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늘푸른나무(www.webegt.com)/ 문화산책/2022년 9월 15일>*<이달의 시-단풍나무 아래서-이해인>*<이야기 미국사 73-9월에 벌어졌던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이달의 교회역사 돌아보기-조선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목사 1866년 9월 >* <이달의 시-가을 하늘>*<이야기 미국사72-미국의 마천루를 바꿔놓은 오티스 엘리베이터>*<역사를 바꿔 놓은 생각들-다신교를 거쳐 유일신교로>

<이달의 시>

단풍나무 아래서 -이 해 인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다
그가 보고 싶을 적엔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마음속에 가득 찬 말들이
잘 표현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도
단풍나무 아래로 오세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세상과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
저절로 기도가 되는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면 행복합니다.
별을 닮은 단풍잎들의
황홀한 웃음에 취해
나의 남은 세월 모두가
사랑으로 물드는 기쁨이여

 (필자는 수녀 시인)

<이야기 미국사 73>

9월에 벌어졌던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

1862년 9월 17일에 벌어졌던 앤티텀 전투는 미남북전쟁중에 가장 사상자를 많이 낸 전투였으며 미국전쟁사에서 사상자를 가장 많이 낸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와싱톤 D.C.에서 약 50마일 북서쪽에 위치한 매릴랜드 주의 조그마한 계곡에 위치한 앤티텀 전투에서의 남,북 양쪽 군대의 사상자들 합치면 하루 사상자가 2만 3천명을 넘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로 남부 연합군의 매릴랜드 주 점령을 막아낼 수 있었다.

1862년 9월 3일 남부연합군의 로버트 리(1807-1870) 장군은 노예제도를 여전히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경계주인 매릴랜드를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리 장군과 남부연합의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 대통령은 북부지역에서의 남군의 승리가1862년 중간선거를 앞둔 북군의 사기에 결정적인 일격을 가할것을 기대하였다.

그렇지만 리 장군이 기대하였던 매릴랜드 주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이 보이지 않았으며 연합군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1809-1865)이 즉시 남군의 침략을 막기위ㅐ 즈ㅡㄱ각 군대와 함께? 죠오지 맥클레란(1826-1885) 장군을 보내왔다. 유니온 군대는9월 16일 저녁 샤프스버그 인근에게 리 장군의 군대와 조우하게 되었다.

다음 날의 전투는 12시간 동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거의 10만명의 군인들이 전투에 참여하였는데 그 숫자는 70여년 전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모든 독림군들보다 더 많은 숫자였었다.

양쪽 군사들 모두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었지만 전투에서 퇴각을 결정하고 버지니아로 퇴각한 것은 리 장군이었다. 리 장군의 군대를 일거에 박멸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링컨 대통령은 맥크레란 장군에게 버지니아를 침공하라고 명령하였지만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무리라며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 맥크레난 장군의 명령불복으로 연합군은 전쟁을 종식시키는 좋은 기회를 놓쳤지만 더 이상의 인명 피해를 막았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앤티탬 전투는 남부에서는 샤프버그 전투로 부르고 있으며 이 전투에서 남,북 군에서 각각 3명씩, 도합 6명의 장성들이 전사하였다.

<이달의 교회역사 돌아보기>

1866년 9월

조선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목사

토마스 목사의 뇌리에서 조선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토마스는 중국에 파견된 웰스(Welsh)의 선교사였다. 그는 ‘은둔의 나라’라고 알려진 조선사람들이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국가들이 중국을 무례하게 다루는 것을 본 조선은 외국인들을 향해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열정으로 불타고 있던 토마스는 자신이 영생에 관해 무지한 이 백성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1865년? 9월 13일 토마스는 조선 해안에 도착해서 이들 조선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오래된 나라 ‘조선’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가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1700년 후반기에 이미 많은 조선인 개종자들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포교는 무척 성공적이어서 1863년에 8천 여명의 카톨릭 신도들이 외국의 영향을 두려워하는 당국에 의해서 살육을 당하였다.????

