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논설과 간증/2020년 1월 1일>

 

<어느 과학도(박윤수 박사)의 신앙고백)

제3회 무로 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두“창조”의 이야기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창조의 마지막날, 여섯째 날에 창조되었다고 한다. 땅, 하늘, 빛, 해, 동물, 식물 등등이 인간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인간 몇 명이 창조되었는가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창세기 2장은 창조의 다른 견해가 기록되어있다. 하나님이 우주를 먼저 창조하시고 남자 그리고 에덴동산이 만들어졌다. 여러 동물들을 만들은 후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부터 창조되었다고 한다.

“창조주의자”들은 이 두 상반되는 서술들을 한가지 역사적 사건으로 묶어버린다. 두 상반되는 창조설을 성서편집자들이 앞뒤로 배열하였다는 사실 자체가창조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라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첫째 이야기는 인간의 기원이 무엇인가?하는 데에 대한 해답이고 둘째 이야기는 왜 인간은 인간이 주어진 그대로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다. 즉 과오를 범한 창조물이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해답인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1장에도 빛이 첫 날에 먼저 창조되고 달, 그리고 별들이 넷 째날에 창조되었다는 모순된 서술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1:2에 보면 지구는 형태가 없었고, 폐허하고 어둠속에서 용두럼치는 바다가 있었다. 이것은 혼돈(chaos)이다. 저자는 추상적인 심경에서 이 글을 쓰지는 않았을것이다. 무(nothing)라는 개념은 없었던 것이다. 무라는 것은 기독교사상가들이 받아들인 희랍적개념이었다. 과학적심경의 경지에서 세상의 종말은 혼돈의 상태로 다시 인간세상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하였다는 것은 성서적개념이아니다. 두 창조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두 창조설은 각기 다른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서 다른이야기들이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창세기의 첫 11장은 세계의 기원과 인류의 초기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주의자”들에 의한 창세기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희극과 같은 성서해석이다. 그들의 창세기에 나타난 종교적 진리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과학에 대한 이해처럼 결실이 없다.*

* 계보

창세기에 나타난 계보는 모든 인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지 인접국가의 신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성서학자들이 명백히 표시하고있다.

* 노아의 홍수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저술한 바벨론문명의 신화를 적은 명판이 주후 1872년에 발견되었다. 홍수로 인한 인류의 형별이 무지개에 의한 계약으로 따르고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증이 따른다. 죄 - 형별 - 구원은 성서에 기록된 메시지이다.

* 바벨의 탑

성서학자들은 언어의 기원에 관한 고대의 이야기들을 인용하고 있다. 죄는 모든 인류와 사회를 하나님으로부터 또 인류를 서로 멀리하고 있다. 근대의 희랍신화는 인류가 너무 강력해지고 신들에게 위협의 대상이 된 것을 본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고있다.

첫 11장에 담겨 있는 창세기이야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멀어졌다는 것을 표현하고있다. 역사적 아브라함의 출현에 대한 무대가 제시되었고 구원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가 12장에 무대전개를 한다.

“창조주의자”들은 창세기를 쇄태한 과학의 교재로 만들고 호기심적인 무관한고대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창조주의자”들의 방법은 고대의 신화나 이야기가 종교적 진리를 표현하는데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있다.

과학과 종교

과학자들은 세계를 특별한 관점에서 보고있다. 과학은 진리를 증명하는 한 관점을 대표하고 기독교는 다른 관점을 대표하고있다. 과학은 주로“어떻게 (How)”를 질문하고있다. 가령 어떻게 인간이 지구에 도착하였는가를 묻고있다. 종교는 주로“왜 (Why)”를 추궁하고있다. “왜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구한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에 과학이나 종교의 관점은 양립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과학과 종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는것이다. 진화론/창조주의의 분쟁은 누군가의 이해가 잘못되어 있는 까닭이다. 창조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였다. 진화는 하나님이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믿는 신앙과 진화론은 아무런 분쟁이 없다.

