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문화산책/2019년 11월 15일>*<이달의 시-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김종원>*<이야기 미국사29)-5분의 3 타협안(Three-Fifths Compromise)안>*<감사절 이야기-감사절에 찾아 온 천사-신디아 빌딕>* <이달의 시-11월이 전하는 말-반기룡>*<이야기 미국사(28)-미국독립전쟁의 성지 배리포지>*<김준자 작가의 영미문학 산책(13)-영국의 소설가 토마스 하디>

<이달의 시>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김 종 원

세상을 산다는 게 문득 외로워져

집을 나와 겨울거리를 걸어보니
차가운 바람에 한기를 느끼며
그 동안 나의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두터운 외투에게 고맙고,
외투가 없으면 춥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내 몸에게도 고맙다

사랑에 실패한 후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
이별에게도 고맙고,

쓰린 이별 덕분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머리 위에서
무너지지 않고 든든하게 서 있는
푸른 하늘에게도 고맙다

푸른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흐려져,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을 느끼며
인생을 산다는 건
행복하다가도, 문득 흐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알려준 하늘에게
다시 또 고맙고
그걸 느낄 수 있게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주신
하나님께도 감사한다

고맙다 고맙다
다 고맙다
이 세상은 고마운 것 투성이다.

(김종원·시인, 1949-)

<이야기 미국사>

5분의 3 타협안(Three-Fifths Compromise)

미 중서부 지역에서 거리를 지나다 보면 ‘피프스 써드 뱅크(Fifth Third Bank)’라는 간판을 보게된다. 오하이오 신시나티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 은행은 은행보유회사인 Fifth Third Bank Corp의? 자회사로 주로 미 중서부 지역에 지점들을 두고 업무를 보고 있다. ‘3/5 은행’이라고 하는 특이한 은행명칭의 유래를 알려면 미국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서 모였던 헌법의회에서 헌법 초안자들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합의점들을 찾아내기 위해 힘겨운 싸움들을 하고 있었다. 북부에서는 노예제도를 거부하고 있으며 많은 대표들이 노예제도를 도덕적인 악으로 간주하고 있음에도 노예제도는 남부경제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회의에 참석한 남부 대표들은 그들의 "특수한 상황"을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회 지도자들은 결국 노예제도를 둘러싼 분규로 의회가 파산나게 내버려 둘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의회가 치명적인 결정을 내리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들을 다음 세대의 몴으로 남겨놓기로 결정하였다. 즉 노예무역을 금지하기 보다는 많은 대표들이 바란대로 그들이 채택한 문서에는 의회가 노예무역을 위법으로 규정하되 그 법의 시행은 1808년 부터라는 단서 조항을 첨가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 대표들은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였다. 각 주들이 인구비례에 따라 새 의회에 참석할 대표의 숫자를 산정할 때 노예들을 인구로 계산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남부대표들이 노예들을 모두 대표로 계산하는데 찬성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영향으로 남부의 대표가 늘어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부의 대표들은 노예들은 시민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의회에서 그들의 대표를 포함할 수 있느냐?고 반대하였다.

열띤 논쟁끝에 대표들은 그 악명 높은 '5분의 3 타협안'이란 것을 통과시켰다. 타협안에 의하면 의회의 대표를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노예 한 명은 한 사람의 5분의 3으로 계수한다는 것이었다 . 바꾸어 말하자면 노예 1백만 명은 사람 6십 만명으로 계산한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이 타협안 덕분에 헌법제정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노예문제를 요령부득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서 건국선조들은 남북전쟁(1861-1865)의 씨를 심어놓았다. 또한 이 타협안은 남부 백인들에게 초기 미국의회에서 부당하게 노예문제에 대한 도전을 막아내는 데 너무 많은 힘을 행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눈에는 필라델피아의 대표들이 보여준 묵시적인 노예제도 수용은 결국 남부 노예제도에 대한 남부와의 음모라는 의심까지 갖게 하였다.

후에 죠오지 와싱톤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 대법관으로 임명된 펜실바니아 대표 제임스 윌슨(1742-1798)이 제안한 '5분의 3 타협안'은 의회대표는 그 주의 시민권자의 숫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제14 수정헌법 제정에 따라 무효가 되어버렸다.

