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교회사 산책 14/2020년 5월 15일>

<교회사 산책 15>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 재 덕

기원 64년부터 4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신앙을 가지려면 그에 앞서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기원 250년 이전까지의 박해는 제한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유대교’라는 용어에 맞서 ‘기독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던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of Antioch)나 서머나의 폴리카르프스감독, 그리고 블란디나,페르페투아, 펠리키타스 를 비롯하 수많은 여성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했다. 순교를 겨우 모면한 젊은 여성들은 사창가로 팔려가야 했다

그러나 이런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늘어갔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이 교회와 함께 하기 때문이란 게 그리스도인들의 해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시 지중해 일대 사람들에게 이전의 전통과는 사뭇 다른 새로운 영적 관심과 삶의 지침을 제시함으로써 높은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 역시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제시한 다음과 같은 새로운 종교 교훈을 빼놓는다면 급속한 성장의 배경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일종의 도덕적 지침을 제시했다. 2세기 중반이 되자 로마 당국은? 유대인과그리스도인을 배격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도덕법을 접한 적이 없는 시민들도 그랬다. 시민 가운데 유대교가 주장하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들은 할례의 끔찍한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유대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회당에 재정적 도움을 베푸는 선에서 만족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는 그 틈새를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이방인들이 보기에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고통스러운 할례의식을 거치지 않고서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커다란 매력이었다.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우월한 도덕적 행동은 법이나 관습, 혹은 계급에 근거한 윤리보다는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일반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존의 종교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도시와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려면 빵과 서커스에 돈을 써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교회는 여유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게 마땅하다고 가르쳤고 그대로 실천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은 평등을 실천했다. 특히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던 여성에 대한 견해는 로마인들의 그것과 분명히 달랐다. 로마인 가장들은 가족 모두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을 갖는 것은 물론, 장애자처럼 원하지 않는 아이기 태어나면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채 내다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달랐다. 기독교 교회를 이끌어가는 남성들은 여성에게 호의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할 정도로 부유한 여인들이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기독교 공동체가 여성을 존중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성을 존중하던 예수님의 교훈과 삶을 그대로 실천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여성을 열등하게 간주하는 유대인 남성들의 편견에 적극적으로 도전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 랍비들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랍비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직접 대화하고 가르쳤다. 여성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리고 부활의 소식을 접했을 때도 역시 누구보다 먼저 믿고 사람들에게 전했다. 세얼이 흐르고 교회의 직제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는 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여성을 존중했을 뿐 아니라 동역을 허락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인격적인 신을 제시했다. 로마의 신들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비인격적 존재였다. 반면에 기독교는 신적존재와의 직접적인 교제는 물론이고 그 이상의 무엇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을 경험한다고 간주했다. 이것은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골의 리옹에서는 블란다나(155?-177)라는 장애인 여성 노예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황제에게 분향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항한 것이다.병사들은 그녀를 경기장으로 끌고 가 벌겨벗긴채 십자가에 매달고 굶주린 맹수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맹수들이 그녀를거들떠 보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녀를 채찍질하고불에 달군 석쇠에 올려놓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황소우리에 내동댕이 쳐 황소들에게 들이 받치고 말았다. 블란다나는 결국 이렇게 순교했다. 숨죽이고 지켜보던 그리스도인들은 불란다나의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예수를 목격했다. 자신들처럼 야유를 당하고, 고통을 겪고, 슬퍼하시던 예수님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신체의 고통은 오히려 용기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카르타고에도 3세기 초반에 박해가 몰아닦쳤다.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145-211 재위)의 칙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페루페티아를 비롯해 다섯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투옥되었다. 로마 당국은 연료한 아버지를 내쉐워 이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 이때 페르페투아는 자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질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죽음이 기다리는 원형경기장으로 걸어 나가서 서툰 검투사의 검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가 가해지면 가해질수록, 그래서 고통의 강도가 심해지면 질수록 그만큼 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한 예수님과 하나됨을 극적으로 경험했다. 극심한 신체적 고통은 그들과 예수님을 잇는 매개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테르투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유재덕 지음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브니엘

 


일본 기리스탄(기독교)과 조선 침략

-최 상 한-

일본에서 서양 신부가 첫 발을 내디딘 때는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선교 사업을 시작하던 때보다 50여년이 앞선다.

1549년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신부가 꼬스모 데 도레스(1510-1579)신부와 후안 페르난데스(1526-1567)수사, 일본인 통역 안지로(安次郞)를 대동하고 안지로의 고향인 규슈(九州)의 가고시마에 도착하면서 일본에 카톨릭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안지로는 살인을 범하고 도망하던 중, 포르트갈 상인에 의해 말레시아의 몰라카로 가서 하비에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일본인 최초의 기독교인(기리스탄)이 된 인물이다.

15세기 말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면서 포루트갈과 스페인은 아시아의 식민지 경쟁에 박차를 가했다.

1520년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당한 인도의 고아는 동양 무역과 예수회의 동양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듬해에 포르투갈은 몰라카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아시아 무역과 선교를 위한 거점 기지로 삼았다. 포르투갈은 몰라카를 점령한 뒤 수도 리스본에서 카톨릭 교회가 이슬람에 승리했다고 축제를 벌이기도 했다.

1513년 포르투갈은 여세를 몰아 마카오에 진출했고 1533년에는 명나라로부터 마카오에서의 무역을 허가받게 되었다. 이로서 마카오는 동북아시아를 향한 무역과 선교의 발판이 되었다.

한편 스페인은 1517년에 동남아의 한 섬을 발견하고, 후에 국왕이 되는 스페인 왕자 필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을 필리핀이라고 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핀의 무슬림 정착지를 점령한 뒤 마닐라를 건설했다.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무역확장은 이렇게 카톨릭 선교와 병행되었다.

교황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에 보호권을 부여하면서 선교를 적극 장려했다. 보호권이란 원래 일반 신자가 성당이나 건물을 건축했을 때,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몇 가지 의무와 특권을 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보호권 제도는 선교수단보다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군사 정복을 정당화해 주는 도구로 변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점령한 몰라카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라카에 있던 하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 상인들과 안지로를 통해 일본에 관한 정보을 듣고 일본 선교를 강행했다. 하비에르 신부의 어깨에는 인도 고아에서부터 나가사가까지의 선교를 총괄해야 하는 임무가 걸려 있었다.

처음에 일본인들은 가톨릭을 불교의 한 종파로 받아들였다. 안지로가 번역한 하느님의 일본식 이름인 다이니찌(大日)가 일본 불교 진언종(眞言宗)에서 사용되는 말이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안 하비에르 신부는 데우스(deus)를 음역한 다이우소(提宇子)를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이름으로 사용했지만, 다이우소의 일본말 뜻은 ‘거대한 거짓말’이었다. 그리스도 용어가 일본어로 잘못 번역되면서 많은 혼선을 빚었다. 1595년 경에는 하느님이라는 말이 텐도(天道), 텐슈(天主), 텐데이(天帝)로 불렸다. 기리스탄이라는 일본말이 조선에 들어와서 여러가지로 음역된 것과 같았다.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는 다이묘(大名)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위로부터의 선교를 시작했다. 어떤 다이묘한테는 선물로 화포와 탄약, 회중시계, 망원경 등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하비에르 신부는 2년 동안 선교를 하면서 700여명을 개종시키고, 또레스 신부에게 일본 선교를 맡기고 인도 고아로 돌아갔다.

고아로 돌아간 하비에르 신부는 일본 선교의 성공은 곧 중국 선교에 있음을 믿고 1552년 8월 중국 광동에 상륙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2월에 병사했다. 그가 이루지 못한 중국 선교는 30년 뒤 마테오 리치 신부가 광동에 도착하면서 실현되었다. 마태오 리치 신부는 고아, 소주, 남창, 남경에서 20년 동안 활동한 후 1601년 북경으로 들어가면서 조선에도 알려졌다.

1583년 일본에는 32명의 서양 신부, 33명의 유럽출신 신학생, 약 15만 명의 일본인 개종자가 있었다. 1587년 이전에는 기리스탄이 20만 명, 교회가 200개나 될 정도로 일본 그리스도교는 급성장했다. 1549년 하비에르 신부 일행이 일본에 들어와 그리스도교를 전래한 이후 금교령에 의해 기리스탄들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1643년까지의 약 100년 동안을 일본의 ‘크리스천 시대’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300명의 서양 신부와 230명의 사제, 70명의 수도사가 일본 땅을 밟았으며, 1614년에는 약 37만명의 기리스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본의 그리스도교 교세 확장은 자연히 부산 앞바다를 통해 조선 내륙 깊숙이 기리시탄을 알리고 있었다. 일본 기리시탄의 존재를 조선에 알린 결정적인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1582년 일본 전역을 장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중국 침략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조선 침략에 포루트갈을 통해 들어오는 신식 무기인 조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양 신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587년 히데요시는 예수회 신부들과 만나서 조선과 명나라를 침공할 계획을 알리고 포르투갈 군함 두 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을 정복하고 나면 중국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 지원 요청에 꼬엘료 신부는 기리스탄 다이묘들과 합동 작전을 제안하는 오점을 남겼다. 꼬엘료 신부는 일본 선교를 총책임 지고있던 부관구장이어서 규슈 지방의 기리스탄 다이묘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성사되지 않았다. 히데요시는 서양 신부들이 불교를 탄압하며, 자신의 심복인 기리스탄 다이묘가 배교명령을 거부했다는 명분으로 일본 내에서의 신부 추방령을 내렸다. 이것이 1587년 의 ‘파테렌 추방령’이다. 그러나 추방령이 떨어졌지만 이로 인해 일본을 출국한 선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파렌텐 추방령이 떨어지자 꼬엘료 신부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무력으로 히데요시에 맞설것을 지시하고 , 포르투갈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은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이끄는 군대와 포르투갈 군대가 협공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세력과 전쟁을 일으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예수회의 동양 순찰사인 발리나뇨(1539-1606) 신부는 꼬엘료 신부의 조치에 격노하고, 포르투갈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바리나뇨 신부는 일본 문화와 풍습을 존중하는 토착화 선교정책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마테오 리치 신부의 중국 토착화 선교는 바로 바리나뇨 신부의 정책을 수용한 것이었다. 바리나뇨 신부는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전격적인 회동을 가졌다.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포르투갈과 기리스탄 다이묘들의 지원이 절실했다. 그는 과격한 선교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일본 내에서의 활동을 막지 않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조선 침략 계획을 알고 있던 발리나뇨 신부는 히데요시에게 조선 침략에 적극적 협조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파테렌 추방령으로 인한 위기 사태를 수습하게 되었다. 발리나뇨 신부와 극적인 타협을 이룬 히데요시는 드디어 조총의 총구를 조선으로 돌리게 되었다.

역사는 그리스도교 전파라는 명분으로 십자가를 높이 든 전쟁을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어간 예수는 십자가 군대로 인한 수많은 죽음을 또 당해야 했다. 일본이 조선 침략의 구실로 명나라를 치러 가기 위해 길을 빌리겠다고 한 ‘정명가도(征明假道)’ 는 ‘십자가도(十字假道)’로 변하고 있었다.

빌리나뇨 신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타협을 확인하듯 조선 침략의 선봉대를 이끈 왜장은 세례명이 아고스띠뇨였던 고니시 유끼나와(小西行長, ?-1600)였다. 소서행장의 선봉대 1만 8천 명 대부분도 기리스턴들로 구성되었다. 그의 부하 4명 중 소 요시토시와 아리마 하루노부는 기리스탄 다이모였다. 소 요시토시는 대마도 영주로서 임지왜란 1년에 발리나뇨 신부에게 사례를 받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딸과 결혼했다. 아리나 하리노부의 부하 장수 중 5명도 기리시탄 다이묘로 구성되었다. 이들 중에 오무리 요시아키의 아버지 오무라 스미타다는 아리마 하루노부와 함께 발리나뇨 신부가 이끄는 4명의 일본 소년 사절단을 유럽으로 파견한 인물이다. 이들은 규슈 지역의기리스탄 다이묘들이었다.

빌리나뇨 신부는 아리마 하루노부가기증한 불교 사원을 헐고 신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이들 기리시단 다이묘들은 세례명을 사용했으며 인감과 깃발에 십자가나 성상을 표시했다. 이렇게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선봉대는 발리나뇨 신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교는 조선 땅에서도 전쟁 개입이라는 역사적 과오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최상한의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돌베게 간 에서

*필자 최상한은 부산 출신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행정학 석, 박사학위 취득. 경상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음.


초기 기독교는 왜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았는가?

기원 64년 여름, 로마에서는 대 화재가 발생하였다.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가 노예들을 풀어서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보면서 시를 읊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네로 황제는 이러한 소문을 종식시키고 대화재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희생양을 물색하던 중 당시에는 소수에 불과하였던 기독교인들의 소행으로 소문 내어 그들을 제물로 삼아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로마연대기>에서 “이 소문을 막기 위해서 네로는 희생양을 만들어 냈고, 아주 정교하게 계획을 짜서 불량하기로 이름난 기독교인들을 처벌했다”고 기록하였다.

네로는 즉시 당시 로마지역에 거주하던 3,000여명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십 분의 1 가량을 재판정에 세워 그것을 근거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타키투스는 그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기 앞서 그들을 놀림감으로 사용하였다. 일부는 가죽을 걸친 채 개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리거나 산채로 불에 타며 밤을 새웠다. 네로는 자신의 정원을 개방해서 로마사람들이 이 모습을 관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 잔인하여 그러한 처벌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까지도 측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로마연대기 15,44)

신약성경 어디에도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하였다거나 순교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나 박해가 한창 극성이던 시기에 로마를 떠나지 못하고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 90년경에 기록된 클레멘트의 <편지>와 110년경에 안디옥의 감독을 지낸 이그나시우스에 따르면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다 순교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전해진 일화에 따르면 베드로는 순교의 순간에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병사들에게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로마 당국은 초대교회의 지도자였던 바울 역시 체포하였다. 바울은 이미 두 해 전에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상태였다. 로마시민에게는 십자가의 형틀을 사용하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일이어서 시민권 소지자였던 바울은 기원 64년에 교수형에 처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바울의 순교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네로의 박해는 네로 개인의 어이없는 미친 짓이었다 하드라도 당시 최고의 문명 대국이었던 로마제국의 시민들이 그러한 선동에 넘어가, 동조하고 열광하기까지 한 데에는 나름대로 어떤 근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들 사이에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에 근거했던지, 오해 때문이었던지 간에 로마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고 박해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소수자로서 무시를 받았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이 종말을 맞는 순간, 대재앙이 닥친다고 믿었다. 로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로마의 대화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상징으로 간주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며 로마 법정에서 사람들이 증언한대로 방화에 관여한 기독교인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들의 돌출적인 행동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큰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이교도 작가는 화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기독교인들의 혐오스러움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고 기록했고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모든 역겨운 것은 동쪽으로부터 온다”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또 하나의 미신을 믿는 사악한 자들의 집단’으로 간주했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은 왜 로마시인들에게 인기가 없었을까? 아테나고라스는 그 이유를 “기독교인을 비난하는 내용은 무신론, 인육을 먹는 만찬, 근친상간등 세 가지다”라고 하였다.

무신론 기독교?

로마시민들은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르는 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누구든지 유일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이스라엘의 야웨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믿었다. 일반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신이라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숭배하는 로마에서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낯 설은 것이며 오만하기까지 하였다. 로마인들은 어느 때는 알려지지 않은 신을 들먹이며 경배할 정도로 신심이 강렬한 듯하지만, 그들은 죽은 황제를 신으로 떠받들고 분향하였다.

로마사람들은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만 제사를 지냈다. 반복되는 일상적인 제사의식을 통해 로마제국이 신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럼으로 제국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일반인들의 눈에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비쳐지면 애국심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고, 심지어 집단적인 박해까지 받게 될 소지가 충분했다.

생소한 종교, 기독교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였다. 전통적으로 로마인들은 새것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었다. 새것을 고르다 실패하느니 낡았더라도 확실한 쪽을 선택하는 게 로마시민들의 일반적인 심리였다. 로마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유대교를 용납한 것은 유서가 깊다는 것이 일차적인 이유였는데 기독교인들의 교회는 로마인들에게 무척 낯 설은 새로운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고, 성전 역시 없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그런 기독교인들이 이상하고 불편했다.

그런데 외형상으로는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다.둘 다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들을 통해서 시작된 유대교와 기독교는 야웨에 대한 믿음을 공유할 뿐 아니라 다나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경을 믿었다. 초기 기독교인들 역시 유대인들의 성전에 예배하고 시편을 읽고 ,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런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분기점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인정하는가 여부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로마인들 역시 기독교를 옛 종교 유대교가 아니라 새로운 종교로 생각해 거부하게 되었다.