창조의 선조

기독교의 정통적교리로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믿는다. 사도신경을 통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하고 우리는 신앙고백을한다.

창조라는 것은 우주의 절대적 시원 또는 발단을 의미하는 것이고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천지창조 이야기는 혼돈 (chaos)에서 질서(cosmos)가 주어지고 어두움에 빛이 주어지는 일반적으로 형태없는 소재에 형태를 부여하는 의미로서의 창조로서 기술되어있다. 즉 창조될소재가 이미 존재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다.

과연 창세기의 저자는 형태가 없는 혼돈이라는 소재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말하려는 의도였을까? 또는 하나님이 우주를 ”무로부터 창조’하였다고 선언하려는 것이 저자의 참된 의도였을까?

일반적으로 창조신화에서 볼 수 있는 창조는 이렇게 소재의 선재를 전재로하고 형태가 주어지는 종류의 것이며,바벨론의 창조신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틀림없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천지창조 이야기도 이러한 발상의 흔적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구약성서 전체로 볼때,실질상 우주의 절대적 발단으로서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성서를 통해서 사람이 그 무엇을 ”창조했다”는 말은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재

성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먼저 으뜸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병행되는 존재가 처음부터 있었다면,하나님은 으뜸되는 하나님으로 일컬어지지 못할 것이다. 으뜸되고 유일한 하나님은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이사야 44:6)고 선언하셨다. 성서가 창조에 관해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야말로 천지의 창조자라는 것이다.

성서는 이 우주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분명히 이 창조자이신 하나님에게로 우리의 관심올 환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 ’하고 고백한다.

고대회랍인들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는 자연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질서와 조화를 가진 이 자연적 ’코스모스’를 보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성서에서 주된 관심사는 창조된 세계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창조자되신 하나님이고,이 창조자되신 하나님은 눈으로 보는것이 아니고 창조자되신 하나님을 믿는데 문제를 두고 있는것이다

성서의 우주관에 나타난 멧셰지

성서는 우주의 형성과정 즉 이 우주가 어떻게 (how) 형성되었는가 하 는문제를다루고 있지 않다. 물론 창세기 첫머리에 담겨있는 창조이야기에 천지의 창조과정이 그려져 있고,바벨론의창조 신화의 영향을 받고있기 때문에 우주기원론으로 간주되는 요소가 있기는 하나 성서 전체로 보나 창세기 전체로부터 보더라도 우주의 형성과정에 대한 관심사가 결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창조신화의 일부가 채용되었을 뿐 창조이야기의 성격은 완전히 다른것이다. 이런점에서 구약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희랍의 바벨론 신화로부터 출발된 철학적인 우주론과 나아가 근대의 과학으로서의 우주기원론과는 대조적이 되는 것이다.
성서에서 주목할 것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의도,그의 계획이다. 먼저 혼돈이 있고 거기에 형태가 주어짐으로서 우주가 형성된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따를 결정이있다. 따라서 이 우주는하나님의 일정한 의도 아래에서 창조되었고 일정한 목적을 가진다. 우주형성의과정이 아니고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의도도 그 목적이 문제인 것이다. 성서가 강조하는 것은 이점이다.

창조의 하나님

하나님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세우셨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혼돈으로부터도 질서를 세우실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혼돈도 창조하셨는가?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외하고는 만물이 다 혼돈으로 변할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암시해주고 있다. 창세기 1장이 쓰여질 때 저자는 ”무”와 ”유”의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창조력과 주권을 강력하게 그러한 형식으로 표현했을 뿐일 것이다. 이 진술이 우리의 신앙과 결부될 때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신조가 출현될 수 밖에는 없는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자이고 어떠한 인간도 마귀도 물체도 하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자이시라는 것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이 나오고 인간의 희망은 하나님 밖에는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유일하선 하나님만이 모든 만물을 존재케하고 지배하신다.
그럼으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믿는 것이다.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초빙교수
전서울대학교. Johns Hopkins 대학초빙교수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문리대물리학과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

