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어떤 기도가 바람직 한가?/2020년 2월 1일>

어떤 기도가 바람직 한가?

김 형 석 교수

기독교의 특성은 기도하는 신앙생활에 있다. 유교의 중심은 자기반성에 있고 불교의 정신은 선(禪)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독교는 절대자이신 신께 드리는 기도가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도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바쁜 일과 중에서도 어떤 때는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드리곤 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며, 예수는 세상을 떠날 때도 계속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없는 예수의 생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도 바울도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가르쳤다. 성 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많은 선인들도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구도자나 수도사들에게는 기도가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곤 했다. 심지어는 기도의 일생을 산 사람들도 있다. 우리 주변의 개신교에서도 기도원 운동에 지나칠 정도로 열중한 때가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어떤 기도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묻게 되며 자기 나름대로 기도생활의 기준을 갖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기도가 신앙생활의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서 기도를 위한 기도에 빠진다든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에 치우치게 되면 거기에 따르는 과오와 불균형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커진다.

먼저 오랜 시간동안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이 좋다는 사고가 그런 것이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40일을 목적으로 기도를 계획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기도생활이 곧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치 기도를 하기 위해 인생이 있다는 듯이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길가에 서서 기도를 드리는 바리새파 사람
들도 있었고,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로 몇 달 씩 보내는 제사장도 있었다. 그들은 칭찬을 받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에게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좋은가를 물었고, 예수는 유명한 ‘주의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긴 기도를 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도 기도를 위한 기도에 빠져 불필요한 과오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기도자의 진심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기원내용을 다 알고 계신다고 가르쳤다. 특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는 삼가라고 주의를 시켰다. ‘나는 누구보다 기도를 잘한다’든지, ‘그 사람의 기도를 들으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다.’는 식의 생각은 옳지 못하다. 특히 공동예배 같은 시간에 내용도 없는 긴 기도를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개 그런 사람들은 개인적인 욕구를 공중 기도로 착각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기도가 될 수도 있다.

싫어하는 친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어린애의 기도가 무의미하듯 신학자들이 신학 노선이 다른 신학자가 회개하기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짐작해 보라. 참으로 우리는 드려서는 안되는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나는 최근 얼마동안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는 드리지 못하고 있다. 가까운 가족들의 건강을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다. 이기적인 욕망이 될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가족들이 건강의 축복을 받아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친구나 병중에 있는 제삼자를 위한 기도는 기 꺼이 드린다. 나의 건강을 위해 기도해주는 분들의 기도에는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그 기도는 성취될 것으로 믿으면서 살아간다.

예수는 친히 ‘주의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긴 기도보다는 내용의 깊이가 있는 기도를 드리자는 교훈이다.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한 가지 기도만으로도 우리의 모든 기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그보다 더 위대하고 존엄한 기도가 어디 있겠는가. 마지막 기도인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뜻을 충분히 깨닫고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예수는 될 수 있는 대로 홀로 조용한 기도를 드리라고 가르쳤다. 공동 기도도 있어야 하고 교회가 갖는 합동 기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나 홀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가 꼭 있어야 한다. 키르케고르는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 단독자로 서게 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다.

특히 예수는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남을 의식하거나 회중을 상대로 하는 기도는 수정되어야 한다는 뜻을 보여주었다. 물론 예수 자신은 밤새도록 기도를 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밤을 새우는 긴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믿음의 스승인 사도 바울은 ‘늘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도 되고 계속해서 기도하라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 든지, 언제나 기도 드리는 심정으로 일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오래전 일이다. 목사님들과 산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었는데 한 목사님이 너무 긴 기도를 드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 기도에 참여했던 내 친구 교수가 ‘기도도 장소와 때를 따라 달라져야지 자기 기분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면 어떻게 하나’라도 불만을 이야기하던 생각이 난다. 유명한 어떤 목사님의 사모님이 목사님과 데이트를 할 때, 커피 잔을 놓고도 기도하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도도 그런 형식적인 대화의 내용이 되면 기도의 뜻이 약화되지 않을 까?

내가 잘 아는 미국의 한 목사는 공동식사를 할 때 기도 드리는 일이 없었다. 내가 웃으면서 ‘당신은 목사인데 식사기도를 드리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기도 안 드려도 주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면서 웃었다. 그러나 이 목사는 가정에서 가족들이 식사할 때나 자기 혼자서 식사를 할 때는 짤막하고도 경건한 가도를 드렸다. 바울 사도가 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격식이나 형식의 노예가 되지 말고 기도를 드리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임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생활의 최선의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가 다 같은 기도생활을 할 수도 없는 법이다.

나는 나의 생활을 정리해 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대로 길지 않은 기도를 드린다. 그 기도 속에는 오래 계속해온 기도가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평화로운 통일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드린다. 그 다음에는 나에게 주어진 일이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결과가 되고, 내가 머물고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깃들기를 기도 드린다. 그리고 가까운 몇 가지 일과 사람들을 위해 기도드린다. 그때그때 사회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린다.

더불어 하루를 지나는 동안에 몇 차례씩 ‘주의 기도’를 마음으로 드리곤 한다.차 안에서 또는 강연과 강의를 앞에 두고 잠시 기도를 드린다. 하루의 일이 끝났을 때 잠들기 전에 기도를 드린다. 대체로 긴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 . .

물론 나보다 더 많은 기도를 드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나보다 더 적게 기도를 드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잘 아는 선배교수 한 사람은 남이 보는 앞에서는 기도를 드리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생의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는 가족들과 더불어 기도를 드리고는 했다. 4.19혁명 때 교수 데모에 앞장 섰을 때도 가족들과 가정의 장래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떠났으며 민주주의가 병드는 것을 보았을 때 친구들에게 겨레를 위해 기도 드리자고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무의미한 기도를 자주 드리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못 된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었다.

기도를 통한 소망스러운 신앙생활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각을 정리해 본 것이다.

*김형석 지음 <어떻게 믿을 것인가 -이와우 출판>에서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