부도덕한 기독교

당시 기독교인의 풍습가운데는 오해를 살 만한 부분들이 있었던 듯 하다. 기독교인들은 일 주일에 한 차례씩 포도주와 빵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사랑의 식사(애찬)를 하면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과 식탁을 함께 할 기회가 없는 로마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말 그대로 사람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불렀는데 이집트에서는 성관계를 갖는 파트너에게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기독교인들은 성관계가 문란하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때 서로 ‘평화의 키스’를 나누는데 이것 또한 외부에서 기독교인들을 보는 사람들에게는오해를 사기에 충분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클레멘스는 “교회를 사랑 없는 키스를 일삼는 장소라고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키스는 신비적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의심과 소문을 부르는 빌미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밖에서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풍습을 보기에는 기독교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고, 어쩌면 위험한 밀교(密敎) 추종자들로 보였다. 거기에다가 초대교회에서는 요즈음과는 달리 성찬식에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만 참석하도록 엄격히 규제하였고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성찬식 때 자리를 떠야 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 마저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기독교인들이 식인과 근친상간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비난이 로마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던 것이다

가치관이 다른 기독교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은 기존 질서와 상당히 달랐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갈라디아 3:28)라고 선언하였다.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는 사회의 지위가 그리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 바울의 가르침을 그들의 삶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계급이나, 인종 그리고 교육이나 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녀가 함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성만찬에 참여하고, 가난한자나 환자, 고아와 과부, 그리고 죄수나 노약자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베풀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행동이 정치적인 이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지만 로마인들이 보기에는 불편하고 불안한 것이 사실이었다.

기독교인들은 노예를 비롯해 소외계층을 환대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였다. 로마법상 노예는 개인적으로 상속이 가능한 재산이었다. 노예는 주인의 어떤 요구든지 마다할 수 없고, 요구에 불응하면 가축처럼 목숨을 잃어야 했다. 여성의 지위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마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간주해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가 아기가 태어났을 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유기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생사여탈권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로마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노예를 환영하고 여성을 대우했다. 버림받은 고아들을 위해서는 고아원까지 운영할 정도였다. 기존의 사회질서와는 어긋난 행동이었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어 의혹이 쌓여 있던 중산층 로마인들은 로마시의 대화제는 기독교인들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자신들의 의혹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열광하였다. 그렇지만 기독교인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소문이 사실이 아니고 그들의 이웃 사랑이 진정한 것임을 체험한 서민층의 어려운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따라 교회를 찾았고 죽음을 무릎 쓰고 기독교 전파의 대오에 참가하였다.


*유재택 지음 <기독교 역사 >브니엘 간 참고하여 정리하였음


 

"들어 보셨나뇨? 정약용의 <조선복음 전래사>"

동방 그리스도교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도마(St.Thomas) 였다. 도마는 1세기 중엽, 인도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고, 실크로드를 걸어서 중국 내륙에 들어갔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1788-1856)은 그의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도마가 중국에 들어가기 약 250년 전 漢나라 때부터 ‘천주(天主)’라는 말을 사용하는 하느님을 믿는 종교가 중국에 있었다고 말한다.

7세기 중엽부터 唐나라 황실에서 네스토리안교를 경교(景敎)라고 불렀다. 경교란 ‘빛나는 종교’란 뜻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7세기 이전부터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 되었다면, 중국의 문명 영향권에 있는 한반도에도 그리스도교가 들어왔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다. 불교, 유교, 이슬람교 모두가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었는데, 유독 그리스도교만 유입되지 않았다면 이는 모순이다.

경주 불국사에서 7-8세기 유물로 보이는 돌 십자가상과 마리아상이 발굴되었다. 2009년에는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 때 임시로 이용되었던 조선 왕의 궁궐 터를 복원하기 위한 발국 조사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초대형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그중에는 ‘천주(天主)”라는한문이 새겨진 기와도 나왔다. 발해 땅이었던 남만주 일대에서는 발해 시대 유물인 기와 십자가도 상당수 발굴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를 푸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유물들을 뒷바침해 줄 문헌이 남아 있지 않아 동방 그리스도교의 한반도 전래는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은 부활한 예수가 불국사를 찾아가서 기념으로 놓고 간 것일까? 유물과 그것의 사료적 근거는 역사의 사실을 증명하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그러면 우리 역사에서 조선, 고려, 발해, 신라에 전래된 그리스도교를 기록한 고문헌은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한 사실들을 기록한 선조들은 없었을까?

현재 조선 시대 이전의 그리스도교 역사에 대한 고문헌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1592년부터 1871년까지 약 300년 동안 전래된 한국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집대성한 달레(Dallet, 1829-1878)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 Histoire de l’Eglise de Coree)에서 사료적 근거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1874년에 파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이 참고자료로 활용한 책은 1844년에 입국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다불뤼(Daveluy, 1818-1866)주교가 쓴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Notes pour l’histoire de Martyrs de Coree)이다.

<한국천주교회사>와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는 조선 중엽 이후후부터 그리스도교가 전래된 기원과 역사를 각종 자료와 서신을 수집하여 편집함으로써 조선 싣대 그리스도교 역사를 연구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두 책 모두 참고자료로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조선복음전래사>를 활용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한국 그리스도교 전래사를 최초로 저술한 이는 다산 정약용이라 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1784년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다. 이때 다산의 나이는 23세였는데, 성균관에서 진사로 들어간 지 1년이 지난 때였다. 다불뤼 주교는 <조선 순교자역사비망기>에서 다산의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조선의 천주교 기원에 관하여 우리가 대부분의 사실을 인용한 자료들은 자주 언급되는 정약용에 의하여 수집되었다. 그는 세례 때 요한으로 불렸다. 그는 시초부터 천주교의 거의 모든 사건에 관여하였고 또 거의 모든 주요 지도자들은 그의 친척이거나 친구였다. 그는 문학과 관직에서 ?뛰어난 사람으로, 천주교를 배반하는 나약함을 보였다. 그것으로 1801년의 그의 유배가 모면되지는 못했다. 수년 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그는 천주교를 열심히 믿으면서 그리스도교인 답게 사망하였다. 그는 또 약간의 종교저술을 남겼다. 우리는 불행히도 너무 간략한, 그러나 매우 잘 작성된 이 기록들을 베끼고 연결하는데 그쳤다.

잘 작성된 이 기록들이란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를 뜻한다. 달래 신부는 그의 책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다불뤼 주교보다 더 상세하게 다산의 말년을 묘사한다.

수년 후에 특사를 받은 정요한은 자기 죄에 대하여 오래고도 진실한 참회를 하였고 또한 모범적인 그의 열심과 극기로써 신도들을 위로 하였고 마침내 교화적인 임종을 하였다. 그는 여러 종교적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조선에 복음이 전래된 비망기를 남겨놓았는데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부분의 사실이 거기에 수집되어 있다.

1801년에 다산이 유배길에 올랐다고 함은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었던 신유사옥(辛酉邪獄)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때 다산의 막내 형 정약종(1760-1801)은 끝내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서소문 사형장에서 참수를 당했다. 다산의 자형이자 천주교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1756-1801)도 같은 날 참수당하고 말았다. 신유사옥으로 300여명의 신도와 청나라 사람인 주문모(1752-1801)신부가 사형을 당했다. 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고결한 목숨을 서슴없이 바쳤다.

달레 신부와 다불뤼 주교가 다산이 천주교를 배반했다고 한 것은, 다산이 전라도에서 발생한 진산사건에 충격을 받고 천주교를 버린 사실을 말한다.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다산의 이종육촌인 윤지충(1759-1791)과 권상연(1751-1791)이 예수를 믿고나서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하여 조선 양반사회를 큰 충격의 도가니에 빠뜨렸는데, 이것을 진산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산은 천주교를 배교했지만 한번 믿었다는 것을 빌미로 18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다.

유배기간동안 다산은 <목민심서>, <경세유포>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은 향리에서 저술 활동을 계속 하는 동안 배교한 것을 뉘우치면서 속종의 삶을 살며 천주교 신앙을 굳게 지켜 나갔다. 다산은 1836년에 중국 사천 출신으로 이태리 나폴리 신학교에서 공부한 유방제 신부에게 마지막 성사를 받으면서 그의 험난한 생애를 끝마쳤다.

다산 정약용은 500여편의 책을 저술했다. 달레 신부와 다불뤼 주교가 그들의 책에 인용한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한반도에 전래된 그리스도교 역사를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함께 기록한 책으로 추측된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서 땅밑에 감춰진 이 책은 어쩌면 발굴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불뤼 주교는 1856년에서 1858년 사이의 어느 때에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수집했고, 다른 많은 자료와 함께 이 책을 보관했는데,1863년 그가 살던 집에 불이 나서 모든 자료가 타 버리고 마라았다. 달레와 다불뤼의 책들을 살펴보면 임진왜란 이후 조선 그리스도교인의 전기, 이벽(1754-1786)의 천주교 토론회, 조선에 그리스도교 서적들이 유입된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다산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인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500여편의 저술을 남긴 다산의 필력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달레와 다불뤼의 기록보다 더 구체적으로 조선의 그리스도교 전래사를 집필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알려진 다산의 문헌에는 이 책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단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등에 천주교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만 전해지고 있다. 신유사옥으로 가족과 동지를 잃고, 자신도 모진 유배생활을 하느라 책의 존재를 다른 문헌에 소개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참수 당한 다산의 막내 형 정약종이 한국 천주교회의 첫 한글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남겼고, 조카인 정하상(1795-1839)은 천주교 박해가 부당하다며 천주교의 자유를 주장한 <상재상서>를 집필했다. 정하상은 다산이 임종하고 3년 뒤인 1839년에 일어난 기해사옥(己亥邪獄)때 참수를 당했다. 형과 조카의 책이 전해져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에 귀중항 자료로 활용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조선복음전래사>의 행방은 아쉬움을 더한다.

<조선복음전래사>가 현존한다면 그리스도교가 1784년 이전에 어떻게 조선에 유입되었고, 다른 종교들과는 어떻게 융화되고, 조선 사회에서는 이를 어떻게 수용했는지에 대한 소중한 문헌이 될 것이다.

*최상한 지음 <불국사에서 만난 예수-돌베개 출판사 간>

*부산 출신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행정학 석, 박사학위 취득. 경상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음.

 


중국 ‘상티’(上帝)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동일시한 마테오리치

김 상 근

마테오리치의 대표적인 저술 <천주실의>는 단순한 교리서가 아니었다. ‘상제’는 결국 우리가 믿는 하나님(天主)이며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라는 혁신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리치의 <천주실의>는 17세기 조선으로 유입되어 조선의 실학사상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583년, 두 명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이 중국 광동성의 번화한 도시 차오칭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 두 명의 이탈리아 선교사들의 이름은 미셀 루지에리(Mishele Roggieri)와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였다. 이들은 모두 로욜라에 의해 설립된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다.

중국 한족이 통치했던 당(唐) 왕조와 몽골족이 통치했던 원(元)왕조 기간 동안에는 외국인의 중국 출입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사상을 더욱 강화하며 외국과의 외교통상관계를 단절하고 있었다. 중국의 동해안에 창궐했던 일본 해적들의 노략질도 중국인들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빌미가 되었다.

인도 동남부 해안지역과 일본 선교의 문을 열었던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 때부터 이미 예수회에 소속된 아시아 지역 선교사들은 토착문화와 종교를 존중하고 상위계급을 먼저 접촉하는 소위 ‘위에서 아래로’의 선교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또한 서양의 진보된 과학문물을 소개하면서 간접적으로 기독교의 복음과 유럽의 문명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선교전략이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유럽 최고의 인문과학 분야의 훈련을 받고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파송되었는데, 마테오리치의 경우도 당대 유럽 최고의 인문지리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마테오리치가 중국 본토로 들어가서 제일 먼저 착수한 선교사업은 다름 아닌 세계지도의 제작이었다. 세계지도를 상류층 중국 지식인들에게 먼저 소개함으로써 서양의 진보된 문명을 기독교와 연관 짓고자 하는 의도와 더불어,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명나라 말기의 중화사상에 일침을 가하려는 고도의 선교 전략이었다.

리치의 의도대로 1583년에 제작한 <곤여전도(坤輿全圖)>라는 세계지도에 이어 이듬해에는 보다 정교한 <산해여지전도(山海輿地全圖)>가 광동성의 중국 지성인들에게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광동성의 지식인 관료들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 유럽 선교사에게 매료되기 시작했다. 선교사 리치는 이들 광동성의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중국 상류층을 파고들어 이들 사람들과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명대 중국인들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에 대한 지식을 넓혀갔다.

이때 일어난 중요한 선교정책상의 변화는 그때까지 선교사들이 입고 있던 불교 승려의 가사(袈裟)를 벗고 유교 사대부의 선비 복장을 입기 시작함으로써 기독교와 중국문화의 접촉점(Point of Contact)이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광동성에 머무는 동안 리치는 클리비우스의 <기하학 Elements of Geometry)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하였으며, 1591년에는 최초로 중국의 고전인 사서(四書)를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594년부터 마태오리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쓰여 지기 시작한다. 리치는 10년이 넘도록 광동성에 거주하며 중국 사대부들과의 친분을 넓히는 동시에 유학 연구에 정진하고 있었지만, 상류층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다는 원칙에 따라 수도 베이징에서 황제에게 직접 선교하겠다는 꿈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었다.

난징에서 리치는 중국 사대부와 황제의 친족들과의 교류를 더욱 넓혀갔다. 그들의 요청으로 유럽의 중요한 윤리 덕목을 소개하기 위하여 키케로(Cicero)의 <우정에 대하여>를 중국어로 번역, <교우론>이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중국 지식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리치의 대표작인 <천주실의>와 함께 이후 조선으로 유입되어 조선의 실학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난징의 사대부들은 리치가 지닌 기억술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 고전의 한 페이지를 한번 읽고 그 문장을 정확하게 암기할 뿐 아니라 문장의 역순까지 암기하는 탁월한 기억술을 지닌 리치는 중국 지식인들에게 기이한 존재였다.

베이징 선교를 향한 마테오리치의 줄기찬 노력은 1601년 1월 24일 마침내 성취되었다. 외국인의 중국 출입을 관장했던 예조판서의 특별조치로 리치와 예수회 선교사들의 베이징 체류가 잠정적으로 허용된 것이다. 특별히 황제에게 선물로 바친 자명종이 고장 날 경우를 대비해서 시계기술을 가진 유럽의 선교사가 항상 상주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마테오리치는 1610년 사망할 때까지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그토록 원했던 명 황제 신종(神宗)을 직접 알현하지는 못했지만, 베이징 체류 10년 동안 리치는 수많은 저술작업에 몰두하여 동아시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603년 베이징에서 출간된 <천주실의>와 1608년에 출간된 <기인십편畸人十編) 이 그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는 단순한 교리서가 아니었다. 마테오리치는 이 책을 통하여 기독교의 하나님(Deus)과 중국의 절대신인 상제(上帝)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연구하였다. <천주실의>에서 리치는 유교 고전에서 ‘상티’(上帝) 가 어떠한 신격을 가진 중국의 절대자였는지를 상세히 고찰한 다음, 고대 중국 유교의 절대 신이었던 이 상제야 말로 유럽의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과도 같은 절대신임을 주장하였다. 이를 리치는 “수많은 고전을 검토한 결과 상제는 천주(天主)이며 단지 이름만 다를 뿐이다”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리치의 혁신적인 발상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2천년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시도한 중국 유교의 절대신과 기독교 하나님과의 동일화 작업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신학적 발상이었다. 선교지 현장의 문화와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흔히 ‘잡신’이나 ‘우상’으로 간주되던 선교지 토착종교의 절대신과 기독교의 하나님을 동일시하였던 마태오리치의 생각은 심각한 신학적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 문제가 심각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중국 지식인들과 동아시아의 유교학자들에게 이 문제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리치의 동일화를 극렬히 반대하였다. 동시에 보수적인 중국의 유학자들도 리치의 동일화 작업을 반대하면서 자신들의 ‘상티’를 마태오리치가 “도적질하여 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중국 기독교 역사를 혼돈으로 몰고갔던 17,8세기의 전래논쟁(Chinese Rites Contriversy)으로 이어졌다.

마태오리치의 <천주실의>는 17세기 조선과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혀 졌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익, 이헌경, 안정복, 신후담 등 성호(星湖) 계열의 지식인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명나라 말기의 중국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각도에서 기독교를 소개한 마태오리치는 복음이 어느 정도까지 선교현지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릴 수 있는지 대한 중요한 물음을 남겼다. 유교의 절대신을 사악한 이방인의 잡신으로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의 접촉점(A Point of Contact)으로 보았던 리치의 노력을 통해, 기독교는 유럽이라는 지역적 범위를 넘어서서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한 것이다.