전북대학교명예이학박사

 


 

제2회 성서 와 과학

“성서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천당에 갈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책이지 결코 하늘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Gallileo Galilei(1564-1642)

박 윤 수 박사(Ph.D.)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종교와 과학과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항상 나의 큰 관심사이다. 우리가 가끔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이 되는 신조를 고백하고 명상하고 우리 실재의 삶과 결합시켜 생각해보는 것도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창조의 하나님

창조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는 우주의 형성에 대한 분석으로 시작하여 창조자가 무엇인가를 추론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 교리는 창조자로부터 시작하여 우주의 창조자가 그 자신을 나타낸 세계를 이해하는데 있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창 1:1). 성서는 이 간단하나 존엄한 서술로서 우주의 실존을 하나님의 탓으로 선포하고 있다.

창세기 1 장에 관한 현대의 논쟁은 지난 과거에 언제 어떻게 세상이 시작되었는가 하는 창조의 연대적 국면의 논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창조의 과거 시 만이 성서의 가르침의 중요한 부문이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우리들의 우주의 전 존재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님의 창조적 힘에 의존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세계관

약 4000년 전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결정하셨다. 6일 만에 그는 만물과 모든 종류를 가지고 세상을 만드셨다. 그는 지구를 평탄한 한 원반같이 만들고 그 안에 산과 계곡을 지으셨고 하늘은 꺼꾸로된 사발같이 형성하였다. 지구 아래와 하늘 위는 물의 대양이 존재하였다. 그는 태양과 달과 별을 그 사발 속에 두셨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메소포다미야 라고 부르는 근방에 모든 식물과 짐승을 만들고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창조의 이야기이고 창조된 세계의 그림이다.

현대의 세계관

약 40 억년전에 우리의 유성계는 태양을 둘러싼 원반형의 가스 덩어리로부터 발전되었다. 지구는 우주에 있는 수백만의 별 중의 하나이다. 극미의 지구에 현존하고 있는 생명의 형태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또 과거에 있었던 많은 생명체도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인류는 적어도 20만년전에 시작됐고 인류가 이러한 생명의 형태로 어떻게 기원되고 발전되었는지도 모른다. 인류기원에 대한 많은 이론과 해답되지 않은 상세한 의문이 많지만 이상이 대략 현
대 과학의 연구와 실재 측량으로 출현된 우주의 기원관이다.

성서와 과학의 갈등

성서와 과학의 세계관을 이렇게 대조 할 때는 기독교인은 과학을 성서적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알고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은 성서적 교리를 유치한 원시적 비과학적 신비로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적 창조의 원리와 과학적 세계기원의 기술은 양자택일의 진리들이 아니고 상이한 국면을 가진 진리들이다. 서로 적대적이라기 보다는 과학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성서적 창조의 교리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였고 또 한편 기독교의 교리가 과학의 발전을 고무하여 서구문화의 세계관으로 창출시킨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창조설과 세계관은 일종의 원시적 과학이다. 그러나 성서저작자들의 목적은 그들의 독자에게 천문학이나 생물학을 가르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메시지 속에 담겨진 원시적 과학을 통해서 그들은 궁극의 근원이고 만물의 통치자인 하나님에 관한 증거를 한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인류의 삶의 뜻과 목표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how)여기에 다다랐는가. 하는 상세한 기술보다는 왜(why)우리가 여기에
있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숙명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두었다. 성서는 과학의 교재가 아니다.

