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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민족의 철인(哲人)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도산 안창호-민족의 철인  
<늘푸른나무/한국의 인물들/2018년 7월>

민족의 철인(哲人)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사회는 점점 더 혼란해지고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지도자는 점점 더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흔히들 국제정세나 사회상은 100년 전과 지금이 너무나 흡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이야기들 한다. 소위 개화기라고 불리던 그 당시에는 어떠한 지도자들이 있었는지 그들을 찾아보면서 한국의 진로를 찾아보려고 한다.

소위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조국은 다행히도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는 지도자들을 적지 않게 가졌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민족의 진로에 대하여 많은 고민들을 하였다. 그 기운데도 누구보다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정신적으로 고민하고 고난을 받은 사람이 도산 안창호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정신적인 수련을 통해 인격과 사상을 심화한 그는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 번영시키느냐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문제, 자기 자신의 문제를 붙잡고 몸부림쳤다.

나라가 절망의 위기에서 눈을 돌려야 할 일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려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을 붙잡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런점에서 그는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한 사색인이요, 성자와도 같은 한 구도자였다. 이땅의 불행한 현실이 그로 하여금 목숨을 내걸고 민족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지명관 교수는 도산은 원래 사색이나 신앙 또는 교육에 고요히 종사할 인간이었다. 그는 그러한 세계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포들의 괴로움을 보고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할 수 없었던 것”이라며 “도산이 좀더 태평스러운 시대에 깊은 사색인으로 삶을 다 할수 있었더라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또 인간과 인간운명을 깊이 명상하고 영원을 갈망하면서 심화하는 종교적인 삶을 살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아쉬워 하였다.

시대적인 도전에 응하여 자신을 내어놓았으면서도 그 시대를 넘어 민족과 인간의 영원한 문제에 부딪쳐 나갔던 시대를 초월한 지도자로 도산을 새롭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의 시절 

도산은 고종 15년(1878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태어나 일곱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그가 자라나던 시절은 격동기로서 다섯 살 때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일곱 살 때는 갑신정변이 터졌으며 도산이 열 여섯 살 때 동학란이 일어나 청일전쟁으로 번져 갔다. 평양에서 청일 양군의 전화에 짖밟히는 고국의 모습을 보며 친구 필대은과 더불어 국사를 논하기도 하고 절망하고 절규하기도 하였다.
 
도산은 젊은 나이임에도 외국군대가 우리 땅에 와서 싸움판을 벌리는 원인이 외국인에게 있다기 보다는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외국인이 마음대로 우리 강토에 들어와서 설치는 것은 우리나라에 힘이 없기 때문이다”고 결론을 내린 도산은 열강사이에서 독립을 지탱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찾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힘은 민족과 개인에 자리하고 있는 정신에서 온다고 생각하였다.
 
도산은 드디어 일신의 안락을 희생하고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먼저 생각하기로 결심하고 열 여덟 살 되던 해 1895년에 서울로 향해 고향땅을 떠났다. 

서울에 올라운 도산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救世學堂)에서 2년 동안 공부하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스스로 장로교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인으로서의 교육을 받고 기독교인으로 입교하였다. 

도산은 일생동안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활동하지 않았고 교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때로는 선교사들이 너무 내세적(來世的)이라고 비판도 하고 울부짓는 신앙에 열광하는 것을 보고 어리석다고 평하기도 하였으나 원래 유교가 형식을 강요하고 공리만을 일삼고 정의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의 사랑과 윤리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듯 하다. 

그는 낡은 인간관계를 극복하고 이웃과의 사이에 새로운 정의에 근거한 교제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낯 모르는 사람에게도 미소를 가져 보자고 말했다. 그는 “서로 사랑하면 살고, 서로 싸우면 죽는다” “너도 사랑을 공부하고 나도 사랑을 공부하자. 남자도 여자도 우리 2천만이 다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2천만 한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고 주장하면서 사랑이 있는 곳에 진정한 힘이 성립될 수 있다고 보았다.

도산은 기독교에서 삶의 원리를 섭취하였고 나아가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 깊은 내면적인 자각을 통하여 혁신되어가는 자아일 때에만 사랑하는 인간, 국가와 민족을 위한 힘이 될 수 있는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도산은 언제나 민족의 문제를 넘어 인간의 문제, 나 자신의 문제에까지 나아갔고, 기독교 적으로 인류를 사랑하는데까지 나아갔다. 그는 인류를 사랑했기 때문에 ‘왜놈”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끝까지 “일본 사람”이라고 불렀던 인간성의 소유자였다. 

