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푸른나무/Gallery/기독교 미술 산책(9)/2011년 9월 15일>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9)

로마네스크 이전 시대의 대표적인 교회 건물들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서구 유럽, 특히 북부 이태리와 프랑스에서는 건축붐이 일어나 전 유럽으로 번져 나갔는데 허물어진 도시의 성곽을 다시 쌓고 새로운 성(城)을 만든는 것과 함께 특히 수도원이나 성당 등 종교적인 건물 건축붐이 일어났다. 이때의 건축양식과 건축물들을 로마네스크 건축 또는 예술이라고 부른다.

로마네스크 건축의 붐이 일어나기 전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11세기 까지를 미술사에서는 로마네스크 이전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 서북부 유럽은 불안과 격동의 장이었다. 변방의 야만족들이나 바이킹들의 침략 등으로 국가들은 단명을 면치 못했고 지방의 귀족들은 권력을 장악하고 영토를 확장하는데 혈안들이 되어 있었으며 후반에는 무슬림들이 이태리의 남단과 리베리아 반도를 장악하는 등 안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궁전과 같은 본격적인 건축은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성당과 같은 종교적인 건물의 건축은 계속 시도되었다.

이때 비잔틴 건축과 미술이 서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보아온? 이태리의 시실리나 라비나의 성당들은 서방의 성당들이 외모나 실내장식 등에서 얼마나 비잔틴 건축의 영향을 받았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로마제국 멸망 이후 로마네스크 이전 시대에 서방세계에서 서방기독교의 영향 아래 건축된 성당들은 나름대로 지역적인 특색들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네스크 이전 시대 북부 이태리와 프랑스, 지금의 독일 그리고 스페인 등에 세워진 성당 등을? 보느라면 자연히 비잔틴 건축양식의 성당들과 비교가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칼레마니 황제의 궁전의 일부로 지은 Aachen 성당. 지금은 성당만이 남았다.

The Aachen Cathedral of Palatine

북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AD 800년 처음 건축된 것이다. Frank의 왕으로 북부 유럽일대를 정복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칼레마니의 명에 따라 지은 것이다. 800년에서 900년 사이 100여년 동안을 서양사에서는 중세기의 루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때의 예술 형태를 캐롤링기안(Carolingian) 예술이라고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고전적인 지중해 연안의 로마예술형태를 북부 유럽의 예술에 접목하여서 유럽 일대에 로마네스크 예술과 더불어 고딕 예술이 일어날 바탕을 마련하여 주었다는 의미을 갖고 있으며 그런점에서 로마네스크 이전 예술, 또는 초기 로마네스크 예술이라고도 부른다. 칼레마니 황제는 원래는 궁전을 지었으나 지금은 교회건물만이 남아 있다. 1884년에 74미터의 탑이 올려졌는데 이 성당에는 분명 여러가지 스타일들이 뒤섞여 있다.

스테인 그래스나 둥근 기둥을 중심으로한 장식이 비잔틴 양식과는 완전히 대조를 이룬다.

고전적인 로마나 희랍의 원기둥으로 된 로비의 장식이나 본당 전면의 스테인 그라스는 지금까지 보아온 비잔틴의 모자익 장식들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The Church of St Michael (Michaeliskirche), Hildesheim of Germany

독일 Hildeshem의 수도원 채플로 세워진 성당. 외모가 무척 눈에 익다.

AD 1001년부터 1031년 사이에 독일의 Hildeshem 감독 Bernward에 의해 베네딕트 수도원의 채플로 건축되었다. 천사장 미가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이 성당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이 성당은 수도원의 채플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화려한 비잔틴의 내부장식들과는 달리 게르만 민족의 검소함과 담백함을 느끼게 한다.

수도원 채플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실내 구조나 장식이 민족성의 반영인듯 매우 단순하다.

The Church-Cathedral of Cordoba Spain,

스페인의 콜도바에 있는 대성당. 500여년간 회교사원으로 사용되었으나 부분적인 개축만으로 기독교 성당으로 사용하여 왔다.

'콜도바 회교사원' 또는 'Mezquita'로 알려진 이 성당은 5세기 경 St. Vincent 성당으로 건립되었으나
711년 무슬림인 무어족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후 786년, 그곳에 있던 St. Vincent 성당을 허물고 The Great Mosque를 건축하였다. 그리고 988년에는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하였다.

회교 사원으로서의 실내 장식들을 그대로 살린채 기독교와 회교의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1236년 무슬림 정권이 붕괴된 후 500여년을 회교사원으로 사용되어 오던 이 건물을 다시 기독교 성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523년에 사원의 일부를 허물고 성전을 지었으나 회교사원의 중요한 장식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스페인에서 기독교와 회교의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김상신 님은 은퇴후 본 <늘푸른나무>를 제작하면서 주로 역사에 관한 글들을 쓰는데 그동안 <역사로 배우는 미국>과 <미켈란젤로 천정벽화의 비밀>을 연재하였으며 현재는 <지리로 배우는 미국>을 연재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역사와 희망>, <크리스천의 역사이해> 등이 있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8)

비잔틴 건축과 모자익 기독교 미술의 특징

로마의 지하 카타콤에 그려져 있는 기독교 성화들과 남부 이태리성당에 보존되어 있는 모자익으로 된 성화들을 감상하였다. 어떻게 보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때와 가장 풍요로웠을 때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기독교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것 같다.

