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2019년 10월 1일>

우리는 얼마나 오래 사는게 적당한가?
- 혹시 너무 오래 사는 것은 아닌가?

-장수에 초점을 맞춘 약품의 증가는 우리 사회에 해가 된다는 저명한 의사의 경고(그러나 누가 보너스로 주어진 수명연장을 거부할가?)-

1996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스위스의 면역관계 권위자 롤프 징커나겔 박사는 인간의 수명은 원래 의도된 것 보다 훨씬 늘어 났다고 믿고 있다. 그는 “나는 기본적으로 우리의 수명은 25세까지 살도록 만들어 졌으며 그 이상의 수명은 사치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부유한 늙은이들은 그들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죽음을 늦추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돈을 사용한다. 이들의 식탁에서의 대화란 내시경 검사, (코레스트롤을 낮춰 주는) 스태틴스 그리고 새로운 음식조절법 등에 관한 것이다. 의사가 아닌 많은 미국사람들이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을 정기 구독하고 있으며 그러한 경향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나의 옛 친구들을 보면 건강과 건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느냐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취미가 된 듯 하다.

이런 현상은 가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사태가 가져올 결론을 한 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자. 만약 인간의 평균 수명이 백 세를 넘어 그 이상이 된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가난한 이민자들이 돌봐 주어야 하는 100세인 군단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백세인들의 자녀들은 70대, 80대에도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직업전선은 급격히 변화하면서 젊은이들이 일할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만약 강력한 새로운 치료법들이 발견되어 노화를 늦추고 죽음을 연장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 혜택을 볼 사람들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남 아메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은 음식이나. 생수, 그리고 기본적인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애쓰지 않으면 안될것이다. 국가가 그런 치료를 위해 자금지원을 해야하나?하는 비극적인 논쟁이 일어날 것이다. 노인들은 가장 강력한 로비그릅이다. 젊은이들에 비하면 투표율이 높으며 그렇기 때문에 투표에서 정치가들을 해칠 수 있다. 정치가들과 정책수립자들은 늙은이들에 대한 복지문제를 다룰때 위험을 감수하여야 한다. 부유한 서방국가들의 베이비부머들은 지금 70대와 60대에 들어서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부모들과는 다른 종류의 늙은이들이다. 그들은 재정계획이 단단하고 능동적이며, 경험이 풍부한 은퇴를 요구한다. 그들은 몰게지 빛이 없으며 풍족한 연금을 수령하는 마지막 세대들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경제적인 하향은 그들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을 뿐이다. 그들은 압축된 질병율을 열성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화에 대한 비젼은 바람에 그칠뿐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노후의 마지막 몇 년 동안을 양로원에서 보낸다. 거기에는 몇 가지 사회적인 이유들이 있다. 즉 수명의 증가, 죽음이 늦춰진 가정들, 안전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관념들 때문이다. 우리 삶의 말년을 양로원에서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양로원은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안전하고 품위있는 곳으로 보여지기 때문에(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 현상이 생겨났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산업화 이전의 대가족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미래는 도시이고, 세분화 되었으며 의료화 하였다. 생명윤리학자인 에즈겔 임마누엘은 2014년 Atlanta 잡지에 기고한 “왜 나는75세에 죽기를 바라는가?”란 글에서 베이비부머들을 향하여 분노하였다. 그는 자신이 “불멸의 아메리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생명을 끝없이 연장하려는 필사적인 미친짓은 잘못된 것이고 파괴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나는 75세가 우리의 생명을 끝낼 적당한 나이라고 생각한다. 아메리칸들은 그들 부모들 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고 하였다

오버린 와우(Auberon Waugh, 61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일찍 죽는 것은 모든 착한 부모들의 의무이다” 몽테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한 자리를 만든 것 같이”라고 말했다.

촬스 C. 만은 2005년 Atlanta에 실린 “The Coming Death Shortage”에서 “새로운 치료법들이 나오면 자신에게 먼저 시험해 보는 아주 늙은 부자들을 맨 위에 놓고, 보험회사에 의해 의료혜택을 받을 권리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평범한 늙은이들 그리고 영향력이 사라져가는 젊은이들로 구성된 미래의 삼각사회를 예견하였다.