과학과 종교의 방법

우리의 현대 문명을 형성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두 힘은 과학과 종교이다. 과학을 통해서 창조의 신비를 더 알려고 하고 종교를 통해서 인류는 창조자를 알려고 한다. 과학은 종교가 아니지만 그 가정과 방법과 진리에 대한 탐구에 기인한 일종의 종교적 활동이다. 과학은 하나님을 증명하며 과학과 종교는 같은 현실을 설명하고 종교는 신의 계시를 포용한다. 성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인간. 자연. 그리고 그의 상호 관계를 배운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자. 관리자가 목적과 목표 역사의 주로 심판자로 그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 과학적인 회답을 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모든 과학적 증거를 수집해서 신의 창조를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는 잘못이다.

창조와 섭리

성서는 모든 창조물이 그 기원과 계속적인 생존이 하나님의 뜻과 행위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독립적인 자연이라는 것은 성서의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행위 (continuing activity)는 창조 후 과거도 지금도 미래에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행위에서 우리는 누가 (Who)또 어떻게 (how)라는 것을 확실히 분별할 필요가 있다. 성서의 저자들은 누가 이행하고 있고 무엇을 그가 성취하였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그가 행하는 가에 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안았다. 그들의 목적은 호기심을 짜내는 것이 아니었고 예배를 북돋는데 있었다. 예수님은 자연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계속적인 활동을 말씀하시고 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마6:26). 과학자들은 어떻게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가. 관측하고 실험하고 이론화할 자유가 있다.

하나님의 계속적인 행위는 기적에도 작용되고 있다. 성서적 기적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놀라움을 산출하는 강력한 사건이고 또 징조이다. 기적의 또 다른 특징은 정확한 타임잉(timing)이다. 성서저자들은 사건의 기구에 무관했던 것처럼 기적이 어떻게 일어 나는가에 대해서도 무관하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행위에 기여하고 있다. 중세기 신학의 자연적/초자연적인 구별은 자연의 법칙과 하나님의 행위 사이에 선을 그을 때는 비성서적이 된다. 오히려 성서적 구별은 예칙 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재발하는 사건과 그렇지 않는 기적들이다. 하나님은 전자에도 활동하시고 후자에도 활동하시고 있다. 기적은 인류의 역사속에 하나님이 행위와 목적의 징조로서 어느 특정한 시간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비상한 사건이다.

결론

창조의 기독교적 교리는 창조주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창조와 그 창조의 일부로서의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 세 가지를 가리켜 주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태초에 창조하셨고 둘째 하나님은 무에서 창조하셨으며 셋째 하나님은 그의 영광과 인류를 위해서 창조하셨다.

성서는 과학의 교과서가 아니다. 그리고 모든 과학적 증거를 수집해서 신의 창조를 설명하려고 하는 태도는 잘못이다.하나님의 계속적인 행위는 자연적인 사건에도 또 초자연적인 사건 (기적)에도 찾아볼 수 있다. 초자연적인 사건만 기적이 아니다. 기적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항상 인류의 역사 속에 일어나고 작용한다. 기적은 현재에도 여러 형태로 일어나고 있다.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 초빙교수
전 서울대학교. Johns Hopkins 대학 초빙교수 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
전북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제1회 "어느 과학도의 신앙고백”

박 윤 수 박사(Ph.D.)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창조설”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1. 나의 신앙 고백

1962년 12월 24일,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선인 아폴로 8호의 승무원들은 달 궤도를 돌면서, 전세계가 TV생중계로 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창세기의 일부를 낭독함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 날 세 명의 승무원, 윌리엄 앤더스(William Anders), 짐 러벨(Jim Lovell), 프랭크 보면(Frank Borman)이 읽었던 말씀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Anders [창세기 1:1~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1:1)

Lovell [창세기 1:5~8]“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창1:5)

Borman [창세기 1:9-10]“하나님이 물을 땅이라고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셨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1:10)

이처럼, 이들은 지구에서 240,000마일 떨어지고, 달에서 60마일 떨어진, 우주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존엄한 선언입니까? 