*김상근 저 <기독교의 역사, 평단 간)에서

*지은이 김상근 교수는 프린스톤 신학대학원에서 강사로, 연세대학교의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저서로는 <기독교의 역사>, <인물로 읽는 교회사> 그리고 <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등이 있다.


 

원나라 경교(景敎), 야리가온(也里可溫)

-구 범 모-

징기스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 경교도들의 치료로 병이 나은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어머니 별길 황후는 독실한 경교도로 소문이 났다.

정부의 탄압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린 당나라의 경교는 300여 년만에 원나라에서 ‘야리가온(也里可溫)’이란 이름으로 다시 살아났으며 그에 대한 연구 역시 당나라의 경교보다는 많이 이루어져서 1917년 중국의 경교전문가인 진원(陳垣)이 쓴 <원나라 야리가온교 고찰>은 원나라 경교연구의 경전과도 같다.

야리가온은 몽고와 원나라에서 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지칭하던 이름으로 “복을 나눠주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나 그 어원은 분명치 않으며 ‘여호와’를 아라비아어로 음역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리고 원나라 이후에는 ‘야리가온”이 더 이상 경교의 명칭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

원나라 역사서에 보면 아리가온(경교)교는 불교, 도교와 더불어 원나라 3대 종교중의 하나로 꼽혔으며 조세정책에 있어서도 불교나 도교 못지않게 고려대상으로 삼은 것을 보아 야리가온의 성장세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불교를 관장하는 기구로 선정원, 도교를 관리하는 기구로 집현원과 함께 야리기온을 관장하는 기구로 숭복원을 만들었는데 (1289년) “주교와 수사를 관리, 감독하며 제사의식 등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원나라 때 전국의 51개 지역 및 도시에 경교 사원이 있었고 이중 10곳에는 주교구가 있었다고 하니 막강한 교세를 짐작할 수 있다.

‘야리기온”은 특히 중국과 서방을 잇는 육로 교통상의 경유지거나 중-서 해로교통과 관계가 있는 상업용 항구등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파했으며 중국땅의 ‘야리기온’들은 몽고군을 따라 각 교통요지와 상업부두 등을 중심으로 흩어져 살았다.

당나라 때 경교는 역대 황제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원나라 때도 ‘야리가온”은 제왕의 무병장수와 복을 빌어 통치계급의 은총을 입었다. <원장전(元章典) 33권에 보면

“지원 14년 11월 징기스칸 황제와 하한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야리기온 성직자는 모든 것을 접어두고 매일같이 오로지 황제의 무병장수의 복을 빌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야리기온’이 역대 황제들로부터 총애를 받은데에는 징기스칸의 아들인 태자 눌리의 병을 거뜬히 고친 독실한 경교도였던 써리빠라고 하는 명의의 <명약> 써리빠의 덕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써리빠가 당시 진강 교구 주교 및 교도들과 함께 태자의 쾌유를 비는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여 ‘야리기온’ 신도들의 절박한 기도와 정성이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 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다는 의미다. 징기스칸 역시 명약 써리빠만 중요하게 여긴것이 아니라 신의 역사를 가능케 한 ‘야리가온”의 기도도 소중히 여겼고 경교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표시했을 뿐 아니라 병이 나음을 받은 황태자 툴리의 아들 쿠빌라이 역시 ‘야리가은’을 적극 지원함으로‘야리기온’은 몽고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할 수 있었음을 알수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징기스칸 가족과 후손들 가운데는 ’야리기온(경교도) 들이 많이 생겨났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쿠빌라이의 모친인 별길 태후, 나이마쩐 황후, 카툰 妃, 주후찐 공주 정도가 이름을 전하고 있다.

특히 징기스칸은 종교문제에는개방적이고 관대하였으며 혼인동맹을 통한 외교에 관심이 많아서 다른 부족의 여자들을 아내나 메느리로 삼는 한편 집안의 공주들을 다른 부족에 왕후나 공주로 보내면서 ‘경교도 여인들이 황실의 안주인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덕분에 야리기온’(경교)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게 되었다. 원나라 공주들이 고려의 왕비로 왔던 고려 말기, 원나라의 “야리기온”도 고려에 전파됐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데 아직까지는 별다른 증거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원나라 성종시대(1229-1240)와 이보다 앞선 태조시대(1206-1227) 그리고 다른 황제들의 통치연간에 경교도들은 불교도들과 다름없는 병역과 납세의 면제라는 특권을 누려왔다. 경교도들이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이러한 큰 우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원나라 황실은 2품 벼슬의 높은 관리를 책임자로 하는 경교 관리기관인 숭복사까지 두고 경교를 우대했으니 그 세력이 얼마나 번성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경교가 얼마나 융성했길래 또 원나라 황실 및 조정과 얼마나 우호적인 관계가 유지됐길래 황제까지 나서서 이들을 각별하게 대했을까? 원나라때 문서들은 경교가 불교 및 도교 등과 함께 대단한 세력을 형성했다고 적고 있다. 경교는 황실의 비호아래 한때 융성했던 당나라 때보다도 원나라에서 더욱 눈부신 발전을 구가했다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원나라 때 경교는 중국 전역으로 전파됐고 그래서 곳곳에 경교사원들이 있었다.중국 땅에 복음이 만개하였다고 할 수 있을것이다. 당시 경교도가 얼마인지를 밝힌 문서상의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이다.

연안에서 발견된 경교의 십자가 상

원나라의 경교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몽고인들이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160여년 동안 경교도 더불어 강성했다. 중국대륙과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페르시아, 바그다드,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등지에서도 그 교세가 천주교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나라 때 중국에서 불교, 도교와 더불어 3대 종교로 자리 잡았던 경교다. 그만하면 융성했던 교세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나라에서 210년 간 존속했던 경교는 원나라 때 다시 중국에 들어와 160여 년동안 무서운 기세로 전국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는 또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삽시간에 종언을 고했다. 당나라 때 일패득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판에 박은듯 꼭 닮았다.

역사의 반복이다. 1368년 원나라가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면서 경교 또한 패주하는 몽고의 칸을 따라 고비사막 깊숙한 곳으로 사라져 갔다. 그 원인 역시 당나라 때와 판박이다. 중국 내륙의 한인(漢人)들 속에 녹아들어 주류사회의 종교문화로 자리 잡지 못했던 때문이다. 경교가 당나라 때와 원나라 때 두 차례나 중국 땅을 밟으면서도 여전히 이방종교의 티를 벗지 못했다는 얘기다. 늘 “그들만의 잔치’로 끝났던게 너무 안타깝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인 게 하나 있다. 야리기온으로 불리던 원나라 경교도 당나라 때처럼 중국 내륙에서 그림자도 없이 자취를 감췄지만, 그 흔적만큼은 선연하게 남겼다는 사실이다. 천주, 양주, 북경, 내몽고, 신강 등지에 남아 있는 경교석각 등 수많은 유물유적 들은 당시의 영화를 증언해주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경교는 ‘사막의 종교’였다. 사막의 폭풍 속에서 시작돼 다시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경교는 기실 5세기 중반 콘스탄티노플교회의 대주교이자 걸출한 신학자였던 네스토리우스가 당시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이른바 ‘로마세력’의 탄핵으로 파문을 당해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를 전전하다가 사막에서 객사하면서부터 시작된 종교다. 그를 따랐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자 분노와 슬픔속에서 더욱 분발하였다.

자신들에 대한 로마제국과 교회의 탄압과 박해가 더욱 지심해짐에도 이들은 끝내 “성모 마리아는 하나님이나 예수님과 같은 신이 아니다”는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고 따랐다. 온갖 협박과 회유속에서 집안이 풍지박산 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극한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종교적 신념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츰 차츰 변방으로 쫓기며 밀려 났다. 소아시아, 페르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등지에 오기가지 숱한 강과 험산준령,사막을 견디고 넘고, 가로질러야 했다. 이들이 겪었을 그 엄청난 고통과 고난은 아마도 상상을 극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경교는 마침내 중국 땅 당나라에 도착해 2백 10년 동안 꽃을 피우다가 사막으로 쫒겨났다. 다시 원나라 때 중국 내륙 깊숙이 들어와 1백여년 동안 번성하다가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또 다시 사막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사막은 경교의 탄생지이자 무덤이었다.

 

*구범회 지음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당(唐), 원(元)시대 기독교 이야기>에서

*지은이 구범회님은 기자로 연합통신 초대 북경특파원을 지냈으며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중국연구소에서 중국어와 중국을 공부, 미코헨신학대학에서 성경을 연구. 현재 성경 및 경학연구 및 집필 활동중.


 

징기스칸과 경교(景敎)3백여 년 만의 부활?

-구 범 회-

당나라 말기부터 북송에 이르기까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즉 경교는 공식적으로는 중국 본토 안에서 이미 자취를 감췄다. 당시의 문헌들을 뒤져 봐도 경교에 관해 언급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북방과 서북 변방지역의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경교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었다. 비록 한 보잘것 없는 이단의 기독교파로 푸대접을 받고 있을지언정, 복음을 향한 그들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다. 당나라 때 중국 땅 전역에 복음을 전했던 경교의 영광은 이미 사그러든지 오래지만, 이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역량을 쌓아가며 때를 기다렸다고 할까.

마침내 기회가 왔다. 당나라 회창(會昌) 5년(서기 845년), 쓰러진 경교의 <대진경교 유행중국비>가 땅속에 묻힌지 3백 60여 년 만에, 훗날 세계를 제패한 몽고제국이 일어선 것이다. 이때 서북 변방지역 소수민족 사이에 퍼져있던 예수교도(경교)들은 몽고인 기마대를 따라 상단의 대오를 갖추고서 아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뻗어 나갔다. 이에 앞서 그들은 중국 내지로 진출했다. 이들은 몽고인들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변방의 경교도들과 중국의 경교도들은 한배에서 나왔음에도 서로 적대시하는 ‘불행한 형제관계’였던듯 하다. 몽고인들을 따라 중국에 들어온 이들 예수교도들은 자신들만이 네스토리스파 기독교의 정통을 이은 ‘적자’라고 주장하며 당나라의 경교도들은 교리와 본분을 망각한 채, 황실과 유착하고 타락해서 몰락을 자초했다고 생각했다. 중국내 잔류세력과의 갈등이고 충돌이다. 사람 사는 세상, 특히 종교계에서 흔히 있는 일종의 정통성의 경쟁이다

12세기 말, 중앙아시아 초원의 동부에 흩어져 살던 몽고 부족들은 빠르게 통합하여 강성해졌다. 세계를 향해 표효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원래 이 광활한 초원은 스키타이족을 비롯해 흉노, 돌궐, 거란 족의 고향이다. 이들은 모두 이동이 자유로운 유목민족이다.

이들 앞에 영웅이 나타났다. 테무진( 鐵木眞)이다 . 그의 통솔아래 통합된 몽고인들은 유사 이래 최강의 태풍으로 돌변했다. 질풍노도같은 몽고인들의 기세는 당시 문명세계에 가공할 충격이었다. 1206년 몽고 각 부족은 하나같이 테무진을 그들의 ‘징기스칸(成吉思汗)’으로 추대했다. 칭기스칸은 천하의 유일한 칸, 다시 말해 ‘세계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징기스카은 몽고족을 통일한 뒤 3차에 걸쳐 서쪽의 아시아와 유럽정벌에 나선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고 아시아와 유럽의 많은 민족들에게 재앙이었다. 그러나 참화 속에서 동쪽의 태평양에서부터 서쪽의 지중해, 남쪽의 인도양에 이르기까지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몽고 기마병들이 말발굽 소리가 금나라와 남송으로 치달으면서 그들을 따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경교)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점령한 몽고인들은 원래 하나로 이루어진 단일민족이 아니었다. 여러 유목민 부락들로 구성된 민족공동체였다.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이미 이 시기(遼-金 시대)에 일부 부족 사이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경교)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이때 경교는 극렬부, 내만부, 왕고부, 메얼치부에서 많은 신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도 극렬부는 몽고고원에서 가장 강력한 부락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극렬부는 11세기 초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20만 백성 모두가 경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3세기 중엽 프랑스 국왕의 특사로 몽고를 방문했던 길로메 드 뢰부루는 “내만인들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이며 와한으로 칭하는 최고통치자 밑에 있는 극렬보와 메얼치브 사람들 또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라고 기록했다.

샤마니즘을 신봉하는 낙후한 몽고인들이 경교를 믿는 부족들을 정복하고 흡수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경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고의 신하가 되기로 충성을 맹세한 피정복지 귀족들은 몽고의 통치집단에 합류했고, 이들 귀족집안의 부녀자들은 후비로 간택되거나 아예 ‘혼인동맹’을 맺기도 했다.

징기스칸은 각종 종교에 대해 상당히 너그러웠다. 이에 따라 경교에도 충분힌 입지와 함께 마음껏 선교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졌다. 실제로 징기스칸의 넷째 아들 툴니(Tulni)는 극렬부 수령의 조카딸인 수얼루허니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녀가 바로 몽쿠와 쿠발라이, 울라구를 낳은 별길태후다. 당시 그녀는 천하가 다 아는 유명한 경교도였다. 몽고인과 경교의 관계는 이처럼 각별했다.

몽고인들이 중원으로 들어가 통치 질서를 세우면서 경교 또한 중국 내지로 다시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장정은 순항했다. 경교도들에게는 그야말로 3백여 년만의 귀향이자, 복음의 부활이었다.

*구범회 지음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당,원시대 기독교 이야기- 나눔사>에서

 


 

<교회사 산책 9>

왜 당 나라에서 경교(景敎)는 몰락했나?

-당(唐)태종의 총애를 받던 경교(동방 기독교)가 갑자기 몰락한 이유는 무엇인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당나라 때 중국땅에 들어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2백여 년 동안 존속했다. 이 사실은 당나라 덕종 때인 건중(建中) 2년(서기 781년)장안 대진사에 세워졌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약해서 경교비라 부른다>의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당태종은 경교의 교리에 특별한 관심을가지고 포교에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경교사원을 건축하는 일에도 편의를 제공하면서 경교와 경교도들을 각별하게 보살폈다.

한편 수도 장안을 비롯 낙양, 양주, 광주 등 도시에는 수많은 페르시아 상인들이 몰려왔는데 그 가운데는 상당수가 경교도들이어서 태종이 죽은 후에도 고종, 현종 때에는 경교가 계속 번성하였다.

현종의 대를 이은 대종과 덕종때에는 당나라의 위세는 태종때와는 차이가 많이 났으나 경교비가 세워지(서기 781년)는 등 경교(景敎)가 당( 唐)나라에 전파된 후 1백 46년동안 중국땅에서 계속된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경교는 당나라 무종(武宗)황제 때인 회창 (會昌) 5년(서기 8백 45년) 에 불교사찰 철폐를 명한 이른바 ‘훼볼사제‘(毁佛寺制’_의 유탄을 맞고 중국 내륙에서 자취를 감춘것으로 알려졌다.

경교가 중국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지 200여년 만에 공식적으로는 무종황제의 외래종교 탄압정책에 의해서 주대상인 불교와 함께 사악한 ‘오랑캐 종교’의 하나로 찍혀 포교가 금지된 것이다. 이때는 당나라가 중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던 시대로 국력도 초, 중기에 비해 크게 쇠약해져 있던 상태로 종교적 측면에서는 역대 황제들의 종교관용정책으로 불교가 무종(武宗)이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을만큼 비대해지자 불교를 멸하기로 작정하였고 이참에 명분을 위해 ‘서방 오랑캐’ 에도 철퇴를 가했는데 경교는 여기에서 피할 수 없었던듯 하다.

경교의 몰락과정에 관한 사료는 별로 찾아 볼 수가 없다. 무종황제의 불교 사찰 철폐에 관한 사료들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전해지기 때문에 그것들을 통해서 경교의 몰락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무종은 불교 승려들의 승적을 박탈, 양반으로 환속시키는 과정에서 경교, 마니교, 조르아스터교 등 서쪽에서 온 세 ‘오랑캐 종교’에 대해서도 일제히 활동을 중단시켰다고 역사서들은 쓰고 있다. 무종황제가 내세운 이유는 “불교도 이미 정리된 마당에 경교 등을 비롯한 사법(邪法)들만 홀로 남겨둔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 종교의 성직자들도 환속시켜 고향으로 돌아가 충실하게 세금을 내는 양민으로 살게 하고 외국인들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 보내 관리하라는 게 황제의 교지이다. 물론 이것은 당연히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

신(新), 구(舊) 당서( 唐書)에 기록된 숫자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구당서>에는 “경교와 조로아스터교의 3천 여명을 강제로 환속시켰다”고 쓰여 있으나 <신당서>는 경교 및 조르아스터교의 2천여 명을 환속시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원수는 이들 종교 사원의 성직자수를 가르키는 것이지 그 신도를 지칭한 것은 아니다.

