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이달의 화두/2019년 10월 1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 18 >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누가 24:38)-새무엘 로드리게스(Samuel Rodriguez Jr.)

두 물체가 같은 공간을 차지할 수는 없다. 사랑과 미움, 진리와 거짓, 예언자적인 것과 무기력한 것, 믿음과 두려움, 확신과 의심 등이 같이 공존할 수 없다. 하나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두려움을 생각해 보자. 두려움은 믿음의 적이다. 두려움 때문에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숨었으며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대로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믿지 못했다. 두려움은 차별하며, 관용하지 않으며 분리된 공동체에 숨어버리며,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을 폐기해 버린다. 두려움은 장벽을 만들고, 진리에 침묵하고, 사랑을 해소하며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고 그 유명한 생명의 사막에서 죽어간다. 두려움은 예언자들을 담금질 하는데서 매력적이거나, 주저함, 파괴, 구속 등을 확대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두려움의 가장 놀라운 모습은 그에 따르는 불행한 현실에 있다. 즉 거기에는 항상 공범과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의심이다.

2000여년 전에 예수께서는 두려움과 의심을 같이 이야기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한때 그의 충성스러운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기적적으로 나타나셨다. 주님의 나타나심은 무엇보다도 크게 축하할 일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러나 기쁨의 웨침 대신 예수께서 마주친 것은 당황한 영혼들이었다. 한 없는 신앙으로 환희에 가득 찬 얼굴들 대신 다윗의 아들 예수가 그 방에서 본 것은 놀라움에 가득 찬 얼굴과 회의의 눈초리들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창조 이래 지금까지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전해지는 질문 “왜 두려워 하느냐” “왜 너의 마음이 의심으로 가득 차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왜 너희들은 두려움과 의심이 너희들을 규정하도록 하느냐?”고 물으신다.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 이후 오늘 그들의 삶을 그의 영을 통해서 재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 같이 그는 계속해서 우리들을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이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는 환경과 동시에 우리를 발견하는 환경을 가능케 하려고 우리들의 삶의 모든 어려움의 고비마다 나타나신다.

이 단순한 진리가 나의 삶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히스패닉계 아메리칸인 나는 문화적 근시안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지역에서 성장하면서 나는 정체성을 찾고 있었다. 나는 나의 주변에 대한 해소방안을 제공할 어떤 목적을 갈망하였다.

놀랍게도 나 역시 유명한 다락방에 갇혀서 나의 꿈이 오늘날의 불확실성 가운데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를 묻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되었다.

내가 14살이던 어느 날 저녁 나는 빌리그래함 특집을 보고 있었다. 그의 분명한 설교는 나의 마음 속의 무언가를 자극하였다. 얼마 안있어 PBS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유명한 “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란 연설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을 방영하였다. 바로 그때 나는 나의 목적을 분명히 설정하였다. 빌리 그램의 멧세지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행진을 결합시키는 삶, 영성과 봉사를 조화시키는 삶, 거룩함과 겸손을 함께 묶고, 의와 정의, 진리와 사랑을 함께 결합하는 삶을 목적하였다.

이 촉매적인 만남은 나의 근시안에 영적인 교정렌스를 제공해 주었다. 그날 나는 나의 주위환경에 의해 내가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규정되었다. 나는 나의 과거의 실패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용서하심에 의해서,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 왔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갈것인가?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는가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도달하였다. 나는 하나님이 이미 나를 위해 하신 것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를 평가하셨다. 그의 사랑, 자비, 은총, 의로우심, 기쁨, 평화, 희생, 속죄, 부활, 그리고 성령 등이 나를 규정한다. 나는 나 그대로의 “나다”

예수께서 2천 여년 전 그 다락방에 나타났을 때 그는 제자들의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뢰를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해에 관심을 가지시기 보다는 우리들의 신뢰에 보다 관심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들이 정말 예수를 신뢰하고 있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들의 삶을 위한 그의 말씀과 목적과 약속을 믿는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우리들이 두려움과 불신의 예언자들을 결코 대면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이다. 예수의 행동과 말씀은 모두가 그것은 그날의 끝에가서 그의 평화가 통치할 것이며 그의 목적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억제할 수 없는 확신을 제공하여 준다.

그러한 약속으로 무장한 우리들은 두려움을 악화시키고 의심을 증가시키는요소들과 직면하여 싸워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때, 우리가 가진 것 즉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마음의 영 등을 알게될 때 우리들은 문제의 영혼과 불신의 범죄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할 수 있다,

바로왕에게는 모세가 있었고, 골리앗 장수에게는 다윗이 있었으며, 느부갓네살 왕에게는 다니엘이, 하만에게는 에스더가, 헤롯에게는 예수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대항하여 일어나는 악마들에게는 우리를 위하여 분연히 일어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있다.

예수께서는 또한 그의 제자들에게 두려움과 회의를 극복할 수 있는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나를 만져보라는 것이다. 내 손을 보고, 내 발을 보라. 너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만져 보고 내가 귀신이 아니란 것을 확인하라. 귀신은 육신이 없는데 나는 보다시피 육신을 가지고 있다.”

“나를 만져 보라” 도덕적 상대주의와 영적 무관심, 미온적인 교회들, 옹고집, 불화, 증오, 두려움, 불신앙 등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좋은 소식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만져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만져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배고픈자들을 공궤하며 헐벗은 사람들을 입히고 어둠가운데서 빛이 되어줌으로 하나님을 만질 수 있다. 우리들은 정의를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함으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만질 수 있다.

나의 기도와 소망은 미래의 세대들이 우리를 보고 ”이 세대들은 하나님을 만졌던 세대들이다” “두려움을 믿음으로 바꾸고, 불신앙을 무한한 사랑으로 바꾸며 그렇게 함으로 세계를 바꾼 세대다” 라고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Samuel Rodriguez Jr.는 캘리포니아주의 크라멘토에 있는 New Season Christian Worship Center의 수석목사로 National Hispanic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의 회장이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How can the guests of the bridegroom fast while he is with them,마가복음 2:19)

내가 어렸을 때 목사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가족 저녁만찬에 참석하시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우리 목사님은 때로는 주일 점심만찬에도 참석하셨고, 어떤 때는 생일축하 피크닉에도 참석하셨으며 심지어 어떤 때는 감사절 만찬에도 참석하신 이이 있었다. 우리가족들은 착실하게 교회에 출석하는 가정이긴 했지만 교회에서 별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가족들은 아니었다.

우리는 텍사스 주 에딘바라 근교에서 목화를 추수하고, 지역의 야채농장에서 과일과 야채 등을 포장하며 최저임금 수준의 수입을 올리며 살고 있는 가난한 가정이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지려면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가족들은 그 어느 것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목사님이 우리들과 식사를 함께 하기위해 오실 때에는 보잘것 없는 우리들의 삶이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 특별한 날로 바뀌었다. 어린아이였지만 나는 우리 목사님은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이해하고 목사님이 우리와 같이 하기위해 오심을 하나님이 같이 하심으로 이해하였다.

할머니 소피아와 어머니 레베카는 교회의 특별한 절기나 가족들이 어려움에 부딪칠 때? 금식을 하셨지만 목사님의 방문때에는 금식하는 일이 없었다. 우리가 가진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음식들을 풍성하게 준비하였으며 아무도 내일 무엇을 먹을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우리들은 식탁에 앉아서 몇 시간씩 음식도 즐기고 무엇보다도 목사님과 함께 있는 것을 즐겼으며 목사님은 신앙이야기들을 마치 살아 있는 이야기 처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셨다. 목사님은 우리들의 삶에 대하여 물어 보셨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만이 외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격려해 주셨다. 우리들은 삶의 어려움과 우리의 연약함에 대하여서도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데 대해 크게 기뻐하였다.

다음 날,우리들은 정상생활로 돌아가 세상적인 삶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였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로 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리를 어떤 어려움에서도 견디어 내게 하였다. 하나님의 멧센저와 함께 식탁을 같이 했던 거룩한 추억이 우리들을 격려해 주었다. 진정한 영적만찬에 대한 어릴적 경험은 나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형성기를 이루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형성해 주었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임을 알게하였다.

마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레위의 식탁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는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목사님의 우리집 방문을 상기하게 해 주었다. 나는 우리 목사님이 그때 내가 나의 가족들과 그와 함께 나누었던 경험들과 예수님을 그의 집에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식사를 함게 나누면서 삶을 나누고 축복을 나누었던 경험들을 같은 경험으로 해석한다고해서 기분 나빠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큰 기쁨이 넘쳐 났었을까!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현현인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편이셨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모든 사람들이 경험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교회 지도자들은 목사님이 식사를 함께 하기 위하여 우리집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들 때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방법으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입장은 왜 목사님이 그 귀중한 시간들을 우리같이 것 없는 사람들과 낭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만찬을 나누는 대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설교준비하며 금식하는데 더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종교적인 관행들이 선과 악의 행동들을 통해 표현될 때 회의를 만들어 내는지 흥미롭다. 그것은 우리들이 우리들의 해석을 통해서 거룩한 것들을 부패시키는지 보여주는 싸인으로 때로는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혼란스럽게 한다.

세계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금식하였다. 바리새인들도 금식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를 눈여겨 보았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사람들과 함께 금식하기 보다는 연회를 즐기는 것이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들의 의문은 예수에 대한 의문으로 옮겨졌다. “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그럴수가 없지요!”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금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마치 결혼의식중에 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혼의식중에 금식한다면 그 멧세지는 우리는 결혼이 즐겁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그 결혼을 동의하지 않는다는 싸인일 수도 있지않은가? 금식은 기쁨의 계절에는 적절한 반응이 아닐 수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사람에 대한 그의 사랑을 보여주고 자비와 은총을 베푸시기 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만찬과 축제의 시간이지 금식의 시간은 아닐것이다.

금식이 적절한 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인간이 언제 금식하고, 언제 즐거워할지를 결정하는 최선의 때를 결정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상처당했는지를 아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방법에 맞추어서 우리들에게로 오신다. 나의 가족들과 나는 우리가 사회에서, 그리고 심지어 우리들은 못나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교회에서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 필요했다. 우리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삶의 자비로운 안식처로서 우리들의 전적으로 죄된 삶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을 안다. 오늘 우리는 우리 크리스천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또한 언젠가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나누려고 시도한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소식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가져다 주셨다는 것이다. 그 기쁨을 위해 금식을 미루는 것이 가치있는 일이 아닌가?

*미너바 카바노(연합감리교회 로스안젤레스지역 감독.)


“너희는 이들 갈릴리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하느냐?” (누가 13장 2절)

티모디 도란 추기경

랍비 해랄드 쿠슈너의 베스트 셀러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겼을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을 기억하십니까? 그 책이 출판된지 이미 30년이 지났지만 그 책은 랍비 큐슈너가 지난 수 천 여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던 중대한 신비로운 사건들의 하나를 탐구함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왜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비극이 일어나는가? 왜 사랑의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시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도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은 것이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인 줄 아느냐?

