부와 <베드로의 계시록>과 <솔로몬의 지혜서>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명단들이 나타났는데 몇몇 소수의 책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끝까지 문제가 되었던 책들 가운데는 헐마의 목자, 다다케, 바나바의 편지 등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좋은책이기는 하지만 영감을 받아 쓰였다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고 하여 탈락되었다.

3세기 말부터 시작하여 4세기에 접어들면서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 기간동안 수많은 기독교 문서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신약성경의 정경화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정경 채택을 통해 기독교 문서들을 보존하고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2-3세기 동안에 이단 사상의 도전을 받아가며 서서히 경전의 모습을 갖추어 가던 초대교회는 4세기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경전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거기에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서기 312년)에 따른 친 기독교 정책 등이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다.

서기 363년 초대교회 역사상 최초로 기독교의 정경 채택을 위한 회의가 라오디게아에서 열렸다. 여기에서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26권이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4년후인 367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매우 영향력이 있는 아다나시우스 감독은 그의 부활절 편지에서 요한계시록을 포함한 27권의 책들을 경전으로 지명하면서 이후로는 그 어떤 책도 기독교경전으로 간주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물론 아다나시우스의 명단으로 경전문제가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397년 칼테지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의 명단을 추인함으로 서방교회에서는 서서히 경전문제가 확정되었다. 결국 아다나시우스의 명단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 후 전 세계의 교회들은 그의 지헤로운 결정을 수용하였다. 드디어 300여년 동안 진행되던 정경화의 과정이 일단락되고 신구약 성서 66권이 최종적으로 기독교 경전으로 채택되었다.

 

 


 

세상을 파괴시켰던 역병들

-역병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반응-

대럴 아문센


밤에 찾아드는 공포를 두려하지 않고
낮에 찾아드는 화살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흑암을 틈타서 퍼지는 염병과
백주에 덮치는 재앙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시편 91:5-6)

인류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많은 공동체들이 널리 유행한 전염병에 의해 고통을 받다가 진정되거나 아니면 장기전이 되면서 더 이상 특별히 생명을 위협하지 않게 된것을 알 수 있다. 요즈음에 와서 우리들은 그것들을 전염병이라고 부르는데 “염병” 또는 “악질”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축복이냐 저주냐

기독교신학에서는 전형적으로 병의 자연적인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한편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치를 인정하고 자연과 역사의 영역에서 다같이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헤아리기 어려운 섭리를 주장한다. 전염병은 널리 퍼지고 인간에게 큰 고통을 주기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전통적으로 그것들을 하나님의 분노의 증거이든가 종말의 징후로 보았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에짚트 사람들에게 염병을 벌로 내리셨으며 다양한 이스라엘 족속의 원수들에게도 병을 재앙으로 내리셨고, 히브리인들이 에짚트를 떠난 후에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에게 충실하면 축복을, 하나님의 사랑에 배반하면 고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러한 약속은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반복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위협은 칼과 기근과 역병(예례미아서에만 14번 언급되었다.) 3총사였다. 종말에 관한 언급에도 역병과 악질을 경계하라고 경고하였다. “”주께서는 역병으로 에짚트를 치시리니 그는 치기도 하시며 고치시기도 하시리라”(이사야 19장 22절)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모든 민족을, 주께서 다음과 같은 재앙으로 치실 것이다. 그들이 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살이 썩고,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혀가 입 안에서 썩을 것이다.(스가랴 14장 12절)”

이러한 주제는 신약성경의 종말에 관한 기록에서도 역시 찾아 볼 수 있는데 계시록 15장에 나오는 일곱 역병을 몰고 오는 일곱 천사에서 볼 수 있다 .
기독교 초기에는 자연재해(역병도 포함)들 때문에 크리스천들이 박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는데 이유는 로마의 신들을 부인하는 “무신논자”들(크리스천을 의미함)에게 관용을 베풀어 로마의 신들이 분노햇기 때문에 자연재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끝