경교의 몰락

무종의 불교타파는 기실 불교를 완전히 멸절시킨 것은 아니었다. 전국의 불교사찰을 줄인다는 명분 아래 전국에 극소수의 불교사찰들을 남겨 놓았다. 사실상 철폐나 다름없는 것이지만 장안과 낙양에는 2개소씩의 사찰을 살려 놨다. 그리고 절의 승려수를 유능하고 법력높은 승려만을 엄선, 30명으로 제한했다. 수도 장안의 경우, 좌가에는 자은사와 전복사, 우가엔 서명사와 장엄사를 각각 그대로 놔뒀다.

그러나 재앙의 유탄을 맞고 “연못 안의 갇힌 물고기”신세가 된 이 세 오랑캐 종교는 아주 빠른 속도로, 그리고 철저하게 명맥이 끊겼다. 중국인 승려의 경우, 강제로 환속시켜 고향으로 보내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양민으로 살게 했다. 외국인 승려들은 서역에 가까운 변방으로 보내져 관의 특별 관리 아래 두었다. 말로는 ‘본처(本處)로 보내졌다고 하지만, 그 ‘본처’가 어디인지 분명치 않다. 그들이 태어나고 선조들이 살던 중국내 원래의 근거지를 지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국경 밖으로 축출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는 이미 강성했던 시절이 아니었다. 무종황제 또한 대당(大唐)시대를 열어 천하를 호령하던 당태종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라의 위세나 개인의 영향력이 역시 비할바가 아니었을 수밖에.

이 와중에서 경교는 어떤 파란곡절을 겪으며 스러져 갔을까. 1천 1백여 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때의 비탄과 절망, 포한과 절규가 뒤엉킨 참담한 광경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수도 장안과 낙양, 그리고 전국 각 지에서 경교사원들은 파괴되며 폐허로 변해갔다. 사원의 성직자들은 강제로 환속되는가 하면 일부는 강제 출국 조치됐다. 교회 조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경교도들은 사회적 냉대와 눈총 속에서 오합지졸만도 못하게 뿔뿔이 흩어졌다.

장안 대진사에 세워져 있던 <경교비>는 어찌 됐을까? 경황 중에 황망히 쫒겨 갔던 경교 승려들은 기약도 없이 <경교비>를 땅 속에 묻었다. 그렇다고 경교가 무종황제의 철퇴에 떠밀려 중국 땅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내륙은 물론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변방에서는 여전히 건재했다. 왜냐하면 당시 쇠락의 길을 걷던 당나라 황제의명령이 특히 변방의 세력들에게는 한낱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무종의 이같은 종교 말살 정책으로 인해 기독교의 최초 중국전파 노력은 이쯤에서 좌초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메인 그라운드를 잃었으니 움치고 뛸 수가 없었다. 경교의 이같은 좌절은 중국의 유장한 전통과 문화적 배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수천 년 동안 중국사회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사상체계와 윤리의식, 신분계급제도 등이 경교의 몰락을 부추겼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군주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가진 ‘천자(天子)’였다. 따라서 군주의 권력보다 더 높은 것은 없었다. 적어도 중국에서는 종교가 하나의 독립적인 사회세력이 된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군주의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중국에서 군주는 종교를 선택하고 지배할 수 있지만, 종교가 군주를 선택하고 지배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기독교 신학이 지배적 권위를 가졌던 중세 유럽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경교가 중국 땅에 유입된 이래 경교를 지탱해준 가장 큰 버팀목은 무엇이었을까.

신앙의 역량이었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당나라 백성들의 공감과 호응이었을까. 물론 말씀의 힘이었다. 여기에 복음이 올바른 진리임을 알아본 태종을 비롯한 당나라 초, 중기 황제들의 지원과 신뢰가 큰 보탬이 됐다. 경교에 대한 당 황실의 지원과? 보호는 경교의 입교보국(立敎報國)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당나라 중엽이 지나면서 당시 세계정세는 경교에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됐다. 당나라 등 세계열강의 사력 판도는 변화무쌍하리 만큼 부침이 심했다‘안사(安史)의 亂’이 일어났던 바로 그 해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高仙芝)가 이끌던 당나라군은 중앙아시아 지역(카자호스탄 일대)에서 아라비아제국 군대에게 패했다. 당시 이슬람교를 앞세운 신흥강국인 아라비아는 페르시아 사산왕조를 정복한 뒤 동진(東進)을 거듭해, 그 세력이 이미 중앙아시아 각지에 미쳤다. 이런 상황속에서 당나라의 세력판도는 점차 좁아져 서역으로부터의 철수 등 수세를 면치 못하던 형편이었다.

이같은 변화는 특히 경교에겐 후방근거지의 상실을 의미한다. 중국땅에 뿌리를 내리고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경교의 명운에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었다. 경교 자체적으로도 중국 안에서 독자적 기반을 갖고 복음을 전파해 나갈 만큼 탄탄한 입장에 있지 못했다. 당나라 초기 황실의 보살핌 등에 힘입어 경교 또한 ‘좋은 시절’을 보냈지만 통치이념과 규범 등은 항상 유교사상에 바탕하고 있었다. 이처럼 통치세력의 확고한 통치철학으로 자리 잡아 독주하던 유학(儒學) 앞에서 경교가 끼어들 틈은 애초부터 지극히 협소했다.

경교는 또한 도교와도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도교는 중국 땅에서 자생해 ?오랜 역사를 이어온 토종(土種) 종교다. 동한(東漢) 말에 생겨나 위(魏),, 진(晉)나라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크나큰 발전을 이룩했다. 기층민중은 물론이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지지기반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당나라로 접어들면서 도교는 당 황실로부터 “특별대접”까지 받으며 날로 번성해 갔다. 왜냐하면 당 황실이 도교의 교주로 추앙받던 “태상노군(太上老君)” ?이이(李珥)를 먼 옛날의 자신들 조상으로 여겨 각별히 배려했기 때문이다. 이런 “특혜’속에서도 도교는 불교와 나란히 가며 일정 충동하지 않는 노련함과? 지혜를 잃지 않았다.

경교는 같은 외래종교인 불교보다도 세력이 훨씬 뒤쳐졌다. 불교는 서한 (西漢) 말 중국에 전래 돼 5-6백년 동안 변화를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중국 고유의 유교 사상과 융합해 당나라 때는 이미 기본적으로 ‘중국화’된 종교였다. 그래서 당 황실로부터도 황제의 권력을 받치는 한 축으로 대접받을 정도였다. 특히 불교는 당나라 때 눈부신 발전을 이루면서 최고의 번성을 누렸다. 위로는 황제의 친인척으로부터 사대부 관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래로는 백성과 상인, 군인, 하인 등에 이르기까지 그 신도수가 사회 각계각층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던 불교가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부패한 나머지 스스로의 통제력과 발전 동력을 상실했다. 백성은 굶주리는데 사찰과 사원, 승려 수는 부지기수로 늘어났고 그 소유 전답과 재물 또한 한없이 비대해져 통치세력의 근본 이익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종황제도 이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부득불 불교 타파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에 비해 경교는 이들 儒, 彿, 道 만큼의 영화나 특전은 누리지 못했다.

중국 땅에 전래된 지 2백여 년이 지났지만, 중국 사회에 시종 확실하게 뿌리를 내렸다고 보긴 어렵다. 경교도중 상당수는 중국 땅에서 장사하기 위해 서역에서 건너온 외국 상인들과 중국 땅에 발붙이고 사는 외국이민자들이었다.

20세기 초 동황에서 발견된 한문 경교 문헌들을 보면 경교 선교사들은 중국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또 <경교비>를 편찬한 경교 고승 경정(景淨)도 혼자 힘으로 30종에 달하는 경교 서적들을 번역해내는 높은 학덕과 뚝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이처럼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유교, 불교, 도교의 틈바구니에서 늘 “곁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기반이 없다시피 하니까, 전쟁에 나가 몸으로 때워 공을 세우면 그것으로 한동안 연명하는 , 어찌보면 황제와 황실의 ‘마당쇠’같은 존재였다. 당시 당나라 주류사회와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 살아남기 위한 이들 기독교인들의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생존과 선교를 위해 자자손손 한 마음 한 뜻으로 이(李) 황실을 극진히 받들어 모셔야 했고, 조정의 권문세도가들의 비위도 끊임없이 맞춰야 했다. <경교비>의 여기 저기에 당나라 황제들의 공덕을 기리는 칭송의 송사(頌辭)가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만 보더라도 당시 경굥의 처지가 딱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종황제의 불교 타파 정책으로 불교는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분노한 부처탓일까. 도교를 맹신했던 무종은 불교 철폐를 실행에 옮긴지 1년도 안돼 도교 도사들이 만들어 줘 장복해온 이른바 불로장생약인 금단(金丹)을 과다 복용한 나머지 이에 중독돼 사망했다. 뒤이어 즉위한 의종황제가 무종의 이같은 종교 탄압정책을 완화하면서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불교도 서서히 정상을 되찾아 갔다.

그럼에도 경교만은 그렇지 못했다. 재앙 속에서 비껴서 맞은 촐퇴마저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당나라 백성들 속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실의 지지와 후원을 상실하자 ‘홀로서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기초체력이 약했던 경교에게 무종이 안겨준 좌절은 회복불능의 치명타였다.

서양학자들이 보는 경교 몰락의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데 외국인 신앙공동체의 단계를 탈피하지 못하고 당나라 백성들이 주축이 된 종교지도자들을 양성해내지 못하는 등 토착화에 실패한 점 등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또 당시 당나라 백성들로붙터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열망을 이끌어내지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다시 말해 불교, 유교, 도교 등 당나라 사회중심에 뿌리박은 기성종교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끝으로 동방교회의 본부가 있던 페르시아나 바그다드와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선교에 따른 원활한 지원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주요 실패 요인 중의 하나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경교는 다시 살아 났다. 그리고 당나라 때보다도 더 융성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동아줄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일단 거기까지였다.

*구범회 지음 <예수, 태종을 사로잡다-나눔사 간>에서


당태종은 왜

경교(景敎)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당나라 때 중국땅에 들어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2백여 년 동안 존속했다. 이 사실은 당나라 덕종 때인 건중(建中) 2년(서기 781년) 장안 대진사에 세워졌던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약해서 경교비라 부른다>의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지난번 <예수, 당태종을 사로 잡다?>에서 언급한대로 당태종은 경교의 교리에 특별한 관심을가지고 포교에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경교사원을 건축하는 일에도 편의를 제공하면서 경교와 경교도들을 각별하게 보살피며 각종 지원을 하였다.

당태종이 이처럼 기독교에 집착에 가까우리 만큼 깊은 관심을 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당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간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영원히 지울 수 없는’존속살인’의 꼬리표가 늘 붙어다니고 있었다. 그는 황제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밀어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당태조에게 먼저 비수를 겨눈 쪽이 형과 동생이었지만 어쨋든 이같은 비극은 그에게 평생의 짐이었고 한이었다.

이를 잊기 위해서도 그는 정사(政事)에 매진하여 선정을 베풀고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대당성세(大唐盛世)’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를 열었던 영명한 군주였음에도 그의 가슴 속엔 늘 패륜아라는 멍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 한편으로는 늘 우울하고 초조하며 불안했다. 당태종이 참회와 용서로 마음 속의 죄책감을 말끔하게 털어내고 싶었을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던 차에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아라본 주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선한 충격과 기대, 호기심 그 자체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과 용서, 속죄와 구원은 어둠속을 헤매던 당태종의 영혼에 가뭄속 단비와도 같은 한줄기 빛이었을 것이다. 형과 동생을 죽인 죄책감으로 발작에 가까운 심적 고통을 감내해온 당태종은 마침내 형제의 망령으로부터 해방될 실마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아라본 주교 일행은 장안성에 입성할 때부터 예상 밖의 칙사 대접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당태종은 무엇보다도 성경의 가르침에 크게 흔들렸다. 당태종을 상대로 어전에서 계속된 아라본 주교의 경연은 거침이 없었다. 구약의 맨 첫머리에 나오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원죄, 메시야 예수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상, 기독교의 세례, 기도, 예배 등에 이르기까지 아라본 주교의 강론은 대하처럼 도도히 흘렀다. 이를 통해 당태종은 생소하기만 한 서방세계의 신관과 우주관, 자연관을 접했으며, 특히 아라본 주교에게 끊임없이 도(道)에 관해 물었던 것으로 <경교비>는 전한다. 이 경교비에 따르면 황궁 안 경서전(經書殿)에서는 성경의 교리들이 속속 당나라 말로 옮겨졌다.

당태종이 기독교(경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유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것 같다. 하나는 아라본 주교의 강론에서 드러났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명시적 구원관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독교 구원론이 당태종의 꽉 막힌 가슴을 뚫어줬을 것으로 보는 견해다. 그때까지 어느 종교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분명하고도 간결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라본 주교의 경연은 특히 이 부분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명료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에겐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핌, 그리고 온갖 특권이 주어진다는 확신에 찬 주장이 당태종의 옷자락을 강하게 끌어당겼을 것이다. 군주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욱 특출해서 인간의 상상을 훨씬 초월하고도 남는 수준이라는 것,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한번 점찍으면 어떤 죄악도 용서하고 끝까지 참아주고 기다리면서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것, 그럼에도 끝내 죄악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비참한 종말을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엄연한 가르침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성경에 나오는 몇 가지 사례들을 실제로 들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사형이 집횅됐던 흉악범도 죽기 직전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구주로 영접해 구원받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당태종은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탄압하고 죽이는데 앞장서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로 변모한 바울의 케이스도 들었다.

모르긴 해도 이런 이야기가 흉악범도 아니고 사도도 아닌 당태종의 마음에 그리 썩 와닿진 않았을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당태종이 이 정도에 마음이 흔들렸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사울왕과 다윗왕에 이르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

스케일은 달라도 똑같은 한 나라의 군주라는 동병상련의 공감대가 있는데다 패역과 부도덕, 잔학함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 용서, 사랑과 응징 등이 한편의 드라마처럼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굳이 죄질을 따지자면 당태종의 그것은 사울이나 다윗에 훨씬 못미친다. 배신을 밥먹듯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사람 죽이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하는 사울이나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하장수의 부인을 빼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그 부하까지 죽여 버린 다윗처럼 추악하거나 파염치하지는 않았다. “이런 군주마저도 참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나 정도는 한결 쉽지 않을까?” 당태종은 스스로에 놀라면서 한편으론 큰 위안을 삼았음 직하다. 당태종은 여기서 그동안 답답했던 가슴이 뻥 둟리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 속에서는 최면과도 같은 자기 확신의 뜨거운 용트림이 일렁였을 것이다. 가령 천지가 다 머리를 조아리고 백성의 우러름을 받는 자신은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이 점찍은 사람이며 황제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형과 동생을 죽인 것도 이미 그 운명에 예정돼 있던 수순이었다는 등의 숙명적 감정이 아니었을까.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무한한 긍지와 자신감, 그리고 주변나라들마저 자신을 일컬어 “하늘도 인정한 황제’라는 이 명칭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당태종은 개운했다. 형과 동생을 죽인 죄책감으로 찌든 자신의 혼탁한 영혼이 한층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늦었지만 참회와 함께 패역의 사슬에서 완전히 풀려나는 해답을 찾은 것이다. 아라본 주교의 경연은 계속되었다.

참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삶은 어둠을 몰아내고 광명한 천국으로 오르는 지름길이라고. 당태종은 그러기에 이례적으로 황제의 칙령까지 내려 경교를 적극 보살피며 장려하고 전국으로 펼쳤다.

또 다른 하나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이른바 ‘산상팔복(마태복음 5:3-10)의 교훈과 믿음, 소망, 사람을 일컫는 ‘삼덕(고린도 전서 13”13)의 가르침이다.

당태종은 원래가 명석하고 사리판단이 예리했다. 타고난 심성과 자질도 좋고 넉넉해서 훌륭한 군주로서의 덕목을 두루 갖췄던 사람으로 역사는 평가한다. 특히 백성을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극진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게 군주의 도리라고 생각한 그였다. 그러면서 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군주가 사욕을 버려야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이 평안하다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래서 황제에 오른 직후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지고 절망한 백성들을 북돋우는데 발벗고 나섰다. 전쟁 대신 화친을 택하고 공역과 조세부담, 형벌을 대폭 완화하며 인재를 널리 등용하는 등 친민정책에 방점을 둔 것이 이를 말해준다.

