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역사의 미스테리/2016년 1월 1일>

김상신의 역사의 미스테리(25)

스물 다섯번째 이야기

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미스테리


알렉산더 대왕이 지중해 연안의 유럽 일대와 바벨론과 페르샤 그리고 북 아프리카 일대를?? 통일하여 헬레닉 세계를 만들었던 기원전 280년경 고대 헬라의 여행자들 사이에는 ‘반드시 가 보아야 할 7개의 세계적인 경이’라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놀라운 건축물 7개를 지목한 것이었는데 그 명단을 보면 ‘기자의 피리미드’, ‘알렉사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알테미스 성전’,’바벨론의 하늘정원’,’로데슨의 거인상’,’하리카나서스의 무덤’,’올림피아의 제우스 동상’ 들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남아있는 것은 에짚트의 나일강 서안에 있는 기자의 피라미드뿐, 그외의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들이 대부분이고 이름만 남아있을뿐 그 건물들이 있었던 소재지마저 확인되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세계 7대 경이적인 건축물들

에짚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10 마일 북방 나일강 서쪽 연안에 자리한 ‘기자의 대 피라미드(The Great Pyramid of Giza)’로 알려진 이 피라미드는 ‘고대의 7개 불가사의’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로 기원전 2550년 경에 20여년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건축된지 45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비교적 큰 변화 없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나일강 서안 가자지역에는 세 개의 피라미드가 웅장하게 서 있는데 쿠프(Khufu)의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카프라(Khafra)의 피라미드 그리고 그의 손자인 멘카라(Menkara)의 피라미드입니다. 그외에도 이 지역에는 왕비와 왕자들을 위한 작은 피라미드들이 서있고 사당들로 있습니다.?

나일강 서안 가자지역에는 세 개의 피라미드가 웅장하게 서 있다.

원래 파라오의 묘소로 피라미드를 처음 만든 에집트의 왕은 제3왕국의 췌세르(Zoser)로서 카이로의 남쪽, 나일강 동쪽 사카라(Saqqara)지역에 계단식 피라미드를 짓고 매장유적들이 많이 있는 멤피스 지역등이 이곳에 있는데 파라호 쿠프는 이곳이 아닌 나일강 서안의 에집트 북쪽에 거대한 피라밋 단지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한 거대한 단지를 만들기에 충분한 지역을 확보하려는 의도와 공사에 필요한 돌들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감안한 결정일 것입니다.

그리스에서는 치로프스(Cheops)로 알려진 파라호 쿠푸는 ?에집트 역사상 초기에 속하는 ‘Old Kingdom” 시대의 제4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기원전 2589년에서 2566년에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5000여년이 다 되어가는 워낙 옛날 일이기에 그의 행적에 관한 것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며 유품도 별로 없습니다. 시나이 반도에서 그의 군대가 그 지역을 방비하고 있었다는 글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그의 석관과 사당을 짓는데 사용한 자주빛 화강암을 채석한 곳으로 추측되는 아스완 지역에서 그의 이름이 새겨진 벽을 발견하였고 그외에는 7.5센치미터(3인치)의 아주 작은 상아에 그의 이름과 파라호의 조각이 새겨진 조각품이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집트에서 가장 큰 피리미드는 파라호 쿠프의 피라미드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평균 2.5톤에 이르는 돌, 2백 5십만 여개를 다듬어 만들었다. 외부벽으로 쌓았던 대리석들은 거의 다 벗겨져 버렸다.

고대에 피라미드는 한 왕조의 강력함과 부유함 그리고 기술문명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으로 이해되는데 에집트에는 100여개의 피라미드가 있는것으로 알려져 고대 문명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기술문명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 피라미드를 건축한 기술들은 비록 4500여년 전의 것이지만 너무나 정교하고 정확하여 오늘날의 방문자들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놀라게 합니다.

파라호 쿠프의 묘지로? 조성된 대 피라미드는 높이 482피트에 밑부분의 넓이가 592만 스퀘어 피트로? 평균 2.5톤에 이르는 돌, 2백 5십만 여개를 다듬어 만들었는데 기본적인 장비밖에는 없었을 그 옛날에 어떻게 그 거대한 건물을 거의 차질없이 정확하게 맞추어서 공사를 할 수 있었을까?하는 것은 현대건축공학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도 20여년이라는 단기간에 완공할 수 있었다는 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처음에는 노예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강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였으나 건축기술로 보아 오랜 숙련을 거친 전문 기술을 가진 일꾼들의 솜씨로 노예들의? 막노동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당시 에집트 왕실의 능력에 새삼 놀라고 있습니다.?

기원전 2550년 경에 완공된 146미터 높이의 이 피라미드는 기원후 1300년 영국의 링컨성당의 첩탑이 완공될 때까지 4000여년 동안 인간이 만든 가장 높은 건축물로서의 지위를 유지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인간이 만든 구조물로서는 가장 거대한 구모의 것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처음 이 피라미드를 보았을 때 거기에 사용된 돌로만 유럽 전체를 두를 수 있는 높이 10피트, 넓이 1피트의 성벽을 쌓을 수 있다고 추산한 것으로 보아도 이 피라미드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고대 에짚트는 일찌기 상형문자를 사용하여 고대문명에 관한 비교적 정확한 기록들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피라미드의 건축에 관한 기록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피라미드 건설의 미스테리는 계속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주변을 맴도는 것입니다.

대 피라미등의 내부모형도. 오른쪽 지상에서 18니터쯤 되는 지점에 출입문이 있고 그곳에서 아래로 경사진 복도가 있으며 조금 내려가다가 오른쪽으로 난 갤러리를 지나먼 왕과 와비의 방들이 나온다. 그러나 어디에도 왕의 유해를 모셨던 흔적은 없다.



태양신을 경배하며 사후의 세계를 신봉하고 있던 에짚트에서는 바라호들의 사후세계를 준비하기 위해 피라미드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라미드의 웅장한 외부모습도 중요하지만 안쪽의 정교하고 화려한 내부 역시 조심스럽게 잘 설계하였습니다. 대 피라미드는 특별히 디자인한 화강암으로 특실과 복도를 장식할뿐 아니라 사각형의 좁은 통로가 오리온 좌들과 일치하도록 함으로서 왕의 특실 윗부분에서 피라미드의 밖으로 죽은 바라오의 영혼(spirit)이 나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피라미드의 정문은 북쪽으로 18미터 지점에 만들어졌는데 그곳에서 방들이 있는 밑바닥까지 대리석으로 장식된 좁은 복도가 경사지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격자천정이 있는 대화랑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고 그 사이에 ‘왕비의 방’과 ‘왕의 방’들이 있습니다. 그외에도 피라미드안에는 죽음의 신인 오시리스를? 대표하는 오리온 성조와 열을 맞춘 통풍구들도 있습니다.

여느 피라미드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방’에 쿠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이 피라미드에서는 붉은 대리석으로 만든 완성되지 않은 관 이외에는 쿠프를 안치하였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왕의 피라미드에 장례유물이 없다는 것은 도굴꾼의 소행이라고 넘길수만은 없는 또 하나의 미스테리입니다. ??

기자의 피라미드들은 한밤중이면 별자리와 어울려서 그 미스테리를 더해 간다.

스핑크스의 미스테리

기자의 대 피라미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스핑크스가 서 있습니다. 흔히들 이 스핑크스는 가자의 대 피라미드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생각들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으로 나름대로 많은 미스테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집트 사회에서 스핑크스와 같이 몸체와 머리가 다른 생물들을 합쳐서 특별한 상징으로 사용하는 전통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사자의 몸체에 파라호의 머리를 붙여 강력한 파라호의 힘을 상징하였던 것은 에짚트 구왕조의 1대부터 사용되어 오든 것으로 쿠프가 피라미드를 만들기 훨씬 전부터 사용되었기 깨문에 스핑크스는 쿠르 이전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을 수 있으며 후에 발견된 어떤 기록에 쿠프가 스핑크스를 수리하였다는 기록도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원작업이 일단 끝나서 전신의 모습을 들어낸 스핑크스

여하튼 기자의 대 피라미드의 수호신과도 같이 서 있는 스핑크스는 인간이 조각한 조형물로는 가장 큰 것들 가운데 하나로 마치 에집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스핑크스의 앞 두 발 사이 발톱 있는 곳에는 신전과 같은 건물이 있는데 건물의 이름은 없어 무엇을 위한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동향(正東向)을 한 것으로 보아 태양신을 경배하는 신전이 아니었나 생각들 합니다. 스핑크스는 바위들을 깍아서 붙여 만든 것이 아니라 커다란 석회석 통 바위를 파서 조각한 것으로 조각을 통해 거의 80미터 길이에 20미터의 거대한 스핑크스 상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스핑크스가 석회석임에도 혹독한 기후와 사막의 바람가운데서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거의 3000여 년을 모래 속에 덮여 있다가 최근에 와서야 ?재발굴되었기 때문인듯 하다는 주장입니다.

