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운동가 월남 이상재  
<늘푸른나무/한국의 인물들/2019년 5월>

민족운동가 월남 이상재
-기독교 신앙에 바탕 항일민족운동 주도-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선생께서는 관리, 교육자, 민권운동가, 정치가, 청년운동가, 언론인등 수많은 호칭에 걸맞게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역사의 분수령에서 나라를 위해, 민족을 위해 애쓰다 1927년 3월 29일 일제의 압박이 한창이던때 유명을 달리 하고 말았습니다. 존경받는 지도자, 백성들이 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어느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이때 그처럼 올곧고 굵은 선을 그어 놓은 선각자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일는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원한 「청년」으로 불리우는 민족운동가이자 청년운동가인 이상재(李商在)의 본관은 한산이며, 자는 계호(季皓)이고, 호는 월남(月南)이다. 그는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한산군 북부면에서 아버지 희택(羲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하여 18세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탐관오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하였다. "한심하다 다시 들어갈데가 아니다"며 이를 개탄한 월남은 낙향하여 은둔하고자 했으나, 친족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신임을 받는 젊은 선비이자 개화파 지식인인 박정양을 만난 사건은 이상재의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박정양은 엉뚱하리만치 개성이 강한 청년인 이상재를 아꼈다고 한다. 

1881년 월남은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조준영, 김옥균 등 10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고영희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월남은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등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심했다.
 
일본을 방문했을때 동경의 병기창을 둘러보고 행한 다음과 같은 이상재의 소감 한마디는 다가 올 사태를 예견한 것이어서 널리 인용되고 있다. "오늘 동양에서 제일 큰 도쿄의 병기창을 보니 과연 일본이 동양의 강국임을 알게 되었소. 그런데 한가지 걱정은 성경에 '칼로 일어서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였으니 다만 그것이 걱정이오."

1884년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이 그를 인천 우정국의 주사(主事)로 임명하고 앞으로 중용하려고 하였으나 그해 12월에 갑신 정변이 실패하고 홍영식이 관군에 의하여 살해당하자 이상재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이때에도 그는 그다운 일화를 남겼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그에 연류된 사람들을 잡아 넣는 판국에 이상재는 자진 관에 출두하여 "시골에 노모가 계셔 만나뵙기 위하여 낙향을 하니 죄가 밣혀지면 고향으로 사람을 보내라"고 신고를 하였다. 이를 가상하게 여긴 조사관이 더 이상 그의 죄를 캐지 않기로 하여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낼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박정양에 의해 등용되었다.

1887년 박정양은 미국에 전권대사로 파견되었으며, 이상재는 이때 2등 서기관으로 수행하여 1년여 동안 워싱턴 D.C.에서 근무했다. 이때의 일화 역시 월남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박정양이 처음으로 조선 조정의 주미전권대신 서기관으로 미국에 갈때 청나라 조정은 전권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였을뿐만 아니라 미국에 간 다음에도 대소사를 청나라 공사에게 보고하여야 한다면서 국서를 미 대통령에게 봉정하는 자리에도 청공사가 대동하여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이에 박정양으로 하여금 칭병케 하고 대신 이상재가 나서서 청관리들을 설득하여 조선전권이 단독으로 국서를 봉정하게 하였다. 이로 청의 미움을 사 1888년 10월 소환되어 귀국한 뒤 잠시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 위원, 1894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중학교, 소학교, 외국어학교를 설립하였고, 한때는 외국어학교 교장을 겸임하여 민족을 이끌어갈 동량을 키우는데 주력하기도 하였다. 

월남은 1896년에는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 의관이 되었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국운을 바로 잡기에 힘썼다. 이 해 7월 그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간부를 역임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의장으로 사회를 맡아보았다. 당시 그는 독립협회의 각종 토론회에서 명사회자로 이름을 날렸다.

1898년 11월 월남은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여 두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동지 16명과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심상훈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월남은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혔다.