저는 과학자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진화론자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와 같은 많은 과학자들이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저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과학을 통해서 해명해 보려고 하는 과학자입니다. 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난 90여년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의 창조주임을 고백하고 살아 온 것이, 제게는 가장 감사한 일 중에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과 과학을 상호 적대적인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과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 역시 진리를 탐구하는 일종의 종교적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증명하는데 있어, 과학은 관측과 실험을 포함하고, 종교는 신의 계시를 포용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는 같은 현실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조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가령 과학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화가 고갱(Paul Gauguin), 음악가 베토벤(Ludwig Beethoven)과 구약의 다윗 왕이 각각 언덕에서 황혼의 태양 빛이 비치는 장대한 계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관찰한다고 합시다. 그들은 모두 동일하게 금색, 홍색의 구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제 각기 다른 지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 운동과 구름의 조직을 설명하는 수학공식으로 가득한 종이를 내어 놓을 것입니다. 둘째로 화가 고갱은 찬란한 색깔을 가진 저녁놀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캔버스를 보여줄 것입니다. 셋째로 음악가 베토벤은 그의 전원 교향곡을 들려주며, 그의 동료들에게 지긋이 눈을 감고 그것을 감상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약의 다윗 왕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는 시편 19편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찾는 그 방법과 표현이 다를 뿐이지, 결국 하나님의 창조를 찬미하고, 피조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차이점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확신

돌이켜보면, 지난 70년 동안 과학자로서의 저의 삶은 순수한 자연의 법칙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몰두했던 참으로 분주한 세월이었습니다. 실험과 연구를 통해 새로운 자연의 현상을 발견하였을 때의 그 기쁨과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와 같은 발견이 계속되어도, 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잡고 있었던 열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연과 인류의 진리를 다른 방법과 다른 각도에서 추구해보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과학과 종교의 상호관계, 특별히 양자가 가지는 세계관의 상이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과학과 종교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주로 “어떻게?”(How?)를 묻는데 관심을 가지는 반면, 종교는 주로 “왜?”(Why?)를 묻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지구에 도착하였는가를 묻는다면, 종교는 왜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를 묻습니다. 즉, 진리를 증명하는데 있어, 과학이 어느 한 관점을 대표한다면, 종교는 다른 한 관점을 대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탐구하는 진리는 하나이나, 과학과 종교가 가지는 관점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이와 같은 서로의 차이점을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과학과 종교에 대한 그의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과학자로 자칭하고 있는 “창조과학자” 또는 “창조주의자”들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성서를 과학의 교재로 만들고, 성서에서 과학의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창조설”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는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그분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런데, “창조과학자”들은 이와 같은 창세기의 목적을 무시한 채, 창세기와 과학적 정확성을 융화하거나 또는 원시적 우주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종교와 과학의 목적을 혼돈하는 것이며, 오히려 종교와 과학에 대한 모독이며, 성경에 대한 모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셨다는 것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화는 하나님이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믿는 창조신앙과 진화론 사이에는 아무런 분쟁이 없습니다. 아무리 현대과학으로 무장한 과학자라 할지라도, 이런 이해 안에서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데에 어떠한 장애가 있을 수 없습니다.  

    3. 기독교와 사회정의

저는 지금껏 신앙 안에서 자랐고, 신앙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의 영향으로 그리스도를 일찍이 주님으로 영접하였고, 어린 시절에는 많은 목사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저를 전쟁의 폐허에서 건져내어 1952년 유학의 장도를 열어주신 분도 한 목사님이었고, 저에게 배우자를 소개시켜 주신 분도 바로 그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저의 공부를 뒷받침 해 주신 분들은 캐나다의 젊은 기독학생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저는 하나님 은혜에 빚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39절의 말씀을 제 고백으로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금껏 이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기에, 사랑을 받은 자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일은, 마땅히 제가 해야할 책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1996년과 2000년, 그리고 2004년 미 연합감리교단의 총회대표로 선출 되었을 때 “교회와 사회 법률 제정 위원회”에 참여하여, ‘동성연애에 대한 문제”, “낙태에 관한 문제”, “인종차별”과 “타 종교와의 교류”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기독교 신앙을 현실적인 현대정치와 외교에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입니다. 저는 그의 “평온을 비는 기도”가 모든 기독교인들의 중요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했던 “평온을 비는 기도”를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소서. 