기독교적 사랑과 자기수련으로 단련한 도산은 구세학당에서의 2년간의 교육기간을 마치고 이제 자기실천으로 나가게 되었다.

서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도산에게는 시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결혼 문제가 있었다. 그를 길러준 조부가 손자며누리를 골라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교적인 강요와 순종에 반감을 가졌던 도산은 종교와 교육수준의 차이를 들어 반대하였으나 신부가 기독교로의 개종은 물론 서을에 있는 정신여학교로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결국 혼사가 이루어지고 신부는 미국유학까지도 동행하여 결국 미국에서 도산의 자녀들을 키웠다. 

젊음을 바쳐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도산은 혁명가나 정치인이기에는 너무나 평화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교육자로서의 안온한 생활을 누릴 수가 없었고 몸부림치는 조국의 현실앞에서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젊은몸으로 대중속으로 뛰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도산은 1898년 9월 10일 스물 한 살의 젊은 나이에 평양성 대동강 서편 쾌재정에서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서 연설을 함으로 그의 공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독립협회 관서지부가 주최한 만민공동회는 평양감사도 참석하는 관민합동의 중요한 집회였는데 이 자리에 스물 한 살의 더벅머리 총각이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연단에 올라 두려움 없이 집권층을 공격하는 한편 국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때 집권층의 각성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의 웅변과 정연한 논리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경탄하였으며 그의 말과 태도는 민중에게 경이와 기대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독립협회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서재필이 정부고문에서 해임되어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정부는 보무상들을 동원하여 독립협회의 모임을 방해하고 심지어는 해산을 명령하였다. 도산은 시골뜨기로 여러지방의 독립협회 모임에 나가서 보무상들의 실상을 폭로하며 민중들의 각성을 촉구했지만 정부가 독립협회의 해산을 명령하여 도산의 첫 번째 정치활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도산은 좌절을 맛볼 때마다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여기서도 진정한 우리의 적은 밖에 있다기 보다는 안에 있다고 자각하였다.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외세에 대항할 수 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도산은 1898년 22세의 몸으로 강서 고향 땅, 동진면 양화리에 전진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최초로 한국사람이 세운 사립학교로 독립이라는 정치운동이 죄절되자 보다 장구한 계획과 꾸준한 노력으로 끊임없는 향상을 도모해 보자는 취지에서 점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도산은 약 3년 반동안 학교 사업과 지방 개발사업에 종사한 다음 도미할 길을 찾아 나섰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돌아와 교육사업을 할려는 생각과 기독교의 오묘한 진리를 연구하려는 생각에서 도미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그는 1903년 고국을 떠나 하와이를 거쳐 그해 10월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도산은 바다위에 떠있는 하와이를 보면서 이때 처음으로 자신의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02년가을부터 시작한 도산의 미국생활은 쉽지 않았다. 25세의 도산은 보통학교 교육부터 받을 생각이었다. 당시 샌프랜시스코에는 상투를 틀고 인삼을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10여명, 공부할 기회를 찾아 온 사람들이 10여명 있었다. 그런데 도미한지 얼마되지 않아 미국사람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상투를 잡고 싸우는 두 한국사람을 보았다. 서로들 약정된 인삼장사구역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사건을 목격한 도산은 먼저 미국에 와 있는 동포들의 생활부터 지도해야할 필요를 절감하였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중단하고 친구들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근근히 생활하면서 이번에는 마국에서 다시 대중운동을 시작하였다.

동포들의 가정을 방문, 실태를 파악하고 청결한 환경, 단정한 복장 등 생활개선부터 시작하여 동포들의 주거지를 찾아서 직접 청소를 하는 등 동포들의 신뢰를 받으면서 동포들이 그를 찾게되었으며 그의 사업은 로스앤젤레스근처의 농장에 일거리들을 찾아 사람들이 몰리면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왔다.

그는 그가 이 지역을 떠나더라도 동포들이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며 생활하도록 돕기위해 친목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미국과 하와이에서 조직된 최초의 단체로 1903년 9월 23일에 조직되어 공립협회, 국민회로 발전하였다.

도산은 샌프랜시스코로 돌아와 회관을 설립하고 1905년 11월에는 공립신문이라 하여 최초의 신문을 발간하였으며 북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도 사람을 보내어 지부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미주에서의 교포조직이 완료되 갈 무렵 고국에서는 노일전쟁이 끝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되는 등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도산은 1907년 5년 반만에 더욱 어려워진 조국으로 돌아왔다.
 