서기 541년에서 767년 사이에 16차례 이상, 역병이 유럽을 습격했는데 그 결과 처음에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교도의 습관으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역병들 때문에 회개를 자극하고 새로운 종교의식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늘어났다. 그리고나서 몇 세기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유럽에서 1348-1349년 쥐가 가져온 병균에 의해 전파된 흑사병이 엄습하여 강타하였다. 이태리에서 흑사병에 살아 남은 한 사람의 기록을 보면

죽은 가족들을 신부나 종교인이 없이라도 개천에 가져다 버린 사람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 . .밤낮을 가릴 여지가 없이 수 백명씩 죽어나갔다. , , , 나 Agnolo di Tura는 나의 자녀 다섯명을 내 손으로 직접 파묻었다. 흙을 제대로 덮지못한 무덤들이 많아서 개들이 파헤친 시체들이 도시에 널려 있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하여 우는 사람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것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

흑사병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게 시도되었고 그럴듯 했지만 치료하는데는 별 효과가 없었다. 진단하고 치료하려는 교회의 노력은 도덕적이고 영적이어서 때로는 의학적인 충고나 일반 치료책들과는 상치되기도 하였다. 공동체에서는 폭력집단, 약자계층, 그리고 편견이 많은 그릎 등에서 특히 유대인들에게서 희생양을 찾았다.

간헐적으로 역병이 16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흑사병에 대한 인기있는 반응이나 그에 따르는 고통은 때로는 기사들에 대한 회개의 요구에서부터 자포자기하여 방탕한 사람들에 대한 회개의 강조로 진짜 병균에 대한 이해나 병에 대한 의학적 이해를 계속 피해갔다. 성직들은 최고의 약이요 치료제로 회개를 강조하였고 의사들이나 보건관계자들이나 정부의 관료들은 제한적인 억제책들을 강조하였다. 성직자들이나 의료 종사자 그리고 정부 관리 등 세 그릎이 일치한 것은 유행병은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들의 일반적인 죄나 특별한 죄에 대해 내린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후에 성병으로 알려진 유행병이 1494년에 창궐했을 때 그것이 성과 관계되어 전파되는 것이 분명한데도, 의료진이나 정부관료들은 다같이 성병을 사회의 다양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7세기에는 천연두가 널리 퍼지기 시작하여 18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리고 19세기에 코레라 유행병이 발생하였다. 비록 천연두는 처음에는 신학적 설명의 주제가 되었으나 그 연관성이 곧 효과적인 예방 수단이 발달하면서 곧 사라져 버렸다. 천연두와의 싸움은 북미에서는 퓨리탄 목사인 Cotton Mather 목사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그는 우두접종에 의한 접종을 촉진하였다.
그는 몇몇 의료계 전문가들과 유명한 신문발행인인 제임스 프랭클린(벤자민 프랭클린의 형)의 반대에 부딪쳤다. 그들은 절차가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뜻에 개입하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접종기술를 찾아 대치하게되자 성직자들과 의료진들이 다같이 받아들였고 매더를 앞장서서 반대하던 William Douglas 도 동의하였다.

하나님의 심판

19세기 초 코레라 유행병의 발생은 또다른 회개운동과 도덕적인 개혁운동을 유발하였다. 1835년 한 장로교회의 신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는 코레라는 무절제하고, 감사할 줄 모르며 안식일을 범하는 죄많은 국가, 인디안들을 착취하고 망쳐 놓았으며 아프리칸들을 노예로 만들고 정당하고 바른 대우를 해주지 않은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본다. 코레라는 그것이 온 곳으로 돌아 갈 것이다. 그러나 충고하노니, 죽음을 각오하라. 죽음이 네 문앞에 서있다. 네 죄를 회개하라.


그러나 1860년대 까지에 코레라는 오염된 상수원에서 온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향상된 위생시설이 유일하고 확실한 예방책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다음 10여년 동안에 병이 세균에 의해 전파된다는 이론과 함께 세균학자들로 하여금 전염병을 포함해 모든 병들의 세균학에 정진하도록 하였다.

