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2020년 6월 1일>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rel)과 함께(15)

노먼 빈센트 피일(1898-1993)은 목사요 저술가로 월간지 <Guidepost>를 창간하였으며 그의 저서 <적극적인 사고방식(The Power of Positive Thinking)으로 유명하다. Guidepost 재단은 <Plus-The Power of Faith>라는 격월간 소책자를 통해 피일 박사의 강연과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평안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놀만 빈센트 필-

모든 사람들이 마음 속의 평안을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이 뿌리하고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항상 원하는 내적 평안을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을 통해서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평안을 주노니 그것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는 평안이다. . . . 마음에 불안해 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사람의 말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문장가운데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이해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내적 평안, 마음의 평화, 또는 영혼의 평온함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할때면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쁘다고까지 이야기하며, 그것은 현실도피라고 말하기도 하고 , 부드럽고 조용한 삶은 살기 바라는 사람들을 마취시키는 마약을 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진리와는 거리가 먼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평안은, 그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인데, 현실도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이 세상에서의 책임들에서 도피하려는것도 아닙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책임을 지고 그것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능력의 근원인 것입니다. 나는 먼저 내적인 안정 없이 진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내면이(마음 속이) 분열된 사람은 초점이 없고, 힘도 없으며 활기도 없습니다. 에너지와 힘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심에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내적으로 듬직한 사람은 강하고 효율적인 사람입니다.

물론 이 세상의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잘못해서 피상적인 것, 거짓된 것, 환상적인 평안을 움켜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성취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그들은 심지어 스포츠나 사교칼럼 이외에는 신문을 읽는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들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사적인 세계에만 관심을 가지고 외부세상에 대해서는 그들 마음대로 돌아가라고 무관심합니다. 사회 문제나 국가적인 문제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추구하는 잘못된 방법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삶의 긴장감은 사람들로 하여금 전에는 결코 없었던 평안을 추구하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자신을 내어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갈등과 증오와, 두려움과 죄, 그리고 당신의 진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릴 때 그가 약속한 평안을 참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께서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는 평안“이란 말씀을 하셨을 때 의미했던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려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세상을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저는 자연세계에는 무수한 평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봄철에 여러분들은 활짝 피는 꽃들과, 푸르게 자라는 잔디, 무성한 나무들에 맺힌 이슬방울들과 햇볓의 평화스러운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면 가을이 오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로 만드신 자연의 경관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한 평안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산과 계곡, 그리고 바다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평화로 채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가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일한 도구는 아니며 가장 깊은 평화로 인도하는 길도 아닙니다. 조만간 우리는 모두가 자연세계의 경이를 통해 우리가 얻게되는 평안보다 더 깊은 평안이 필요하게 됩니다.

한번은 제가 비행기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승무원이 와서 “저 뒤에 계신 어떤 신사분이 선생님과 대화하기를 원하시는데 선생님이 바쁘게 일하시는 것을 보고, 저에게 혹시 비행기가 착육하기 전에 대화할 시간을 내 주실수 있을런지 좀 알아봐 달라고 하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물론이지요. 당장 오시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신사가 와서 자신의 명함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회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제가” 부사장님이시군요”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사장 바로 다음자리가 아닌가요?”라고 묻자 그는 “부사장이란 사장이 낚시하러 갈때 모든 것을 맡아하는 자리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책임이 당신에게 있다는 말인가요?”

이 한 마디는 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내 옆 빈자리에 앉아서 15분 동안이나 그가 회사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는 자신의 직업과 싸우고 있는 한 불쌍한 사나이의 처량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직업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건 힘든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모든 어려운 일들을 감내합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 신사는 “저는 매일 밤 서류가방을 챙겨 가지고 집으로 가지요. 그리고 지난 8년 동안 휴가도 한 번 못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휴가도 못갔다고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싸인입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신경이 너무 과민해져서 잠도 잘 못자고, 아내와도 자주 싸우게 됩니다”

의자에 앉아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연히 창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저는 “혹시 오늘 아침 밖을 내다보신 적이 있나요?”라고 물었고 그 사람은 “아니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지금 한번 내다보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수정과도 같이 맑게 개인날이었습니다. 하늘은 짙은 하늘색이었으며 우리가 앉은 자리에서 내다 보이는 날개의 끝 부분에서 짓푸른 하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좀 멀리 떨어진 곳에 하늘을 배경으로 부드럽게, 뭉게 뭉게 피어오르는 적운이 거대한 눈덮인 산과도 같이 세상을 뒤덮듯이 하고 있었습니다. 구름가운데 한 조각이 마치 배와도 같이 보였습니다. 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한 구름배라, 아름답지 않습니까?” 저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 모든 사람들은 하루중에 반드시 시간을 내어 하늘을 올려 보라고 이야기 하엿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에머슨의 “하늘은 영혼의 일용양식이다”란 문구를 언급하였습니다.