그러나 1902년 6월 정부 전복을 음모했다는 이유로 개혁파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서에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날 고종(高宗)은 이상재를 불러 의정부 참사관을 명했다. 그러나 이상재는「어명」을 거역하고 단호하게 물러설 뜻을 밝혔다. 그후로는 관직에서 물러나 사회운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관직에 있을때 그의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많이 있다 

당시 외세에 빌붙어 매관매직을 일삼던 김홍육(金鴻陸) 일파가 고종에게 보자기에 싼 뇌물을 바쳤다. 이를 목격한 월남은 "상감 계신 방이 왜 이리 추운가"라고 일갈한 뒤 서슴없이 그 뇌물을 보자기째 난로에 처넣어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리곤 통곡하며 왕앞에 엎드려 대죄(待罪)를 했다. 그러자 고종은 도리어 눈물을 지으며 이상재 선생의 손목을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또 때로는 "…신(臣)은 비록 만번 주륙을 당할지라도 이런 매국의 도적들과는 조정에 같이 설 수 없사온즉, 폐하께서 만일 신이 그르다고 생각 하시면 신의 목을 베이사 모든 도적들에게 사례하시고 만일 옳다 여기시면 모든 도적의 목을 베이사 온 국민에게 사례를 하소서" 하며 당당하게 나아가 고관들은 물론 임금께서도 당황해 하였다 한다. 

감옥에서 성경 읽다가 기독교인이 되다.

월남은 감방에서 우연히 거적자리 밑에서 발견한 요한복음을 읽다가 감동받은 다음 열심히 성경과 기독교 관련서적을 통독하고 54세의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개화파들이 서구 종교인 개신교를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하나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현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들을 하지만 월남은 자신이 감옥에서 ‘위대한 왕의 사자’가 나타나 세번이나 믿을 기회를 주었는데도 왜 신앙을 갖지 않느냐고 질책하는 신비체험을 했다고 전한다. 그 신비체험이란 월남이 워싱턴에 있을 때 기회를 주었는데 거절한 것이 첫번째 큰 죄이고, 독립협회에 가담했을 때도 기회를 주었는데 자기만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믿지 못하게 방해한 것이 두번째 죄이고, 결국 민족이 진보할 길을 막았으니 더욱 큰 죄로 지금이라도 잘못을 회개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월남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확신하고 성경을 통독하면서 기독교신앙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1904년 2월 월남은 감옥에서 석방된 뒤 서양선교사 게일이 담임목사로 있던 연동교회에 옥중동지들과 집단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김정식, 유성준 등과 함께 1905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에 가입하여 초대 교육부 위원장이 되어 민중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그는 1908년 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 총무를 맡아 성서연구반을 조직하여 성경 중심의 신앙운동을 주도했으며, 1909년에는 “동포여 각성하라”를 외치며 구국운동에 앞장섰고 ‘백만인 구령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되고 일제가 무단통치를 강행하자, 월남은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의 교육에 헌신하였다.
 
1913년 월남은 63세의 나이로 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여 사멸 직전의 청년회를 사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그는 1926년 명예총무로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청년회의 재정 확립과 지방으로의 확장을 이룩하였다. 

1914년 월남은 재일조선YMCA를 비롯한 세브란스, 배재, 경신과 개성의 한영서원, 광주의 숭일, 군산의 연맹, 전주의 신흥, 공주의 연맹 등 학생 YMCA를 망라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며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모든 민간단체가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고 이후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되었는데 이는 월남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는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0년 부터 월남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전국연합회 회장으로서 제 2독립운동, 물산장려운동, 소년척후대운동, 학생청년회운동 등을 주관하였으며, 각종 강연회, 토론회, 일요강좌, 농촌운동, 지방순회운동, 각종 체육활동, 음악회 등을 통해 폭넓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한편 그는 부모제사를 지내는 일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기독교의 잘못된 부모 공경방법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922년에는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1923년에는 조선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준비위원장이 되었으며, 창문사를 설립하여 기독교 문서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소년척후단(보이스카웃) 초대 총재, 1925년 제 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서 한국 언론계의 활동 진작과 단합에도 기여하였다. 1927년 1월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월남은 창립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해 1927년 3월 29일 풍운의 한말(韓末)과 일제(日帝) 암흑시대를 숨가쁘게 동시 호흡한 이상재 선생은 개화의 의지속에 국정개혁을 도모하고 자주독립의 신념으로 애국청년을 지도하고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으로 일제의 우민정책을 질타하며 때때로 대중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등 열렬한 삶을 살다 서울의 한 구석에서 78세로 생을 마감했다.

