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인물/2019년 11월 1일>

<개화기 한국의 인물탐구 14>

외국땅에서 숨진 밀사(密使),이준(李儁)


쓰러져 가는 조국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수 만리 이역에까지 찾아가 분투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비통하게 순국한 이준 열사( 李儁 烈士). 1907년 헤이그에서 서거하였지만 1963년 9월 26일에야 독립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63년 10월 4일 3부요인들과 국민들이 추모하는 가운데 유해봉영국민장(遺骸奉迎國民葬) 이 엄수되고 수유리 묘소에 안식의 자리를 찾았다. 57년만의 환국이었다.

이준은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에서 철종 9년(1859년)1월 21일 이병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열강의 손길이 동양 전체에 암운을 몰아오던 때였다. 인도를 완전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프랑스와 더불어 청조를 위협 천진조약을 맺고 동점을 계속하며 조선까지 위협하였고 섭정 대원군은 국제정세에? 어두워 척양을 고집하고 쇄국정책을 강행하고 있었다.

이준은 어렸을 때 한학을 익혔는데 일곱살 때 하루는 서당 선생이 대원군을 비방하는 것을 보고 “정치를 개혁하려는데 왜 비난하십니까?”라고 따졌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라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다혈질인듯 하다.

이준의 소년기는 나라의 내우외환 속에서 보냈다. 대원군이 가톨릭 신자들은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신미, 병인 양요가 연달아 일어났다. 마냥 강대국에 휘둘리는 나라의 형편을 보면서 “살기 위해서는 죽기로써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겼고 나라의 불의 앞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웠으며 구국운동에 몸을 바치기로 다짐히였다.

소년 이준은 17세에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부터 그는 조야인사들을 찾아보며 교제하기 시작했는데 대원군, 최익현, 형조판서 김병시 등이었다. 특히 김병시는 이준을 비서와 같이 데리고 다니며 일을 시키고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그가 29세 되든때 이준은 고향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경학원을 세워 교육에 힘을 썼다. 그 후 한때 함흥 순릉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법관으로서의 새출발

1894년 갑오년 국내에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동학란, 김옥균 피살, 청일전쟁 발발 김홍집 내각과 갑오경장 등나라는 온통 벌집을 쑤신듯 다난하였다. 이에 이준은 순능참봉 벼슬을 집어 던지고 무언가 시대에 필요한 일을 하겠다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박영효, 서광범 등이 새로 설립한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6개월만에 졸업하고 다음해 한성재판소 검사보에 취임했다. 강직한 이준은 부패한 조신들의 불법과 비행을 추호의 용서도 없이 파헤쳤다. 결국 상사들의 미움을 받아 법관생활을 한달 만에 끝냈지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서재필, 안경주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부패한 정부를 정면으로 탄핵하며 평의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친로파들의 박해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망명기간동안 이준은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40세에), 법관으로서 구국운동자로서 충분히 성숙할 수 있었다.

귀국한 이준은 독립협회에 가담하여 정부탄핵의 선두에서 활약,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고 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협력 할 것과
함부로 이권을 양보하지 말고 예산, 결산을 국민에게 알릴 것, 중대한 밤죄는 이를 공판에 회부할 것 등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시행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나라를 뒤엎을 음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이준, 이상재 등 17인을 투옥하는 바람에 만민공동회는 3년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준은 광무 6년에 민영환, 이상재, 이상설 등과 함께 개혁당을 조직하고 적당한 시기에 부패한 내각을 무너트리고 유능하고, 참신한 개혁정치를 실현하려고 계획을 세우다가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으며 1904년에는 황무지 개척권을 일본에 대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투쟁을 선도하였고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를 조직하고 일진회에 대한 공격을 가하였다.

이준은 또한 구국운동의 또 다른 방법으로 민중을 계몽시키고 독립정신을 높이는데 온갖 노력을 쏟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나라가 망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자 이준과 그의 동지들은 “나라와 함께 죽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준은 죽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죽고 만다는 것은 너무나 아쉽다고 그는 느꼈다.