저의 손님은 자신의 의자에 깊숙이 들어앉으면서 “무척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낚시를 갔을 때 본 물줄기를 역류하는 송어들에 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자연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무척 침착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박사님, 무척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평온해 지는군요.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래 가지는 않을것입니다. 옛 걱정꺼리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으니까요. 저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피상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라고 말을 꺼냈습니다. 그는 괘면쩍은 얼굴이 되었습니다만 저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으시지요, 아닌가요?”

그는 그렇다고 하였으며 과연 예수를 믿고 있었다.

‘혹시 당신이 지은 어떤 죄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하고 묻자

그 사람은 살피는듯한 눈초리로 저를 잠시 쳐다보너니 “예, 저는 어떤 형태로든 풀어버려야 할 짐이 있습니다. 저는 저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버린듯 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요?”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에 관하여 그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저는 복음서의 훌륭한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시작했습니다. 별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둘만이 있었지만 우리들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 평안을 주리라고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전에 아무도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것이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 저는 그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가 한 기도는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더 낳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요. 저를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저에게 평안을 주셔서 보다 강건하게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였습니다.

후에 저는 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이 보다 깊은 평안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산을 만드는 구름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속으로 자신이 깊숙이 들어갔읍니다. 문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답에 이른다면 당신은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활절 멧세지

-놀만 빈센트 필-

나는 여러 나라에서 온 50여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이슬에 젖은 채 햇빛을 받으며 맞이했던 그 평화로운 아침을 잊지 못 할 것입니다. 나는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있는 한 공원에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바로 앞에는 바위를 파내서 만든 무덤이 있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유대 산헤드린의 멤버였던 니고데모의 무덤으로 나사렛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세상을 떠나신 후 잠시 그의 시체를 안치하였던 곳입니다.

우리는 잠시 예배 드리기 위해 앉아있으면서 돌이 치워진 채 열려져 있는 무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꽃 향기와 함께 부드러운 미풍을 맞으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만일 저더러 제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평안을 느꼈던 때를 열거해 보라고 한다면 그때 그곳을 하나로 꼽을 것입니다.

그날 아침 설교한 분은 우락부락하고 다부지게 생긴 몸매에 산전수전 다 겪어본 듯한 군목이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신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의 언어는 교회에서 듣기에는 약간 거칠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교훈을 전적으로 믿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부활을 주제로 설교하였는데 열려진 무덤 양편에 있던 광채나는 흰옷을 입은 인물들을 묘사하면서 이곳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곳이라고 말할 때 저는 갑자기 영존하는 신앙의 도약을 느꼈고 그것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부활절 아침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관하여 깊은 평안을 가져다 주는 만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몇일 후 우리는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사로가 죽어 누워있었고, 거기에서 예수께서 나사로를 불러 다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무덤 옆에 서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가능하다면 예수께서 서 계시던 바로 그 지점에 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느 지점에서는 내 발이 예수께서 서 계시던 바로 그 지점을 밟을 수도 있겠지? 생각하면서 그 일대를 걸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꺼내어 아내와 함께 예수께서 그 날 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갑자기 저는 흘러내리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저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떠남을 애도하며, 그들의 존재의 신비를 꿰뚫어 보려고 할 때 인류의 구세주이신 이 분의 감미롭고 아름다운 이 말씀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 말씀이 달리 있을까요?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는 이 우주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주는 매우 파괴적입니다. 이 우주는 아름다웠습니다만 또한 문제도 많고 슬픔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우주에 홀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크리스마스의 멧세지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이라(마태 1:23)” 입니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입으시고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겪으셨읍니다. 결국 그는 죽임을 당하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절의 멧세지는 아무도 그를 멸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움도 그를 파괴하지 못하고 그에게서 위협을 간파했던 제사장들의 어떠한 음모도 그를 파멸시키지 못했고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무가치한 정치가들의 배신도 그를 파괴하지 못했으며 죽음 마저도 그를 파멸로 몰아 넣치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를 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단순한 멧세지입니다. 그는 살아 계시고 지금도 여기에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주적인 장대한 외로움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나이를 먹어가면서 늙어갈 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하나 작별을 고할 때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고 볼 수 없다고 할 때 우리는 사라져버린 손과 귀에 쟁쟁히 남아 있는 그들의 목소리들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저는 오하이오 주 남부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습니다. 가끔 저는 그곳을 방문하여 옛 친구들을 만나곤 합니다. 미시즈 루 모리스라고 하는 미망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저의 어머니의 절친한 친구로 어렸을 때 저는 그녀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웃음 소리는 물 흐르는 듯 음악과도 같아서 무척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 지역에 갈 때마다 그녀의 조그마한 집을 방문하곤 합니다. 그녀는 우리 어머니의 사진과 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나의 형제들과 저의 사진 등 우리 가족 모두의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의 혼자 사는 생활에 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글세, 여기 나하고 같이 있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지. 주님이 여기, 나와 같이 계시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남편의 사진을 보면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마지막 날 아름다운 강가에서 다시 만나리”라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잘 아는 찬송이기에 그녀와 함께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오래 전에 같이 불렀던 “저 강 언덕에서 다시 만나리”와 같은 찬송들을 같이 불렀습니다. 인간의 삶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것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영원과 생명에 대한 신앙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크리스천들의 깊고 다정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앙이요 그들이 강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들의 사랑하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리라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절의 신앙입니다.