카타콤에 그려져 있는 예수상과 비잔틴 양식의 성당 천정 벽에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는 예수상

로마제국의 핍박 가운데서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리에 지하 공동묘지에 모여 예배드리면서 그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하고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로마의 카타콤 벽에다 그림을 그렸던 무명의 화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카타콤의 성화에 비하면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고 신앙심 깊은 황제들에 의해 종교적인 열정과 국가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하여 국고를 투입하여 성당들을 짓던 때에 특히 야만족들의 침입을 당하여 존망이 위태롭던 서로마 제국과 달리 새로운 도성 콘스타틴노플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던 비잔틴 제국에서 최고의 재료들과 당시 희랍과 터키 그리고 소 아시아 일대에 유행하던 최신의 미술양식을 동원하고 사방의 일류 장인들을 모아서 만들어 낸 호화롭고 값비싼 실내장식인 비잔틴 건축과 모자익 성화들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라비나에 있는 비잔틴 건축양식의 성당(왼쪽)과 와싱톤 DC에 있는 Cathedral 의 외부 모습

비잔틴 건축양식의 성당들의 첫 인상은 수수한 외모와 화려한 실내 장식이라고 하겠다. 외모에 압도되는 서구 Bascillica양식의 성당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첩탑도 없고 납작한 십자가 형의 네모진 모습의 외모가 초라해 보이지만 일단 안에 들어가면 호화롭다고 할 정도의 화려한 모자익 벽화들이 사방을 덮고 더욱 인상적인 것은 지금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서방의 대 성당들이 가운데 복도를 중심으로 앞의 제단으로 향하게 하여 양쪽의 관중들이 주의를 앞으로 돌리게 한데 비하여, 가운데 위로 향한 돔을 높게 만들어 그곳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게 하여 관중들의 주의를 위로 돌리도록 한 것이라 하겠다

전면 강단을 중심으로한 현대식 교회내부와 비잔틴 성당의 위로 향한 돔 형식의 천정장식 구조

또 다른 특징으로는 조각품과 같은 장식물들이 비잔틴 식 성당에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우상숭배라고 하여 금지되었다. 그대신 내부의 모든 벽에는 화려한 색갈의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랫부분을 제외한 모든 벽과 천정과 기둥들과 지붕의 돌출부 등이 거의 모두 유리로 된 모자익으로 덮여 있는데 베니스에 있는 성 마가 성당의 경우 8000 스퀘어 미터 이상이 모자익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비잔틴 모자익 성화들의 또 다른 특징을 들자면 작품들의 인상이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AD 500년대에 만든 모자익이나 AD 1000년 대에 만든 모자익이 시대를 막론하고 유사하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다. 더구기 중앙의 대형 예수의 모습은 얼굴의 윤곽이나 구레나루, 의상 등이 카피한 듯 거의 일치하는데 알고 보니 비잔틴 예술은 교회와 궁전의 철저한 관리가운데서 무척 표현이 제한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교리논쟁이 심하던 때라 궁전과 교회의 심사가 까다로와 작가들이 마음대로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통과된 초기 예술가들의 작품을 베끼다 보니 시대와 장소를 막라하고 성당의 모자익들이 비슷비슷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팔라틴 성당(첫번째)과 몬리얼 성당(가운데) 그리고 카파루 성당(왼쪽)의 예수상들이 비슷비슷하다

여기에서 떠오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비잔틴 모자익 작품에는 그 훌륭한 작품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작품은 남겨져 있는데 ‘바티칸 시스틴 채플의 천정벽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물론 까다로운 심사에 무난히 합격한 작품들을 베껴 만들다 보니 창의력을 가진 화가가 필요 없고 유리를 채색하고 바르는데 익숙한 장인들만이 일하다보니 물론 전해질 이름이 없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런지 모른다. 미켈란젤로도 ‘시스틴 천정벽화’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암호를 사용하였는데 그보다 수 백년이 앞선 시대에 그러한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런지도 모른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시작된 기독교 건축과 미술이 제일 먼저 꽃핀 것이 비잔틴 건축과 모자익 장식형태였으며 그 후 1000여 년을 비잔틴 제국과 함께 비잔틴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그동안 수많은 성당들의 건축과 함께 기독교 미술이 만들어졌겠지만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 화산 폭발과 지진과 같은 천재와 전쟁과 같은 인재를 겪는 가운데 대부분이 유실된 가운데 이태리에 있으면서도 비잔틴 지역에 속하였던 라비나와 크라세 그리고 시실리에 있던 비잔틴 형식의 성당들이 보존되어서 비잔틴 모자익 미술을 오늘날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잔틴 기독교 미술산책을 마치면서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비잔틴 제2기라고 할 수 있는 유스티니안 황제(527-565) 1세 때에 콘스탄틴노플에서 대대적인 건축공사들을 하면서 그곳에 Hagia Sophia 성당을 건축하였다. 오늘날 동서양의 관문이라고 하는 터어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하기아 소피아가 바로 그곳이다. 50미터 높이의 돔과 어마어마한 내부의 Hagia Sophia는 지난 500여년 동안 기독교 장식들을 훼손하고 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흔히들 회교 건축물로 생각 하지만 원래는 비잔틴 기독교 건축의 최고 걸작품이었다. 그곳에도 모자익으로 된 기독교 성화들로 내부가 장식되었지만 회교도들에 의하여 모자익들이 철거되거나 회로 덧칠하여 훼손하였는데 밑의 예수성상이 바로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현 터어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Hagia Sophia 성당, 훼손된 예수 모자익상과 아랍어로 된 장식들

비잔틴 건축과 미술은 프랑스와 이태리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정교회(Orthodox Church)가 지배적인 발칸 반도나 코카시언 그리고 러시아 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20세기 상반기 이 지역이 무신론을 주장하는 공산정권하에 있으면서 보존 관리는 커녕 많이 파손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7)

시실리(Sicily)의 모자익 성화들

이태리 동북쪽에 자리한 라비나와 크라세에 초기의 기독교 모자익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6세기의 모자익으로된 작품들이 보존되어 있는가 하면 이태리의 남서쪽에 자리한 시실리 (Sicily) 섬에는 12세기에 제작된 귀중한 기독교 모자익 미술품들이 보존되어 있어 발길을 끈다.