기원전 1425년 경에 거의 모래에 묻혀 있는 스핑그스를 복원하기 위해 현판을 붙혔다는 기록이 있고 기원전 6,7 세기에도 반쯤 묻힌 스핑크스를 파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원후애는 이교도들의 작난으로 스핑크스의 코가 잘려나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곳을 방문했을 때에는 스핑크스가 목까지 모래로 덮여있었다고 하는데 그후 여러차례의 작업을 통해서 1925-36년 사이에야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래에 덮여서 그나마 수명을 지켜낼 수 있었던 오늘의 스핑크스는 새로운 위험인 공기오염, 개스오염 등의 오염에 위협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본 스핑크스(왼쪽)와 현재의 스핑크스의 모습.바람과 폭우 때문에 모래에 갇혀서 3000년을 제모습을 제대로 들어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1995년 일꾼들이 스핑크스의 동쪽에 주차장공사를 하다가 스핑크스의 바로 밑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통로를 발견하였습니다. 10피트 넓이에 200피트의 이 비밀통로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향하다가 지하에서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발굴작업은 ?하지 않고 도굴을 방지할 조치만을 취하고 말았지만 ?이곳을 정밀검사한 에집트전문가 Robert Bauval에 의하면 그 안에는 여러 지류(支流)들이 뻗어있는 커다란 맨홀이 있는데 ?10000여년 전에 만든(Bauval은 스핑크스가 1만여년이 ?되었다고 보고있다) 스핑크스 밑으로 물이 흐르는 것을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석회석 사이로 볼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두 마리의 스핑크스가 사후세계로 들어 가는 문을 지키고 있는데 그 아래에는 지하수가 흐르고 있다는 고대 에집트 신화와 일치한다는 주장입니다.

스핑크스는 ?언듯 보기에도 뚜렷하게 코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대기와 끌로 깍고 망치로 쳐서 깨버린 자국의 이 코를 누가 부셨는가?하는 데는 아직 정설이 없지만 15세기 경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유럽에서는 나폴레옹이 에집트를 점령하였을 때(1798-1801) 그의 포병들이 대포를 쏘아 스핑크스의 코가 날아갔다는 류머가 돌았으나 15세기에 이미 없어진 것으로 확인되었고. 그 후 아랍계 역사가인 al-Maqrizi에 의하면 1378년 광신적인 무슬림 신비주의자인 Mohammed Sa’im alDahr이 지역 주민들이 스핑크스를 우상과 같이 숭배하는데 격분하여 훼손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역사의 미스테리들은 고고학의 발달과 각종 장비의 현대화로 하나씩 착착 진상이 밝혀져 나가는 것들도 있지만 하나씩 풀어지는가 하면 또 다른 미스테리들이 나타나는? 것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현대와 같이 초스피드의 컴퓨터 시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리는데 역사의 미스테리의 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김상신 님은 은퇴후 본 <늘푸른나무>를 제작하면서 주로 역사에 관한 글들을 쓰고 있으며 그동안 <역사로 배우는 미국>,<미켈란젤로 천정벽화의 비밀>,<고대문명의 발자취를 따라> 등을 연재하였고 현재 <인물로 배우는 미국>과 <명화감상>을 담당하고 있다. 역서로는 <역사와 희망>, <크리스천의 역사이해> 등이 있다.)


 

김상신의 역사의 미스테리(24)

스물 네번째 이야기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Our Lady of Lourdes)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피레네 산맥의 중턱에 숨겨져 있던 루르드라는 조그마한 마을이 지금은 매년 5백만 내지 6백만의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세계 최대의 캐톨릭 성지로 발전하였습니다. <루르드의 성모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동굴에 있는 우물에서 넘쳐 나오는 물에 목욕도 하고 마시기 위하여 전 세계에서 수많은 캐톨릭 순례자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1858년 2월부터 7월 사이에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 수비루(Bernadette Soubirous)에게 나타나서 샘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후로 루르드는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성모 마리아 성지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곳으로 떠올랐을뿐 아니라 육체적인 병을 고쳐주는 기적의 치유성지로도 알려져 150여년이 지난 지금 가장 크고 가장 붐비는 성지가 된 것입니다.

물론 신앙심이 깊은 캐톨릭 신자들에게는 종교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기적의 장소로 받아들여 졌겠지만 사회적으로도 한동안 큰 관심을 끌었을 뿐 아니라 늘어나는 순례객들의 쇄도로 루르드는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숙객시설이 많은 도시로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1848년 2월 11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14살의 베르나데트는 언니와 같은 또레의 동네 친구와 함께 인근의 산으로 땔감을 구하러 나섰습니다. 마사비엘 동굴 근처에서 그녀는 뒤쳐져서 개울을 건너기 위해 양말을 벗으며 지체하고 있는데 굴안에서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나오는 바람에 놀라서 쳐다보니 나무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환영(幻影)이 그녀 앞에 나타났습니다.흰옷을 입은 환영은 금빛 묵주를 가지고 있었으며 푸른 띠로 허리를 졸여맨 조그마한 여인이었고 캐스코뉴 방언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이나 교회에서 처음에는 그녀의 이야기를 말도 안됀다고 무시해 버리고 더 이상 그곳에 가지말라고 하였지만 그녀는 호기심에 그 후에도 그곳을 방문하면서 여러차례 환영을 보았고 환영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환영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변화되기 위해 기도와 참회를 하라고 청하기도 하였고 어떤때는 특별한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환영의 여인이 앞으로 이곳에 많은 사람들이 올것이니 교구신부에게 부탁해서 큰 성당을 건축하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또 한번은 네가 있는곳에 우물을 파서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진흙땅을 마구 파헤치자 그곳에서 샘이 솟아나서 큰 웅덩이를 이루었습니다. 처음에는 흙탕물이었지만 곧 깨끗해졌고 이 물들을 각종 병자들에게 먹이자 병이 나았다는 소식들이 들려왔으며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지방 의료진들이 이들 환자들을 조사하여 과연 병이 기적적으로 나았는지, 그 물속에 병을 고칠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는지를 조사하는 소동이 벌어졌는가 하면 ?어떤 의사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몇몇 환자들의 병이 나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인서”를 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소문이 것잡을 수 없이 퍼져가자 교회에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당국에서도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과연 그 물이 치유의 효과가 있는가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프랑스 전역으로 소식이 전해지면서 당시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지시로 이곳을 그대로 개방하도록 하였습니다.

 

베르나테드는 도합 18번이나 환영을 보았는데 대부분은 기도와 참회로 끝나는 간단한 것이었지만 가장 긴 것은 1시간 이상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베르나테드는 환영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물었으며 자신은 캐톨릭 교리에서 동정녀 마리아를 지칭하는 “’Immaculate Conception’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베르나테드는 그때까지 자신이 본 환영이 누구인지 몰랐고, 캐톨릭교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인 “Immaculate Conception(원죄가 없는 자)’라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 도 분명치 않습니다만 그때부터 이곳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던 성지로, 그의 지시로 발견한 샘물은 병을 고쳐주는 성수로 알려졌습니다.

1858년 11월 캐톨릭교회는 전국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860년 1월 지방감독의 명의로 “동정녀 마리아가 베르나테드 수비루에게 나타난 것이 사실이다”고 하는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그 이후 루르드는 매년 5,6백만명이 찾는 세계 최대의 마리아 성지로 확장되었습니다.

