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문화산책/2020년 9월 15일>*<이달의 시-희망의 아침-박윤수 시인>*<이야기 미국사(34)-미 대륙횡단철도>*<미국음악 산책-미국민속음악을 유행시킨 우디 거스리>*<이달의 시-9월-목필균>*< 이야기 미국사(33)-백인우월주의집단 큐 클럭스 클랜(KKK)>*<김준자 작가의 영미문학산책-버지니아 울프(1882-1941년)의'등대로'>

<이달의 시>

희망의 아침
박 윤 수 시인

눈을 비비며 창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열리는 빛이 쏠린다
오늘도 희망 이 가득 찬 하루를
예고한다

희망찬 하루가 시작한다
지난 밤의 악몽을
다 지워버리고
밝은 마음으로

무한한 기쁨도 가져다 주는
희망 때문에
오늘도 힘껏
살아 야지

이웃과 같이 손잡고
지난 허물을 묻어 버리고
용서하며
희망의 기쁨을 나눠야 지요

*캘리포니아 주 실비치에 거주하며 해외문인협회」(미국)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 윤수시인은 『해외문학』 신인상과 『창조문학』 신인상을 수상했고, 그의 대표작 ‘보슬비'‘맨해튼의 별들''소나기’등 3편이 제21회 해외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물리학 박사요 교회의 장로인 박윤수님은 본지(늘푸른나무 .webegt.com)에 <어느 과학도의 신앙고백>을 연재하고 있다.

<이야기 미국사 33>

미 대륙횡단철도

록키산맥을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된 것은 1869년으로 이로 인해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 화물과 인력의 수송비가 엄청나게 감소한 것은 물론 서부에 대대적인 백인 정착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록키산맥을 넘는다는 것은 미국역사상 가장 힘든 토목사업의 하나로 수 백개의 다리와 굴들을 만들고 수 천 마일의 철로를 까는 험란한 작업이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폭파작업과 산사태, 그리고 철로배설시의 충돌 등으로 죽었다. 그래서 대륙횡단철도를 미국역사상 가장 중요한 산업계의 이정표라고 한다.

19세기 초 철로가 처음 발명된 이래 미국사람들은 태평양까지 가는 철로를 꿈꾸어 왔다. 1845년 처음으로 대륙횡단철도 계획안이 처음 의회에 제출되었다.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나라가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때라 이 계획은 논의도 되지 못한채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남북전쟁 때(1861-1865) 아브라함 대통령은(1809-1865) 대륙횡단철도부설을 국가의 제1 과제로 밀어부쳤다. 1862년에 의회는 Central Pacific 과 Union Pacific이 이 로선을 건설하도록 인가하였으며 이 두 회사에 막대한 현금상여제도를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두 건설회사가 동과 서에서 각기 출발하여 만나는 지점에서 그들이 공사한 철도의 길이에 따라 상금과 주변의 토지를 배당하는 것으로 두 회사의 경쟁을 유발하여 완공을 촉진하는 이점도 있었다.

대륙횡단철도 부설은 처음부터 철도가 빨리 부설되기를 원하는 연방정부와 어떻게든 많은 이익을 끌어내려는 회사간의 쉽지 않은 공동작업이였다. 철도회사들은 제작원가를 가급적 싸게 들여서 이윤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들의 안전보다는 확실치 않은 위험한 관행들을 마다하고 졸속공사를 하였으며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재정적인 속임수를 예사로 하였다. 그 결과 철도부설공사가 끝나고 1870년대에 와서 ‘The Credit Mobilier 스캔들’이라는 것이 터져 유니온 퍼시픽이 어떻게 연방정부를 속였으며 유력한 정치인들을 매수하였는지가 생생하게 폭로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륙을 횡단하려는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취되었으며 그것은 한 세대전 Erie Canal의 완성을 훨씬 능가하는 업적이었다.1869년 5월 10일 두 회사의 기차가 유타 주의 Promontory Point에서 만나 연결되면서 개통의 축제는 절정에 이르렀다. 뉴욕에서 샌프랜시시코까지 횡단 시간이 반 년에서 한 주 정도로 단축되면서 두 해안 사이의 무역은 폭발적으로 증대되었다. 1880년까지에 수 백만 달라어치의 물동량이 운반되었고 수 천명의 백인 이민자들이 서부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위험한 일들을 맡아서 한 중국노동자들

