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위대한 음악가들의 영성/2019년 10월 15일>

위대한 음악가들의 영성(Spiritual Lives of the Great Composers)-16

(Patrick Kavanaugh 지음, 김상신 역)

합창곡 'Quartet for the End of Time'을 작곡한
올리비에 메시엥(Olivier Messiane 1908-1992)


실레시아에 있는 Stalag 8A 수용소에 있는 죄수들은 또다시 춥고 음산한 하루를 맞기위하여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은 1941년 1월 15일이었다. 그러나 누더기를 걸치고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이 사람들은 달력을 보거나 날짜를 기억하는 사치는 잊으지 오래되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굶주림과 학대와 죽음 이외에는 기대할게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들의 비참한 일상생활에 무언가 색다른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수용소 당국자들이 몇 몇 죄수들이 함께 음악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다. 문화에 목말랐던가 아니면 무언가 좀더 좋았던 때를 회상해 보려는 5천 여명의 뷸쌍한 남자들이 가설무대 앞으로 몰려들었다.

무대위에는 몇 명의 죄수들이 앉아있었다. 줄이 세 개밖에 없는 낡은 첼로를 들고 있는 첼리스트, 그리고 크라리넷 주자와 바이올린 주자. 그 옆에는 다 부셔져가는 낡은 피아노가 한대 서 있는데 보나마나 조율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괴상한 수리를 낼것이 틀림없어 보였으며 그나마도 부러진 키들이 보였다.

피아니스트가 입장하자 그가 오늘의 연주를 위해서 새 곡을 작곡하였다는 안내광고가 있었다. 그 곡은 수용소에서 작곡한 것으로 이라는 따분하고 음울한 제목을 갖고있었다. 많은 청중들에게는 이곡이 그들이 들은 마지막 음악이 되었다. 다행히 이곡을 작곡한 올리비에 메시앵은 다음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의 연주회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으며 종종 자신의 음악이 몹시도 추웠던 Stalag 8A 수용소에서의 연주회만큼 주의를 끌며 공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위대한 음악가일뿐 아니라 시대를 통털어 가장 거리낌없이 기독교신앙을 강조하던 크리스천 음악가였다. 신앙에 관한 것을 찾아보려고 수 백권의 문서들을 뒤적이는 것 보다도 메시엥의 그리스도 신앙에 관한 구체적인 일화 몇 개를 보는 것이 낳을것이다.

그의 음악은 너무나 혁신적이고 복잡해서 충분한 평가를 받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메시엥의 음악은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신자들과 비신자들에게 여러차례 퇴자를 맞았다, 신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그의 현대음악시도에, 불신자들은 메시앵이 전달하려고하는 신앙적인 진리에 호감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긴 생애의 말년에 가서 작곡자와 그의 여러 작품들이 일반적으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다.

그는 1908년 12월 10일에 애비뇽에서 출생하였다. 메시앵의 부모님들은 신실한 캐토릭 신도로 그의 창조적인 재능은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부모님들-아버지는 세익스피어 학자였고 어머니는 시인이었다-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하다. 라는 피아노독주곡을 아홉 살때 작곡하였고 1919년에는 파리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가 22살 때 파리에 있는 La Saite Trinite 성당의 올개니스트로 임명되었고 거기에서 수십년 동안을 성실하게 봉직하였다. 그는 “매주일 나는 세번의 미사와 저녁미사에 연주하였고 때로는 주중의 장례식이나 결혼식에도 연주하였다”고 회상하였다.

5년 후 메시앵은 바이올린 연주자인 Claire Delbos 와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그로 하여금 첫번째 연작가곡을 작곡하도록 격려하였으며 이곡은 결혼의 영적 의미를 찬양한 것이다. 첫번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는 부모에 관한 연가곡 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프랑스가 2차세계대전에 휩싸였을 때 군에 입대하였는데 낡은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다가 독일군에 붙잡혔다. 가 Stalog 8 수용소로 끌려갈 때 가져간 소지품은 바흐의 브란덴버그 악보와 베토벤, 라벨, 버그 그리고 슽라빈스키 등의 악보였다. 2년간 수용소에 있는동안 메시엥은 을 작곡하였으며 그것은 20세기 최고의 실내음악의 하나로 꼽히고있다.