우리의 초점이 종두와, 위생시설, 그리고 세균이론 등으로 옮겨지면서 병에 대한 신학적인 설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HIV/AIDS 를 당해서 현대의학의 확실한 안전에 의문이 생기고 새로운 코로나바이러스의 어려움이 새롭게 부각되자 전염병의 의미에 관한 관심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기독교 전통안에서는 비록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은 신의 섭리의 미묘함에 의해 인간이 다 이해하지 못하게 숨겨져 있지만 병을 자연적인 용어로 그 원인을 설명한다고 해서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갖는 믿음과 두려움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할 것이다.

*Christian History Magazine 135호에서 >

*Darrel W. Amundsem은 Western Washington University 의 명예교수로 <Medicine, Society and Faith in the Ancient and Medieval World>의 저자이다.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 하나님의 심판(?)

유 재 덕

1340년대에 들어서자 페스트가 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페스트에 전염된 사람들은팔과 다리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냄새가 고약한 고름이 흐르다가 죽었기 때문에흑사병라고도 불렀다. 전염병의 정확한 전파경로는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지만, 의학계에서는 몽골 기마병을 유력한 후보로 꼽고 있다.

몽골 기마병이 흑해 북쪽에 있는 제노바의 무역기지 카파를 공격해 왔다. 3년간 지루하게 전투를 벌이던 몽골군 진영에서 페스트가 펒졌다. 지니백이라는 이름의 우두머리는 몽골군의 부패한 시체들을 투석기를이용해서 성 안으로 날려보내도록 지시했다. 지옥과도 같은 성을 겨우 빠져나온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1347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마자 페스트로 인해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펜스트는 동방지역에서 계속 확산되어서 이슬람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상인들이 제노바와 피사를 거쳐서 이탈리아에 상륙하면서 페스트 역시 함께 들어 왔다.

이탈리아에서도 죽음의 광풍이 불었다. 수백 명이 죽은 시에나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밤낮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서 그들 모두 . . . 구덩이에 던져 넣고 덮었다. 그리고 나는 . . . 다섯 명의 우리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 .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가 세상의 종말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1348년에 흑사병이 플로렌스에 닥쳤을 때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처음 병에 걸리게 되면 . .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종기가 생겼는데,이런 종기 중 어떤 것은 사과 크기만큼 자라났고, 다른 어떤 것은 달걀 정도만 했다. 사람들은 이 혹을 페스트 종기라고 불렀다.” 같은 해에 흑사병은 프랑스를 휩쓸었고, 1349년에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해서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그리고 계속해서 1350년에는 북유럽을 거쳐서 아이슬란드와 러시아까지 피해를 입혔다.

유럽을 휩쓴 흑사병 때문에 1400년경의 유럽 전체 인구는 흑사병 발생 이전에 비해서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전체 주민의 88%가 목숨을 잃었다. 파리는 하루에만 무려 800명이 흑사병으로 죽어 갔다. 플로렌스에서는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체들이땅에 묻히지 못한 채거리에서 썩어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종은 울리지 않았고, 누가 목숨을 잃어도 눈물을 흘리는 법이 없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의 희생자들은 두 볼에 불그레한 반점들(‘하나님의 표시’)이 생겨 났고 죽어가면서 재채기를 했다. 사람들은 사체에서 풍기는 악취를 가리기 위해서 주머니에 꽃을 채우고 모여들었다. 그러면 부모는 죽은 자식을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 “얼굴에는 반전, 주머니에는 꽃이 가듣, 에취! 에취! 우리 모두 망했구나!” 아침마다 시신을 수거하는 수레가 마을을 돌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내다 버렸다.

보카치오는 당시 사람들이 네 가지 방식으로 페스트에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첫째 부류는 지방이나 외진 곳으로 피신해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절제하며 지냈다. 이것은 주로 상류층 귀족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아비농의 교황도 흑사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뒤로는 누구도 쉽게 궁전에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부류는 세상에 종말이 닥친 것처럼 난잡한 파티를 벌이면서 몸을 마구 내굴렸다. 셋째부류는 웃옷을 벗은채 쇠붙이가 달린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면서 여러 마을을 행진했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흑사병이 더 쉽게 전파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넷째 부류는 공포를 타인들에게 투사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유대인들이 흑사병의 전파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마자 도시마다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남김없이 살해하거나 불을 질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은 수그러들 기미르 보이지 않았다.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한 가운데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수습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교회의 절대권력을 붕괴시켰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당시대가 범한 죄의 결과, 더 구체적으로는 교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했다.