예수께서 자기의 가까운 친구들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제기한지가 2,000여년이 지났는데도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되거나, 병에 걸리거나, 힘들게 애 쓸때 그 사람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당한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고통 받을 짓들을 했기때문이라는 거죠. 그들은 죄인들이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을 벌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제가 병원에서 중요한 수술을 기다리는 친구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의아해하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는가?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나쁜 짓이라도 했단말인가?”하면서 소리를 높였습니다. 저는 경찰로 근무중에 피격을 당해 세 어린 아이들은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상심중에 있는 여인을 위로하러 장의사를 찾았을 때도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10살도 채 안된 저의 조카가 낳는다는 보장도 없이 그 힘든 방사선 치료을 받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 불쌍한 어린 아이가 당하는 고통이 어떻게 정당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와 똑같은 잘못된 사고방식-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여하튼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의 운명을 자초한 것이라는-이 종종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열등한 사람들을 이해하는데에 초대도 받지 않고 슬그머니 끼어드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문깐에 웅크리고 있는 거지를 지나칠 때나 일거리를 얻기 위해 길거리에 서 있는 이민노동자들을 지날 때 또는 화재경보기도 없는 건물에서 살던 사람들이 화재로 가족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들은 그 사람들은 무언가 잘 못해서, 법을 어겨서, 비 도덕적이어서 그러한 운명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삶의 신비를 설명해 보려 하고, 인간으로 알 수 없는 일 또는 알수도 없는 일들에 대해 그 이유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마도 어쩌면 그 사람들은 그런 운명을 사는게 마땅하다고 생각함으로 우리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사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운명에는 면역이 되어 있어서 나 자신이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슬픔이나 고통에서 자유롭다고 믿는 우(愚)를 범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도발적인 질문을 가지고 고난과 비극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겪게된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는 잘못된 논리에 반박하십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다. 이 배경에 의하면 폭군 본디오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잔인하게 다스렸습니다. 사람들은 독재자 빌라도의 무리들이 무언가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잘못을 저질러서 그러한 유혈사태가 났다고 생각할만한 상황입니다. 이와같이 잘못 알려진 사고방식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때에도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사랑스럽고 자비가 넘쳐나는 그분의 아버지는 또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도 한데 그렇게(죄 때문에 고통을 받도록) 행동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심술궃고 복수심이 강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왜 무고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가에 관해서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지만 왜 그들이 고통을 받지 않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에 대해 화를 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요, 그들의 죄가 적어서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계속되는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최고의 대답은 “Good”이라는 이상한 이름이 붙여진 성 금요일에 갈보리 언덕에서 그분에게 일어난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분의 아버지며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은 3일 후인, 첫 번째 부활절에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답하셨습니다.

*티모디 도란 추기경은 카톨릭교회 뉴욕교구의 추기경이다.

 


“이것이 누구의 초상이냐? 그리고 누구의 글이냐?”(마가 12:20)

쿠억 푸이 란(Kwok Pui-Lan)

나는 영국영토였던 홍콩에서 자랐다. 우리 동전에는 영국왕실의 왕관을 쓴 여왕의 초상이 영어로 새겨진 ‘엘리자베스 여왕 2세’라는 문장과 함께 새겨져 있었다. 이 동전은 제국의 권위와 대영제국의 부와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복귀되면서 여왕의 초상화 대신 홍콩의 꽃인 자주색 보히니아 꽃이 들어간 새 동전이 만들어졌다.

예수 시대에는 로마의 동전이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유형의 상징이었고 황제에게 영광을 돌리며 정치적인 선전을 할 수 있는 도구였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팔레스틴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였다. 티베리우스 데나리우스는 승리의 월계관을 쓴 시자와 신의 이미지가 새겨진 은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돌아가면서 “티베리우스 시자, 경배 받으실만한 하나님의 아들 아우그스투”라는 뜻의 라틴어 약자를 새겨 넣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그는 성전에서 사고 파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엎으시며 성전을 청소하셨다. 예수의 행동과 비유들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자극하여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게 하였다. 어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사람들은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였다. 그들은 “시자에게 황제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물었다. 바리새인들이 물은 이 세금이란 로마정부가 호구조사에 등록된 모든 성인들에게 부과하는 인두세(人頭稅)로 은화 데나리온으로만 지불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식민지하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세금을 증오하였으며 10여년 이상을 납세자 반란을 일으켰고 기원 66년 경에 벌어진 전쟁을 통해 그 절정에 달했었다.

그래서 예수는 꼼짝없이 진퇴양란의 상태에 처했다. 만약 예수께서 로마에 세금을 내야한다고 대답하면 군중들이 분노하여 그에게 대항할 위험이 있으며 만약 그들에게 세금을 내지 말라고 대답한다면 바리새인들은 예수에 대해 비난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얻게 될 것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의 위선을 정확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질문에 대해 직답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 보라고 하시고 “이것이 누구의 초상이며 글이냐?”고 물으셨다. 그의 물음에 대해 그들은 “시자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시자의 것은 시자에게 돌려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대화상대자’들은 그를 옳아 맬 수가 없었으며 그들은 예수의 대답에 놀랐다.

그 후 지난 수세기동안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은 크리스천과 정치적 권위자나 공공의 권위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여 왔다. 예를 들면 2세기의 핍박 가운데서 져스틴 마틸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하지만 세금은 내야 하며 공공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기록하였다. 16세기의 마틴 루터는 영적인 권위와 세상적인 권위를 구별하였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만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하나님만을 신뢰하여야 한다. 반면에 크리스천들은 지상적인 권력과 정부는 하나님에 의해 질서를 보호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은 기관이므르 그들에게 복종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카톨릭과 개신교 전통들은 오랫동안 이 구절들을 교회와 사회권력 사이에 책임을 공유하는 것으로 읽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이중적인 이해는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현상황을 지지하면서 입 다물고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부(富)의 집중화가 심화되고, 빈부의 차이가 넓어지는 가운데 무엇이 시자의 것이며, 무엇이 하나님의 것이냐?하는 논란은 현 세계에서 우리들에게 매우 적절한 것이다. 세금문제에 있어서도 예수는 식민지 일자리를 수행하는데서 오는 멍에의 개념들과 경제정의(經濟正義) 문제들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로마의 조공체제에서는 부와 자원은 정복된 사람들과 지역으로부터 제국의 도시들로 흘러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자신과 가족들의 호구를 위해 힘들게 애쓰는 한편에는 국경을 초월하여 자본주의 엘리트들에게 이익이 가도록 하는 세계적인 경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Wall Street 점거운동 역시 세계적인 총체적인 경제적 불균형을 고발하는 것으로 그들은 “우리는 99%다”라는 스로간을 사용한다. 미국에서 상위 1%의 수입이 미국민 총수입의 23%와 맞먹으며 2012년도 하위 50%의 수입을 상회한다는 것이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 경제학자 Saez의 연구결과이다. 상위 1%의 부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을 정치가들을 로비하는데 사용하는데 로비의 내용은 그들의 개인세와 부동산세를 계속 낮추도록 하는데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진자와 못가진자 사이의 넓혀진 간격에 대해 많은 크리스천들은 현상을 지지하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만은 없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시저의 제도를 믁인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릴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예수의 유대파 청중들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이해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돈을 다 함께 경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히브리 예언자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권력자나 부자들을 비난한 것은 예언자들의 전통에 속한 것이며 거기에 근거해서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시저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 사이의 과도기적인 긴장가운데서 살고 그런 가운데 우리들은 우리의 정치적인 기구가 우리 사회를 하나님의 통치에 더욱 가까이 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떻게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의 잘못으로 해를 입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의를 회복시켜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정부의 형성을 시사하기도 하고 또는 강력한 응징을 하는국제적인 세금제도의 수립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회사와 개인들이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상쇄하기 위해 산소배출권을 사들이는 것이 가능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국제적인 세금제도나 산소배출권 등이 세계의 총체적인 불의를 해결하는데는 충분하지 않겠지만 그것들은 과도기적인 공간과 시간가운데서 시행할 수 있는 조치들에 대한 전망을 높여 준다.

요한복음 1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나의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은 이 지상적인 능력과는 매우 다른 것으로 상상하였다. 바리새인들에게 행한 그의 대답에서 예수는 사람들에게 로마통치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혁명적인 열성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예수는 사람들의 종교적, 도덕적 확신에 호소하고, 그들의 의식을 고양시킴으로 제도에 도전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영적인 권위와 지상적인 권위를 구별할 수 있게 되고 시자의 것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게 하였다.

*Kwok Pui-lan은 매사슈세츠 주 캠브릿지에 있는 에피스코팔 신학교의기독교 신학과 영성 교수였으며 <Postcolonial Imagination and Feminist Theology>의 저자이다.

 


 

왜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가?(”Why does this generation ask for a sign.?”)마가 8:12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세상을 볼 때 두 가지 방법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모든 것들이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은 하나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만약 이 세상에 기적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이 복음서의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가 함께 이야기한 사람들은 현란하면서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이 분명한 증거를 성스러운 현존의 증거로 요구하였다. 예수께서는 질문으로 그들의 요구에 대응하셨다. 즉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현존을 보고 경험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다시 구성해 보라고 초청한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기적을 그저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으로 생각지 말고 마음을 열어 주는 많은 문제들을 포함하는 계속되는 영적 대화의 한 부분으로 생각해 보라고 초청한 것이다. 거룩한 현존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세상속으로 들어올까? 만약 내가 거룩한 현존을 내 안에서 그리고 나의 주변에서 경험한다면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성가곡(聖歌曲)의 작사자인 나는 종종 일상적인 것들과 매일매일의 경험가운데서 퀘이커 교도들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 계신 하나님” 또는 “큰 빛”이라고 언급한- 거룩하신 분(the sacred)의 신비로운 임재의 경험에 놀라기도 하고 그에 관해 쓰기도 하였다. 나는 계속되어 일관되게 경이로움과의 일상적인 관계의 문을 열어 놓았을 때 그 경이는 일반적으로 나타났었다. 결국 나는 그곳에 항상 있던것들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남부 인디아나 주에 살았는데 그곳은 후기 빙하시대의 빙하들이 그곳까지 내려와서 정지해버린 곳이다. 그곳은 완만하게 경사진 초원지대로 깊은 골짜기와 사랑스런 낙엽수들로 덮여있는 숲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은 또한 정동석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돌들이 특별히 많은 곳이다. 겉으로 보면 정동석이라는 회색의 먼지가 푹석이는 돌이지만 안을 보면 아름다운 수정들이 들어있었다.

내가 사는 숲을 가로질러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그곳에는 지금 설명한 그런 바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디아나의 몬로카운티에는 이런 정동석이 옥수수만큼이나 많아 널려있다.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경이롭다. 미 중서부의 아름다움을 보기위해 뉴욕에서 저를 방문한 친구가 있었는데 나는 정동석을 발견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그 친구를 데리고 시냇가로 산보를 나갔다. 그녀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디에 그 돌들이 있다는 거야 라고 물어 보았다. 저는 그 돌 하나를 들어서 보여주며 “잘 봐, 이것이 흙덩이 같이 보이지 겉의 색갈은 회갈색이고.” :그러자 그녀는 서서 주위를 살펴보더니 “여기 봐, 그야말로 어느곳에나 있네.” 이제야 그녀는 기적을 보았고, 이제는 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은
일상적인 것들로 감싼 기적이란다.
만약 하려고만 한다면 옆 사람의 눈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지
하나님은 진흙덩이 장화를 싣고도 걸어 다니시며
때로는 청소도 하시고, 그것이 사실이라네
항상 그것을 알 수는 없지만, 때로는 그것을 알지
From “Geodes.” By Carrie Newcomer

내가 비록 일상적인 것에서 큰 빛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그동안 내가 세상을 경험했던 방식을 바꾸었으며 우리들의 문화적인 결핍에 관한 이야기를 놀라운 풍요와 감사와 책임감으로 대치시켜 재 구성하여 주었다. 나는 시카고에 있는 미술관에서 5살 난 나의 딸을 데리고 모네전시실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나는 우편엽서에 있는 그의 ‘잡초더미”를 보여주면서 이 화가는 다른 종류의 빛들 아래서는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느껴지는가에 관심이 많아서 그는 소량의 색깔로 그가 좋아했던 감정을 재생했다고 설명하였다. 우리가 그 방에 들어갔을 때 딸 아이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러더니 “잡초더미”그림 앞으로 뛰어갔는데 그 그림에 너무 가깝게 가자 그것들은 indivisual stroke로 녹아버렸다. 그녀는 “그것이 사라졌어요. 그것은 조그마한 점들이에요”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뒷걸음을 쳐서 내가 서 있는 곳까지 와서 그림을 전체적으로 보았다.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숨을 크게 쉬더니 “저기 있어요. 보이네요. 매직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 그게 바로 이 그림이 작동하는 원리란다”라고 하였다.

