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교회사 산책 15/2020년 7월 15일>

<교회사 산책 16>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 하나님의 심판(?)

유 재 덕

1340년대에 들어서자 페스트가 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페스트에 전염된 사람들은팔과 다리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냄새가 고약한 고름이 흐르다가 죽었기 때문에흑사병라고도 불렀다. 전염병의 정확한 전파경로는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지만, 의학계에서는 몽골 기마병을 유력한 후보로 꼽고 있다.

몽골 기마병이 흑해 북쪽에 있는 제노바의 무역기지 카파를 공격해 왔다. 3년간 지루하게 전투를 벌이던 몽골군 진영에서 페스트가 펒졌다. 지니백이라는 이름의 우두머리는 몽골군의 부패한 시체들을 투석기를이용해서 성 안으로 날려보내도록 지시했다. 지옥과도 같은 성을 겨우 빠져나온 이탈리아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1347년에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마자 페스트로 인해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펜스트는 동방지역에서 계속 확산되어서 이슬람 지역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일부 상인들이 제노바와 피사를 거쳐서 이탈리아에 상륙하면서 페스트 역시 함께 들어 왔다.

이탈리아에서도 죽음의 광풍이 불었다. 수백 명이 죽은 시에나에서는 살아남은 사람이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밤낮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서 그들 모두 . . . 구덩이에 던져 넣고 덮었다. 그리고 나는 . . . 다섯 명의 우리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 .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모두가 세상의 종말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14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1348년에 흑사병이 플로렌스에 닥쳤을 때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하게 소개했다. “처음 병에 걸리게 되면 . . .사타구니나 겨드랑이에종기가 생겼는데,이런 종기 중 어떤 것은 사과 크기만큼 자라났고, 다른 어떤 것은 달걀 정도만 했다. 사람들은 이 혹을 페스트 종기라고 불렀다.” 같은 해에 흑사병은 프랑스를 휩쓸었고, 1349년에는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해서 인구의 절반을 앗아갔다.그리고 계속해서 1350년에는 북유럽을 거쳐서 아이슬란드와 러시아까지 피해를 입혔다.

유럽을 휩쓴 흑사병 때문에 1400년경의 유럽 전체 인구는 흑사병 발생 이전에 비해서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전체 주민의 88%가 목숨을 잃었다. 파리는 하루에만 무려 800명이 흑사병으로 죽어 갔다. 플로렌스에서는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사체들이땅에 묻히지 못한 채거리에서 썩어갔다. 어떤 사람은 이런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종은 울리지 않았고, 누가 목숨을 잃어도 눈물을 흘리는 법이 없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흑사병의 희생자들은 두 볼에 불그레한 반점들(‘하나님의 표시’)이 생겨 났고 죽어가면서 재채기를 했다. 사람들은 사체에서 풍기는 악취를 가리기 위해서 주머니에 꽃을 채우고 모여들었다. 그러면 부모는 죽은 자식을 위해서 노래를 불렀다. “얼굴에는 반전, 주머니에는 꽃이 가듣, 에취! 에취! 우리 모두 망했구나!” 아침마다 시신을 수거하는 수레가 마을을 돌면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부모를 내다 버렸다.

보카치오는 당시 사람들이 네 가지 방식으로 페스트에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첫째 부류는 지방이나 외진 곳으로 피신해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절제하며 지냈다. 이것은 주로 상류층 귀족들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아비농의 교황도 흑사병에 걸렸다가 회복된 뒤로는 누구도 쉽게 궁전에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둘째부류는 세상에 종말이 닥친 것처럼 난잡한 파티를 벌이면서 몸을 마구 내굴렸다. 셋째부류는 웃옷을 벗은채 쇠붙이가 달린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때리면서 여러 마을을 행진했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흑사병이 더 쉽게 전파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넷째 부류는 공포를 타인들에게 투사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유대인들이 흑사병의 전파와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마자 도시마다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남김없이 살해하거나 불을 질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은 수그러들 기미르 보이지 않았다. 뚜렷한 대책을 찾지 못한 가운데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수습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교회의 절대권력을 붕괴시켰다. 사람들은 흑사병을 당시대가 범한 죄의 결과, 더 구체적으로는 교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했다.

