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문화산책/2020년 6월 1일>*<이달의 시-말의 힘-황인숙>*<이야기 미국사(35)-로스앤젤스 이야기>*<김준자 작가의 영미문학산책(20)-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이달의 시-공포의 아침-박윤수>*<이야기 미국사(34)-시카고 이야기>*<미국음악의 발자취-록앤 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

<이달의 시>

말의 -황인숙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 보자. 맞아보자. 터트려보자!


*이문재의 한마디- 책의 시대는 갔다고, 활자의 영향력이 형편없어졌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시기 바란다. 단어들이 즉각 즉각 어떤 이미지를 불러오지 않는가. 머릿속에서 느낌표들이 비눗방울처럼 터지지 않는가.
이 시를 읽고도 문자의 시대는 갔다고, 말에는 힘이 없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아침마다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아니, 크게 소리쳐 보자. (
이문재 엮음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 없다>(이레)에서)


*황인숙(1958년 ~ )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지성사, 1988) > 을 위시해 여러 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이야기 미국사 35>

로스앤젤스 이야기

로스앤젤스는 1781년 스페인의 캘리포니아 주지사(당시 캘리포니아는 미국영토가 아니라 스페인 영토였다)의 격려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북부 멕시코로부터 미리 선정된 지역으로 먼 거리를 찾아온 수십명의 스페인사람들과, 인디언, 흑인 그리고 혼합된 여러 인종의 정착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El Pueblo de Nuestra Senora la Reina de los Angeles로 “천사들의 여왕이신 우리 성모의 도시”이다.

1850년 멕시코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 패한 후 (184-1858)1850년에 미국의 도시로 설립된 로스앤젤슨는 19세기 후반까지는 비교적 작은 도시였었다. 그런 도시에 철로가 들어오고, 영화산업이 터를 잡으면서 국방산업이 번성하는 한편 그 지역에서 유전이 발견되면서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로스앤젤스는 요약해서 L.A.라는 별명으로 부르는데 미국의 도시들 가운데 인구로는 뉴욕 다음으로 두 번째 도시로 꼽히며 메트로포리탄 인구들을 합치면 1천 3백여만에 이른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로스앤젤스는 초기단계에서는 폭력이 난무했던 도시로 가장 유명했었다. 전설적인 이야기지만 1848년 캘리포니아 금광러시가 한창이던 혼란기에는 이 도시에서 “매일 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도시가 설립된 이래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도시의 성격상 인종간의 긴장은 항상 사고의 불씨였다. 로스앤젤스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사건의 하나는 1871년 한 백인이 사고로 죽은데 대한 보복으로 흥분한 백인들이 차이나타운에서 중국인 19명을 무차별 사살한사건이다.

1876년 로스앤젤스와 샌프랜시스코를 연결하는 철로가 완성되면서 새로운 이민자들이로스앤젤스로 몰려들었고 도시의 서부적인 와일드한 분위기들이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1892년 이 지역에서의 오일발견은 차원 높은 번영을 가져왔고 수 천명의 새로운 주민들을 끌어들였다. 1900년에는 인구가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이 지역의 풍광과 기후에 매력을 느낀 영화산업이 1910년대에 L.A.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뒤를 이어 수많은 관광객들이 밀려들었으며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해 버리는 등 도시는 날로 확장되어 갔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은 많은 비행기 제조회사들이 남부 캘리포니아에 공장들을 설립하면서 로스앤젤스에 또 다른 성장의 붐을 가져왔다.

로스앤젤스는 흑인과 아시안 그리고 라티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종적으로 가장 혼합된 도시가 되었다. 그런만큼 인종간의 충돌도 적지 않았다. 1965년 백인경찰과 흑인 사이의 인종적인 충돌로 수십명이 죽었으며 1992년에는 흑인을 살해한 백인의 무죄선고에 항의하는 폭동으로 L.A.의 코리아타운이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80년과 1990년 센서스에서 로스앤젤스의 인구가 시카고를 앞질렀으며 그 기록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한인인구수는 로스앤젤스가 단연 뉴욕을 능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준자 작가의 영미문학산책 >