세상은 보통의 사물들이 그렇드시 물과 먼지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적으로 채워져 있다. 큰 빛과 상당량의 매직으로. 이 프레임을 가지고 세계를 볼 때 조그마한 것들이 아주 선명한 모습을 보이며 일상적인 행동들이 성례전이 되었다. 증거로서 기적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기적은 이미 이곳에 있다.

접시와 하수구
비누와 싱크대, 컵과 접시들
따뜻한 털양말, 그리고 찬 흰 타일
샤워 꼭지와 마른 수건들은 거룩합니다.
그리고 계란 후라이하는 소리는 시편과도 같고
내 손바닥에 묻은 약간의 소금은
성만찬의 한 부분입니다.
지나간 오늘 하루와도 같이

번잡한 거리
그곳을 질주하는 차들
계산대에서 잔돈들을 계산하는 아가씨들과
오늘 나와 악수했던 손들은 거룩합니다.
하늘을 나르는 기러기들의 찬송과
어미들을 따라 힘껏 저어대는 날개들
무언가를 잡기위해 꿈속에서 달리는 개
또한 복있을진저.

익숙한 방,
조용한 오후의 한 순간
시트를 접듯이 두 손을 접고
기도를 드리노라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마치 대지에 흩날리는 가을 낙엽과도 같이
여름이 오고 가듯이
지나간 하루와도 같이 거룩한 것들입니다.

내가 선곳은 아무리 조그마한 곳이라해도
비록 백지라고 해도
내가 보는 곳마다 구원이 있네
우리의 발걸음이 느린줄도 모르고
기대하지 못했던 은총의 그늘 아래서
내뿜는 감사의 미소와 슬픈 한탄은 거룩합니다
그리고 아침의 빛은 “섭리”라고 노래합니다.
지나간 하루와도 같이 거룩하게.

“holy as the Day is Spent.”by Carie Newcomer: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Woman, why are you weeping? Who is it you are looking for? 요한복음 20장 15)

케이스 와 크리스틴 게티(작가)


구약의 시편저자는 하나님께 노래합니다. "나의 모든 슬픔을 주께서 헤아리시고 내가 흘린 모든 눈물을 당신의 병에 담아 두시며 그 사연은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습니까?”(시편 56:8)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문화에 따르면 사랑하는 사람들의 묘지를 방문할 때 종종 시편을 낭송하게 됩니다. 이때의 노래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여러가지로 표현하는데 때로는 여기에서와 같이 자비심이 풍성하시고 우리가 고통당할 때 가까이 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발견한다는 가사들입니다. 너무나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보실 뿐 아니라 그것을 기록하시고 간직하십니다.

마리아의 눈물 역시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여기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죽으심과 지금 그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데 대한 슬픔으로 예수가 눕혀졌던 무덤옆에서 울고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복음서기사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크나큰 용서를 받았고,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래서 지금 그가 받은 상실감은 너무나 컷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녀가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군중가운데에 끼여있는 희미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에게 군림하려는 사람들의 뒤에 숨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홀로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덤들로 둘러 쌓여있는 그곳에서 그것은 이상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들을 나눈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대답을 이미 구체적으로 알고 계셧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아니라 마리아의 개인적인 이해에 관해 물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간의 인격적인 관계에 관한 것들과 그분이 누군가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해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 구절 앞에 보면 천사들도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천사들의 선언 이후에도 마리아는 계속해서 예수께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래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우리들도 종종 저지르는 삶에 대한 비탄으로 인한 눈물과 몸싸움으로 눈이 멀어버리는 그러한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특별한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옛 노래 가사처럼 “슬픔의 샘,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잃은 것은 잠자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으셨고 지금 그는 살아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질문에 의하면 마리아는 예수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자신이 실제로 누구를 찾고있는지-십자가에 못밖히신 주님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를 알았어야 합니다. 그 질문은 이야기를 성 금요일에서 부활주일로 옮기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절망적인 슬픔의 수레바퀴에 매달려 미끄러져 내려가던데서 구세주 옆에서의 드높은 희망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수한 맥락가운데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찾고 있느냐?” 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 몇가지 특별한 주장을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특별한 주석은 모든 생활을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님되심에 대한 깊이 뿌리박은 확신이며 친구요 왕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예를들면 빌립보서 3:8-9 같은 것)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라. ‘어디에 주님을 뉘였나?
슬픔에 잠겨 그녀는 빈무덤에서 나왔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이시다. 주님이 다시 생명으로 들어올리셨다
몇 년동안 맴돌았던 목소리
우리에게 생명을 이야기하고, 희망으로 마음을 설레게 하고, 평화를 가져다 주던
주가 나타날 때까지 울리리
주가 살아계시니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네”

-Keith Getty and Stuart Townsend, “See What a morning”

21세기의 우리들에게도 마리아에게 물었던 질문을 여전히 물으십니다. 인간의 경험 한 복판에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원수가 늘 같이 하고 있는듯 합니다. 모든 세대들이 죽음을 능가하고, 죽음을 정복하고, 더 오래 사는 방법과 메시아를 찾기에 열망하였으며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눈물만이 비석을 적셨고, 삶의 희망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찾고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경은 우리들의 대답은 예수를 아는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죽음의 비통한 눈물을 맛보셨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은 맛보지 않아도 될것입니다. 우리들은 육체적으로는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진정으로 그를 찾는 사람들은 그를 발견할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가 아니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통해서 그를 알게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경전체를 통해 설명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펼쳐봄으로 예수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누가 24:13-35) 죽음을 격파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으시고 우리의 육신과 영혼에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그의 못자국이 밖힌 손을 내미십니다. 계시록은 언젠가 주님께서 돌아오실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계시록 21:4) 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히는 몸부림이나 죄의 가시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슬픔등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는 요인이 되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그리스도께서 그들이 지금까지 찾아 왔던 분으로 인식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돌아오실 때 희망을 찾고, 전적인 안도감과 완전한 해답을 주게될 것입니다.

“한때 의심과 어둠으로 덮였던 곳에 서
그들은 예수를 보았고 그들의 마음은 믿게되었다
그러나 보지 못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노래하자, 할렐루야
그를 무덤에서 일으키신 그 능력
이제 우리안에서 강력하게 구원의 역사를 하네
그는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하여 그의 은총가운데 살게 하네
나가서 그의 선하심을 전파하라.”

-케이스 게티, 크리스틴 게티 그리고 에드 캐시가 지은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는 진실로 부활하셨다”에서


*케이스와 크리스틴 게티는 노던 아이랜드의 찬송가 작가이며 연주가이기도 하다.

 


 

“너는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Do you not understand these things?요한 3:10)

Roma Downy-배우, 프로듀서

나는 신앙인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그들의 종교가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는것을 인정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여행에서 지성이란 것이 물론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서는 거룩한 신비의 여지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요한복음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교사”에게 예수께서 가르쳐 주려 하였던 것이 그런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말씀들은 내가 좋아하는 만남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시 지도적인 종교지도자의 한 사람이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 산헤드린의 멤버였습니다. 당시의 전통적인 생각에 의하면 니고데모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께서 분명히 보여주었지만 니고데모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을 이해해 보려고 예수를 찾아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인용해 보면 니고데모는 예수께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영적인 태어남인 두 번째 태어남을 언급하시면서 영적각성이 필요하다고 니고데모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설명하시면서 나고데모의 생각을 신비의 영역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강한 신앙을 가지고 성장했습니다. 나는 전화(戰禍)를 겪던 노스아일랜드에서 캐톨릭으로 성장했습니다. 남편 마크 버넷(Mark Burnett)는 영국에서 개신교도로 성장했습니다. 여러면에서 우리들을 맞지 않는 부부였으며 그것도 극단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 사이에 평화와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알게하셨습니다. 우리가 HISTORY 채널을 위해 미니시리즈 The Bible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때 우리는 성경공부에 특히 예수의 생애를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활애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스크바에서 드라마를 촬영하는 가운데 상상도 못했던 하나님께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격려하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분명하게 느꼈던 사건의 하나는 오늘 본문의 장면을 촬영하던 때에 일어났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있을 때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장면을 예루살렘 성벽 밖에서 모닥불을 중심으로 대화하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신비로운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우리 예수(폴튜갈 배우 Diodo Morgado가 배역을 맡음)의 머리가락을 날리기 시작하는 순간 “바람이 임의로 불매”하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면에 특별한 효과를 넣어주셨다는 것을 느끼면서 출연진들과 촬영진들은 뼈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느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신비로우면서도 훌륭한 장면이었습니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방법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에게로 끌어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그를 알수 있도록 특수한 상황속으로 집어넣으십니다. 저는 <Touched by an Angel>이란 시리즈에 거의 10년 동안 출연하였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우연이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늘 익명으로 숨어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들을 수 없는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는 우리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신비의 시간으로 이러한 일상을 초월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Roma Downy는 아이리시의 배우요 남편 Mark Burnett와 함께 The Bible, A.D.의 프로듀서였다.

 


“어떻게 다시 짠 맛을 내겠느냐?(How can you make it salty again?” 막 9:50)

-배리 블랙(Barry C. Black) -미 연방의회 상원 채플린-

유능한 변호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에 대한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문제들을 물으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 50 절에서 그는 마태복음 5장 13절에서 대답하셨던 물음을 물으셨습니다.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다시 짠맛을 회복할 수 있겠느냐?” 그 때 예수께서는 “그것은 더 이상 쓸데 없어 버려질 것이며 사람들의 발에 짓밠힐 뿐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맛 잃은 소금은 쓸데 없다는 것”을 근본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맛 잃은 소금에 대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는 산 위에 몰려온 대중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만 특히 열 두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의 가르침을 듣는 청중들이 좋건, 나쁘건 간에 자신들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은 이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을 전보다 더 좋게 할수도 있고, 더 나쁘게도 할 수 있습니다. 소금과도 같이 그들의 영향력은 살균하는 능력이 있어 오염된 세상을 깨끗하게 해줍니다. 소금과도 같이 그들의 영향력은 생명력이 있어서 맛없는 세계에 향기를 가져다 줍니다. 그리고 소금과 같이 그들의 영향력은 방부제의 능력이 있어 썩어빠진 세상에서 부패와 부식으로 내몰리는 것들을 지켜 줍니다.

예수께서 청중들에게 외부에 어떤 영향끼치기를 기대하였는지에 관하여 한번 살펴보십시다. 제자들은 동네나, 그 지역이나, 그 나라의 소금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나가서 사람들로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태 28:19)고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 갖고 있는 큰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도행전 1:8에서도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향력을 오용하였을 때 그 결과는 단지 지역적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알기 원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본보기의 삶을 살며 정화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셔서 맛 잃은 소금의 이야기를 하신듯 합니다. 그는 제자들이 후에 골로새 4:6절의 말씀 “너희 말을 항상 은혜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한 태도를 수용하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태복음 5:44절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하신 대로 행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중요한 일에 우리가 영향력을 상실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변혁기에 가장 큰 비극은 나쁜 사람들의 거친 소란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의 처참할 정도의 침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맛 없는 침묵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살아있는 편지”(고린도 후서 3:3)입니다.

아마도 예수가 이 질문을 한 것은 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잘못 사용하면 부패가 계속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던듯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그들의 사명은 썩는 악취를 잡아내고 생명과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 원하셨습니다. 20세기 초기,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G. 캠블 몰간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당대의 군중들을 돌아보시면서, 삶의 모든 분야에서 만연한 부패, 붕괴, 분열과 분해, 약탈 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중에 대한 그의 사랑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패를 잡을 수 있는 소금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잘못 사용된 영향력은 우리 세상에서 향기를 제거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 맛 잃은 소금에 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성서주석가 매튜 헨리는 “무지와 사악함 가운데 사는 인류는 썩을 준비가 된 쓰레기더미와 같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제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삶과 교리들을 통해서 이 땅위에 지식과 은총으로 맛을 내게 하셨다. 만약 그들이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면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존재이다.” 엘리후 뷰리트는 조금 달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현재뿐 아니라 다가 오는 모든 미래에 있어서도 전체적으로 보아 인간의 행복에 도움을 주거나, 아니면 해를 끼치게 된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영향력을 오용할 때 그들은 이 세상을 그들의 구미에 덜 맞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줄이게 됩니다.