귀환한 후에 그는 파리음악학교의 하모니 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오랫동안 스탁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이나 부레츠(Peere Boulez) 같은 차세대 젊은 음악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였지만 작곡에서는 자유롭게 탐구하도록 격려하였다. 그는 이 ‘자유’라는 것은 공상, 무질서, 반항 또는 무관심같은 것들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적극적인 ‘자유’로 자신을 조절하고 다른사람들을 존경하며 창조물에게 경외심을 가지며 신비로운 것들을 묵상하고 진리를 찾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훌륭한 자유는 천국의 자유를 미리 맛보는 것과 같은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말 안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될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이야기하면서 이것을 우리들에게 약속하였다.

그의 작곡가로서의 생애가운데 전환점이 된것은 1945년 여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이 초연된 때였다. 그것은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적인 의미가 충만한 가사들은 세속적인 비평가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했고 청중가운데 크리스천들은 불협화한 음악에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고 난 후 메시앙의 명성은 확고해졌고 그 이후로 그의 작품들은 늘 명작으로 평가되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그의 강한 신앙을 증언하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1949년 메시앙은 미국의 탱글우드음악제에서 음악을 가르치도록 초청을 받았다. 버른슈타인, 쿠사비스키 같은 저명한 음악가들이 그의 천재성을 인식하고 그의 음악을 옹호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그의 작품들이 세계적인 연주자들에 의해서 세계 전역에서 연주되기 시작하였다. 1978년과 1979년에 메시앵은 미국의 주요도시들을 돌며 연주여행을 하였고 그의 70세 생일에 뉴욕링컨센터에서 ‘메시앵주간’ 연주로 마지막을 장식하였다. 1992년 4월 27일 그가 사망했을 때는 온 세계의 음악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메시앵의 열열한 캐토릭신앙은 아주 잘 알려졌다. 그의 전기를 쓴 새무엘(Claude Samue)l 이 “당신은 당신의 청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어떤 인상을 주기원합니까?”라고 메시앵에게 묻자 그의 대답은 “내가 표현하려고 하는 첫번째 아이디어는-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캐톨릭신앙에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캐토릭 신자가 되는 행운을 얻었다. 나는 모태신앙을 가졌고 어렸을 때부터 성경은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 는 것이었다.

메시앵은 후에 <올리비에 메시앵이 영적세계에 끼친 공헌(Contribution s to the Spiritual World of Olivier Messiaen>이라는 훌륭한 책을 쓴 로블러(Almut Robler)는 두 차례에 걸쳐 신앙에 관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저자는 자신의 구주에 관하여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 시간과 공간에 매인것이 없는 분으로 그래서 모든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며 자기안에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고난당하기 위해 오셨다는 놀라운 지식이 우리들에게 전해졌다. “고 하였다. 또 매시엥은 “부활은 우리 희망의 원인이요 뿌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불신자들이 그들의 불신앙에서 직면하는 장애물들을 분명하게 보았다. 한 인터뷰에서 메시앵은 “불신자들에게 힘든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신앙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예수가 베드로롤 불러 물위를 걸으라고 하였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그것이 우리들이 매일매일 하여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빠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새롭게 힘써야 한다. 우리들은 우리의 시선을 저 세상으로 곧바로 향하게하고 이 세상의 삶을 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메시앵의 배경은 캐토릭 교회였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기독교안에 풍성하게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는 “나는 크리스천이다. 우리는 모두가 크리스천이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교회연합의 시대에는 ?어느시대나 마찬가지지만- 종교적인 차이점에 너무 치중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모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우리의 언어로, 우리들의 감각으로 그리고 우리들의 심적 태도로 그를 이해할 수 있께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화육(化肉)의 신비, 그것이 내가 크리스천인 이유이다. 이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나는 정교회 신자들이나, 개신교도, 캐톨릭 교인들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이란 하나님이 오셨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고 하였다.