토마스 목사는 한국어에 관한 자료들이 부족하여 중국어로 출판된 전도지와 신약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1866년 그는 미국상선 제네랄 셔먼호가 조선과 미국간의 교역을 트려 한다는 계획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그는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얻는 대가로 상선의 통역관으로 동행하기로 제안하였다. 그 해 8월 제네랄 셔만호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항해하였다. 토마스는 배가 진행하는데 따라 강뚝에다가 전도지들을 던졌다.

상선이 강의 상류에 이르자 조선 관리들은 이들을 발견하고 미국인들은 즉시 물러갈것을 명하였다. 미국인들은 이 경고를 무시하며 항해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교만했던 대가로 그들의 목숨을 잃게 되었다. 퇴거하라는 명령을 받은지 얼마 안되어 상선은 죄초되었고 그들은 빠르게 진흙탕에 빠져들어갔다.

이 지방의 지사였던 박규수는 상선을 공격하였고 조선사람들이 창을 휘두르며 배에 올라오려하자 미국사람들은 총을 쏘았다. 그 후 2주 동안에 조선사람들은 미국사람들을 연안에 감금하고 20여명을 살해하였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고문에 신물이 난 조선사람들은 물에 빠져있는 셔만호에 불을 질렀다. 미국사람들은 육지로 도망을 가던지? 배에서 타죽던지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에서 도망친 선원들은 역시 살해당했다. 토마스는 다른 선원들과 함께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기 사명에 투철했던 토마스는 갑판아래로 뛰어내려가 성경꾸러미를 가지고 나오면서 배로 몰려드는 조선병사들을 향하여 “예수, 예수”을 웨치며 성경을 그들에게 주려고 하였다. 이 때 한 조선 병사가 창으로 그의 머리를 짤라버렸다.

토마스의 이런 노력은 헛된 것 같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인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셨다. 토마스의 빛난 얼굴을 보고 그가 착한 사람이란 것을 확신한 조선병사는 성경책 한권을 보관하였다가 자기 집의 벽지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소문이 나면서 벽에 붙여진 성경말씀들을 읽으러 인근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는 것이다. 동네에 교회가 세워졌고 토마스를 죽인 사람의 조카는 후에 목사가 되었다.

지금 남한에는 20%가 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며 북한에도 핍박가운데서도 숫자를 알 수 없는 크리스천들이 있다. 세계 10대 교회가운데 과반수가 한국에 있다는? 것은 우연이 된것이 아니다. 토마스 목사와 같은 순교의 씨가 60배, 80보, 100배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This Day in Christian History 에서

<이달의 시>

가을 하늘

맑고 푸르게
웃기만 하는
하늘은
천국

그 아래서
누구도
죄를 지을수 없다.
하느님도 엄마도
거기 계시다.

모질게
야단치지 않고도
나를 참회하게 만드는
하늘은
나의 사랑

(저자 미상)

<이야기 미국사 72 >

미국의 모습을 바꾼 오티스 엘리베이터

엘리사 오티스(Elisha Otis1811-1861)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믿을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발명하여 보급시킴으로 19세기 미국도시들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는 변화를 가져온 위대한 인물이다. 그리고 그가 세운 오티스 엘리베이트 회사는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엘리베이트 회사로 건재하고 있다.

버몬트 주의 농촌에서 태어나서 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1845년에 무조건 뉴욕으로 이주한 오티스는 산업혁명 시대에 농장에서 번성하던 도시로 옮긴 이민자였다.

뉴욕에서 오티스는 기차에 쓰이는 브레이크를 개발하는 일에 흥미를 갖게되어 열심히 연구한 결과 그 분야에서 가장 유능한 전문가가 되었다.