 

감사절에 찾아온 천사
-신디아 빌릭(Cynthia Bilyk)-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린도 전서 9장 23절)

나에게 세상이 절망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내가 열 다섯살 때였다. 어머니가 또 다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무척 충격적이었다. 어머니는 수술을 받았고,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며 다행히 암을 이겨 냈다. 그런데 암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병마와의 싸움만을 걱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달랐다.

지난번 암치료에 든 경비때문에 이번 병치례는 어머니를 완전히 파산상태로 몰아넣었다.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 가정을 지키는 것은 오직 엄마의 몴이었다. 엄마는 책임져야 할 것들은 많았으나 날로 늘어나는 병원비를 치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일자리를 얻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 해 겨울은 무척 힘들었다. 우리는 전기료를 낼 수가 없어서 전기 없이 지내야 했다. 난방용으로는 작은 개스 스토브가 하나 있었다. 다행히 이웃 집에서 전깃줄을 연결하여 우리집으로 넘겨주는 바람에 램프 하나를 켤 수 있었다. 리빙룸의 개스스토브가 우리집의 유일한 난방시설이었다. 나는 리빙룸의 마루바닥에서 가능한한 개스 스토브에 가깝게 자리하여 잠을 잤는데 불이 붙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했다. 엄마는 그녀의 추운 침실에서 가능한한 많은 담요들을 겹겹이 덮고 잤다.

매일 낮, 매일 밤 엄마는 기도하였으며 때로는 나더러 같이 기도하자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하나님께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에 대해 감사하였으며 하나님께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녀는 결코 한탄하거나, 화를 내거나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님은 우리가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지켜주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신뢰가 없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시고 위대하시다면 우리가 왜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가? 왜 우리 엄마는 지금도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아파도 주일이면 꼭 걸어서라도 교회에 나가는데 왜 암에 걸리는가? 때때로 나는 기도하기가 힘들었다. 하나님에게 화가 났다.
나는 세계를 향해서도 화가 났다. 도대체 삶이 불공평했다.

추수감사절 날이었다. 먹을 것이 있나해서 벽장을 뒤져 보았으나 먹을 것이 신통찮았다. 나는 음식이 든 깡통이라고 하나 있나 해서 벽장 문을 꽝꽝 닫으면서 찾아 보았으나 먹을 것은 없고 화만 더욱 났다. 꽝꽝거리는 소리에 엄마가 잠을 깼는지 담요로 몸을 감싼 채 부얶으로 나왔다. 그녀는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보면서 "왜 그러니, 애야?"하셨다.

나는 퉁명스럽게 "배가 고프단 말이야. 그게 문제야"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에게 화낸 것이 아니다. 나는 우리의 처지에 화가 났다. 나는 못된 아이같이 행동했다. 그렇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을 벌려 나를 감싸 않으면서 "이리 와, 같이 기도하자"고 하였다.

"그래 봤자 아무 효과 없어요"라면서 나는 눈을 크게 굴렸다. 나는 내 말이 엄마를 아프게 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나를 쳐다 보셨다. 그녀의 눈 속에 가득한 슬픔이 나를 슬프게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단다. 만약 네가 네 눈을 열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수많은 축복을 해주신 것을 볼 수 있을거야. 우리를 돕고 계신거야. 물론 지금 우리은 어렵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공급해 주실거야.너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거야."

"그래요, 그렇군요" 나는 엄마에게 향해 "하나님이 그렇게 좋은분이라면 왜 우리는 굶어야 하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좋으신 분인데 왜 우리는 이 집에서 얼어죽어야 하지요? "하고 소리질렀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괴로운 그 표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감정을 발산하는 것이 몹시 싫었지만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거기에서 그칠 수가 없었다. 나는 천정을 향해 "하나님, 만일 당신이 그렇에 능력이 있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왜 먹을 것 좀 보내주시지요. 사실, 추수감사절인데 통통한 터키 한마리도 안 보내주십니까? 우리는 당신 보시기에 감사절 음식을 받을만큼 착하지 못하다는 겁니까?"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테이블을 내려다 보면서 "과연 감사절 식탁은 보이지 않는군요.엄마는 보이나요?"라며 건방지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그 자리에 서 계셨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이 아침에 내가 한 행동들과 말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하나님과 나의 상황에 분노를 느껴 이러한 집의 분위기에서 도망하기 위해 재빨리 밖으로 걸어나갔다. 나는 문을 열려고 확 잡아당기다 손에 상자들을 잔득 들고 있는 푸른셔츠의 다부진 남자와 거의 부딪칠뻔 했다.

