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논설과 간증/2020년 8월 1일>

 

<어느 과학도(박윤수 박사)의 신앙고백>

제 10회 교회와 사회

박 윤 수 박사(Ph.D.)


 “교회의 본질”이라는 제목으로 교회의 정의 기원, 근거, 본질, 목적 등등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들의 교회 생활 태도를 살펴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 또는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 등에 관한 문제점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 느낌이 들어 이글을 써 보기로 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 

먼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대망 하면서 이 세상속에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공동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러 나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집단이라고 해도 사회생활을 하는 이상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교회가 놓여있는 사회속에 뿌리박게 됨으로서 자연히 교회가 사회속에 동화하게 되며 그가  놓여있는 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받게 됨을 피할수가 없다.

역사가 짧은 초대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을 하 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전도에 힘쓰도록 장려하는 것 만으로라도 교회 의 생명을 다하는 것으로 여길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교회같이 긴 역사를 가지고 사회속에 뿌리를 내린 상황속에서는 당연히 교회의 사회적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회는 정치적, 경제적,사회적 문제에 대하여 증언하고 토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그러 나 교회가 시대의 조류에 따라 피상적인 발언을 하여서는 안된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 같이 현실을 통찰하고 모순을 지적하고 정의와 부정 을 가리고 부정을 시정하기 위한 메시야적 증언 을 선포하여야 한다.

교회의 사회운동의 한계성

그러나 교회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여러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기독교적 입장에 서서 발언할 수 있는 문제들이 있고 발언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가령 지금 이나라에서 문제되고 있는 경제 부진에 대해서는 이것이 우 리 생활에 절실히 관련된 문제일지라도 이것은 순수한 경제적 문제이고 기술론적 문제이지 성서로서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경제부진으로 인해서 인심에 끼쳐지는 영향때문에 먼저 취급되어야 될 문제들은 기술론적인문제 가 아니고 가치 판단에 속하는 것임으로 성서 기독교 윤리에 깊이 관계가 되어 있다. 

정치면에도 마찬가지로 기술적인 측면과 가치 판단에 속하는 측면이 있다.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관여할 때는 정치 그 자체의 실태와 그 한계를 충분히 이해하여야 한다. 정치가들이 아 무리 좋은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해도 권력이 없이는 그 이념을 실현할 수가 없다. 권력을 잡기 위 해서는 투표를 얻어야 한다. 투표를 얻기 위해 서는 흔히 인간의 윤리가 파괴되고 변질될 때가 많다. 이러한 정치의 측면은 가치 판단에 속하 는 것임으로 기독교인이 정치에 관여할 때는 기 독교 윤리에 입각하여 올바르고 그릇된 것을 똑 바르게 판단하여 참여해야 한다.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먼저 우리가 유의할 것 은 정책 목표와 정책 수단의 구별이다. 만일 기독교가 관여할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정책 목표에 관한 것이지 정책 수단에 관한 것은 아 닐 것이다. 정책 목표를 논의할 때는 가치 판 단이 개입될 것이고 사회 철학이나 사회 윤리가 개입됨으로서 당연히 기독교 사회 윤리학이 개 입될 영역이 된다. 그러나 정책 수단에 대한 연구는 정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적 지식 을 추구하는 것으로 사회 과학의 영역이지 기독 교 사회 윤리학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교회의 참된 사명

필자는 어디까지나 교회의 사회적, 정치적 사명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회의 첫째 사명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계할 하나님의 백성 으로서 한사람이 라도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 의 백성의 일원으로 만드는 것 즉 전도하는 것이다. 