“내가 죽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다면 누가 일을 할것인가? 살아서 일하다가 얼마든지 죽을 수 있지 않은가?”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이제 나라를 구하는 길은 국민을 계몽시켜 인격을 도야하는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1906년 국민교육회를 조직 . 보광학교를 세우고 재경 관북유학생회 등을 통해 기호학회, 서우학회, 광동학회 등을 세워 교육에 전력하는 한편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는데 이준은 그해 헤이그로 떠날 때까지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으로 양기택, 안창호, 이동휘, 장지영 등과 부지런히 뛰었다.

한편 1906년 6월 이준은 평리원(平理院)검사에, 다음 달에는 특별법원 검사에 취임했다. 당시 <매일신보>는 그의 검사생활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었다. “그는 출근을 하면 먼저 옥중에 들어가 개과천선할 것을 효유하고 병이 난 자가 있으면 더운 방으로 옮겨 조리하게 하였다. 그가 맡은 사건은 재빨리 그리고 공정하게 판결하여 오래동안 미결로 남겨 두는 일이 없었다”

이준은 구한말의 고위급 검사로 법부(法部)의 불공평과 잘못을 시정하기 위하여 요료에 청원운동을 벌리는 등 상부에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결국 1907년 2월 평리원 사령에 의해 구속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다행히 고종의 특사로 석방, 복직이 되었지만 결국 3월 법무대신 이하영에 의해 파면되고 말았다.

밀사의 사명을 띠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조선은 일본에 외교권과 경찰권을 박탈당하고 고종은 측근들을 통해 해외에서 일어나는 국제정세를 얻어 듣는 정도였다. 고종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제창으로 1907년 6월 홀랜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무력으로 강요된 것임을 전세계에 호소하기로 하였다.

3인의 밀사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 밀사 파견계획에 발탁된 사람이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었다. 이상설은 1905년 의정부참판(議政府參判)으로 임명되었는데 11월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여 두문불출하고 있다가 용정으로 망명하였고 이위종은 러시아 주재 한국공사의 아들로 공사관의 서기로 있다가 그대로 러시아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1907년 4월 20일 고종으로부터 신임장을 받고 곧바로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러시아에 가서 이위종과 합류하였다. 이들 일행의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만국평화회의는 하루 전에 이미 개회되었다.

이들 대표들은 “한국황제가 전권의 자격을 주어 평회회의에 파견한 전 의정부 참관 이상설, 전 평리원 검사 이준, 페테스부르크주재 한국공사관의 전 참사관 이위종 등은 다음과 같이 보고해 드리는 영광을 갖는 바입니다”로 시작하는 호소문을 회의에 참석한 각국대표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은 호소문에서 1905년 일본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한국을 합방하였음을 밝히면서 첫째, 일본은 우리 황제의 동의 없이 행돌을 취하였다. 둘째 일본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정부에 무력을 행사하였다. 셋째 일본인은 우리나라가 만든 법규와 관습을 무시하고 행동을 취하였다며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만행을 규탄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밀사들들이 헤이그에 나타난 것을 늦게야 알게된 일본당국은 조선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주최국은 한일협약에 의해 이미 외교권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조선 대표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하였다.
이들 밀사들은 한일협약이 일본의 협박에 의한 것이요 황제의 조인도 없는 것이며 그래서 황제는 자신들을 밀사로 보낸 것이라고 호소하였으나 끝내 평화회의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제 세계의 여론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밀사들은 신문 등을 이용하여 일제의 침략행위를 통열히 비난하였다. 특히 영불노어에 능통하였던 이위종은 이곳에서 열린 만국기자회의에서 연설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A Plea for Korea’라는 연설을 하여 동정을 사기도 하였다.

수만리 이역땅을 멀다 않고 찾아왔으나 국제정세가 너무나 조국에 불리함을 알게된 이준은 우울하고 침통한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과로로 병을 얻어 헤이그에서 순사(殉死)하고 말았다. 어쩌면 다혈질의 그가 분을 삭이지 못했기 때문인듯 하다. 그는 임종할 때에도 눈물을 흘리며 분노로 비장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융희 원년(1907년) 7월 14일 오후,그는 향년 49세. 망국(亡國)의 신하로서 머나먼 남의 땅에 와서 황제에게 위임받은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 한을 안고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애국자 이준은 이 세상을 떠났다.