*유재덕 지음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브니엘 출판사

 


 

‘황제 기독교 시대’를 연 콘스탄티누스

김 상 근


기원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함락된 후 팔레스타인에서 지중해 연안의 로마와 그리스 문명권으로 흩어져서 박해를 받으며 유대종교의 한 분파로 하층민들을 상대로 소수종교의 모습을 유지하던 기독교가 312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로마제국과 황제의 후원을 받는 ‘다수의 종교’가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280년경 나이수스(Naissus)에서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또는 시저라고도 부른다)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293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오도라와 결혼하기 위해 첫 부인 헬레나와 결별하였는데 이 비운의 여인 헬레나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모였다. 어머니의 운명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유년기부터 복수와 음모가 판을 치던 로마정치의 한 복판에서 성장하면서 정치적 감각을 익혔다.

어린 시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8년 통치) 황제의 로마궁정에서 그의 부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볼모로 잡혀 지내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자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만과 술책과 같은 정치적 기술을 일찍부터 터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로마제국은 2명의 카이사르(Caesar)와 2명의 아우구스트스( Augustus)가 4분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갈레리우스(305-311) 황제의 경호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젊은 콘스탄티누스 장군은 부친의 사망(306년) 이후 로마제국의 북쪽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로마제국의 새로운 카이스르임을 선포하고 경쟁자였던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로마를 향해 진격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서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아우그스트스로 등극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막센티우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장군 휘하의 9만 명의 보병과 8천 여명의 최정예 기병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서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막센티우스의 본거지인 로마를 향해 진격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가 로마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막센티우스는 중요한 전략적 실수를 범한다. 로마를 거점으로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공격을 막기보다는 직접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출장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을 내린 312년 10월 28일은 마침 막센티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지 6년째 되는 기념일로 그는 황제취임기념일이 특별한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막센티우스의 오판으로 패전으로 이어졌다.

이날 내려진 막센티우스의 전략적 실수에 대해 초대교회의 역사가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막센티우스의 오판과 패전으로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황제로 취임하면서, 로마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를 떠난 막센티우스 군대는 티버강을 사이에 두고 콘스탄티누스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 강에는 기원전 109년에 건축되어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밀비안 다리(Milvian)가 있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여기에서 또 다른 중요한 군사적 실책을 범한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밀비안 다리 옆에 임시 가교를 설치하였지만 막센티우스 군사들이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막강한 전력에 밀려 후퇴하면서 가교가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군사들이 강에 빠져 죽고 막센티우스도 티버강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로마제국과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이 밀리안 다리에서의 전투는 중요한 결과를 남겼다. 막센티우스의 군사 전략적 실수와 패전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는 더 중요한 사건이 밀비안 전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목격하였으며 “이 표적으로 너는 승리하리라”는 신비의 문구를 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목격했다는 ‘신비의 환상’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네로 황제부터 시작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에 최고조에 이른 기독교 박해 시대가 끝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전환하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면서 이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펼치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였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참으로 놀라운 싸인을 보여주셨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사건을 기록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승리하신 황제는 이때 일어난 사건을 이 책의 저저인 내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황제를 알게 된 영광을 누림과 동시에 그에게 소속된 경위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가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사실임을 거듭 맹세하였다.(중략)

