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독립만세의 선창자 의맘  
<늘푸른나무/한국의 인물들/2018년 9월>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독립만세의 선창자


한일합방 이후 10여년이 지난 1919년 3월 1일 일본의 통치하에서 억압을 당하던 한 민족이 하나가 되어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대한이 독립국가임을 선언하는 대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앞장 서서 주도한 인물이 의암 손병희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는 순서는 죽는 순서라면서 천도교 대표로, 33인의 대표로 맨 앞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던 손병희는 3년 여의 옥고를 치루는 가운데 병세가 심하여 병 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병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1922년 5월 이 세상을 떠났다.

19세기 하반기 대한제국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의암은 천도교주로, 동학군으로, 독립운동가로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지도자로서 나라사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린 시절 

의암 손병희는 한말 이조 철종 12년, 1861년에 청주 아전 손의초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운구라고 불렸으며 병희는 동학에 입도한 후에 불려진 이름으,로 의암(義菴) 은 은사 최해월에게서 받은 호이다. 

서자로 태어난 그는 어렸을부터 행실이 거칠어 “賤室소생 ”이라 어쩔 수 없다는 동네 어른들의 비난을 받으며 자랐으며 나이를 들면서는 양반과 쌍놈의 구별을 절감하고 서자는 천대를 받을 뿐 아니라 출세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자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이 굳어졌다.

그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글방에 다니며 ‘통감(統監)’까지도 익혔으나 출세의 길이 막혀 있는 서자라 “글은 배워 무엇하랴”는 생각에 서책을 동댕이 쳐 버렸다. 그리고는 청주, 괴산, 논산 등지에 횡행하는 불량청년들을 규합하여 서민들을 못살게 구는 간악한 세도가들을 골탕먹이고 혼내 주며 세월을 보냈다.

한편 그는 동정심괴 의협심이 남달랐던듯 그가 열 두 살때 형님의 심부름으로 상급관청인 청주에 공금을 바치러 가는 길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 길에 나딩구는 것을 보았다. 어린 그는 환자를 이웃 주막으로 엎어다 맡기고 관아에 갖다주려고 가지고 있던 40량을 주면서 치료를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 꾸정을 들었다고 한다. 

또 열 여섯살 때는 어느 양반이 서민에게 행패부리는 것에 분개하여 양반을 응징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집을 떠나 몸을 피하여 사방으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 일곱살 때인 1877년, 어느 고을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연을 알아보니 한 가족이 괴질로 죽은지 몇 일이 지났는데 동네사람들이 병에 걸릴까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걱정 마시요, 내가 할테니”하고 들어가서 시체들을 염습하여 매장해 주었는데 그 후 아무 일도 없었다.

의암은 얼마동안 유랑생활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술마시고 투전하고, 사람들을 때리는 불량배 샐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약한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양반들을 혼내주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그의 방자한 행동을 괘씸이 여겼지만 서민들을 은근히 응원하면서 통쾌해 하였다. 

동학의 새로운 기수로 

이렇듯 울분과 좌절감 가운데서 마음을 잡지 못하던 손병희가 동학에 가담한 것은 스물 한 살 때였다.

동학은 경주 사람 최제우가 철종 11년(1860)에 창시한 새 종교로 당시 상황은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외국의 간섭이 심해지며 정치는 문란하고 사회적인 불안과 긴장이 계속되는 혼란기였다. 당시 유교나 불교는 부패하거나 쇠퇴하여 민중의 마음에 안식처가 되지 못했고 서양에서 갓 들어온 기독교는 유교사상에 젖은 민중들에게 잘 전파되지 않았고 또한 조정의 핍박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제세구민(濟世救民)의 기치를 내세우고 서학에 대립하는 민족고유의 종교를 표방하고 나온것이 동학이다. 여기에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교, 불교, 도교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즉 천심이 곧 인심이라는 사상을 전개하여 지상천국의 이념과 만민평등의 이상을 표방하였다.

청주 지방에서도 동학이 비밀리에 퍼졌는데 손병희는 처음에는 동학이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면하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하는 도(道)”라는 설명에 내 일신만의 장수를 위한 도라면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하였으나 “동학이란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이 인간은 다 평등할 뿐 아니라 보국안민, 과아제장생하는 대도라는 설명에 마음을 열고 “나라를 돕고 만민을 평안히 살게하며, 널리 창생을 구제하는 일이라면내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겠소”하면서 동학에 입문하였으니 그것이 그가 스물 한 살때의 일이다.
 
손병희는 ?지금까지 세상에는 진리도 없고 , 정의도 없고, 도덕도 없는 말세라고 생각했는데 동학에 입문한 후로는 이 세상에는 진리도 있고 정의도 있고, 도덕도 있다고 생각함으로 사상과 생활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다. 손병희는 우선 자신이 동학에 의하여 훌륭한 인격을 도야하고, 국권을 확보하여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새 나라를 이룩하고, 동학에 의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새 세상을 수립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술을 끊고, 도박을 끊고, 오랫동안의 동지였던 불량배들을 끊어버려야 했다. 