화란의 유력지 <헤드 화데란트>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고자 평회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한국대표 이상설, 이위종 양씨와 함께 온 차석(次席) 대표 이준 씨가 어제 저녁 서거하였는데 그는 이미 지난 수일 동안 병환 중에 있다 모 호텔에서 사망한 것이다”라고 간단히 그의 죽음을 알렸다.

항간에는 반일 분위기에 편승하여 이준 열사가 회의장에서 활복자살했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퍼졌었지만 사실이 아닌듯 하다. 국사편찬위원회는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라 조사한 결과, 1962년 "할복 자결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사절(밀사)로서의 외교활동 실패가 병의 원인으로 죽음에까지 이른것은 분명하다

이준의 유해는 동료들의 주선과 화란정부의 호의로 헤이그의 뉴우 에크 뒤덴 묘지에 안장되었다가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고 1963년 독립된 대한민국으로 환국하여 수유리 묘역에 안장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열사 기념관이 이준열사기념교회(감리교)안에 건립되었다.

*신구문화사 간 <한국의 인간상 6권>에 수록된 송병기의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주로 참고하였음을 밝힘니다>


<개화기 한국의 인물탐구 13>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大統領) 우남 이승만(李承晩)

 

이승만(李承晩,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은 조선과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의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이며,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 건국 대통령,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본관은 전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박사 학위였고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유일하게 외국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한 대통령이다. 4.19혁명에 의해 하야 후 하와이로 요양 갔으나, 병세가 나빠져 하와이에서 서거했다

이승만은1875년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의 몰락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어머니 김해김씨 (金海金氏,)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 집안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이승만에 의하면 "(아버지 이경선)은 부자였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이승만 위로 두 아들을 두었다가 천연두로 잃자 세상을 크게 비관하고 몸져 눕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이승만은 이씨조선 왕족에 속하였지만(양평대군 16대 손) 계승권에서 멀리?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으며 자신의 조상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후에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승만은 세 살때 할아버지를 따라 황해도 해주 방면으로 이사하였으나 세 살 때 온 가족들이 아버지를 따라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는 학교가 없어 서당에서 선생을 모시고 글공부를 하였는데 이승만이 천자문을 배울 때 해방 후 주일대사를 지낸 신흥우가 같이 공부하엿다고 한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계속된 오랜 감옥생활과 해외생활 그리고 아들 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하였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한 것으로 보아 주변 환경에 대해 비판적이었던듯 하다.


새로운 문물에 눈이 뜨다

이승만이 20세 때(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고 동학란으로 인심이 흉흉했으나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려는 생각으로 한문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과거시험에 여러차례 낙방하고 우울한 날을 지내고 있었다. 이때 신흥우의 형 신긍우가 아펜셀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이승만에게도 입학을 권유하자 1895년 4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면서 민족의식이 자랐고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1895년 11월 29일 명성황우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가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과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 후 그는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이싱재, 윤치호 등을 만나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언론 활동

이승만은 1898년 1월 양흥목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행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얻다.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

이승만은 활발한 언론활동과 함께 교육계몽운동에도 관여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는데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승만은 수감중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 1904년 8월 수감생활 5년만에 특사로 석방되었다.

수감생활과 기독교 개종

승만은 수감 시절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을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수감중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한편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1900년8월, 한성감옥에서청.일 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민영환, 한규설 등이 등이 그를 특사로 미국으로 보내기위해 노력한 결과 특사로 감옥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석방된 후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민영환, 한규설을 만난후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고 도미준비를 하였다. 이승만은 민영환을 만나 그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보냈으나 평소 고종을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렸다고 생각하던 이승만은 고종을 만나지 않고 도미한다. 평생 이승만을 따라 다녔던 옹고집이 이때에 이미 그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승만은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가 그 해(1904년)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하였다