베르나테드는 보잘것 없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먹을것도 넉넉지 않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 중병을 앓았고 키도 작았으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찌기 집을 떠나 양치는 여자목동으로 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저 특별한 것이 없는 단순한 시골아이였을뿐입니다.

베르나테드가 환영을 볼때에는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지기 때문에 같이 갔던 사람들이 무서워 도망치기도 했지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관해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였고 어떤 놀림이나 협박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자신이 본 것이 분명한 사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르나테드는 환영을 본것 때문에 널리 알려져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했던듯 22살 때 루르드를 떠나 수 백 마일 밖에 있는 종교단체인 Charity of Nevers 수녀원에 들어가 35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그녀가 죽은지 50여년이 지나 1933년에 그녀는 교황 XI세에 의하여 성인으로 공표되었고 <루르드의 성자 베르나데드>로 알려졌습니다.

그녀의 환영현상을 놓고 많은 논란과 설명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물론 신앙심이 깊은 캐톨릭 교인들 가운데는 수수꺼끼(mysyery)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기적(miracle)으로 무조건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흥분상태에서 나타난 환각상태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또한 어떤 회의적인 사람들 가운데는 어떠한 설명도 일축하고 이 사건 전체를 장난삼아 만들어 퍼트린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베르나데트는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흔히 있던 마리아 현현(顯現) 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준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일단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자 거짓말한 것이 탄로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그럴듯하게 만들어야 했으며 아니면 주위의 관심을 얻는것이 재미있어 계속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루르드의 우물물이 과연 치유적인 특수성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해 본 결과는 부정적인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기적적인 사건의 주장들이 잘못되었거나 적어도 과장된 것이라는인상을 강하게 주었습니다. 어쩌면 의사들이 플라세보 효과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심리적인 의료과학이 적용되어 효과를 본다는 것입니다.

 

The Sanctuary of Our Lady of Lourdes는 베르나데트가 처음 영상을 본 후에 지은 첫번째 채플 이후 계속 늘어난 순례자들을 수용하기위해 확장을 계속하여 왔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the Domein 이라고 알려진 이 성역에는 22개의 예배처소가 있는데 가장 큰 곳은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전체의 넓이는 100 에이커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들이 모여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을 이룹니다,(아래 사진 참조) ?지금은 종교적인 순례지라기 보다는 상업적인 관광지의 냄새가 너무 난다며 상업화된 분위기에 식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수요가 있는한 공급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상업화된 분위기를 그렇게 탓할것은 아닌듯 합니다.

미스테리는 지금과 같은 첨단과학과 의술이 발달된 21세기에도 매년 5,6백만명의 순례자들이 그곳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가끔 어디에 있는 성모상이 눈물을 흘렸다든지, 한쪽 눈에 피가 맺혔다든지 하는 소식들이 해외토픽으로 들려옵니다. 그리고 성탄절을 앞두고 그러한 기적을 대망하는 신도들이 세계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마리아 성지들을 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르데를 방문한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이건 병약한 사람이건간에 이곳에서 격려와 평 안과 화해와 희망과 믿음 그리고 치유를 발견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성수로 목욕을 하고 성당에서 성체를 받고 촛불을 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걸으면서 개인적인 또는 공통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합니다. 시장바닥같은 혼잡한 군중속에 파묻힌 다는 것은 환자들에게는 물론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루르드에서는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지탱하는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곳을 찾는 순례자들은 베르나데트라는 평범한 사람이 경험한 기적에 호응해서 동참하기 위하여 모여든 사람들입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역사적 사실이지만 역사적으로 입증될 사건은 아닌듯 합니다. 믿겨져서 그곳에 동참하여 평안과 희망과 믿음이 고무되고 치유를 느낀다면 그것은 사실로 다가올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사실이 되어 버릴것입니다. “복음이 믿는자에게는 ‘좋은 소식’이지만 믿지않는 자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한 사도바울의 말씀이 진리인듯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로니, 또는 역사의 미스테리가 아닐까요!

 


 

유럽인의 꿈을 키워준 엘도라도 궁성의 상상도

스물 세번째 이야기

남미를 휩쓸었던 엘도라도(황금의 땅) 선풍의 진상

옛날부터 황금은 고귀하고 값진 보물로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요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고대 에짚트나 중국에서는 황금으로 파라호나 황제의 궁성을 장식하여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어쩌면 천국에서도 황금은 값지고 아름다운 것의 상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약성서의 요한계시록을 보면 저자 요한이 본 천국은 황금과 각종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황금에 대한 관심은 중세기 유럽인들에게도 여전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으로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해지고 항로개척을 위한 원정 항해가 늘어나면서 확인이 안된 외지의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전설처럼 퍼져나갔는데 그 가운데는 황금에 관한 것들이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11세기부터 유럽에서 유포되었던 Prester John의 아프리카 왕국에 관한 소문들은 구약의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의 금은 장식품들이 에디오피아에서 공급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실인듯 퍼져나갔고 13세기 이태리 상인이요 탐험가였던 마르코 포로의 <동방견문록>은그가 방문한 중국의 왕궁이 황금으로 장식되었고 황금으로 덮인 지붕은 햇빛을 반사하여 번쩍이고 있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당시 흔치 않은 해외 여행자들의 관심을 끈것은 황금으로 장식된 또는 황금이 넘쳐나는 이국(異國)의 모습이었던것 같습니다.

이와같은 황금이 넘쳐나는 이국에 관한 소문들 가운데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아시아 보다는 신대륙에서 온 기막힌 황금의 땅 엘도라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남미의 서부 밀림 속 깊은 오지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엘도라도가 있는데 그곳에는 황금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떠오르면 금가루로 온몸을 칠하고 해가 지면 석양의 빛을 받으면서 호수에 나가 이 금가루들을 물로 씻어낸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씻어낸 금가루는 호수 밑바닥에 가라않게 되고 오랜 세월 계속되는 동안에 이곳은 황금의 호수로 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스페인 원정대들이 사용하였던 지도. 엘도라도 지역이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엘도라도의 전설은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탐험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16세기 초부터 이 환상의 엘도라도를 찾는 탐사단들이 남 아메리카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영토확장을 꾀하는 스페인과 폴튜갈 그리고 영국 등의 국가적 야욕과 미선교지역과 종족들을 찾아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직자들의 열망과 어울려 엘도라도 러쉬를 이루었습니다.

1526년 스페인은 카리브 해안의 남부를 기점으로 요새를 구축하는 것을 시작으로 남미원정의 선봉에 나섰습니다. 그 후 1530년 스페인의 탐험가 Francisco Pizarro는 180여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잉카제국의 보물들을 약탈하기 위해 파나마를 떠나 페루로 향했습니다. 비록 소수였지만 잘 훈련된 군인들과 유능한 지도자 피자로의 영도아래 이들 스페인의 원정군은 단숨에 잉카제국의 황제인 알카후알파를 체포하였습니다. 알카후알파는 목숨은 부지시켜 주겠다는 약속에 그동안 잉카 황실이 모아놓은 금,은 보석들을 내주었으나 원전대는 막대한 금과 은 등 보물들을 탈취한 후 황제를 죽여버렸습니다. 스페인사람들의 페루에서의 황금찾기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황금을 찾으면 찾을 수록 밀림 어디엔가는 소문처럼 황금이 자갈처럼 깔려 있는 엘도라도가 있을 것이라는 자신을 갖게 되었고 원정길에 만난 원주민들의? 이야기는 동쪽으로 좀 더 가면, 또는 북쪽으로 좀 더 가면 아니 남쪽으로 좀 더 가면 그런 곳이 나온다는 것이었지만 방향은 종잡을 수 없을정도로 각양각색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탐험대들은 그들이 만난 원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주로 남아메리카의 북서부 고원지대의 밀림속으로 흩어져 나갔습니다.

현지 탐험가들이 현지 원주민들에게서 얻어들은 각기 다른 정보들이나 자신들의 목격담이나 체험담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때에는 자연히 과장되고 부풀어지면서 노다지 엘도라도를 찾아 한탕하겠다는 유럽인들의 열망과 신비의 땅 엘도라도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더하여 갔습니다.

그런가운데 1636년Juan Rodriquez Freyle이라는 탐험가가<The Conquest amd Discovery of the New Kingdom of granad>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거기에 엘도라도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단편적으로 들으면서 열망해오던 엘도라도에 관한 처음으로 정리된 이야기입니다.