그는 지극정성으로 수도하였으며 그가 신도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면서 24세 때에 교주 최해월을 직접 만났는데 그의 범상함을 알아챈 교주 최해월은 7,8년 동안을 직접 지도하여 수제자로 양성하였다. 

동학이 날로 퍼져나가자 국가가 금지하는 종교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지방토호들이나 관리들은 이것을 빌미로 백성들을 탄압 착취하였는데 이에 대한 동학도들이 원성과 분노가 점점 높아가고 있었다. 

고종 28년인 1891년에는 전라감사에게 동학탄압을 중지해 줄 것을 청원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못하자 동학의 전라지역 지도자인 전봉준은 먼저 무력시위부터 벌리려고 준비하였다. 당시 교조 최해월은 위암을 보내 전봉준을 무마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고종 30년, 1893년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 등이 두 차례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다. 

동학란으로 나라가 씨끄럽던때 의암은 교주 최해월로부터 동학군 총동원령을? 명령받고 동학군 총지휘권을 물려 받았다. 그것이 1894년 9월이었다. 이로 인해 동학은 부패한 양반세력의 타도만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무력침략에 항거하는 봉기로 확산되었다. 동학군의 기세는 성난 파도와 같았다, 전봉준은 10만 인파로 전라도 일대를 압도하였다. 

의암은 중군통령의책임을 지고 6만여명의 민병을 지휘하여 충주, 진천, 청주 영도 등지를 거쳐 논산에서 전봉준의 부대와 만났다.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고 합동으로 작전을 세웠다. 동학군들은 때로는 진압차 출동한 정부군을 격퇴시키고 전쟁에 승리하는듯 했으나 그들은 민병에 불과하였다. 신무기로 무장하고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투입된 일본군을 감당할 수 없었다. 대오가 무너진 동학군은 숨가쁘게 퇴각하면서 10여만의 군졸들이 몇 몇 지휘관들 밖에 남지 않자 군대를 해산하고 붂쪽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2월 2일 불의의 습격을 받아 지방민에게 잡혀 일본군대에 인계되어 교수대에서 처형되었다. 교주 최해월은 강원도 원주에세 체포되어 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1년여 짧은 기간동안에 20여 만명의 희생자를 낸 최초, 최대의 민중혁명인 동학혁명(또는 동학란)은 이렇게 무참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외국유람.

이러는동안 의암을 몸을 피해 다녔다. 해월이 체포되기 여러 달 전인 1897년 12월 24일 의암은 대도(동학)의 장래를 물려 받았던 것이다. 이에 그에게는 하여야 할 일과 지켜야만 할 일들이 주어진 것이다.

교주 최해월이 순교한 후로도 의암은 여러해동안 교도들의 집을 숨어다니며 동학을 이끌어 나갔다. 이 기간 그의 생활에 관해서는 확실한 것들을 알 수 없다. 은거생활이 여의치 않고 탄압이 심해지자 의암은 망명 겸 세계대세를 살피기 위해 아우 손병흠과 제자 이용구 등을 데리고 국내를 탈출하기로 하였다. 1901년 3월 안경 장수러 변장하고 일본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상해에서 김옥균이 ?살해하여 일본에 넘겨지던 때라 도리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동경으로 돌아와 오사카에 머물렀다. 

일본에 있으면서 관료출신인 오세창, 권동진, 조희연, 박영효 등과 알게되면서 이들과 조국의 불운을 개탄하고 국운 회복을 위한 국사를 논하였다. 의암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길은 인재양성이 금선무라는 것을 절감하고 본국에서 인재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의암은 광무 6년인 1903년 1월 본국에 돌아와 제1차로 유학생 24명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으며, 2차로 이듬해에 40명의 유학생이 건너가서 의암이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도합 64명이 유학생을 길러낸 셈이다. 

그후 한국에서의 활동.

동학혁명을 계기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 구한국에서는 청의 세력이 물러가고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으니 그것이 갑오경장이다. 그러나 일본과 청국과 러시아의 각축가운데 대한정부는 혼란의 연속이엇으며 연이어 민비가 일본군에 살해된 을미사변, 고종이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등이 벌어진다.

일본에 머무르던 의암 손병희는 이러한 격변하는 상황가운데서 노일간에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측하고 결국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므로 일본의 군사적인 도움을 받아서라도 정부를 장악하고 동학군의 힘으로 정부를 개혁하고 강력한 정당을 조직하여 단결된 인민의 힘으로 국민의 생활을 혁신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1904년 일본에서 만난 이용구를 조선에 보내어 <진보회>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의암이 예상한대로 1904년? 2월 로일전쟁이 일어나 러시아군이 패퇴하자 의암은 <진보회>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머리를 짜르고 검고 짧은 옷을 입게 하는 등 개화운동을 급격하게 추진해 나가도록 했다.