정제하고, 맛을 내며 부패를 방지하는 유용한 소금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한번은 그가 이발소에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한 남자가 들어와서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깎고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물으면서 가족들의 안부에 관해서도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발소의 분위기가 금방 달라졌습니다. 윌슨은 후에 이때를 회상하면서 “그때 D.L. 무디가 그 의자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복음주의 집회에 참석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무언가가 자신들의 생각과 기분이 고양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나 역시 이발소를 떠나면서 예배보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무디는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소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능한 변호사와 같이 예수께서는 맛 잃은 소금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소금은 쓸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강조하고 계십니다. “나를 따르는 자들아 유익한 영향력을 배양하여 깨끗하게 쟁화하고 삶에 향기를 내며 부패를 방지하라”고. 당신의 향기로운 영향력을 다스리기 어려운 양심을 촉진하는데 사용하고 냉소적인 대화에 생기를 불어 놓고 일탈한 부패를 억제하는데 사용하십시요. 당신의 삶을 위한 나의 봉사를 통해 당신의 세상에서 세균을 죽이고 생명을 제공하고 보존하는 영향을 행사하도록 하십시요. 예수께서는 믿는자들에게 그들의 영향력으로 생명의 물을 갈망하는 이 세상에 넘치게 부어주도록 하라고 도전하고 계십니다.

*필자는 미국연방의회 채플린이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마가 5:30)

*Wilfredo De Jesus,시카고 New Life Covenant Church 목사

인간의 접촉에는 대한한 힘이 있다. 그렇지만 조사연구에 의하면 미국사람들은 약간의 접촉공포증을 갖는 경향이 있다. <Psychology Today>에 의하면 건강한 인간적인 접촉은 스트레스를 감소시키고,코레스톨 수치를 낮추며 신뢰와 안정감을 증가시키는 옥시토신의 분비를 유도한다. 이러한 결론은 ‘치유의 손길’이란 단어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훌륭한 의사이신 예수는 마가복음 5장 30절에 나타난 정도의 인간적인 접촉에서도 믿기 어려울 정도의 신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는 마치 접촉공포증에 걸린 사람처럼 질문을 하였던 것이다.

몹시 앓고 있는 아이를 도우려고 서두르는 참담한 군중들에 둘러 쌓여 걷고 있던 예수는 갑자기 가던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군중들을 향해 돌아서서 물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그는 아마도 위엄있는 목소리로 이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기사에 의하면 아무도 그의 물음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 그 복잡한 상황에서는 분명히 이상한 물음인데도 그 물음에 항의한다는 것은 불합리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예수께로 몰려들고 있었다. 금방 범인이 밝혀질 상황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제자들이 거부하는 뜻으로 그들의 손을 들기 시작했으며 천천히 물러났으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방어적인 태도로 그들은 그가 심문하는 동기에 대해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문제를 그냥 묻어버리려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들의 저항에 보다 끈질기게 맞섰다.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모든 말들과, 순간들, 모든 만남들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망또 뒤에 숨겨져 있는 것은 신의 약속이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에 대한 해답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한 여인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설명이 안된다면 그 여자는 출혈을 하고 있었다. 성경기사에 의하면 그 여자는 12년간 불치의 상태에서 고통을 받아왔으며 그러한 상항은 수치심을 가져다 주었을뿐 아니라 죄에 대한 벌이라는 조롱까지 받아왔다. 이 병으로 그녀는 종교적 의례에 따라 부정한 여자가 되었고 종교적으로나 의학적으로 격리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 여인은 동네 밖에 거처를 정하여야 하는 책임을 가진 버려진 자였으며 만약 사람들이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하면 그들에게 “부정한 자”라고 크게 웨쳐서 경고하게 되어 있었다.

출혈을 하고 병에 걸린 여인으로 그녀는 3중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군중들 가운데 그녀가 끼어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예절과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녀는 예수의 근처에 가려면 적어도 자신을 숨길 수 있을만한 거리에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여자는 이름없는 병자로 적혀져 있다. 심지어 2000년 후에도 이름 없이 출혈의 문제가 있는 여인으로 알려지고 기억되고 있다. 그녀의 고독감은 아마도 그를 미치게 하였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상적이 되기를 원했고 군중들 속에 끼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의 담대함과 고집, 끈질긴 해답의 추구는 감동적이다. 복음서 저자는 “그녀가 많은 의사들의 치료를 받으면서 고통을 많이 겪었으며 많은 돈을 썼지만 낫기는 커녕 더욱 악회되었다”고 적고 있다. 우리같으면 벌써 수건을 던져버리고 포기했을것이다. 자신을 인간 실험물로, 치료실험대상으로 내어 놓고 치료받는 동안 병은 악화되고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와같은 두려운 상황에서도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녀의 믿음은 그를 예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그의 옷만 만져도 병이 나을것”(마가 5장 28절)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기대했던 방법 이상의 방법으로 병이 나았다. 여인이 예수를 찾았던 것 못지 않은 끈기로 예수는 그 여인을 찾으셨다. 그녀의 기도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 예수이듯이 그녀는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예수의 물음은 대답을 요구하며 여인에게는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었다. 그녀의 군중속에 숨기 위한 탐색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녀를 군중에서 골라내었다. 예수는 그녀의 놀라운 믿음을 치켜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스러운 고통과 감춰두었던 치유를 어렵게 고백하였다. 그녀의 증언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였으며 진실은 그녀가 달고 다니던 오명으로부터 그녀를 자유케 하였다. 예수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고쳤다.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 너의 모든 고통에서 자유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더 이상 탕녀가 아니라 딸이다. 그녀는 가정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찾게되었고 하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단순한 질문 하나로 예수는 그 여인으로 하여금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죄책감에서 영광으로 , 고통에서 평안으로 옮겨가도록 자극하였다. 단순한 접촉 하나로 이 여인은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평생토록 고통받던 병이 치유되었다. 그녀의 변두리 인생이 완전히 변하여 새로운 세계가 되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들은 종종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이 필요하다고 느낄때가 있다. 우리들은 새 책들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위해 돈을 사용한다. 우리는 주변의 도덕적 또는 영적 병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기위해 최고의 신학전문가들을 청빙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현존이다-군중사이를 헤치고 몰려온 사람들은 물론 치유를 받게 될 것이다. 대답 대신 우리는 질문을 하는게 더 낳을런지 모른다. 누가 예수를 만졌는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증언들이 우리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Wilfredo De Jesus는 시카고에 소재한 New Life Covenant Church의 목사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9 >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요한복음 1장 38절)

-호세 H. 고메즈 대주교-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따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군중들 가운데서 옆을 지나가고 있는 예수를 알아 보고 그들에게 말했을 때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들이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요 예언자들이 우리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라고 가르쳐준 사람이라고.

이 두 사람은 요한의 말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즉시 예수를 따르기 위해 요한을 떠났습니다.

이제 예수는 그들을 향해 물으십니다: “너희들이 찾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는 묻기 전에 이미 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방식입니다. 그는 정보를 얻으려고 묻지는 않습니다. 그의 질문은 우리를 비추어 보는 거울입니다.

예수께서 이들 첫 번째 제자들에게 물은 질문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는 질문이요 언제나, 어디서나 남녀 모든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무엇을 찾고 있느냐?

우리는 쉬지 않는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칼과 같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묻는 질문으로 우리의 심장을 찌릅니다. 이 세상에서 도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행복과 만족한 삶을 살기위해서는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가? 어떻게 그것을 확신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예수님은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그는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말합니다. “와서 보라.” 명령입니다. 초청입니다. 약속입니다.

우리들은 이 만남의 이야기를 복음서에서 계속해서 듣게됩니다.

예수의 초청을 들은 사람들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지 못합니다. 부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슬펐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가정적인 책임때문에 마쳐랴 할 일들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대답을 찾고, 치유를 바라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나를 따르라, 와서 보라”라는 말들은 그들을 다시 살도록 풀어주는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안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모두를 돌보아 주시며 아주 작은 필요까지도 챙겨주십니다. 그는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시는 분이시며 모든 어린이들은 하늘에서 감시하고 있는 개개인의 천사와 함께 태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면서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의 삶은 신성하고 값지고 그리고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계획안에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밝혀주었습니다.

당시에 그것은 파격적인 멧세지였으며 지금도 파격적인 멧세지입니다.

때때로 저는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 가장 어려운 기독교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우주는 광대합니다-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돌보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이 광대한, 익명의 세계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별 볼일 없는 존재’(NOBODY)로 살아가는데 어떻게 내가 하나님께? ‘어엿한 존재’(SOMEBODY)가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밝혀주신 것, 그의 교회가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우리의 존재는 마구잡이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 지구가 형태를 이루기 전 공허하든 때, 어둠이 표면에 충만하던 때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아셨고 우리들의 생명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셧던 것입니다.

“세계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 . . . 그가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는 자신의 뜻으로 정한 목적에 따라서 우리들이 사랑으로 그의 자녀가 되독록 운명지워 주셨다.”라고 사도 바울은 예배소에 보내는 편지의 첫 구절에서 쓰고 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과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 하나님이 당신이 태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분이 당신이 존재하기 원하신데에는 그분의 개인적인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 이것은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기도의 제목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우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우주안에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고 우리의 위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등-모든 것을 바꾸어 버릴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우리가 인종이나, 국가나, 종교나, 정치집단이나 자기 주체성 등에 속하기 이전에-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복음서에 보면 사람들은 거듭거듭해서 “그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역시 오늘의 우리들도 놀라게 합니다.

만약 우리들이 우리들이 그렇게 원했고, 필요로 했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만약 우리들이 매일매일을 마치 우주의 창조자가 부모의 사랑으로 우리들을 사랑하듯이 생각하며 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마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과 같이 사랑을 받고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에 부분적으로나마 역할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베다니에 있던 첫 번째 제자들이 그날 늦게 예수를 만났습니다. 아마 저녁 4시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밤을 예수와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들이 하루를 시작하려고 할 때 그들의 삶은 새로운 의미와 방향을 갖게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면 지붕에 올라가서라도-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그렇게나 찾던 그것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이 쓰시던 말을 사용했습니다. “와서 보라”

우리 모두에게 예수와의 만남은 도착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여행의 시작입니다.

에수님의 부름은 아시시의 프랜시스나, 로욜라의 이그나시우스, 아빌라의 테레사 그리고 시에나의 캐더린과 우리 시대의 요한 바울 2세와 성모 테레사와 같은 역사를? 변화시킨 위대한 성자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러한 부름은 오늘날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보통사람들, ‘익명의 성자들’의 삶은 비록 역사는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그들이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사랑과 친절을 통해서, 그들의 공동체와 나라에서의 자비로운 선행과 정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예수와의 만남 이래 우리는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를 따르고 있는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이 세상의 오솔길을 그분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족으로 예수와 가까이 하면서 그분이 살던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면서 그의 가르침과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본을 따라 함께 걷고 있습니다.

우리 각사람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위해 의도하시는 그러한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의 한 부분을 맡아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환영 받고, 반겨지며 아무도 폐기물 취급을 받지 않고 주변인 대접을 받지 않는 세계 말이지요.

우리가 바라던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찾던 것이 무엇입니까?

첫번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우리가 찾는 것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추기경 Jose H. Gomez는 미국에서 가장 큰 캐토릭 교구인 L.A. 지역의 대주교로 ArchbishopGomes.com에서 그의 글들을 볼 수 있다.