김준자 작가의 스무 번째 글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어느 날.화가 바실이 그의 런던 화실에서 잘생긴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화에 마지막 붓질을 하고 있다.때 마침 그의 친구 헨리경이 방문하여 초상화를 무심히 바라본다. 바실은 그에게 이 초상화가 자기가 생각하는 젊음의 이상형이라고 설명 한다. 그리고 앞으로 도리언을 만나지 않으면 좋겠는데 이유는 그가 젊은 도리언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까 걱정이 되어서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도리언이 화실에 들어온다. 화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헨리경은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도리언에게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한다. 화가가 초상화에 마지막 사인을 하자 헨리경이 그 초상화를 사고 싶다고 한다. 화가는 도리언 에게 헌정 할 초상화라고 한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초상화를 보던 도리언은 좀 더 늙고 주름이 있어야 하는데 전과 똑 같다고 말하면서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초상화는 세월이 흐르는 대로 늙어가지만 자신은 영원히 젊고 싶다면서 초상화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나는 언제나 젊은 모습이고 이 그림이 대신 나의 나이를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바람대로 도리언은 악행을 저지르고 타락을 해도 그의 얼굴만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지만 대신 초상화의 얼굴은 늙고 흉해지기 시작한다.

그 이후, 도리안과 헨리경은 가까운 친구가 된다. 헨리는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정력적인 삶을 살아온 젊은이에 대한 책을 도리안에게 선물하고 도리언은 그 책의 패턴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다.

첫 번째 수업은 사랑에 대한 수업이다. 그는 삼류극장에 가서 줄리엣 역을 맡은 여배우 시빌 베인을 만나 그녀의 진지함과 매력에 반한다. 그리고 그녀를 이런 싸구려 극단에 둘 것이 아니라 온 세계를 뒤흔들 배우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면서 헨리경을 극장에 초대하여 그녀의 연기를 보게 한다.

그날따라 시빌은 생기 없는 연기로 관객들을 실망시킨다. 연극이 끝나자 도리언은 무대 뒤 분장실로 가서 그녀에 대한 실망을 말한다. 그녀는 도리언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도리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 몰라 연기를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 말을 들은 도리언은 이제 그녀가 그의 사랑을 죽였으니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겠다는 잔인한 말을 하고 쌀쌀하게 떠난다.

집에 돌아온 도리언은 화가가 준 그의 초상화의 모습이 달라 진 것을 보게 된다. 입 근처에 희미하게 잔인한 선이 새로 생기고 그의 나이가 나타나 보인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기 얼굴에는 주름도 없고 그가 원하는 젊은 모습 그대로이다. 기분이 언짢아 진 도리언은 앞으로 헨리경을 만나지 않을 것과 시빌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헨리경이 도리언을 찾아 와 시빌 베인이 전날 저녁, 분장실에서 자살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실망한 도리안은 이제 그에게 남은 선택은 기쁨과 흥분된 삶을 사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날 밤에 헨리경과 함께 오페라에 가서 마음껏 즐긴다.

얼마 후, 화가가 도리언을 찾아와 시빌 베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에 대해 묻는다. 도리언은 자신이 그녀의 자살의 이유가 된 것은 말하지 않고 그녀가 자신을 매력적인 왕자로 알고 있다는 말만 한다. 화가는 떠나기 전에 그의 초상화를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도리안은 거절하고 앞으로는 화가마저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가 떠난 후, 도리언은 이층 서재에 초상화를 걸고 문을 잠근다. 그리고 방 열쇄는 자기만 아는 곳에 감춘다.

이제 도리언의 인생은 헨리경이 준 책의 주인공이 되어 가는 중이다. 그는 새로운 경험과 센세이션을 미치도록 탐색한다. 자주 아편 소굴에 들리기도 하고 여자들과 지저분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의 초상화에는 여러 가지 그의 못된 행동이 다 기록되어 간다.

런던에서는 계속 도리안과 헨리경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자자하다. 이제 사람들은 도리언을 초대 하는 일도 없고 친구들도 그를 모른 척한다. 계속해서 그의 범죄와 방탕은 그의 초상화에 그대로 반영되지만 도리언의 모습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젊다.

도리언이 38살이 되는 생일에, 화가가 다시 그를 방문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소원한 사이였지만 화가는 도리언에게 방탕한 생활에서 벗어나도록 충고하기 위해 온 것이다. 화가는 그에 대한 소문을 믿을 수 없다고 하자 도리안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가 얼마나 변했는가를 화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를 데리고 이층 방으로 올라가 초상화를 덮었던 베일을 벗긴다. 초상화는 화가가 알아볼 수 없도록 달라졌다. 그가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인뿐이다.