메시앵의 음악은 그의 인간됨과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재능을 교회는 물론 세상의 연주장을 위해서도 사용하면서 그는 “나는 하나의 예배행위를 완수하기 원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연주장을 신의 사무실로, 연주회를 일종의 공동체의 찬양으로 바구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음악스타일이 다양한 것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그는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을)나타내 보이시는 분이다. 그리고 거룩한 음악에 대한 나의 개념은 이러한 확신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모든 것 가운데 임재하시며 그렇기 때문에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음악들은 매우 다양할 수 있고 또 다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분명한 신학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주장하는 요행성의 또는 ‘우연한’ 음악에 대해서도 확고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크리스천이기때문에 ‘우연’이란 것을 믿지않는다. 나는 섭리를 믿으며 모든 일어나는 사건들은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건의 자유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모든 것들을 동시에 보시는 하나님에게는 우연이란 없다”고 하였다.

메시앵은 자신의 콘서트 음악과 신앙을 결합하면 반대가 따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첫번째 논란에 관하여 “나는 신앙의 진실을 연주장에 도입하였지만 그저 예배의식이란 감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요종교연주곡을 Trois petites Liteurgies라고 이름붙였다. 나는 이 이름을 그저 아무생각 없이 붙인 것이 아니다. 나는 예배의식을 연주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것은 일종의 예배를, 일종의 조직된 찬양행위를 연주장으로 옮겨서 하는 것이었다. 되풀이하지만 그것이 어떤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였지만 원래 내가 의도했던 것은 캐톨릭예배의전을 종교적인 예배를 위해 지은 석조건물에서 그러한 음악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건물로 옮겨보려는 것으로 결국은 좋은 평판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특히 기독교신앙을 언급하고 있다. 그의 Couleurs de la Cite celeste는 계시록에서 언급된 색깔들을 해석한다. 올갠곡인 La Nativite de Seigneur은 하나님의 말씀과 아기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초점을 맞추었다.
The Quartet for the End of Time은 계시록에 나오는 두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더 이상 시간이 없으리라’고 웨친 천사에게 헌정한 것이다. 이 오페라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가장 닯은 성자로 선정된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이다.

이전의 많은 크리스천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엥은 자신의 신앙을 악보의 모서리 등에 적어놓았다. La Nativite du Seinneur의 “Desseins eternals”란 장면에서 그는 성경구절 에베소 1장 5절과 6절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성구를 적어 놓았다. le tombeau resplendissant의 오케스트라 악보에는 “나는 신이 주신 선물,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의 살과 피에 감사한다”로 시작되는 메시앵의 시가 적혀 있었다.

그의 작품들은 많은 음악소재에서 원용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메시앵이 “귀중하면서 표현력이 풍성한 마르지 않는 멜로디의 샘물”이라고 불렀던 교회의 일반찬송가들도 들어 있다. 자연에 대한 예찬-특히 새소리와 같은-들이 그의 작품가운데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 다음으로 자연을 사랑하였다. “성 바울과 같이 나는 자연에서 신의 다른 한 면을 보고있으며 하나님의 창조물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메시엥은 전 세계의 다른 문화들의 복잡한 리듬들을 연구하고 수용하였다. 특히 힌두의 리듬을 많이 받아들였는데 그래서 어떤 음악가들은 그가 동양종교로 기울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오해를 받게되지 메시엥은 분명히 말했다.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소. 나는 힌두 리듬을 매우 존경하지만 단지 리듬뿐이지 인디안 철학을 존경하는 것은 아니요. 나는 그들의 리듬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을 공부하였지만 나는 힌두교도나 시바신도는 아니요. 불교에 관한한 그것은 공(空)의 이론이요 소극성의 이론이다”고 하엿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존경을 보낸 메시앙의 삶의 한 측면은 다른사람들과의 평화로운 평정심과 다른사람들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이다. 새무엘은 메시엥의 주거지가 복잡한 파리의 한 복판에 있어서 불편하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러자 메시엥은 “당신 생각이 옳을거요. 내 생각이 옳치못했고.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야 하는데 . . .”라고 말했다.