 


 

어느 것이 더 중하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태복음 23:17)

*Ellen T. Charry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로 그녀의 최근 저서가운데는 <시편 1-50 주석, 이스라엘의 탄식과 노래>가 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별로 아름다운 품격을 갖고 있지 않았던것 같다. 마태복음서의 이 구절에서 우리는 공격적이고 몹시 화가 난 예수를 만나게 된다. 그의 행동을 보면 좋아하지 않는 무화과 나무를 죽여버리고, 그가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요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평했던 사람들에게 여섯가지 잔악한 예화와 함께 일곱가지 협박적인 비난를 퍼부으면서 정상적인 사업을 방해하는 무질서하고 무례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어떤때는 그의 반대자들에게 죽음으로 협박하였고 그것은 그의 처형을 촉진하였다. 예수가 죽은지 50여년 후에 쓰여진 마태복음의 예수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라. 거기에는 예수가 자기가 하는 일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처형을 자초하였던 것 같다.

이 신랄한 두 개의 질문들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한 예수의 오랜 비판가운데 나온 것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의 생활의 중심인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시작되었다.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고 소경된 자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 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태복음 23장 16-22)

수사학적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분명한듯 하다. 수사학적인 질문의 본질은 질문한 사람으로 하여금 당황해서 입을 다물도록 하는데 있다. 그리고 마태의 인신공격은 성공하였다. 2천여년 동안 크리스천들은 당대 유대인들이 칭송하던 바리새인들을 조롱하도록 배웠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의 대상이 과연 누구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분노를 촉발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인가? 그리고 역시 비난속에 포함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누구인가? 왜 이러한 갈등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가?

서기관들은 법룰을 공부한 사람들로 유대백성들을 위해 봉사하였는데 그것은 예수시대 훨씬 이전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족들이 하던 것으로 그들은 글을 아는자들로 소위 지도자들이었고 백성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관한 지도를 그들에게 의존하였다. 예수 시대에 서기관들은 예배를 위하여 경전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번역하는 일을 맡아하였다. “서기관들”에 대한 총체적인 공격은 사회가 의존하고 있는 교육받은 지도자들을 싸잡아 비난한 것이다.

바리새인이란 고대 팔레스틴에서 예수 이전 170년 경에 생성된 조그마한 특별한 이해집단의 종교그릎으로서 주후 70년경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을 때인 주후 70년 경에 리더싶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들 바리새인 중의 하나에 속한다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70년경의 대참사 이전에도 그들은 성서적 지각의 세심힌 지지자들로서 레위기와 성서적인 율법을 포함하고 있는 다른 본문들에 나타나는 명령에 절대 헌신하였다. 그들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함락 이후 더욱 중요하게 되었으며 유대학 학자 야곱 루사너가 기록한대로 그들은 관습적인 식사와 성(性)규정 그리고 다른 순결함에 관한 규율 등 유대의 순수성에 헌신하므로 유대주의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바리새인들의 경건은 외부로부터 들어와서 작동하였다. 원칙은 네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며,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하면 안된다는 것으로 우리를 규정하였다. 동네의 관습과 문화적인 양상은 네가 누구라는 것을 형성하고 인도하였다. 어떤 결과를 얻기위해서는 어떤것이 들어가야 했으며 우리는 우리가 아는대로, 우리가 행동하는 그대로가 되었다.

유대생활과 예배의 중심지가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유대인들은 희랍-로마 문명에 완전히 동화되어 성경의 하나님에게서는 멀어질 위기에 있었다. 바울이나 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컴뮤니티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교가 없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들이 제시한 방법에서는 하나님의 지각에 절대복종하는 경직된 생활에 헌신할 것을 요구한듯하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 제자 마태는 예수께서 보다 덜 책임을 질 수 있는 맹세와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맹세를 구별하려는 반대자들의 시도를 간과하고 폭로하였다고 보았다. 예수는 모든 맹세는 똑같이 구속력을 가진다고 본데 반해 그의 반대자들은 우리들은 상충되는 책임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정하였다. 기독교는 이웃사랑을 중요시 한다. 가족에 대한 책임이 우리를 압박할 때 어떻게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가? 자녀들에게 생산적인 생업을 통해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밀접한 ?관계에서 떨어져야 할 경우 어떻게 가족들을 돌볼수가 있을가?

이러한 냉혹한 비판속에 있는 우리들을 위한 단어가 있을 것이다. 모순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옳바른 해답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원수들은 실제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혹을 받을 수 있다. 합리적인 논쟁보다는 비난하기가 쉽다. 그게 바로 수사학적인 질문의 본질이다. 해답이 매우 분명한듯 해서 반응이 필요 없는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탐색해 본다면 우리의 적들의 입장 배후에도 우리가 첫 눈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상당한 이유들이 있을 수 있다. 거기에도 재고해봐야 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Ellen T. Charry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교수로 그녀의 최근 저서가운데는 <시편 1-50 주석, 이스라엘의 탄식과 노래>가 있다.

*<What Did Jesus Ask? By TIME Books>에서 ?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8 >

너희는 밖에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들을 더럽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Rita Nakashima Brock

너희도 아직 께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의 몸속으로 둘어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뱃속으로 들어가서 뒤로 나가기 때문이다.” (마가 7장 18절)


1993년 중앙 아메리카에서의 전쟁 소식들이 신문의 전면을 뒤덮던 때 세계교회협의회(NCC)는 나를 소수의 국제 대표들과 함께 어떻게 정부와 혁명운동 사이에서 유엔이 개입하여 이룩한 합의를 그곳의 교회들이 지원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엘살바돌과 과테말라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국가 원수들,? 군 장성들, 인권운동가 그릎들, 성직자들은 물론 혁명 지도자들과 교황청 대사, 유엔 관리 그리고 노벨평화상 수상자 리고벨타 멘추 등을 만났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암울한 상황을 강요한 민란이 10여년이 넘게 ?계속, 확대되어 온데다가 유엔의 지원을 받는 정부는 원주민 마야족들, ?활동가, 피난민, 학원과 학생들, 좌향적 성향의 정치가들과 노동자들, 언론인과 거리 불량배들에 대한 지독한 “백색테러”를 자행하고 있었습니다. 수천명의 극빈자들이 과테말라 도시의 오염된 쓰레기장에서 살면서 기본적인 생활 필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가족들과 고아들이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도시주변의 소작인동네인 나사렛 컴뮤니티에서 우리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며 음악과 기도로 우리를 환영하였습니다. 우리는 하얀 보자기를 덮은 기다란 탁상과 긴 의자에 그들과 함께 앉았는데 그들의 형편으로서는 너무나 훌륭한 음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집에서 만든 또디아와 콩 그리고 구운 고기였습니다.

나는? 두 젊은이들과 마주 보고 앉았는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안절부절하는듯 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그들의 교회를 방문해 주어서 고맙다면서 자랑스러운듯 고기와 또떼야가 담긴 접시를 전해주었습니다. 당시 나는 건강식을 하는 채식주의자였는데 나는 잠시동안 생각 끝에 내가 고기를 사양한다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에 제일 작은 고기조각을 집었습니다. 그리고는 작게 짤라서 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또 씹었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입안에 든 질긴고기뭉치를 뱉아버릴 방법을 찾고 있는데 열심히 고기를 씹고 있는 젊은이들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우리는 잠시 멈츳했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우리는 만찬 동안 유쾌하게 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그들은 다정한 포옹을 해주었습니다.

몇 달 후에 정부의 불안정으로 과테말라에서 중재된 평화는? 늦추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러한 뉴스를 보면서 그 나라에 대해 걱정하였습니다. 나는? 그날의 저녁식사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었던 젊은이들의 친철을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밖에서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들을 더럽게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것은? 정의를 부르짖으며 특권층에게 도전하였던 이사야 선지자의? 본문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음식을 먹는) 입술로는 존경하지만 마음으로는 나에게서 머니라.”

우리 대표단들은 과테말라에서의 오래 되고 무척 어려운 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진 국제적인 기독교 사회의 대표였기 때문에 그 저녁파티에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그 고기를 거절했더라면 어린이들이 살기위해 쓰레기를 주워 먹는 한 나라에서의 음식을 거부한 것이 됐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우리는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우리들을 우리가 속한 문화나 공동체의 산물로 판단하고 우리가 말할 때 눈동자를 어떻게 굴리거나, 우리가 선물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미묘한 문제들 까지도 연결시켜 생각합니다.

나는 그 교회의 친절을 거의 거부하였고 그들의 평화와 사후의 보다 낳은 삶 그리고 안전한 삶에 대한 희망에 대해서 나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손님이라고 간주해 버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나는 정의와 평화에 대해서도 철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그 식사에서의 손님으로서의 나의 참석이 얼마나 단순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의 백색테러캠페인을 주도하는 정치가들과 군사지도자들과의 만남은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나는 닫힌 마음을 가지고 그게 진실일 수도 있고 또는 평화의 희망을 줄 수도 있는 그들의 말들을 듣지 않으려고 작심하였었습니다.

나는 부자와 권력있는 자들의 기득권을 보호했던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들의 나라가 ?경제적으로 붕괴되거나, 그 자신의 가족이나 집이 폐허가 되거나, 그들 자신이 실패하여 암살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한번도 농사꾼에서 시작해서 여러 계단을 거쳐 높은 자리에 오른 직업군인들과 어린 아이들과 학살을 서슴치 않는 데모대들과 그들의 땅에서 떠나기를 거부하면서 산채로 분신하는 사람들을 향해 발사명령을 하여야 하는 군인들이 바쳐야할 대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나는 그 군인의 명령에 따라서 피할 수 없이 시민전쟁에 개입하게 된 사람들에 관해서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전쟁상황에서 모든 결정은 죽음이나 손실로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법을 배워서 그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느껴지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인류사회의 도덕적인 규범-아마도 전쟁행위에서의 도덕적인 규멈까지도 범하였다는 것을 거부합니다.
완악해진 마음은 어떤 사람들을 평생동안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때로는 그러한 마음이 깨어지기도 합니다. 이 깨어짐이 강열한 영적 힘으로, 인간의 도덕적 양심의 신비로움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이 양심을 파괴하려고 디자인한 가장 나쁜 방법들을 끈질기게 추적하도록 합니다.

희망을 추구하려고 싸우는 사람들은 종종 슬픔에 빠지거나 속이 텅비는 탈진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악몽을 꿀수도 있고 분노와 환멸을 동시에 느끼며 혼동할 수도 있습니다. 끔직하거나 그보다 더 참혹할 수도 있는 끔찍한 선택에 직면해서 생존자들은 죄책감을 느끼고 그들이 한 일에 대하여, 아니면 그들이 실패한 일에 대하여 모멸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그들이 더 이상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거부하기로 작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깨어진 마음을 도덕적인 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나는 나와 저녁을 같이 한 젊은이들이 저항운동에 가담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의문을 가져 봅니다. 핑크 색 사살의 안개속에서 생명 없는 눈동자들, 폭음이 진동하는 폭발, 시체들은 파손되고 매카한 알 수 없는 자욱한 연기들이 그들의 꿈을 덮어버렸을까? 만약 그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면 그들은 아마도 깨어진 마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평화의 성취를 위해서는 계속 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들은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을 돌보아야 할 뿐 아니라 폭력을 가한 사람들 특히 그들의 국가와 백성들을 대신해서 폭력을 행한 사람들과 우리와의 관계를 검토해 보아야만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도덕적 책임을 탐사할 수 있다면 단지 깨어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우리를 분리하는 것보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더욱 깊이 끼어들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여는 것은 회개와 보상 그리고 회복을 포용하는 고대 지혜의 신비로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생자들을 더 큰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폭력이 저지른 근본적인 상실을 개탄하면서, 생명이 번영할 수 있도록 추구하면서 공동체로 하여금 깨어진 관계를 개선하도록 합니다. 그때, 내적인 변화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우리를?더럽히지 못할 것입니다.

*Rita Nakashima Brock 은 Texas에 있는 Brice Divinity School 내의 Soul Rpair Centerdml 디렉터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7 >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아니면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장 4절)

우리는 종교에 봉사하려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종교가 인류에게 봉사하려고 부름받은 것이다. 그외의 것들은 억압일뿐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곡식)들을 짤라먹었을 때 이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든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였다.

안식일이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의 생활에서 기존의 계명이나 문화적인 중요 인물들은 매우 중요하였다. 예수의 말씀들은 사랑이 법율을 이긴다는 기본적인 신의 진리를 내보여 주었다.