이와같은 진보회의 활동에 정부가 제동을 걸고 탄압을 하게되자. 진보회의 책임을 맡았던 이용구는 친일조직인 <일진회>와의 통합을 선언하고 을사보호조약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준비를 하려던 의암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되었다.

의암은 대노하여 일본에 있던 제자들과 함께 귀국을 서둘렀다. 귀국한 의암은 일진회와 진보회의 통합에 대한 대책으로 일진회의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자 이용구를 비롯한 일진회지지자 62명을 출교처분하고 1906년 12월 <오늘의 천도교는 과거의 동학이다>라는 성명으로 천도교의 창시를 세계에 선포하였다. 

출교자들은 의암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고 <시천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동산, 부동산을 장악하고 천도교에 항거하여 의암의 동학 재건운동은 어려움이 많았다. 천신만고끝에 동학혼을 살리는데 어느정도 성공하였으나 그로서도 쓰러지는 국운을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1910년 한일합방을 당하면서 동학을 통해 나라를 개혁하려든 그의 모든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의암은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우리가 장차 할 일은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암은 천도교령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교육사업을 통해서 계속해서 은근히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자금 준비까지 아울러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의암의 행적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비록 교령자리를 물러났다 하였으나 쌍두마차로 서울 장안을 달리고 한강에 배를 띄우고 선유를 즐겼으며 유흥과 향락으로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분명 타락의 생활을 즐기는듯 하였다. 이러한 의암을 향해 비난이 빗발쳤고 그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점점 나빠지면서 10여년이 지나 기미독립만세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가고 일제의 감시에서도 느슨해져 갔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의 압박 아래서 조선사람들은 잡혀가고, 망명을 떠나고, 생활터전을 빼았기고 만주로 이민을 떠나야 했다. 그런 가운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자. 약소국가들을 중심으로 민족자결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북간도의 독립운동 단체들 그리고 동경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독립운동 소식들이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해외의 움직임을 감지한 의암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에게 거사준비를 하도록 지시하면서 거국적, 독립시위를 하되 질서정연하게, 정정당당하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 천도교, 불교 대표들을 망라하는 한편 심지어는 친일파라고 비난받는 사람들까지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손병희의 이러한 노력과 지도 아래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33인의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했으며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에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경비의 많은 부분을 손병희가 부담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거사가 일본총독부의 삼엄한 감시하에서도 비밀리에 준비되고 진행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한일합방이후 손병희의 행적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일제의 단속과 감시를 피하지 위한 연막전술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다.

나라가 이미 망했으니 할일은 나라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종교사업과 교육사업 그리고 출판사업 등을 통한 은밀한 독립정신 고취뿐 주목 받을만한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으며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라기 보다는 사치와 향락에 빠진 타락한 사이비 종교인으로서의 이미지를? 풍기면서 세상의 이목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때문인지 몰라도 3.1 만세운동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당국의 감시를 별로 받지 않았으며 그의 천도교 인쇄소를 통해서 독립선언문을 무사히 인쇄할 수 있었고, 태화관에서의 모임도 요정연회에 익숙한 그로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모임으로 전혀 의심을 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외부의 비난과 평판에도 불구하고 측근들에게는 신용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당한 신뢰 없이 그러한 대사를 추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맺는말

3.1 만세운동이 일어난자 3년여가 지난 1922년 5월 19일, 서울 장안의 골목들은? 의암 손병희의 죽음을 알리는 신문사 호외의 방울 소리로 시끌하였다. 만세사건 이후 감옥생활을 계속해 온 의암은 얼마전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치료중이었으나 5월 19일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떠나기 전날 “나는 가나 뒷일을 청년에게 부탁한다. 일본이 절대로 한국을 아주 먹지는 못한다. 반드시 독립을 회복할 것이니 낙심말고 일을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우리민족의 자랑인 3.1. 독립만세의 선창자 의암 손병희는 천도교의 교주로서의 종교운동과 독립운동 이외에도 교육사업으로 보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였고 문화기관으로는 보성사를 운영하며 잡지와 서적을 출판하였다. 그는 평소에 출판사가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사람들에게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다고 대답했었는데? 3.1만세때 최남선의 독립선언서를 밤세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 할 수 있었던 것은 보성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인자한 모습의 교주(종교지도자)라기 보다는 한평생 불의와 탄압에 항거하며 애국충정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던 의암 손병희의 넔은 삼각산 동쪽 기슭 우이동 계곡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글은 신구문화사 간행 <한국의 인간상 6권>에 실린 백세명의 ‘독립만세의 선창자 손병희’의 내용을 요약 축소, 수정한 것임을 밝힘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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