월남은 서울 재동 자택에서 가족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장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졌고 한산에 있던 선영에 안치되기 까지 일제의 삼엄한 감시속에서도 10만여명이 나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한다. 1957년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변영로가 쓴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월남은 넓은 도량과 고매한 인품의 소유자로 여유있는 풍자와 기지가 넘치는 해학으로 당시 살벌했던 사회분위기를 순화시켰고 일제의 침략과 불의를 날카로운 경구와 유머로써 제어했다. 한번은 월남 이상재 선생이 YMCA에서 강연을 할 때 일본 형사들이 청중 속에 있는 것을 보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 허, 개나리가 만발하였구나!" 라고 하여 폭소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봄에 피는 나리꽃은 아무데서나 잘 핀다고 하여 '개나리'라고 부르는데 일제시대 개나리 꽃이 일본 순경을 뜻하는 은어로 쓰인 적이 있다. 일본 관헌을 뒤에서는 '개(犬)'라고 불렀고 앞에서는 존칭으로 '나리'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한데 합치면 개나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久遠의 청년으로 노년에도 청년들과 어울려 담소하고 해학과 풍자를 즐겼다. 한번은 한 젊은이에게 그의 선친의 이름 아래 씨자를 붙여 000씨라고 부른 것이였다. 한번도 아니고 계속 그렇게 부르자 이 젊은이가 월남 선생에게 왜 "저를 부르시면서 저의 선친의 이름을 부르십니까?"고 항의하자 "내가 뭐 잘못됐나? 자네 아무 아무개의 씨가 아니란 말이냐!"고 대답하여 좌중을 웃겼다는 것이다. 이런 그를 보고 한 친구가 "젊은 사람들하고 너무 허물없이 굴면 버릇이 없어지지 않겠냐"며 충고를 하였다. 이에 대해 월남 이상재는 "아니, 여보게,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그럼 청년더러 노인이 되라고 하겠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청년 노릇을 하는 걸세"라며 대답하였다고 한다. 

월남을 「민중의 영원한 반려」라는 짧은 한마디로 요약한 사학자 박유봉(朴有鳳)은 "그가 지금도 우리의 마음 속에 위대한 인물로 살아있는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가장 필요한 국민의 철학, 즉 희망과 자주성을 갖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지만 강직한 기상과 굳센 의지로 리더싶을 발휘하여 역사를 만들어 갔으며 항상 정열에 불타 나라를 사랑한 ‘만년 청년’으로서 청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정신을 심기 위해 노력한 청년운동가로서 인재를 기른 교육자였다. 특히 월남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무저항 비폭력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위대한 선각자요 시민운동의 등대로서 서정민 교수에 의하면 수구와 개혁, 좌와 우의 대립이 극심하던때 "양극화"를 극복하는 '화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는 것이다. 

전택부씨는 "조선 일보 내 좌우(사회주의 성향과 민족주의 성향) 양 세력의 싸움이 치열한 상황에서 선생은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는데 자기가 필요하다면 나서야지 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선생은 동업자(동아일보)와 경쟁하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의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사장직을 수락하였다"고 말한다. 

유저로는 논문집 ‘청년이여’를 비롯하여 ‘천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 ‘진평화’(眞平和), ‘청년회문답’ 등이 있다.
세브란스 교장을 지낸 아비슨은 그를 ‘조선의 거인,’이라 불렀고, 민중들은 ‘조선의 성자’로 추앙하였던 월남 이상재 선생이 '화합의 리더십'이 어느때보다도 필요한 이때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깝다.
(김상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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