*유재덕 지음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브니엘 출판사

 


 

‘황제 기독교 시대’를 연 콘스탄티누스

김 상 근


기원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함락된 후 팔레스타인에서 지중해 연안의 로마와 그리스 문명권으로 흩어져서 박해를 받으며 유대종교의 한 분파로 하층민들을 상대로 소수종교의 모습을 유지하던 기독교가 312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로마제국과 황제의 후원을 받는 ‘다수의 종교’가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280년경 나이수스(Naissus)에서 로마제국의 카이사르(또는 시저라고도 부른다)였던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293년에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오도라와 결혼하기 위해 첫 부인 헬레나와 결별하였는데 이 비운의 여인 헬레나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모였다. 어머니의 운명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유년기부터 복수와 음모가 판을 치던 로마정치의 한 복판에서 성장하면서 정치적 감각을 익혔다.

어린 시절,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 박해자로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8년 통치) 황제의 로마궁정에서 그의 부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볼모로 잡혀 지내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환경에서 자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릴 때부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만과 술책과 같은 정치적 기술을 일찍부터 터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로마제국은 2명의 카이사르(Caesar)와 2명의 아우구스트스( Augustus)가 4분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갈레리우스(305-311) 황제의 경호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젊은 콘스탄티누스 장군은 부친의 사망(306년) 이후 로마제국의 북쪽 변방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스스로 로마제국의 새로운 카이스르임을 선포하고 경쟁자였던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주둔해 있는 로마를 향해 진격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명실상부한 서 로마제국 전체를 통치하는 아우그스트스로 등극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막센티우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장군 휘하의 9만 명의 보병과 8천 여명의 최정예 기병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서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막센티우스의 본거지인 로마를 향해 진격한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가 로마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막센티우스는 중요한 전략적 실수를 범한다. 로마를 거점으로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공격을 막기보다는 직접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출장하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을 내린 312년 10월 28일은 마침 막센티누스가 황제로 취임한 지 6년째 되는 기념일로 그는 황제취임기념일이 특별한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 기대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막센티우스의 오판으로 패전으로 이어졌다.

이날 내려진 막센티우스의 전략적 실수에 대해 초대교회의 역사가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막센티우스의 오판과 패전으로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황제로 취임하면서, 로마 기독교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를 떠난 막센티우스 군대는 티버강을 사이에 두고 콘스탄티누스 군대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 강에는 기원전 109년에 건축되어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밀비안 다리(Milvian)가 있다. 막센티우스 황제는 여기에서 또 다른 중요한 군사적 실책을 범한다. 그는 자신의 군대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밀비안 다리 옆에 임시 가교를 설치하였지만 막센티우스 군사들이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막강한 전력에 밀려 후퇴하면서 가교가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군사들이 강에 빠져 죽고 막센티우스도 티버강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로마제국과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이 밀리안 다리에서의 전투는 중요한 결과를 남겼다. 막센티우스의 군사 전략적 실수와 패전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바꿔놓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에서는 더 중요한 사건이 밀비안 전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것이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목격하였으며 “이 표적으로 너는 승리하리라”는 신비의 문구를 본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목격했다는 ‘신비의 환상’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것은 네로 황제부터 시작되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기간에 최고조에 이른 기독교 박해 시대가 끝나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전환하는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보도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면서 이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펼치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달라고 기도하였다. 그가 이런 모습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참으로 놀라운 싸인을 보여주셨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 사건을 기록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승리하신 황제는 이때 일어난 사건을 이 책의 저저인 내게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내가 황제를 알게 된 영광을 누림과 동시에 그에게 소속된 경위도 바로 이때부터이다. 그가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줄 때에 사실임을 거듭 맹세하였다.(중략)