1856년 콜롬비아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황금으로 세공한 뗏목

Muisca라는 오지의 나라에서는 왕이 죽으면 새로운 왕을 선출하여 뒤를 잇게 하는데 새로운 왕은 대체적으로 전임 추장의 조카로 오랜동안의 취임과정을 거쳐서 최종단계에 이르면 뗏목배를 타고 중부 콜롬비아의 거룩한 호수 Guatavita 한 복판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다고 합니다.

그 뗏목에는 네명의 사제들이 둘러싼 가운데에 날개를 달고 온 몸에 금가루를 뿌린 왕이 황금과 여러가지 귀중품으로 만든 제물들을 가득 싣고 호수 한복판까지 들어가 그것들을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호수에 던져 놓습니다.

호수 연안에서는 온 백성들이 모여 횃불을 들고 악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새로운 추장의 취임을 축하하다가 뗏목에서 싸인이 오면 한 목소리로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무이스카 부족의 의식(儀式) 에 대한 설명이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해서 뒷바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1856년 콜롬비아의 Pasca란 동굴에서 후에 Muisca raft라고 부르는 금으로 만든 뗏목 조각품이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그것 외에도 많은 금과 보석으로 만든 조각품들이 함께발견되었지만 이것은 길이 19.5 센치, 넓이 10.1센치, 높이 10.센치의 물건으로 제작연대는 기원전 1200-15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측정되었고 80% 합금에 은과 동 등 다른 광물을 섞어 만든것이었습니다. 무이스카 왕국의 엘도라도 의식과 완전 부합되는 조각품입니다만 그것은 Guatavita 호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동굴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엘도라도 전설의 핵심에는 기원 600년부터 지금까지 중앙 콜롬비아에 살고 있는 Muisca부족들의 통과의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발견된 역사적 기록들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나타난 사실들을 종합한 것으로 16세기 초기이 지역에 발을 디딘 스페인의 기록자들에 의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엘도라도를 찾아서

황금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황금으로된 도시, 금가루를 쓴 황금왕 엘도라도가 호수에 쏟아 넣었을 보물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그곳은 어떠한 위험을 무릎쓰고라도? 찾아갈 가치가 있는 곳으로 특히 탐험가들의 매력적인 목표가 되었습니다.
엘도라도라는 이름으로 원정을 처음 떠난 것은 Gonzalo Quesada였습니다.

1536년 9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콜롬비아의 북부연안을 출발한 Quesadar가 짙은 밀림의 습지대를 통과하면서 무척 어렵게 진격했을뿐 아니라 비우호적인 원주민들을 만나 는 등 우여곡절끝에 Chibchas 에 도착했을 때는 200여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엘도라도를 찾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이곳에서 세 명의 왕(또는 추장)들을 만나 많은 금은 보석들을 갈취할 수 있었으며 원주민들의 제보에 따라 험준한 안데스 산맥 깊숙이까지 들어갔으나 그들이 찾던 엘도라도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원정대들이 계속해서 엘도라도 발견의 원정을 계속하였는데 어떤 경우에는 원주민 추장들을 협박하고 고문하여 금,은 보물들을 얻을 수 있었고 폴튜갈인 사이살이 이끈것과 같은 어떤 원정대는 긍은이 깔린 지역을 발견하였으나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도망하였는데 그 후 그 지역이 남미 최대의 황금 생산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150톤에 달하는 금을 생산하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어렵게 탐험을 하였으나 식량이 떨어져 중도에 퇴각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고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무덤들을 파헤쳐 보물들을 찾은 경우도 있으나 원주민의 공격에 희생당하고 밀림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또는 식량이 떨어져서 또는 말라리아나 향토병에 걸려 희생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16세기에 시작된 엘도라도를 찾으려는 탐사단의 활동은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열기가 좀 시드는듯 했지만 1856년 엘도라도의 뗏목이라 할 수 있는 황금조각품들과 보석들이 발견되면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의 상인 세풀베다는 황금을 발굴하면 5분의 3를 국가에 바치기로 하고 엘도라도가 뗏목을 띄웠다는 호수의 준설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배수로를 뚫고 강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줄어들자 황금으로 만든 공예품들과 보석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만 찾아낸? 보물들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 1912년에는 서구의 원정대가 15만 달러를 투입하여 원정대를 모집하여 구아타비타 호수를 수색한 결과 수백만 달라에 이르는 황금을 발견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태양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6세기 남미가 스페인에 정복된 후 이곳을 찾은 정복자들과 탐험가들은 한결같이 황금과 보석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황금과 보석들을 빼았기 위해서 무자비한 학살도 서슴치 않았으며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들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엘도라도가 있다고 알려진 뮤지카 사회에서 황금이나 보석은 돌과 같은 것이었읍니다. 부와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황금은 툼바가라고 불렸는데 그것들은 물질적인 가치보다는 인간을 신과 연결해주며 무이스카 사회에 조화와 균형을 가져다 주는 능력을 가졌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져다 아름답게 세공하거나 의례가 있을때, 또는 아침 일찍이 가루를 뒤집어 쓰고 하루를?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인 능력때문에 남미의 원주민들은 그것을 귀하게 여겼을 뿐이란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을 바라보면서 황금이 있나보다 했던 원주민들과 목숨을 걸었던 이방인들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태양신을 숭배하던 원주민들이 이른 아침, 호수 저쪽에서 황금빛을 눈부시게 뿜어대며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반짝거리는 호수 그 밑에는 찬란한 황금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안데스 산맥의 누런 산과 골짜기를 보면서 그 밑에는 생명력을 가진 황금이 잔뜩 뭍혀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유히 흐흐는 아마존의 누런 황톳물을 보면서 그밑에 황금이 있나보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황금이 부의 상징이 될 수 없었고, 더더구나 목숨까지도 걸고 지켜야할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황금이라면 “좀 더 깊이 가면 찾을 수 있는 것, 좀 더 가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금에 눈먼 ‘하얀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는 것”이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엘도라도”를 찾아 남미로 갔습니다. 한 몫 챙긴 사람들도 있고 생존마저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황금왕이나 황금성으로 알려진 엘도라도는 많은 유럽인들의 꿈이기는 했지만 어쩌면 그것으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허황된 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황금을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추구하는 한 어쩌면 엘도라도는 무지개와도 같이 영원히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한장의 역사 스케치였는지도 모릅니다.

(김상신 님은 은퇴후 본 <늘푸른나무>를 제작하면서 주로 역사에 관한 글들을 쓰고 있으며 그동안 <역사로 배우는 미국>,<미켈란젤로 천정벽화의 비밀>,<고대문명의 발자취를 따라> 등을 연재하였고 현재 <인물로 배우는 미국>과 <명화감상>을 담당하고 있다. 역서로는 <역사와 희망>, <크리스천의 역사이해> 등이 있다.)


 

김상신의 역사의 미스테리(22)

스물 두번째 이야기

잉카문명의 미스테리 마츄 피츄(Machu Picchu)

마츄피츄의 발견

1911년 미국의 역사학자요 탐험가였던 하이람 빙엄(Hiram Bingham)이 안데스 고원지대의 Vitkos, Vilcabamba 그리고 Machu Picchu 지역을 답사하다가 우연히 지역주민의 도움으로 마츄피츄산에서 정글에 덮여있는 고대도시의 유물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산과 절벽과 밀림에 가려 밑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 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이 도시를 처음 본 그는 처음에는 그들이 원래 탐험을 시작할 때 찾으려고 하였던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스페인 침략자들이 침탈할 때의 잉카의 마지막 수도였던 Vitcos)려니 생각했으나 Yale대학교의 지원과 페루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아래 본격적으로 밀림을 걷어내고 발굴을 계속한 결과 고대도시의 집들과 벽, 제단과 계단식 테라스 그리고 계단 등 수많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스페인 침략자들에 의하여 피탈(被奪) 을 당한 도시들이 한결같이 파괴가 심하고 유물들이 훼손 내지 훼파되어 있었든데 비하여 이 도시의 유물들은 전혀 인위적으로 훼손된 흔적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관광지로 가장 각광을 받고 있으며 관광포스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페루의 마츄피츄는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해발 2600 피트 높이에 자리한 안데스 산맥의 우름밤바 강이 감싸고 흐르는 계곡(Sacred Valley)에서 8000피트(2,430 미터) 높이 솟아 오른 마츄피츄 산과 후아이나 피추 산의 두 산봉오리 사이의 좁은 능선에 자리한 마퓨피츄 도시는 무척 신기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산 봉우리 자체가 다른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인데다가 강에서부터 올라오는 구름에 쌓여 신비감을 더 해주고 있을뿐 아니라 두 봉우리 사이에 엄청난 바위들를 사용하여 만든 이색적인 도시는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오랜 기간동안의 연구와 발굴작업을 거쳐 1950대부터 70연대까지 대규모 복원사업이 전개되었고 마침내 페루정부는 마츄피츄 지역을 ‘역사적 성역’으로 외부에 공개하였습니다. 유네스코에서는 1983년에 세계문화 유적지로 지정하였고. 그 이후 마츄피츄는 세계적인 관광지로 각광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2008년 한 인터넷 매체는 마츄피츄를 세계 7대 불가사이의 하나로 선정하였습니다.