당태종의 치세를 상징하는 소위 ‘정관(貞觀)의 치( 治)’가 오늘날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을 받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당태종이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한 산상수훈은 목마른 그에게 큰 깨달음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해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당태종의 절절한 마음을 비추는 꼭 맞는 거울이었다. 당태종의 통치 코드는 축약하면 애민(愛民)과 화평이다. 이런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해 하며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한 자 등의 가르침은 당태종에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패륜의 악령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최고의 명약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믿음, 소망, 사랑 등 이른바 ‘삼덕(三德)’의 정신은 백성을 향하는 당태종의 강한 의지를 더해주는 윤활유였다.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특히 당태종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고 선린우호를 지향했던 당태종의 마음을 더욱 다잡게 만든 촉매제가 됐을 게 틀림없다.

게다가 성경의 여러 구절들도 절대군주의 절대 권력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예컨대 윗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 것이나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샤(황제)의 것은 가이샤에게로” 상징되는 정교분리 등이 그것이다. 아라본 주교가 설파한 기독교는 황제의 속마음을 훔쳐라도 본 듯이 쏙쏙 집어냈다. 불교, 유교, 도교 등 다른 주류종교들에 비해 메시지마저 간결하고 분명했다. 마음에 큰 위안까지 얻은데다 가르침이 백성을 교화하고 통치하는데 득이 되는 종교이니 적어도 일석이조는 되는셈이다. 머리 좋은 당태종이 이를 놓칠리가 없었다. 황실이 보살피고 장려하면 황실에 위협이 될 정도로 비대해져가는 불교 등에 맞서는 견제세력으로도 충분히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국내 일각에서는 <경교비>를 인용해 당태종과 그의 신하들이 아라본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으나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당태종 혼자만의 마음속 다짐이고 결정이지, 내색은 금물이다. <경교비> 어디에도 당태종 등이 세례를 받았다는 대목이 없을뿐 아니라 당시의 제도나 관행, 사회 분위기 등을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황제는 당시 종교위에 군림하던 절대 권력이다. 그런 황제가 특정 종교의 교도가 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을뿐더러 절대 금기사항이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포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나라의 주류 종교인 불교와 도교 등을 제치고 서역에서 막 넘어온 오랑캐 종교의 신자가 된다면 황제의 영이 서지 않을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웃음거리가 되고 말 것이다. 아마 황제자리에서 쫒겨나겠다고 스스로 서약한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다. 그러니 그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깊은 혜안과 통찰력을 지닌 어진 군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가르침에 감동하고 자계(自戒)로 삼아 백성이 그 가르침을 따르도록 배려하고 권면한 것으로 보는 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은 분명 하나님이 점찍었던 군주였음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시대를 열었던 성군이라는 이구동성의 찬사가 이를 웅변한다.

*지은이 구범회님은 기자로 연합통신 초대 북경특파원을 지냈으며 싱가포르 국립대학교 중국연구소에서중국어와 중국을 공부, 미코헨신학대학에서 성경을 연구. 현재 성경 및 경학연구 및 집필 활동중.

*구범회 지음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 당(唐).원(元)시대 기독교 이야기> 나눔사 간

 


 

<교회사 산책 7>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한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7세기 초 당나라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당시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고 패주했다는 이야기로 너무나도 친숙하다. 그렇다고 당태종이 우리가 우습게 여길 만큼 호라호락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아마 중국 왕조시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군주 2명을 고르라면, 한무제와 더불어 선두 다툼을 벌일 정도로 걸출한 영웅이다. 중국인들이 그들이 흔히 말하는 오랑캐 출신의 징기스칸보다 오히려 당태종 이세민을 더 선호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치세(治世)에 기독교의 중국땅 선교를 허락했다. 상상을 불허하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당나라에 들어온 기독교는 경교(景敎)란 이름으로 불렸다. 1천 3백여년 전의 일이다. 당시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결단이다. 그로부터 1천 2백여년이 흐른 뒤에도 한국에서는 “서양 오랑캐”들이 들고 온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무고한 순교의 피를 흘린 것과 비교해 보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더구나 기독교가 당나라에 들어온지 3년 만에 당태종이 수도 장안에 경교 사원 건립을 명하는 황제의 조서를 내린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이보다 앞서 당태종은 정관 9년(서기 635년) 자신의 총신이자 재상인 방현령을 황성 밖까지 내보내 최고의 예(禮)로서 경교를 전하러 온 아라본(영문명 Alopen) 주교를 융숭하게 맞아들였다. 당시 아라본 주교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당나라 의장대의 사열까지 받으며 장안성으로 입성한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경교비(景敎碑)>와 역사서인 <당회요(唐會要)>에 기록된 “총장서교(總仗西郊)”에 기록되어 있다. 재상 방현령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장안성 서문 밖까지 나아가? 모든 의전을 갖춰” 아라본 주교를 융숭하게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 즉 기독교 선교와 그 사원 건립을 허용한 것은 당시 당태종의 위세에 비추어 볼 때 파격중의 파격이다. 성경적 시각으로 본다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사로잡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찌감치 당태종을 전찍었고 당시 세계를 향해 포효하던 영웅인 당태종도 경교가 “바른 진리임을 깊이 알고” 그리스도의 부름에 흔쾌히 응하였다고 밖에는 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경교비>의 기록이 이를 뒷바침한다. 이러한 기적적인 사건이 있지 않고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기독교의 중국전파는 애초부터 엄청난 난관에 봉착했을 것이다. 당시 당나라의 문화와 풍습 등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세계를 제패한 몽고나 원나라의 경교도 이에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징기스탄이나 그의 손자 쿠빌라이 등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기에 번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 부활 이후 6백 여 년만에 동아시아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 <경교비>와 <당회요>에 나오는 당나라 최초의 경교사원 건립에 관한 당태종의 칙서부분을 보면

“정관(貞觀)12년(서기 638년) 가을에 당태종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도(道)에 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거룩함에 항상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형편에 따라 가르침(종교)을 세우는 것이며 그리 해서 촘촘하게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다. 대진국의 아라본 주교가 멀리서 장안으로 경전과 성상을 가져와 헌상했다. 그 종교의 교지가 상세하며 심오하고 오묘하기 이를 데 없고 그 근본 원리를 보건대 사람이 나고 이루고 서는데 필요한 것이다. 말에 번잡한 설명이 없고 이치가 정연하니 그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을 잊을 만하다. 물(物)을 활성화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니 이에 마땅히 천하에 행하노라. 소관기관은 의영방(義寧坊)에 대진사(大秦寺, 경교사원) 한 곳을 세우고 경교승려 21인을 두라.”

이 부분에 관한 <당회요>의 기록 또한 이와 대동소이하다. 장안의 최초 경교 사원 건립을 이야기 할 때 보다 구체적으로 다뤄진 것이다. 아라본 주교가 기독교를 전하기 위해 장안성에 입성할 때 그를 맞아들인 당황실의 예우 또한 지극히 이례적이다. 서역에서 오는 한낱 ‘오랑케 종교’의 성직자를 영접하기 위해 황제의 명에 따라 조정 최고의 중신까지 뛰어나간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납득이 안 될 정도의 과공이다. 당시 당나라 조정 신료나 백성들의 눈으로 보기엔 아니 할 말로 당태종이 ‘실성”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할 정도로 대경실색할 노릇이었다. 한마디로 당태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단단히 붙잡혔다는 말 이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경교비>에 기록된 대로 그때의 장면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인믈됨이 명석하고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돌며 빛나는 대운이 뻗치던 당태종 문황제때 대진국의 아라본이라는 이름의 주교가 경교를 전해 번성시킨다는 일념과 기대를 갖고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경교 경전을 들고 정관 9년(서기635년)에 장안(長安, 당시 당나라 수도)에 이르렀다. 황제는 재상 방현령을 장안성 서문 밖까지 내보내 최고의 의전으로 그를 맞아들였다. 아라본 주교가 가져온 경교 경전은 번역돼 황제에게 올려졌다. 황제는 도를 물으면서 (경교가) 바른 진리임을 깊이 알게 되자 경교를 전수하라는 특별 칙령을 내린다.”

아라본 주교는 이처럼 당태종으로부터 극진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장안성으로 입성했다. 특히 당태종은 경교가 ”올바른 진리임을? 깊이 알고’ 이를 마땅히 천하에 전수하라는 특별칙령을 내렸다고 했다. 또 그 교리가 “심오하고 오묘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하였다. 당태종이 무언가에 씌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중대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중국의 5천년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기독교가 ‘오랑캐 종교’에서 당나라 활제도 인정하는 종교로도약하는 순산이었다. 당태종은 확실히 특출 난 인물이었다. 그 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한 눈에 알아 본 것만도 예삿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불가사의이다. 사람으로서는 내릴 수 없는 상상 밖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래서 당태종을 가르켜 “7세기 때 복음 전파를 위해 동아시아에 왔다 갔던 하나님의 선지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까지 극찬한다.

황제로서는 더더욱 어려운 결정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교, 도교, 유교가 이미 당나라 사회에 단단하게 똬리를 틀고 있고, 당태종 자신을 포함해 모든 백성들이 이들 종교와 그 문화 및 풍습에 흠뻑 젖어있는 환경에서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더구나 대당성세(大唐盛世)가 상징하듯, 나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큼 강성했던 시절이다. 세계각국의 사신들이 장안으로 물려들어 앞 다투어 당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실크로드가 다시 열려 서방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뤄지던 때였다. 당태종을 일컬어 가히 “땅의 천자”로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 없던? 때였다. 이런 마당에 자청해서 쓸데없이 조정 신료와 백성들의 원성을 살 일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인간의 지혜로는 더 이상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당태종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경교)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곁에 두고 알뜰살뜰 보살피며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태종은 에수 그리스도에게 필이 꽃혔고, 그 가르침에 감전된 것이다. 말하자면 “땅의 천자”기 “하늘의 천자”인 에수 그리스도에게 정확하게 주파수를 맞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경교비>가 최상의 어휘들로 당태종을 기리고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기독교의 중국내 선교를 허용한 당태종이야말로 그들에게 더할 수 없는 최고의 은인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당태종의 이같은 파격이 당시 당나라 서북 변방의 군사적 도발을 잠재우려는 전략적 고려에서 비롯된 유화책이었다는 분석도 있지만, 수긍하기 어렵다. 그런 의도였다면 서북변방에서 경교 이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던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를 먼저 붙잡었어야 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이들 두 종교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겸용병축(兼容倂畜, 모두 받아들여 자산으로 삼는다는 뜻)으로 상징되는 개방적인 종교정책에 따라 다 받아들이긴 했어도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는 여전 당태종에겐 관심 밖의 ‘오랑캐 종교’일 뿐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소개된 외래 종교들 가운데 오로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즉 경교의 교리에만 깊은 관심을 나타내며 가르침을 청했다. 오직 경고만이 당태종의 마음을 빼았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태종은 경교와 경교도들을 각별하게 보살피며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그가 당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 3년 만인 정관 12년(서기 638년)에 당나라 최초의 경교사원인 파사사를 황궁과 지척인 의영부에 세우게 한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태종의 이같은 ‘기독교 사랑’은 당대에 끝난 게 아니었다. 태종을 시작으로 고종, 측천무후, 현종, 숙종, 대종, 덕종 등 누대에 걸쳐 2백 10년 동안이나 계속 이어졌다. 이런 황제들의 사랑과 신임이 있었기에, 측전무후 때 불교가, 현종 때는 유교가 각각 경교를 탄핵하고 나섰을 때도 이를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것들을 두고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말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논쟁은 불필요한 말작난일 뿐. 각자의 생각과 판단에 맡긴다.

*구범회의 <예수, 당태종을 사로잡다>나눔사 간, 에서


 

인도로 간 도마, 사실인가? 전설인가?

남인도 첸나이에 있는 성 도마 성당, 도마가 순교한 곳에 워졌다고 하는 기념 성당. 힌두교의 나라로 알려진 인도의 크리스천들은 3900만으로 알려졌다.

기독교가 인도에 전파된 경위에 관해서는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의 하나인 성(聖) 도마(Saint Thomas)가 인도에 직접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수 사후 예루살렘 교회는 도마를 인도에 파견했다는 것이다. 야사는 그렇게 전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밖혀 죽기 전에 인도왕 곤다포루스(Gondaphorus)는 상인(商人) 아반을 서방에 보내 궁전 수축에 필요한 기술자를 구해오라고 했다. 이에 예수는 도마를 노예로 위장시켜 아반에게 팔았다. 도마는 숙련공인데다가 수완이 좋았다. 솜씨가 좋으니까 왕의 환심을 샀고 덕분에 곤다포로스 왕을 기독교도로 만들었다. 내친 김에 도마는 인도의 또 다른 이웃 나라의 왕인 모데우스(Modeus)에게도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리어 그곳에서 피살돼 어느 이름 모를 산에 묻혔다. 중서교통사료회편 (中西交通史料?篇)에 의하면 도마의 유해가 기원 394년 소아시아의 이데사로 옮겨 안장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전해지는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도마는 선교하다가 고난을 당해 인도의 말라바르(Malabar)에서 순교하였다.

원나라 때 로마천주교회의 북경 대주교였던 존 데 마리그놀리(John de Marignolli)가 쓴 <奉使東方追想記>에는 도마의 순교와 관련,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도마는 말리바르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교회당을 세웠다. 또 사람들을 고용해서 이곳에 두 번째 교회당도 지었다. 도마는 이 부근 해상에 지금까지도 늘 신기하게 모습을 보인다. 그의 묘지 흙 또한 기이하다. 가령 오늘 묘지의 흙을 파버리면 괴이하게도 그 다음날 그 자리에 흙이 다시 돋아나있다. 또 그 흙과 물을 마시면 질병이 치료된다. “

이 책에는 도마의 선교활동도 기록돼어 있는데

“도마는 중국인과 흑인(이디오피아인들)들로 하여금 모두 예수교를 믿도록 했다.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아이들에겐 이름을 지어 주었다. 사람들에게 성부, 성자, 성신을 믿도록 하였다. 사람들에게 신앙을 가진 뒤에도 계속해서 신앙을 유지하도록 했다. 인도인들에게 모두 진리를 믿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가르쳤다. 천국의 날개를 움직여 중국에 선교했다.”

인도는 기독교 발상지에서 가깝다. 또 중세에 유럽의 여행가들이나 선교사들이 해로를 이용해 중국 연안에 오려면 반드시 경유하는 지역이 인도이다. 이런 연유로 인도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에 따르면 도마는 서기 50-52년 인도 서해안의 말라바르에 도착했다. 이곳에 7개의 교회당을 세우고 각 교회당마다 목사를 임명하고 왕과 이민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까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도마는 인도에 들어온 지 20여년이 지난 서기 72년에 인도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콘디(Conti)의 여행기에도 도마에 관한 기록들이 나온다. 프랑스인 그레고리(Gregory) 등은 직접 도마의 묘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13세기 시리아의 교회사가 바로 헤브라에우스는 18세기 <동방문헌>을 써서 유명한 죠셉 사이먼 아세마누스와 꼭같이 도마를 인도에 최초로 기독교 복음을 전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1521년 이래 계속해서 도마사원의 유적과 고분이 발견됐다. 1547년에는 도마 산서 고대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비석이 발굴되기도 했다. 또 1849년에 발간된 곤다포르스 왕 초상이 새겨진 화폐도 도마의 선교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유물들의 대다수는 후세사람들이 위조한 것이어서 도마의 선교사적으로 단정하기엔 함량미달이다.

도마는 동방기독교회를 통해 인도 등지에 복음을 전한 원조로 인식되고 있다.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이 인도에 들어갔다. 다시 말해 도마의 인도 선교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인도 진출은 완전히 별개라는 의미이다. 도마가 앞장 섰고, 한참 뒤에야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인도 진출이 이뤄진 것이다. 그 후 도마의 뒤를 이어 2대조는 아다이(Addai), 3대조는 아가(Agga). 4대조는 마리아(Mari)등으로 나타났는데 이 와중에서 역사의 진실은 위조의 홍수 속으로 묻혀버렸으며 날조된 유물, 유적이 역사의 증거로 양산되었다. 그 결과 근세의 학자들은 이때의 기독교 전래이야기는 “반박의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라고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 3-4세기 인도에는 눈길을 끄는 믿을만한 소식이 하나 있다. 인도 북부에 매우 큰 기독교공동체가 있었다는 것, 이들은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 건너 온 개종 기독교도들로 자발적으로 무리를 이루어 생활했으며 대체로 인도인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왜 기독교로 개종했을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도마의 복음전파가 일궈낸 결과라는 것이다. 기실 누구가 복음을 전했는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한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여러 세기에 걸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믿는 상인, 직공, 성직자들의 누적된 복음전파에 힘입은 바 크다는 점이다.