장화처럼 생긴 이태리의 발끝이라 할 수 있는 남서쪽 끝과 거의 맞닿은 곳에 시씰리라는 섬이 있다. 비록 조그마한 섬이지만 옛날부터 지중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어 동서남북으로 해상교통과 무역의 요지였으며 그러한 지형때문에 사방에 있는 문명들의 영향을 계속 받아왔는데 그점은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이미 희랍의 문명과 종교가 이곳에 전해져 희랍신화에 근거한 신앙의식이 소개되었고 희랍식 신전들이 세워졌으며 로마가 세계를 점령한 후로는 로마식 신전들도 세워졌는데 1세기 경에는 로마군에 잡혀온 유대계 노예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구성된 유대인들의 회당까지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가는 길에 이 섬의 남단에 있는 시라큐사에 들렸을 때(사도행전 28장 12절)는 이미 소수의 유대계 크리스천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로마의 카타콤 시대와 같이 그것은 숨어서 믿는 그러한 형태에 불과하였고 기독교가 공인되고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5, 6 세기에 이르러서는 시실리의 중심종교로 부상하였다.

8,9세기 이슬람이 지중해 연안을 정복할 때에도 시실리는 침입을 모면하다가 결국 9세기 말에 가서야 함락이 되었는데 아랍이 지배하는 동안 시실리의 북단에 있는 파라모(Palermo) 도시는 1050년 당시 35만명의 주민을 가진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때 기독교로 전향한 바이킹 후손들이 시실리에서 해양관계 일자리들을 얻어 자리를 잡아갔는데 결국은 이들이 아랍계를 내쫓고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 후 150년 내지 200여년 간을 Norman Christian Era라 하여 시실리의 ‘황금시대’로 부르고 있다. 이때에 시실리 제국의 부와 힘을 바탕으로 기독교 성당들을 위시한 건물들의 보수와 신축붐이 일었으며 이 성당들의 내부장식으로 만들어 놓은 모자익들이 다행히 지진과 천재지변들을 견디고 남아 있어 기독교미술에서는 빼놓을수 없은 값진 걸작들로 꼽히고 있다.

파라티나 채플(Palatine Chapel, 1132-40)

강단을 중심으로 금과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익

12세기 놀만 기독교시대에 파러모 궁전에 세워진 이 성당의 내부장식에서 지금은 사라진 모자익 문화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제한된 공간 안에 희랍, 라틴, 아랍의 예술들이 집중적으로 융합되어 특이하면서도 풍부한 데코레이션을 만들어 놓았다. 대리석 바닥과 벽의 아랫부분에는 아랍의 기하학적 패턴을 삽입하였고 천정과 강단을 가르는 곳에는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사용 회교교당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복도와 천장을 가르는 곳은 라틴식으로 만들었고 중앙 돔은 희랍식을 따랐다.

벽면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천정의 돔에는 그리스도의 초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실내 장식은 대부분이 모자익으로 되어 있으며 금과 은을 재료로 사용하여 그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또한 색갈이 양하고 풍부하여 마치 밖의 자연세계에서 보는것 같이 생생하다.

아랍의 기하학적 무늬를 사용한 벽의 일부(좌)와 바닥(우), 그리고 금 빛 배경에 푸른 외투의 비잔틴 풍의 창조주 하나님 또는 심판주 그리스도(가운데)가 모자익으로 장식되어 있다.

Cefalu Cathedral(1131-66)

이 성당 내부를 모두 모자익으로 장식한듯 한데 본당 중앙에 있는 강단 뒷쪽에 있는 ‘심판주 예수상’ 과 그 아래 '마리아와 천사들'의 모자익만이 남아 있다. 콘스탄틴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만든 것으로 비잔틴 영향을 받았고 비잔틴 계통의 모자익으로서는 이태리에서 제일 훌륭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단 뒤쪽 돌출부의 커다란 예수상은 비잔틴식의 창조자의 모습으로 육신을 입은 어린 목자에서 온 세계의 통치자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8세기 우상숭배논쟁과 동방교회의 미술품 사용금지 조치 이후 12세기에 만들어진 이 모자익에는 수염이 난 예수가 한 손에는 요한복음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처하지 않을 것이요’라고 적혀 있는 성경을 펴들고 다른 한 손은 들어 축복하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비잔틴계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Pantocrator>의 모습이다.

성당의 외부와 강단 꼭대기에 새겨진 Pantacrator. 아래에는 천사들에게 에워싸인 마리아가 손을 들고 서있다.

Monreale Cathedral(1174-85)

노마드 기독교시대에 시실리 왕 윌리암 2세에 의해 건축된 이 성당은 Palatine 채플과 Cefalu 캐더드랄의 위용들을 잘 결합하여 만든 후기 중세기 건축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성당의 웅장한 외부와 피사에서 만들어 가지고 왔다는 성서의 장면들이 새겨진 정문

로마네스크 형태의 건물 외부를 지나 1186년에 피사에서 만들었다는 구리로 만든 정문에 서면 성서의 장면들이 문에 새겨져 있어 그 안에 무엇이 있을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육중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금빛 찬란한 모자익 장식으로 성당 안은 생동한다.

금빛 찬란한 장식의 강단 뒷벽의 모자익 장식들

창조에서부터 베드로와 바울 사도의 죽음으로 끝나는 모자익이 윗벽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고 생생하게 붙여져 있다.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금색 가운에 푸른색 외투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 광휘가 빛나는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모자익에서 모자익으로 움직이며 창조의 작업을 하신다.

복도의 벽들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모자익 되어 있다. 예수의 고쳐주심을 바라는 문둥병자의 그림이 있으며 그 위의 하늘에는 검은 글씨로 “주께서 원하신면 저를 고쳐주실수 있읍니다”고 적혀 있다. 또 다른 그림에는 야이로의 가족들이 그의 딸을 고쳐주자 기뻐 눈물 흘리는 장면도 있다. 예수의 열 한 제자들이 사도 베드로가 물위를 걷다가 물로 빠져들어가자 뱃가에 모여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그를 쳐다보는 그림도 있다. 모든 사람들을 사랑과 지혜와 자비로 빛추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문둥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와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끄시는 예수의 모습이 모자익으로 되어 있다.

교회당의 양 벽에는 그리스도와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 그려져 있고 그 반대편에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다 순교한 베드로와 바울의 삶이 그려져 있다.