페루의 수도인 쿠스코(Cuzco)에서 북서쪽으로 50마일(80킬로미터, 산악열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Sacred Valley 위로 높이 솟아 있는 산등성이에 세워진 ‘오래된(Machu=Old) 산 봉우리(Picchu=Peak)’란 뜻을 가진 이 도시는15세기 잉카 문명의 유적이라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와 기후의 변화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신비의 마츄피츄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성산(聖山) 으로 주민들의 경외의 대상이었던 이곳에 도시를 세운 것은 잉카제국의 황제 Pachacuti(1438-1472)때로 1450년 경에 이곳에 도시를 건립하였는데 1세기 후인 1532년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 페루에 침입했을 때는 이미 도시가 폐쇄되어 폐허가 되었던지 그 존재조차조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어서 스페인 정복자들도 그냥 지나쳐 버렸고 그 후 400여년 동안에도 극 소수의 지역주민들만이 알고 있었을뿐 스페인 식민지하에서도 그 존재를 모른채 울창한 정글속에 갖혀서 사람들이 눈길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20세기 들어 전쟁이나 약탈로 인한 손상을 전혀 입지 않은 상태로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생생한 잉카문명의 정수를 보야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츄피츄는 ‘잉카문명의 잊혀졌던 도시’가 아니라 남아있는 유일한 ‘잉카문명의 성지 또는 정수’로 세계를 향해 다가선 것입니다.

마츄피츄의 구성

마츄피츄 고대도시는 총 면적이 5 평방길로미터(Km2) 정도로 도시 절반 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 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 도시는 가파른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산위에서는 계곡이 다 내려다 보이지만 계곡에서는 어디에서 올려다 보아도 그 존재를 알수없고  접근조차 어려워 요새로는 더할나위 없는 곳입니다.

도시의 고지대에 있는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곳(왼쪽),정상에 세워진 해시계(오른쪽)

이 도시는 대체적으로 중앙의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 고지대(Upper town)와 동쪽의 저지대(Lower town)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고지대에는 귀족들이나 왕족들을 위한 궁전과 신전이 자리하였고 저지대에는 이들의 시중을 드는 서민들의 주거지와 활동공간인 시장이나 창고 들 그리고 농지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200여 채의 건물들이 중앙의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동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는데. 동쪽은 주거지역, 서쪽은 종교나 의식을 위한 신전이 자리한 지역으로 여기에는 Inti신(잉카의 태양신)을 위한 거대한 제단과 관측을 목적으로한 거대한 탑 Torreon과 시간을 계산하기 위한 거대한 햇시계 등이 있으며 세개의 창문을 가진 방이 있습니다.

저지대에 있는 주거지역은 서민들이 사는 곳으로 창고와 단순 주택들이 들어있으며 그 아래로는 농사를 짓기위한 계단식 밭과 가축을 사육하는 가파른 언덕이 펼쳐져 있습니다. 귀족들을 위한 궁전은 계곡에 줄을 지어 있는데 현자들을 위한 주택은 붉은 벽으로, 공주들을 위한 지역은 사다리꼴 방으로 만들어져 있는 등 다양한 건축 스타일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츄피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라 할수있습니다. 특히 잉카인들의 돌다루는 기술은 정교하기가 신기(神技)에 가까웠으며 20톤이나 나가는 엄청난 크기와 무게의 돌들을 정확하게 자르고 붙여서 신전과 성벽과 건물을 세웠는데 어떻게 그 큰 바위산에서 커다란 돌들을 잘라내어 수십km 떨어진 산위로 날라다 신전과 집을 지었는지, 접착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도 종이 한장도 들어갈 틈이없이 정확하고 단단하고 치밀하게 붙였는데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들이 크기가 무려 8.53m 높이에 361톤이 나가는 엄청난 큰돌을 마치 가벼운 물건 다루듯한데 대해서는 현대 건축가들도 설명을 못하고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을 지경입니다.

돌로 만든 건물들과 층계 그리고 옥수수 재배를 위한 계단식 밭들이 보인다.

이미 언급한대로 좁은 평지를 백분 활용하여 산비탈을 계단처럼 깍아 옥수수를 경작함으로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으며 빈틈없이 깔아논 돌들로 배수시설을 만들어 물의 누수를 최소화하여 식수문제와 관개문제를 해결하였고 철대신 구리를 특수 제련하여 사용한 흔적들을 발견하였지만 그들의 제련술에 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마츄피츄의 역사

페루 고원지대에 잉카부족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1150년 경입니다. 1200년 경에 쿠즈코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를 세우고 1300년 대와1400년대에 군사적인 정복과 통합을 통해서 제국을 확장하였는데 제국은 태평양 연안과 안데스 산맥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두 갈래 길(잉카로드) 을 2만 km나 만들어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황제의 명령, 한 마디로 국민 한사람 한사람까지도 통제하는 강력한 지배체제를 갖추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잉카인들은 불행하게도 통용되는 글자를 갖지 못했고 쇠, 화약, 바퀴달인 교통수단 등을 갖지 못했지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강한 군대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1450년 경 잉카의 9대 황제인 Pachacuti(1438-1472) 가 마츄피츄를 건립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대에 와서 잉카제국은 분열되어 내란을 겪었고 1530년대 스페인 원정대가 페루고원지대까지 진출하여 잉카 제국의 황제를 납치하고 그들의 괴뢰정부를 세웠을 뿐 아니라 수도 쿠즈코가 그들의 손에 함락되면서 1572년에 잉카제국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마츄피츄의 목적

마츄피츄 도시가 왜 1450년 경에 그곳에 건설되었는지? 왜 건립된지 100여년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 버려졌는지? 어떻게 400여년의 스페인 통치기간에도 전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채 그 원형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험난한 지연 환경가운데 그러한 난공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아직까지도 많은 부분이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냐? 황제와 그의 귀빈들을 위한 호텔이냐? 두가지 다냐!

왜 마츄피츄를 그곳에 건설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그곳의 경관이 특이하여 옛날부터 사람들이 ‘성지(Sacred Valley)’로 경외하고 신성시 하던곳이라는 것이 첫째 이유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전략적으로 안전한 안성마춤의 요새라는 것입니다. 좀체로 외적이 침입할 수 없는 자연적인 지형과 함께 일단 침입한다 하더라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도시의 목적이 무엇이냐?하는 것을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번성했을 때 1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라는 점과 교통 편의를 고려할 때 쿠즈코와 같이 한 나라의 수도나 교역의 중심지로서의 도시를 생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대국가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신에게 제사드리기 위한 신전을 중심으로 한 신(神) 도시 또는 신시(神市) 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민족신을 위한 제단을 중심으로 종교 의식 종사자들과 봉사자들을 위한 주거지 그리고 신전를 장식할 각종 장식물들을 만드는 기술자들의 작업장들로 이루어진 도시로 1년에 몇 차례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제사를 드리고 축제를 지내는 신시들을 마야문명권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잉카인들은 마츄비츄의 특이한 경관 이외에도 하지와 동지 그리고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특별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믿어 그들이 최고의 신으로 받드는 태양신 Itis을 위한 성지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전망대와 제단 및 신전을 만들어 종교의식을 행했을 뿐 아니라 점차 순례지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 되었는데 자연히 숙박의 편의를 위한 도시가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능합니다.