만약 너의 황소가 안식일에 웅덩이에 빠졌다면 너는 그 황소를 웅덩이에서 꺼내야 한다 그것은 네가 그 황소가 필요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황소가 너를 필요로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옳은일이고 거룩한 것이다.
사랑이란 어떠한 법율도 능가하는 반드시 하여야하는 영적인 행위이다.
나는 말틴 루터 킹 목사가 자라면서 제기하였던 문제에 공감한다. 그것은 “사랑받는 컴뮤니티”라는 개념으로 사랑받는 컴뮤니티란 무었인가?사랑받는 컴뮤니티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냄새가 나고, 어떻게 느껴지는가? 그곳은 물론 종교적인 전통들이 사랑의 법들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곳이 아닐 것이다.

지배적인 문화의 규범적인 정의에 잘 들어맞는 사람들은 환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제거하는 강압적인 종교나 신학은 예수의 멧세지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예수는 스캔들(추문)이었다. 그는 권력을 향해서는 진리를 이야기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이야기 한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인물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시고 어떤 사람은 내치신다고 암시하는 어떤 신학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제대로 반사하지 않는다.

젊은 유대인 어머니의 아들로 노동자 목수에 의해 양육된 예수는 상처 입고,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환영하고, 받아들이고, 고쳐주셨다. 예수는 사람들의 더럽혀진 명예를 제거하도록 도와주었고, 그들이 생산적인 일에 돌아갈 수 있도록 치유하였다. 예수는 그의 집이 있는 동네의 회당에서 사람들과 함께 서서 어느 안식일 아침 이사야 서의 말씀을 읽었다.

주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함을 선포하고 ,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의 은행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누가복음 4:18-19)

이러한 우선사항들은 억압에서 자유로운 사랑받는 컴뮤니티의 우선사항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예수의 선교와 마음을 생각해 보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수 있겠는가? 교회가 예수의 사역을 철저하게 구현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사교클럽으로 그치고 말것인가? 컴뮤니티를 형성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억압 받았고, 억압 받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을 매고있는 신학적인 맷돌을 극복하려고 추구하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컴뮤니티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억압적인 신학악습을 전파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경멸적인 추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이 유산으로 물려받았거나 촉진된 억압은 권력이나 이익을 얻기위한 목적을 위한 고정관념으로 이끌어간다. 도날드 치눌라는 사랑받은 컴뮤니티에서의 왕의 개념을 사용해서 권위나 이점의 불공정한 사용으로 나타난 억압이란 “억압받는 사람들을 희생하거나 자체를 영구화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정관념은 억압자에게 억압받는 사람에게서 떠나 서도록 허용하며 일단의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화 하거나, 묵살해 버리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러한 억압은 특히 종교가 자신을 변호하도록 사용할 때 음흉스럽게 작용한다.

우리는 모두가 컴뮤니티가 필요하다. 기존의 컴뮤니티에 접근하기가 가능하지 않을 때 변두리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컴뮤니티를 개발하도록 추구하여야만 한다. 사람들이 새로운 크리스천 컴뮤니티를 새롭게 만들려고 할 때 오래된 장애물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들을 극복하여야 한다.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의 신학이 종종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적들이라고 규정지으려는 것을 본다. 그런 경향은 특히 지배적인 규범의 정의에 순응하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회개하지 않는 개인이나 그릎들의 경우 사실이다. 외적, 내적인 억압신학을 극복하거나 어떤 사람들을 제외하는 신학은 주로 사람들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듬에 있어서 주로 주변부에서 볼 수 있을 섯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어떤 인종이나,문화나 성적 그리고 계급적 계층들을 제외해야 한다는 신학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은 예수는 자신이 가장 가진것들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였던 변듀리 사회의 출신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게 좋을것이다.

예수께서 지상에서 사역을 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변두리의 다른 사람들이 모이는 열린 컴뮤니티, 포용적인 컴뮤니티에 반응한다. 그러한 분위기는 사람들이 그들이 누구건 같이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환영한다. 수용의 해방신학은 크리스천 컴뮤니티를 해방하는 분위기에 수용되어야 한다. 교회나 모든 종교들을 비하하는 것은 종종 억압적인 신학, 성서적인 문자주의, 그리고? 강경한 전통에 노출되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이나, 교회나, 사회는 큰 해를 끼칠 수 있는데 특히 그 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서의 “지원”을 받거나 덕성에 의존해 이루어 졌을때 심해질 수가 있다. The Good Book에서 피터 고메스는 그가 친구에게서 들은 옛 경구를 명상하고 있다. “남아도는 덕성은 남아 도는 악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남아 도는 덕성이란 양심의 제약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얼만전에 믿을 수 없는 유대 여인 나오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알차이머 병에 걸려 황폐해신 사람들을 돕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여인인 흐래디스를 도와주기로 작정하였는데 이 흑인 여자는 알차이머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복음성가 부르기를 좋아하였다. 이 사랑스러운 유대인 여인은 그레이디의 생애에 어떤 불을 붙여야 할런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여인은 예수에 관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 빛은 그녀의 환자들의 눈에 붙여졌다. 그들의 신앙이나 종교가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곳에는 공통된 신조나 교파가 없었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 품안에서 함께 찬송하였다. 이곳에서는 다시금 사랑이 법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다.

*Yvette Flunder는캘리포니아의 오크랜드에 있는? The Fellowship Affirming Ministries의 주재 감독이다.


*<What Did Jesus Ask?>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6 >

“네 이름이 무엇이냐?”(마가복음 5장 9절)

최근 나는 한 노련한 유치원교사의 아침 일과를 관찰하였다. 제일 먼저 그녀는 한 아이, 한 아이를 문앞에서 맞았다. 학생들이 각자의 소지품들을 그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상자에 챙겨 넣은 후에 선생님은 구두로 출석을 점검하였다

선생님은 각 학생들의 이름을 성과 이름을 하나씩 또박또박 불러서 비록 다섯살 짜리 꼬마들이지만 그들이 성년이 되었을 때에 불려질 그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하나 하나가 그러한 호명에 매우 익숙한듯 당당하게 큰 소리로 “출석(Present)”이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 교실을 떠나면서 누군가가 나를 풀네임으로 불러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이름을 알려주고 우리 이름이 불려졌을 때 내가 그곳에 참석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마가복음 전반부인 5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어떻게 예수님이 게네사렛에서 ‘마귀들린 사람’에게 대응하시고 고쳐주셨는가 하는 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지는 힘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귀들린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 것을 알고 있었고 실제로 “예수,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예수에게 자신을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과정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이미 분명히 그 대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것이 예수의 질문이었지만 그 사람이 한 대답은 반드시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대단한 가치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름은 사람의 신분을 알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본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족보나 그 집안의 역사를 안다는 것이고 이름은, 그 사람의 기원과 배경에 대한 중요 정보들을 보여 준다. 예수가 계네사렛 사람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예수는 그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자백함으로 그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과 본질을 알아보도록 자극하였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이름이 “군대”라고 대답했을 때 독자들은 그 사람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그의 신분 자체가 사탄에 소유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군대 용어인 ‘군대’란 말은 다양한 충돌과 내적 혼란이 그를 너무 괴롭혀서 그는 쇠사슬에 묶여 강제로 동네에서 격리되어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내적인 마귀들이 수적으로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영혼 안에 로마군인들의 군부대가 진주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게네사렛 사람이 그의 이름이 “군대”라고 대답했을 때 우리는 이 사람은 모든 것-그의 주체성, 그의 가족, 역사, 그의 친구 그리고 그의 진정한 이름까지도 - 상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는 이 질문은 이 사람의 기쁨과 평화와 건강을 훔쳐간 무리들의 신분을 즉각적으로 말로 분명히 밣혀줄것을 요구한다. 군대는 일련의 사회적 세력들과 계급사회를 언급할 수 있다. 그것들은 그 사람 안에서 넘쳐나는 절망감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군대는 정신적 질환의 황폐함을 초래함으로 고대사회에서는 이해할 수도, 고칠 수도 없는 것일수도 있다. 이 고대 텍스트를 읽는 현대의 독자들은 그의 생활에서 군대가 무었일까를 생각해 보기 바란다. 몸을 상하게 하고 마음을 절단하며 인간성을 말살시키고 자존심을 억압하는 구조적인 죄들과 불의와 억압들과 함께 우리들이 두려워 하는 것, 우리들의 죄와 문제 되는 내적인 어려움의 이름들을 적어보기 바란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사람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에게 해를 끼치도록 용인된 것의 이름을 밝힘으로 치유과정의 첫 발걸음을 시작하신 것이다.

이야기가 전하는바에 의하면 이 사람은 밤낮 공동묘지를 배회하며 소리를 지르고 돌로 자신을 해하며 계속해서 족쇄를 뒤틀어 버리고 사슬을 끊어버리곤 하였다. 그는 동네에서 배척을 당하고 종교적으로 불결하다는 판정을 받았으며 그래서 그는 동네에 되돌아 갈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그를 버렸고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으며 가까이 접근하여 편안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여전히 예수의 편에서는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었다. 예수는 이 사람의 비참한 상황을 보면서 그이 이름을 물으심으로 예수께서는 이 사람의 육체적인 상황이나 심리적인 상태 너머를 보았다. 예수는 이 혼란스러운 사람은 여전히 그의 바른 이름에 걸맞는 위엄과 존경을 회복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이야기의 끝에 가서 성경에는 “게네사렛의 귀신들린자”라고만 기록되어 있는 이 사람은 온전하게 되어 동네로 돌아가 예수께서 하신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고 하였다. 독자들은 그의 올바른 이름을 모르지만 우리들은 존경과 위엄이 그에게 회복된 것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 마가복음 5장 9절에서 제기한 질문에 관해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관심을 소위 말하는 귀신들린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어떤 사람, 그리고 모든 사람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고 여전히 사랑 받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인간으로 보게될 때 가능한 치유와 회복에 집중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이사야 서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찾아 볼 수 있다. “나는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는 내 것이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셨을 때 그는 사람들의 육체적 또는 정신적 상태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알고, 부르고 그리고 포용하신다는 이 약속을 반영한 것이다.

나는 내가 관찰했던 유치원 교실과 선생님이 학생들을 full name으로 부르던 것을 생각한다.. 아마도 누군가가 해로운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고 , 그것이 상처가 되어 그들의 인간성과 위엄을 손상할 수도 있을것이다. 그중에 어떤 아이들은 단지 그들의 인종이나, 신앙이나 성에 근거해서 경멸하는 미래를 직면할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이 하루 하루를 그들에게 사랑으로 주어진 이름을 기억하도록 배려해 주었던 선생을 기억하기를 희망한다.

*Yolanda Pierce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아프리칸-아메리칸 종교와 문학부교수로 흑인교회연구센터의 소장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5 >

누가 나의 어머니요 나의 형제들이냐?(마태복음 12장 46절)

도날드 우얼(Donald Wuerl) 추기경

 

한번은 미사 후에 한 어린이가 나에게 물어왔습니다. “왜 당신께서는 우리들을 형제요, 자매들이라고 부르십니까? 당신은 나의 형제가 아니지 않습니까?”그 어린이는 나는 이미 내 기족들이 있는데 하고 생각해 보니 어떻게 그와 내가, 우리가 형제가 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생겼던 것입니다. 나는 그래서 “응, 그래.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 가족의 멤버들이니까 나는 너의 영적인 형제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모님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뒤에야 이 어린이는”와, 그렇군요. 저는 그것을 몰랐습니다.”고 동의하는듯 말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하시는“누가 나의 어머니요, 누가 나의 형제냐?”하는 물음을 듣습니다.

이 물음은 듣는자들에게 혼란을 야기시켜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가족들이 바로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질문의 의미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하신 자신의 질문에 대한 그의 해답은 “나의 하늘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시선을 자연적인 가족의 영역 너머로 넓힐 것을 가르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들을 자신의 가족, 즉 하나님의 거대한 가족의 한 부분으로 초청하고 계신겁니다.