저는 우리가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영원과 불멸의 물줄기를 타고 있습니다. 육신이 무덤으로 들어갈 때 당신은 단지 지상에서 영혼을 담고 있던 육체적인 도구를 흙속에 묻는 것 뿐입니다. 이 복잡하고 매우 신비로운 우주를 만드신 좋으신 하나님은 이 우주를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우주는 아주 신비로운 곳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죽음 후의 삶>이라고 하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전에 쓴 어떤 글들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편지로 반응을 보여주었으며 그 가운데는 어떤 주제의 글 보다도 더 감동적인 글들이 많았습니다. 한 여인은 여러 해 전 몹시 아파서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럿을 때의 경험을 적어서 보내주었습니다. 그녀는 “나는 잿빛의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나의 침실의 문간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할머니 마저도 그 층게들을 걸어 올라 오셨다. 그들은 모두가 나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갑자기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나만 혼자 남았다. 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갔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합류했는데 -그들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나는 밖이 보이도록 좀 더 앞으로 나아갔다. 거기에서 나는 눈부시게 빛나는 하늘 아래 하얀 데이지 꽃들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다. 그리고 그 정원에는 아주 예쁜 어린 소녀가 꽃들 사이에 앉아서 꽃들을 따고 있었다.

“그때 빛을 배경으로 커튼이 떨어지더니 Mama needs me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때 잠이 깼는데 나는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처밖고 있었다. 엄마는 조그만 소리로 나를 계속 부르면서 ‘애야, 우리에게 돌아 오렴’하고 소근거리고 있었다. 그 후 병세가 호전되었고 지금 이 나이까지 살고 있다.”

그 여인은 어디에 갔다 온 걸까요.

그리고 다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할머니의 25살 난 아들 엘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엘머는 장티브스로 열이 있었는데 당시 그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엘마는 쌍둥이 여동생 에바에게 아주 헌신적이었는데 그녀가 1년 전에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의 삼촌인 엘마는 여러 날 동안 코마상태에 있으면서 너무나 쇠약해서 꼼짝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두 팔을 하늘을 향해 뻗고서 침대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행복의 광채가 빛났고 확실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에바!’라고 부르더니 사망하였다.”

우리는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삶과 닿아 있습니다. 편지 하나만 더 소개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이것은 저의 계모에게서 온 것입니다. 최근 제 아내와 저는 아주 크고, 무겁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여 어떤 문제건 해결의 유일한 방법인 주님의 손에 맡기기로 하고 기도로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먼저 저의 아버님의 이름은 Clifford이고 제 아내의 이름은 Ruth라는 것을 밝힘니다.)

저의 계모는 저의 아내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했습니다. “어제 밤, 의자에 앉아서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루디(Ruthie)는 괜찮을거야, 걱정하지마 ‘라는 생각이 떠 올랐다. 너도 잘 알고 있드시 나는 너를 루디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Ruthie는 아명으로 성인의 경우 호칭과 함께 Ruth라고 부른다. 결혼 후 만난 사이기에 시어머니와 며누리가 아명을 불렀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역자 주)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 가운데 너를 루디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어(당시에 이미 사모님 존칭을 받던 며누리었다). 그렇지만 크리포드는 너에게 친절하게 애정을 표현할 때면 종종 너를 언급하면서 그저 루디라고 불렀었지. 그런데 어제 저녁 왜 갑자기 ‘루디는 괜찮을거야, 걱정하지마”란 말들이 나에게 떠올랐을까?