그리하여,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평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해주소서!”


개인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만이 결코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정부의 정책, 나아가서는 교계의 정책에 항상 관심을 두고 “정의” (Justice)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4. 곤경 속에서 얻은 믿음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저를 어려운 시련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모든 어려움이 제 믿음을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믿습니다. 지난 2007년 1월 29일에 저는 심장마비로 심장수술(bypass)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4개월 반 만에 회복되어, 그 때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었는지를 지금 이처럼 간증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 뿐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2002년 10월 5일에 이스트 랜싱 미시간에 있는 주립 대학에서 글로벌 코리아 상을 받으러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무려 4개월이라는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2년 반이 지나 완쾌하게 되었으니 그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지팡이를 짚어야 하는 연약함에 있었지만, 2004년 3월 1일에 서울대학교에 초빙교수로 부임하여, 2년 동안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으니, 이 역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2010년 4월 7일에는 저의 집사람이 계단에서 떨어져 오른쪽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4번의 수술을 받은 후, 치료를 시작한 지 13개월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지난 7월 23일에는 Stroke에 걸려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한 달 만에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제가 병중일 때에는 제 집사람이 시중을 하느라 고생을 하였는데, 이번에는 제가 집안 살림과 부엌 일을 하게 되면서, 주부의 일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집사람을 회복시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이지만, 이 일을 통해 남녀평등의 귀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 주셨으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생길 때”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의 저자 Harold Kushner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러한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는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난 앞에서,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고, 교회에서도 열심으로 봉사하며 섬기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내게 이런 화를 주실 수 있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재난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지시하고 계시는지를 물으며,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 속에는, 앞으로 있게 될 내일을 우리가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이 믿음을 주셔서 인생의 곤경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5. 기쁨과 희망의 종교를 바라며

기독교는 기쁨과 희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이 우주를 정복케 하시고 다스리고 삶을 즐기도록 하셨습니다. 창조는 삶의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기독교의 가르침과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이며, 그 안에는 선택의 자유, 질서, 출산의 기쁨, 축제와 같은 행복의 가치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닙니다. 삶은 사랑과 관련이 되어 있고, 자기 생명에 대한 사랑과 이웃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같은 존엄한 책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삶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셨고, 그 기쁨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며,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경건함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며, 엄숙하고 심각한 표정을 가지고 예배할 것만을 요청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밝은 얼굴로 기쁨의 보좌 앞에 담대히 서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기독교는 원죄로 시작한 종교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에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창조의 경륜은 범죄의 발생 이전에 이미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기독교는 창조와 축복(Original Blessing)의 종교이지, 죄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죄의 종교요 어둠의 종교로 만드는 신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기쁨의 종교, 축복의 종교, 창조의 종교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 없던 더한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로 인해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타락과 속죄의 신학체계 속에서는 그 중심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러나 축복의 신학 중심에서는, 이 우주에 이미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깃들어 있다는 고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창조의 축복이 죄보다 앞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과 은총으로 가득한 이 우주와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삶을 지나치게 죄악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선의 요소들을 찾고, 주어진 삶을 즐겁게 영위해야 합니다. 창조의 기쁨과 창조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최대의 특권입니다

 시대와 나라를 불문하고 모든 크리스천은 항상 새로워져야 하며, 창조(New Creation)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것(New Being)이 될 수 있습니다. (고후 5:17) 그러나, 우리가 이처럼 새롭게 되기 위해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막 12:30~31)는 신약의 두 가지 계명 위에 확고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져자소개:박 윤 수 Ph.D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 초빙교수

전 서울대학교. Johns Hopkins 대학 초빙교수 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 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전북대학교 명예 이학박사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