21세기가 되면 메시앵의 음악이 시간이란 테스트를 잘 치뤄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겸손함은 그의 현재의 성공에 근거해서 그가 장기적인 성공을 거둘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헌신적인 크리스천 음악가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성곡을 기념하는 한 글에서 그는 “성령과 더불어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우리들의 힘을 표현하기 위해서, 육신의 감옥의 문을 가로막은 산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우리들의 세기에 갈한 목을 축여 줄 우물을 찾아주기위해 훌륭한 예술가인 동시에 위대한 크리스천인 위대한 예술가들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메시엥에 대한 단상들:대담함

메시앵은 거의 신앙을 찾아보기 어렵던 한 시대와 사회를 살았다. 물론 그는 생의 많은 부분을 교회봉사로 바쳤지만 그의 작품들과 걸출한 생애는 세속적인 음악세계 한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그의 신앙에 대해 침묵을 지키려는 유혹이 엄존하였고 특히 그의청중들이 그의 천재성에만 관심을 가질 때 그런 유혹은 더욱 심했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작품이나, 강연이나 강의, 저술, 대담 등을 통해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였다.

암스텔담에서 행한 전형적인 개회사를 들어보자. “나는 종종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희망하는가와 같은 나의 신앙고백을 하라는 부탁을 받는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는 삼위일체를 믿으며 성령을 믿는다((성령님께 나의 작품 “Messe de la Pentecote”를 헌정하였다.) 그리고 그 아들, 육신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나의 작품들의 많은 부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헌정하였다.)
청중들 가운데 이와같은 스스럼없이 신앙이야기를 하는 크리스천에게 언잖아하는 사람들은 없었는가? 있었다 하드라도 메시앵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교회에서 대화하듯이 음악비평가들 한테도 같은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그의 전혀 주저함이 없는 확신때문에 청중들은 그를 존경하였다. 그의 전기를 쓴 작가들은 비록 그와 같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한결같이 그의 인간성과 음악이 주는 타협없는 멧세지에 대해서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의 담대함은 그의 인격의 한 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성실한 신앙에서 나온것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이 음악적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신앙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내가 죽음에 임하여서 후회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일에 대해서 가장 숭고하면서도 전혀 의심이 없었던 것으로 그것들은 가장 유용하고 가치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올리비어 메시앵은 뛰어난 작곡가 그 이상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세속적인 환경가운데서 크리스천으로서 걸어가야 할 훌륭한 모범을 남겨주었다. 그의 삶 가운데 각인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증언은 그가 하나님께 영광드리기 위하여 작곡한 작품들 가운데 계속 살아있다.

그의 작품들:
오케스트라 곡들: Chronochromie; Seven Hailai;Colrs of the Heavenly City; Turangalila-Symphomie: Et exspecto rresurrectionen mortuorum
실내악 곡들: Quartet for the End of Time
합창곡들: 쏟 Transfiguration of our Lord Jesus Christ
키보드 음악: meditations on the Mystery of the Sacred Trinity(for organ); Catalogue of Birds(for piano)

 


합창곡 'Dona Nobis Pacem'을 작곡한
랠프 본 윌리암스(Ralph Vaughan Williams,1872-1958)

영국연안 북해에서 수영을 한다는 것은 늘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훌륭하게 수영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파도는 너무 쎄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는 사람 하나 없는 해안에서 멀리멀리 밀려나가고 있었다.

목숨을 걸고 파도와 씨름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는 이렇게 죽음의 지경까지 몰아낸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떠올렸을까? 그는 그가 이렇게 멀리까지 헤엄쳐 나온 유일한 이유가 바다에 관한 위대한 심포니를 작곡하는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이 불안한 순간에 주님에게 기적을 베풀어 구조해 달라고 소리지르며 기도하였을까? 그가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포기하기 직전에 커다란 파도가 밀려와 그를 바위들이 있는 해안으로 던져버렸다.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에서 그는 겨우 물에서 기어나와 헐덕거리며, 기침을 하면서 그리고 생명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한동안 누워 있었다.