정오쯤 되었을 때 날이 벌써 저물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하늘에서 비치는 십자가 모양의 빛을 발견하였다. 황제는 그 신비한 싸인이 태양너머에 보였다고 말하면서 ‘이 사인으로 승리하라”는 문양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광경은 그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는데, 이를 목격한 그와 함께 주둔해 있던 군사들에게도 이 광경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황제는 깊은 번민에 사로잡혔노라고 말했다. 그 싸인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는 밤이 되어서까지 계속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스도가 꿈에 나타났는데 낮에 하늘에서 보았던 십자가 싸인을 들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이 십자가 싸인의 복제품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 적과의 임박한 전투에서 그것이 황제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동료들에게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금과 보석을 세공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가 목격한 싸인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신비의 환상은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였음과 ‘그리스도’가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임을 공식화 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관해서는 종교적으로 순수한 것이었느냐? 제국을 용이하게 통치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하는 논의들이 있지만 그가 개종한 다음해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선포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진심이었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그가 숭배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 당한 분이 아니라 위대한 로마제국에 승리를 가져다 준 구세주가 아니었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교회가 제국의 보호를 받는 소위 “황제 기독교 시대”로의 문도 열었다.

*김상근 지음 <기독교 역사>평단 간

티버강변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본 '신비한 환상' 장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 재 덕

기원 64년부터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신앙을 가지려면 그에 앞서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기원 250년 이전까지의 박해는 제한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유대교’라는 용어에 맞서 ‘기독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of Antioch)나 서머나의 폴리카르프스감독, 그리고 블란디나,페르페투아, 펠리키타스 를 비롯하 수많은 여성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순교를 겨우 모면한 젊은 여성들은 사창가로 팔려가야 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늘어갔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교회와 함께 하기 때문이란 게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지중해 일대 사람들에게 이전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영적 관심과 삶의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 역시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제시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종교 교훈을 빼놓는다면 급속한 성장의 배경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일종의 도덕적 지침을 제시했다. 2세기 중반이 되자 로마 당국은? 유대인과그리스도인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도덕법을 접한 적이 없는 시민들도 그랬다. 시민 가운데 유대교가 주장하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할례의 끔찍한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유대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회당에 재정적 도움을 베푸는 선에서 만족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는 그 틈새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방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고통스러운 할례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커다란 매력이었다.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우월한 도덕적 행동은 법이나 관습, 혹은 계급에 근거한 윤리보다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종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도시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면 빵과 서커스에 돈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게 마땅하다고 가르쳤고 그대로 실천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평등을 실천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견해는 로마인들의 그것과 분명히 달랐다. 로마인 가장들은 가족 모두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을 갖는 것은 물론, 장애자처럼 원하지 않는 아이기 태어나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채 내다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기독교 교회를 이끌어가는 남성들은 여성에게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할 정도로 부유한 여인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기독교 공동체가 여성을 존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성을 존중하던 예수님의 교훈과 삶을 그대로 실천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여성을 열등하게 간주하는 유대인 남성들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랍비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직접 대화하고 가르쳤다. 여성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접했을 때도 역시 누구보다 먼저 믿고 사람들에게 전했다. 세얼이 흐르고 교회의 직제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는 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여성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동역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인 신을 제시했다. 로마의 신들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비인격적 존재였다. 반면에 기독교는 신적존재와의 직접적인 교제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무엇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간주했다. 이것은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골의 리옹에서는 블란다나(155?-177)라는 장애인 여성 노예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분향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항한 것이다.병사들은 그녀를 경기장으로 끌고 가 벌겨벗긴채 십자가에 매달고 굶주린 맹수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맹수들이 그녀를거들떠 보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녀를 채찍질하고불에 달군 석쇠에 올려놓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황소우리에 내동댕이 쳐 황소들에게 들이 받치고 말았다. 블란다나는 결국 이렇게 순교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그리스도인들은 불란다나의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를 목격했다. 자신들처럼 야유를 당하고, 고통을 겪고, 슬퍼하시던 예수님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신체의 고통은 오히려 용기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에도 3세기 초반에 박해가 몰아닦쳤다.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145-211 재위)의 칙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페루페티아를 비롯해 다섯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로마 당국은 연료한 아버지를 내쉐워 이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이때 페르페투아는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죽음이 기다리는 원형경기장으로 걸어 나가서 서툰 검투사의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그래서 고통의 강도가 심해지면 질수록 그만큼 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예수님과 하나됨을 극적으로 경험했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은 그들과 예수님을 잇는 매개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테르투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재덕 지음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브니엘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