기억해야 할 일은 대륙횡단철도 부설에서 특히 서쪽지역의 공사를 맡았던 ‘센츠랄 패시픽 회사측의 노동력이 대부분 중국인들에 의해 공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제대로 된 장비가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대부분 개인들의 노동력에 의존해야 했던 철도부설 공사를 일화천금을 꿈꾸며 몰려온 백인이민자들이 외면하자, 황금노다지를 미끼로 중국노동자들을 직접 끌어왔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철도노동뿐이었다. 내몰리다시피 철도부설공사에 투입된 이들은 쿨리(coolie)란 이름으로 온갖 위험하고 힘든 일들을 하면서 미국대륙횡단부설에 일등 공신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인 미국이민의 터를 닦았다.

센트랄 패시픽에서는 철도공사를 하면서 1864년 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위험한 폭발물 nitroglycerin을 사용하여 많은 비난을 받고 사상자도 많이 나왔다. 

자동차 산업의 발달과 함께 그동안 최초의 횡단철도들이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도 암트랙을 이용하면 동서횡단여행을 즐길 수 있다.

<미국음악 산책>

미국민속음악을 유행시킨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우디 거스리(1912-1967)는 1930년대와 40년대 미국민속음악을 유행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병으로 오래 활동하지는 못했지만 거스리는 1천 여편의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그의 메마른듯 하면서도 쉰 목소리와 화가 난듯 항의하는 가사들, 사회적인 불의를 매도하면서 1960년 뉴져지 병원에서 희귀병인 유전적인 두뇌병을 치료받던 거스리를 방문했던 밥 딜란을 비롯하여 젊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오크라호마에서 태어났던 우드로우 윌슨 거스리는 1930년 중엽에 칸츄리와 서부의 민속노래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경제공황기에 몇 년동안 허송세월한 후 그가 부른 분노섞인 차압이나,부채, 병고 에 대한 노래들은 흙바람이 날리는 곳의 절망적인 가난을 반영하고 있다. 거스리의 유명한 “아름다운 소년 프로이드의 노래”를 예로 들면 그는 은행을, 많은 농장들을 차압하는 은행을 아름다운 노년 프로이드로 비교하며 빈정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권총으로 당신을 약탈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은 펜으로 약탈하지”

1930년대에 거스리의 노래들은 보다 분명하게 정치색을 띠면서 더욱 좌파로 기울었다. 1940년에 뉴욕으로 이사한 거스리는 그곳에서 그의 노래들이 제공하는 미국인들의 권위를 갈망하는 지성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 해에 그는 그의 가장 잘 알려진”This Land is Your Land”란 노래를 썼으며 그의 자서전 <Bound for Glory>가 1943년에 출판하였다.

1950년대에 거스리의 건강이 이상하게 악화되어 결국 불치의 신경병인, 헌팅톤의 코레라란 진단을 받았다. 그는 1965년부터 마지막 15년 동안을 비참하게도 대화도 못하고 병상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그의 명성은 더 높아만 갔다. 1960년대의 민속노래의 붐과 함께 딜란 등이 이끄는 새로운 가수들이 거스리의 노래들을 새로운 세대에게서 부활시킨 것이다.

거스리가 죽은 후 그의 부인 매죠리는 헌팅톤의 코레라를 연구하는 재단을 만들었으나 아직까지도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의 자서전 <Bound for Glory>가 1976년에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달의 시>

9 월-목 필 균
  
태풍이 쓸고 간 산야에
무너지게 신열이 오른다

모래알로 씹히는 바람을 맞으며
쓴 알약 같은 햇살을 삼킨다

그래, 이래야 계절이 바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이 가는데
온몸 열꽃 피는 몸살기가 없을까

날마다
짧아지는 해 따라
바삭바삭 하루가 말라간다

(목필균·시인)

