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2019년 11월 1일>


"어느 과학도의 신앙고백”

박 윤 수 박사(Ph.D.)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창조설”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1. 나의 신앙 고백

1962년 12월 24일,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8호의 승무원들은 달 궤도를 돌면서, 전세계가 TV생중계로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창세기의 일부를 낭독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날 세 명의 승무원, 윌리엄 앤더스(William Anders), 짐 러벨(Jim Lovell), 프랭크 보면(Frank Borman)이 읽었던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Anders [창세기 1:1~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1:1)

Lovell [창세기 1:5~8]“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창1:5)

Borman [창세기 1:9-10]“하나님이 물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1:10)

이처럼, 이들은 지구에서 240,000마일 떨어지고, 달에서 60마일 떨어진, 우주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존엄한 선언입니까? 

저는 과학자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진화론자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와 같은 많은 과학자들이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과학을 통해서 해명해 보려고 하는 과학자입니다.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난 90여년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의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살아 온 것이, 제게는 가장 감사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을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과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 역시 진리를 탐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증명하는데 있어, 과학은 관측과 실험을 포함하고, 종교는 신의 계시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는 같은 현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조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령 과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화가 고갱(Paul Gauguin), 음악가 베토벤(Ludwig Beethoven)과 구약의 다윗 왕이 각각 언덕에서 황혼의 태양 빛이 비치는 장대한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관찰한다고 합시다.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금색, 홍색의 구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 각기 다른 지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 운동과 구름의 조직을 설명하는 수학공식으로 가득한 종이를 내어 놓을 것입니다. 둘째로 화가 고갱은 찬란한 색깔을 가진 저녁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캔버스를 보여줄 것입니다. 셋째로 음악가 베토벤은 그의 전원 교향곡을 들려주며, 그의 동료들에게 지긋이 눈을 감고 그것을 감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의 다윗 왕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는 시편 19편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찾는 그 방법과 표현이 다를 뿐이지,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찬미하고, 피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차이점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

돌이켜보면, 지난 70년 동안 과학자로서의 저의 삶은 순수한 자연의 법칙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했던 참으로 분주한 세월이었습니다. 실험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자연의 현상을 발견하였을 때의 그 기쁨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와 같은 발견이 계속되어도, 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류의 진리를 다른 방법과 다른 각도에서 추구해보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과학과 종교의 상호관계, 특별히 양자가 가지는 세계관의 상이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주로 “어떻게?”(How?)를 묻는데 관심을 가지는 반면, 종교는 주로 “왜?”(Why?)를 묻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지구에 도착하였는가를 묻는다면, 종교는 왜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를 묻습니다. 즉, 진리를 증명하는데 있어, 과학이 어느 한 관점을 대표한다면, 종교는 다른 한 관점을 대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탐구하는 진리는 하나이나, 과학과 종교가 가지는 관점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이와 같은 서로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과학과 종교에 대한 그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과학자로 자칭하고 있는 “창조과학자” 또는 “창조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성서를 과학의 교재로 만들고, 성서에서 과학의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창조설”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창조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창세기의 목적을 무시한 채, 창세기와 과학적 정확성을 융화하거나 또는 원시적 우주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종교와 과학의 목적을 혼돈하는 것이며, 오히려 종교와 과학에 대한 모독이며, 성경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화는 하나님이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믿는 창조신앙과 진화론 사이에는 아무런 분쟁이 없습니다. 아무리 현대과학으로 무장한 과학자라 할지라도, 이런 이해 안에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데에 어떠한 장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3. 기독교와 사회정의

저는 지금껏 신앙 안에서 자랐고, 신앙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의 영향으로 그리스도를 일찍이 주님으로 영접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많은 목사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저를 전쟁의 폐허에서 건져내어 1952년 유학의 장도를 열어주신 분도 한 목사님이었고, 저에게 배우자를 소개시켜 주신 분도 바로 그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저의 공부를 뒷받침 해 주신 분들은 캐나다의 젊은 기독학생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하나님 은혜에 빚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39절의 말씀을 제 고백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금껏 이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사랑을 받은 자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일은, 마땅히 제가 해야할 책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1996년과 2000년, 그리고 2004년 미 연합감리교단의 총회대표로 선출 되었을 때 “교회와 사회 법률 제정 위원회”에 참여하여, ‘동성연애에 대한 문제”, “낙태에 관한 문제”, “인종차별”과 “타 종교와의 교류”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입니다. 저는 그의 “평온을 비는 기도”가 모든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했던 “평온을 비는 기도”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소서. 

그리하여,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해주소서!”


개인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만이 결코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부의 정책, 나아가서는 교계의 정책에 항상 관심을 두고 “정의” (Justice)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4. 곤경 속에서 얻은 믿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저를 어려운 시련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모든 어려움이 제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믿습니다. 지난 2007년 1월 29일에 저는 심장마비로 심장수술(bypass)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4개월 반 만에 회복되어, 그 때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이처럼 간증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뿐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02년 10월 5일에 이스트 랜싱 미시간에 있는 주립 대학에서 글로벌 코리아 상을 받으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무려 4개월이라는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 반이 지나 완쾌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연약함에 있었지만, 2004년 3월 1일에 서울대학교에 초빙교수로 부임하여, 2년 동안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니, 이 역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2010년 4월 7일에는 저의 집사람이 계단에서 떨어져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4번의 수술을 받은 후, 치료를 시작한 지 13개월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지난 7월 23일에는 Stroke에 걸려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달 만에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병중일 때에는 제 집사람이 시중을 하느라 고생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제가 집안 살림과 부엌 일을 하게 되면서, 주부의 일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집사람을 회복시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이지만, 이 일을 통해 남녀평등의 귀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생길 때”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의 저자 Harold Kushner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고, 교회에서도 열심으로 봉사하며 섬기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런 화를 주실 수 있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재난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지시하고 계시는지를 물으며,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는, 앞으로 있게 될 내일을 우리가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이 믿음을 주셔서 인생의 곤경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5. 기쁨과 희망의 종교를 바라며

기독교는 기쁨과 희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이 우주를 정복케 하시고 다스리고 삶을 즐기도록 하셨습니다. 창조는 삶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며, 그 안에는 선택의 자유, 질서, 출산의 기쁨, 축제와 같은 행복의 가치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닙니다. 삶은 사랑과 관련이 되어 있고, 자기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이웃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같은 존엄한 책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삶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셨고,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며,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경건함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며, 엄숙하고 심각한 표정을 가지고 예배할 것만을 요청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밝은 얼굴로 기쁨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기독교는 원죄로 시작한 종교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의 경륜은 범죄의 발생 이전에 이미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와 축복(Original Blessing)의 종교이지, 죄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죄의 종교요 어둠의 종교로 만드는 신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쁨의 종교, 축복의 종교, 창조의 종교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 없던 더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로 인해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타락과 속죄의 신학체계 속에서는 그 중심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신학 중심에서는, 이 우주에 이미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깃들어 있다는 고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창조의 축복이 죄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한 이 우주와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죄악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선의 요소들을 찾고, 주어진 삶을 즐겁게 영위해야 합니다. 창조의 기쁨과 창조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최대의 특권입니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모든 크리스천은 항상 새로워져야 하며, 창조(New Creation)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것(New Being)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 5:17)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새롭게 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막 12:30~31)는 신약의 두 가지 계명 위에 확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져자소개:박 윤 수 Ph.D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 초빙교수

전 서울대학교. Johns Hopkins 대학 초빙교수 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전북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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