교회자체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석하고 그 자체에 궁극적 목적을 둔다면 교회에 한사람 또 는 두사람씩 전도하여 교인의 수를 증가시켜 나간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지상에 세워질 것 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교회를 자기자족주의로 이끌어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하나님의 집단은 자칫하면 세상과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화하는 사명에서 멀어 지게 될 경향이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는 하나님 의 백성의 집단이지 ”하나님의 나라’ 그자체가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을 증가시켜나가면 ”하 나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위로 부터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에 들어 가 는 하나님의 백성을 증가시킬 필요가 있고 “하 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대망하면서 이 지상에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항상 종말의 희 망 속에 사는 공동단체이다.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초빙교수
전서울대학교. Johns Hopkins 대학초빙교수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문리대물리학과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

전북대학교명예이학박사  

현재는 은퇴하여 캘리포니아 주 실 비치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박윤수 박사님의 이전 글들은 홈 페이지의 <a href="http://www.webegt.com/cgi-bin/egt/main.cgi?board=Science"target="mainFrame" class="style65">과학과 종교</a>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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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회 창조로서의 예배


박 윤 수 박사(Ph. D.)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 었도다 (고후 5: 17)". 

   
우리는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간다. 그래서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보려 한다.  ”그리스도인의 예배” 라는 과제를 두고 우리가 매주일날 같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뜻과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자세를 다시 한번 점검하였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요 4:24)"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뜻있게 되새길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예배의 다른 측면을 논의해 보려고 한다.

생활의 출발점으로 서의 예배 

그리스도인의 일주일 생활은 주(週)의 첫날의 예배로서 시작하는데 큰 뜻이 였다.  주(週)의 첫날은 제7일째인 안식 일이 아니고 일요일의 예배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날에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주(週)의 최초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이 거기에 계신다. 그날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날 즉 예배의 날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주(週)의 첫날이 우리 생활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제일 첫째의 날이라는 것은 또한 천지창조의 제일 첫 째날에 대응한다. 그런 까닭에 이날에는 새창조의 출발을 또한 느낄 수가 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새로운 피조물” 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런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 었도다."  "New Creation" 즉 "새 창조” 이다.

그리스도안에 거하면 ”새 창조” 가 일어 나는 것이다. 예배가 인생 삶의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예배 드림으로써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New Creation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Paul Tilich는 이 New Creation"을 "New Being - 새 존재” 라 고 표현함으로써 그의 신앙의 근본을 제시하고 있다. "새 존재 ”는 하나님의 창조로 부터 오기 때문에 창조야 말로 존재를 규정하는 위대한 경륜인 것이다. 

우리가 처하고 있는 환경은 별로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태도, 습관, 인품, 성격도 외형적으로 변함없는 고정된 실존인양 보인다. 아무 변함없이 보이는 우리들의 전 인격이 문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로잡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받아지는 것이다. 이 사실을 시인하고 우리 전부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겨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새 창조이고 새 인생인 것이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되 찾을 수가 있고 또 이웃과의 교제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새 창조” 가 예배에서 일어나고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고 새롭게 사는 소망이 생기고 힘과 위로가 주어지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타난 예배의 근본적인 문제 

창세기에 나타나는 아담과 가인의 실패한 이야기속에서 우리는 두가지 예배의 근본적인 문제를 배울 수가 있다.

첫째,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부끄러움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하는 우둔한 인간에게 던지는 하나님의 물음이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면 인간은 예배를 잃고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아담의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엎드려 예배하여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가인의 실패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즉 자기를 잃고 자기의 형제를 잃은 인간에게 “네 형제들은 어디 있느냐? " 하고 하나님은 물으신 것이다. 가인의 실패는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아우 아벨을 죽임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즉 예배의 실패, 예배의 좌절을 초래한 것이다. 

이렇게 창세기는 ”네가 어디 있느냐?" "네 형제가 어디 있느냐?" 하는 인간의 두 근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예배의 근본 문제를 취급하고있다. 예배는 무조건 드려야 하는 것이다. 감사할 때 뿐만 아니라 고난과 혼돈에 빠졌을때에도 무조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겸허하게 주님 앞에 굴복하여 예배드림으로써 자기 자신을 찾고 자기가 어디 있는지 인식하고 깨어진 삭임을 도로 찾고 회복하여야 한다

새창조와 예배 

예배를 통해서 설교를 듣고 성찬에 참여하고 축복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힘을 얻어 우리 자신의 생활에 돌아갈 때 우리에게는 "New Creation"  새 창조가 일어 나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는 두가지가 있다. 제일의 창조는 "무로부터 의 창조(creatio ex nihilo) 즉 무로부터 ”빛 이 있으라” 하고 하나님이 선언함으로써 우주와 인간이 창조되었다. 