정오쯤 되었을 때 날이 벌써 저물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하늘에서 비치는 십자가 모양의 빛을 발견하였다. 황제는 그 신비한 싸인이 태양너머에 보였다고 말하면서 ‘이 사인으로 승리하라”는 문양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 광경은 그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는데, 이를 목격한 그와 함께 주둔해 있던 군사들에게도 이 광경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황제는 깊은 번민에 사로잡혔노라고 말했다. 그 싸인이 과연 무슨 의미일까? 그는 밤이 되어서까지 계속 고민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스도가 꿈에 나타났는데 낮에 하늘에서 보았던 십자가 싸인을 들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이 십자가 싸인의 복제품을 만들라고 지시하면서 , 적과의 임박한 전투에서 그것이 황제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동료들에게 이 놀라운 사건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금과 보석을 세공하는 사람들을 불러 그가 목격한 싸인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신비의 환상은 로마의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였음과 ‘그리스도’가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를 승리로 이끈 구세주임을 공식화 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에 관해서는 종교적으로 순수한 것이었느냐? 제국을 용이하게 통치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하는 논의들이 있지만 그가 개종한 다음해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선포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의도는 진심이었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그가 숭배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희생 당한 분이 아니라 위대한 로마제국에 승리를 가져다 준 구세주가 아니었을까?. 콘스탄티누스는 신앙의 자유뿐만 아니라 교회가 제국의 보호를 받는 소위 “황제 기독교 시대”로의 문도 열었다.

*김상근 지음 <기독교 역사>평단 간

티버강변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본 '신비한 환상' 장면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 재 덕

기원 64년부터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신앙을 가지려면 그에 앞서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기원 250년 이전까지의 박해는 제한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유대교’라는 용어에 맞서 ‘기독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of Antioch)나 서머나의 폴리카르프스감독, 그리고 블란디나,페르페투아, 펠리키타스 를 비롯하 수많은 여성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순교를 겨우 모면한 젊은 여성들은 사창가로 팔려가야 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늘어갔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교회와 함께 하기 때문이란 게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지중해 일대 사람들에게 이전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영적 관심과 삶의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 역시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제시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종교 교훈을 빼놓는다면 급속한 성장의 배경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일종의 도덕적 지침을 제시했다. 2세기 중반이 되자 로마 당국은? 유대인과그리스도인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도덕법을 접한 적이 없는 시민들도 그랬다. 시민 가운데 유대교가 주장하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할례의 끔찍한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유대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회당에 재정적 도움을 베푸는 선에서 만족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는 그 틈새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방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고통스러운 할례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커다란 매력이었다.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우월한 도덕적 행동은 법이나 관습, 혹은 계급에 근거한 윤리보다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종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도시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면 빵과 서커스에 돈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게 마땅하다고 가르쳤고 그대로 실천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평등을 실천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견해는 로마인들의 그것과 분명히 달랐다. 로마인 가장들은 가족 모두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을 갖는 것은 물론, 장애자처럼 원하지 않는 아이기 태어나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채 내다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기독교 교회를 이끌어가는 남성들은 여성에게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할 정도로 부유한 여인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기독교 공동체가 여성을 존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성을 존중하던 예수님의 교훈과 삶을 그대로 실천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여성을 열등하게 간주하는 유대인 남성들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랍비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직접 대화하고 가르쳤다. 여성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접했을 때도 역시 누구보다 먼저 믿고 사람들에게 전했다. 세얼이 흐르고 교회의 직제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는 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여성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동역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인 신을 제시했다. 로마의 신들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비인격적 존재였다. 반면에 기독교는 신적존재와의 직접적인 교제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무엇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간주했다. 이것은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골의 리옹에서는 블란다나(155?-177)라는 장애인 여성 노예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분향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항한 것이다.병사들은 그녀를 경기장으로 끌고 가 벌겨벗긴채 십자가에 매달고 굶주린 맹수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맹수들이 그녀를거들떠 보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녀를 채찍질하고불에 달군 석쇠에 올려놓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황소우리에 내동댕이 쳐 황소들에게 들이 받치고 말았다. 블란다나는 결국 이렇게 순교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그리스도인들은 불란다나의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를 목격했다. 자신들처럼 야유를 당하고, 고통을 겪고, 슬퍼하시던 예수님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신체의 고통은 오히려 용기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에도 3세기 초반에 박해가 몰아닦쳤다.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145-211 재위)의 칙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페루페티아를 비롯해 다섯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로마 당국은 연료한 아버지를 내쉐워 이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이때 페르페투아는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죽음이 기다리는 원형경기장으로 걸어 나가서 서툰 검투사의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그래서 고통의 강도가 심해지면 질수록 그만큼 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예수님과 하나됨을 극적으로 경험했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은 그들과 예수님을 잇는 매개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테르투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재덕 지음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브니엘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