나는 일반적으로 계속 늘어나는 수명연장은 사회에 독이 된다는데 만과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문제는 몇 년 더 살 수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나라면 그것을 받아들일까, 거부할까?하는 것이다. 나는 받아들일 것이다. 재미 있는 죠크가 있다. “100살까지 살기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 99살 난 사람이다.”

의약품들은 신용도를 많이 확보하였다. 그러나 개발국가에서의 수명연장은 조직화된 건강관리, 증진된 생활조건, 질병퇴치 그리고 금연과 같은 행동의 변화 등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흥미롭게도 최고의 인간수명은 아직도 110-120에서 변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급격하게 증가된 인간수명에서의 평균치이다. 이제 어느 점 에서 우리는 선을 긋고 그만큼 살면 “충분해”라고 말할 것인가?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죤 그레이는 비록 과학적인 지식은 계몽사조 이래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되었지만 인간의 비합리성은 여전히 완고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웅변적으로 주장하였다. 과학은 이성과 논리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종종 비이성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의사로서의 나의 일과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어쩌면 예스,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비이성적인 현상들이 착각에 빠진, 인터넷을 섭렵하는 환자들과 친척들에서 부터 스캔이나 다른 진단에 과도 유출된 사람들, 효과가 의심되거나 값비싼 약들을 널리 사용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의료계의 전역에 번져있다. 암치료는 “과도한 의료 문화”라고 묘사된다. 과도한 사용이나,쓸데없는 사용이 환자나, 의사나, 병원이나, 제약회사 등에 의해 시행되고 있다. 사려가 깊고, 절약하는 의사들은 직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득볼 것이 없다.

의료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현대 건강관리의 방향-미국과 같은 나라에서 의약품 소모가 득보다는 해가 될 수 있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경계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우리들은 종종 제약회사들에 의해서 병에 대한 경고가 유발되는 것을 보았다. 유전자들은 다양한 병들에 대한 우리의 경향을 확인함으로 우리를 환자로 만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혈압과 코레스트로 치료에 관한 유럽심장학회 가이드라인은 놀웨이 성인의 76%가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확인하였다. 이러한 “병을 퍼트리는” 음모는(주로 제약업체들에 의한 것인데) 환자들 보다는 그들의 업계를 걱정하게 만든다는 것이 알려졌다.
우리는 수전노들과 같이 건강을 비축해 둘 수 없다. 살다 보면 그것들은 다 사용하게 된다. 낭비하는 사람들과 같이 건강을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돈과 같이 건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돈과 마찬가지로 건강은 품위있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건강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소비지상주의로 우리들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빈곤하게 만든다. 건강관리를 위한 지출을 늘인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들의 다른 사회적인 필요, 즉 교육과 주택 그리고 교통에 대한 지출을 줄이는 것이다. 의약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문제를 포기하고 평안과 구조를 제공하는 핵심적인 기능에로 물러나야 한다.

*Monthly Atlanta 에서

*Dr. Seamus O’Mahony는 아일랜드에 있는 Cork 대학병원 위장학 전문의로 <The Way We Die Now>를 출판하였다.

 

 


 

영적회의(懷疑)를 가져도 괜찮은가?

-불확실성은 성장에로의 열쇄이다.

-스태파니 헬첸버그(Stephanie Hertzenberg)-


영적인 회의를 경험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 일 수 있다. 심각한 영적 회의는 당신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알아온 모든 것들에 대해 전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도록 하며 그게 심해지면 이 세상이 낯설어지면서 방황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면 모든 것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사후의 삶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당신의 행동이 왜 중요한가? 윤리가 왜 중요한가? ?당신은 혼란과 두려움의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비록 조그마한 의심마저도 불안하게 만든다.