신비롭고 거룩한 곳에 특별히 제단을 마련하고 종교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세운 도시일거라는 추측이 충분이 힘을 얻게된 것입니다. 특히 발굴 초기에 여성들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이 발견되면서 중세기의 수녀원들과 같이 태양신에게 헌신한 여 사제들이 상주하면서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또한 거석(巨石)으로 만든 높은 제단은 사람을 산채로 제물로 드리는 당시 종교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와서 마츄피츄 근처에 왕실별장이 있었다는 스페인 문서가 발견되어서 이곳이 단순한 성지나 종교의식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15세기 잉카황제였던 Pachacuti의 황실별장으로 휴식과 사냥과 손님접대용 장소였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습니다. 강력한 잉카제국의 황제와 VIP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휴가를 즐길 수 있는 시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영적인 중요성과 실용적인 중요성이 합쳐져서 성지로 추앙받던 마츄피치산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소규모 종교행사들이 강력한 황제가 나타나면서 대축제로 이어졌고 이를 수용하기 위해 도시가 확장되었지만 지리적 여견때문에 황제의 휴식과 손님접대 장소로 규모가 제한되지 않았을까?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황제가 최고의 인력을 동원해 도시를 거의 완성하였는데 아들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국력은 극도로 약화되고 한가한 별장같은 건물에 더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게 되어 결국은 방기(放棄)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상상할 있습니다..

계곡에서부터 산등성이까지 지그재그로 만들어 놓은 도로(왼쪽)와 이곳의 유일한 운송수단이며 가축인 라마(오른쪽)

어떻게 그 엄청난 기술의 건축공사가 가능했을까? 하는데 대한 대답으로 외개인 개입설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잉카의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은 그러한 공사를 완수할만한 기술과 능력은 충분히 가졌다고 항의하는 바람에 외계인설은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정(祭政)이 일치되어 있던 고대문명에서 황제가 거하는 곳은 바로 거룩한곳입니다. 단순하고 영적인 것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졌던 잉카 문명에서 절대적인 힘과 권력을 행사하던 신과 황제가 있는한 그런 난공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황제의 초청을 받은 손님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신비의 땅이 빗장을 열었지만 그 안의 미스테리를 다 풀어놓기에는 시간이 걸릴듯 합니다. 그때까지는 황제의 초청장 없이도 자유롭게 눈요기(관광)를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듯 합니다.

아직도 신비에 감싸여 있는 마츄피츄에는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들이 남아 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상상도

 

스물 한 번째 이야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디로?

 

에짚트의 나일강 서북쪽 지중해 연안에 알렉산드리아라는 고대 도시가 있습니다. 기원전 3세기(BC 336-323), 에짚트를 정복한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도시로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하로 에짚트 지역을 물려받은 톨레미(Ptolemy)장군이 톨레미 왕조를 세운후 에짚트의 수도로 크게 발전한 도시입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는 안정되고 강력하였던 톨레미 왕조가 건설한 아름답고 호화로운 궁전과 안전하고 거대한 항구 시설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들 외에도 ‘세계적인 경이(驚異)’라고 부르는 신화적인 등대 등을 자랑하는 당시로는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도시였습니다.

오늘날도 공식적으로 ‘고대의 7대 불가사의(七大不可思議)’의 하나로 꼽고 있는 팔로스(Pharos) 등대는 기원전 3세기에 지은 360피트의 고층 건축물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하는 의문으로 불가사의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거대한 등대에는 관광객들을 위한 관광과 휴식 그리고 시장(市場)등을 위한 공간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기원후 642년, 에짚트가 모슬림에 의해 정복된 후로는 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만 기원후 1300년대에 이 지역에 지진이 발생하여 바다 밑으로 자취를 감춘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고대 에짚트문명 하면 피라밋이나 스핑크스 또는 신전이나 대형 파라호의 묘지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들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제국이 에짚트를 정복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3세기 말 까지의 700여년 동안 고대세계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도서관이 에짚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은 의외이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틀의 제자이기도 했던 마게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의 최측근, 장군으로 에짚트 지역의 후계자가 된 톨레미는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아 톨레미 왕조를 수립한 기원전 3세기에 당시 학문과 지식의 중심지였던 그리스, 아데네의 문화적 아이디어를 차용하여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만들었으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식의 근원인 문학, 과학, 예술의 신 Muses에게 헌정하였습니다. 역대 톨레미 왕조의 적극적인 재정적 지원 아래 책과 유물 등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을 수집, 보관, 연구케 하는 한편 학자들이 자유로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여 각지의 석학들이 이곳에 모여 강의하고 토론할 수 있게 함으로 당시 세계 제1의 도서관, 세계 제1의 지식의 전당,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의 도시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파피루스 두루말이로 만들어진 책들이 쌓여있는 서고

책을 만들려면 직접 쓰거나 복사하여야 하던 때, 도서관 관계자들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책이란 책들은 무조건 복사하여 보관하였는데 다른지역에서 항구에 배가 들어오면 관리들이 책이 있는지를 조사하여 발견되는 책들은 무엇이나 필사하여 사본을 만들어 도서관에 보관할 정도였다고 하며 고대 그리스에서 유포되던 귀중한 저서들은 왕실에서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입수하여 호머, 플라톤, 쏘크라테스 등의 작품을 포함하여 수많은 아데네의 책들이 수집, 보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도서관은 돈이나 힘만으로는 확보 할 수 없는 명성을 쌓아 올렸는데 그것은 당시 세계의 거의 모든 유명한 사상가들이나 과학자들이 이곳에 와서 연구도 하고 강의도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야말로 오늘날의 대학과 같이 학문의 전당으로서 또는 싱크 탱크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00여년 전에 피의 순환에 관한 강의가 있었던 곳이 이곳의 해부학 강의실이었으며 태양계의 중심은 태양이고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천문학자 아리스타코스(기원전 310-230)가 2000여년 전에 이미 설파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유명한 수학자 유크리드(기원전 300년경)나 알키메데스(기원전 287-212) 등도 이곳 도서관에서 그들의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외에도 신 프라토니즘의 창시자 프로티누스(기원후 240-270), 기독교 신학의 창시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0), 기독교의 첫번째 이단자인 아리우스(250-336) 그리고 유대인 신학자 필로(기원전 20-기언후 50) 등도 이 도서관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톨레미 2세와 대화하는 학자들(1813년 Carnuccini의 작품)

Muses신의 신전을 중심으로 문서나 서적의 사본을 만들어 저장하는 서고, 귀중한 유물들을 수집 전시하는 박물관, 세계적인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의하는 강의실, 그리고 토론장과 휴계시설(기숙시설) 등을 두루 갖춘 세계적인 지식의 보고, 학문의 전당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자랑거리로 고대의 자료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수장품을 소유한 지식의 보고라고 칭송하면서 지중해 연안 전 지역에서 많은 학자들이 이곳의 책들을 보기위해 몰려들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곳에서 연구하면서 무슨 책들을 썼는가에 대한 소문은 자자하지만 현재는 그 위대한 도서관의 옛 터들도, 그 많은 두루말이로 된 책들도 그리고 귀중한 유물들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피라밋 안에 잘 보관되어 있는 미라들과는 달리 오늘날 그 자랑스러운 지식의 보고는 건물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소장했던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커녕 소장했던 책들의 리스트 조차도 없으며 건물의 부서진 파편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문이 자자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이 사라진데 대해 애석함을 금치 못하면서도 과연 도서관이 존재하기는 했었나 하는 의구심을 가질 정도입니다.

에짚트, 그리스,로마는 물론 후에 그곳을 정복했던 크리스천이나 모슬렘 등 모두가 그들의 소중한 자료들이 사라져 버린데 대해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만 사라져 버린 이유에 대한 분명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러가지 설명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석연치 않아 아직도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왜 사라져 버렸나?