영국의 작곡가 랠프 본 윌리암스는 그의 목숨을 거의 빼앗아갈 뻔 했던 바다의 사정없는 위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곧 계획했던대로 이 대단한 영감의 기억을 활용하였다. 그의 위대한 Symphony no. 1(일명 “A Sea Symphony”)의 시작과 함께 합창단이 온 목소리를 높여 부르는 “보라 저 바다를!”이라는 합창은 음악역사상 가장 웅장한 순간의 하나이다.

1872년 10월 12일, 태어나는 날부터 랠프 본 윌리암스는 영국시골 땅에 깊이 뿌리밖았다. 그의 음악은 에드워드 엘가에 의해 자리잡은 민족정신을 보여주었으며 그것들을 풍부한 영국민요로 확대시켰다. 영국의 위대한 작곡가로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후에 그는 “만약 당신의 예술의 뿌리가 당신 자신의 토양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그 토양이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주는 것이 있다면 당신은 전 세계를 얻는 한편 너 자신의 영혼도 잊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의 가계(家系)는 영국과 웰스의 역사에 깊이 뿌리밖고 있다. 그가 탄생하기 바로 몇 해 전에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과학자 다윈(Charles Darwin)에 의해 촉발된 대논쟁 때문에 그의 가족은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다윈의 책 ‘종의 기원’은 아직도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는 책으로 랠프가 어렸을 때 그는 어머니에게 논쟁으로 소란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머니는 상식을 바탕으로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논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여 주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6일동안에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단다. 증조할아버지인 촬스는 그게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나 우리는 그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어느쪽이든간에 그것들은 다같이 훌륭한 일이거든” 이러한 어머니의 설명이 어린 랠프를 만족시킨듯 하며 그는 결코 어머니의 대답을 잊지 않았다.

랠프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였지만 그의 조용한 성품때문에 후에 그를 유명하게 하였던 그러한 재능이 있으리란 생각을 주위사람들이 미쳐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모찰트같은 신동도 아니었으며 와그너같은 늦둥이도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수년동안 꾸준히 음악을 연주하여 음악학이나 교수법, 연주실력 그리고 작곡에 이르기까지 숙달된 철저하게 원숙한 음악가가 되었다. 그가 훌륭한 작품을 작곡한 것은 30대에 들어와서였다.

그 이전에는 캠브릿지 대학교에서 음악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런던에 있는 성 바나바교회의 올래니스트가 되었다. 그 후 그는 합창음악에 몰두하여 몇몇 합창단을 지휘하고 지방합창단들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이러한 값진 경험들을 통하여 후에 그는 훌륭한 합창곡들을 작곡할 수 있었다.

그는 교회음악의 전문가로 급격히 부상하여 교회음악과 다른 음악주제들에 대한 강의들을 하였다. 그는 특히 “초기의 찬송가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감정과 권위에 비교해 볼때 현대찬송가들은 잘못된 감상이 많이 들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1904년 그는 을 편집하였는데 그 후 50여년 동안에 5백만부가 팔렸다. 여기에는 본 윌리암스의 초기 멜로디들이 익명으로 포함되어 있다.

1925년에는 를 편집하였는데 여기에 그가 작곡한 ‘Songs Saviour,’, ‘Thy Dear Name We Raise’ 그리고 ‘At the Name of Jesus’등이 들어 있다.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여겼던 시골지방의 영국민속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종종 몇 주간씩 시간을 내어 연필과 공책을 들고 말을 타고 시골을 여행하면서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시 그들이 알고 있는 옛 민요들이 있는지를 묻고 수집하며 다녔다. 이러한 방법이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는 끝내 위대하고 값진 영국의 음악유산들을 수집해 내었고 많은 부분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넣어 활용하였다.