우리에게는 저 세상에서 우리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제가 믿고 있는 나의 확신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친절하였던 사람들을 결코 상실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들도 결코 당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계속적이고 영원한 불멸 가운데서 함께합니다. 우리들은 불멸의 상태로 죽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게 아닙니다. 불멸의 조건은 우리들의 본질인 인간의 삶 속에 세워집니다. 우리는 육신과 피가 아닙니다. 육신은 당신과 내가 잠시 사용할 도구입니다. 더 이상 그것이 필요 없을 때 우리는 육신을 떠납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영적 삶의 일부인 하나의 영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끝이 없습니다.

*Plus-The Power of Faith(April-May 2020)에서


 

어떻게 염려를 털어낼까?

노먼 빈센트 펄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가운데서 계속 염려를 하기 때문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정당한 이유 없이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연구를 해 본 어떤 분은 우리의 염려의 대부분이 초점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연구자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들의 40%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래된 염려들의 30%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의 12%만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는 건강에 관한 것인데 건강문제는 염려할수록 더욱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염려의 8%만이 가능성이 있는 염려로 타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당신이 보통 하는 모든 염려의 극소수만이 걱정할 이유가 있는 실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염려할 이유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실제적으로 염려에 대한 해독제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해독제란 믿음입니다. 믿음은 염려나 두려움 보다도 훨씬 강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한 것 가운데 하나는 문제가 아무리 냉혹하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으며 깊은 신앙을 연마함으로 그와 연관된 걱정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염려가 가져다 주는 모든 병폐들에 관해 잘 언급한 성경구절을 베드로 전서 5장 1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격에 관해 언급하면서 성경은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라. 그는 너의 모든 염려를 돌보시는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종교가 주는 위대한 멧세지입니다. 당신은 당신을 외면하시는 하나님과 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아 두려워 말아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염려를 내려 놓게 하는 위대한 방법입니다.

이제 저는 묻겠습니다. 염려를 털어버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점차로 염려가 당신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염려와 두려움과 불안은 인간의 안녕에 가장 파괴적인 원수들입니다. 우리는 영어단어의 어원에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염려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단어의 어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옛 앵글로 색슨의 단어인 wyrgan에서 왔습니다. ‘윌간’은 목 졸라 죽이다. 목을 조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의 목을 잡고서 힘껏 눌러서 공기가 통하지 않게 한다면 저는 당신에게 당신이 오랫동안 걱정했던 염려의 희생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문자 그대로 자신을 목 졸라 죽입니다.

유명한 의사 한 분이 나쁜 감정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좋은 감정은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나쁜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글쎄요. 화내는 것은 나쁜 감정의 하나입니다. 만약 화를 내면 그것은 당신의 육체가운데 명치를 먼저 치게 됩니다. 거기에 있는 신경은 화를 내는 바람에 과도하게 예민해져서 아픔을 느끼고 활기를 잃게 됩니다.

증오는 또한 당신을 아프게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나쁜 감정입니다. 몇 년 전 한 여름 주일에 저는 뉴 져지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한 여인이 제게 말했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무척 감사했습니다만 온 몸이 가려워졌습니다.”