”제이의 창조 ”는 ”마이너스 로 부터의 창조이다. 즉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한 상태, 죄의 상태로 부터 새로이 삶을 얻는 것이다. 이 "제이의 창조 ”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창조이다. 예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제이의 창조”가 되풀이되는 것이고 거기서 또한 ”제일의 창조 ”와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천지의 창조는 속죄를 위해서 있고 속죄는 창조때문에 있는 이 상호적인 관계가 예배를 통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창조때문에 있는 이 상호적인 관계가 예배를 통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11세기의 불란서 수도 대수도원장인 Saint Bernard of Clairvaux는 ”제 일 의 창조 ”는 6일간이었지만, ”제이의 창조 ”는 속죄를 위한 창조를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30년을 필요로 했다고 하였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6일간의 창조로 인해서 형성된 인간은 죄의 유혹에 빠졌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속죄로 인하여 죄로 부터 해방되어 그 죄를 이긴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제일의 창조” 롤 회복하고 갱신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제이의 창조-속죄의 창조” 를 통해서 반복되고 현실화되고, 또 거기서 ”제일의 창조 ”가 회복되고 갱신되고 재생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배속에서 우리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인간관계도 새로이 창조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종말론적 예배 

이 지상의 예배는 "New creation-새 창조” 이고 그런 의미에서 평상생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지만,또 한편 예배속에는 인생의 궁극의 목표를 거울이 비쳐주는 것같이 비쳐주고 있다.

인생의 궁극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궁극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 이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영원한 생명” 이다. 영원한 생명,즉 영생에서는 무엇이 시행되고 있는가? 거기서 시행되고 있는 것은 예배인 것 이다. 계시록 22장 1-5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이 밤이 없고 등불과 햇빛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하였다. 즉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들은 인생의 최종의 모습으로서,궁극의 모습으로서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 하나님의 얼굴을 비쳐보며 예배를 본다는 것이다. 
즉 영생-eternal life의 내용은 예배 인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 것이 영생의 내용인 것이다. 인생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배드리는 그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내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의 교제가 회복되어 만물이 다 예배하는 것이 인생의 최후의 모습이라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을 겪은 시인 Pastarnak은 "Dr. Zhivago"의 시 중에서 ”창조의 목적은 헌신에 있다 ”고 하였다. 즉 ”창조의 목적은 예배하는데 있다” 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있고 인간과 만물이 회복되는데 있다.

이 지상의 교회의 예배는 인간의 궁극의 모습, 그리고 우주 만물의 궁극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단편적이든 또는 바울이 고린도 전서 13장애서 말한 것처럼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한 모습’ 이든 한사람 개인의 모습을 사회의 또는 신 세계의 궁극의 모습을 비쳐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의 예배를 바라보고 이 궁극의 예배가 비쳐 주고 있는 이 지상의 예배를 드리면서 매주일, 매주일 살아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될 때 까지 지금은 이 지상의 예배의 때이다. 그리고 그 나라가 도래할 때 까지 우리는 열심히 전도하여야 한다. 만물의 예배, 만민의 예배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선취 적, 대표적 입장에서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나의 기도

저희들에게 중하고 귀한 예배 생활에 관하여 공부할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서기에 부끄러운, 또 종종 믿음의 약함으로써 주님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으로서 저희들에게 주어진 예배생활을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저희들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기쁨을 가지고 주님께 바치고 주님께 맡길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요.

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의초빙교수
전서울대학교. Johns Hopkins 대학초빙교수역임
전 Office of Naval Research 물리학자
서울대문리대물리학과졸업
Univ. of Alberta 석사
Univ. of Cincinnati 박사

전북대학교명예이학박사  

현재는 은퇴하여 캘리포니아 주 실 비치에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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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