"오, 제때 왔군요" 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에게 '행복한 감사절이 되셔요" 젊은이는 유쾌하게 인사하면서 상자들을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여기 있는 이 큰 박스에는 터키가 있구요 물론 구운거지요, 그리고 이것은 감자, 이것은 그레이비 그리고 이것은 호박파이이고 이것은 피칸 파이지요. . ."

갑자기 내귀가 멍멍해 지는듯 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들을 하나도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터키와 스터핑 그리고 모든 음식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음식 박스들이 쌓여있는 작은 식탁을 볼 수 있었다. "자 이제 훌륭한 감사절 식탁이 준비되었군요 마님, 이제 여기다가 잘 받으셨다는 사인만 해주시면 됩니다"라고 그 청년은
말하면서 펜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종이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동안 그 배달원은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본 사람들 가운데 가장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엄마로부터 펜을 받은 뒤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내 옆을 지나면서 내 어개를 살짝 치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도 축복하시기를?"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가 우리집에서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말 한마디 못하고 거기 서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그가 누구지?하고 생각하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가 누구였을까? 누가 감사절 만찬을 보냈을까? 알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포치로 뛰어나가 계단을 내려갔으나 미끄러지고 말았다. 계단에 서리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세멘트 인도 끝에 있는 출입문으로 뛰어가 문을 열고 차도를 내다 보았으나 차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들어오는데 아침 햇살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우리 인도에는 오직 한 쌍의 발자국만이 서리위에 나 있었다. 자세히 살펴 보았으나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감사절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나의 분노를 식히기 위해 보내셨던 그 천사를. 나는 그 사람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때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실만큼 자상하시고 어린 소녀의 마음에 믿음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의 천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Chicken Soup for the Soul(A Book of Miracles)애서

<이달의 시>

11월이 전하는 말

반 기 룡

한 사람이 서 있네
그 옆에 한 사람이 다가서네
이윽고 11이 되네
서로가 기댈 수 있고 의탁이 되네
직립의 뿌리를 깊게 내린 채
나란히 나란히 걸어가시네

북풍한설이 몰아쳐도
꿈쩍하지 않을 곧은 보행을 하고 싶네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만나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올곧은 모습으로
어기여차 어기여차
장단에 맞춰 풍악에 맞춰
사뿐히 사뿐히 걸어가시네

삭풍이 후려쳐도
평형감각 잃지 않을
온전한 11자로 자리매김하고 싶네

(반기룡·시인)-반기룡 시인은 시낭송가, 수필가, 아동문학가, 가수이며 또한 전자공학을 전공한 IT회사 회사원이기도 하다. 시인의 시는 작위적이지 않으며 진솔한 본연의 목소리를 가감없이 위트와 유머을 섞어 흐르는 물 같은 자유로운 생각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야기 미국사 29>

미국 독립전쟁의 성지 배리 포지(Valley Forge)

배리 포지는 미국 독립 전쟁 중인 1777년에서 1778년 사이에 혁명군이 동계에 주둔한 곳으로 필라델피아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하고 있다.

1777년 12월, 죠오지 와싱톤(George Washington, 1732-1799) 의 지친 군대는 펜실바니아 주의 작은 마을 배리 포지에 도착하였다. 영국군들이 근처 필라델피아를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와싱톤 장군은 이미 눈이 6인치나 덮여있는 이 동네를 미 혁명군이 겨울을 지낼 야영지로 선정하였다. 배리 포지에서의 겨울나기는 악몽이었다. 와싱톤과 그의 군대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기간이었다. 영국군들이 필라델피아에서 따뜻하게 지내는 동안 미국군대들은 약 1만 명 가운데 2000여명이 추위과 질병과 굶주림으로 눈덮힌 배리 포지에서 죽어갔다.