미국에서의 외교활동

이승만은 1905년 1우럴 15일 "워싱턴 포스트" 와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의 주선으로 죤 헤이 미 국무장관과 면담, 한국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에 이승만은 워싱톤 D.C.의 죠지워싱톤 대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으며 그 해 봄에는 워싱톤 D.C.의 커버난트 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승만의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에 관해서는 1905년 여름 이승만이 루스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면접하는데 성공하였으나 루즈벨트 대통령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공식문서로 한국공사관을 통해 정식청원하라고 하였으나 당시 일본에게 포섭되어 있던 공사 김윤정이 도움을 거절하여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추진중이던 루즈벨트 대통령은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이승만은 1905년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 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민영환은 두 달 후에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미국 유학

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1910년에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이때 이승만은 다른 학교지만 옆에 붙어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강의를 들었다.

1908년 미주교포사회에서는 이승만을 일약 유명인사로 부각시키는 한편 그에 대한 찬반이 엇갈리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1908년 미국에 와있던 장인화, 전명운 의사가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 두 의사를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에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자 이승만은 미주의 한인들에게 전명운의 변호비용으로 3000달러의 거액을 요구했다. 그뿐 아니라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형편을 살피고 통역하기를 거절하였는데, 그 이유는 "시간 관계로 오래 있을 수 없으며 예수교인의 신분으로 살인 재판 통역을 원하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 통역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는 법정 변호를 거부한 후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승만 개인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대한 교포사회의 비난 역시 고조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인 신흥우가 장인환과 전명운의 변론을 맡았고 국내외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금운동에도 적극 참여함으로 큰 파문과 함께 각성의 계기가 되어 교회가 민족운동에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이승만은 공부를 마치고 1910년 일단 귀국하여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 기독교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1912년 4월에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차 도미하였다.1913년에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하였다.

하와이 정착

1913년 이승만은 국민회와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하와이섬의 마운틴 뷰에서 숯 사업을 시작하기도 있다.

한편, 이 무렵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 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 건 벌어졌다.

니승만은 감리교 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로부터 독립시켰다. 이승만의 교회 분열로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한다.

한인 사회 장악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폭발혐의를 받게되자 국민군단을 해체하고 하와이를 떠났으며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함으로 그동안 한인사회를 흔들던 분열과 대립은 일단락 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예정되고,미국 대통령인 우드로우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이승만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밀지를 보낸다.

이승만은 밀사를 송진우와 김성수에 보내어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의 밀서를 전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활동을 감지하고 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되돌려 보냄으로 한국에서의 3.1.만세운동에는 이승만이 참여하지 못하고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문에 이승만이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

이승만은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이즈음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듯 3.1. 만세운동 이후 여기 저기에서 그를 지도자로 추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어쩌면 전 달(2월) 미수에 그친 일본인 밀정의 이승만 저격사건이 알려지면서 영향을 끼친듯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브라디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탄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 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1919년 4월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국무총리로 추대되었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 임시정부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제국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그 해 6월 이승만은'대한공화국'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스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7월 15일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그런데 그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8월 25일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니. . .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이승만은 도리어 “소문이 나면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니 언급하지 말라”며 계속 대통령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에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기존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대폭 개정하여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고 대통령제를 도입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기존 국무총리였던 이승만이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에 머물면서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 활동을 하는 한편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상해를 방문 다음 해 5월 미국 하와이로 돌아갔다.
이승만이 미국에 거주하면서 평판이 그리 좋은편이 아닌데도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톤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한듯 하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에 기반을 가지고 있는 이승만을 헌법을 고쳐가면서까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으나 대통령호칭 문제로 충돌하고, 동료들의 반대에도 천황 히로히토에게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다가 묵살을 당했으며 1921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 탄핵이유로 외교를 이유로 임지(상해)를 떠나 미주에서 지내면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과 민심을 분산시키고 허위 날조로 정부기구의 위신을 손상시킨 것 등을 들고 있다.

구미외교위원부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서 활동하며 미국,유럽,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1929년 이후 이승만은 임정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임정 구미위원부를 가동하며 외교,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고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구와 이승만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 수 없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김구는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이런 의거는 어리석은 짓이며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것이다”면서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장제스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을 명문화시킨 것이윤봉길 의거 덕분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정의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한국인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상하이의 임정으로 송금해 주었다.