자신의 변신을 화가에게 보인 도리안은 화가 나서 가까이에 있는 칼을 들어 화가의 목과 등을 찌른다. 그리고 방문을 다시 잠그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날 밤 화가는 파리로 떠날 계획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찾는 사람이 없다. 도리언은 그의 시체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전에 꽤 가깝게 지내던 젊은 화학자 알렌을 협박하여 비밀리에 그 시체를 불과 화약 품으로 완전히 없애도록 강요한다. 그 이후,초상화의 손은 피로 범벅이 된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도리언은 밤늦게 허술한 옷을 입고 아편소굴에 들렸다가 그를매력적인 왕자라 부르는 여인을 찾아가는 길이다. 선원 한사람이 그의 뒤를 따른다. 그 선원은 여배우 시빌 베인의 오빠로 그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도리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누이가 죽은 지 이미 18년이 지났는데. 선원이 본 도리언은 아주 어려 보인다. 그는 잘못 본 것으로 생각하고 도리언을 지나친다.

집에 돌아 온 도리안은 그의 엄청난 죄목이 기록된 초상화를 없애기 위해 위층 서재로 올라간다. 그가 본 초상화는 묘한 승리감을 보이는 모습이다. 도리안은 화가를 죽였던 칼을 집어 초상화를 무섭게 찌른다. 하인이 고통스런 신음 소리를 듣고 이층으로 올라와 잠긴 문을 열고 보니 벽에 걸린 초상화는 그대로였지만 바닥에는 칼로 가슴을 찔린 주름투성이의 시체가 누어있다. 하인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 볼 수 없었지만 파티 옷과 눈에 익은 장식품으로 주인의 시체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의 의식을 죽이려는 도리언이 자신의 육체를 죽게 한 것이다.

*김 작가는 연세대학교와 일리노이 주립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 피츠버그대학, 3M에서 연구원으로 재직, 인디아나 퍼듀대학의 강사를 역임했습니다. 현재 캘리포니아주의 실비치에 거주하면서 YTN 방송과 신문 등에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달의 시>

공포의 아침

박 윤 수

신종코로나
오늘도 아나운서들
보도에 여념이 없다

안개가 가득한 이 아침
무서운 병마를
가로막을 것인가?

병마는 조물주의 가혹한
형벌인가 시련인가?
그의 자비를 원망하지 말라

그를 비난하지 말라
반드시 이 환난속에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항상 그의 자비하심을
감사하고
찬양하라

*캘리포니아 주 실비치에 거주하며 해외문인협회」(미국)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 윤수시인은 『해외문학』 신인상과 『창조문학』 신인상을 수상했고, 그의 대표작 ‘보슬비'‘맨해튼의 별들''소나기’등 3편이 제21회 해외문학상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물리학 박사요 교회의 장로인 박윤수님은 본지(늘푸른나무 .webegt.com)에 <어느 과학도의 신앙고백>을 연재하고 있다.

<이야기 미국사 34>

시카고 이야기

미시간 호수를 끼고 아름답게 뻣어있는 시카고의 Skiline

온 세계를 위한 돼지 백정
기구들을 만들고, 밀을 챙겨주는 곳.
열차를 운행하면서 이 나라의 화물들을 취급하는 곳.
폭풍우가 몰아치고, 떠들석한 이곳.
커다란 어깨들의 도시

-칼 샌드버그의 “Chicago”에서

지금은 뉴욕, LA에 이어 미국에서 제3의 도시가 되었지만 20세기 하반기까지만 해도 미국 제2의 도시였던 시카고를 시카고가 낳은 작가 칼 샌드버그는 위와 같이 묘사하였다.

17세기 초 프랑스의 탐험가들은 지금의 시카고를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운하로서 최적지라는 것을 그때 이미 알았다. 시카고가 제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기 이전에 이미 시카고는 미국의 이미지 가운데 뚜렸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곳은 황량한 들판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근대적인 도시로의 시카고는 1833년에야 200여명을 주민을 가진조그만 도시로 시작되었다.

1848년은 도시역사상 전기를 이루는해였다. 철도가 들어서고 오대호와 미시시피강을 연결하는 운하가 완성된 이 해는 시카고를 미국의 교통중심지로 만들었다. 철로들이 사방에서 시카고를 중심으로 몰려들어 서부에서는 축산물들을, 동부에서는 강철들을 그리고 전 세계로부터는 이민자들을 실어 날랐다. 남북전쟁(1861-1865) 당시 상선들의 미시시피 강 사용을 금지하자 화물운송을 철도운송으로 바꾸면서 시카고는 갑자기 발전하였다.