도마스 페인(1737-1809)의 말을 빌리면 배리 포지의 기간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기간이었다.” 장티브스 열병과 폐염이 진중에 퍼졌다. 담요와 의복과 심지어 신발까지도 부족했다. 많은 병사들은 앉아서 죽음과 병을 기다리느니 탈영해 버렸다. 그래서 탈영은 와싱톤 군대의 공통된 고질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배리 포지에서 살아 남은 군인들은 1778년 가장 단련된 전투병력으로새롭게 태어났다. 프리드리히 본 스튜벤(1730-1794)이라는 프러시아 장교가 배리 포지 군대에 합류하여 와싱톤의 군사훈련을 돕게되었다. 눈이 녹으면서 스튜벤은 군인들을 훈련하기 시작하여 보다 전문적인 군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군인들은 1778년까지 배리 포지에 주둔해 있었는데 필라델피아에 있는 영국군 사령관이 그의 군대를 뉴욕으로 옮기는 결정을 하였다. 와싱톤 군대는 중부뉴저지에 있는 몬마우스 전투에서 영국군 주류를 공격하였다. 물론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전투결과는 스튜벤의 훈련이 군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최고의 영국군대에 맞서서 와싱톤 군대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였던 것이다.

배리 포지에서 보낸 몇 달 동안은 와싱톤 군대에게는 최악의 악몽과 같은 기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메리카의 영국군대를 쫒아버릴 수 있었던 정예군대를 단련한 귀한 기간이었다.

여기에 참가했던 군인들 가운데는 알렉산더 하밀톤(1755-1804), 아론 벌(1756-1836) 같은 후에 미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인사들이 들어있었을 뿐 아니라 배리 포지의 와싱톤 군대는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로 해방된 노예들과 오네이다 인디언 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와싱톤 사령관은 연방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이 군인으로 입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던 것이다.



<김준자 작가의 영미문학산책 >

김준자 작가의 열 세번째 글

영국의 소설가 토머스 하디 Thomas Hardy

토머스 하디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석공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 주셨다. 가족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동네 우물가에는 부모님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잡담과 소문을 즐기는 환경에서 자란 하디는 좀 더 커서는 매일 걸어서 학교와 도체스터 교외를 오가며 근처지대의 숲과 황야와 강, 그리고 농장을 답사하고 다른 동네에 사는 친척을 방문한다. 

십대부터 20세 초반까지는 건축사의 실습생으로 집, 교회, 묘지를 돌아보며 폭넓은 여행을 했다. 22살부터 하디는 런던에 있는 킹스 칼리지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한때 미술 평론가가 되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그만두고 시 짓기에 몰두 하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때 런던에 있는 아서 블름필드 건축 사무실의 도안 공으로 일하면서 찰스 스윈번 (Charles Swinburne)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찰스다윈(Charles Darwin)의 영향을 많이 받고 혼자 시 쓰기와 글쓰기 공부를 열심히 했다.

27살에 그의 첫 소설 <Poor Man and the Lady >(1867-68)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지만 거절당했고 두 번째 책 < Desperate Remedies>가 31살 때 출판되었다. 32살 때 그의 3번째 소설 <푸른 나무 아래에서Under the Greenwood Tree (1872)> 출판 이후 하디는 작가로서의 자리를 잡았다. 교회 재건축 일을 하면서 만난 에마(Emma Lavinia Gifford)가 하디에게 글쓰기를 격려하여 글쓰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1874년, 그가 34세 때, 두 사람은 결혼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들은 영국 남부의 웨섹스 지역을 배경으로 농촌 풍경을 그렸고 그가 쉽게 접할 수 있었던 농촌 사람들의 미신이나 풍습이 그의 소설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래서 지방색이 강하지만 결코 지역 소설에 머물지 않고 그의 소설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인간의 가치들과 당대의 핵심적 문제들을 제시하는 데 특출한 작가적 역량을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디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애버딘 대학교, 브리스틀 대학교 등에서도 명예 학위를 받았다. 자신의 저택 맥스게이트(Max Gate)에서 많은 유명 인사들을 접견하던 중 1925년에는 왕세자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1914에 부인 에마Emma가 죽고 Emily Dugdale와 새로 결혼했다. 1928년 1월 11일 세상을 떠난 하디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Poet's Corner, 에 안장되었으나 고향에 묻히고 싶어 했던 하디의 심장은 첫 부인 무덤 옆에 묻혔고 그의 둘째부인은 남편 옆에 안장되었다.

웨섹스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그의 대표작들 중에 특볆히 <귀향> 과 <테스> 가 유명하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