저는 “그래요, 저는 설교 후에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봤지만 설교때문에 몸이 가려워졌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 보는 군요. 정말 몸이 가려워 지셨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여인은 소매를 팔굼치까지 밀어 올리면서 말했습니다. “어디 한번 보세요.” 피부가 약간 붉은 듯 하기는 했지만 나의 상상력때문에 그렇게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별다른 증상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계속해서 “그것은 가려움증이 아니라고 말하지 마세요. 저는 그게 가려움증이라는 것을 알아요.”그리고는 그 여인은”이상한 것은 제가 교회에 올때에만 가렵다는 것이에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교회의자에 뭐가 있는 게 아닐까요” 라고 물어보기도 했으나 저는 이미 흥미로운 케이스를 하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여인과 그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뒤에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하였습니다. 그녀는 나에게 “저는 가려움증만 있는 게 아니라 항상 100.5도를 유지하는 미열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는 저에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늘 이야기하는데 저는 목사님과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생겨서 후에 그녀의 주치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는 제가 ‘내적 습진’이라고 부르는 증상을 가지고 있지요. 물론 제가 아는 한 그런 이름의 병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인은 안에서 자신을 계속 긁어 대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증오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매를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그 여인은 그의 자매가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남겨준 유산을 빼았았다고 주장합니다. 그 여인은 오랫동안 자매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만약 목사님께서 이 여인이 자매에 대한 증오를 중지시키신다면 아마도 이 여인은 속에서 자신을 긁어 대는 것을 중지하고 그렇게 되면 외부의 신체를 긁어 대는 것도 중지하리라고 생각합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교회에 오면 더 가려워지는 것은 교회에서는 죄책감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반사적인 가려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은 비참한 상태였습니다. 그 여자는 나쁜 감정때문에 오랫동안 병에 걸려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손을 그 여인의 손에 얹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에서 증오심을 뽑아 내셨습니다. 그 여인은 자매와 화해하였고 그의 내면에서의 가려움증과 외면에서의 가려움 증이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이 케이스를 건강하지 못한 생각유형이 육체에 끼치는 비극적인 영향의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는 틀림없이 당신을 병들게 합니다. “걱정이 많아서 아퍼” 라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병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습니까? 새로운 내성을 개발해야 합니다. 즉 새로운 내적 자세입니다. 염려는 천천히 온 마음으로 흘러 퍼지기 시작합니다. 당신이 하는 가장 나쁜 것은 물과 같이 이런 염려가 계속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 속에 커다란 도랑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당신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이나, 직장에 관해 생각하는 당신의 모든 생각이 이 공포와 걱정의 통로로 흘러가버려 더 큰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없애기 위한 방법은 다른 통로 즉 신앙의 통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통로가 마음 한 가운데를 지나면서 점점 더 깊어 지게 되면 얼마 후 신앙의 위대한 강은 당신의 마음을 관통하여 모든 생각들이 명철하고 눈부시고 낙관적이며, 희망적으로 바뀌어 버리고 삶은 아주 좋아질 것입니다. 신앙의 통로를 당신에게 필요한 깊은 안전을 줄 수 있도록 개발하십시요. 하나님을 돌보십시요. 그는 당신을 돌보실 것입니다.

이제 당신을 불안에서 구해 줄 것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본질적으로 사람의 외적인 상황은 불안정합니다. 인간은 꽃과도 같이 자라서는 꽃을 피우고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지금 여기에 있던 것들이 내일엔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들은 유한합니다. 우리들은 육체와 피로 되어있습니다. 우리들은 불안정합니다. 우리는 인간존재라는 불안정한 덧없는 삶의 한 부분을 살고 있을 뿐입니다. 외적으로는 우리에게 안전이란 보장이 없습니다. 진정한 안전이란 내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는 내적으로는 매우 안전합니다. 내적으로 우리는 매우 안전합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군에게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병원의 부상자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하루에 일곱 번 설교를 했습니다. 제 일생에 지금까지 하루에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상황아래서 설교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몇 번의 설교는 위치가 노출된 채 적군들이 침투해 오는 전쟁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설교하는 가운데 때로는 비행기들이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고 폭파음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제가 설교하는 곳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곳 즉 제가 1000여 명 군인들에게 설교하려는 언덕에 군인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모래주머니로 둘려있었습니다. 저는 “장군님, 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장군은 “그 사람들은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호위대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저쪽에는 적군들이 있고 이쪽에는 천 여명의 군인들이 집결 해 있습니다. 적들이 공격할 목표가 되기 십상이지요. 우리는 그러한 기회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 그러더니 그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미 해병대를 믿으십시요”

그렇습니다. 저는 그곳에 앉아서 그 군인들을 바라보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은 아무런 안전막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장군님, 저는 민간인 목사이고 이런 호위망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병사들은 어떤 안전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는 “그들의 안전망은 훈련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기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무기도 없습니다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저의 안전을 걸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에 앉아있으며 스스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과연 나는 죽던지 살던지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알고 나의 마음속에 평안함과 침착함을 가지고 인간실존의 위험에 과감히 뛰어 들 준비가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저는 장군을 향하여 “성경에서 안전에 관해 언급한 성경구절을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어떤 성경말씀 말인가요?” 저는 성경을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너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그는 당신을 돌보는 분이시다.”란 구절을 읽어주었습니다.

장군은 무척 감동한 듯 “목사님, 앞에 있는 이 병사들을 사랑하시지요? 민간인 목사라고 하셨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 하신다고 말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시지요?” 그래서 저는 전력을 다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였습니다.

신앙만이 진정한 유일한 안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믿을만한 안전입니다. 신앙으로만 당신은 패배와, 저항과 증오와 공포와 폭력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염려는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며 이것이 내적인 안전입니다. 이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삶의 영고성쇠를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How to Turn Off Worry by Norman Vincent Peale> Plus The Power of Faith-February/March 2020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