는 또한 인도인들에게 기독교를 보급하고 발전시킨 원동력이기도 했다. 4,5세기 경 페르시아 제국은 기독교교도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기독교도들은 페르시아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고, 자연스럽게 무역거래 등으로 교류가 잦은 인도로 흘러들어와 정착했다. 이들이 바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다. 다시 말해 훗날 당나라에서 2백여년 동안 기독교를 번성시킨 경교(景敎)도들과 똑같은 기독교도들이다. 이들이 들어 올 때 복음도 함께 인도 땅에 유입됐다. 이처럼 인도에 대한 복음 전파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250년 경에 쓰여진 <사도의 교의(Doctrine of Apostles)>에는 인도와 그 인접 나라들에서 기독교가 융성했음을 시사하는 흥미로운 기록들이 나온다.

“인도 전역과 인접국가, 그리고 남쪽 연안의 나라들에서도 유다와 도마로부터 사도를 계승하는 성직자 지위를 부여 받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어디까지, 얼마나 사실로 믿어야할 지 쉽게 판단이 안 선다. 373년에 사망한 스프렘(St. Sphrem)은 생전에 도마를 칭송하고 기리는 글들을 많이 썼다. 그 중 여러편에서 인도 기독교의 존재가 언급되는데, 여기에 나오는 성 도마는 도대체 누구일까? 한마디로 “인도 기독교의 신화가 된 도마”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페르시아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탈출해온 기독교 지도자들로 성 도마를 흠모하며 그와 똑같은 이름을 썼던 ‘도마들의 집합’을 이름이다. 따라서 사도 도마가 정말 인도에 갔었는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간 것 이상의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기 때문이다. 사도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 전파를 통해 수많은 도마를 낳고 키우며 인도 기독교 발전의 주춧돌이 됐다.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를 직접 만져보는 사도 도마. 17세기의 카라바죠의 작품 '도마의 의심'

*구범회 지음 <예수, 당태종을 사로 잡다>나눔 사 출간)에서

 


교회사 산책 5

초기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예배드렸나?

기원 150년 경, 져스틴 마틸(Justin Partyr)은 다음과 같이 초기 크리스천들이 예배드리는 모습을 기술하였다.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에는 도시나 부락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장소에 모였다.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예언서들을 시간이 허용하는대로 읽고 읽기가 끝나면 회장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이러한 좋은 일들을 따라 하도록 권면하였다. 그 다음에는 다같이 일어나서 기도를 올렸다(send up prayers)
기도가 끝났을 때 빵과 포도주와 물이 공급되었으며 회장이 같은 모양으로 기도를 올리고 능력에 따라서 감사헌금을 드렸다. 사람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성찬을 나누고 참여하려면 감사기도를 드려야 하며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집사들을 통해 전달하도록 한다. 재력이나 유산들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원하는대로 바칠 수 있으며 수집한 것들은 회장이 보관한다. 회장은 고아들이나 과부들, 그리고 병이 들거나, 빚이 있거나 여행중인 나그네 등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들은 모두 일요일에 같이 모이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어둠을 빛으로 바꾸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첫째 날이기 때문이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토성의 날(토요일) 전날에 십자가에 못밖았으나 토성의 날 다음날(일요일) 예수께서는 사도들과 제자들 앞에 나타나 우리가 여러분들에게 가르치는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Firsr Apology, 67 에서)"

져스틴 마틸은 기원 2 세기경 아시아, 팔레스틴, 로마 등지의 기독교를 가장 잘 알고 있었든 사람으로 철학자요 기독교옹호론자로서 기원 165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이 기사를 썼을 때에는 열성적인 평신도였던듯 하다.그의 기록을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의 주일예배 모습을 살펴 보면

*그는 "일요일에 다같이 모였다"고 하였다. 일요일(Sunday)은 이교도들의 명칭으로 이교도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대로 사용한듯 하다. 유대인들의 명칭은 “주간의 첫날”이며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의 날” 또는 “주일”이다. 져스틴에 의하면 주일은 물질적인 창조를 시작한 날이요 새로운 창조, 부활을 이룬 날이기도 하다.

*”사도들의 회고록이나 선지자들의 저서들을 읽었다”고 하였다. 성경봉독은 이미 신약성서에 포함된 글들이나 구약성경 모두를 포함하였다. 사도들의 회고록은 복음서를 말하며 “예언서”라는 것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듯 하다. 예언서들에는 예수의 오심을 예언한 내용이 들어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고 자주 읽었다. 져스틴은 성경을 연속해서 읽었는지 아니면 그때 그때 특별한 구절들을 택해서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회장이 권면을 하고 그러한 선한 일들을 본받으라고 강조하였다.”교회 직책이 확정되지 않은 때라 져스틴은 "회장"(President)라고 불렀는데 회장이 설교를 하였다고 하였다. 회장은 단순한 사회보는 사람이란 뜻도 있으나 통치자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회장은 후에 교회에서 ‘감독”(Bishop)이라고 부르던 사람의 직책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일반 낭독자와는 다른 성경도 낭독하고, 설교도 하고, 일반 교회업무나 구제도 맡아 했던 특별한 신분의 사람인듯 하다. 초기의 교회에서는 교리보다 선행을 강조하는 설교를 했다는 점을 져스틴은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데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이상한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인듯 하다.

*"우리들은 다같이 일어서서 기도를 올려 드렸다". 져스틴은 회중들이 기도하려고 일어섰다고 하였다. 흔히 기도할 때에는 겸손, 뉘우침, 회개, 죄의 고백을 뜻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거나 엎드리는 자세를 취하는데,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자녀들이 자유롭게, 대담하게 그들의 기쁨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첫째 날 서서 기도한다는 것은 부활과도 연관하여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초기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대한다는 특별한 특권으로 하나님이 받아주셨고 자유로 말할수 있는 권리를 갖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기도는 일반적인 공동기도로 아버지요 창조주인 하나님께 그의 막대하신 능력을 찬양하고 감사를 드린 후 간구를 아뢰고 영광의 찬가를 드리는데 이 모두를 예수의 이름으로 하였다.

*”빵을 주고 포도주와 물도 주었다” 빵과 포도주는 일상적인 음식이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유대교에 따르면 어떤 제물을 특별한 목적을 위해 바칠 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바친다. 져스틴이 언급한 회장의 감사기도는 빵과 포도주를 더 이상 보통 빵과 음료수가 아니게 만들었다. 져스틴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감사의)기도로 빵과 포도주는 이제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었고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었다. 져스틴이 “포도주와 물”이라고 언급하였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포도주에는 흔히 물을 타서 음료수로 사용했던 것을 의미하는듯 하다.

*”사람들은 “아멘”으로 그들이 찬성한다는 뜻을 노래로 전했다.” 아멘 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져스틴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게 될지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기도나 송영의 끝에 나오는 회중들의 “아멘”이라는 말은 초대교회에서 유대인 회당의 전통을 따른것이었다. “아멘”으로 한 사람이 한 기도가 전 회중의 공동기도가 되는 것이었다. 져스틴은 이와같은 대중 참여방식이 무척 인상적이였던듯 하다. 져스틴은 “그들의 동의를 sing out”한다고 번역하였는데 그것은 조용한 유니송으로 아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 질러 “아멘”을 웨치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성찬의 분배와 참여가 이루어졌다.” 기도로 거룩하게 된 성체들이 공동체의 모든 멤버들에게 집사들에 의해 분배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았다. 빵과 포도주를 나눈다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의 교제를 의미한다. 병이나 신체적인 이유로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집사들이 성체를 가져다 주어 침대에서 꼼짝 못하는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져스틴은 공동기도후, 빵과 포도주를 나누기 전에 회중들은 “키스로 우리들은 서로 인사했다”고 하였다. “거룩한 키스”, “사랑의 키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자들의 인사법이다. 그래서 새로 한 가족이 된 세례받은자들과의 인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런데 성만찬식을 앞두고도 행했다는 것이다. 물론 성만찬에는 교회안에서 충분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멤버들만이 참석하게 되어 있으므로 한 가족임에 틀림없다.

“재물과 뜻이 있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서 원하는 만큼 재물을 바친다” 져스틴은 금전을 바치는데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그는 헌금의 자발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회장”이 맡아가지고 있는 돈들은 활당금이 아니다. 그러므로 회중의 기부금들은 당시 로마나,헬라에 있던 자선기관들의 회비와는 다른 것이었다. 각자가 자유로히 내는 선물이다. 이러한 자선의 수혜자들 즉 고아, 과부, 병자, 죄수,나그네들이 성경 등에 종종 언급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가르친다
*시편 등을 포함해 공동기도를 들인다.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만찬
*자신의 재산 등을 바치는 것,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
져스틴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일요일 행사들은 수 세대동안 계속되었다.

져스틴이 기술한 의식가운데는 두 가지가 균형을 맞추고 있는데 하나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도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 대한 우리들의 응답을 요구하신다. 둘째로 성만찬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즉 그리스도를 통한 영적인 삶을 상징한다. 헌금이나 기부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선물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가 되돌려 드리는 것이다.

져스틴이 소개한 초기 기독교의 예배 요소들 가운데 중세기에는 미사때문에, 종교개혁후에는 설교때문에 다른 요소들이 약회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져스틴이 소개한 4개의 요소들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져스틴 마티는 철학자요 기독교옹호론자로서 기원 165년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첫번째 기독교 변증>, <두 번째 기독교 변증> 그리고 <유대인 트리포와의 대화> 등을 집필하였다.


 

 교회사 산책 4

암울한 시대에 예수 따르기-본 훼퍼의 삶
죤 G. 스택하우스 Jr.


본 훼퍼의 어려운 선택들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평화에로의 길은 항상 분명한 윤리적인 대답으로 포장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테로리스트 혐의자를 심문하기 위해 고문하다.

종족학살을 종식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들에 개입하는 것. 중동에서 고대의 분쟁과 현대의 폭력을 해소하는 것, 기업의 범죄를 고발하는 것, 불한당 국가를 제재하는 것. 도시의 길거리에서 마약파는 사람들과 대결하는 것.

디에트리히 본훼퍼는 어려운 일들의 수호성인으로 윤리적으로 당혹스러운 문제를 안내해 주고 딜렘마에 빠져있을 때 영감을 주었으며 도덕적으로 어두운 곳에 등불이 되어 주었다. 히틀러 암살음모에 참가한 것과 그 음모가 실패하여 투옥되고 처형당한 것은 그의 짧은 삶의 의미를 규정하는 귀중한 순간이 되었다. 본훼퍼는 우리들에게 현대의 삶이 주는 처참한 도전을 생각하는데 많은 것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깊은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주고 있다.

본훼퍼는 부모가 모두 격조 높은 특별한 전통을 가진 독일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칼은 베를린대학의 심리학자요 교수였으며 그의 가정은 거대한 주택에서 종들을 부리며 비록 제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어려운 때에도 기득권층이 누리는 모든 안전과 쾌락을 즐기며 성장하였다.

젊은 디이트리히는 지적으로 영재라고 할만큼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재능을 신학연구에 바침으로서 종교성이 아주 빈약했던 가족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1927년에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전공으로 Ph. D. 학위를 받았으며 1930년에 교수청빙과 함께 주는 명예학위인 Habilitation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국교인 루터교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고 잠시동안 발세로나, 런던 그리고 독일 등지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는 미국을 두 번 방문하였는데 주로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미국사람들이 이론적인 신학에 별 관심이 없는데 놀랐지만 특히 라인홀드 니버를 위시해 실제로 실천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아프리칸-아메리칸 기독교에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종종 할렘에 있는 흑인교회들 특히 아비시니안 침례교회를 방문하곤 하였다. 이러한 경험들이 합쳐져서 학자풍의 본훼퍼로 하여금 목회와 실천 적인 면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하였다.

성직자며 음모자

1930년대 초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고 민족주의, 보복, 인종주의 정책을 밀어부치던 때 독일로 돌아온 본훼퍼는 세 가지 방법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지역적으로 그는 대학교수라는 명예를 버리고 히틀러가 지도자라고 믿는 사이비집단에 대항해서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원시적인 고백을 믿는 신앙공동체인 고백교회의 목회자들을 훈련시키는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비인가 신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곳에서 일한 2년 남직한 기간동안에 본훼퍼는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안내서를 출판하였는데 <제자직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와 <공동생활(Life Together)>이 그것들이다.

전국적으로는 나치당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공적인 토론이나 사적인 토론 등에 참여하여 자신을 비밀경찰의 감시대상으로 노출시켰다. 그 결과로 그는 가르치고, 설교하고, 출판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국제적으로는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폭넓은 접촉을 활용하여 서방교회들이 나치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도록 권유하는 한편 외국의 정부들로 하여금 나치의 프로그램을 개선하도록 외교적 압박을 가하도록 고무하였다. 그는 이때 반폭력주의자로서 명성을 날렸는데 심지어 모한다스 간디의 정치철학을 공부하기위해 인도여행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본훼퍼는 몇몇 유대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고 육군정보부에 처남이 있어서 그를 통해 그는 누구보다도 나치의 반 유대인운동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나치가 그들의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강화하자 본훼퍼는 육군정보부 내부의 히틀러전복음모에 가담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는 비밀경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이중간첩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육군정보부(Abwehr)에 고용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에큐메니칼운동을 위해 국제적으로 접촉하는 것으로 하였지만 다른나라들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지역에 있는 독일저항세력들과 알게되었으나 이 이중적인 외교가 별 효과가 없자(특히 영국정부가 독일 레지스탕스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 본훼퍼는 비 폭력적인 해결방안에 실망하였다. 독일군대는 계속해서 성공하였고 히틀러의 국가장악력은 더욱 강화되어 절대적이 되었으며 바람직하지 않은 정치적, 인종적 조치들이 증대되었다.

그렇게되자 그의 음모는 비폭력적인 쿠테타에서 암살음모로 바뀌었다. 히틀러의 생명을 노리는 몇 차례의 암살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마지막 시도가 암살에는 못미치고 히틀러에게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끝나자 히틀러는 관계자들을 모두 처형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본훼퍼의 처남인 육군정보부의 한스 본 도나니가 체포되자 그의 책상에서 협력자들의 이름이 나왔는데 거기에 본훼퍼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1943년 4월 본훼퍼는 베를린에서 체포되었고 그 후 다시는 처형될 때까지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다.

족쇄를 찬 신학자

2년 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본회퍼는 동시에 세가지 일을 하였는데 그것은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다. 첫째로 그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학> 집필을 계속하였다. 이 책은 완성을 보지 못해서 후에 쪽지형태로 출판되었다-세상안에서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초점을 맞춘 주제들로 매우 절묘하고 창조적으로 쓰여졌다. 그는 또한 감옥에서 후에 출판된 많은 서신들과 다른 책들도 집필하였는데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흥미를 주는 사상들과 문장들이 들어 있다.

둘째로 그는 동료 수감자들뿐만 아니라 간수들까지도 상담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때로는 죄수들의 처우개선을 위한 당국과의 담판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세번째로는 그가 신학적으로 매우 깊고 심오한 저서를 집필하고, 목사로서 수감자들을 돌보는 목회를 하면서도 그는 음모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과 이미 잡힌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밀경찰 등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그의 저서들은 그가 초기의 분명하고 단순한 견해에서 평화와 전쟁, 선한 정부와 악한 정부, 평상적인 생활과 후에 윤리학자들이 명명한 “주변적인 ” 또는 “경계선상”의 극단적인 도덕적 도전을 받는 그러면서도 분명하고 “완전한 선택이란 없는 복잡한 상황 이해로 이전하였음을 보여주었다.

본훼퍼는 자기 교회에 무척 실망하였다. 그가 대학시절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였던 신학은 나치의 끔찍한 계획들에 맞서 대항할 수 있는 준비를 해주지 못했으며 캐톨릭과 개신교의 협력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이 죽음의 그늘이 덮인 골짜기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어디로 인도하실런지? 물론 단지 자기보호만을 도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단지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 자유만을 추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희생자들을 돕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본훼퍼는 그의 가장 급진적인 사상을 보였는데- 자신의 안전이나 편안한 양심이 문제가 아니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남겨 둘 이 세상이 문제였다.“책임 질 사람에게 물어야 할 궁극적인 물음은 어떻게 이러한 상황에서 영웅적으로 탈출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다음 세대들이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자직의 진정한 대가

본훼퍼는 일상생활을 사랑하였다. 그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고 야외활동을 좋아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비록 결혼하기 전에 처형당했지만 연애도 하고 약혼도 하였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특히 윤리학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준비하신 좋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즐기라고 우리에게 권하였다.