영적 회의는 그것들이 당신에게 그런 의문은 갖는 것이 아니라고 늘 가르쳐 왔다는 점에서 더욱 마음을 편치 않게 한다. 신앙이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므로 갑자기 왜, 무엇이, 어떻게, 또는 언제 등을 알기 원하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도가 지나치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당신은 유한한 존재일 뿐,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질문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이 하나님께 침을 뱄는다는 느낌과 함께 영적회의는? 자신이나 친구들을 배반한다는 느낌마저도 갖게 한다. 그들은 전혀 영적 회의로 고통을 받지 않는듯하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 아주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도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그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의 충성된 신앙을 어떻게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당신이 영적 회의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국외자란 느낌을 가지거나 죄책감을 가진다고 하면 회의를 경험한다고해서 잘못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영적회의란 당신이 신앙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들은 당신의 신앙을 깊게하고 강하게 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가 있다. 영적회의가 없다면 당신은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 당신은 작은 질문들을 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은 진부하고 단순한? 그리고 피상적인 대답에 만족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실제적인 질문이 없는 한 심각한 대답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이 의문인데” 또는 “호기심이 동하는데”라는 정도로는 당신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파헤쳐 보는데 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잘안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됐다면?”하는 의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밀고나가게 한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하는 의문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도록 하는 수단이 될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되면 의심을 했던 사람은 더 깊은 신앙을 갖게되고 그러한 방법으로 증거물들을 수집하여 의심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적 회의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종류의 탐구는 당신이 이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당신의 다른 신앙 영역을 들어내 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의심을 쫓아내려는 ?의도에서 당신은 당신의 주의를 요하는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구체적인 것들은 후에 연구할 초점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도색영화를 보는 것이 죄냐 아니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당신의 의문에 대한 답을 얻는데 도움이 될까하여 성경구절들을 깊이 파고들면서 당신은 아마도 흥미롭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성경구절을 접하게 된다. 당신은 신약시대에 바리새인들은 누구였으며 왜 그들은 그렇게 적대적이였었나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색영화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했지만 당신은 바리새인에 관한 호기심으로 되돌아 왔다. 당신은 로마시대의 예루살렘 역사에 깊이 몰두하였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경쟁했던 다른 전통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신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갖게되었다. 이러한 성서의 이해는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성경구절에 대한 깊은 이해로이끌었거나 그동안 당신이 혼동하고 있었을 수도 있는 성경들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하였다.??

영적 의심마저도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신앙을 바로 갖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당신이 전혀 회의를 갖거나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당신이 믿는 것에 대해 왜 믿는지를 진지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왜 당신이 믿는 것들이 중요한지를 진지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귀동냥만 한 것으로 그저 그대로 믿을 것이다. 당신이 직면하는 회의가 반드시 거대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소한 교리에 대한 조그마한 의문이라도 깊은 탐구로 이끄는 자극제가 될 수 있다.당신으로 하여 진정한 ?신앙을 갖게하는 것은 이러한 탐구를 통해 당신이 발견하는 해답들이다.????

영적 의심은 편치 못한만큼,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신앙을 변호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당신이 전혀 자신의 신앙에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당신은 결코 자신의 신앙을 완전히 변호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왜 그런것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훌륭한 대답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대답이나 변호는 질문한 사람에게는? 피상적이고 독창적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은 맹목적으로 교회생활을 할 뿐, 당신이 믿는것에 대한 깊은 의미나. 영향을 생각해 보는 고민이 없다는 것을 느낄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사소한 것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의문에 대하여 당신의 신앙을 변호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것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자신의 신앙에 대 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회의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들이 당신에게는 영적인 회의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란 전혀 없으며, 모든 신자들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할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비극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종교에 가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영적 회의로 씨름하는 것은 편치 않은 일이며,즐겁지도 않고, 놀라운 일일수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믿었던 것들과 내가 배워온 것들을 배반하는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영적 회의는 당시에는 지독한 것으로 생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재앙은 아니다. ?영적회의는 당신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배움을 주는 기회이다. 그것들은 당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기회를 주어 그 어느때 보다도 강한 신앙을 가지고 돌아와 “나는 이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회의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다. 그러나 회의를 이겨낸 신앙은 허리케인을 견뎌낸 나무와 같다. 그 나무는 아무리 강한 태풍가운데서도 뿌리를 깊이 박고 꿈적도 안할 것이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