<이야기 미국사 33>

백인우월주의집단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로 잘 알려진 쿠 클럭스 클랜은 미국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증오그릎의 하나로 1865년 남군 출신들에 의해 테네시 주에서 생겨났다. 그 후 거의 한 세기동안 클랜은 수 천번 이상 흑인들과 이민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1960년대부터 클랜은 줄어들었지만 ADL(Anti-Defamation League)에 의하면 오늘날도 비주류극단주의 그릎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남북전쟁(1861-1865) 직후 클랜의 주요목표는 그들의 시민권리를 주장하는 흑인들에게 겁을 주는 것이었다. 클랜은 또한 전후 재건을 위해 흑인들과 협력하는 백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초기 클랜의 처형대상에는 스카라왜그라고 알려진 북측 정부에 협조적이던 남부의 백인 정치꾼들이 들어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흑인들을 상대로한 폭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클랜들은 그들의 정치권을 행사하여 투표에 참가하려는 노예 출신들을 겁주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얀 복면을 뒤집어 쓴 클랜의 “야간 복면 기마단”은 흑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거나 채찍질로 테러를 가하면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을 “현재 그대로의 위치”에 묶어두려고 하였다.

클랜의 폭력이 너무 만연하여서 유리시스 그랜트(1822-1885) 대통령은 1871년 군대에 클란들을 추적하고 연방정부에 그들을 기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쿠 크루스 클랜법으로 알려진 특별법을 제정하여 공표하였다. 이 법의 제정으로 1870년에 와서 클란들의 활동이 급격하게 감소되었다.

그러나 조직 자체는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전후 재건운동이래 지역에 따라서는 다시 살아나는 조짐마저도 보였다. 가장 큰 재기의 조짐이 1915년 그리피스가 감독한 무성영화<The Birth of a Nation>에서 클란을 회복운동에 저항하는 영웅으로 묘사함으로 나타났다. 이 영화는 클랜에 새로운 생기를 부어주는 도구가 되었다. 1910년과 1920년대에 이 그릎은 수 백건의 린치 사건을 조직하고 행사하였다.

클랜은 1950년대 민권운동기간에 다시 나타났으며 그 멤버들은 가장 잔인하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들이 자행한 잔혹행위 가운데는 흑인 십대 Emmett Till 살해사건과 1963년 4명의 흑인소녀가 죽은 버밍햄의 16가 침례교회 폭발사건이 있다. ADL에 의하면 최근에도 남부와 북부에서 클랜들이 반 이민, 반 동성애 조직으로 활동한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쿠 크룻스 클랜의 위세는 대단하였다. 초창기 이들 클랜들은 특히 사우스 캐로라이나에서 강력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 그랜트 대통령은 주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을 미국의 권위에 저항하는 폭도로 규정하였으며 후에 대통령이 된 트루만은 한때 클랜 회원이 되었다가 캐톨릭 고용인을 해고하라는 KKK의 지시를 받고 그에 저항하여 탈퇴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1991년 클랜의 지도자 데이빗 듀크가 루이지아나 지사선거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하기도 하였다.

금년 여름 특별히 미국전역을 강력하게 휩쓸고 있는 반인종차별 캠페인의 배후에는 이와같은 무자비하고 뿌리 깊은 백인극단주의자들의 백인우월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김준자 작가의 영미문학산책 >

김준자 작가의 스물 세 번째 글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

스코틀랜드 북서쪽 해안에 있는 램지 가정에 여러 손님들이 램지네 별장을 방문한다. 램지 박사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철학교수이다. 그날 방문한 사람 중에 Mr.탄슬리는 8 아이의 어머니인 55살의 교수댁 사모님에게 사랑을 느끼는 것 같다. 화가인 릴리 브리스코는 제임스를 앞에 앉히고 그림을 그리고 아이들은 흰 수염에 노란수염이 섞여 있는 카미카엘 시인을 좋아한다. 젊은 Mr.뱅커는 교수네 아이들 중 제일 예쁜 푸르를 좋아한다.