사람이 사는 집이란 짐승들의 우리와 같이 단지 험악한 날씨를 피하게 하고 새끼들을 기르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재산과 더불어 친밀하고 안전하게 인간적인 삶과 기쁨을 즐기는 곳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건강만을 목적한 것아 아니라 육체적인 삶의 자연적인 즐거움을 가능케 하려는 것이다. 의복도 단지 몸을 가리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몸을 장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락이란 것도 단지 일의 효능을 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적절한 휴식과 기쁨을 제고하려는 것이다. 놀이도 원래가 어떤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삶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 분명해 졌다. 성교는 후손을 생산하는 방법일뿐만 아니라 이러한 목적과 분리되어서 두 사람이 하나되는 결혼생활안에서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려는 목적이 있다.

그렇지만 특별하고 비자연적인 것에서는 본훼퍼는 우리들의 유일한 선택은 최선을 다하고, 가능한한 예수에게 충실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옳고 그름의 정연한 윤리적 선별선상에서 우리들의 조치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한 많은 선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책임있는 행동이란 자신은 궁극적으로 옳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이 모든 인격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을 가늠하는 책임과 함께 수행되었을 때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고 인간이 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데서 이러한 행동은 그것이 수행되는 순간 유일하게 하나님에게로 인도됀다. 자신의 선과 악에 대한 절대적인 무지와 온전히 은총에 의지하는 것은 책임있는 역사적 행동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이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그의 이념안에서 정당화하여 본다. 책임적인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기며 하나님의 은총과 돌보심으로 살아간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음모나, 속임수, 그리고 암살에 가담하여서 가능한 것이라면 본훼퍼는 이러한 악한 행동들이 수반하는 죄책감(그것이 무엇이든간에)을 자초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악한 선(evil good)이란 말을 사용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는 그러한 행동을 하였을 때 얻게되는 죄책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므로 <제자도의 대가>에서 “값싼 은총” 에 관해 분노하였던 이 신학자는 후에 자신을 하나님의 “값비싼 은총”에 던져버렸으며 극한상황에서-어쩌면 선을 이룰수 있을 나쁜 일을(bad thing)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평화주의자로 언제나 평화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다. 폭력은 오직 최후의 수단이었으며 크리스천들에게는 음울하고 낯 선 것이었다. 그러나 본훼퍼는 다른 방법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선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타인과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셨음을 인정하였다. 본훼퍼는 우리들은 하나님보다 더 “거룩”하려고 분투해서는 안됀다고 결론지었다.

크리스천들은 그러므로 먼지와 피가 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피의 일부는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일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본훼퍼는 전쟁의 종식과 새로운 기독교의 출현을 기대하였으며 더 이상 국가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은 제자도, 더 이상 단순한 사회적인 순응으로 해석되는 제자도, 하나님이 우리 앞길에 뿌려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즐기는 제자도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바로 진정한 제자도의 “종교 없는 기독교”였다.

그리고 본훼퍼는 우리에게 여전히 십자가를 지고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 놓여있는 막연하고, 폭력적이며 값비싼 은총의 자리들을 통과하여 모든 것들의 주님을 따르라고 도전하고 있다.

*John Stackhouse는 카나다, 뱅쿠버에 있는 Regent College의 신학과 문화 교수이며 최근 <문화신학>에 관한 저서를 출간하였다.


 

교회사 산책 3

콘스탄틴 황제는 과연 크리스천이었나?
-데이빗 F. 라이트(David F. Wright)-

 


-크리스천들에 대한 박해를 종식시킨 것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황제. 그러나 그는 진정한 크리스천이었나? 아니면 정치적 기회주의자였나?-


 

콘스탄틴은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역사에서 뚜렸한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교도 로마제국에 의한 크리스천 박해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로 그것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가 동료 황제인 리시니우스(Licinius)와 기원 313년 미란에서 합의 채택한 협약에 의하면 “크리스천이나 다른 종교를 믿는 신도 모두에게 그들이 원하는 예배형식을 따를 수 있는 충분한 권위를 허용한다. . . . 기독교를 따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순간부터 자유로히 그리고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방해나 불안해 할 필요 없이 전과 같은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고 하였다. 되돌아 보면 이러한 합의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순교의 시대에 종식을 고하고 기독교 제국의 전조를 열어준 주요 분수령의 하나를 형성한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지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나타난 첫 번째 로마제국의 ‘대제”(大帝) 인 콘스탄틴은 과연 어떠한 사람인가? 소위 말하는 미란 칙령과 그가 교회의 후원자로서 취했던 다른 조치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것이었나? 그 자신은 얼마나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나? 하는 의문들이 계속 떠오른다.

황제가 되기까지

콘스탄틴은 기원 272년 2월 27일에 나이수스(Naissus)-현재 유고슬라비아의 동쪽에 있는 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는 군대의 장교였고 어머니 헬레나는 하류층 출신으로 콘스탄티누스는 후에(아마도 기원 290년 경)정치적인 야망을 위해서 이혼을 하였다. 부모들의 종교적인 신앙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헬레나는 유명한 아들이 회심한 후에 크리스천이 되었으며 무척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는 당시 로마제국의 한 부분인 영국과 고울(현재 프랑스)지역에서 부(副) 시저(a Junior Caesar)로 있으면서(기원 293년) 기독교를 박해하는 반 기독교 조치를 시행하였으나 열성적으로 기독교를 박해한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두 번째 아내를 통해 낳은 아이들중에 한 아이의 이름을 희랍어로 ‘부활”이란 뜻을 가진 아나스타시아 (Anastasia)라고 지었는데 그것은 친 기독교적인 감정을 내포한 이름으로 비록 직책상 반 기독교적인 조치는 취했지만 기독교에 대해 관용 이상의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한다. 후에 역사가였던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는 진정한 유일신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로 묘사하였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인듯 하다. 증거에 의하면 콘스탄틴은 아버지로부터 기회가 왔을 때 기독교를 그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성향을 물려 받았던 것 같다.

시저의 아들이요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있던 콘스탄틴은 12년 동안(기원 293-305)을 상위(上位) 시저인 아우그스투스의 디오크레티안 궁전과 그의 하위(下位) 시저인 갈리레우스의 궁전에서 지냈다. 콘스탄틴은 황제수습생으로 그리고 인질(아버지의 로마제국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로 간주되었다. 콘스탄틴은 (보스포로스의 동부해안가에서 멀지 않은 현재 터키의 이즈미트(Izmit)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크레티안 궁전과 군대에서 그의 소년기를 보냈다. 이러한 성장기에 콘스탄틴의 종교적인 신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크리스천들이 꽤 많이 퍼져있던 곳에서 크리스천들에 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디오크레티안의 관료들과 군인들 그리고 어쩌면 가까운 친척들중에도 크리스천들이 있을 수 있으며 니코데미아에도 교회건물들이 있어 궁전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기원 303-304년에 발생했던 기독교대박해에 매우 불쾌감을 느꼈음에 틀림 없다. 학자들이 논쟁하는 상황에서 갈리레우스가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시안의 뒤를 잇게되자 콘스탄틴은 곧 니코메디아를 떠나 아버지가 이번에는 상위시저로 있는 영국으로 갔다. 306년 7월 25일 콘스탄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군대들은 콘스탄틴을 아버지의 후계자로 아우그스트스(Augustus) 자리에 앉혔다. 이것은 당시 제국에서 권좌를 정하는 방법으로서는 희귀한 일로서 콘스탄틴은 전쟁터에서 그의 통치자로서의 권한을 입증해야 하였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기원 312년 10월 28일 콘스탄틴은 로마에서 10여 마일 밖에 있는 멜비앙 브릿지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서로마제국의 유일한 영주가 되었다. 12년 후에는 끝내 루시니우스를 격파하고 “전 세계의 통치자” 또는 적어도 전 로마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크리스천들에게 호감을 가지다.

기원 312-313년 겨울부터 콘스탄틴이 전투에 승리하여 로마에 입성한 직후- 콘스탄틴은 눈에 띄게 기독교회에 대한 우호적인 조치들을 취하였다. 이 기간동안에 그는 북 아프리카 지역 로마제국의 수도인 칼테지(Carthage)에 세 통의 편지를 보냈다. 첫 번째 편지는 로마총독들은 어느곳에 있건간에 모든 기독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들을 현재의 주인에 관계없이 되돌려 주라는 명령이었다. 두 번째 편지는 칼테지의 감독들에게 합법적이고 거룩한 종교행사를 위한 성직자(대부분의 기독교 성직자 포함)들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이 곧 감독앞으로 보내질 것이며 교회를 해치는 어떠한 행위들도 단호히 배격하고 보호하겠다는 통보였다. 세 번째 편지는 총독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성직자들이 “신에게 예배하는 것은 국가의 제반행사에 큰 유익을 가져다 주며 로마인의 이름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그들이 예배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역적인 제반 업무에서 책임을 면하도록 하라는 지시였다.

종교적인 확신들

이와 같은 콘스탄틴의 편지와 칙령 속에는 그의 종교에 대한 감정이 스며들어 있다. 거기에는 제국의 복지는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하나님은 그가 국민들에 의해 진정으로 예배를 받는 한 제국의 운명을 복되게 하여 주실것으로 믿는 깊은 종교적인 인물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진정한 예배(콘스탄틴은 이 점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기독교회에서 시행되는 예배이고 진정한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의 하나님이 분명하다.

어떻게 콘스탄틴이 이러한 종교적인 확신을 갖게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어 왔다. 기독교 저술가인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 두 사람은 말년에 직접 콘스탄틴을 만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멜비앙 브릿지전투 전날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콘스탄틴이 꿈을 꾸었거나(락탄티우스) 비젼을 보았다(유세비우스)고 하였다. 그것이 콘스탄틴으로 하여금 크리스천의 하나님을 믿고 전투에 임하게 하였으며 특별한 기독교의 상징을 만들어 전투에 들고 나가게 했다. 이러한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논리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콘스탄틴의 종교적인 충성심의 결정적인 변화-개종-를 기록하였으며 그것은 오늘날의 저명한 로마제국 역사가들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역사학자 놀만 H. 베인스는 막센티우스와 대결하였을 때의 콘스탄틴의 행동을 보면 “콘스탄틴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그에게 승리를 보장해 주었다고 확신한 점에서 그보다 더 분명한 설명은 없다”고 하였다.

콘스탄틴의 친 기독교적인 자세가 과연 순수한 것이냐?하는 것은 그의 꿈이나 비젼이 과연 역사적인 사실이냐? 여부와는 별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도리어 그것은 결정적인 승리 직후부터 그의 말과 행동으로 분명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신앙?

그렇지만 콘스탄틴은 기본적인 기독교교리에 관해서는 아마도 기초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듯 하다. 기원 324년에 그는 이단적인 아리우스와 그의 반대파 사이의 분열을 “아주 작고 별로 의미가 없는 문제”로 간주했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이나 비인격적인 용어인 “신의 능력” “섭리””최고 신”등의 용어를 보다 많이 사용하였고 “그리스도”나 “우리 주”라는 말은 점차적으로 사용하였지만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콘스탄틴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병석에 눕게된 후에야 세례를 받았는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 337년 5월 22일 성령강림절에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그때를 콘스탄틴이 회개한 때로 본다면(당시에는 세례를 죽기 전에 받는 것은 관례였다.) 그를 위선자요, 협잡꾼이요 심지어는 괘물이라고 비난하던 비판자들이 너무나 종종 잊었거나 최소화한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콘스탄틴은 로마의 황제였다. 그리고 제국의 온 백성과 군대의 (그리고 종교의)우두머리렸다.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개인 콘스탄틴에 관한 자료들은 별로 없다. 그의 편지나 칙령들은 모두가 공식문서들이다.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헌신으로 표현한 예가 많지는 않지만 칙령이나 공식문서에서 그렇게 분명하게 그의 종교적인 신념들을 밝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방종교와의 혼합

콘스탄틴의 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사력으로 확보한 그리고 이교도들을 압도한- 독재적인 통치자, 황제의 종교이다. 만약 그가 개종한 직후에 모든 것이 새로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이교적인 요소들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하여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콘스탄틴의 입법과정과 행정조치들은 이상적인 크리스천군주(무엇보다도 크리스천인 로마황제를 이끌어 줄 전례나 롤 모델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의 모습에 비추어서 평가하기 보다는 역사적으로 가혹한 보복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잔혹한 시대였다는 각도에서 이해한다면 쿤스탄틴의 조치가 그렇게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내와 큰 아들이 반역죄로 죽었다는 사실도 감안하여야 할것이다. 콘스탄틴은 무모하게 검을 휘둘렀든게 아니었다.

그러나 여러면에서 기독교적인 영감이 법률제정에 나타나 있다, 예를 들면 죄수들과 노예들을 취급하는 문제나, 신분이 없는 로마사회의 하층계급에 대한 배려, 남아 돌아가는 어린이들 문제에 관한 조치 그리고 독신과 결혼, 혼외 불윤에 대한 문제등에 대한 관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콘스탄틴을 사실보다 더 철저한 크리스천으로 묘사하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그는 회심을 하고서도 그가 전에 믿던 이교도 신앙에서 철저하게 떠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태양신예배에서 기독교의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의 전이과정이 특히 눈에 띤다. 기원 321년 그는 매 주 첫 번째 날을 휴일로 정했을 때 그는 그날을 태양의 날(오늘날의 Sunday)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날을 “주의 날(Lord’s Day)”이라고 불렀다.

결과들

콘스탄틴만큼 많은 선례를 남긴 개인은 없을것이다. 그는 기독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종교가 되는 길을 닦았으며-그것은 반 세기 후에 데오도시우스 대왕때에 완성되었다- 기독교국 로마인 ‘새로운 로마’의 기초를 콘스탄티노블에 세움으로 서로마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1천 여년이나 더 존재했던 고귀한 비잔틴의 기독교 문명 또는 동로마제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콘스탄틴은-핍박 받고, 힘 없고, 평화주의자였던-‘순교자들의 교회’를 지상의 영광스런 국가와 군사력과 제휴하도록 도와주었다. 콘스탄틴 사후에는 기독교가 다시는 그와 같은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곧 제국의 전쟁은 성전(聖戰)이 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은 그들의 교회적인 판단(니케아 회의는 아리우스를 추방하고 콘스탄틴은 그를 망명시켰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시민의 지원을 추구하였다. 통치자들도 교회지도자들을 소집하여 그들의 의사진행에 영향을 끼치거나 위협을 하려고 하였다. 교회의 성직제도는 이단이나 교회분열에 맞서 어떻게 국가의 회유를 물리치는지를 배워갔으며 그들은 또한 점차적으로 재산과 부를 증대시키는 방법들을 알아갔다. 크리스천들에 의한 크리스천 박해, 크리스천에 의한 이교도 박해, 크리스천에 의한 유대인이나 모슬렘 박해등이 곧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평가해 본다면 그 책임은 콘스탄틴보다는 그에게 크리스천 황제로서의 보다 훌륭한 통치기술을 가르치는데 실패한 교회지도자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유세비우스의 말대로 교회지도자들은 크리스천 황제에게 사치스런 신학을 제공함으로 황제로 하여금 이 지상에서 신의 능력을 지닌 화신으로 군림하게 하였다.

 

David F. Wright은 영국 에딘버그대학 신과대학 학장을 역임하였다.


 

교회사 산책 2

초대교회에서 기독교 복음이 어떻게 로마 전역에 퍼졌나?-평범한 신도들

E. 그린 힌손(E. Glenn Hinson)


-대부분의 이교도 사회가 영향을 받은 것은 부흥집회나, 유능한 설교자들의 설교가 아니라 일반 크리스천들의 일상을 통한 전도에 의해서였다.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수 천명식 개종하였다. 논리적이고 열정적으로 이론을 펴는 변증론자들은 엘리트 로마인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하는 확신을 주었다. 이것들은 초기 기독교 선교역사 가운데서 한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전형적인 개종자들은 아마도 변증론자들이나 대중집회에서 신앙에 관하여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그보다는 “매일매일의 전도”를 통해서 말하자면 지역교회에서 계속되온 생활과 크리스천 개개인의 간증들 그리고 특별한 “파라처치”(어떤 교회나 교단에 속하지 않고 사회활동이나 선교활동에 종사하는 크리스쳔 집단을 말한다)목회 등을 통하여 -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사명에 철저한 교회들

콘스탄틴 대왕 전,후의 조직화된 신앙공동체들은 무엇보다도 로마제국 복음화에 최상의 목표를 두었다고 평가할만 하다. 바울에 의해 형성된 모델을 본따서 초기의 크리스천들은 교회를 세우고, 육성하고 그 교회가 회심자들에게 매력을 느끼게하며 그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들은 가능한 방법들을 거의 다 동원해서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때로는 감독이나, 장로 또는 집사들을 전도하러 파송하고 새 교회들을 조직하였다. 예를 들면 3세기 중반에는 로마의 코네리우스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7명의 감독들을 고을(Gaul, 현재의 프랑스)에 보낸 것으로 유명해졌다. 어떤 때는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교회들이 감독에게 지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모든 교회들이 공통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전도였다.