시카소 시인 칼 샌드버그(1878-1967)가 1916년에 별명을 붙인대로 “커다란 어깨들의 도시”는 19세기 미국의 성장을 견인한 기관차와도 같았다. 특히 미국의 중심부인 중서부에 위치한 시카고의 입지는 곡물과 축산물의 집합지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하였다.예를 들면 1900년 미국에서 소비되는 소고기의 대부분이 시카고에서 가공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시카고는 도시로 성장하는 초기단계에서 상당한 어려움들을 감내해야 했는데 그 가운데 산재한 도살장으로 인한 더러운 거리와 하수구들은 시카고의 전설이 되었고, 1854년 시민의 6%의 생명을 앗아간 코레라 전염병, 그리고 1871년에 있었던 시카고 대화재 등을 들 수 있다.

188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그해 필라델피아를 누르고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발돋음 하였으며 그 후 거의 한 세기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다.

1864년 시카고 가축시장(Chicago’s Union Stock Yards)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그 넓이가 320에이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카고의 엔지니어들은 도살장의 하수물들이 미시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시카고 강의 방향을 바꾸어서 하수들이 미시시피강으로 빠지게 하는 대 역사를 이루어냈다.

1950년대의 시카고 번화가. 1871년 대화재로 뒤의 Water Tower만 남고 도시가 다 타 버렸다. Water Tower는 Michigan Avenue의 명물로 남아 있다.

<미국음악의 발자취-록앤 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

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


엘비스 아론 프레슬리(1935-1977)는 1950년대 중반 록앤 롤 분야에서 가장 인기있는 가수였고 “Heartbreak Hotel.” “Don’t be Cruel” “Hound Dog” 등으로 기록적인 챠트 톱을 기록한 가수이다. 1954년 자신만만하고 반항적인 섹스 심볼로 등장한 프레슬리는 미국과 세계 음악계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비틀즈나 밥 딜란, 롤링스톤 등이 한결같이 엘비스로부터 음악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격찬하였다.

그러나 프레슬리는 록 앤 롤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 난타하는 백비트에 기타의 현과 묵직한 타악기들이 같이하는 아메리칸 특유의 스타일은 아프리카 출신 아메리칸 들이 1940년대와 1950년대에 특히 Chuck Berry, Bo Diddley, Fats Doino , B.B.King 등이 발전시킨 것이다.

미시시피에서 태어난 프레슬리는교회에서 노래하는 것을 배웠으며 흑인들이 부르는 노래였던 ‘race music’(흑인들의 음악이 부르스나 리듬으로 분류되기 전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모두 레이스 음악이라고 하였다.)을 들으면서 공감하였다. 1948년 그의 가족들은 테네시주 멤피스로 이사하였으며 그곳에서 프레슬리는 시골의 작은 레코드회사인 Sun Records사의 주인인 Sam Phillips의 눈에 띄어 되었다. 필립은 미남인 백인청년이 부르는 흑인음악스타일은 충분히 흥행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1954년 프레슬리와 레코드 계약을 체결하였다.

프레슬리의 놀라운 성공은 필립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록음악을 개발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에게는 오랫동안 입맛을 쓰게 하였다. Bo Diddley는 2003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분통을 터트렸다. “나를 화나게 만든 것은 백인친구들이 기타를 치면서 우리와 같은 소리로노래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엘비스가 록앤롤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 . .엘비스는 록앤롤을 시작하지 않았어요. 나는 엘비스를 좋아하고 그는 훌륭했으며 나는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만 그는 나보다 3년 후에 나타났어요.” 그런데 프레슬리 자신은 항상 아프리칸 아메리칸 연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하였다.

성공적인 일련의 영화 들(프레슬리는 일생동안 33개의 영화에 출연하였다)이 프레슬리의 인기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가수로서의 삶은 1958년 그가 군에 징집되어 독일에 주둔하면서 일단 정지가 되었다. 그가 1960년 무대로 돌아왔을 때 그의 초기의 인기를 회복하기가 힘들었다.

1977년 마약논란에 휩싸였던 그는 멤피스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저택 Graceland는 후에 미국의 첫 번째 록 스타의 기념관으로 개봉되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끌고 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