Pantocrator(모든 것의 통치자, 희랍어에서 왔음)는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미했지만 3위 1체의 신앙을 거치면서 후에는 '심판주 예수'를 의미하게 되었다. 6세기 져스틴 2세 황제때 만든 주화에 처음 구레나루에 긴 머리가락을 가진 모습으로 선보였지만 그 후 우상논쟁으로 Hagia-Sophia에 있는 것을 위시해서 많이 파손되었으나 시실리에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공통점은 상반신에 십자가형 광휘(光輝)를 둘렀고 IC, XC나 알파와 오메가 가 쓰여져 있으며 금빛 배경에 하늘색 외투를 입고 있다.

기독교의 시대였던 중세기 기독교 미술을 대표하는 것은 모자익 작품들이었지만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아 더욱 귀중하며 시대적으로, 공간적으로 주변의 다른 문화와 종교의 영향을 수용하면서 만들어진 기독교 미술이란 점에서 또한 귀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시라큐스 대성당(Temple of Athena)

모자익 성화와는 직접 연관이 없지만 2005년 유네스코에 의하여 여러 문화유산들이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라하여 세계 문화 자연 유산으로 지정된 시실리 남동쪽의 시라큐스에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대성당 건물이 있다.

2500년 전의 아데나 신전의 외형과 돌기둥들을 그대로 살리면서 카톨릭 성당으로 개축하였다.

일명 아데네 신전(Temple of Athena)라고도 불리는 시라큐스 대성당(Syracuse Cathedral)은 기원전 480년경 희랍의 지중해연안 도시였던 시라큐스가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에 위치한 Carthage에 승전한 기념으로 이곳에 세운 희랍신전이었다. 사도행전 28장 12절에 나오는 '시라구사'가 이곳으로 기록에 의하면 로마로 호송되던 바울이 3일을 체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그는 아데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 우뚝 서 있던 이 신전을 둘러보았을 듯 하다. 비록 이 신전이 기독교 성당이 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겠지만. . .

그로부터 500여년이 지난 7세기 초에 이 지역의 조시모 감독은 이 신전을 기독교의 성당으로 개축한다. 신전의 대리석 기둥들이 그대로 나오도록 하여 외양(外樣)을 그대로 살려 지은 이 성당은 한 때는 회교도들의 회당(mosque)으로도 사용되었으나 계속 기독교의 교회당으로 사용되었고 비록 개축의 과정을 거쳤지만 오늘까지도 시라큐스의 성당으로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이교도들의 신전으로 시작되어 2500여년 동안을 예배하는 곳으로만 계속되어 온 곳이다.

신전의 돌기둥 사이에 성모상을 세웠으며 세례시 사용하는 성수대도 희랍식으로 만들었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6)

라비나의 기독교 미술 돌아보기 2

라비나에 있는 The Basilica di San Vitale 는 기원 6세기 중엽(526년 착공되어 548년에 헌당) 당시 라비나의 감독과 교황에 의해 건축된 곳으로 성 비타레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대부분의 모자익들이 이 건축기간중에 같이 만들어진 것들이다. 웅장한 로마식이 아니라 비잔틴 양식의 조그마하고 허름한 외양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가면 8각형의 벽과 천정에 고풍의 비잔틴 식의 모자익이 그려져 있는데 황금색과 진푸른 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12제자와 구약의 선지자들 그리고 당시의 져스틴 황제와 데오도라 여제 등의 그림이 있고 하나님의 어린양, 유대인의 교회를 대표하는 예루살렘 도성과 이방인들의 교회를 상징하는 베들레헴 도시의 모자이크되어 있다.

Archiepiscopal Chapel(c. 480-500)-오스타로고드의 왕 데오도릭(Theodoric)왕 때에 433년부터 450년까지 라비니의 대주교였던 St.. Peter Chrisologue의 기념채플로 그의 아들 Peter 2세가(495년 이곳의 대주교가 되었다) 후에 건축한 것으로 이곳에 있는 모자이크들도 그 때 같이 만들어졌거나 직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아래 부분들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윗 부분들은 모자이크로 되어 있는데 정면에 제왕이나 장군의 복장을 한 예수가 사자와 뱀을 밟고 서 있다. 왼손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장 6절)라고 라틴어로 적혀 있는 책을 들었고 오른 손으로는 붉은 순교의 십자가를 어깨에 메고 있는데 그 위로 금빛 광채가 얼굴을 둘러싸고 있다. 광야의 시험과 사자와 뱀(좌와 악을 상징)을 정복하신 예수는 세상의 구세주라는 정통신앙을 분명히 하며 예수께 대한 최고의 영광을 보냈다는 점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피조된 자이므로 하나님 다음의 지위에 서게 된다’는 당시 유행하던 아리안 주장과는 의견을 달리하는 것임에도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The Basilica of Sant' Apollinare Nuovo (c 480-500)오스트로고드 왕 데오도릭(Theodoric)이 라비니에 자신의 채플로 지은 것으로 바실리카 양식이다. 504년경에 아리안 파 교회로 헌당하였다가 856년 Classe에 있는 Basilica of Saint Apollinare에서 그의 시신을 라비나의 Basilica로 옮기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의 모자이크들 가운데는 비잔틴 시대에 예배분위기를 해친다하여 훼손된 것들도 있고 후에 복구된 것들도 있는데 여기에서는 성당에 들어서면 앞의 제단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서 있는 24개의 희랍식 대리석 기둥과 양쪽 벽에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훌륭하다. 한 쪽에는 아기예수를 무릎에 앉힌 마리아를 중심으로 값비싼 아주 좋은 옷들과 장신구들로 호화롭게 꾸민 22명의 비잔틴 성녀들이 늘어선 그림이, 반대편에는 4명의 천사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보좌에 앉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26명의 흰옷 입은 순교자들이 행진해 오는 모습의 벽화가 모자이크 되어 있다.