도산이 도미할 때 동행을 고집했던 부인 이 여사는 미주의 생활은 오직 눈물의 세월이었다고 회상한다. 도산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는 “이 여사는 로스안젤레스에서 첫아기 필립을 낳았다. 필립을 낳은지 1년 만에 도산은 귀여운 첫아기와 아내를 미국에 남겨 준채 다시 고국으로 떠났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가족을 데리고 갈 형편이 못되었던 것이다. 이 여사는 남편의 뜻을 너무나도 잘 알았으므로 그대로 가게 하였다.

한말의 풍운 속에서

도산이 처음 귀국할 때에는 국내의 사정을 잘 알아본 후 다시 도미하여 그곳의 동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내 동지들의 권고로 국내에 그냥 머물며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하여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전국을 순회하는 강연회도 열었다. 

이때의 도산의 강연은 20대의 그 옛날보다 한층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국제정세를 알리고 국내의 사정이 얼마나 절박한가를 깨우치면서 “지금에 깨달아 스스로 고치고 스스로 힘쓰지 아니하면 망국을 뉘 있어 막으랴!” 호소하면서 전 국민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의 직설적이고 솔직하면서도 간절한 연설은 청중들을 울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중에 포함하는 것 보다는 우정 있는 2천 만을 이웃으로 두는 것이 일본에 득이 될것이라”는 그의 호소는 일본사람들 까지도 숙연하게 하였다.

그는 귀국한 1907년에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민족주의적인 인물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젊은 엘리트 훈련에도 힘을 기울였다. 후에 흥사단의 신조가 된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의 4대정신을 고취하는 수양단체로 점진적으로 각성시키자는 그의 생각이 담겨져 있는 합법적인 단체였다. 또한 당시 각자의 수양에 힘쓰고 일심단결하여 교육과 산업에 힘씀으로 앞으로 독립할 기회를 찾자는 취지에서 ‘신민회’라는 조직이 있었다. 당시 애국지사 300여명이 참여한 비밀조직으로서 도산은 처음부터 조직에 참여하고서도 최고위직에는 양기택을 추대하는가 하면 산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주식회사 마산도자기회사를 건립하는 한편 문화사업으로 태극서관을 설립하여 출판사업에도 관심을 보였다. 

1909년 안중근의 이등박문 암살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독부는 신민회를 중심으로 한 애국인사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도산은 1910년 귀국한지 4년만에 중국의 소금배에 몸을 싣고 다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도산은 슬픔을 안은채 조국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거국가(去國歌)를 남겼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
나의 등을 떠밀어서 , 너를 떠나가게 하나.
일로부터 여러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
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 간다고 설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여.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을 선언하고 도산이 힘을 기울였던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 신민회 등을 해산하였으며 그해 9월 한일합방을 기어이 선포하였다. 

다시 미주의 하늘아래서 

중국 청도에 도착한 도산은 만주와 연해주 등을 돌아보면서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웠으나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도산은 나라을 잃어버리고도 단합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무척 실망하다가 미국에서 여비가 도착하자 1911년 봄 영국과 독일을 거쳐 로스앤젤스에 도착하였다.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이곳을 떠난지 4년 만에 나라를 잃고 돌아온 셈이다. 동족의 분열에 쓰라린 좌절을 경험한 도산은 ‘민족성 개량’이라는 이념 아래 재미동포를 위하여 다시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1919년 독립만세 이후 중국 상해로 떠나기까지 9년동안의 미주생활이 시작되었다.
도산은 송종익과 교포들의 지원 아래 교포지도에 힘쓰게 되었으며 1912년 11월에 <대한인국민회>를 샌프랜시스코에서 창립하였다. 미국,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등지의 대표가 참석한 이 모임은 형식상 대한제국이 망한 이때 정신적 대한제국에 대한 희망이 지극하므로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를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육성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되엇지만 1922년 멕시코와 큐바 그리고 미주만의 북미대한인 국민회로 되었다가 1937년 다시 대한인국민회로 불려졌다. 도산은 이 단체를 미국정부와의 연락창구로 활용하면서 동포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도산이 또한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 것은 그가 평소에 생각하였던 엘리트 젊은이들의 양성이다. 그가 대성학교와 청년학우회를 통해서 하려던 진정한 헌신적인 엘리트 지도층의 양성을 1923년 샌프랜시스코에서 흥사단이란 이름으로 시작하였다. 도산은 흥사단의 목적을 “본단의 목적은 무실, 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체,지의 삼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심산유곡에서의 고행이나 수련이 아니라 이웃이나 동지가 합하여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일하고 수련하자는 것으로 개인 인격수련이 아니라 민주적인 협동인으로서 인간을 혁신해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주적인 시민이 서로 관용하면서 단결할 때 민족의 힘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힘이 바로 독립의 힘, 조국 발전의 에너지가 된다고 믿었다.
도산이 미국에서 “실력을 기르자, 조직하자, 이길 자신을 가질 때 나가 싸우자”며 동포의 각성을 위해 수련하고 있을 때 조선에서 들려오느 소식들은 절망적인 것들뿐이었고 “나도 모르겠다”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임시정부의 일꾼으로 