영국민속음악과의 접촉은 그의 창조적인 능력에 영감을 부어주었고 그는 곧 시간을 내어 작곡을 하게 되었다. 1908년 그는 당시 저명한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과 공부하기 위하여 프랑스여행을 하였다. 그 다음해 그는 이중현악오케스트라를 위한 를 작곡하였는데 그의 첫번째 대작이었다. 아직도 그의 작품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고 많이 연주되는 이 아름다운 작품은 조국의 옛 음악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그 주제는 16세기 영국교회의 작곡가에 의해 작곡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영국의 음악활동들은 중지되었다. 그러나 본 윌리암스가 새로이 발견된 그의 창조성을 억누를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한번은 그가 영국의 보병들이 이동하는 도버해의 절벽 위를 걷다가 갑자기 멜로디가 떠올라 그 자리에 앉아서 그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때 갑자기 젊은 장교가 나타나 그를 체포하였다. 젊은 장교는 본 윌리암스의 악보용지에 “지도와 적에게 도움이 될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다행히 장교의 상급자가 그의 음악을 알아보고 당황하여 작곡가를 석방해 주었다.

그후 얼마되지 않아 윌리암스는 군복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들것을 운반하는 일에서부터 포병장교로 그리고 군합창단의 지휘자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이 끝난후 본 윌리암스는 왕실음악학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작곡에 정력을 쏟았다. 그의 강력한 심포니들로(베토벤, 말러 그리고 브루크널과 같이 그도 모두 9개의 심포니를 작곡하였다.) 그는 세계적인 음악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항상 관심을 가졌던 것은 조국이었다. 1935년 그는 영국작곡가들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the Order of Merit’를 수상하였다.

그의 음악성과 영성이 조화되어 본 윌리암스는 위대한 크리스천 작곡가 J.S. 바흐해석의 일인자가 되었다. 1920년대에 그는 유명한 런던의 바흐합창단을 지휘하였고 1947년에는 Dorking Bach Choir를 조직하여 1954년 은퇴하기까지 그의 정열을 쏟아부었다. 이때 그와 함께 하였던 동역자가 본 윌리암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번은 바흐의 Mass in B Minor를 연습하는데 지휘자가 우리들에게 말했다. 바흐를 노래하려면 “시인의 마음과 성자의 가슴과 거인의 폐가 필요하다고!”

바흐의 <마태수난곡> 연주는 그의 영적상태를 잘 들어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운데 누가 감히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며 십자가상의 죽음을 노래할 때 지휘자의 뺨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을 잊을 수가 있을가? 나는 특히 유다가 ‘주여! 내니이까?’라고 묻자 예수가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말하던 그 순간의 강열함을 기억한다. 그것는 전체음악가운데서 가장 슬픈 순간의 하나였다."고 한 동료는 회상하였다.

“마태수난곡 가운데서 ‘죽을 때, 주여 제 가까이 게시옵소서”를 부르면서 그는(본윌리암스) 우리 모두에게 “너 자신들을 위해 이 곡을 부르라”고 언급하였다고 한다.

본 윌리암스는 바흐의 경건한 음악을 대할 때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는 B Minor Mass의 “Quoniam”운동-“당신만이 아버지 하나님의 지극하신 영광”이라는 말을 표현한-을 이야기하면서 지금까지 나온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음악적음률이라고 하였다. 그는 성구를 인용하여 해석의 원리를 기술하고 있다. “문자는 죽이지만 성령은 생명을 주신다. 만약 우리가 좀스럽게 기계적으로 바흐의 문자에 집착한다면 불가피하게 그 정신은 죽어버릴 것이다.”

본 윌리암스는 80대에 이르기까지 작곡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음악활동들을 계속하였다. 1958년 8월 26일 그는 그 해에 완성한 심포니 no 9을 녹음할 계획이었다. 그날밤 그는 수면중에 사망하였는데 사인은 관상동맥혈전증이었다.

항상 교회음악과 깊은 관계가 있었던 이 위대한 작곡가는 그의 개인적인 신앙을 항상 유지하였다. 고상한 영국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경건함이나 신앙심을 내보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볼상사나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전의 에드워드 엘가와 같이 본 윌리암스는 그의 신앙과 신념을 그가 진지하게 작곡한 음악가운데 잘 표현하곤 하였다.