이들 벽화 위에는 5세기 말에 이미 알려져 있던 예수의 생애 가운데의 여러 장면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한쪽에는 13개의 기적과 비유들이, 다른 한쪽에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면 13이 그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는 그물을 고치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는 장면, 마귀에 잡힌 남자를 구해주는 장면, 소경과 중풍병 걸린 사람을 고쳐주시는 모습,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는 모습 그리고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모습 등이 있다.

여기에서의 모자이크들은 라비나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예술적인 솜씨들을 과시하고 있다.

The Basilica of Sant' Apollinare in Classe 는 라비니 근처에 있는 중요한 비잔틴 예술의 기념비의 하나로 디자인과 공간 활용에 있어서 초기 기독교 성당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UNESCO는 평가하고 있다. 서방 제국이 붕괴되기전 동방제국과 서방제국을 통일한 유스티니안(Justinian) 황제 때 건축된 이 성당은 6세기 초에 시작, 549년 완공되어 라비나와 크라세의 첫 감독이었던 성 아포리나레에게 헌정되었다.

문을 열고 성당에 들어서면 24의 희랍양식의 대리석 기둥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고 이 성당의 반원형 천정은 윗부분과 아랫부분 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위로는 보석과 예수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십자가가 별들에 휩싸여 있으며 위쪽 꼭대기에는 구름사이로 손이 하나 나와 있는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을 상징하며 양쪽으로 흰옷 입은 엘리아와 모세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밑으로 세 마리의 양은 변화산상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상징한다.

그 아래로 바위와 나무와 풀들과 새들이 있는 푸른 초장이 있고 한 가운데에 성 아포리나리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12마리의 흰 양들로 상징되는 자신의 신실한 양떼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십사 기도하는 모습이다. 첫 눈에 시편23편의 첫 구절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5)

라비나의 기독교 미술 돌아보기

모자이크(mosaic) 도시로 알려진 라비나는 도시가 보존하고 있는 모자익 장식들로 인해 유네스코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지만 초기 기독교 모자익 미술의 보존지역으로서의 가치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동안 이곳 교회당과 세례실과 묘지등에는 왕실의 것으로 손색이 없게 각종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신.구약을 관통하는 복음의 멧세지와 삼위일체께 영광돌리는 그림,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 천사 그리고 짐승들과 자연까지 어울려 완전한 평화를 이루며 아름다움과 기쁨을 노래하는 모자이크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틴채플의 천정벽화나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 1,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그 규모와 정묘함은 놀랄만하다.

이제 라비나의 기독교 모자이크 예술품들을 찾아 산책길에 나서 보려고 한다.

Galla Placidia의 묘역의 외부는 십자형의 수수한 건물이다.

그러나 입구에 들어서면 양쪽의 석관들과 함께 벽면과 천정이 온통 모자익 벽화로 되어 있다.

라비나에 있는 Galla Placidia 의 묘역. Honorius황제의 이복동생으로 라비나의 여러 건물들을 건축한 Galla Placidia를 위해 만든 이 조그마한 십자가 모양의 묘지는 5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한 세기 후에 세워진 The Basilica San Vitaler 성당 뒤에 자리하고 있다. 지하에는 무덤이 있는 수수한 외모의 건물이지만 유럽에서는 가장 오래된 모자이크 장식들이 가장 잘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라틴 십자가 형의 어둑한 내부에 주춤하게 되지만 눈이 점점 어둠에 적응하면서 회를 바른 조그마한 창문들을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빛으로 벽과 천정의 모자이크들을 볼수 있다. 눈높이 이상의 모든 벽에는 깊고 은은한 하늘색을 칠하였으며 눈이 익숙해 지면서 밤하늘의 별들과 같이 금빛 별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천정 꼭대기의 금 십자가 까지 이어진 것을 보게된다.

이 묘소는 기원 425-50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그 안에 있는 모자이크 장식들도 그 때에 같이 만든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라비나에서도 가장 오래된 이곳의 모자이크는 현재까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의 모자이크 성화로 추정되고 있다.

황금빛 별들이 천정 한 복판의 십자가까지 이어져 있다.

물을 마시는 비들기들은 성령을 상징한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한조각, 한조각 모자익으로 되었다.

입구의 바로 위에 있는 ‘선한목자’라는 이름의 이 모자이크는 여섯 마리의 순결한 흰색 양들과 함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선한 목자 예수를 그린 것이다. 선한 목자 예수는 카타콤의 조각들과 같이 침착하면서도 우아한 듯한 면도를 잘한 곱슬머리의 젊은이로 금빛 의상에 금색 지팡이를 들고 있다. 넔을 잃고 먼곳을 바라보는듯 하지만 한 손으로는 양을 쓰다듬고 있는 예수는 출입구 위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를 통해서만 뭇 영혼들이 영원으로 인도될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라비니에 있는 Battistero Neoniano(세례 받는곳).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세례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고 교회건물에는 침례를 받을 수 있는 방을 따로 마련하든가 다른 건물을 지어 세례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아래의 사진들은 기원 440년에서 50년 사이에 라비나에 세워진 세례소로서 8각형의 건물로 지어졌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7일과 예수님이 부활하신 새 생명의 날을 상징한다고 한다. 건물 안에 들어서면 한가운데 둥근 돔을 중심으로 열두 제자들에 둘러쌓여 요한에게 세례받으시는 그림이 금빛 배경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다.