역사- 교회 역사-를 통해 볼 때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의 은유적인 표현이나 시적인 인물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고 그의 가족됨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예수는 우리에게 철학적인 교훈 이상의 것을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을 우리들과 나누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안에서 성장하는 가족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미사에서 만났던 어린 아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함으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진정한 영적 가족의 한 부분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진정한 물음은 :무엇이 예수님의 하늘 아버지의 뜻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그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예수님의 어머니, 형제, 자매가 된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하는 것입니다.

그의 선교사역을 통해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요한복음 6장 4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아픈 사람들을 고치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뿐 소식을 전하였으며 잡힌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였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긍휼한자,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자, 슬퍼하는자, 평화를 만드는 자 그리고 마음이 가난한 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의 선교 말기에 예수의 제자들은 배고픈자들을 먹이고, 목마른 자들을 마시우며, 이방인들을 환영하고 벗은자들을 입혀주는 세계를 상상하도록 도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서로 용서하고 세계를 향해 착한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의 생명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의 말씀과 행동가운데서 주님은 인격화된 사랑이었으며 그의 뜻은 단지 우리가 그를 사랑하고 또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내어주고, 다른 사람들을 내 속에 모시는 것, 이것이 바로 가족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냐? 누가 나의 형제들이냐?”란 예수님의 물음을 더욱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 에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보통 사람이 아니요 주님이시란 것을 기억항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가족의 한 부분으로 우리와 나누고저 했던 생명은 신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음의 쇄사슬을 끊어버림으로 그는 우리들과 그의 부활을 나누도록 초청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요청하십니다. 니코데모에게 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의 시대에 거듭나도록 초청하십니다.(요한복음 3장 1절-21절) 하나님의 가족안에서의 새 생명은 옛 질서의 범위가 사라지는 것으로 우리들이 받는 물세례로 시작합니다.”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요한 1서 3장 1절)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모두가 사랑안에서 결합한 한 가족으로 예수의 새로운 영적 형제요 자매여야 합니다.그것은 예수께서 그의 물음으로 우리에게 묻는 의문-어머니가 그러하듯 우리의 사랑을 통해 열매 맺는 사람이 되는 것은 서로을 돌보아주고 존경하는 것이며 서로를 형제애와 자매애를 가지고 손을 내밀어 포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바로 그 근본적인 요소가 아닌가?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만약 우리들이 우리 사회를 동정심 많은 문화로, 이해하고, 상호존중하는 그리고 단결하는 문화로 바뀐다면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는 삶이란 여정가운데서 길에서 예수를 만났고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여기에서 우리는 쉽사리 그의 질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누가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이냐?” 예수께서는 우리-당신과 나-에게 물어보십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 나의 형제, 나의 자매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는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 같이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까?”(요한복음 21장 15절). 당신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Donald Wuerl 추기경은 와싱톤 지역의 로마캐톨릭 추기경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4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복음 27:46)

루크 파월리(Luke Powery)

 

“예수는 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엘리, 엘리, 라박사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울부짖음이다. 시로 끝나는 삼박자 설교가 아니다. 울부짖음이다. 예수는 절망적인 이 순간에 칼 발트의 <교회교의학>이나, 죤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디에트리히 본훼퍼의 <공동생활>이나 <영혼을 위한 치킨숩>을 인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되시는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이 통탄하는 웨침은 시편 22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비록 우리는 그것을 무시해 버리기 원할지라도 예수의 입에서 이 말씀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교회사의 회랑에서 아직도 크게 메아리치고 있는 울부짖음이다-“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것은 통탄의 웨침이며, 버림에 대한 애통이며 포기의 울부짖음이다. 이 웨침은 당신을 편치않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십자가상에서의 웨침이 그 누군들 편안하게 할 수 있을것인가? 우리는 교회에서 사교적인 예배를 드리며 반쯤 죽은 상태의 좀비가 되어서 “찬양을 올려드리면 축복이 내려온다”는 듣기좋은 소리로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다른 자세의 찬양을 보여준다. 찬양을 올려드려도 암덩이가 떨어지지 않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찬양을 올려드려도 렌트비는 여전히 밀리고 당신의 삶에 암울함이 계속될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찬양을 올리지만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는 울부짓는 소리가 계속 들릴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러한 상황은 하나님이 하나님되기를 거의 포기한 듯이 보인다. 매일 매일이 성 금요일이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십자가를 혼자서 짊어져야 할 때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이야기 해 주겠다- 탄식하라, 울부짖어라, 신음하라, 투덜대어라 그리고 한탄하라.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의 피를 소독하고 깨끗하게 빨아버리려고 노력하면서 아주 작고, 멋있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말없는 예수를 목에 걸고 다닌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의 부르짖음은 우리가 있으나 없으나 계속된다. 예수는 오늘날 현대판 십지가틀 위에서 고문당하고, 십자가에 못밖힌 모든 무고한 사람들을 위하여 웨치신다. 예수는 “왜”라고 묻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나무틀 위에서 웨치고 계신다.

탄식은 성실한 연설이다. 시편의 3분의 1이 탄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웨치는 탄식의 소리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폭력적인 무기에 살해 당한 흑인들의 웨침 속에 계속되고 있다. 당신은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 에릭 가너(Eric Garner) 그리고 타밀 라이스(Tamir Rice)의 울부짖음을 듣고 있는가? “도와주세요!” “쏘지 마세요” “숨을 쉴 수 없다구요”하는 소리들이 들리는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후로리주의 샌포드, 미주리주의 퍼거슨, 뉴우욕주의 스태튼 아이랜드 그리고 클리브랜드 등지에 있는 아메리칸들이 현대의 십자가틀-이들 흑인들은 모두가 걸어가다가 당했다.-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라고 크게 부르짖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렸다. 해골골짜기인 골고다는 여름방학여행 예정지에 들어 있는 곳이 아니다. 목사들이 새로이 교회를 시작할 후보지도 아니다. 골고다 언덕의 나무위에서 나오는 울부짖음은 구약신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rmann))에 의하면 탄식의 표현으로 기본적으로 “삶이 정당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예수의 웨침은 사회적 규범을 비판한 것으로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권력자들은 예수의 웨침을 없애버리려 하였다. 예수의 마지막 멜로디는 시편 22편에 있는 커다란 탄식의 소리이다. 그것은 바바라 홈스(Barbara Holmes)교수가 언급한대로 Middle Passage란 노예선에서 벨리춤을 추면서 몸을 흔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통의 무게에 억눌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당신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는 탄식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예수는 후드가 달린 웃도리를 입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십자가를지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예언자적 사명의 결말이 어떤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성공이나, 번영이나 인기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학자요 민권운동지도자인 하워드 덜만(Howard Thurman) 의 말에서 예수는 우리에게 “세상을 사랑하면 무슨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논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에 이르렀지만 그는 혼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의 큰 울부짖음은 세상의 기초를 흔들었고 마지막에는 웃음을 가저올 것이었다.

예수의 입술에 달렸던 시편 22편의 탄식은 시편의 수많은 탄식들이 그랬던 것 처럼 탄원에서 찬양이나 희망으로 옮겨졌다 그것은 탄식의 웨침으로 시작했지만 바뀌어서 “후손들은 그를 위해 봉사할 것이요, 후세들은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가 하신 일을 이야기하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백성들의 구원을 선포하리라”는 선포로 끝을 맺었다.

탄식은 눈물의 세계에서 말없이 잠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행동하는 분이시라고 신뢰하면서 하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예수는 큰 목소리로 다시 웨치고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성전의 커튼이 위에서 끝까지 두쪽으로 갈라졌다.”

예수님의 커다란 웨침에 성전이 부셔졌다. 완전히, 전적으로, 모두 다, 부셔져 버렸다. 그의 커다란 웨침이 종교질서의 중심지를 분산시켰고 압제를 부셔버렸다. 그의 커다란 웨침은 싸우는 말로 그의 삶을 종료함으로 다른 질서를 세웠다. 커다란 웨침을 통해서 모든 승인되었던 종교적인 분리가 파멸되었다. 그의 커다란 웨침으로 신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성과 속의 구별이 사라져 버렸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은 울부짖었고 죽었지만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길을 시작하셨다. 한 미디의 단순한 웨침이 모든 제도들을 부셔버렸다. 총도, 탱크도, 폭탄도, 칼도 더 이상 없게되었다. 이 땅을 흔들어 놓은 탄식의 웨침이 바위를 가르고 무덤을 열었다. 예수께서 울부짖고 운명하였을 때 무언가가 변화된 것이다. 예수께서 웨치고 죽었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일어나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 죽이는 방법을 죽여버렸다. 그의 죽음은 실제로는 그분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파괴적인 방법의 끝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커다란 웨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미래를 열고 이 세상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신 웨침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탄식의 큰 웨침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왜냐하면 신약학자인 크맆튼 블랙(Clifton Black)이 언급한대로 “탄식의 등뼈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울부짖음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울부짖음은 위에서 아래까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였다.

그러므로 불안에 떨어 울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면서 크게 울어라.하나님은 여전히 울부짖음 가운데 계신다.” 죽음과 애도가 더 이상 없을 때까지 크게 웨쳐라. 죄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죄지은 사람들을 벌주기 위한 새로운 제도와 구조가 세워질 때까지 크게 웨쳐대라. 새로운 인종차별과 형무소들을 부셔버릴 때까지 큰 소리로 울부짖어라. 어떠한 종류의 증오건, 증오에 맞서서 크게 웨쳐라. 늑대가 양과 더불어 누워 뛰놀 때까지 크게 웨쳐라. 예수를 위하여, 예수를 향하여 크게 외쳐라. 예수께서 웨치셨으므로 우리들은 비록 의문이 있다하드라도 탄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임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크게 웨쳐라.

*루크 파월리(Luke Powery)는 Duke 대학교 채플의 책임자이며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3 >

왜 의심하느냐?”(마태복음 14장 31절)

나디아 볼츠 웨버(Nadia Bolz-Weber, 1969)

나디아 볼츠 웨버(Nadia Bolz-Weber, 1969)-콜로라도 주 덴버에 있는 House for All Sinners and Saints의 설립자요 담임목사로 <Accidental Saints>와 <Finding God in All the Wrong People>의 저자이다.


나는 종종 물위를 걷던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왔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연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광풍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예수께서 물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보았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걸어? 그거 멋있는데’ 하고 생각하였다. ‘아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리고는 그는 아주 미친짓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시도한다. 놀랍게도 그는 시도하였고 실제로 그는 몇 걸음을 물위로 걸었다. 당신은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하는 그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요? 그때 그는 자긍심과 할 수 있다는 태도가 최고로 치솟아 있었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경지까지 이르도록 힘을 더 내어야 했으며 그에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다.

만약 너에게 충분한 믿음이 있었다면(나는 이 본문에 대한 설명에서 수없이 들어 왔던 말이다) ?당신은 그것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베드로보다도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예수앞에 다다를 때까지 당신은 물위를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설교자들은 종종 베드로의 유일한 실수는 자신에 대한 신뢰,? 아니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수는 베드로가 물에 가라앉을 때 그에게 다가가서 “왜 의심하느냐?”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 질문을 항상 “너는 그러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어.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셔-베드로야, 너는 충분한 믿음만 갖기만하면 돼”라는 말로 들렸다.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 이야기의 교훈은(그리고 물론 모든 성경이야기는 어떻게 교훈할까?에 관한 것인데-) 만약 당신이 물 위를 걷는 능력면에서 하나님과 같지 못할지라도 또는 경제적으로 번영하지 못하거나 인간으로서 당신의 부족한 점들을 극복하지 못하였을 지라도 문제는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당신의 신앙을 더 강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로 가는 길을 만드는 것은 너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라, 충분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베드로(자신에 대한 확신? 아니면 예수께 대한 믿음? 확실치 않다.) 와 같이 되지말라. 그저 예수에게 다다를 때까지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를 계속하라고 ?설교는 끝맺는다.