Mrs 램지는 그의 7살짜리 아들, 제임스에게 내일 날씨가 좋으면 별장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등대에 가보기로 약속한다. 제임스는 그의 여덟 아이들 중 막내로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다. 제임스는 이상한 말투 때문에 아버지를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

그날 오후에 Mrs. 램지는 동네 아픈 여인을 방문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등대지기네 아이들에게 줄 양말을 짠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녀의 바쁜 일정을 보면서 어떻게 부자도 아니고 시간 여유가 많지 않은 사람이 남을 돕는 일에 열중하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다.

점심 후에 카미 카엘 시인은 책을 읽는 것 같았지만 실은 졸고 있다. 제임스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잡지에서 그림을 잘라 크리켓 게임을 하느라 바쁘고 Mr.램지와 Mr. 탄슬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Miss 브리스코는 캔버스에 서투른 그림을 그리고 푸루와 Mr. 뱅커는 해변 가로 산보를 나간다. 램지 부인은 딸 푸루가 Mr. 뱅크와 사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가 끝나는 대로 아이들은 바로 침실로 간다. Mrs 램지는 아이들 방에 올라가서 그들이 벌려 놓은 것들을 정리하고 내려와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남편과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침실로 가기 전에 내일 폭풍이 심하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등대에 가는 것을 취소하기로 한다.

그해 여름이 지나도록 이들은 등대를 가지 못했고 그 이후 10년이 지나도록 램지 가족은 여름 별장에 가지 못했다. 그동안 일차 대전도 있었고, Mrs 램지가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딸 푸루는 Mr.뱅크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세월이 흘러 집안 벽지는 떨어지고 부엌의 컵들도 집안일을 돕는 가정부가 떨어뜨려 많이 깨졌다. 정원에 있는 꽃들도 제대로 가꾸지 않아 엉망이다. 가정부인 Mrs. 맥납은 주인으로부터 집 정리를 하라는 전보를 받고 두 사람의 청소부를 고용하여 며칠 동안 집안을 깨끗이 치운다. 오랜만에 램지 가족이 정돈된 시골집에 도착한다. 예전에 왔던 방문객들 중에 화가, 릴리와 시인 Mr. 카미 카엘도 다시 나타난다.

다음날 아침 화가 릴리가 아침을 먹으로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이미 Mr. 램지와 제임스와 카밀라 세 사람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닷가로 걸어 나가는 것이 보인다. 릴리 브리스코 는 시골집을 그리기 위해 다시 캔버스를 편다.

이제 아이들에게는 등대가 있는 섬으로 가는 것이 별로 재미있지 않다. 어머니 없이 무뚝뚝한 아버지는 그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아이들은 작은 일로 서로 다툰다.

Mr. 램지는 등대지기와 그 집 아이들에게 줄 50파운드의 물건들을 가지고 큰 걸음으로 걸어가 배에 싣고 돛을 달고 모두 배에 오른다. 배 가운데에 Mr. 램지가 앉고 늙은 어부와 그의 아이들도 따라 앉는다. 배가 뒤집힐 경우를 생각해서 램지씨는 실력이 좋은 제임스에게 노를 맡기고 제임스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힘차게 등대를 향해 저어간다. 아버지는 편안히 책을 꺼내 읽는다. 몇 시간 후에 아무런 문제없이 등대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아이처럼 배에서 뛰어 내려 아이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훌륭하게 배를 저어온 제임스의 어깨에 그의 큼지막한 손을 얹는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 북서쪽 해안에 있는 램지 가정의 별장에서 10년 이라는 긴 세월에 걸친 지기지우(知己之友)들의 이야기이다. 1부는 램지 교수댁 별장에 모인 램지부부와 손님들을 묘사한다. 그 이후 10년 동안 램지 부인과 제임스의 형이 죽는다. 누이도 죽는다. 전쟁은 끝이 난다. 3부는 남은 사람들 중에 화가 릴리 브리스코는 죽은 램지 부인의 초상화를 끝내고, Mr.램지와 그의 막내아들 제임스와 딸이 소설 처음에 계획 했던 등대에 도착 한다.