예수는 허리까지 차는 요단강 안에 서 있고 그의 오른쪽에는 수염을 단 사람이 있는데 요단강을 의인화 한것이라고 하며 왼쪽으로 사도요한이 예수의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세례를 베풀며 그 위로 성령을 상징하는 비들기가 있다. 이 모자이크는 그후 희랍이나 러시아 정교회가 공인하는 공식 '예수의 세례장면'으로 1천여년 이상을 내려왔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4)

기독교 미술과 비잔틴 예술

어려운 환경가운데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복음을 상기시켜주고 신앙을 격려하며 믿음의 진수를 가르쳐 주려는 의도에서 서투르게나마 시도되었던 기독교 미술은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기독교의 위용을 자랑하고 들어내는 도구로 변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마츄어가 아닌 프로들에 의한 작업이 되어버렸다. 특히 웅장한 성당들을 새로 짓는 건축분야에서는 오랜 세월을 거쳐 축적된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였고 자연히 그리스로부터 고대 로마를 거쳐 전수된 웅장한 건축양식들과 기술들이 카톨릭 교회당 건축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하나의 도시국가였던 비잔틴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는 북방 야만족들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콘스탄틴노블로 이름을 바꾼 비잔틴은 동 로마의 수도로 1,000여년을 지속하였다. 동 유럽과 소 아시아의 경계에 자리한 비잔틴은 오래전부터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왔고 로마의 통치아래서 로마의 영향을 받아 왔지만 인근의 고대 에짚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그리고 소 아시아 문화의 영향 또한 받아왔기 때문에 동방과 그레코-로만이 혼합된 토양에서 새로운 기독교 예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비잔틴 예술이라고 부른다.

비잔틴 미술하면 떠오르는 것이 모자익(mosaic) 예수상이다. 사실 모자익은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 장식을 위한 도구로 인기가 높았으며 로마제국을 통하여 북 아프리카에서 흑해까지, 아시아에서 스페인까지 귀족들의 고급저택에 벽이나 바닥의 장식용으로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위의 왼쪽에 있는 모자익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것으로 색갈이 호화로우며 현대의 추상화와 같은 인상을 준다. 오른쪽에 있는 그림은 화산폭발로 묻혀있던 폼페이가 발굴되면서 드러난 저택의 바닥에 만들어져 있던 개의 모자익으로 당시 로마제국의 전역에서 특히 개의 모자익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모자익이 대형 교회건축 붐이 온 로마제국으로 퍼지면서 교회 내부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고 콘스탄티노블, 라비나, 로마, 베니스 그리고 후에는 시시리 등지에서 가장 훌륭하고 효과적인 예술材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변형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리스 예술의 아이디어와 업적을 비잔틴 교회가 보존해 주었다고 말할수도 있겠다.

모자익은 정교한 솜씨가 필요하고 사용하는 자료(금이나 다이아몬드 등)에 따라서는 경비가 많이 들며 한번 붙혀 만들면 떼거나 붙이는 것이 힘들며 일단 파괴되면 재생복원하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7세기에 우상숭배 논쟁이 벌어진다. 성상의 모형이나 그림들이 유행하면서 교회에는 물론 가정집에까지 걸어놓고 경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그것이 과연 우상숭배가 아니냐?하는 것이었다. 한때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하여 가정의 것들은 물론 교회 안에 만들어 놓은 성상들도 떼어버리거나 부셔버리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 때문에 7세기 이전의 훼손되지 않은 모자익 성상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며 또 그 이전에 지은 성당들 역시 개축이나 신축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는 것이 거의 없어 내부장식들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로마의 마지막 황제요 비잔틴의 첫번째 황제였던 Justinus 의 모자익으로 라비나에 남아 있다.

그런점에서 라비나(Ravenna)에 남아 있는 모자익들은 매우 소중한 것들이다. 라비나는 중부 이태리 해변가의 몇몇 섬에 건설된 도시로 인근에 있는 해군기지 Classe와 함께 베니스가 부상할때까지는 서부 지중해의 중요한 항구였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전해졌었는데 AD 402년에 밀란에 있던 황제가 야만족 비시고트의 침입을 피해서 이곳으로 왕실을 옮기고 라비나에tj 300년을 계속 지내왔다.

그동안 이곳 교회당과 세례실과 묘지등에는 왕실의 것으로 손색이 없게 각종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는데 신.구약을 관통하는 복음의 멧세지와 삼위일체께 영광돌리는 그림,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 천사 그리고 짐승들과 자연까지 어울려 완전한 평화를 이루며 아름다움과 기쁨을 노래하는 모자이크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3)

기독교 미술과 Greco-Roman문화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후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Basiilica)를 건축하엿다. 로마제국의 신전이었던 pantheon과 시장이나 법원의 대중집회 장소였던 Basillica 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어 로마문화의 영향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내 앞에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에 따라 그림이나 조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로 금기시하였던 유대교를 배경으로 팔레스틴에서 시작된 기독교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카타콤에 작품들을 남기게 되었을까?

초대 기독교사를 보면 기독교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해 준 두 개의 사건이 있다. 첫번 째는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인의 변방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전파됨으로 당시의 희랍-로마의 문화와 상호영향을 받는 종교로 확장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으로 기독교가 로마제국이 공인하는 종교뿐 아니라 국교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들이 기독교 형성에는 물론이요 기독교 미술의 생성과 발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로마, 에배소, 빌립보, 데살로니가등 지중해 연안의 희랍과 로마의 도시들을 넘나들면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그레코-로만의 종교적, 문화적 경험에 부닥치게 되었으며 이미 기원전 3, 4 세기에 꽃을 피운 희랍의 사상과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아름다움(美)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생동적인 요소라고 생각해온 희랍의 예술과 섬세한 조각과 웅장한 건축에 익숙해 있던 희랍과 로마의 이교도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훌륭한 건물은 찬양을 고취시키며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분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친숙해진 이미지들을 가지고 기독교 복음을 구체화 한다면 신앙에 도움이 된다고 하였을 때 구태여 반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카타콤에 그려져 있는 벽화들로 1) 큰 물고기 앞으로 들어가는 요나, 2) 사자굴 속의 다니엘 3)불구덩이 속에서도 아무일 없는 다니엘의 세 친구,아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의 모습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국가의 종교로 공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나의 밀교(密敎)로 전파되는 동안 예수의 생애에 관한 그림을 직접 그려놓기를 꺼려 하였던 듯 하다. 그래서 3세기 경의 카타콤의 그림들 가운데에는 예수의 탄생이나 십자가 처형 그리고 부활과 같은 그림은 찾아 볼 수가 없고 도리어 잘 알려진 구약의 그림들로 대치한 것을 볼 수 있다.