내 생각에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끝낸다면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닐 것 같다. 나의 경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다짐한다고 광풍의 무서움이 줄어들 것 같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설교자들이 말했드시 내가 좀 더 믿음이 있었다면 불가능 한 것을 할수 있다는 말도 내가 태풍에 몹시 시달릴 때에는 내 항해에 별 도움이 돼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였을 때 아마도 그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셨을 때 베드로는 물에 빠질거라는 불가피한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라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왜 의심하느냐고 한 베드로에게 향한 예수의 질문은 물위에서 걸을 수 있는 그의 제한적인 능력에 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광풍속에서도 바로 앞에 와계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일시적으로 불가능해 졌다는 사실을 언굽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서 폭풍우가 내리는 날씨는 항구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혼돈과 불확실-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폭풍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을 향해 물위를 걸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귀신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어려운 상황이나, 두렵고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고 혼란한 경우에 나타날 수 있는 분이 아니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예수님이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한 후에도 베드로는 여전히 의심하였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어떤 기똥찬 기술을 해내느냐에 대해 베드로가 가지는 관심보다는 암담하고 혼란에 찬 인간경험 과 투쟁하고 있는 그의 투쟁현장에 하나님이 임재할 수 있을런지를 의심하는 베드로에게 더욱 초점을 맞추어서? “왜 의심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이다. 그리고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울 때 삶의 사건들은 잠잠하고 평화스러우며 전혀 괴물같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아파트멘트와 같다면 그것은 깨끗하고 , 조화되고, 풍수가 잘 어울리는, 미친것 같지 않고,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쓰레기통을 뒤짚어 엎은것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삶이 고층건물보다 쓰레기통 같이 보일 때 우리들은 하나님이 어디 가시고 그의 부재앞에서 우리는어떻게?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첫 번째 제자들을 위하여 그러한 생각을 와해시켜 버리셨다. 같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태풍과 충돌과 배반가운데서도 그를? 따르려는 자들 앞에 나타나셨는데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면 고통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수반한다는 생각은 지속되기가 어렵다. 예수는 그들 나름대로 “나는 할 수 있습니다”고 말할 수 있는 보호시설이 잘 되어 있고 조용하고 거룩한 빌딩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그들과 함께 장거리를 거닐고 태풍속에 그들을 향해 걸어가셨다. 그는 세속적인 곳과 초월적인 곳들을 걸으셨고 복된 곳이나 끔찍한 곳을 거닐으셨다. 예수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곳이나 축제에 가까이 계셨고 하나님이 가까이 하리라는 일반의 생각들을 혼란하게 만드셨다.

아마도 우리들에게 주는 요점은 만약 우리가 우리들의 내적인 적극적인 사고능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우리에게 충분한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하나님에게 도달 할 수 있는 기회를?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요점은 하나님은 혼란가운데서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감히 하나님과는 가까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배설물들 가운데도. . . . 그러니 왜 의심하느냐?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2 >

온 세상을 얻고도 너희 영혼을 빼았기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마태복음 16장 26절)

죠나단 L. 왈튼(Jonathan L. Walton)

최근에 나는 17세기 프랑스의 극작가 모리에르의 <브루조아 신사(The Boirgeois Gentlemen)>를 새롭게 발견하였다. 이 희곡은 한 귀족이 허세를 부리며 문화적인 우월성을 과시하려고 대단히 호사스러운 것을 애착하며 대중들과는 다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조롱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인 신분에 꽉 붙잡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믿기 어려운 풍자이다.

이 희곡의 주인공 몽시울 졸데인은 의상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는데 그것은 도리어 그를 우수꽝스럽고 어색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배우려는 생각에서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음악 교사, 펜싱 훈련사, 철학교수들을 고용한다. 그는 자기 딸이 모든 숨쉬는 것이라면 귀족과 같이 여기기를 좋아한다고해서 사랑하는 강직한 중산층 청년과의 결혼을 거절한다.

몽시올 죨데인은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기 원한다. 그렇지만 그가 귀족의 행동이나 물질적인 표식에 어울릴거라고 생각하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거슬리게 하고 좋은 인상을 주려는 사람들에게 우수꽝스럽게 보일뿐이다.

요즘 시체말로 하면 몽시욜 죠르데인은 흉내쟁이나 열렬팬이란 비난을 받을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오스트랄리아의 학자 클리브 해밀턴과 리차드 데니스가 사회적인 전염병으로 언급한 “affluenza” 증상 즉 과도한 빚과 불안과 낭비에 감염된 눈에 잘띠는 소비성과 어리석은 물질주의를비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몽시울 죠르대인을 어떻게 생각하든지간에 우리가운데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신분에 대한 불안은 21세기 미국이나 17세기 프랑스나 1세기 팔레스틴이나 어디에서나 계속되어온 문제라고 말해서 잘못될 것이 없다 하겠다. 마태의 복음는 우리에게 전통적인 이 세상의 사회질서를 뒤집는 하나님 나라의 저 세상적인 모습을 그려준 예수를 제시하고 있다.

'부정’하다고 생각되던 개인들-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고침을 받은 혈루증 앓던 여인과 같이-이 자칭 의롭다고 하는 지도자들에 의해 심판 받았지만 (9장 12절) 구원을 받았다.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쫓겨났으며 초대받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환영잔치 에서 가운데 자리에 앉게되었다.(22장 1절) 그리고 먼저 된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자가 처음 된다(20장 16절) 바꾸어 말하자면 대반전(大反轉)의 예수 복음의 멧세지는 그렇지 않았드라면 권리를 박탈당하고 불만을 품고있을 사람들에 대한 격려요 권력이양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멧세지는 군대나 정치권력이나 교회 교권과 다른 사회적 신분에 공통되는 표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되었던 것이다.

많은 믿을만한 심리치료사들은 물질적인 것들과 문화적인 차별을 보여주는 증거물에 대한 우리들의 집착은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매 끼니를 걱정하거나 한 달분 약을 살 돈을 걱정한다. 이것은 이해할만 하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는 주위에 백만달러 이상을 버는 사람들이 있어서 몇 십만 달러밖에 못벌기 때문에 안달이 난 사람들도 있다.

카나다의 작가인 크리스티아 프리랜드는 그의 Plutoxrats:The Rise of New GlobalSuper Rich and Fall of Everyone Else에서 밑바닥 1%의 사람들과 최상위급 0.01%의 사람들 사이에서 생성되는 불안에는 단순한 경제적인 안정보다는 더욱 깊은 불안으로 몰아가는 것들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늦추거나 삶에서 성취될 수 없는 보다 더한 것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제기한 이유이다.

“온 세상을 얻고도 그들의 영혼을 탈취당한다면 무엇이 유익하리요?”오늘날 우리자신에게 이같은 질문을 하려면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과학적인 자료들은 우리 대부분이 경험한 것들을 확인해주고 있다. 일단 우리가 어떤 수준의 경제적 안정에 이르면 돈과 행복사이에는 연관성이 없어진다. 사실 세계보건기구의 한 국제팀은 프랑스나, 뉴질랜드 그리고 미국과 같은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덜 부유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보다도 경제공황이나 스트레스의 타격을 더 많이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얼마나 많은 땅을 필요로 하는가?>의 주인공과 같이 우리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비록 생명은 아닐지라도 행복을 탈취당하였다. 우리에게 이득이 된 것이 무엇인가?

반면에 몇몇 연구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과 전반적인 웰-빙 의 연결점을 확인하였다. Exter Medical School의 연구원들은 지난 20여년 동안의 자료를 검토해 보았는데 자원봉사와 우울증이나 죽음의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들을 이런 방향으로 밀어넣고 있다. 우리는 그저 먹고 살기만 원하는가? 아니면 살 가치가 있는 삶을 영위하기 원하는가? 만일 우리가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도전,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며, 가친자들을 방문하라는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거짓된 안전을 추구함으로 영혼이 자살하는 것은 중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인간성을 갈가먹는 절하되어가는 재산에 의존하는 것을 중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에 투자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사회의 그늘에 사는 사람들을 돕는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그들의 인간성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발견한다. 그들의 인간성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간의 삶이란 결코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자산이기 때문이다.

*Jonathan I. Walton은 하바드신학교의 종교와 사회 교수이며 기념교회의 목사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들 1 >

“만약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무슨 보상을 받겠느냐?(마태복음 5장 46절)

“오 나의 영혼이여. . . 어떻게 질문할 줄 아는 사람에게 대비하라”-T. S. 엘리오트의 “Choruses From the Rock.”에서

 

종종 질문이 매우 중요할 때가 있다. 대답들은 곧바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책임을 넘겨주고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도록 한다.

예수님은 질문에 능수능란하셨다. 그는 “너는 ‘네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들어왔지만 나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다. . . 만약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설교를 쓰고 말하는 사람으로서 대답은 항상 가장 쉬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설교자에게 좋은 모토가운데 하나가 (우리 대부분이 간과하는 것이지만) “일어나서, 소리 높여 말하고, 입을 닥쳐라”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간단명료하였다: 산상수훈을 다 읽는데 몇 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제기하는 질문들은 삶을 변화시키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로 하려금 회상하게 하였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이 일자리가 어때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나를 따르겠는가?”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경우였다.

그것들은 값싼대화로 옮겨질 수도 있는 종류의 질문들이지만 잠시 침묵해 보면 우리가 대답을 하여야할 질문들임을 알게된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관해 제기한 질문은 아무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우리 대부분을 편치않게 하는 전제들이 들어 있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기 원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우리들은 모두가 한, 두가지의 원수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들은 군중들과 섞이는 것을 좋아하며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에게 관대하면서 인기 얻기를 좋아한다.그러나 슬프게도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친구를 얻게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당신은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소원하게 만들며 원수를 친구로 만들기도 쉽지 않다(예가 많지 않다).

만약 우리가 가치있는 삶을 산다고하면 우리들에게는 원수들이 생길것이다. 한번은 서로 다투고 있는 두 그릎 사이에 중재를 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과 저녁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만약 계속해서 중재를 하실려면 계속해서 당신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셔야 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나는 “당신의 경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처다 보았다.

그의 경고는 두 번이나 거듭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왜 그가 점점 더 단호해지나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고맙다고 하였다. 그때 나의 전화가 울렸다. 거기에는 우리 두 사람을 잘 아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무엇을 하든지간에 X와는 만나지말라”고 쓰여 있었다. X는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단지 우호적인 의도로 나에게 주의를 주려는 것으로 알았지만 실은 그가 나를 협박하려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잘못된 일들로부터 이득을 얻는 원수들을 극복하고 옳은일들을 하려고 할때라도 이러한 일들은 흔히 벌어진다.

우리 주변에서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보다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훈련들 가운데서 중요한 것들이 다 그러하듯이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사도바울은 그의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원수였을 때도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하였으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친구가 될 길을 만드셨다고 하였다. 요한복음서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주셨으며 그러므로 그를 믿는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다.

원수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관계하는데 어떻게 사용할가를 결정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우할까?를 결정하는 범주는 우리들이 결정할 가능성을 가진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의 질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도 훨씬 값비싼 것이다. 원수에게 꽉 쥔 주먹을 내밀지 않고 활짝 편 손바닥을 내미는 것은 그들이 당신의 손바닥에 못을 박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예수님에게 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세계에서는 원수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쉬운듯하며 어떤 사람의 원수가 된다는 것 역시 인종적, 국가적, 성적 동기 등으로 얼마든지 우연히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대답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랑은 사랑하기 쉬운 사람들만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하는가?

대주교로서의 나의 특권중 하나가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원수들을 사랑하는데 종사함으로 자유와 해방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그 것는 그들이 증오로 꽉 잠겨져 있었을 때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는다. 나는 아프리카의 공동묘지에서, 파키스탄의 페사와의 병원들에서, 그리고 내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들을 발견한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사랑을 선택한 인간의 아름다움때문에 큰 충격을 받는다.

*Justin Welby는 영국 Canterbury 교구의 대주교로서 영국국교회의 최고 지도자이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