*김 작가는 연세대학교와 일리노이 주립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피츠버그대학, 3M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인디아나 퍼듀대학의 강사를 역임했습니다. 현재 캘리포니아주의 실비치에 거주하면서 YTN 방송과 신문 등에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새 영화 소개>

‘김일성의 아이들’북한 전쟁고아들의 감동적인 삶의 기록

로마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작품상 수상

김덕영 감독의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이 로마국제영화제(Rome International Movie Awards)에서 2020년 7월 최우수 다큐멘터리 작품상(Best Documentary Feature)을 수상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전쟁으로 남과 북에서 10만 명의 전쟁고아들이 발생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할 능력조차 없던 시절, 남과 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고아 문제를 처리하게 된다. 남한의 전쟁고아들이 ‘해외 입양’이라는 방식을 통해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한 반면 , 북한의 전쟁고아들은 동유럽 여러 나라에 분산 수용되는 방식이었다. 이름하여 현지 ‘위탁 교육’이었다. 그 결과 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낯선 곳들에서 5천 명에서 1만 명에 달하는 북한 전쟁고아들이 10년 동안 생활을 했다. '김일성의 아이들'은 그동안 그들의 숨겨져 있던 삶에 대한 기록으로 전쟁 속에 꽃피는 애잔한 사랑이야기이기도 하다.

북한 아이들이 갖고 있던 전쟁의 공포와 부모를 잃어버린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절실했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배경이 북에서 온 아이들과 그들을 돌봐주었던 당시 동유럽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간적인 교감이 생겨났다.

북한 아이들의 존재는 모든 나라에서 철저하게 비밀로 부쳐져야 했다. 그러기 위해 현지에 채용된 동유럽 교사들 역시 나이 어린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사를 선발했고, 심지어 2차 대전으로 부모를 잃어버린 경우도 많았다. 자연히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 대한 교사들의 애틋함이 클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 출발은 냉전과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소련 공산당의 주도로 이뤄진 사회주의 연대와 이데올로기의 선전이 목적이었지만 그들은 서로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상황 속에서도 순수한 인간애 하나로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정체성 교육을 위해서 북한에서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파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외부와 차단된 지역에 아이들의 주거 시설이 만들어졌다는 점. 그만큼 당시 동유럽 각국이 매우 민감하게 이 사안을 처리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유럽 각국으로서는 부담이 되는 사업이었다.

-북한 전쟁고아 탈출 사건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 권력을 넘겨받은 소련의 후루시쵸프는 스탈린식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했다. 이런 변화 속에 1956년 10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자유화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자유화 물결은 폴란드, 체코 등으로 번져나갔다.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유럽의 생활과 문화에 익숙해진 아이들에게도 뭔가 심상치 않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1956년 6월 동유럽을 방문했던 김일성 역시 유럽에 머물던 북한 아이들의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게다가 북한 내부에서 반김일성 쿠데타까지 일어나면서 김일성은 북한 전쟁고아들의 전원 송환을 결정하게 된다.

그 결과 북한 아이들이 머물던 기숙사에서 탈출 사건이 발생한다. 이런 사례는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등지에서 주로 일어났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1957년 5월 폴란드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북한 대사관은 북한 학생 2명이 기차를 타고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국경 검문소에서 적발되었다는 내용의 전문을 받았다..

루마니아에서는 남자 아이 하나가 루마니아 가정으로 입양될 예정이었다. 당의 허락 하에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서 입양이 이뤄지지 않자, 결국 아이는 루마니아 시레트 조선인민학교를 탈출했다. 그날은 루마니아에 머물던 아이들이 전원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으로 송환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숲으로 도망 친 아이는 결국 북한 아이들에 의해서 산속에서 붙잡히고 현장에서 집단 린치를 당했다. 아이는 그날 다른 북한 아이들과 함께 북송 열차에 올랐지만 다리를 심하게 다쳐 불구자가 되었다.

김덕영 감독은 지난 2019년 3월 불가리아에서 7명의 생존자들를 취재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1950년대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친하게 지냈던 북한 아이들의 이름까지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마치 보물처럼 사진을 간직하고 옛 추억을 잊지 않으려 했다.

그들과 인터뷰를 마치면서 혹시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 이 영화를 보게 될지도 모를 북한에 있는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겨달라고 했다. 그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휴머니즘과 사랑이 숨겨져 있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