요나나 다니엘의 그림들은 예수의 생애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요나를 큰 고기의 배속에서 구원해 주시듯, 히브리 백성들을 사막에서 구해 주시듯,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해주시듯 주여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하는 그들의 기원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카타콤에서 발견된 벽화들 가운데는 ‘제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예수’의 그림을 찾아 볼 수 있다. 진정한 큰 스승으로서의 예수의 권위를 보여주려한 이미지로 제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쏘크라테스나 프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할 정도로 희랍적인 인상을 풍기고 있다.

하나의 밀교에 불과하였던 기독교가 이와 같은 그레코-로만 세계와의 폭넓은 상호교류를 통해 4세기 초, 이미 기독교는 신학과 예술에 있어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을 알수 있다.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국교가 되자 로마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안디옥에서 알렉산드리아에 이르도록 전 제국 안에서 대량의 개종자들이 생겨났다. 로마제국은 기독교가 되었고 로마제국의 후광을 업은 교회의 권위는 높아졌으며 특히 로마감독의 우월권이 행사되면서 라틴어가 희랍어를 물리치고 교회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이교도의 상징인 모든 동상이나 신전들을 파괴하여 버려야 한다는 일부 크리스천들의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라틴 문화유산들을 승계한 교회는 파괴보다는 보호에 중점을 두었고 희랍문화의 좋은 것들은 지켜야 한다는 실리적인 로마의 전통은 기독교에도 전승되어 기독교 미술, 기독교 예술로 승계되었다.

기독교 예술에 미친 로마의 영향은 무엇보다도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콘스탄틴 이전의크리스천들의 집회소는 다른 일반주택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다른 것이라면 가장 중요시하는 ‘세례’를 베풀 별실을 마련하였다는 정도이다.

그러나 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틴에게는 그러한 초라한 교회당은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주도하여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를 위시하여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 교회’, ‘예루살렘의 성 분묘교회(holy sepulcher)’ 그리고 새로이 도읍을 옴긴 콘스탄티노플 등에 교회당들을 지었다.

고대로마의 신전 Pantheon의 외모와 실내 돔(가운데), 오른쪽의 것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돔으로 너무나 유사하다.

로마카톨릭의 ‘베드로 대성당(The Roman basilica)’으로 대표되는 교회당은 건축가들이 콘스탄틴 대제의 교시에 따라 많은 개종자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국교로서의 권위를 들어낼 수 있도록 위엄이 있고 교회의 내적 기능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교회 건물을 건축한다고 하였으나 결국은 고대로마의 신전과 로마제국에서 시장이나 재판소의 대중집회장소로 사용하던 Bascillica를 합쳐놓은 건물이 되었고 그것이 전형적인 캐톨릭의 성당건물의 모형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2)

기독교와 미술

고대로부터 종교와 미술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좀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는 신을 형상화 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흔적들은 원시인들이 굴 속에 그린 그림이나 암벽에 그린 그림들에서도 찾아볼 수 가 있다. 그 후 대부분의 종교들이 그림이나 조각들을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즐겨 활용해왔는데 유독 구약의 유대교만은 예외였다. “내 앞에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가르침에 따라 그림이나 조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로 금기시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미술이 자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무엇보다 절대시하며 구약의 가르침까지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 일부 극단적인 개신교에서도 유대교의 전례를 그대로 따랐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구약을 보면 신의 형상을 글로 표현한 것을 많이 볼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문학적인 표현들이 풍부하고 아름다워 성경의 문학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미술적인 표현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시편 23편 같은 것은 문자로 표현된 한 폭의 그림이다. 그러나 후대에 기독교인 화가들에 의하여 그림의 소재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유대교나 유대교인들에 의해 그림으로 그리려는 시도는 전혀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에서도 동방 정교회나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기독교 미술이라 할만한 것이 별로 없는 것도 역시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기독교회에서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았던 듯 하다.

로마 카타콤의 기독교 미술

물론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거나 그림을 그려가며 복음을 전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핍박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 몰래 예배하던 최초의 신도들이 그림을 통해서 자신들의 신앙을 재확인하고 서로 격려하였던 흔적들을 로마의 카타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것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기독교 예술 또는 최초의 기독교 미술의 예라고 말할 수 있다.

St. Priscilla 카타콤의 한 갤러리 묘지, 벽에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밑에는 시체를 놓았던 자리들

팔레스틴에서 시작된 예수와 그의 가르침이 소아시아와 로마로 퍼져나갈 때 비록 세상적인 힘이 없는 평범한 무리들에게였지만 강력한 기세로 번져나갔다. 예수에게서 그들이 받아들인 신앙은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강열 하였으며 장로들과 감독들의 지도 아래 초대교회는 강력한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제국의 안정을 해치는 위험한 집단으로 생각되었다. 기원 64년 로마 성이 불 난 것을 기화로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였다. 베드로 사도가 꺼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것이 이때이다.(반 미치광이인 네로 황제가 시를 읊기 위해 로마 시에 불을 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지만 확인된 것은 아닌 듯 하다)

시체를 다루는 로마의 법은 분명하고 무척 정중하였던 듯 하다. 아무리 죄인의 처형된 시체라도 친척이나 친지들에게 인계하여 장사 지낼 수 있게 허락하였는데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자신의 무덤에 장사 지낸 신약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로마에서 처형된 기독교인들의 시체들 역시 친지들에게 넘겨졌으나 위생상 이유로 로마 성밖에, 지하에 매장하도록 하였는데 Catacombas에 있는 Appian Way 지하였다. 이미 유대민족을 위시하여 매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이 지역 지하는 화산재가 쌓여 이루어진 곳으로 비교적 쉽게 굴을 파서 채플이나 갤러리 스타일의 묘지를 만들수 있었고 서로 연결된 지하도를 만들어 광장을 중심으로 벽 쪽에 가족이나 구역단위 무덤들을 만들었다. 벽 여기저기에는 ‘쉼터(rest)’ 또는 ‘잠자는 곳(sleep)’라는 글들이 쓰여 있어서 “죽음은 단지 부활과 영생을 기다리며 쉬는 곳”이라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다.