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어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대한독립청원서(大韓獨立請願書)를 제출하였다. 1933년 3월 6일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 이로서 임정에서 탄핵당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이승만은 1934년 가을 뉴욕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1933년 2월 제네바 바문시 만났던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9년 이승만은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았고, 선교사들에 의해 빼돌려져 체포를 면하고 부산항을 거쳐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선임

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6월 일본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미국침략을 경고한 《일본을 벗기다》(원제 -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일본 내막기'라고도 함)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는 이후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1941년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와 미국의 업무연락을 맡아서 하는 한편 미국국무부에 쏘련의 한반도 점령 가능성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전후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 미국의 중경 임시정부 승인을 여러차례 청원하였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끝내 승인을 얻어내지 못했다.

1942년 미국의 소리에 한국어 방송을 하도록 하였으며 미육군전략사무처(OSS)와 협동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훈련하여 전투에 참여시키는 계회 등을 추진하였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승만은 미국체류 20여년 동안 조선 정부의 밀사로 시작하여 임시정부의 대통령과 임시정부 주미외교부 위원장 등의 명칭을 가지고 주로 미국을 상대로 임시정부를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안이한 정세판단과 실속 없는 독립호소외교를 비난한다. 혹자는 일본의 끈질긴 방해공작을 주요 원인으로 지적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힘을 합치지 못하고 파당을 짓는 그의 모난 성격때문에 신임을 잃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하였다. 8.15광복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준비를 했으나 미 국무부는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정하고 여권발급을 지연 10월 16일에야 김포 공항에 도착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하였다.이승만은김구,김규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였다 이승만은 1946년 1월 14일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 선 공산당을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그후로 공산당과의 일체 타협을 거부하였다

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위에 도전했다. 해방직후의 찬탁, 반탁, 미소공동위원회와의 반목 등 혼란기를 거쳐 UN 감시하의 남한만의 선거가 실시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니 그의 나이 74세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단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로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으나 미군의 재빠른 참전결정과 유엔의 지원으로 북한군을 일단 격퇴하고 3년간의 전쟁 끝에 휴전선을 가운데 둔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며 한미군사동맹의 체결로 외국의 침략에서 일단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었으나 전후의 나라형편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전후 10여년 동안은 국내적으로 격동기였다. 이승만은 자신의 자유당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헌법을 고치는 등 독재적인 방법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 역시 심상치 않았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고, 개표 과정에서 이기붕의 부통령당선을 위한 개표조작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항의가 전국적으로 진행된 가운데 경남 마산에서는 조직적 저항으로 발전한 마산 3.15 의거가 발생했다. 이것이 4.19일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결국 이승만은 “불의를 보고 국민이 좌시한다면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대통령 직에서 사퇴하였다

이승만은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처음에 한국을 떠날 때 영구 망명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한 달 정도 잠시 피하는 걸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허정 과도 내각과 제2공화국 장면정권은 이승만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망명생활중 평소의 심장병이 악화되어서,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루루 요양원에서 심장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 이승만의 나이는 90세였다.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호놀룰루를 출발, 김포비행장을 통해 입국하였으며,7월 27일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치고, 가족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해방정국에서의 이승만의 주장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국무총리를 지낸 허정은 '흔히 선생님을 독재자라고도 하지만 미국에서 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 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잖아 있었다' 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점을 두고 그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90평생을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한 인물, 그것도 국가적으로 가장 격동기를 헤쳐나가야 했던 인물에게 함부로 잣대를 갖다 대어 평가하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분명 애국자였다. 특히 요즘 정치하며 애국한다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전형적인 조선의 선비사상과 미국의 기독교 사상이 혼합된 인물로서 평생을 매우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인간의 약점을 벗어버리지 못한 나약한 인간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자신의 주장을 꺾기에는 너무나 똑똑하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는 주위의 박수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새정부 들어 이승만 격하운동에 열을 올리지만 과연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지도자는 누구인지는 곱씹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먼 훗날 역사가 증명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늘푸른나무(www.webegt.com)-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