그는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Arthur Vaughan Williams 목사로 옥스포드의 크라이스트교회 예술담당자였고 Down Ampny의 교구담당 목사였다. 본은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관한 것을 배웠고 그의 킹 제임스번역본 성경은 일생동안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기나긴 일생동안 글을 쓸때나 가르칠 때 성경을 인용함으로 그가 이야기하려는 요점을 분명히 하곤 하였다.
본 윌리암스에게는 교회음악을 진흥시켜야겠다는 끝없는 사명이 불타 오르고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찬송가들과 성가곡들이 작곡법상으로 너무 질이 떨어지는 것을 개탄하고 교회음악가들에게 적당한 선에서 안주하지 말라고 꾸짖었다. 그는 교회에서는 종종 세속적인 음악세계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낮은 수준의 작품들을 받아들이고 있다며 실망을 나타내었다. “왜 우리들은 교회에서도 콘서트 홀에서와 같은 수준의 음악유산을 지켜내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와같이 항상 우수함을 강조하다보면 친구들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번은 그가 예배의식에 춤을 도입했다하여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한 비난에 대해 그는 “나는 한때 유행했었던, 종교는 흥을 깨고 침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견해가 행복하게도 지금은 죽어 없어졌기를 희망했는데 춤을 천하게 생각하고 그것들은 차버리거나 재즈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러나 잘 표현된 극치의 춤은 음악, 시, 회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최고의 염원을 표현하는 가장 위대한 방법가운데 하나이다. 감정이 덧붙여진 질서정연하고 율동적인 움직임은 항상 종교적인 열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춤으로 승화되지 않은 위대한 교회의 축제를 상상할 수 있는가? 시편 150편은 '징과 춤으로 그를 찬양하라'고 말하지 않는가? 번연의 천로역정 역시 최고의 종교적인 열정으로 채워져 있는데 그는 Mr. Readyto-Halt로 하여금 그가 구출된 것을 춤으로 축하하도록 하지 않았는가?”라며 본 윌리암스는 묻고 있다.

윌리암스는 인간의 사랑의 멧세지가 담긴 음악들을 연주한다는 비난을 받을 때에도 그는 성경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과시하며 설명한다. 그는 “인간의 사랑은 항상 인간과 신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의 애가는 모든 교회에서 하나님의 인간과의 관계의 상징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사야 서에서의 이사야와 ‘사랑받는 포도원’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교회가 항상 ‘신부’로 상징되고 있지 아니한가?”라고 기록하였다.

본 윌리암스의 가장 위대한 영적유산은 물론 그의 작품가운데서 발견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의 세개의 작품으로는 오페라 , Holdie(이 날)라고 부르는 <크리스마스 칸타타> 그리고 을 들 수 있다. 이 모두가 크리스천의 신앙을 표현한 작품들이며 특히 마지막 작품 욥은 작곡자가 성경의 욥기를 읽고 또 읽으며 작곡한 것으로 실제로 킹제임스의 리듬을 그의 작품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 윌리암스의 신앙을 전해주는 또다른 유명한 작품으로는 그의 바리톤,코러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라는 작품이 있다. 대본은 영국의 위대한 크리스천 시인의하나인 George Herbert의 시들 가운데서 뽑은것으로 그가 선택한 ‘사랑’이란 분명 감동적인 표현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시 가운데서 사랑이 “너는 그게 누구책임인지 모른다”고 말할 때 그것은 구세주가 모든 청중들의 마음에 직접 다가오는 말로 들린다.

그의 다른 성가곡들 가운데는 캔터베리대주교의 취임식을 위해 작곡한 과 아주 절묘한 이 있다. 이 곡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빈 윌리암스의 가장 위대한 성곡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항상 그의 현대적인 작곡 스타일을 조국의 음악적 유산과 결함시키려고 하였으므로 그러한 임무를 책임진 Richard Terry 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감사장에서는 “당신의 개인적이고 현대적인 표현 속에 당신은 옛 예배의 정신과 분위기를 살려내었다”고 치하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의 소품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고 같은 영감적인 노래들을 부르면서 겨우 본 윌리암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뿐이다. 이러한 소품들은 대부분이 특별한 행사를 위해 작곡한 것들이지만 작곡자에게 밀려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작곡한 곡들도 없지 않은데 그 가운데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은 대표적인 예이다.