기원전 295년 톨레미 1세에 의해 설립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원전 281-246년 사이에 톨레미 2세에 의하여 도서관과 박물관으로 크게 확장되었으며 기원전 230년에는 톨레미 3세에 의해 The Serapeum이라는 신전(톨레미왕조에 의해 만들어진 그리스와 에짚트의 신을 조합한 특이한 신)에 도서관의 지부가 설립되는 등 전성기를 이룬듯 하였습니다.

그렇듯 지중해 연안의 지식의 보고요 학문의 전당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타격을 입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8년에 로마군들이 이곳에 침공하여 전투를 벌이면서였습니다.

쥴리우스 시저의 방화로 해안이 불타고 있다. 팔로스 등대가 보인다.

로마제국의 쥴리우스 시저(기원전 100-44)는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항구를 포위하고 정박중인 배들에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불은 것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나가 해안의 건물들에까지 번져 나갔는데 후에 나온 어떤 보고에 의하면 40만권의 파피루스 두루말이들이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시저의 공격으로 도서관이 연소되었다는 기록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책을 보관하였던 서고가 타버렸는지 아니면 외국으로 보내기 위해 창고에 보관(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필사본 제작소로 주문을 받아 복사본들을 만들어 수출하고 있었다)하고 있던 두루말이들이 타버린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여하튼 이 불로 도서관이 큰 피해를 입은 것만은 분명한듯 하지만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었던듯 그 후에도 적어도 기원후 391년까지는 알렉산드리아가 학문의 중심지로서의 명맥을 유지한듯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방문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제국의 데오도시우스(379-95) 황제가 모든 이교의 신전들을 폐쇄하도록 명령하자 세라퓸 신전에 있는 도서관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이 강력한 반항에도 불구하고 반 이교도 정서에 휩싸여 기독교를 지지하는 폭도들은 신전에 침입하여 700여년이 된 신상을 끌어내리고 부셔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도서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만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오빌로스가 평소 이교도들의 책이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것으로 보아 그리스나 에짚트의 이교도들의 작품이 주종을 이루었을 도서들이 많이 훼손되었을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원 642년에 알렉산드리아는 모슬렘들의 손에 떨어졌는데 군대의 지휘관이 엄청난 책들이 소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상부에 자문을 청하였습니다. 위에서 내려온 대답은 “코란의 주장에 동의하는 책이라면 더 이상 필요없는 것들이며. 코란과 다른 주장을 하는 책이라면 이미 신을 모독한 것이니 모두 없애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안정적이고 여유가 있었던 토레미 왕조 아래서 형성되었던 유례 없는 지적인 금자탑은 불안해진 정치적, 군사적 상황가운데서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으며 어쩌면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리적 여건 역시 한 몴을 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독선은 마치오늘날 ISIS들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들을 폭파시켜 버리듯이 귀중한 인류의 유산을 한 순간에 짓덩이로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 줍니다.

다행인 것은 1980년대에 에짚트 정부와 유엔의 교육, 과학, 문화 기구는 옛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지향했던 목표를 기리며 이루기 위해 Bibliotheca Alexandrina 를 세우기로 하고 2002에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현대식 도서관 건물을 완공하였습니다. 사라진 고대 도서관의 미스테리를 뒤로 한채 새로운 문화의 장을 만들어 갈것입니다.

현대의 알레산드리아 도시와 완공된 Bibliotheca Alexandriana

김상신 님은 은퇴후 본 <늘푸른나무>를 제작하면서 주로 역사에 관한 글들을 쓰고 있으며 그동안 <역사로 배우는 미국>,<미켈란젤로 천정벽화의 비밀>,<고대문명의 발자취를 따라> 등을 연재하였고 현재 <지리로 배우는 미국>와 <명화감상>을 다. 역서로는 <역사와 희망>, <크리스천의 역사이해> 등이 있다)


스무 번째 이야기

노아의 홍수와 방주, 흔적 찾기

구약성경의 창세기(6장에서 9장)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와 ‘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신(信),물신(不信)을 막론하고 너무나도 잘 알려진 설화입니다.

이 세상과 인간들을 창조한 야웨신은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시고 이 세상을 창조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놓기 위하여 홍수로 이 세상을 씻어버리고, 방주를 통해서 다시 이 세상을 시작하기로 작정하십니다. 야웨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시고 때가 되면 노아의 가족들과 온갖 짐승들 한쌍씩을 싣고 홍수를 피하라고 명하십니다. 노아는 야웨가 지시하는대로 방주를 만들어 홍수에도 무사할 수 있었고 땅이 마르기를 기다려 약 9개월만에 짐승들과 함께 배에서 내려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후로 더 이상 홍수로 인간들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야웨의 무지개 약속가운데 노아는 3백 50년을 더 살면서 자녀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번성하였다는 기록이 노아의 홍수와 방주에 관한 내용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냐? 아니면 창세기 전반부에 나오는 창조설화의 하나로 신화나 설화로 취급하고 말것이냐? 하는 것은 각자의 지식이나 신념 또는 신앙에 따라 결정할 문제입니다만 홍수로 인간들의 죄를 심판한다는 ‘홍수 설화’는 구약성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대교나, 이슬람교 등 거의 모든 종교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이고 특히 고대 메소포타미아 등지에서 널리 유포되었으며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200여개의 비슷한 내용의 ‘홀수 설화’들이 세계적으로 전해져 온다고 합니다.

홍수설화가 기록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Nippur Tablet

홍수 설화가 기록으로 나타난 가장 오래된 것은 수메르에서 전파되던 홍수설화 ‘길가메쉬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라는 것에 나오는 홍수설화로 기원전 200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Nippur Tablet이라고 하는 진흙으로 만든 석판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928년 영국의 고고학자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르(Ur)에서 발굴하였습니다.

노아홍수 설화

창세기의 홍수 설화에는 방주의 크기와 비가 온 날자들과 땅이 마르는데 걸린 기간 들 그리고 지명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문자 그대로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당시 전해오던 두개의 설화를(첫 설화에서는 야웨를 두번째 설화에서는 하나님을 사용) 짜깁기 한 것으로 사실이기보다는 우화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구형성에 관한 사실들이 많이 밝혀진 19세기 이후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노아홍수 설화는 문자그대로의 사실일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전설이나 설화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현상인 홍수설화의 기원을 밝혀내고 아라랏산 정상에 정박하였다는 창세기의 노아방주 잔해를 찾아내려는 소수의 노력은 꾸준히 계속되어 왔습니다. 특히 20세기 들어 고고학자들의 증가와 탐사기술의 발전 등으로 전에는 시도해보지도 못했던 탐사노력 들이 시도되었는데 이러한 홍수설화의 기원과 아라랏산 탐사 시도 등을 간단히 살펴보면

홍수설화의 기원

창세기는 “땅 위에 사십 일 동안이나 폭우가 쏟아져 배를 띄울 만큼 물이 불어났다. 그리하여 배는 땅에서 높이 떠올랐다. . . .”고 홍수의 시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라랏산은 두개의 높은 산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맥과 같은 지역이다.