세계 1차 대전이 종결되고 약소국가들 사이에서 민족자결의 바람이 불자 해외동포들 사이에 조국에 어떤 변화가 오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져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산은 도리어 경거망동하지 말고 확실한 기회를 기다릴 것을 강조하였다. 언젠가 미일전쟁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한 도산은 일본이 패전하는 때가 온다고 보았고 조국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만 독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에서 1919년 3.1독립만세사건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42세를 맞이한 도산은 3월 10일께 고국의 만세소식을 듣고 분연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독립운동이 너무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왕에 일어난 일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3월 15일 미국, 하와이, 멕시코 교포 대표자회의를 소집하고 대한인국민회총회장 안창호 이름으로 성공하기까지는 많은 피를 흘려야 할것임을 강조하고 대한민족이 일제히 일어나 용감하게 싸워나갈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4월 5일 국민회의 특별파송을 받아 상해로 향하였다. 5월에 상해에 도착한 도산은 6월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미 여러곳에서 정부형태를 주장하는 단체들이 나타나고 조선에서도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오고 있었다. 도산은 각 지역에 있는 영수들을 모아 통일된 정부를 세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1년여를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다음해 5월 임시정부의 자리를 물러난 도산은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서울에 수양동맹회, 평양에 동우구락부 등을 조직하였고 1926년에는 북중국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여 이상촌 부지를 마련하고 산재한 군사활동들을 통일한 혁명세력 대독립당을 세우려는 구상을 해 보았지만 일본정부와 가까워가는 만주정부의 반한적인 동향을 보면서 그 꿈마져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상해에서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주도로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애국인사들을 대거 검거했는데 이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던 도산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폭탄투척사건과 연관이 없었음이 확인되었음에도 일본경찰은 도산을 조선으로 압송하였다. 도산은 이렇게해서 신간회 검거를 피해 고국을 떠난지 23년만에 묶인 몸으로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수감된지 4년만에 30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고 가출옥하였으나 오랜 형무소생활에 몸이 무척 쇠약해졌다. 

도산은 고향을 돌아보고 팔도강산을 순례하고 싶었다. 그러나 2,30대때와는 달리, “말없는 도산, 말없는 민중”이었다, 어찌 할 말이 없었으며, 속 시원하게 뿜어내는 도산의 목소리가 그립지 않았으랴만 도산이 지나가고 나면 그와 접촉한 사람들이 경찰에 불러다니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본 도산은 그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고향으로 들어가 잠적하고 말았다. 

그런 도산에게 평남도지사는 사람을 보내어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도산은 안창호의 존재가 민심을 악화시킨다면 그것은 조선에 있으나 미국에 있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니 나는 이곳에 있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동지들을 만나면 일본은 정의와 인도에 반역하는 무리이므로 반드시 망할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준비 없는 나라, 단결 없는 국민과 지도자들을 걱정하였다

일본정부는 다시 도산을 송치하였으나 도산의 몸은 극도로 쇠약하여졌다. 

“나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나는 죽으려니와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그렇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니 미안하고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서 아무 가족도 임종을 보지 못한 가운데 1938년 3월 10일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한 평생을 민족의 자각과 수련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면서 엘리트 지도자들을 양성하여 한민족의 힘을 길러 자력으로 독립의 길을 확보하려고 하였던 도산은 위대한 개혁자, 위대한 정치가의 꿈을 거둔채 피의자 신분으로 조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어쩌면 그의 삶은 실패와 좌절의 삶이었는지 모른다. 실패와 좌절을 맛보아도 남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다시 되돌아 보는 삶, 아무리 어려워도 삶과 이상을 포기하지 않던 삶, 각성과 훈련을 통해 힘을 기르는 것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믿었던 도산의 삶은 오늘날에도 민족의 진로를 보여 주었고 애국의 길이 무엇임을 보여준 삶이 었다. 

*이 글은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 간)에 실린 지명관의 '민족의 철인'을 중심으로 요약, 증보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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