원시적인 엘리베이터가 사용된지는 이미 수 세기가 지났지만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여 사람들은 사용하지 못하고 화물을 나르는데만 사용되고 있었다. 오티스는 기차 브레이크에 사용되던 기술들을 여기에 적용시켜서 1853년 안전한 에리베이터를 제작하였다. 이 엘리베이터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기본적으로는 톱니바퀴를 사용하여 도르래가 끊어졌을 때 엘리베이터가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게 하였다. 로프가 끊어졌을 때는 오티스가 발명한 브레이크가 엘리베이트가 꺼꾸로 쏟아지기 전에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엘리베이터의 결함들을 다 제거하는데에는 여러해가 걸렸지만 특히 엘리베이터를 디자인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수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마천루를 건축하기까지 장애물이 무척 많았다. 오티스가 첫 엘리베이트를 만든지 20여년이 지나는 동안에 그는 2,000여대의 엘리베이터를 미국의 빌딩들에 설치하면서 미국의 마천루들이그 모습을 바꾸어 나갔다.

오티스는 60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두 아들이 확장, 발전해 온 오티스 엘리베이터 회사는 날로 사세를 확장해 가면서 지금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마천루들을 바꾸어가고 있다.

1930년대만 해도 엘리베이터에는 특수훈련을 받은 조종사가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었으나 기술이 날로 발전하면서 1950년대에 와서는 완전 무인조종으로 바뀐 것이다.

 

<역사를 바꿔놓은 생각들 2>


2. 다신교를 거쳐 유일신교로.

우주의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존재한다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각은 정령숭배로 진화되었고 나아가서 다신교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하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는 지역에 따라서, 생활방식에 따라서, 살아가는 지역의 지리에 따라서 나름대로 특별히 숭배하고 섬겨야 할 정령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3000년 경의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는 강신, 산신, 하늘신, 지방신, 동물 대가리 신 등 수많은 도시국가들과 지방의 신들을 합쳐 2000여개의 신의 이름이 문자판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보다 훨씬 후대인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수많은 신들과 여 신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신화들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많은 신들 가운데는 가장 힘이 쎄서 다른 모든 신들을 제압할 수 있는 신이 하나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전파하고 실천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났습니다. 정령숭배가 다신교를 거쳐 유일신교로 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쉬운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기원전 14세기 에짚트 왕 아멘호테르 4세는 유일신교를 도입하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통치 초기인 기원전 1346년 생명을 주는 태양의 원반인 Aten을 유일신으로 정하고 제국의 이름을 버리고 자신을 ‘아텐의 종’이라 하여 '아케나텐'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그는 옛 사원들을 폐쇄하고 모든 종교재산들은 아텐의 승려들에게 몰아 주며 모든 종교문서에서 ‘신 들’이라는 복수명칭을 삭제하고 다른 신들의 승려들을 해체시킬뿐 아니라 아켈타텐이라는 아켄신에게 봉헌한 도시를 다시 만들고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는 등 유일신교 수립에 전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켄나텐의 새로운 종교는 다신교에 익숙하였던 백성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것이어서 17년 동안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자 함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이 파라호가 되자 아톤신을 버리고 그전에 최고신이었던 아몬을 아톤 대신 에짚트의 최고신으로 인정하고 다시 다신교로 방향을 선회하였던 것입니다.

서양역사에 보면 에짚트에서 실패한 유일신교의 시도가 이스라엘 민족가운데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서도 황금송아지를 섬기고 바알신을 섬기는 등 다신교의 흔적들이 적지 않지만 초기부터 유일신에 대한 의식이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은 우상 만드는 집 ㅊ출신(다신론자)으로 여호와의 명을 따름(유일신론자)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었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세 유일신교의 원조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신론자에서 유일신론자로의 사고의 혁명적인 전환을 이룬 대표적인 인물이며 이러한 전환은 정신사적인 면에서 세계를 크게 변화시켰다고 하겠습니다.

<늘푸른나무-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