노아와 그 아들들만으로 과연 지상의 모든 산 짐승들과 들 짐승들을 한쌍씩 실을 수 있는 큰 방주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하냐는 주장과 함께 노아가 방주를 만들던 때가 600세요, 그 후에도 360세를 더 살았다는 것이 믿을만 하냐? 그리고 현재와 같이 둥글고 큰 지구가 40일간의 폭우로 산꼭대들까지 가득 찼다는 사실이 가능하냐?는 주장들이 큰 힘을 받으면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전래되어 온 우화나 신화로 치부되고 마는듯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홍수 설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그저 상상의 산물이 니니라 무언가 놀랄만한 물로 인한 재난이 비록 국지적으로나마 어디에선가 일어났고 그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이야기꾼들에 의하여 이곳 저곳으로 퍼져나가면서 그때, 그 지역에 맞게 수정되거나 과장되면서 그럴듯하게 전파되었으리라는 생각들을 하개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1997년 William Ryan과 Walter Pitman이 기원전 5600년 경에 터어키의 북쪽에 있는 흑해(Black Sea)에 거대한 홍수가 발생한 증거들을 발견하였다는 보고서를 학술지에 발표하였습니다. 뉴욕타임스에도 보도된 이 들의 보고에 의하면 3만여년 전부터 계속되던 빙하시대는 12000여년 경부터 지구의 온난화가 시작되면서 빙하들이 녹아내렸는데 이때 녹아내리는 담수들로 가득 찬 호수들이 많이 생겨났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흑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오늘날 염분이 많은 호수로 잘 알려진 흑해는 7500여년 전 까지만해도 염분이 없는 호수로 사방이 건조한 이 지역에서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으며 호수 주위에는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빙하시대의 얼음들이 계속 녹으면서 전 세계의 바다수심이 계속 높아지다가 7500여년 전 쯤 지중해보다 500피트나 낮은 흑해 연안지역에 갑자기 물로 인한 큰 재난이 몰아닥쳤습니다. 당시로서는 신이 진노하였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갑작스런 대 재난이었습니다.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지중해의 수심이 일반적으로 높아지자 터어키의 바로 서쪽에 있는 에게 바다(Aegean Sea)로 물들이 밀려 들었고 그 물들은 Dardanelies라는 좁은 협곡을 따라 말마라(Marmara) 해협으로 들어샀는데 더 상상 빠져나갈 곳이 없자 그 물들이 압력때문에(나이아가라 폭포의 200배에 이르는 압력이라 함) 말마라해와 흑해 사이를 막고 있는 산등성이로 스며들다가 후에 Bosporus point of breach로 명명된 지점에서 산등성이가 무너져버리면서 말마라 바다의 짠 물들이 150미터나 낮은 흑해 연안으로 쏟아져 내렸고 지역의 주민들은 순식간에 물벼락과 함께 물ㄹ에 잠겨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1년 동안에 6만 스퀘어 마일에 이르는 지역에 물이 들어찾고 300여일이 지나서야 말마라해와 흑해의 물이 균형을 이루게 되었으며 흑해의 수심은 전보다 150미터(500피트)가 높아졌는데 그 호수물은 완전히 염분이 섞인 바닷물로 채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목격하면서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홍수를 피해 높은 지대로 도망쳤던 사람들(다행히 살아 남았다면)의 기억속에는 그것들이 노아의 홍수나 방주의 이야기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고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 자연재해를 신들의 복수로 이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보스포로스 협곡이 만마라 해협으로 밀려들어온 바닷물의 압력에 무너지면서 150여 미터나 낮은 흑해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고 흑해연안 일대가 완전히 물에 잠겨버리는 대홍수가 일어났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수난을 당했거나 전해들은 사람들에게는 노아의 홍수와 같은 이야기로 형상화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반론들도 제기되고 아직도 논란이 계속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홍수설화 또는 노아의 방주에 대한 관심이 증가된 것이 사실이며 Ryan 과 Pitman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려는 탐사활동들이 전개되었는데 Robert Ballard는 1999년 현재는 수심 167미터 되는 지점에서 흑해의 옛 해안을 발견하는데 성공하여 라이안과 피트만의 홍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 주었고 UNESCO는 2005년부터 리서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인지 를 대답할만한 근거는 못되기에 노아의 방주, 또는 그 잔해를 찾으려는 노력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찾아

고고학에서는 기록과 유물이 일치될 때 신빙성을 인정하게 됩니다. 기록은 남아있는데 그것을 입증할만한 유물이 없다든가, 유물이 발굴되었는데 그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다면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됩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유물을 아직 찾지못한 경우입니다. 거대한 방주(규모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되었음)를 만들었고 그것이 40여일을 항해하다가 아라랏 산에 안착하였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방주를 찾으려는 노력은 특히 최근에 와서 열기를 더했습니다.

아라랏산 계곡에 정박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방주의 잔해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되었으나 아직은 아무런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듯한 방주의 기착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8장 4절은 ‘아라랏 산들’에 정착하였다 하여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아라랏은 터어키의 동쪽에 자리한 산맥으로 현대의 동부 터키와 이란까지도 포함되는 넓은 지역입니다.

시리아와 이락 국경 근처의 남동부 터키의 Taurus 지역에 있는 해발 6853피트의 ?Cudi Dagh(Mt. Judi)로 알려진 산은 전통적으로 아라랏 산과 동일시 하였으며 1000여년 동안 노아방주의 이야기와 연계되어 내려왔고 특히 고대 유대문헌이나 코란 경 그리고 교부들의 저서들 가운데 그 이름이 나타나 있습니다.

지난 세기까지도 Sofinet Nebi Nuh(노아의 배)라고 부르는 돌로된 구조물이 이 지역에 있어 매년 여름이면 쿠르드인들이 찾아와 참배하였습니다. 지상으로 올라와 있던 노아 방주의 잔유물들을 지난 수세기동안 승려들을 포함한 순례자들이 뜯어다가 수도원을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물건의 샘플을 1953년 독일 지질학자들이 채취 검사한 결과 6500여년이 된 것으로 나타나 보다 많은 배들이 이 지역에 묻혀 있을것으로 생각하고 계속 일대를 탐험하였으나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터어키 북동쪽 알메니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는 해발 16945 피트의 화산을 Agn-Dagh(아라랏 산)라고 불렀습니다. 기원전 5세기 경에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산이 노아의 방주가 기착한 곳이라고 믿는 신앙인들이 오래전부터 이 산을 순례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 지역이 노아의 방주가 정착한 거룩한 곳이라고 믿고 있는 알메니안 부족들이 남아있습니다.

이와같이 아라랏산의 소재에 대해 일치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데다가 1만 피트가 넘는 높은 봉우리들은 흰눈이 덮여있는 빙하지대로 한여름 2,3개월만 접근이 가능하기 때문에 5000여년의 세월이 지난 방주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경부터 이 지역에서 노아의 방주를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전해오고 있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며 실제로 1940년대에 George Hagopian이라는 사람이 몇몇 지역주민들과 함께 방주의 유해를 보았다며 비슷한 증언을 하는 바람에 탐험대를 조직하여 13번이나 탐험을 시도하였으나 눈사태와 빙하의 이동 등 기후이변으로 현장을 찾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976년에 <In Search of Noah’s Ark>’란 다큐멘타리 영화가 제작 상영되는 바람에 노아의 방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980년 대에도 NASA의 우주인 James Irwin이 참가하는 탐험대가 활동을 개시하여 관심을 모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탐험활동도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나 촬영기술의 발달로 Ararat anomaly라고 부르는 지형과 어울리지 않은 부분들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여 그것들이 혹시 방주의 잔해가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만 발굴에까지 이를수 있을런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입니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촬영이나, 심층촬영 등의 기술이 개발되면서1993년에는 CIA가 인공위성에서 아라랏산 영상을 통해 Ararat anomaly (아라랏산의 이상한 물체)라고 불려오던 것을 촬영하는데 성공하였는데, 아라랏산 서쪽 산맥의 북서쪽 코너에 있는 15300피트의 이 물체는 대부분이 빙하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이 영상들을 확대해 본 결과 성경에 기록된 방주의사이즈와 매우 근사한 것으로 분석되었으나 그것이 바위일수도 있다는 반론에 선뜻 발굴작업에 나서지 못하고 있으며 또 다른 연구팀이 빙하 100피트 밑에 있는 구조물을 분석하여 그것이 어쩌면 노아의 방주일 수도 있다고 보고 했지만 아직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탐험대를 동원할만큼 신빙성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외에도 이 지역의 정치적, 종교적, 지리적 상황이 발굴작업을 어렵게하고 있습니다. 터어키, 이란, 러시아 등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국경분쟁지역인데다 기독교, 유대교, 무슬림 교등이 나름대로 거룩한 땅으로 여기는 지역이라는 복잡한 상황때문에 발굴작업이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옛날부터 화산의 폭발과 지진이 빈발하던 지역으로서 비록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수천년의 세월을 무사히 견디고 어딘가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로봇이 인간의 작업을 대신하고 IT 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하여 운전사 없는 자동차가 곧 상용화 된다고 뽑내는 21세기지만 풀리지 않는 역사의 미스테리들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영화 <‘노아의 방주’를 찾아서>에서와 같이 방주를 발견하는 고고학적인 개가를 올릴것인지? 아니면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성경이야기로 그치고 말것인지? 궁금하다면 노아홍수가 만든 지층이라면서 그랜드 캐년을 답사하기 보다는 인내심을 가지고 끝없이 발전하는 현대발굴기술의 발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