일생을 통해서 랠프 반 윌리암스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많은 격려를 하여주었고 특히 교회음악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음악학연구가인 Michael Hurd는 “인간으로서의 본 윌리암스는 일반적으로 아주 호감이 가는 인상을 남겼다.”고 기록하였다. 한 때 그를 비판하였던 그는 “그는 하늘 문이 그 앞에 활짝 열려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본 윌리암스에 관한 단상:단순함

랠프 본 윌리암스가 영어민요의 단순성에 푹 빠진 이유를 자신이 물려받은 수수함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듯 하다. 그는 비록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고 왕실과 고급사교계에서 인정을 받았으면서도 소문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 윌리암스의 인간성은 상황이 바뀌고 여러 이질적인 다른 사람들과 만나면서도 바뀌지 않았다. 그의 많은 친구들은 항상 그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그의 타고난 단순함 때문에 더욱 강회되었다.

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작곡가에 대한 사람들의 관찰을 들어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를 아주 사랑했던 사람들은 종종 그의 세련되지 못한 행동을 즐겼다. 그를 잘 아는 한 음악가는 “반 윌리암스는 농업박람회에서 소를 평가하기 위해 가는 농사꾼처럼 보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미국의 작곡가 Aaron Copland는 “그의 음악은 점잖은 농부의 음악과도 같았다”고 언급하였다. 그의 작품가운데 많은 부분들은 특히 그의 심포니 No 3(“Pastoral Symphony)는 단조로우면서도 시골풍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의 진정한 소박함은 그로 하여금 영국사회에서의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존경하도록 하였다. 본 윌리암스는 결코 일반사람들과 거리를 두지 않았다. 한번은 합창단 연습실에 들어갔더니 마침 그의 심포니 1번(바다 심포니)을 연습하고 있었다. 합창단원들이 미처 그를 알아보기 전에 그는 베이스섹션에 슬쩍 끼어들어가 앉으면서 깜짝 놀란 단원에게 “내가 자네 옆에 앉는게 좋을듯하네, 나는 이 곡을 잘 모르거든!”이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어린 아이와 같은 본 윌리암스의 성격은 그가 9살난 소년에게 써 보냈다는 편지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한 어린 소년이 본 윌리암스의 심포니 No. 8과 함께 하이든의 심포니를 연주한 음악회에 갔었던 모양이다. 이 소년은 음악회 후에 그때 지휘자였던 John Barbirolli 경에게 하이든의 심포니는 매우 좋았지만 다른 곡들은 그렇지 못했다고 편지를 써보냈다. Barbirolli는 이 편지를 반 윌리암스에게 보여주었는데 그는 이 편지를 보고 곧 그 소년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다.

사랑하는 톰에게
죤 발비롤리 경께서 자네가 그분에게 보낸 편지를 나에게 보내주었다네. 자네가 하이든을 좋아한다니 매우 기쁘군. 그는 아주 위대한 작곡가이고 아름다운 곡들을 많이 쓰셨지. 나도 언젠가 반드시 자네가 좋아하는 곡을 쓰도록 노력하겠네.
자네를 좋아하는 R.V. 윌리암스로부터

그의 주요 작품들
Orchestra Music: 9개의 심포니 가운데 ‘Sea’ Symphony(no. 1), ‘London” Symphony(no. 2), ‘Pastoral’ Symphony(no. 3) 그리고 ‘Sinfornia Antartica’(no.7) 일명 Job(욥) 등이 특별히 유명하다.
합창음악: O Taste and See; Dona Nobis Pacem; O Clap your Hands; Old Hundreth; The Souls of Righteous; Te Deum; Mass in G Minor
칸타타: Hodie; The Sons of Light; Dona Nobis Pacem
오페라:Pilgrim’s Progress; Sir John in Love
가곡:Five Mystical Songs; Songs of Travel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