에짚트의 초기 기도서에는 “어둠 속에 있는 저들에게 빛을”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계속해서 “넘어진 자들을 붙잡아 세우고, 약한자들을 강건케 하며, 병든자들을 고치고, 모든자들을 선하신 주께로 인도하여 구원의 길로, 당신의 거룩한 양떼로 인도하소서”라고 되어 있다.

어떤 회심자들은 교회멤버들과의 우정을 통해 신앙에 관해 배웠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나 병을 고치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이 당국에 붙잡혀 가거나 순교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또 기독교 가정에서 노예나 계약노동자로 일하면서 같이 생활한 사람들도 있었다. 3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크리스천들이 세운 교회들이 로마제국 거의 전 지역에 이교도회당들과 함께 세워져 있었다.

이교도들이 기독교에 관하여 어떤 방법으로 들었던지 간에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를 찾아 왔으며 불안한 시대에 교회가 그들에게 안전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에 그냥 머무르게 되었다. 이들 방문자들은 크리스천 교사들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죽지 않으며,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있고 구원이 보장된다는 약속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례와 성만찬이 주는 두개의 종교의식의 능력에 관해 듣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다.

크리스천의 높은 도덕기준과 사회적 신분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행애지는 자선행위에서 불신자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스의 의사인 갈렌(129-199)은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란 글에서 “그들은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생활하면서 동거하는 것을 자제하며 음식과 음료수를 조절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그점에서 순수한 철학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기록하였다.

학습반과 성만찬

일단 교회를 찾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관해 관심을 보이면 교리문답 과정(오늘날의 교리입문반이나 신신자 반과 같은)이 그들을 신비로운 곳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제공된다. 히포리투스(Hippolytus)가 217년 설명한 것을 보면 이들 교실들은 세례받기위한 준비반으로 유능한 교사에 의해 예비질문으로 시작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회심에로 이르는 길을 보여주기 위한 대화로 이끌어 간다.

회들은 박해의 시대에 심각한 책임을 갖기 힘들어 보이는 후보들은 조심스럽게 골라낸다. 히포리투스는 그의 <사도적인 전통>이라는 책에서 그들을 “청취자”명단에 올리기 전에 교사들은 후보자들의 생활과 신앙을 받아들이려는 이유에 대해 검토해야 한다고 하였다. “청취자”를 데려온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을만큼 유능한지를 테스트해 볼 것을 요구한다.

히포리투스는 다음과 같은 특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을 바꾸지 않는 한 제외할 것을 권했다. 그 가운데는 뚜쟁이, 우상 조각가나 화가, 배우나 팬터마임 배우, 이교도 학교의 교사, 검투사, 마차경주자나 쇼에 관여하는 사람들,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 군 지휘관이나 공직에 종사하는 관리들, 매춘부나 음란한 사람들, 점성술사, 점쟁이같은 직업들이 들어 있으며 마술사 역시 포함되어 있다.

그외의 입문과정들은 대개 3년을 요하는데(어떤 곳에서는 6년이 걸리기도 했다.)주로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는가를 주요요건으로 보았다. 4세기에 어거스틴은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전형적인 과정을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후보자의 동기를 철저히 점검한 후에 교리교사는 창조에서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구속사의 멧세지를 전한다. 때로는 교리교사는 느리고, 완고한 후보자에게는 반복과 재촉을 하면서 관대하게 , 참을성 있게 다루어야 한다.

교리문답 수강자들은 교육용 (설교)예배에만 참석할 수 있다. 교육 후에 교리강사는 후보자들을 위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여 주고 그들을 돌려보낸다. (이때 “가라! 너희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의 Ite! Misa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에서 예배를 뜻하는 미사란 말이 나왔다고 생각된다.)

교리문답반 수강자들은 설교 후에 시행되는 성만찬에는 참가할 수 없다. 이 예식에는 특별한 신비가 둘러싸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예식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세례를 받은 후에 따르는 많은 제한들과 제재들을 지켜야 하고 세례후 교육도 받아야 한다.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전은 신비종교(신비적인 의식들을 많이 행하는) 들이 번성하는 고대세계에서는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성만찬에서는 구도자들에게 이교도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값비싼 황소나 양, 식물과 동물같은 값비싼 제물이 아니라 “피없는 희생제물”인 하늘의 만나를 먹고 마실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오라, 미친녀석이여, 술의 신 버커스의 지팽이에 기대지 말고 상아로 왕관을 만들어 쓰지 말고 . 모자를 던져버려라. 털 코트도 벗어버려라’ 그리고나서 그리스도와 성만찬을 언급하면서 “정신 차려라! 말씀을 그리고 말씀의 신비를 보여줄테니.”라고 언급하였다.

일반 성도들과 시골뜨기들

공식적으로 순회하던 부흥사들은 2세기에만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Casual”전도가 초기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크리스천들은 시골뜨기들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대해서 오리겐은 보통사람들을 통해서 기독교 가 전파되었다는데 동의하였다. 예를 들어 죠오지아(전 쏘련연방 소속)에 기독교가 심어진 것은 니노라고 하는 종으로 잡혀간 여인의 증거를 통해서였다. 그렇지만 가장 유명한 개인의 예는 져스틴이다. 그는 165년에 신앙때문에 순교하고 말았는데 그가 개종한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하나는 죽음 앞에서 아무 두려움이 없는 크리스천들 때문에 개종하였으며 두 번째는 그가 나눈 한 노인과의 대화때문이었다

그것은 그가 영적탐구에 몰두하던 때에 일어난 것으로 그때 그는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책들을 열심히 탐독하고 있었다. 하루는 예배소의 해변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우연히 한 노인을 만났으며 그와 철학에 관한 논쟁에 빠져들었다. 그일은 사실이었지만 단 하번뿐이었다. 져스틴은 그 노인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 한번의 대화가 그의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그는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의 친구들”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의 불이 붙었다 고 말했다. 그 대화 이후 얼마되지 않아 져스틴은 개종하였다.

파라쳐지 학교들

학자들은 당시에 어떻게 복음적/철학적 학교들이 생겨났는지 확실히는 모른다. 고대세계(특히 고대 그리스에서)에서 많은 철학학교들이 개인들에 의해서 시작된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교사가 명성을 얻게되면 따르는 자들이 모여들었다고 본다. 판테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학교를 시작했는데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의해 유명해졌다. 져스틴은 로마에 학교를 세우고 거기에서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소개하였다.

어떻게 그런 교사들은 그들의 과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오리겐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그레고리 다우마툴거스는 그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레고리와 그의 형 아데나도로스는 우연히 가이사랴로 가는 길에 오리겐을 만났다. 그리고 오리겐은 그들과 순수하면서도 깊은 우정을 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번은 오리겐이 그들에게 가이사랴에 머물도록 설득하였고 그들에게 체육과 철학, 윤리학 그리고 끝내는 성경(오리겐은 성경을 모든 학문의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까지도 가르쳐 주었다.

이 형제들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오리겐의 가르침은 말과 머리만의 지식이 아니라 그의 삶속에 구현된 화신(化身)이라는 것이었다. 그레고리는 후에 쓰기를 “그리고나서 불꽃과 같은 것이 우리의 내적인 영혼에 불을 지폈다. 사랑,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거룩한 말씀에 대한 사랑에 불이 붙여져서 우리 안에 불꽃이 피어나게 하였다.

이 결과 그레고리는 전설적인 부흥사가 되어 카파도기아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계속하여 수많은 개종자들이 그들의 삶과 증언을 통해 교회에서건, 대화를 통해서건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파하였다.

*E. Glenn Hinson 은 버지나아 주의 리치몬드에 있는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그의 저서가운데는 <The Evangelization of the Roman Empire(Mercer University, 1981)가 있다.


 

교회사 산책 1

초대 기독교세계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어떤 혜택이 있었나?

- 로드니 스탈크(Rodney Stark)


많은 이교도들이 교회가 신도들에게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축복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매력을 느꼈다.


 

로마제국을 통치하였던 첫 번째 크리스천 황제인 콘스탄틴은 당시 황제들의 통치기간보다 훨씬 많은 31년을 왕위에 있다가, 급사한 대부분의 황제들과는 달리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별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장수는 그들이 생활가운데서 성취한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고대의 크리스천들은 이웃의 이교도들보다 평균수명이 훨씬 길었다.

현대의 인구통계학자들에 의하면 평균수명은 삶의 질을 보여주는 최고의 지표로 그에 비추어 보면 크리스천들은 누구보다도 좋은 생활을 하였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사실 많은 이교도들이 교회가 신도들에게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축복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매력을 느꼈다.

왜 크리스천들은 장수하였나?

첫 번째 이유로, 사회봉사라는 것이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던 고대사회에서 크리스천들은 형제들을 돌보아주었다. 2세기 말에 터투리안은 이교도들의 신전은 신도들의 기부금을 “한 차례 주연 (酒宴)”에 다 써버리고 마는데 크리스천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거나 장사지내는데 사용하며, 가난한 부모밑에서 어렵고 학대받는 소녀, 소녀들을 돕거나 집에서 꼼짝 못하는 노인들을 돕는데 쓴다”고 기록하였다.

마찬가지로 251년 안디옥 감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로마감독은 “1,500여명의 과부들과 병자들”을 자신의 회중들이 돌보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크리스천들의 자선사업에 관한 언급은 이교도들의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교도 황제였던 쥬리앙은 “경건한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이교도들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주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이교도들도 기꺼이 돌보아 주었던 크리스천들의 모습은 165년과 251년 두 차례에 걸쳐 전염병이 로마제국을 휩쓸었을 때 극적으로 대중들에게 보여졌다. 치사율이 30%를 넘었었다. 이교도들은 병자들과의 접촉을 지극히 꺼렸고 심지어는 살아있는 환자들도 하수구에 던져버렸지만 크리스천들은 반대로 환자들을 돌보다가 자신들이 죽기까지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극적이었다. 오늘날 초등간호학에서는 전염병은 약 없이 환자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때 주는것 만으로도 치사율을 3분의 2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결과로 크리스천들은 이교도들 보다 회복환자들이 훨씬 많았다.-그것은 눈에 보이는 축복이었다. 크리스천의 사회봉사는 또한 그리스-로마 세계에 자주 발생하던 자연적, 사회적 재난 -지진, 기근, 홍수, 반란, 전쟁 및 침략 등- 때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대중의 눈에 띄었다.

여권 신장

초기 회심자들 가운데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로마제국 전체를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많았다. 그 비율은 로마의 경우 131대 100정도였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보다 더하였으며 엘리트 층에서도 비슷하였다.

여성이 적은 첫째 이유는 로마사회에 널리 퍼진 여자아이살해 풍습때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히라리온이라는 남자는 아내에게 “아들이면 잘 키워라. 만약 여자면 버려라”라고 쓰고 있다. 셀수스의 말에 의하면 잦은 낙태로 많은 여성들이 생명을 잃는 위험에 처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여성인구를 적게 만드는 낙태도 유아살해도 없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는 여성들이 이웃의 이교도들 사이에서 보다 훨씬 높은 지위와 안전을 즐기고 있었다. 이교도 여성들은 전형적으로 (사춘기도 되기전인)어린 나이에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들과 결혼하지만 크리스천 여성들은 더 나이가 들어서 결혼하였으며 배우자를 정하는데도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그외에도 크리스천 남성들은 쉽게 이혼할 수가 없으며 남성과 여성 모두 혼외성교는 강력히 금하여 왔다.

크리스천 여성들은 교회안에서의 상당한 신분 덕분에 많은 혜택을 누렸다. 사도 바울이 여성들이 지도자의 책임을 맡았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프리니가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장로(deaconesses)라고 부르는 두 여성을 고문했다”는 보고서에서도 확인되었다.

도시의 성소

초기의 교회들이 남녀 모두에게 매력이 있었던 것은 보다 오래 살고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또한 분열되고 혼란한 고대세계에서 강력한 공동체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스-로마 도시들은 지나칠 정도로 인구가 많았다. 예를 들면 안디옥은 한 에이커 당 117명이 살았는데 현재 뉴욕의 3배나 되는 숫자이다.


크리스천들의 동기를 유발한 것은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현재 이곳에서 크게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공동주택의 쪽방들은 연기가 나고 어두웠으며 때로는 습기가 차고 더럽고, 땀냄새, 오줌 , 똥냄새가 진동하고 쓰레기 등이 넘쳐났다. 밖에 나가면 거리는 진흙탕길에 열려져 있는 하수구, 오물들이 널려있고 심지어는 하수구에서 시체들이 발견되었다. 많은 인종집단으로 갈라져서 신참자들이나 낯선 사람들에게는 적대감을 보이고 폭력적인 반란도 종종 일어나곤 하였다.

이러한 나쁜 환경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반목에 교량역할을 하고 강력한 공통된 정체감을 제공해 주는 통합된 작은 문화권을 제공하였다.

집 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한 도시들에 기독교는 자선과 희망을 주었다. 신참자들과 낯선 사람들로 가득찬 도시들에 기독교는 즉각적인 교제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고아들과 과부들로 가득한 도시들에 기독교는 새롭고 확장된 가족개념을 제공하였다.

요약하자면 기독교는 더 길고, 더 안전하고, 더 행복한 삶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순교의 정서적 혜택

박해가 심할때는 교인들이 급격히 줄어드는게 분명하다. 사실 박해는 가끔 일어났으며 소수의 크리스쳔만이 순교를 당한게 사실이다. 역사학자인 윌리암 프렌드에 의하면 순교자는 수 천명이 아니라 수 백명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감독이나 다른 유명인들만이 순교자로 선정되었다. 사실 일반 크리스천에 대한 위협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순교는 초대교회 신도들의 신앙을 강화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해는 많은 새로운 종교에서 공통되게 문제된 “무임승차”문제를 제거해 주었다. 교회에 남아있는 신자들은 그것을 지키는 것은 “값비싼” 것이기에 그들의 신앙교리를 철저하게 믿었다.

커다란 희생을 요구하는 일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들 초기의 가정교회에서 행해지던 예배가 강열하고 공감되는 정서적인 만족을 만들어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위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강하게 결속시킨다.

연민의 방정식

크리스천들의 동기를 유발한 것은 단순히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현재 이곳에서 크게 보상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러므로 교인이 되는 대가가 매우 비싸다 하드라도 그것은 사실상 "값싼”것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새로 온 교인들에게 많은 것들을 주면서 그들도 그대로 따라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들은 으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은 또한 자신들도 그러한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재난에 대한 커다란 안전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환자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은 돌보도록 요청받기 때문에 그들 또한 그러한 돌봄을 받을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기 때문에 그들 역시 사랑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던 때 사회적인 계층간의 관계를 완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동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동등하다 그리고 보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줄 책임이 있다고 설교하였다.

신학적으로 좋은 소식

회심자들은 크리스천답게 행동해야 한다고 배우는 한편 왜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해하도록 배웠다. 그들은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며 형제들을 돌보는 자들이 되라고 명령하셨다고 배웠다. 사실 그들은 “신”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이해해야 했던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 . . “란 간단한 어구가 아리토텔레스가 가르쳐 준대로 신들은 순수한 인간들에게는 사랑을 느낄 수 없다고 믿고 있던 교육받은 이교도들에게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고전적인 철학자들은 자비란 병적인 감정이요 성숙하지 못했거나 극복하여야 할 인격적인 결함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비의 하나님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신들이 우리 인간들이 서로 어떻게 대하느냐에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은 모든 세련된 이교도들에게는 명백히 불합리한 것으로 묵살되었다.

이러한 세련된 이교도들이 받아들인 신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와는 대비되는 시시한 존재들이요 “그의 아들”에 비교하면 사악한 무능력자인듯 하다. 그래서 많은 이교도들에게는 이 새로운 가르침은 황당한 것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에게도 역시 기쁜 소식이었다.

물론 이러한 모든 분명히 보이는 사회학적, 지적 동기들 배후에는 이교도들을 믿도록 촉구하고 설득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고 크리스천들은 믿고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천의 회심은 궁극적으로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나 아마도 하나님이 성령이 역사하도록 이러한 것들을 들어 사용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Chrisitian History 통권 57호 에서)

*Rodney Stark-Washington 대학교의 사회학 및 비교종교학 교수 역임.저서로는 The Rise of Christianity:A Sociologist Reconsiders History(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6)이 있음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