카타콤 벽에 그려져 있는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구약의 '아담과 이브' 모습

기독교인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던 4세기 초까지 약 600만구의 기독교인 시체들이 로마의 주위 지하에 있는 50여 개의 카타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깜깜하고 시체들이 즐비한 악몽 같은 카타콤의 통로들이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복음을 듣고 성례 전을 행하며 성찬을 나누는 자리가 되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옥 같은 어둠을 뚫고 카타콤을 방문한 신도들에게 기독교의 기본 신앙을 특히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신앙을 상기시켜주고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사용된 것이 그림이었다. 이미 2세기에 크리스천들은 카타콤의 벽에다가 하나님의 창조솜씨를 찬양하며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들과 성경(구약)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을 그렸다. 성 Priscilla와 성 Domitilla 카타콤에는 아직도 그러한 그림들이 남아 있으며 계속 새로운 그림들도 발견되고 있다..

물론 이 벽화들은 대부분이 표현이나 기법에서 예술작품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유치하고 보잘것없지만 상징적인 수법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쳐주고 영감을 얻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카타콤에는 아담과 이브, 노아, 다니엘, 요나의 이야기 등 구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를 물고기나, 포도나무나 양 등으로 표현한 그림들도 있으며 성만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들도 발견되는데 잔의 밑에 베드로와 바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는 것들도 있고 'Vivas in Deo'나 'In pace Christ' 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들도 있다.

특이한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모습’은 카타콤 벽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제국 치하에서 십자가에 달린다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런 모습을 원치 않았던 듯 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그림이 뻐젓이 내걸리게 된 것은 1,000여 년이 지나 기독교가 강력해진 중세기였다고 한다.

카타콤에서는 조각품들도 나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원 314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이다 제법 세련된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조각품은 꼬불꼬불한 머리에 단정한 희랍식 복장 등으로 미루어 보아 희랍의 신 아포로를 연상시키지만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즐거워 하는 모습이 분명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선한 목자'와 함께 예수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척 세련된 작품으로 조각가가 평소에 자신의 신앙을 이렇게 표현하여 만들었다가 기독교가 공인되고 박해가 끝난 다음에 같다 놓은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로마에 있는 Lateran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카타콤은 4세기 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한동안 묘지로 사용되었으며 그로부터 약 100년 후 야만인들에게 로마가 점령된 후로는 카타콤이 방치되어 잊혀져 버렸다가 1578년 포도원을 가꾸던 한 농부에 의하여 카타콤이 발견됨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김상신의 '기독교 미술' 산책 (1)


기독교가 서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예술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2,000여 년 동안의 서양의 예술 즉 건축, 조각, 회화, 음악, 문학 등에는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들이 많고 그것들은 기독교적인 요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소화하기가 곤란한 것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기독교 예술> 또는 <기독교 미술>이라는 장르가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 길지 않은 한국에서는 <기독교 미술>이라는 용어자체가 생소하여 언뜻 감이 잘 오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서양을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이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이해를 넓혀 가려고 한다.

기독교 미술이란?

영어로 <Christian Art>라고 부르는 것을 <기독교 미술>이라고 번역을 하고 보면 의미가 모호해 진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경과 신앙생활을 통해 깊은 영감을 받은 크리스천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의미의 Christian Art는 한국어로 <기독교인 미술>이라고 번역하면 어감이 이상해 지고 그래서 <기독교 미술>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공식적인 기독교의 렛델을 붙여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한다든가 교회시설에 설치 또는 전시된다든가 교회나 관계인사들의 요청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든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Christian Art의 의미가 희석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기독교 미술>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몇 가지로 정의해 본다면: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인 크리스천 예술가에 의하여 제작된 작품.-물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기독교 미술>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 <기독교 미술>에 속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심경이나 해설이 있다면 기독교 신앙이 작품가운데 어떻게 녹여져 있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말’ 자체를 액면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요즈음 같은 세상에서는 그것도 보장은 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관객에게 기독교적인 영감을 준다면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감상과 이해의 폭이 다양한 추상화의 경우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의 기사들이나 인물들을 소재로 한 작품- 기독교의 전성기인 중세기에 성당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던 가장 무난한 기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평생 구약의 이야기들만 그렸다면 그의 작품을 <기독교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 된다. 물론 신약과의 연속성이라는 각도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구태여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폭넓게 보여준다면 소재야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교회가 형성,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하여 만들어진 예술품들이나 인물화들-교회라는 컴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집회장소나 각종의식 등에서 호소력을 높이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각적 보조 물들을 만들어 사용하게 되었는데 강대상의 장식에서부터 사제들이 두르는 후드의 문양을 거쳐 성당의 벽화나 천정벽화 등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교황을 위시하여 각종 성직자들이나 교계 인물들의 초상화들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런 경우 만든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Arts in Church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런 것들도 한국어로 번역하면 <기독교 미술>로 통칭할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미(美)의 근원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고 '보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재창조하는 작품들을 통틀어 <기독교 미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어떻게 그것이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될 수 있느냐? 는 항의도 있을 수 있어 <기독교인의 미술작품>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겠지만 첫번째 정의와 중복될수도 있으면서 뉴앙스는 좀 다르기 때문에 기독교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면, 관객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다면 더구나 기독교 문화권에서 자란 서구인들이 그렇게 느낀다면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정의 가운데 해당되지 않는다고 구태여 <기독교 미술>에서 제외할 필요가 없지 않을가?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위의 잣대를 가지고 어떤 작품이 <기독교 미술>에 속하고, 않고를 따져보려는 것이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은 대략적인 <기독교 미술>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폭 넓게 <기독교 미술>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야 말로 산책이 될 것이다. 산책을 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기독교 미술>이라는 것이 이런 것 들이구나?하는 감이 잡혀진다면 다행이고 그 다음 감상은 독자들의 몴으로 남겨두려고 한다.

<늘푸른나무(webegt.com)-나이를 잊고 늘 푸르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읽을거리>